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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초단편은 2019년에 한국SF컨벤션 조직위원회에서 주최한 제 1회 SF초단편 + SF시 공모전의 초단편 부문 당선작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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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한국기상학회의 발표 장소는 갑자기 소란해졌다. 방금 마친 발표의 내용이 너무 파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발표 세션(session)의 좌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뉘앙스로 발표자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강 교수님께서는 지금 구름도 생명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발표자인 강 철환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하늘의 구름들이 생성되고, 합쳐져서 성장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소멸하는 과정이 생명게임(life game)에서 생명의 일생과 동일하고, 그에 더해서 수많은 구름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제 발표의 요지입니다.”

좌장은 여전히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고, 청중으로 앉아 있던 기상학자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손을 들어 올리며 반론할 기회를 요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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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언어학회의 발표 장소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지금 결론을 향해 가고 있는 발표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일이 가능하다는 놀라운 주장이었다. 발표자 유 진철 박사는 영어로 이렇게 자신의 발표를 요약하고 있었다.

“... 그래서 저희 연구진은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구름 생태계와의 의사소통에 성공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이 시도에는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논리학, 언어학, 기상학, 레이저광학, 암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론들이 적용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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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은 방 안에 펼쳐져 있는 복잡한 기구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구름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생명체라는 학설은 교양과학 수업에서 접했던 적이 있지만, 그런 구름들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언어학연구소의 연구진은 그런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인 자신 앞에서 실제로 구름과의 의사소통을 시연해 보이겠다고 제안했고, 청와대 홍보부서는 과학한국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하여시연행사에 대통령인 자신이 참석할 것을 권유했기에, 수많은 보도진을 앞에 두고 연구진과 더불어 여기에 서게 되었다.

연구진의 리더인 유 진철 박사라는 사람이 말을 건넸다.

각하, 이제 구름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십니다. 무언가 구름에게 질문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역사학을 전공한 대통령에게 갑자기 즉흥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구름, 당신들은 몇 십만 년 동안 지상의 생태계를 관찰하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 동안 한 번도 인간의 역사에 관여한 적이 없는가요?”

유 진철 박사도, 주변의 연구원들도, 취재에 여념이 없던 보도진들도 모두 예상 밖의 질문에 놀라면서, 구름의 반응이 무엇일지 또한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구름의 반응을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주는 시스템이 복잡하게 작동한 후에 번역된 반응이 나왔다. 몇몇 사람들은 구름이 낮게 한숨을 쉬는 듯한 잡음을 들었다고 느끼기도 했다.

어째서 우리 구름들이 인간의 역사에 관여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질문만큼이나 예상 밖의 응답에 당황한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기원전 13세기의 어느 평범한 날

  그 작은 구름은 낮은 고도에서 형성됐을 때부터 장난기가 넘쳐흘렀다. 동물이나 물건 같은 모양으로 변화해서 땅 위의 생물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었고, 갑자기 변덕을 부려 주변은 모두 화창한데 자신이 떠 있는 곳에만 소나기가 내리도록 만들고선 당황해 하는 동물들과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재미있어 하기도 했었다.

바람 따라 흘러가던 장난꾸러기 구름은 재미있을 법한 대상을 발견했다. 장인에게 얹혀사는 나이 많은 양치기를 놀려먹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장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천천히 양떼를 몰고 나아가는 늙은 양치기를 따라서 구름은 느릿한 속도로 계속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 구름과 양떼와 양치기가 어느 산자락에 도달했을 때, 건조한 날씨 때문인지 떨기나무에 불이 저절로 발화되어 버렸다. 뜨거운 불에 타버릴 나무가 불쌍해진 구름은 고도를 조금 낮추고 때마침 잔뜩 머금고 있던 습기로 떨기나무를 뒤덮어 불이 나무 전체로 번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불이 나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던 양치기는 불이 붙었는데도 건조한 떨기나무가 활활 타버리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신기했는지 다시 나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장난꾸러기 구름에게 늙은 양치기를 재미있게 놀려먹을 방법이 떠올랐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불꽃 위에서 장난꾸러기 구름은 사람의 형상을 짓기 시작했고, 아까 장인이 늙은 양치기를 부를 때 났던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나도록 공기를 밀어냈다.

호기심에 가득찬 늙은 양치기는 아직 꺼지지 않은 떨기나무 속의 불꽃에 이끌려 다가왔다가, 그 위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수증기 덩어리가 나타나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더더욱 놀라운 일은 그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것이었다.

모세야, 모세야

이집트 왕궁에 살던 시절부터 그토록 오랜 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신의 부름이 드디어 자신에게 도달했다고 생각하며, 양치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김달영

land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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