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한적한 카페, 여자는 의뢰인의 지시대로 약속된 시간에 맞춰 나와 있었다. 곧 있으면 의뢰인의 내연남이 나타날 터였다.

의뢰인은 내연남과 밀회를 나누는 기혼녀였는데, 자기 대신 내연남을 직접 만나 이별하자고 통보해줄 사람을 물색했다. 직접 만나서 헤어지자고 말을 하자니 그럴 자신은 없고, 전화 통화나 문자 메시지로 처리하는 것도 그닥 내키지 않아, 인력 거래용으로 제법 알려진 어느 앱을 통해 여자에게 접촉, 의뢰인 자신의 친척이나 직장 후배 정도로 신분을 속이고 내연남에게 대신 이별을 통보해달라고 부탁했다. 내연남이 악감정을 품어 엉뚱한 일을 터트릴 수도 있으니,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모두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일러달라고, 진정성이 느껴지게 신경 써 달라 거듭 강조하였다.

비록 여자가 여러 일들을 의뢰받곤 했지만, 난감한 치정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자는 고민 끝에 의뢰를 수락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여자 자신의 인생에는 일어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자신에게, 어쩌면 이 곤혹스러운 경험이 창작의 소재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자신은 의뢰인을 대리하는 역할에 불과할 뿐이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그러니 담담해지자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거렸다.

하지만 막상 의뢰인의 내연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여자는 점점 초조해졌다. 진짜로 상황이 닥쳐올 거란 생각에 문득문득 아찔한 느낌이 일어났다. 긴장된 숨이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숨결에 텁텁한 온기가 묻어 나왔다.

그 때, 카페 입구로 검은색 벨벳 재질의 롱코트 차림을 한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남자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훤칠한 키, 넓은 어깨, 그림을 그린 듯 선이 곱고 부드러운 이목구비. 여자는 직감적으로 저 남자가 오늘 만나기로 예정된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여자의 심장이 느닷없이 쿵쾅거렸다. 막상 상황이 들이닥치자 무슨 말부터 시작할지는커녕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래지고 있었다.

그 사이 남자는 여자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고, 의자를 살짝 당긴 다음 시트 위에 천천히 앉았다. 간단하고 사소하지만 어쩐지 무게 있는 동작으로. 아주 잠깐, 여자는 자신이 의뢰를 받고 나온 게 아니라 진짜로 이 남자와 내연의 관계였다면, 이라고 상상했다.

 


 

여자는 대학생 시절부터 시나리오 공모전마다 원고를 보냈지만 모조리 탈락했다. 탈락 횟수가 헷갈리기 시작할 즈음 얼떨결에 졸업했고, 지인들은 번듯한 직장을 구했거나 소리 없이 잠적해 버렸다. 일부는 오랜만에 연락 해선 점심이나 먹자며 약속을 잡고는 만나러 나가보면 청첩장을 내미는 식이었다. 여자는 결혼이 부럽진 않았다. ‘결혼이 가능할 만큼 ‘사회적으로 떳떳한’ 그들의 일상이 자괴감을 맛보게 했을 뿐. 점점 생활고의 무게가 묵직해지면서, 여자는 청첩장을 받아도 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뭐라도 붙잡자는 마음에 여자는 인력을 공급하고 구매하는 창구로 통하는 어느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였다. 자신의 인적을 간략히 올려두면, 모바일 알람으로 일거리 의뢰가 들어오는 식이었다. 사람이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대리 인력’이 필요한 일들. 여자가 처음 한 대리 알바는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식 하객’ 행세였다.

그러니까, 초대받은 결혼식은 가지 않지만 의뢰받은 결혼식은 가는 거였다.

택배를 대신 수령해달라는 자질구레한 일부터, 친하지도 않은 친척의 장례식장에 대신 가달라는 부탁까지, 여러 종류의 ‘대리 인력’ 수요를 휴대폰 진동으로 전달 받으며, 여자는 지금 겪는 경험들이 새로운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에 밑거름이 될거라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다가 내연남에게 이별을 전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내연남을 만나러 나왔다.

그렇게 여자와 남자가 만났다.

 


 

“이미 짐작하셨을 걸로 압니다.” 남자가 먼저 말했다. 촉촉한 목소리가 여자의 귓가로 물결처럼 잔잔히 적셔들었다. “미안하게 됐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림처럼 선이 고운 얼굴을 한 남자가, 호수처럼 깊은 울림의 목소리로 말하는데, 외모와 목소리의 그 간극이 의외로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두 분의 감정이 보통은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위험합니다.” 여자의 귀가 ‘위험’이라는 단어에 저절로 솔깃했다.

“이제 저희 형님을 놓아주십시오. 본인이 나오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저희 형, 그쪽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여자는 뭔가 이상한 낌새에 무슨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는 물끄러미 여자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건 제가 하려던 말인데요…?” 여자가 슬며시 발을 내딛듯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남자의 눈썹 끝이 슬며시 올라가며 ‘뭐지?’라는 말을 대신하였다.

“혹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말했다.

“의뢰 받고 대리로 나오신 거…?”

“대리 알바하는 분이세요?”

내연 관계인 당사자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 이별을 통보해 줄 대리 알바를 구했으니, 그게 바로 카페에 마주 앉은 여자와 남자 두 사람이었다. 의뢰 받은 대리 알바 둘이서 서로를 의뢰인의 내연 관계인이라고 지레 짐작, 심각한 척 무게 잡으며 연기했던 것이다. 서로의 정체를 확인한 두 사람은 민망한 듯 허탈한 듯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든 헛웃음을 터트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가 둘의 시선이 서로에게 고정되었다.

남자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짜 연기를 집어치우고 자기네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자는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임을 밝혔고, 남자는 자신이 가난한 색소폰 연주가라고 말했다. 남자는 음악 학원을 전전하며 레슨비 조금 받는 게 수입의 전부이고, 이따금 버스킹인지 구걸인지 모를 것도 하며, 유튜브에 색소폰 연주 영상도 간간히 올리지만 조회수는 거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곤란한 상황을 대리해 줄 단기 알바를 구하는 창구로 이용되는 어느 앱을 접하곤, 새로운 경험이 자신의 음악 세계에 새로운 영감이라도 주지 않을까 순진하게 기대하며 (그리고 일하고 받을 돈도 기대하며) 대리 알바 노릇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자는 자기도 시나리오 쓰는 일에 도움이 될까 싶어 이 일을 시작했다며 맞장구쳤다.

“일하면서 별 일 다 겪지 않아요?”

“맞아요!” 남자의 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자기가 겪은 황당한 의뢰들을 이야기하다가, 한번은 철부지 고등학생 아들이 무면허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는 바람에 피해자에게 선처를 호소해야하는데 자기는 도저히 남 앞에 무릎 꿇고 비는 행동은 못하겠다며 대신 가서 친척인 양 행세하고 합의를 부탁드린다 읍소해 달라는 의뢰까지, 그래서 피해자 가족들에게 몇 시간이고 욕받이가 되느라 혼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던 일화까지 이야기했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며, 교사를 폭행한 학생의 삼촌 행세를 하면서 선처해 주시라 호소한 일화를 (즉 욕받이 노릇 하느라고 고생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처럼 공감하고 있었다.

어느덧 저녁 식사 때가 되었고, 두 사람은 꽤 비싼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의 의뢰인이 입금해준 돈이 그 정도의 사치를 한번 정도는 누릴 수 있을 만한 액수였으니까. 여자와 남자는 식사 중 가볍게 와인을 곁들였고, 헤어지며 연락처를 교환했다. 연락과 만남이 이어졌으며, 생활비를 아끼는 차원에서 동거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여자와 남자 모두 같은 곳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토탈 이모션>이라는 회사였는데, 의뢰 내용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겠다며 자기네 사무실로 찾아와 달라는 게 요구의 전부였다. 두 사람은 이번 의뢰가 이전 일들과 사뭇 다르다는 인상만 받았을 뿐 무슨 내용의 의뢰일지 이렇다할 짐작은 떠오르지 않았다.

<토탈 이모션> 사무실은 도심 건물 한 곳에 세를 주고 앉은 작은 사무실이었다. 스무 평 조금 안 될 것 같은 사무실에 대여섯 정도의 직원들이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전화통화를 하거나 문서를 뒤적이거나 하고 있었다. 직원 한명이 여자와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그들을 칸막이벽으로 구별된 사장실로 안내했다.

사장실 안에 들어가니, 탈모의 기미가 엿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어서 오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꺼운 손으로 두 사람과 힘 있게 악수를 한 다음, 종이컵 두 개에 믹스커피를 타서 여자와 남자에게 나눠주었다. 사장은 자신이 모 유명기업 IT관련 부서에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얼마 전 독립하여 이 회사를 차렸다고 소개하였다.

“<토탈 이모션>은 현대인의 미래를 책임지는 게 목표입니다.” 사장이 말했다. 말이야 거창했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하나도 없으니, 여자도 남자도 서로 눈치만 살피며 어떻게 반응할지 머뭇거렸다. 사장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현대인의 노동은 점점 정신노동으로 이행되고 있으며, 육체노동의 상당수는 이미 기계에게 내어준 지 오래라고 하였다. “그 결과 현대인에게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게 ‘정신질환’입니다. 정신노동의 비중이 커지니까 자연스레 화두로 올라올 수 밖에요.”

사장은 사회가 점점 정신노동에 따른 개인의 심정적 기력을 극도로 소모시키는 중이라 말하고는, 따라서 미래의 인류에게 ‘심정적 차원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날이 갈 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인간을 불신하고 기피하는 이유가 이겁니다. 소셜 미디어로 소통하고 반려동물에 애정을 주면서 정작 사람끼리의 접촉은 어색해 하죠. 사람을 상대하는 거 자체가 스트레스니까요. 정신노동의 상당수가 인간관계에 따른 스트레스를 수반하는데, 일상 생활까지 사람을 상대하면 그 자체로 감정 에너지를 더 소모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돈을 주고 여러분 같은 대리인을 고용해서 상황을 떠넘기는 거죠. 여러분은 ‘감정 대리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선 이것 좀 보시죠.”

그러더니 사장은 그림과 글이 적힌 종이 한장을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그림은 박물관에 걸려 있을 법한 르네상스 시대 유럽 회화 느낌이 다분했고, 글은 미사여구로 점철된 한편의 시였다. 여자와 남자가 그림과 글을 살피는 사이 사장은 작은 리모콘을 몇번 눌렀고, 그러자 어디선가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전부 AI가 만든 겁니다.” 사장이 말했다. “그림도, 글도, 지금 들리는 음악도. 알파고가 바둑판에 파란을 일으키기 전부터 예술 콘텐츠를 생산하는 AI 개발은 상당부분 진척되고 있었습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소설은 아직 모자란 수준이긴 하지만요. 예술이 AI에게 난공불락의 요새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경험하는 중이신 거고요.” 사장이 글과 그림이 담긴 종이를 몇장 더 내밀었다. “어느 게 사람 거고 어느 게 AI 건지 구분이 되십니까?” 여자와 남자가 보기엔 구분할 수 없었다. “이제 AI가 인간의 감수성까지 관여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사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기 죄송한데, 그래서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여자가 말했다.

“사람이 만든 거랑 AI가 만든 거랑 구분 되냐고 그거 하나 알아보려고 부르신 건 아니시겠죠?” 뒤이어 남자가 말했다.

“<토탈 이모션>는 AI를 통한 ‘감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될 겁니다.” 사장이 답했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뿐 아니라, ‘감정 대리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분들의 도움이 말이죠.”

사장은 우선 문자메시지 대행 AI 서비스부터 시작할 계획이라고 했다. (즉, 이 회사는 아직 아무 것도 만들지 못했다.)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게 부담스럽고, 전화로 목소리를 듣는 것도 감당하기 싫어한다면 문자 메시지로 연락해야 한다. 하지만 문자메시지로 진지한 이야기를 호소력 있게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토탈 이모션>이 개발(하기 위해 노력) 중인 문자메시지 대행 AI 앱은 (일단 ‘토탈 텍스트’라는 이름인데) 앱에 탑재된 AI가 USIM카드의 정보, 설치된 메신저 프로그램의 기록과 온라인 접속 쿠키, 스크린을 터치할 때 확인되는 체온과 심박수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AI 스스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상황, 목적, 취지 등을 파악하고 마치 사람이 쓴 것처럼 호소력 있는 텍스트 메시지를 자동으로 생성, 발송하는 앱이었다. (그렇게 되게끔 하는 게 목표였다.)

사장은 AI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여러분 두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역할을 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 경험을 ‘토탈 텍스트’에게 입력시키는 겁니다. 여러분이 DB 그 자체입니다. 우리 회사 기술팀이 여러분의 노하우를 프로그램화 할겁니다. 여러분은 AI가 내놓은 아웃풋을 확인하고 피드백 해주시면 됩니다. DB 제공, 아웃풋 확인, 그리고 피드백. 이렇게 세 가지만 하시면 됩니다. 예, 저는 지금 두 분께 우리 회사의 직원이 되어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장은 입가를 올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정규직입니다. 야근은 없습니다. 뭐, 기술팀은 종종 있지만.”

 


 

‘토탈 텍스트’는 성공했다. 너도나도 이용하더니, 나중에는 간단한 음식 배달 주문에도 활용될 정도였다. 여자와 남자 그리고 추가로 채용된 ‘데이터 인력’들이 사람을 상대해온 경험을 DB로 구축한 결과였다. <토탈 이모션>은 연이어 두 번째 작품으로 ‘토탈 ARS’를 내놓았다. ‘토탈 텍스트’가 개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라면, ‘토탈 ARS’는 기업들을 타게팅한 것이었다. 비록 ARS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 되었지만, 많은 고객들이 상담원과 통화하길 요청하는 게 다반사였고, 상담원들의 스트레스는 심각했다.

‘토탈 ARS’는 이 점을 공략했다. 기업들이 ‘토탈 ARS’를 구매하고 설치하면, 고객의 불만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AI가 시종일관 침착하고 공손한 태도로 고객들을 응대했다. 사람보다 정교했고 사람보다 친절했으며 사람과 달리 싸우지 않았다. 설치된 AI를 관리하는 소수의 직원만 고용하면 충분하기에, 1년만에 각종 기업과 관공서의 ARS를 ‘토탈 ARS’가 대체했다.

이후 <토탈 이모션>은 각종 상품을 내놓았다. 실행과 동시에 사용자의 취향과 현재 상태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즉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생성하는 E북 소설 앱 ‘토탈 픽션’, 그리고 사용자의 취향과 상태를 자동으로 분석하여 가장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소리를 팝, 힙합, 로큰롤, 클래식, R&B, 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생성하는 ‘토탈 사운드’, 진짜 같은 가짜 사진과 고전적인 느낌의 서양화 및 동양화 그리고 추상회화까지 그려내는 ‘토탈 드로잉’ 등이었다.

가장 흥행한 역대급 작품은 ‘토탈 패키지’였다. 어느 상황이든 말동무가 되어주는 AI 앱으로, 가령 혼자 밥 먹으면서 드라마를 볼 때 스마트폰으로 ‘토탈 패키지’를 실행하면, 카메라를 통해 외부를 파악한 AI가 즉석으로 같은 장소에서 함께 TV를 보는 가짜 인간의 모습을 화면상에 생성하였다. 자동으로 생성된 가짜 인간은 화면 속에서 밥을 먹으며 화면 밖의 진짜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드라마를 감상했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타고 있거나 자가용을 몰고 갈 때면 귀에 이어폰만 꽂고 자동 생성된 가짜 인간과 오디오로만 대화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했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은 ‘토탈 패키지’를 실행시켜 함께 공부하는 가짜 인간을 만들어 공부 도중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마다 화면 속 공부에 집중하는 가짜 인간을 보면서 다시금 기운을 차리곤 하였다. 특히 아이돌 가수 소속사들과 <토탈 이모션>이 사업 제휴를 맺은 뒤, ‘토탈 패키지’가 생성하는 가짜 인간에 현실 세계의 아이돌 스타들이 등장하면서, 해당 스타의 팬들은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슈퍼스타와 일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큰 인기를 끌었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토탈 이모션>의 주가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놀랍지도 않았으며, 순식간에 <토탈 이모션>은 대기업으로 거듭났다. 회사의 초기 직원이었던 여자와 남자는, 이 역시 당연하게도, 높은 수준의 안정된 급여로 풍족한 삶을 누렸다. 그리고 마침내 정식으로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남한의 미학 전공 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AI는 알고리즘이고, 따라서 창조성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AI가 예술을 할 수는 없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우리가 AI라고 부르는 것은 일련의 알고리즘 체계 그리고 그 체계의 작동이다. 작동할 수 있는 영역과 범주가 근본적으로 유한하다. 단지 그 유한한 범주가 워낙 방대하여 인간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수준이라, 편의상 이것을 무한 또는 무한에 가까운 것으로 정리했을 뿐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과 근본부터 어긋난다.

그러나 예술(art)의 개념을, 새로움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근대 예술(modern art)에서 살짝 물러나 살펴보면 어떨까.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측면, 비물질적이며 심정적 만족을 선사하는 기예(art)의 측면으로 접근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기예 자체는 새롭거나 신선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만족감을 선사하기 충분하므로 말이다. 맛있는 음식의 레시피는 정해져 있다. 요리사가 실수하지 않는 한, 재료에 이상이 없는 한, 레시피대로 조리과정을 거친다면 누가 만들든 요리의 질은 동일하다. 수학 공식에 입각한 연산이 아무리 복잡한들 계산하는 사람이 실수하지 않는 한 같은 답을 도출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기예로서의 예술은, 새로움과 창조성이 없더라도 충분히 우리들로 하여금 정서적 만족감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이른바 문화콘텐츠라 불리는 것들이 그러하다. 대중을 상대로 창조되는 문화콘텐츠는, 그것이 어떤 형식이고 장르이고를 넘어서, 일정 수준의 기예를 통해 의미 또는 재미 등의 내용물(contents)을 구현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심정적 만족감을 충분히 선사한다.

AI의 음악, 미술, 픽션 등은 그런 점에서 완전무결한 문화콘텐츠라 부를 만 하였다. 전위적인 예술 작품이 이지적인 실험에 함몰되어 심금을 자극하는 정서적 충족에 실패하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예술성을 외치는 인간 예술가들의 작품과 AI가 만든 확실한 만족감의 콘텐츠 중 대중들이 어느 쪽을 선호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분야에는 엘리트이지만 나머지 분야에는 순진한 반면, AI를 활용하는 쪽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철저히 단련되어 잇속에 밝은 기업들이었다. 예술가는 자연스레 소멸하였다. 사람들은 자판기에서 AI가 즉석으로 만든 회화를 프린트하였고, 자동 공정 시스템이 완비된 무인 악세사리 판매점에 들러 매장 내에 배치된 AI 탑재 3D프린터가 생산한 물건을 구매하였다. 물론, 항상 그 품질에 만족해하면서. 그런 시대가, 도래했다.

 

여자와 남자는, 그런 시대의 문을 연 선구자들이었다. 그 덕에 안락하게 나이를 먹으며 풍족한 삶을 누렸다. 영원히 이어지는 봄날마냥 평화롭고 오붓한 인생이었다.

여자의 마음 한 곳에서 그 봄의 균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나리오 쓰고 싶어.” 여자가 저녁을 먹다 말고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써 봤자 누가 받아주지도 않겠지. 내 시나리오가 상연되는 날은 영원히 없을 거야. 요새 누가 작가가 쓴 대본을 봐주겠어, AI가 만든 게 항상 돈을 벌어다 주는데. 걸작은 아니어도 항상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AI가 만들어주는데 말이야.” 여자는 한쪽 입 꼬리만 올리며 옅은 냉소를 지었다.

여자의 씁쓸한 표정을 읽고, 남자는 잠시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그래도 써보는 시도는 할 수 있잖아.” 남자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자신의 말이 궁색하게 들렸는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꼭 남들에게 알려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시나리오 쓰는 게 즐겁다면, 즐거운 일을 취미로 계속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테고.” 그리고 간신히 쥐어짜서 떠올린 말을, 그러나 말을 하는 남자 자신도 기대하지 않는 말을, 하였다. “혹시 모르지. 계속 쓰다보면 영화 기획사 쪽에서 계약하자고 나올, 훌륭한 작품이 될지도…….” 남자의 목소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작아졌다.

“자기 그런 말 하는 거, 아무 위로도 안 돼. 미안해, 고마워. 그치만 그런 말 들으면 난 오히려 힘이 빠지는 걸.” 낮게 깔린 여자의 목소리가 차갑고 건조했다.

“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자는 힐끔 남자를 한번 쳐다볼 뿐 대답을 이어 받진 않았다. 더 이상 남자의 목소리가 호수처럼 깊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세월에 녹슨 남자의 성대에서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한 폭의 그림 같던 이목구비도 시간이 새긴 자잘한 주름들에 서서히 바래지고 있었다.

“자기는 연주하고 싶은 마음 없어?”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색소폰을 분 게 언제였을까? 두 사람이 궁핍하던 시절, 열악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불확실한 미래조차 걱정하지 않던 시절, 그 시절 남자는 종종 여자가 앞에서 색소폰을 불어주곤 했다. 특히 투고한 시나리오가 탈락해 여자가 울적해진 날이면 더욱 정성껏. 하지만 삶이 풍족해지면서 색소폰을 불어줄 이유가 사라졌고, 어느새 남자는 색소폰에 대한 열정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혼자서 연주만 한다고 생각해봐. 자기도 알잖아. 감상해 줄 관객이 있어야 한다는 거. 관객도 없이 혼자 작업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는 거, 시간이 갈수록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알 거 아냐. 색소폰 연주가로 무대 위에 오르고 싶다는 꿈이 자기한테도 있었잖아.”여자의 말은 여전히 낮고 건조했지만 가슴 속에 응어리진 열기가 묻어있었다.

남자는,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과 사는 게 행복해진 후로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졌어.”

 


 

여자는 다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투고는커녕 완성조차 버거웠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AI가 만든 이야기보다 별로라는 생각에 상상 속에서 이미 검열이 일어났다. 가까스로 원고를 완성해도 제작사에 투고하기 무섭게 탈락 통보가 날아왔다. 여자는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남자는 여자의 변화를 어려워했다. 웃음이 사라진 여자의 얼굴, 식도염이며 위염이며 등등을 달고 통증에 시달리는 여자의 건강, 불면증이 만성화 된 여자의 일상, 야위어 가는 여자의 몸. 그 모든 것이 남자의 머리를 버겁게 하였고 그 모든 것이 남자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였다. 여자의 짜증은 점점 심해졌다. 고성을 지르는 경우가 잦아지더니, 결국에는 남자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때마다 서로 사과하곤 하였지만, 그렇다고 여자가 무너져가는 이 상황이 멈추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궁리 끝에 케이스 속에 잠들어 있던 색소폰을 다시 꺼냈다. 여자가 집에 없는 동안, 남자는 두어 번 정도 연습삼아 색소폰을 불어보았다. 형편없고 조악한 소리가 피식피식 튀어나왔다. 머리는 과거처럼 연주하라고 명령했지만, 늙은 손가락은 굳은 뼈마디를 머리가 명령하는 속도에 맞춰 움직이지 못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색소폰 소리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남자는 색소폰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이 연주하던 곡을 AI에게 연주해달라고 하면 어떨까 싶었다.

남자는, 여자가 AI의 색소폰 연주를 듣고 예전에 자신이 연주하던 모습과 숱한 추억들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안락해지길 희망했다. 하지만 남자는 희망에 너무 눈이 멀어, 원하는 결과와 반대 방향으로 상황이 펼쳐지면 어떻게 대처할지 따로 생각하지 못했다.

결과는 가혹했다. 정확히 원하는 결과와 반대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집에 돌아온 여자는 남자가 응원이랍시고 AI에게 색소폰 연주를 지시하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자신의 진심을 설명하는 동안 여자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의 울 듯 한 얼굴로 변하더니, 확 소리를 내지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뒤따라 가며 무어라 말을 이으려했으나 큰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방문 앞에 멈춰서야 했다.

남자가 소파에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동안, 여자는 방 안에 있는 침대에 누워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AI가 내는 색소폰 소리가 집 안의 공기 사이로 부드럽게 흘렀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여자는, 눈물로 젖은 베게에 얼굴을 대고 모로 누운 채 방금 전 상황을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남자에게 그렇게 반응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다. 남자의 행동은 여자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

문득 여자는 자신의 행동에 남자가 상심해 있을 거란 미안함을 느꼈다. 남자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과는 감정적인 힘이 많이 소모되는 행동이었고, 여자는 사과를 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자신의 미안한 마음과 가슴에 응어리진 우울감을 모두 토로하고 싶었지만 그것 자체가 버거운 일이었다. 망설임 끝에 여자는 스마트폰으로 남자에게 문자메시지를 전송했다. 여자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AI가 자동으로 생성한 문자메시지를.

얼마 후, 남자가 보낸 장문의 답신이 도착했다. 여자는, 남자가 보낸 메시지의 정갈하고 차분한 느낌, 그리고 자신을 향한 섬세한 위로에 따스함을 느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여니, 남자가 미소 지으며 여자를 향해 두 팔 벌려 가슴을 내보였다. 여자는 남자의 품에 몸을 기댔고, 두 사람의 팔이 서로의 몸을 감싸 안았다.

남자의 뺨과 여자의 뺨이 맞닿을 때, 여자는 문득 깨달았다. 남자가 아까 보낸 장문의 문자메시지도, 자신이 보낸 것처럼, AI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 뒤로도 여자와 남자는 다툼과 화해를 반복했다. 다툼은 두 사람이 직접 벌였고, 화해에는 항상 AI가 개입했다. 날카로운 말들로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AI가 만든 문자메시지로 흉터를 어루만졌다. 미안한 마음을 보여주고자 때때로 선물을 사 주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AI가 추천한 물건을 구매하는 일이었고, 함께 여행을 가더라도 그들이 여행 장소를 물색한 게 아니라 AI가 제시한 최적의 장소를 가는 식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점점 공허해졌고, 형태만 유치한 채 낙엽처럼 메말라, 한때 살아 숨 쉬던 생명체의 화석마냥 굳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화석이 되어가는 자신들의 사랑을, 두 사람은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오고가는 몸짓은 진심을 담았지만 모두 AI의 산물이었다.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들마저 AI가 제시한 가이드를 이행하는 것에 불과했다. 진심이 빚어낸 허상의 연쇄였다. 두 사람은 끝없이 이어지는 공허한 사슬의 반복과 반복 속에 지쳐버렸고, 마침내, 이혼에 합의하였다. 먼저 이혼을 말한 건 여자였다.

여자가 이혼을 언급했을 때, 남자는 생각했다. 여자가 이혼을 제안한 것은 여자의 마음이 내린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여자의 마음을 분석한 AI가 제안한 것일까? 남자는 그 답을 구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초췌한 몰골로 참호 밖을 기어나가며 백기를 흔드는 패잔병마냥 이혼 서류에 서명하였다.


 

홀몸이 되었지만 남자의 생활에 불편은 없었다. 집도 있고 돈도 충분하며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연금을 주었다. 단지 긴 시간을 함께 나눈 누군가가 떨어져 나가면서, 시간과 공간의 추억들이 잘려나가 생긴 마음 속의 텅 빈 공백 때문에, 이따금 아려오는 과거의 환부마냥 허무를 느꼈을 뿐. 그리고 그 허무가 모든 물질적 안락을 압도했을 뿐.

순순히 이혼에 합의한 게 실수였을까? 덧없는 질문이었다. 남자는 질문 대신 기억을 더듬었다. 시나리오를 쓰지 못해 눈물짓던 여자. 그 전에, 풍족한 생활에 편안해 하던 두 사람. 편안해지기 전에, 궁핍하던 시절 여자를 위해 색소폰을 연주하던 남자 자신.

남자의 기억 속에 불꽃처럼 무언가가 번쩍 일었다. 남자는 방치되어 있던 색소폰을 꺼냈다. 그리고 무작정 바깥으로 나갔다.

도심 한복판에서, 남자는 색소폰을 불었다. 얼마만의 버스킹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걸핏하면 음이 새었고, 얼마 불지도 않았는데 숨이 막혔다. 굳어버린 손가락이 원래의 박자를 따라잡지 못했다. 행인들은 과거에나 봤을 버스킹 광경에 신기한 듯 눈길을 주며 지나갔다. AI가 항상 완벽한 음악을 들려주는 시대에 직접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라니.

남자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집중했다. 비록 삐거덕거리는 마차마냥 남자의 연주는 느리고 더디며 거칠었지만, 손가락이 하나씩 움직이면서 천천히 선율을 이루기 시작했다. 투박하지만 점점 ‘음악’의 모습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맺혔다. 마침내 연주가 끝난 순간, 남자는 색소폰에서 입을 떼며 큰 숨을 내뱉었다. 손으로 땀방울을 쓸면서,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잘 들었어요.” 가던 길을 멈추고 아까부터 남자의 연주를 바라보던 젊은이가 말했다. 남자는 고맙다고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버스킹을 구경할 줄은 몰랐네요. 종종 이렇게 연주를 하시나봐요?”

그러자 남자가 손을 저었다. “젊었을 때 연주를 좀 했죠. 그때는 지금처럼 AI에게 음악을 듣는 시대가 아니었거든요.”

“어렸을 때 사람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봤던 게 기억나요. 그걸 오랜만에 다시 봤네요.”

“형편없죠?”

“아뇨, 아녜요. 저도 모르게 구경하게 되던 걸요.”

“나이를 먹더니 손이 많이 굳었어요. 좋게 들어줘서 고마워요. 내가 괜히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미안해지네요.”

“전혀요. 여기서 애인이랑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괜히 일찍 나오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남았거든요. 덕분에 시간 잘 떼운 셈이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로 하셨군요.” 남자의 목소리에 탄식이 스며있었지만 젊은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행복한 사랑 나누세요.”

“고맙습니다.” 젊은이가 웃었다.

언젠가, 남자가 여자와 만나기 시작하던 시절에 짓던, 그런 웃음이었다.

별안간 남자의 정신이 번쩍였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남자의 입 밖으로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해도 될까요? 그냥 합석만 하고, 나는 색소폰만 연주할 게요. 당신과 당신 애인의 자리에서 제가 연주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젊은이가 뜻밖의 상황에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을 짓자, 남자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제가 비용을 지불하겠습니다. 액수는 상관없습니다.”

남자는 젊은이와 젊은이의 애인이 보는 앞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다. 젊은이와 애인은 남자에게 연주도 들으면서 돈까지 받아 기분이 흡족했다.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고마워하자, 남자는 자신이야말로 연주를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답했다. 연주하는 동안 남자는, 음악을 함께 감상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저절로 남자 자신까지 기분이 좋아졌고, 그것은 여자와 한창 사랑에 빠져 있던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까지 일으켰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남자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이 아니라 감정에 잠겼다. 여자와 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의 감정에.

잠시 후, 남자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다음과 같이 글을 포스팅했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에게 색소폰을 연주해드립니다. 당연히 제가 돈을 지불하겠습니다. 원하는 금액과 세부 사항은 메신저로 문의해 주세요.」

돈을 줄 테니 당신들 앞에서 연주하게 해 달라는 공고에 많은 사람들이 문의해왔다. 남자에게 액수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남자는 매번 신청자에게 돈을 주고 색소폰을 불었다. 젊은 연인들 옆에서 연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나누던 과거의 체험이 되살아난 기분이었다.

얼마 후부터는 다른 경우들에도 돈을 주고 연주하였다. 병원을 찾아가 임종을 앞둔 환자 앞에서 연주할 때, 남자는 인생의 가치와 죽음의 엄숙함을 체험했다. 유치원 선생의 신청으로 어린 아이들 앞에서 연주할 때, 아이들의 파릇파릇한 기운을 느끼며 생동감을 체험했다. 길거리의 노숙자들에게 남자가 자진해서 돈을 주고 연주를 감상해달라고 한 적도 있었는데, 빈곤한 노숙자들이 자신의 연주에 잠시나마 평온해하는 걸 느끼면서, 남자는 나눔과 봉사의 가치를 체험했다.

남자는 재정적으로 안정된 사람이었고, 그래서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돈을 지불해가며 연주할 수 있었다. 색소폰을 불 때마다 남자는 다양한 감정들을 체험했고, 그 결과 남자는 점점 더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안정적이며 이해심과 공감의 폭이 깊은 사람으로 발전하였다. 돈을 주고 체험을 구매하여 정서적 여유와 풍족을 체험한 것이다.

 

그렇게, 감정적 체험이 시장을 통해 돈을 주고 교환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제 이 시대는 물질적 재화를 바탕으로 정서적 풍요까지 구매하는 시대다. 가령, 길거리 한복판에 누군가가 심장 발작으로 쓰러지면, 그 사람을 도와줄 자격은 오직 ‘긴급 상황에서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도와줄 경험을 미리 구매한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험을 구매하지 않은 사람이 도와주려고 행동하면 불법 행위로 처벌 받는다. 쓰러진 사람 바로 옆에 있다고 해도, 당신이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줄 경험’을 구매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경험을 구매한 사람들에게서 ‘경험을 훔친 것’에 해당하므로 절도죄가 성립한다. 경험을 판매한 사람이 이미 판매한 경험을 시도할 경우, 그것은 ‘사기죄’에 해당한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줄 경험’을 구매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응급조치를 취했다. 스스로 돈을 주고 구매한 만큼, 경험을 실천하는 능동성과 주체성이 매우 높았다. 선량한 경험을 자진해서 구매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봉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무사히 구출되면, ‘경험 구매자’들은 자신이 소중한 생명을 구해냈다는 보람과 자긍심 등, 풍부한 정서적 체험을 누렸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들이 축적되어, 그들은 감정적으로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타인에 대한 정서적 공감과 이해 그리고 배려의 마음이 깊은 인간으로 성숙해졌다.

반면 경험을 판매한 사람들은 돈을 받은 대신 판매한 경험을 누릴 수 없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체험의 폭이 좁아지면서 정서적으로 메말라갔다. 타인에 대한 공감의 수준도 따라서 낮아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경험을 미리 판매하였고, 경험 기회를 팔아버린 그들은 정서적 체험을 누릴 기회 자체가 박탈되었으며, 그 결과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타인에게 공감이나 감정이입 등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자신의 욕구에 함몰되는 인간으로 변모해갔다.

물질적 빈부는, 이제 공감과 연민의 빈부로 확장되었다.

나는 당연히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줄 경험’을 미리 판매한 지 오래되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감정적 경험들도 미리 팔았다. 나는 변변한 직업이 없다. 육체노동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며, 애초부터 육체노동의 많은 역할을 이미 기계들이 수행한지 오래였다. 정신노동을 하기에도 딱히 나는 특출 난 구석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은 AI도 충분히, 아니 나보다 더 잘 하기 때문에, 내가 정신노동을 할 수 있는 분야도 찾기 어렵다.

내가 가진 거라곤 ‘언젠가 미래에 겪을 경험들’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판매하며 먹고 산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요리해줄 경험, 잊고 지낸 친구에게 다시 연락을 시도할 경험, 아릅다운 반지들이 나란히 진열된 직사각형 유리 쇼케이스 앞에서 프로포즈 용 반지로 어느 걸 구매할지 고민을 할 경험 등, 경험이란 셀 수 없이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경험을 팔 때마다 느끼지만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이란 세부적으로 쪼개면 쪼갤수록 셀 수 없이 많구나 싶다. 나에게 경험을 구매한 부유한 사람들은 정서적으로도 부유한 사람들이 되리라.

그런데 나는 왜 그게 별로 부럽지 않은 걸까? 어쩌면 원래는 그들을 부러워해야 ‘정상’인데, 내가 워낙 경험들을 많이 팔아서, 직접 체험한 감정이 너무 부족한 탓에 정서적으로 퇴화된 탓일까? 그렇다면 나와 같은 처지의 빈곤한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정서적 퇴화를 겪고 있을까?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알 바 아니다. 휴대폰 하나만 있어도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여행은 못하지만 위성으로 촬영한 데이터가 증강현실 렌즈로 구현되니 진짜로 여행 나갈 필요도 없다. 굳이 돈을 써가며 진짜 경험을 체험해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럴 욕구를 느끼지 못하므로.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내 알 바 아니다. 관심 없다. 만나봤자 돈 밖에 더 들겠는가? 나를 계속 좋아하든가 그만두든가, 그건 그 사람 더러 알아서 하라지. 그래, 굳이 내가 직접 거절할 필요 없다. 상대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면 그만인 거다. 그래서 나는 조만간 ‘사랑을 거절할 경험’을 판매할 계획이다. 내가 생존하는 데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검토한 결과, 굳이 필요하진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랑을 나누든 사랑을 거절하든 헤어지든 그런 일체의 감정 경험이 나의 생존에 아무 필요가 없더란 것이다.

그런데 사랑을 거절할 경험은 공급량이 꽤 많은 편이다. 비싼 값에 팔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 경험을 비싼 값에 팔기를 포기하는 대신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대화할 경험’과 ‘사랑을 고백해오는 상대방에게 거절할 경험’으로, 대화와 거절을 나눠서 판매할 생각이다. 두 경험을 세트 상품으로 내놓을 거다. 아마 약간만 가격을 디시해주면 금방 팔리지 않을까?

나는 내가 겪을 미래의 감정들을 할인가에 판매하기로 했다.

두영

"I'm the one I should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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