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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526일 저녁시간 GMT +00 : 분기점

 

분명히 점심때까지 도시는 멀쩡했었다. 그저 평범한 수요일 날이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옥스퍼드 대학에 연구원으로 와 있던 윤하는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열심히 연구하고 저녁때가 되어 15분 거리의 하숙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물리학과 건물인 타운센드 빌딩을 막 나선 참이었다. 그날따라 같은 연구실의 동료들이 일찍 귀가해 버리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윤하는 신경 쓰지 않고 저녁 무렵까지 혼자 남았다가 그때서야 퇴근했던 것이다.

물리학과 건물을 나와 몇 걸음 걸어서 블랙홀 로드 (Black Hall Rd.) 골목길을 지난 후에 올라선 번화가 세인트 자일즈(St. Giles)에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사람이 전혀 없었다. 옥스퍼드가 인구 15만 내외의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물리학과에서 윤하의 하숙집까지 가는 길은 도시의 가장 번화한 거리들을 거쳐 가야 하고, 그날은 영국치곤 날씨도 제법 괜찮아서 외출하기도 좋은 날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은 분명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윤하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소름이 쭈뼛하게 돋았다. 평소 즐겨 읽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post-apocalypse) SF 소설에 곧잘 등장하는, 주인공이 실내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거나 죽어 있고 빈 거리만 남아있는 으스스한 장면들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윤하 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은 완전히 소설 속에 나오는 지구멸망 이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 그대로였다.

유령도시처럼 완벽하게 텅 빈 도시를 걸어가면서 윤하에게는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드디어 나도 돌아버린 건가? 천재들의 학문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것과 어울리게 윤하의 물리학 동료들 가운데는 성격이 괴팍하거나 초월적인 인물들이 많았고 개중에는 결국 정신병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윤하에게 가장 무서운 일 가운데 하나는 자신도 그렇게 물리학을 연구하다가 돌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고 있을 때 누구나 흔히 나타내는 반응은 윤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윤하는 곧 그런 생각을 부정해 버렸다. 윤하는 자신이 꿈을 흑백으로 꾼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났을 때 꿈의 내용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도시의 건물과 도로들은 모두 말짱한데 사람만 하나도 없는 으스스한 광경은 꿈이라고 생각하기에 너무나 선명한 총천연색이었고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3차 세계대전이라도 일어난 건가? 세상은 그럭저럭 평화로웠지만 누가 알겠는가. 윤하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그 몇 시간 사이에 어느 정신병자가 핵미사일 발사단추를 눌렀을지. 해외 명문대학에서 연구한다는 부푼 꿈을 안고 유학 왔지만 영국의 날씨나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9월에 다시 귀국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윤하에게 이런 상상은 세계멸망 못지않게 생각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정말로 세계대전이 발발한 거라면 유라시아 대륙 한쪽 끝에 있는 영국에서 다른 쪽 끝에 있는 한국으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휴거가 일어났나? 서기 1천년대가 끝나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1999년이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종말론이 판치고 있었고 한국에서도 그 해 안에 세상이 멸망하고 믿는 자들만 천국으로 승천할 것이라는 휴거론이 사회문제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도시는 멀쩡한데 사람들만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진 희한한 광경을 보면서 평소에 교회에 다녀둘걸 그랬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콘마켓 거리(Cornmarket St.)에 접어들고 보니 상점들조차 대부분 문을 닫았고 간혹 열려 있는 상점에도 손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버스가 한 대 지나갔는데 승객이 하나도 타고 있지 않아서 윤하는 다시 한 번 등골이 쭈뼛해졌다. 옥스퍼드가 완전히 유령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숙집에 가까운 카팍스(Carfax) 네거리까지 왔더니 다행히도 사람이 있었다. 도시의 이상한 지금 상황은 자기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의 흑인이 한 명 지나갔다. 윤하는 사람이 있어서 반가운 것인 아니라 오히려 포스트 아포칼립스 SF에 곧잘 등장하는 좀비들이 연상되어 더더욱 패닉에 빠져 버렸다. ‘뭐야 이거 무서워상태에 빠진 윤하는 하숙방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가 간단히 저녁을 챙겨먹고는 오들오들 떨며 걱정만 하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1999527일 아침시간 GMT +00 : 평행우주 1

 

다음날 아침 윤하가 다시 거리로 나갔을 때 도시는 언제 그랬나 싶게 멀쩡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연히 눈길이 닿은 신문가판대의 초대형 활자를 보고 윤하는 어제 퇴근하던 시간에 영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트레블 달성!’

영국 최강의 축구 클럽인 맨유가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트레블을 달성하던, 그래서 거의 모든 영국인이 집이나 펍에서 숨죽이며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중계를 시청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윤하는 혼자 어리둥절해 하면서 텅 빈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999527일 아침시간 GMT +00 : 평행우주 2

 

다음날 아침에도 거리는 여전히 황량했다. 이제는 정말로 거리에, 도시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윤하는 휑뎅그렁하게 서 있는 옥스퍼드 시청 건물과 세인트 알데이츠 (St. Aldate’s) 거리를 막막하게 바라보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김달영

land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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