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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푼크툼 게임(Punctum Game)

2019.10.25 16:0010.25

“내일 기각될 거야.” 식당 아줌마가 연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연희는 손님들이 남긴 반찬그릇을 쟁반 위에 옮기던 중이었다. “다들 속고 있는 거야.” 아줌마는 카카오톡으로 숨겨진 진실이 떠돌고 있다고 말했다. 연희는 마지못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아줌마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TV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반으로 나뉜 TV 화면 한쪽에서는 뉴스 앵커가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는 중이었고, 반대편 한쪽에서는 판사와 변호사간에 설전이 벌어지는 재판 현장의 모습이 보여 졌다. 화면 속의 변호사가 벌떡 일어나 태극기를 펼쳐보였다. 판결 D-1이라는 자막이 화면 귀퉁이에 걸려있었다. “연희는 착하니까 내가 일부러 가르쳐주는 거야. 혼자만 알고 있어.” 아줌마가 웃었다. “두고 봐, 내일 웃는 사람이 누가 될지.” 아줌마가 TV 앞에 앉아 뉴스를 보는 식당 사장 내외 쪽으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바보들.” 식당 아줌마가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중얼거렸다. TV 속 뉴스 화면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광화문 광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기 김치찌개 멀었어요?” 아저씨 한분이 밑반찬으로 나온 콩나물을 젓가락으로 휘적거리다 볼멘소리를 내었다.

“아이고, 금방 나가요.” 사장 부인이 그렇게 외치며 일어났다. 부인은 부엌으로 종종 걸으며 아줌마의 뒤통수에 눈을 흘겼다. 아마도 손님은 아줌마에게 김치찌개를 주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줌마는 이를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아줌마의 실수는 잊을만하면 반복되었다. 사장은 이런 식의 실수가 생길 때마다 아줌마를 따로 불러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아줌마는 당황하는 기색도 반성하는 기색도 없었다.

다음날,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아줌마가 카운터 옆에 놓인 정수기로 다가갔다. 아줌마는 믹스 커피 스틱의 끄트머리를 뜯고 내용물을 종이컵에 쏟아 부은 뒤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스틱 비닐로 커피를 휘휘 저으며 TV를 바라보았다. TV에는 파면된 대통령의 예전 기자회견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나오고 있었다. 연희는 슬그머니 아줌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아줌마가 TV를 보며 우는 건 아닐까 상상하면서. 그러나 아줌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거렸다. 입가에 파인 팔자주름과 삐죽 나온 아랫입술, 조금 수그러진 어깨가 평소보다 도드라져 보일 뿐. 화면을 바라보는 힘없는 눈. 그 눈은 어쩐지 연희로 하여금 남자 친구 두영을 떠올리게 하였다.

 

두영이 일하는 PC방은 지금껏 안 망하고 버틴 게 신기한 곳이었다. 요즘 신설 PC방들이 알록달록한 조명으로 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24시간 공기청정기를 돌리며 깨끗한 느낌을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담배 냄새가 자욱했으며 천장과 바닥 그리고 벽면에 깔린 타일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우중충한 느낌이 역력했다. 연희가 두영이 일하는 PC방에 온 건 과제용 리포트 때문이었다. 함께 점심을 먹던 중, 연희가 컴퓨터가 없어서 아무 PC방이나 가서 레포트를 써야겠다고 말하자 두영이 자기가 일하는 PC방에 와서 공짜로 하고 가라 일러주었다.

“오빠, 여긴 PC방치곤 조용하다.” 연희는 담배 냄새가 거슬리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여기 오는 손님들, 다 나이 잡순 어른들이야. 그래서 조용해. 애들이 안 오니까. 조용한 거 하나는 좋은 데지. 근데 누가 어르신들 아니랄까봐, 담뱃재 엄청 날려. 그거 청소하느라 귀찮은 게 흠이랄까.” 두영이 카운터 의자에 다리를 꼬아 앉은 자세로 발목을 까딱거렸다.

두영은 연희더러 손님들 사이에서 담배 냄새 맡을 게 아니라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쓰는 편이 나을 거라며 자기 자리 옆에 의자 하나를 가져왔다. 연희가 두영이 가져온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서 손님들 쪽을 바라보니, 죄다 마흔 줄은 되어 보이는 아저씨들 투성이였다. 머리가 희끗한 분들, 뒤통수가 휑한 분들이 간간이 보였다. 가장 젊어 보이는 남자조차 최소한 서른은 넘어보였다. 드문드문 아주머니들도 눈에 띠었다. 그리고 다들 하나 같이 담배를 입에 물거나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연희야, 잠깐 카운터 좀 봐 주라. 나 저 쪽에서 담배 하나만 피우고 올게. 화면에 나온 요금대로 불러주기만 하면 손님들이 알아서 돈 줄 거야. 다른 건 신경쓸 필요 없고 거스름돈만 제대로 맞추면 돼.” 두영이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PC방 금연 아니야?” 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법으로는 그렇지. 여긴 아니야. 다들 대놓고 피워.”

“못 피우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PC방을 먹여 살리는 게 저 사람들야. 담배 피우지 말란 소리를 어떻게 하겠어?” 두영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두영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이 PC방이 지금까지 안 망하고 버틴 역사를 장대한 신화마냥 들려주었다. 연희는 두영이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 때마다, 연희는 그런 두영의 모습을 볼 때마다 문명사회의 개입으로 서서히 바래지는 전통 설화를 들려주며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하고자 열과 성을 다하는 어느 쇠락한 부족의 샤먼 같다고 느꼈다.

두영의 이야기에 따르면, 박 사장의 PC방도 한때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매니저 두 명에 알바생 네 명을 고용하고도 이윤이 남았다. PC방을 차리는 게 치킨집을 차리는 것만큼 유행이어서, 근처에도 다른 PC방 세 곳이 더 있었다. 한 동네를 두고 같은 골목에 PC방이 넷이나 있었지만 업계가 워낙 호황이라 다들 수입에 지장은 없었다. 문제는 게임 회사들이 PC방 업주들에게 자사 게임의 이용 요금을 부과하면서 시작됐다. 게임 회사에 수수료를 떼어주자 수입이 반 토막 났고, 전국 PC방들이 죽는 소리를 앓았다. 박 사장과 인근 PC방들도 마찬가지였으며, 한 곳은 앓는 소리를 제대로 내기도 전에 망해버렸다. 박 사장은 남은 PC방끼리 경쟁이 생길 거라 직감했다. 과연 살아남은 PC방 두 곳 중 한 곳이 1시간당 요금을 500원으로 내렸다. 얼마 후, 나머지 한 곳도 500원으로 가격을 내렸다. 박 사장이 보기엔 미친 짓이었다. 박 사장은 손님 수가 줄어드는 걸 감수하며 1000원 요금을 고수했다. 1년 뒤, 500원으로 경쟁이 붙은 두 PC방은 문을 닫았고 박 사장 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것뿐이었다. 이미 손님들, 특히 아이들은, 건너편 동네의 최신식 프랜차이즈 PC방으로 떠나버린 후였다. 소규모 동네 매장에 불과한 박 사장의 PC방이 프랜차이즈 PC방과 경쟁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박 사장은 지출을 줄였다. 매니저 하나만 남기고 전부 잘랐다. 박 사장은 매니저 하나만 데리고 둘이서 12시간 맞교대로 근무를 섰다. 그나마 두영이 알바생으로 채용되면서 3교대 근무가 가능해졌다. 아이들이 사라진 PC방. 이제 그곳을 들락거리는 건, 개점 초기부터 얼굴을 비춘 동네 단골손님들뿐이었다. 그들은 박 사장의 PC방이 좋아서가 아니라 익숙해서 오는 거였다.

박 사장은 수입을 단골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달리 그들은 구매력이 높아 새로 들어온 라면이나 음료 등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박 사장은 단골들에게 식료품을 최대한 많이 파는 쪽으로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 딱히 형편이 나아진 건 아니지만 망하는 건 면하는 수준으로 수입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건물주가 박 사장의 PC방을 없앨 생각이 별로 없었다. 건물주는 박 사장의 PC방에 자주 놀러왔는데, 이 PC방은 그에게 개인 오락실이나 다름없었다. 요금을 하나도 안 냈다는 뜻이다. 대신 박 사장이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하여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 주었다. 두영은 이상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박 사장의 선택은 현재를 지켰으나 미래를 잃었다고. 아이들이 사라진 PC방에는 나이든 자들뿐이라고.

“현재를 지켰으나 미래를 잃었다, 좀 그럴싸하지 않았어?” 두영이 눈썹을 쫑긋거렸다. 연희는 마지못해 호응해주는 티를 일부러 내며 기계적인 박수를 쳐주었다. “알았어, 담배 피우고 올게.” 두영은 무안해진 입술을 쩝쩝거리며 담배를 꼬나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희는 방금 전까지 두영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두영이 쓰던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모니터가 두 대였다. 왼쪽 모니터는 매장 상황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이 실행 중이었다. 손님들이 앉은 위치, 좌석별 컴퓨터가 실행 중인 프로그램 리스트 등이 화면에 나와 있었다. 오른쪽 모니터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화면이었다. 하단에는 시작 표시줄이 깔려 있었고 바탕화면 위로는 프로그램 아이콘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연희가 모르는 프로그램 하나가 실행 중이었는데, 언뜻 보아 게임 같았다.

“이거 게임이야?” 연희가 방금 막 담배를 다 피우고 돌아온 두영에게 물었다.

“내가 만든 게임.” 두영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빠 게임 만들 줄 알아?”

“약간.”

“뭐하는 게임인데?”

“대통령 선거.”

두영이 중학생인 시절, 사업가가 대통령이 되었다. 두영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두영은 어른이 되어 선거할 때면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이 당선될 거라 믿었다. 몇 년 후 두영은 대학생이 되었고,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장군의 딸과 인권변호사 두 사람의 대결이었다. 두영은 인권변호사에게 투표했다. 그리고, 장군의 딸이 당선되었다.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개표 방송을 보던 두영은 장군의 딸이 당선 확정 되었다는 발표에 잠시 말문을 잃었다가 어느새부턴가 소주를 마셨다. 고작 투표용지에 도장 찍는 일로 패잔병의 심정이 이런 걸까 생각하며.

“한번 해 볼래?” 두영의 물음에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을 실행하자 화면에 대한민국 지도가 펼쳐졌다. 작은 창이 하나 열리더니, 어느 후보를 지지할 건지 결정하라는 선택지가 떴다. “너는 이제 네가 선택하는 후보 측 캠프의 본부장이 될 거야.” 두영이 말했다. “후보자를 코치하는 거, 언론이랑 컨택하는 거, 재벌이랑 협상하는 거, 여론전 전략 짜는 거, 다 네가 선택하는 거야. 네가 하는 선택에 따라서 게임의 시나리오가 바뀌어. 돌발적인 변수까지 포함하면 이론상 수천 개의 시나리오가 가능해.”

연희는 수두룩한 정치인들의 얼굴 사진을 보며 새삼 우리나라에 정치하는 사람 참 많구나 싶었다. 잠시 고민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골랐다. 화면에 떠 있던 지도가 옆으로 살짝 밀려나더니,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의 사진과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연희가 선택한 정치인도 있었다. 연희가 그의 얼굴 사진을 클릭하자, 새로운 창이 열리면서 현재 그가 국민들에게 받고 있는 지지율, 소속 정당, 이력사항, 우호적 관계의 정치인과 적대적 관계의 정치인 리스트, 특기 분야, 능력상의 강점과 약점 등이 출력되었다.

“오빠 이 사람들 다 조사했어?”

“중요하다 싶은 사람들 일일이 검색했어. 시간 꽤나 잡아먹었지. 그리고 정치인은 아니어도 자주 언급되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도 입력해놨어.”

연희가 지지한 후보는 당내경선에서 조기 탈락했다. 애초부터 인지도가 낮은 사람이었다. 연희는 이대로 게임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탈락이 결정되자, 당내에서 유력한 대선 후보로 일컬어지는 국회의원이 연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네 캠프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연희는 두영을 쳐다보며 제법 그럴싸하다는 의미로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요청을 받아주면 그 후보 캠프의 본부장이 되어서 게임을 계속하는 거고, 거부하면 이대로 게임이 끝나.” 연희는 요청을 수락했다. 유명한 후보라서 그런지 토론회를 거칠 때마다 지지율 그래프가 올라갔다. 마침내 그가 당내 경선에 승리,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잠시 후, 연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정치권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언론인’이 경쟁 정당의 대권 주자로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이 사람이 대통령 선거를 나간다고?” 연희가 헛웃음을 짧게 뱉었다. 두영이 팔짱을 끼우고 낄낄거렸다. 이제 연희는 국민적으로 신뢰 받는 언론인을 적으로 상대해야 했다. 언론인은 탁월한 언변과 토론 솜씨로 연희의 후보를 공격했다. 설상가상 연희의 후보가 시장에서 유세하던 중 과로로 쓰러지자 상대 정당에서 건강 이상설을 퍼트렸다. 언론인은 당내 거물급 인사인 ‘장군의 딸’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다. 그러자 언론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이 급격히 치솟았다. 연희는 전직대통령의 친구인 ‘인권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는 자신이 정치에 관여할 그릇이 못 된다며 거절로 일관했다. 결국 언론인이 연희의 후보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당선되었다. 게임 오버. 연희가 두 손을 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게임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해?” 두영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불가능이 없다는 거야.” 마우스 커서가 인권변호사의 얼굴을 클릭하였다. 두영은 연희에게 게임의 매력이란 무한에 가까운 자유도에 있다고 말했다. 어떤 장르도 게임의 자유도는 따라잡을 수 없으며, 영화는 게임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잠시 후,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기업가 겸 교수’가 인권변호사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두 사람이 ‘아름다운 단일화’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두영이 마우스를 몇 번 더 클릭하자 선거가 시작되었다. 인권변호사가 당선되었다.

두영은 조용히 화면을 응시하였다. 대통령에 등극한 인권변호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너머 어딘가 다른 것을 응시하는 듯한, 그런 눈으로. 연희는 문득 두영이 눈앞의 화면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렇게 느꼈다.

“연희야, 과제나 하자. 내용이 뭐야? 도와줄게.” 두영이 목소리에 일부러 힘을 실어 애써 쾌활한 모습을 꾸미는 것 같다고, 연희는 생각했다.

“이거야, 빨간 색으로 별표 친 거.” 연희가 노트를 펼쳤다.

“‘디지털 매체에 푼크툼이 성립할 수 있는지 논하시오.’ 푼크툼? 롤랑 바르트?” 두영이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영이 핏, 하고 입술 사이로 야트막히 웃는 소리를 흘렸다. “그거 불가능해.”

“성립할 수 없다?”

“응.”

“왜?”

“그건 말이야.”

“응.”

“담배 피우고.”

“끊어 좀.”

두영이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연희는 노트에 필기한 것들을 다시 살폈다. 푼크툼, 스투디움, 사진, 피사체……. 연희는 그것들을 살피다가 작성하다 만 레포트 파일을 프린트 하여 찬찬히 읽어보았다.

 

「…롤랑 바르트는 짐을 정리하던 중 수십 년 전에 찍은 가족사진을 보았고, 그 속에서 이미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이미 돌아가신 분임을 알고 있기에 바르트는 슬퍼하지 않았으나, 알 수 없는 아련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는 자신이 느낀 아련함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였고, 그리하여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푼크툼은 스투디움과 대립된다. 스투디움이 사진의 설계된 목적이라면, 푼크툼은 개인이 사진을 대하며 주관적으로 느낀 의미이다. 바르트의 사례에 적용하자면, 가족사진은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스투디움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사진에서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에 대한 아련함은 가족사진의 목적인 가족의 모습을 간직함을 위배한다. 푼크툼이 스투디움을 뒤덮어 사진의 의미를 바꾼 셈이다. 하지만 푼크툼을 스투디움과 연계시켜 이해하는 방식으로만 접근하면 놓치는 지점이 발생한다. 바르트가 느꼈던 아련함이다. 푼크툼에 대한 논의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는 정작 바르트가 푼크툼을 제시하게 된 계기 즉 아련함을 놓치곤 한다는 점이다…」

 

연희가 아예 다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게 나을까 생각하던 찰나, 아주머니 한 분이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종이컵 다 떨어졌어요.”

“네, 네?”

“종이컵 다 떨어졌다고요.” 아주머니는 연희가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종이컵이요? 종이컵…….” 연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방금 막 담배를 다 피운 두영이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종이컵 떨어졌죠? 지금 바로 채워놓을게요. 제가 커피 하나 뽑아서 가져다 드릴게요.” 두영이 그렇게 말하며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는 김에 드라마 좀 다운 받아줘요.” 아주머니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창고 안으로 사라지는 두영 쪽에 대고 말했다. 창고 안에서 네에, 하고 외치는 두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영은 자판기를 열어 종이컵을 채운 다음 커피 한잔을 뽑아들고 아주머니 손에 넘겨주고, 직접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며 웹하드 사이트를 통해 일주일 동안 방송된 드라마들을 다운로드하였다. 아주머니는 두영이 받아준 드라마 파일을 재생시켰고, 그 사이 두영은 카운터로 돌아와 연희 옆에 앉았다.

“종이컵 때문인 거 어떻게 바로 알았어?” 연희가 물었다.

“저 아줌마 맨날 하는 말이 ‘종이컵 떨어졌어요’거든. 저 분, 커피를 엄청 먹어. 저거 보여?” 두영이 아주머니 쪽을 가리켰다. 아주머니 자리에 커피가 비워진 종이컵이 한 줄로 겹쳐 세워져 있었다.

“저렇게 먹으면 배 안 아프나?” 연희가 입을 벌리며 놀라했다.

“화장실을 자주 가긴 하더라. 저 커피아줌마 되게 귀찮아. 아까 나보고 드라마 받아달라고 했잖아. 근데 드라마만 받아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영화 제목 말하면서 막무가내로 받아달라고 할 때도 많아. 저번에는 어땠는지 알아? 다짜고짜 자기 휴대폰 벨소리 바꾸고 싶은데 음악을 어떻게 넣어야하는지 모르니까 나보고 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해줬어?”

“어떡해, 해드려야지. 저 아줌마 컴퓨터 하나도 몰라. 한번은 고스톱 게임이 안 된다면서 나보고 고쳐달라는데, 알고보니까 게임 회사가 서버를 점검하는 중이라 임시로 게임을 막아놓은 거였어. ‘지금 서버가 점검 중이라 게임이 안 되네요’하고 설명을 해줬지. 근데 뭔 소리인지 이해를 못해. ‘아무튼 알았으니까 빨리 고쳐줘요’ 이러는 거야. 나보고 ‘이거 하나 못 고치면서 어디 가서 PC방 알바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래. 아니 PC방 알바가 무슨 벼슬인가? 어쩌겠어. 불쌍한 사람 하나 도와주는 셈 쳐야지.”

연희는 생각했다. 저 ‘커피아줌마’는 이곳이 아니면 갈 수 있는 PC방이 없겠다고. 두영 오빠처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고. 그 커피아줌마가 1년 뒤 같은 식당에서 함께 일할 ‘식당아줌마’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줌마는 TV에 대통령이 나오기만 해도 흐뭇하게 웃었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는 저분이 화면에 나오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요’ 라고 말하곤 했다. 아무도 말을 받아주지 않으면 꼭 누구라도 동의하는 대답을 해달라는 듯 ‘저는 저 분이 참 좋아요’ 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부인은 끝까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고, 사장은 듣다듣다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더는 못 들어주겠다 싶었는지 ‘어디가 그리 좋은데요’ 하고 이따금 말을 붙였다. 정작 아줌마는 그때마다 ‘아니 그냥 부모님 생각도 나고 옛날 생각도 나고, 그냥요’ 라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래놓고 대화가 끝났다 싶으면 꼭 반 박자씩 뒤늦게 ‘아무튼 저는 저 분이 좋아요’ 하고 배시시 웃었다. 사장이 대통령의 행보에 문제가 있다고 중얼거리면, 아줌마는 사장이 말하는 내내 입술을 빼죽 내밀고 가만히 있다가 사장이 말을 그친 뒤에야 ‘아무튼 저는 저분이 좋아요’ 라고 토를 달았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 가결된 후, 사장 내외와 아줌마의 반목은 연희가 보기에도 노골적이었다. 아줌마가 테이블을 행주로 닦으며 대통령한테 무슨 죄가 있냐고 투덜거리면, 사장이 대통령이 저런 짓을 했으니 잘못인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줌마는 목소리를 낮추며 ‘아닌데…’ 라고 구시렁거렸다. “아니 아줌마, 그럼 내 말이 틀렸어요?” 사장이 따져 물으면, 아줌마는 ‘아뇨’ 하고 이미 닦은 테이블을 계속 닦으면서 사장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래놓곤 잠잠해진다 싶으면 ‘그래도 아닌데…’ 하고 버젓이 들리도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통령이 뭘 잘못했다니?” 한번은 연희가 아줌마에게, 대통령의 혐의와 근거들을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잠자코 듣던 아줌마는 연희가 말을 끝내자 아무런 대답 없이 아랫입술만 삐죽 내민 채 부엌으로 들어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설거지를 하였다. 물속에 잠긴 그릇끼리 쩔그렁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그래도 대통령인데…’ 라고 구시렁대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연희의 귀에 들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연희는 아줌마가 대통령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대답 없이 웃어주기로 일관했다.

결국 대통령이 파면된 후, 아줌마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TV를 외면했다. 깨끗한 테이블을 괜히 닦는 척했고, 먼지도 없는 바닥을 빗자루 질 했다. 그리고 정수기 앞에 놓인 믹스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던 아줌마는 이제 TV를 등지며 커피를 마셨다.

“손님들 마시라고 놓아둔 걸 저 혼자 다 파먹네.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야. 그렇지 않니?” 사장 부인이 연희에게 아줌마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불평을 늘어놓았다. “일이나 열심히 하면 또 몰라. 청소도 대충, 요리도 대충, 설거지도 대충. 일을 못하면 염치라도 있어야지. 어쩜 저리 밉상인지 모르겠다.” 연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네, 그렇죠’ 하며 떨떠름한 미소로 호응하는 것뿐이었다.

“여기 삼치구이 멀었어요?” 손님이 짜증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고, 금방 나가요.” 부인이 급히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아줌마가 또 주문을 깜빡한 것이다. 부인이 급하게 삼치를 굽는 동안, 식당으로 돌아온 아줌마는 정수기 옆 마루턱에 앉아 커피 스틱을 뜯고 있었다. 부인이 손님에게 삼치를 내놓으며 아줌마를 향해 눈을 흘겼지만, 아줌마는 커피를 홀짝이느라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저 이 계속 못 두겠어. 가게 말아먹게 생겼다고.” 하루는 사장 부인이 아줌마가 없는 자리에서 사장에게 작심하고 말했다.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손님이 음식에서 쉰내가 난다고 항의하였다. 아줌마가 만든 반찬이었다. 연희가 맡기에도 냄새가 심했다. 재료가 상한 것 같았다.

“난 몰라. 그냥 있는 재료 가지고 만들었어. 아무튼 몰라.” 아줌마는 모르쇠로 나왔다. 사장은 연신 죄송하다며 손님에게 허리를 숙였고, 부인은 부랴부랴 상한 재료가 더 있는지 냉장고를 살폈다. 연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처한 표정으로 서있기만 했다. 점심과 저녁의 중간 때라 다른 손님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손님들이 바글거렸을 점심이나 저녁시간이었으면 난리 났을 일이었다. 정황상 아줌마가 냉장고 문을 똑바로 닫지 않아서 재료가 상한 게 분명했다. “난 몰라.” 아줌마는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죄송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그러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아줌마에게 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던 부인의 입장에선 아줌마를 쫓아내자고 얘기하는 게 당연했다.

“어쩔 수 없어. 손님이 식중독 걸렸다고 소문 한번 퍼지면 그 식당은 그냥 문 닫는 거야.” 부인이 연희에게 말했다. “원래 우리도 이렇게 사람 막 자르고 그러진 않아. 저 이는 너무 심해. 재료가 죄다 상했더라. 싹 다 버렸다. 그러고 다니니까 가는 식당마다 쫓겨나지.” 부인은 연희에게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주었다. 아줌마는 예전부터 식당 하는 사람들 사이에 좋지 않은 평판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을 시키면 일을 만들어오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일하는 곳마다 쫓겨났다. 아줌마는 그래도 가족들을 위해 이혼한 남편 몫까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며 계속해서 일할 식당을 찾아다녔다. 이 일대에 아줌마가 일해보지 않은 식당이 없었다. 즉, 쫓겨나지 않은 식당이 없었다. 그러다 일손을 구하던 사장 내외가 불쌍한 사람 도와주는 셈치고 아줌마를 고용했는데, 결국 이렇게 사고가 난 거였다.

연희가 빗자루 질을 하는 동안, 사장이 아줌마를 불러 무언가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사장과 대화를 마친 아줌마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러나 평소보다 약간 느릿하게, 정수기 앞에 다가가 믹스 커피를 탔다. 연희가 슬쩍 아줌마의 동태를 살피니, 커피를 마시는 아줌마의 얼굴이 사약을 받아먹는 죄인의 얼굴 같았다. 다음 날 아줌마의 얼굴은 어딘가 침통해 보였다. 그 다음 날은 더 침통해 보였고, 그 다음 날은 더욱 침통해 보였다. 아줌마는 점점 더 커피를 마셨고, 누가 불러도 마지못해 움직이는 양 느릿느릿 반응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나타나지 않았다.

 

탄핵 집회 기간 동안, 두영은 점점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한번은 연희와 둘이서, 두어 번 정도는 친구들과,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두영은 매주 광화문으로 나갔다. 물러가라고 물러가라고 소리 질렀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보면 속이 시원하다며, 탄핵 안 당해도 되니까 지금처럼 주말마다 실컷 소리나 지르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놓고 대통령이 파면되자 제일 신나했다.

어느 날 두영은 연희에게 인디게임 콘테스트에 게임을 내 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상금이 제법 쏠쏠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입상작들은 콘테스트를 주관하는 게임회사와 정식으로 출품 계약을 맺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무슨 게임을 내려고?”

“당연히 저번에 만든 선거 게임이지.”

두영은 예전에 만든 선거 게임을 최근 정치 상황에 맞춰 수정했다. 새로운 정치인들을 추가하였고, 위상이 달라진 정치인들은 그에 걸맞게 편집하였다. 게임을 손보는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는 두영의 눈은, 예전에 가상으로 당선된 인권변호사 얼굴을 바라보던 그 눈이 아니었다. 두영의 대통령 선거 게임은 1차 예심을 통과했다. 1차 예심 통과작들은 콘테스트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개되었다. 두영의 게임에 사람들 반응이 제법 괜찮았다. 가능성을 확인한 두영은 아예 이쪽 업계에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학과사무실에 졸업을 신청한 다음, 박 사장에게는 이번 달을 끝으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전했다.

두영이 PC방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 연희는 두영을 보러 PC방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식당 아줌마와 마주쳤다. 입가에 파인 팔자주름과 삐죽 나온 아랫입술, 게다가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 아줌마와 연희는 서로를 알아보았다. 친하지도 않을지언정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날 때 으레 그렇듯 두 사람의 얼굴이 예의상 웃는 표정을 지었다.

“잘 지내세요?”

“응, 그냥.”

연희는 아줌마에게 다른 곳에서 일은 하고 계시느냐 물으려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목소리며 눈동자며 힘이 축축 빠진 느낌이라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저기, 게임 괜찮은 거 있으면 하나 가르쳐줘요.” 아줌마가 두영에게 말했다.

“갑자기 게임을 찾으세요?” 두영은 속으로 이젠 게임까지 나한테 찾는구나 싶었다.

“고스톱도 지겹고 포커도 많이 했고 지뢰찾기니 카드놀이니 이런 건 수백 번도 더 했고, 다른 거 아는 게임 있으면 얘기 좀 해줘요.”

“글쎄요, 게임 종류가 워낙 많아서……. 이번 주 드라마 보셨어요? 다운 받아 드릴까요?”

“아휴, 드라마 다 봤어요. 영화도 저번에 다운받아준 거 다 봤고. 그러지 말고 게임 하나 가르쳐 달라니까.”

“그게 저,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이게 참…….” 두영의 웃는 낯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빠가 만든 게임은 어때?” 연희가 말했다. 딱히 깊게 생각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다. 적당한 게임 하나 얼른 알려드리고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먼저 두영이 만든 게임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거 재밌어요?” 아줌마가 물었다.

“아 그게, 좀 복잡한 게임이라 하시기에 어려울 수도 있을 텐데…” 두영이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내 자리에 깔아줘요.” 아줌마는 그렇게 말하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훽 돌아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두영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한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두영은 아줌마 자리로 가서 대통령 선거 게임을 설치해주었다.

“마지막 날까지 귀찮게 하네.” 카운터로 돌아온 두영이 연희에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아줌마도 카운터로 돌아왔다.

“게임이 어려워서 그러는데 조금만 도와줘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두영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면서 차마 뭐라고 말은 못한 채 애써 웃는 표정으로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연희가 일어났다.

아줌마는 연희와 두영을 번갈아 쳐다본 다음 자리로 돌아갔다. 연희는 아줌마의 뒤를 졸졸 따랐다. 중간에 두영을 한 번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줌마는 구 여당 소속의 검사 출신 도지사를 선택했다. 연희가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면 된다는 거지?” 아줌마가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줌마가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고 말하면, 시키는 대로 결과가 나오게끔 연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식이었다. 구 여당은 전임대통령의 파면 이후 전국적으로 신뢰도가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검사 출신 도지사는 언변 능력은 탁월했지만 호전성이 높아서 인간관계 점수가 상당히 낮았다. 우호적 정치인 명단에는 아무 이름도 없는데, 적대적 정치인 명단에는 다양한 정당 소속의 여러 이름들이 수두룩했다. 이래가지곤 대통령 선거는커녕 당내경선도 못 버틸 수준이었다. 연희는 우선 당내경선 경쟁자들을 하나씩 포섭해나갔다. 아줌마는 연희가 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도지사가 당내경선에서 승리하였다.

“이제 대선후보가 된 거예요.” 연희가 말했다. “제가 했던 거처럼 하시면 되요.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면, 게임에서 이기는 거고요.” 아줌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줌마가 말했다. “미안한데, 나 좀 계속 도와주면 안 될까?”

도지사는 공격적인 언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차츰차츰 지지율이 올라갔다. 젊은 시절 성범죄를 모의한 일화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한 차례 위기를 맞이했으나, 겸손한 자세로 사과하는 모습과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건한 모습을 적절히 보여준 결과 지지율이 오히려 올라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뉴스 속보가 보도되었다. 구속 수사를 받던 전 대통령이 강압적인 수사 끝에 병환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국민들 사이에 동정론이 발생하였다. 도지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지사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공개되었다. 국가의 안정과 분열된 국론이 통합되길 원하는 목소리들이 도지사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대선 후보로 기업가 겸 교수가 자신의 경쟁자에게, 즉 서거한 대통령의 친구이자 인권변호사에게, 지지의 뜻을 밝히며 후보 단일화를 선언하였다. 도지사의 당선을 저지한다는 명분이었다. 기업가 겸 교수가 단일화에 협조해준 덕에 인권변호사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이제 상황은 도지사와 인권변호사의 양강 구도로 고착되었다.

잠시 후 대형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의 탄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국민적으로 신뢰를 받던 언론인이 알고 보니 특정 세력에게 사주를 받고 그들의 지시대로 행동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여론은 언론인의 배후 세력이 누구였느냐에 촉각을 모았다. 언론인은 긴급 체포되었다. 얼마 후, 언론인을 사주한 배후 세력이 사실은 유력 대선 후보 중 한 사람이며 심지어 그의 진짜 정체는 간첩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간첩 후보와 언론인이 밀회하여 나눈 대화를 녹음했다는 녹취록까지 등장했다. 도지사는 나라가 패망할 지경에 이르렀다며 읍소하였고 인권변호사는 모략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선거일이 다가왔고, 투표가 시작되었다.

언론인이 배후 세력과 결탁했다는 소식에서 아줌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력 후보 중에 간첩이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순간 아줌마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개표가 끝났다. 검사 출신 도지사가 박빙의 승부 끝에 당선되었다.

 

박 사장의 PC방이 문을 닫았다. 매장 내 흡연으로 벌금과 더불어 영업정지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박 사장을 쫓아낸 다음 재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건물을 두 층 높이는 증축공사였는데, 원룸으로 내놓아 대학생들을 상대로 월세를 받을 요량이었다.

연희가 새로운 자취방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소에 들렀을 때, 바깥에는 공사하는 소리로 한창 시끄러웠다. 중개사가 지금 처리 중인 일만 얼른 끝내고 매물을 보러 가자면서 연희더러 소파에 편히 앉으시라 손짓했다. 소파에 앉은 연희 앞으로 중개사가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 한 잔을 건넸다. 중개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서류 몇 장을 살피면서, 마침 좋은 매물이 들어왔는데 타이밍 좋게 오셨다고, 연희 쪽에 대고 말했다. 연희는 어색하게 웃는 선에서 그러하냐고 적당히 응대만 했다. 중개사가 말하는 좋은 매물이 중개사에게 좋다는 말일지 연희에게 좋다는 말일지는 가 봐야 아는 노릇이니까.

두꺼운 반투명 유리문 너머로 공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굴삭기의 엔진 소리와 낡은 건물을 허물고 잔해를 퍼내느라 움직이며 내는 소리, 그라인더로 철근이나 형강 등을 갈아내는 소리, 부수고 자르며 없애는 소리가 골목 가득 울렸다. 드릴이 아스팔트를 파고드는 진동이 지면을 타고 연희가 앉은 소파까지 닿았다. 몇 년 째 학교 근처에서 자취 하는 입장이라 이제는 익숙할 법 하지만 연희는 공사 소리가 버거웠다. 건너편 골목도, 그 맞은편 골목도, 그 맞은편의 건너편 골목도, 재건축 공사 소리가 즐비했다. 원래 있던 무언가를 밀어내고 새로이 세우는 소리들. 연희가 새로 거주할 곳도 그 소리 속에 지어진 건물일 것이다. 연희의 코끝으로 믹스 커피의 달달한 향기가 눅눅히 스몄다. 문득 연희의 머릿속에, 아줌마를 마지막으로 본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아줌마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모니터에 도지사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줌마는 한동안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왔다.

두 잔이었다.

고마워.” 아줌마가 잔 하나를 연희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함께 커피를 홀짝거렸다. 게임 잘 만들었네. 아줌마가 말했다. 모니터에 도지사가 당선된 게임 화면이 그대로 있었다. 어쩌면 말이야. 아줌마가 연희를 바라보았다. 이 게임 내용 있잖아, 진짜일 수도 있겠지? 연희는 이번에도 억지로 웃으려 했다. 가슴이 먹먹해서, 웃을 수가 없었다.

두영

"I'm the one I should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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