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인류는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안 박사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를 데려와도 지금 그가 느낄감정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없을 터였다. 그는 눈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터지는 플래쉬의 향방이 집중될수록 더욱 설렘과 환희를 숨기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오늘 강단에 선 이유는 한국만이 아닌 전세계가 주목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안 박사의 옆에 서 있던 조종사 들이었다. 그들은 기자들의 관심과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하지 않았다. 묵묵히 훈련을 받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던 사람들이 적응할 새도 없이 몰아치는 섬광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다만 오만상을 다 찡그려가며 서 있는 다섯명의 조종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들의 옆에 마련된 간이 강단에서 열변을 토하는 안 박사가 이만 하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


모두가 안 박사와 그의 옆에 선 조종사들에게 집중하던 그 순간, 은희는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로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은희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흰색 연구소 가운을 입지 않았다면 평범한 여성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을 사람에게 자극적인 요소를 갈구하는 이들이 뽑아낼 것은 없었다. 은희의 표정은 아주 보기 좋게 일그러져 있었다. 대놓고 욕을 하지 않았을 뿐 기회가 있다면 당장 상스러운 말도 거리낌없이 할 얼굴이었다. 눈에 가득 찬 독기는 안 박사를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강단으로 달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의 은희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 안에 들어있던 액체 한모금을 마셨다.


“엑, 시발.”


곧 입 안으로 퍼지는 쓰고 역한 맛에 은희는 오만상을 다 부리며 병을 확인했다. 자신이 연구하던 ‘그것’, 그리고 ‘지금 눈에 독기를 품고 있게 된 이유’에 사용된 정제액이었다. 가운 소매로 혀를 문지른 후에도 영 입 안에 역한 맛이 남은 것인지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은희가 몸을 틀었다. 같은 연구소 부서 동기이자 동료인 희진이었다. 차가운 캔 음료수를 양 손에 들고 있던 희진은 하나를 은희에게 건넸다. 차가운 고철의 느낌에 정신이 조금 맑아졌는지 두 눈에 서려 사납게 일렁이던 독기가 어느 정도 가셨다. 희진은 캔 음료 입구를 따 한 모금 마셨다.


“기분 영 안 좋으면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는 거 어때? 어차피 안 박사 저 놈은 지금 신나서 네가 뭔 부탁을 하든 다 들어줄 걸.”


“됐어, 트집 잡히기 싫어. 그 정도로 기분 조절 못 할 정도의 애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하기에 방금 전까지 은희의 표정은 누구 하나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살기가 끓어 넘치는 표정이었다. 희진이 다시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원래 이 바닥에서는 이런 거 흔한 일이라고 그러잖아. 연구 성과 냈는데 그거 다 선임 연구원이 낸 거라고 하는 거 지난 번에도 있었던 일이고.”


“…”


“그러니까,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냥 잊어버리자. 나도 솔직히 은희 너 속 상하는 거 알지. 알긴 아는데, 그래도 이렇게 담아두고 있어봐야 너만 손해잖아. 이 바닥 좁아서 어차피 알 사람은 다 네가 다 연구했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이만 기분 풀어, 응?”


“…이 연구에만 10년을 쏟아 부었어. 다른 연구 제의 다 뿌리치고 이 연구 하나에 내 연구원 인생을 다 걸었다고. 기계 설계부터 가설 수립, 연료 연구까지, 싹 다 내가 했는데…. 9할 정도 완성 시키니까 이제 지가 할 수 있다고 날 연구에서 빼?”


캔을 들고 있던 은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옆에 있던 희진이었다.


“은희야, 조금만 진정하자. 여기서 난리 쳐봐야 너만 손해인 거 알잖아.”


“…타임 워프 머신 개발이 어디 쉬워? 그거 불가능하다고 학계에서 몇 십년 넘게 보류하던 학설이야. 그런데 내가 그거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다 입증하고 증명해 보였잖아. 그랬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쳐?”


“은희야, 사람들 듣겠어, 응? 여기서 소란 피우면 너만 곤란해진다고.”


“아, 진짜….안현모 저 새끼 진짜 죽….”


말을 하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결국 중간에 멈추고서 한숨을 크게 내쉰 은희가 벽에 등을 기대어 선 뒤 캔을 따 그대로 음료수를 들이켰다. 꽤 많은 양이지만 속이 탔는지 한번에 다 들이킨 뒤 캔을 버린 은희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가까이 오라는 듯 희진에게 손짓을 보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희진은 일단 은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굽혔다.


“그래도 사실 괜찮아. …내가 사실 가설에 오류 내놨거든?”


“뭐?”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희진이 급히 입을 틀어막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두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이는 없었다. 황급히 목소리를 줄인 희진이 은희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뭘 해?”


“내가 쫓겨날 때 그냥 쫓겨났겠어? 나, 억울해서 이거 성공하는 꼴 못 봐. 저 새끼 성공하면 자기 덕이고 실패하면 내 탓할 거 뻔한데 이대로 당하기에는 억울하잖아?”


“…그래도,”


“연구실 퇴소하기 전날 새벽에 가서 코드 몇 개만 에러 코드로 바꿨어. 걱정 마, 어차피 안 박사 쟤는 뭐가 에러고 뭐가 맞는지도 잘 모를 걸? 어차피 내가 거의 다 했으니까 마무리 조금 한 게 전부일 거야, 뻔해. 연구소장 빽 믿고 뭣도 모르면서 박사 노릇 하는 거 꼴 보기 싫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망신이나 당해버리라지.”


은희가 코웃음을 쳤다. 생각치도 못한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희진이 오히려 발을 동동 구르며 사고를 친 당사자보다 더 불안한 눈치였다.


“그래도, 에러코드면 큰일 나는 거 아냐?”


“아냐, 에러코드면 문제 없어. 내가 세운 가설의 정상 코드만이 본래 목적으로 둔 방향으로 갈 수 있어. 에러코드면 연료만 열심히 소비하고 작동도 안 할 걸? 안 박사 저 놈, 엿 좀 먹어봐야 돼.”


은희가 고개를 돌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마침 안 박사의 일장연설이 거의 다 끝나가던 찰나였다.


“…해서, 이번 타임 리프에 관련된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면 우리 연구소의 조종사들은 세계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는 것이며, 저 안현모 박사가 제작한 ‘데우스 엑스’ 호는 세계 최초로 타임 워프에 성공한 타임 머신이 되는 것입니다!”


“안 박사 망해라.”


은희가 안 박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자, 이제 뒤를 봐주십시오, 여러분!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기다리셨을 그것, 저희의 자랑이자 세계의 역사를 바꿀 그것! ‘데우스 엑스’의 모습을 봐주십시오!”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안 박사와 조종사들의 뒤편에 위치한 기기로 향했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댄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비행사들이 자리를 잡고 앉으면 꽉 찰 것처럼 겉보기에도 큰 크기는 아닌 원형 기기였다. 가려 놓는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타임 워프’ 기기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지 흘러나오는 탄식은 놀라움과 실망감이 뒤섞인 소리였다.


“저 기계가 어떻게 작동한다는 겁니까, 박사님!”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던 기자가 물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안 박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긴 말을 해서 무얼 하겠습니까, 기자님.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특수 연료를 이용한 이 기기에 탑승해 조종사들이 조종을 시작하면, 저희가 몇 년간 연구한 좌표를 통해 타임 워프가 시행될 예정입니다. 좌표는 10년 후의 지금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10년 뒤에 조종사들에게 미리 얘기해둔 장소에 놓인 물품을 가져오는 것이 최종 미션인 셈이죠. 사람들은 불가능하다 한 시도지만 저희는 결국, 성공해낼 것입니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나요? 아무리 그래도 시험 운행도 안 해본 것으로 아는데,”


“자,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저의 모든 박사 생활을 걸고 만든 이 기기를, 말보다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모두 이 다섯명의 조종사들에게 응원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다양한 군 부대와 체육계 등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엘리트 중의 엘리트입니다. 이들이 이제 짧으면 몇 분, 길면 며칠 후에 우리 나라 역사의 새 기록을 쓰는 것입니다!”


안 박사가 박수를 쳤다. 잠깐의 공백 후 기자들과 그 옆에 서 있던 연구원들이 따라 박수를 쳤다.

 


“지랄 났다, 진짜. 양심이 어떻게 저렇게 없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기기에 탑승하는 조종사들을 바라보며 은희가 한 말이었다. 더 정확히는 시선만 다른 곳에 고정했을 뿐 안 박사를 저격하는 말이었다. 그런 은희의 분노를 아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안 박사는 희열에 찬 얼굴이었다. 오히려 안절부절 못 하는 사람은 희진이었다. 안 박사가 간이 강단에서 물러서고 연구원들이 뒷정리를 하는 모든 과정에서 은희가 어떻게 튀어나갈 지 모르는 상황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걱정의 근원은 크게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은희야….”


“됐어, 어차피 잘못된 좌표라 많이 작동해봐야 시동 조금 걸리고 연료 소진하는 게 전부일 거야. 곧 있으면 망신 당하고 매장 당할 게 뻔하니까 그걸로 참아야지.”


“그래도…만약에 좌표가 작동하면 어떻게 해?”


“걱정 마, 완전히 이상한 좌표 넣어뒀으니까. 안 박사 저 놈, 연구에 관심도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저런 껍데기 같은 모습도 이제 오늘 이 순간이 마지막이지.”


그 순간 우웅, 하고 기계의 공명음이 들렸다. 구체의 기기는 서서히 덜덜거리며 본체가 떨리더니 곧 어딘가로 나아갈 것처럼 진동의 세기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요란하게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음조차 그 큰 진동에 묻힐 정도였다. 은희도, 희진도, 안 박사와 모든 기자들도 인류의 역사를 가를지 모를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했다.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자동차 수백대의 모터 엔진을 합친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 순간, 기기는 모습을 감췄다.

 


“…뭐야?”


당황한 것은 은희만이 아니었다. 귀청 떨어질 듯 요란한 소음을 견디며 사진을 찍던 기자들도, 한쪽 구석에서 기기를 지켜보던 연구원들도, 하다 못해 안 박사 마저도 이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기기가 있던 곳 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적막이 흘렀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말을 꺼낼 정도로 빠르게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기자들이었다.


“박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박사님, 방금 인류 최초의 타임머신 개발 및 시험에 성공하셨습니다!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박사님, 한 말씀만 해 주시죠!”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들은 녹음기와 카메라를 안 박사에게 들이대고 저마다의 질문들을 쏟아냈다. 셔터음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몇 초 전까지 들렸던 소음과 맞먹을 정도로 귀가 아플 정도였다. 안 박사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 대신 허허, 하는 나름의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가식이고 거짓이라 생각해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사람은 그 공간 안에서 은희가 유일했다.


“…재수없어.”


“은희야, 이만 가자. 여기 더 있어봐야 너만 기분 상해, 응? 내가 오늘 한잔 살게.”


은희는 이를 부득 갈다 결국 등을 돌렸다. 안타깝게도, 은희가 이 곳에서 난리를 친다 하더라도 결국 우위에 있을 사람은 안 박사였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해명할 생각을 버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운 일이었다. 치가 떨리고 분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그나마 나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떠나려던 은희와 희진의 발목을 잡은 것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공명음이었다. 익숙한 소리였다. 바로 몇 분 전 고막이 터지도록 들었던 소리를 벌써 잊을 리 없었다. 기자들의 시선이 안 박사에게서 곧 기기가 모습을 드러낼 빈 공간으로 쏠렸다. 그들은 이미 자랑스럽게 세계 최초의 타임 워프를 마치고 돌아온 자랑스러운 조종사들에게 뜨거운 시선과 질문을 던질 준비를 마쳤다. 점차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커졌다. 자리를 뜨려던 은희도 결과는 궁금했던 것인지 그 자리에 멈춰서 시선을 고정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쇠를 긁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떠한 기체의 손상도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대다수의 입에서 경탄이 터졌다. 이제 기기의 문이 열리고 조종사들이 멀쩡하게 걸어 나온다면 안 박사는 세기의 천재이자 과학을 발전시킨 천재로 역사에 남을 터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기기의 문이 열렸다. 무언가가 툭,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으아아아아악!!”


그것은 사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 수 없는 푸른색의 ‘곰팡이’로 뒤덮인 조종사 들이었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직 의식이 있는 사람은 연신 구역질을 하며 ‘곰팡이’를 게워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실패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패의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안 박사의 표정이 당혹감에 젖어 들었다. 기자들이 다시 녹음기와 카메라를 안 박사에게 돌렸다. 하지만 질문은 아까 전과 확연하게 달랐다.


“박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박사님, 지금 조종사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 역시 예상 범주 내에 있던 일입니까?”


기자들이 길목을 막은 탓에 연구원들은 조종사들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모두가 뒤엉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은희와 희진 만이 그들 사이에 포함되지 않은 채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가자.”


은희의 말에 희진은 별 다른 대답 없이 응했다.

 


무슨 정신으로 빠져나온 것인지, 두 사람은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연구 센터 뒷문을 나왔다. 일반적인 출입은 앞문으로 하는 탓에 뒤쪽은 한산했다. 두 사람 모두 얼이 빠진 채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 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나마 정신을 먼저 붙잡은 은희가 자신의 뺨을 두 번 정도 내리친 뒤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내쉬었다.


“…희진아.”


“…어.”


“분명히 오류가 나서 연료만 잔뜩 소비하고 헛걸음만 하는게 맞았는데 말이야. 안 박사는 망신당한 다음에 뉴스 보면서 잔뜩 비웃어 주는 게 내 계획이었단 말이야.”


“….”


“…너는 오늘 아무 것도 못 들은 거야, 희진아. 나는 정상 좌표 찍었던 거야. 안 박사한테 복수하고 싶은 생각 따위 없었던 거야.”


“….”


뭐라 답을 해줘야 할지, 희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나 병가 낼 거야.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거라고. 알겠지, 희진아. 오늘 내가 한 얘기는 너만 아는 거야.”


결국 희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넋이 나간 은희에 대한 불쌍함 때문인지, 동기를 생각하는 의리 때문인지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희진의 대답을 들은 은희는 심호흡을 하고서 뒤돌아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절대 자신이 고의로 낸 실수가 아니라 몇 번이고 되새긴 후에도 은희의 손은 여전히 사시나무 마냥 떨렸다.

 


***

 


은희는 집 안에 틀어박혔다. 오랜 시간 연구실에 사느라 청소를 게을리한 열 평 남짓의 자취방은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몇 번이고 재채기가 나고 피부가 간지러웠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은희는 거실 소파에 처박혀 TV 채널을 돌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끝냈다. 화면 구석에 표시되는 날짜와 시간이 아니었다면 은희는 오늘이 며칠인지, 밤인지 아니면 낮인지 구분하지도 못한 채 계속 멍하니 웅크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해도 이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안 박사가 희진을 앞세워 은희의 집을 찾아온 것은 은희가 은둔 생활을 시작한 지 2주 즈음 되었을 때였다. 그 때는 은희가 집 안에 웅크려 살다 집 안에 있던 식량을 모두 다 먹고서 장을 보러 나가야 되나 걱정하던 찰나였다. 뉴스에서는 안 박사를 ‘희대의 과학 살인마’ 따위의 멸칭을 붙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비난과 비판 중간 즈음에 위치한 기사를 쏟아 내기에 바빴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은희는 안 박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아닌 이은희 라는 연구원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다’ 라 말하는 악몽을 꿨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 박사는 자취를 감췄으며 걸려오는 연락 역시 없었다.

 


딩동-.

 


공중파 방송은 이미 안 박사의 얘기로 가득 찬 탓에 삼류 케이블 방송을 틀고 멍하니 있던 은희가 문득 주린 배를 잡고 비어 있을 부엌으로 가던 찰나였다. 올 사람은 없었다. 제대로 병가 처리를 거치고 잠적한 것도 아니라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딱히 누군가와 교류하던 성격도 아니었던 터라 그럴 일은 없었다. 일단 연구소가 뒤집힐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은희를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누구세요?”


은희가 현관문으로 다가가 렌즈에 눈을 가져다 댔다. 그 곳에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희진이 서 있었다. 그리고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 한 명이 같이 서 있었다.


“…”


“이 연구원, 문 좀 열어보지?”


은희는 손을 뻗어 걸쇠를 잠궜다.


“해치려는 것이 아냐, 빨리 열어, 쿨럭, 쿨럭. 열어 봐.”


“…내가 할 말은 없어요. 나한테 그렇게 관련된 권리를 빼앗아 갔으면 박사님이 그에 대해서 책임져야 되는 거 아닌가요?”


“자네가 아예 관련 없다고 말 할 자신 있나? 이미 다 알고 왔는데?”


은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까 전 희진이 짓고 있던 어색한 미소의 의미를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안 박사는 렌즈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 성격이라면 문을 부술 듯이 두들기며 언성을 높였을 터였다. 하지만 ‘과학 살인마’ 소리를 듣는 와중에 그러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걸 본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나마 그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빨리 문부터 열어봐, 이 연구원. 우리 대화로, 쿨럭, 풀자고, 대화. 협상, 알지? 돈 필요하면 돈 주고 승진 원하면 승진시켜줄 테니까, 열어보라고, 어?”


“…싫습니다, 싫다고요. 저 이제 곧 연구소 그만 둘 거고요. 박사님이 저 필요 없다고 쫓아냈으니 그에 대한 건 박사님이 책임 지셔야죠. 제가 다 뒤집어 쓰라고요?”


“은희야….한번만 문 열어주라, 응?”


안 박사의 눈치를 보다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는 희진의 모습에 순간 은희는 마음이 약해져 문을 열어주려 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연구소에 돌아가 가뜩이나 안 박사를 받아내야 할 희진에게 미안했지만 열면 그 분노와 짜증을 자신이 감내해야 했다. 아무리 희진이 친한 동기이자 친구여도 그것은 거부감이 들었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들기고 온갖 회유를 늘어놓던 안 박사와 희진은 결국 지쳤는지 은희를 불러내길 포기했다. 안 박사가 분을 못 이겨 문을 세게 걷어찬 것인지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이 연구원, 그래도 내가 마음이 넓으니까, 쿨럭, 일단은 기다릴게. 한달 내로 돌아와, 돌아와서 수습해. 이것도 길게 준 거니까 눈치껏 오라고, 알았어?”


잔뜩 열이 난 안 박사와 그 옆에서 눈치를 보던 희진이 집 앞에서 떠났다. 렌즈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희가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구소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돌아가봐야 결국 해야 할 것은 안 박사의 뒤치다꺼리 일 것이 뻔했다. 그대로 눈치껏 버티다 여차하면 신분 세탁이라도 하고 머나먼 시골로 숨어버리자고, 은희가 은연 중에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은희는 2주 뒤 연구소로 복귀했다.

 


그날의 그 곰팡이가 번식하는 것은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물론 타임 워프의 성공 자체가 생각치도 못한 상황이었지만 한 순간에 서바이벌 같은 인생을 살아야 될 운명에 처한 것은 더욱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날, 은희는 오랜만에 뉴스를 틀어 대국민 사과를 하는 안 박사를 보았다. 안 박사는 기기 폐기와 연구소 폐쇄를 내세우며 기자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잠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시간은 오후를 넘긴 직후였다. 그리고 뉴스에서는 안 박사 이야기 대신 푸른 ‘곰팡이’ 이야기를 바쁘게 떠들고 있었다.


[…이 이상한 곰팡이는 현재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으며 접촉한 사람들은 물론 반경 내에 있을 시 무조건적으로 감염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최초 감염자는 당시 우주항공개발 센터 내 타임 워프 머신 ‘데우스 엑스’ 취재를 나갔던 기자들로 알려져 있으며…]


은희 역시 그 곰팡이의 반경 내에 있던 사람이었다. 은희는 잠적할 생각은 있었지만 죽을 생각은 없었다. 결국 은희는 2주 만에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

 

“일단 내 계획은 이래. 쿨럭, 조종사들을 ‘데우스 엑스’에 태워서 10년 뒤 미래로 다시 돌아가는 거야. 10년 뒤라면 이렇게 곰팡이 천국 이어도, 쿨럭, 최소한의 해독제 정도는 있겠지.”


“…보고서 작성이나 국가에 보고하는 건 안 해요?”


“하겠냐? 안 그래도 지금 사람들 대부분, 쿨럭, 다 퇴사하거나 자기 감염됐다고 다 나가고 난리야.”


은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존에도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전에 비하면 인원 수가 확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바쁘게 보고서와 임상실험 결과 용지를 들고 오가야 할 사람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사람은 은희와 안 박사,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희진이 전부였다.


“암암리에 다른 연구소까지 연락 돌려서 조종사들은 모집해 놨고, 이제 교육은 안 연구원이 시킬 테니 이 연구원 너는 기기를 손봐. 손보라는 소리가 뭔 말인지 알지? 이미 다 들어서 알아.”


“…희진이가 교육 하고 제가 좌표 수정하면, 박사님은 뭘 하는데요?”


“나 바쁜 몸이야.”


“그러니까 뭐가 바쁜,”


“나는 바쁜 사람이야, 쿨럭. 그러니까 찾지 마. 알겠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 박사는 기침을 하고서 급히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애초부터 모든 것을 다 떠넘긴 뒤 자신이 공을 가로채려는 수작이었다. 그것을 한번 당했음에도 다시 당한 셈이었다. 희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은희에게 다가왔다.


“지난번에…그 일은 미안. 나도 원래는 안 말하려고 했는데 그런 압박이 좀 그래서….”


“…됐어, 네 잘못 아냐. 그런 거 잘잘못 안 따질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우리 일이나 하자. 솔직히 안 박사 꼴 보기 싫어서 해주기는 싫은데 가만히 있으면 내가 죽으니 어쩔 수 없잖아.”


희진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를 피했다. 은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황 상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분위기였다. 갈 길이 막막했다.

오랜만에 안으로 들어온 데우스 엑스 호의 내부는 익숙한 구조였다. 10여년의 세월 동안 도면과 9할가량 완성될 때까지 지켜본 탓에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바닥에 간간히 무언가 눌어붙었던 자국 – 아마도 ‘곰팡이’ 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 이 보였지만 그것은 인력을 써서 제거한 것인지 남아있는 ‘곰팡이’는 보이지 않았다. 은희가 능숙하게 스크린에 손을 댔다. 지문 인식 프로그램이 작동해 모든 시스템이 가동하기 시작했고 부팅이 이어졌다. 프로그램이 상당히 묵직한 터라 완전한 작동 시작까지 시간이 걸려서 시간에 공백이 생겼다. 그 사이 은희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설계에서 제작을 할 때와 다른 조합의 부품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이 계획했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은희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수많은 잡념을 깬 것은 부팅 완료를 알리는 안내음이었다. 은희가 바쁘게 자판을 두들겼다. 지금부터 좌표에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적어도 사흘 밤낮을 새야 했다.

 

생각보다 코드는 방대했으며 오류는 자잘했다. 처음으로 자신이 오류 코드를 심었던 것을 후회한 은희는 식사도 거르며 바쁘게 손을 놀려 코드를 입력했다. 그나마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혹시 몰라 저장해 둔 파일들이 아니었다면 다시 한번 말도 없이 탈출을 시도했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흘하고 반나절이 지난 후, 은희는 기어코 모든 오류를 수정하는 데 성공했으며 원래대로 입력되어야 할 좌표를 모조리 입력하는데 성공했다.

 

***

 

 

“쿨럭. 여러분은 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비록 우리는 그 끔찍한 ‘곰팡이’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릅니다. 여러분이 해독제를 찾아와 인류의 구원이 될지! 쿨럭.”

 

기자도 없고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정말로 일장연설을 하고 싶은지, 은희가 안 박사에게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서 자신의 뒤에 위치한 기기를 바라보았다. 조종사들을 섭외했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좌표 입력 완료 연락을 돌리기 무섭게 센터 안으로 낯선 사람들 세명 이 찾아왔다. 꽤 유명한 항공 연구소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은희는 오늘 아침 짧은 휴식을 취하면서 들었던 라디오 방송이 문득 떠올랐다. 곰팡이가 생각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마도 공기 중으로 전파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잠복 시기는 사람마다 달라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으로 방송은 끊겼다. 이미 자신을 포함한 안 박사와 희진 역시 곰팡이 감염자일 확률이 높았다.

 

“자, 이제 인류의 구원자가 되러 떠나 봅시다! 인류는 여러분을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쿨럭!”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연설이 마무리되고 비행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기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희진에게 조종법을 배운 탓인지 별 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세 사람이 기기에서 몇 발짝 물러섰다. 조종사 세 명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게 임할 뿐이었다. 자판을 조작하자 ‘데우스 엑스’의 문이 닫혔다. 우웅, 하고 기계의 공명음이 들렸다. 점점 본체가 서서히 덜덜거리며 떨리더니 곧 어딘가로 나아갈 것처럼 진동의 세기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들은 적 있던 자동차 모터 몇 백 개를 합친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기기는 모습을 감췄다. 우선은 성공이었다.

 

“…됐나?”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기기의 밖에 서 있던 사람 모두 기대와 불안을 안은 채 사람이 조종사들이 나타나기 만을 기다렸다. 잠시 동안의 공백 후, ‘데우스 엑스’의 문이 열렸다. 은희의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이 서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비행사 들이었다.

 

“…어.”

 

그들 역시 안타깝게도 ‘곰팡이’로 뒤덮인 채였다.

 

 

“이게 뭔 상황이야!”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부들거리던 안 박사가 역정을 내며 은희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은희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맞는 좌표라 하지 않았어? 쿨럭,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이야!”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나도 최선을 다 했고, 분명히 맞는 좌표였어요.”

 

“맞는 좌표? 맞는데 또 이 꼴이 나? 하여간 여자, 쿨럭, 연구원을 여기다 들이는 것이 아니었어, 탁상, 쿨럭, 공론만 잘하니 이 꼴이 나지!”

 

순간 은희의 표정 역시 매섭게 일그러졌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것은 두 사람을 말리지도 못하고 사이에 낀 희진이었다.

 

“두, 두 사람 다 그만 해요. 지금 이런 말 할 상황이,”

 

“내가 여자여서 뭐 이득 봤던 거 있어요? 10년을 바쳐서 90퍼센트 넘게 연구 완성해 놓으니까 홀랑 잡아먹고 자기가 했다면서 거짓말 한 주제에? 오히려 손해본 거 아닌가?”

 

“쿨럭, 쿨럭. 그래도 마무리는 내가 했어! 이게 어디서 박사한테…! 이제 우리 다 곰팡이에, 쿨럭,  노출되었으니 곧 죽을 거야, 알아? 너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는 거라고!”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요! 애초부터 잘못된 좌표가 그렇게 갈 줄 몰랐고, 갈 수가 없는 방향이었는데!”

 

두 사람은 당장 서로의 멱살을 잡고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다 적막을 깬 것은 바로 안 박사였다. 그는 몸을 돌려 ‘데우스 엑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시바알, 나는, 쿨럭, 이렇게 못 죽어, 알아? 내가 박사 학위 어떻게 딴 건데, 응?”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안 박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비행사들의 시신을 대충 밀어 던지고서 내부로 들어가려 했다. 은희가 급히 달려가 그의 팔을 꽉 잡고서 막았다.

 

“왜, 두번이나 실패했으니 이제는 내가 가져올 거야. 너도 이제 못 믿어, 내가 살아야지!”

 

“미쳤어요? 그리고, 언제는 믿었어요? 그리고 뭐가 뭔지 알기나 해요? 이거, 내 10년 바쳐서 만든 거라고요. 당신이 뭔데 이걸 마음대로 써!”

 

“나니까 내 마음대로 쓰지! 믿을 건, 쿨럭, 나 밖에 없어. 내가 직접 운행해서, 쿨럭, 쿨럭, 내가 직접 구원자가 되겠어, 내가 직접 하겠다고!”

 

“운행법도 모르면서 어딜 나대! 지금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마구잡이로 가서 더 이상한 거 달고 오려고? 박사라고 허리 굽혀가면서 봐줬더니 지금 제정신이야?”

 

“네, 네가 알게 뭐야! 내가 해독제 구하면, 쿨럭, 네 거는 없어! 꺼져, 꺼, 쿨럭, 쿨럭, 꺼지라고!”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당장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의 얼굴을 할퀴고, 물어 뜯고, 쥐어 잡는 싸움이었다. 은희는 안 박사의 팔을 할퀴었고 안 박사는 은희의 머리채를 잡았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는 와중에 희진은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결국, 안 박사가 주먹을 은희의 복부에 매다 꽂은 뒤 조종사들의 시신이 있는 방향으로 내던지면서 싸움은 끝이 났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은희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희진이 황급히 놀라 ‘곰팡이’도 신경 쓰지 않고 달려와 은희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은희는 대답 대신 ‘데우스 엑스’ 방향을 바라보았다. 안 박사는 계속 마른 기침을 하며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곁눈질로 배운 조종법인지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들에 비해 느린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은희가 자신도 모르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옆구리가 무언가에 쓸린 것 처럼 쓰라렸다. 시선을 돌려 통증의 근원지를 확인하니, 그 곳은 바로 주머니였다. 주머니는 무언가가 새어 나와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

 

은희가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자잘한 유리 조각들이 잡혔다. 아마도, 자신이 주머니에 소분하여 넣어 두었던 정제액이 틀림없었다. 희진이 은희의 몸을 일으켰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는지 쓰라린 느낌 외에 큰 통증은 없었다. 은희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자신이 넘어지며 의도치 않게 깔고 누운 시신이 있었다. 온 몸에 ‘곰팡이’가 핀 채, 신체 일부에는 자신의 하중을 이기지 못해 깨지며 정제액까지 묻은 그 시신을 보았다.

 

“…”

 

“…은희야?”

 

은희의 시선이 액이 묻은 시신의 팔 부근으로 향했다.

 

“…희진아.”

 

“응?”

 

“나 가고나서, 안 박사가 뭐 건드렸어?”

 

“어…, 연료탱크 부분? 자기가 마무리할 수 있다고 거기 손 댔는데, 큰 결함은 없었어.”

 

은희가 다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빼냈다. 자잘한 유리 조각과 액이 손 끝에 묻어났다. 그리고 그 손을, 그대로 곰팡이 위로 가져다 댔다. 액이 묻은 곰팡이는 소리 없이 검은 색으로 물들더니 그대로 수분기를 잃고 바스라졌다.

 

“…어.”

 

은희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안 박사는 시행 코드를 마저 입력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잘 있어, 나의 연구원들아. 나는, 쿨럭, 이 세상의 구원자 이자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이 될 한 걸음을, 쿨럭, 도약할 테니!”

 

“어, 잠시만,”

 

우웅, 하는 공명음이 다시 들렸다. 서서히 요란한 엔진음이 들렸다. 기기 닫는 법을 모르는 것인 것 잠시 헤매던 안 박사가 어떤 버튼을 누르자 서서히 해치가 닫히기 시작했다. 뒤늦게 닫히기 시작한 문 덕분에 은희는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내부 아래쪽에서 푸른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곳은 연료 탱크 쪽이었다.

 

“잘 있어라, 우매한 이들아! 나는, 우웨에에에엑!”

 

은희가 급히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곰팡이를 게워내는 안 박사의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이후에 문이 닫히고,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내며 ‘데우스 엑스’ 는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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