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 이 초단편은 201911월 도래(到來) 기념으로  작성된 <블레이드 러너> 프리퀄(팬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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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PD (로스 엔젤리스 시 경찰국) 블레이드 러너 수사반(Blade Runner Unit)의 브라이언트 반장은 지금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인상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족제비 같은 눈매와 살짝 얽은 곰보 같은 뺨과 거무스름한 피부색을 가지고 얍삽해 보이는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그렇소.”

당신이 어제 새로 부임한 감찰관인가요? 라는 질문에 남자는 퉁명스럽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브라이언트는 그래서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정치경찰의 권력이 강하더라도 공식적으로 형사반장과 감찰관은 같은 계급인데 저렇게 나를 안중에도 없는 듯이 대하다니.

당신의 수사반에 레플리컨트(replicant)들에게 동정적인 블레이드 러너가 있기 때문에 조처를 취해야겠소.”

인사 나누는 것 말고 다른 용건이 있냐는 브라이언트의 질문에 남자는 은박지를 한 장 꺼내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브라이언트는 당황스러운 느낌이었다. 우리 반에 배신자(betrayer)가 있다고? 이 감찰관은 바로 어제 발령을 받아왔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저렇게 금방 배신자를 찾아냈다는 거야?

반장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우리란 점은 이해하지만, 어쨌거나 사실이오.”

그것이 감찰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정치경찰들의 본래 임무이기는 하다. 정부 조직 내에서 러시아와 공산주의에 호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숨은 빨갱이들을 색출해 내는 것. 그렇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정치경찰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국방성과 CIA가 가장 혐오하는 대상이 (러시아 공산당과 KGB가 아니라) FBI의 감찰부서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정치경찰이 배신자로 지목하면 제아무리 직급이 높고 조직에 기여가 많은 사람이라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강제로 은퇴(retire)당하는 정도는 약과였고 더 험한 꼴을 당하는 경우도 꽤 있다고 들었다. 많은 공무원들이 뒤에서 그들을 게슈타포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세간에서 FBI 정치경찰의 이미지는 피도 눈물도 없고 잔혹한 냉혈한 바로 그것이었다.

핵전쟁이 끝난 이후로 레플리컨트가 러시아 스파이 못지않은 위험요소로 간주되다 보니 급기야 이제는 LAPD의 블레이드 러너 수사반 같은 지방경찰 말단부서에까지 정치경찰들이 배치되기에 이르렀고 지금 브라이언트의 눈앞에서 은박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녀석이 첫 번째 감찰관으로 어제 부임한 것이다.

배신자에게 적절한 조처를 취하고자 하니 동의해주시오, 해리(Harry).”

브라이언트 반장은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이 자식이 내 애칭을 막 부르네? LAPD에서 그를 해리라고 부르는 사람은 순경 시절부터 모셔왔던 막역한 상관 두 명 뿐이었다. 그런데 불과 어제 새로 부임한 녀석이 부하에게 대하듯이 그를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하겠소. 당신은 동의만 하면 되오.”

감찰관이 지목한 잠재적인 배신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지 물었을 때, 정치경찰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로 불친절하게 대답했다. 내 부하들 가운데 누가 배신자인지도 가르쳐주지 않고 어떻게 처분할지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동의만 하라고?

당신의 동의가 필수적인 것도 아니오. 규정대로 하자면 나는 통보만 하고 처분을 집행해도 되오.”

브라이언트가 의견을 말하기도 전에 정치경찰은 약간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손으로 주물럭거리던 은박지는 대략 형상을 갖추어 가는 듯 했지만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홀든(Holden)이오.”

배신자가 누구냐는 반복된 질문에 감찰관이 이렇게 대답하자 브라이언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홀든이라니?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오. 빨갱이들과 싸우다 보면 공산주의에 물드는 배신자들이 간혹 나오듯이 레플리컨트들을 사냥하다 보면 그들에게 동정적인 생각이 드는 수도 있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데이브 홀든이 레플리컨트에게 동정적인 배신자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차라리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모자를 먹어 치웠다고 말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겠다.

이미 조처는 취했소.”

홀든이 정말로 배신자라면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감찰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반장인 브라이언트의 동의도 없이 정치경찰은 이미 홀든에 대한 처분을 실행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고 브라이언트 반장은 데이브 홀든이 타이렐 본사에서 신입직원들을 대상으로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수행하다가 레플리컨트가 쏜 총에 맞아 척추를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홀든이 왜 느닷없이 타이렐 본사에 간 거지?

내가 보냈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정치경찰이 묻기도 전에 브라이언트의 마음 속 의문에 답을 주었다. 순간 형사반장은 냉동된 바늘이 등골을 관통하는 듯한 섬뜩하고 날카로운 공포를 느꼈다. 이것이 배신자에 대한 정치경찰의 처분이었나. 정치경찰은 이렇게 될 줄 미리 예상하고 홀든에게 위험한,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업무를 지시했던 것인가. 물론 FBI는 지방경찰의 수사를 지휘할 권한이 있기는 하다.

말로만 듣던 게슈타포의 냉혹함에 몸서리 치며 브라이언트는 눈앞의 저 생물이 과연 인간인지 혹시 감찰관으로 위장한 레플리컨트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냉혈한의 손에서 은박지는 사람 비슷한 형상을 조금씩 갖추어 가고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도 젊었을 때는 문학청년이었소. 원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오. 동지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사랑의 도피를 하는 볼셰비키 혁명가 커플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자비출판 했던 적도 있고. 비록 지금은 FBI에서 일하지만 아직도 사랑의 위대함만큼은 믿고 있소.”

이오시프 스탈린도 학생 시절에는 시를 써서 제법 이름이 알려졌다더라.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젊어서 감상적인 소설 몇 줄 끄적거리면 뭐하냐. 결국에는 그런 독재자가, 저런 정치경찰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의 인간성을 의심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치경찰이 방금 내뱉은 이야기는 정말 뜬금없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화가 왔을 때부터 감찰관은 브라이언트가 뭔가를 질문하기도 전에 계속 한 발짝 앞서 가면서 제 3자가 들었다면 완전히 엉뚱해 보일 발언들을 계속하고 있었다. 반장은 감찰관이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갑자기 들었다.

“FBI는 절대 불법적인 방법으로 타인의 사상을 감찰하지 않아요.”

야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또다시 맥락 없는 소리를 꺼내는 감찰관을 바라보며 브라이언트의 의심이 조금씩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FBI가 불법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J 에드거 후버1)가 도청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이성은 머릿속으로라도 화를 내어선 안 된다고 브라이언트에게 경고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계속 피어오르는 게슈타포에 대한 적개심은 완전히 억누를 수 없었다.

당연히 블레이드 러너들의 미국과 인류에 대한 충성심을 측정하는 테스트가 도입될 것이오. FBI에서 개발한 베이스라인(baseline) 테스트2)라는 방법인데, 이것을 2020년부터 LAPD의 블레이드 러너 팀에 도입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공식 임무요.”

블레이드 러너들이 모두 감찰관 개인의 주관적인 심사대상인지 물었을 때 감찰관은 이렇게 FBI의 방침을 브라이언트에게 전달해 주었고, 최소한 감찰 기준이 홀든의 경우처럼 심사자 개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도 알려주었다.

홀든이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되어 심히 유감이오. 그럼 누가 또 그 일을 할까?” (It’s too bad he won’t work. And again who does?)

감찰관의 질문에 브라이언트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릭 데커드를 언급했다. 얼마 전에 레플리컨트들을 폐기시킬 때마다 지급되는 인센티브가 너무 적다는 이유로 사표를 던지고 그만둬버린 솜씨는 괜찮지만 부리기는 쉽지 않은 바운티 헌터였다. 그렇게 돈을 밝히는 녀석이니 레플리컨트에게 동정심 따위를 느껴 홀든 같은 꼴을 당하지는 않겠지 싶은 생각도 조금 있었다.

그럼 내가 그 데커드라는 친구를 찾아 데려오겠소.”

감찰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름 멋지게 보이도록 신경 썼지만 왠지 나치의 게슈타포 복장을 연상시키는 코트와 모자를 차려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로 브라이언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교통반에 내선전화를 걸어 그가 타고 갈 스피너를 수배해주다가 브라이언트는 중요한 질문을 아직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두아르도 개프(Eduardo Gaff),”

브라이언트가 묻기도 전에 먼저 생각을 읽어버렸는지 정치경찰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고, 코트 깃을 바짝 세운 다음 사무실 블라인드 너머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브라이언트의 책상 위에는 뿔난 사람 형상으로 접힌 은박지 인형이 남아 그를 비웃듯이 서있었다.

각주 1) J Edgar Hoover (1895~1972). 20세기 중반에 수십년간 FBI 국장을 역임한 미국의 수사관. 각종 불법적인 사찰을 통해 정치가들의 비리에 대한 정보들을 독점하여 정계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악명 높았다.

각주 2)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등장하는, 레플리컨트 블레이드 러너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 테스트 명칭.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블레이드 러너 레플리컨트는 폐기 처분된다.

김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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