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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구원자 - 3.도래

2019.09.05 22:3209.05

-도래- 


 

공원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정자에서 효진이 반쯤 미친 듯한 모습으로 불타고 있는 제주 시내를 바라본다. 

맑게 갠 화창한 여름 하늘 아래로 펼쳐진 제주시내가 온통 불타오르고 있다. 

여기 저기서 폭발이 계속되는 모습. 어느 순간 효진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해가 저물 무렵. 정자의 나무바닥위로 쓰러져 있던 효진이 문득 정신을 차린다. 

화들짝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효진. 온통 시커멓게 연기를 뿜고 있는 폭파된 제주시내의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구토가 쏠려 정자의 난간을 잡고 밖으로 한바탕 토악질을 해대는 효진. 

그리고 나서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쓴다.  

 

'효진아. 침착하자. 어떻게 된거지? 아까 내 시계도 그렇고 멀티 글래스도, TV도, 자동차도.. 비행기까지.. 전자 기기가 전부 폭발하는 것 같아. 인터넷에 연결된 것들이 폭발되는 사이버 테러?..도대체 왜?.. 이제 난 어떻게 하지?' 

 

무심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는 효진. 무의식 중에 손가락에 낀 티타늄 반지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손이 보인다. 

 

'..아빠... 그래. 인공 블랙홀로 한달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모든걸 막을 수 있어.. 세종시로 가야돼.. 모터보트는 엔진으로만 가는거니까 무사할 꺼야. 목포항까지 가서, 자전거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세종시까지 갈 수 있어..'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느끼는 효진.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시내를 향해 걸어내려간다.   

 

*

 

어둠 속, 불탄 편의점 안에서 타다 남은 진열대를 뒤져 먹을것을 장바구니에 담는 효진.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빛에 희미하게 주변이 보이는 밤 거리. 

길가에 앉아 캔 통조림을 하나 들어 뚜껑을 따는 효진. 입을 갖다 대는걸로는 먹기 힘들자, 잠시 고민 끝에 옷에 손을 슥슥 닦더니 손으로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 먹는다. 

 

한 손에 음료와 식량이 든 장바구니를 든 효진이 도로 표지판에 '제주항'이 표시된 방향을 향해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간다. 

길 한쪽의 자전거 보관소가 눈에 보이자 그쪽으로 가더니 안 잠겨 있는 자전거를 한대 찾아내서 타고 간다.  

 

제주항에 도착한 효진. 밤 하늘에는 이제 꽉 찬 둥근 달이 제법 떠 올라 달빛이 환하게 사방을 비추고 있다.

주변의 바다 위에 선실이 불에 탄 채 여기저기 떠 있는 요트와 유람선의 모습이 보인다. 

자전거로 제주항을 누비며 작은 모터 보트를 찾던 효진의 눈에 찾던 물건이 들어온다. 

모터 보트 위로 올라타서 이곳 저곳을 살펴보던 효진. 보트 뒤쪽의 엔진을 켜면 '투두두두우우웅~' 소리와 함께 엔진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자전거와 통조림 캔들을 보트 위로 옮겨 갈 준비를 끝내고, 

운전석에 앉아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기어를 밀어 넣는 효진. 

보트가 바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됐어!!!"

 

효진이 성공한 기쁨에 소리지른다. 

조종석에 달린 나침반의 방향을 보며 목포쪽을 가늠한 북서쪽 3도 방향으로 보트를 움직여 나가는 효진. 

환한 보름달 달빛 아래 펼쳐진 잔잔한 여름 바다를 가르며 효진의 보트가 천천히 앞으로 나간다. 

바다 위 보름달을 바라보는 효진.

'저 보름달이 다시 차오르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연구소에 가야한다.' 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날이 밝기 시작하는지 동쪽부터 어스름이 밝아지는 하늘. 

수평선에 남해안의 육지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금세 손에 잡힐 듯 점점 가까워 온다. 

해안선을 따라 가면, 보이기 시작하는 목포항의 등대와 항만의 모습들. 

보트를 몰던 효진이 다급하게 연료 계기판을 또한번 확인한다. 

계기판의 바늘 표시가 이제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 있다.

 

"제발. 조금만 더 가자..."

 

'토닥토닥 토토토.토.토. 통.' 힘없는 마지막 소리를 끝으로 완전히 꺼지는 엔진. 

 

"안돼!!!!~" 

 

절박하게 비명을 지르는 효진. 그러나 보트는 잔잔한 바다 위에 완전히 멈춰서서 물 위를 둥둥 떠 있을 뿐이다. 수면 위로 닿을 듯 상체를 내밀고 손을 물속에 담궈 노젓듯 물을 밀어내보는 효진. 

보트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잠시후. 보트 위에 팔짱을 끼고 서서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쪽을 보며 보트와의 거리를 가늠하던 효진이 결심한 듯 보트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잠시 당황해서 바다 위를 허우적 대던 효진. 곧 진정을 찾고는 등대 쪽을 향해 헤엄쳐 나가기 시작한다. 

 

등대 쪽에 가까워 질 수록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치기 시작하고, 헤엄치던 효진의 힘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바닷물을 먹은 효진이 당황해서 허우적 거리더니 이내 지쳐 바다 속으로 가라 앉으려는 찰나, 효진의 눈에 작은 고깃배가 보인다. 

배 위의 사람 형체 하나가 바다로 뛰어들어 자신쪽으로 헤엄쳐 오는 모습을 보며, 효진은 정신을 잃는다.   

 

*

 

정신이 든 효진의 눈에 드럼통 안에 불타고 있는 나무가 보인다. 몸에 덮힌 모포를 걷어내고 자리에 앉는 효진.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썩기 시작한 듯한 생선 냄새가 코를 찌르자 얼굴을 찌푸리는 효진. 부둣가 창고 안이다. 

드럼통 난로 건너편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던 20대 남자가 일어난 효진을 보고는 옆에 돌아누워 잠을 자고있는 할아버지를 깨운다. 

 

"아빠 일어나!~ 여자 깼어~"

"응?! 으으음.."

 

위아래로 한복처럼 통이 크고 두꺼운, 따뜻해보이는 옷을 입고 자던 할아버지가 잠에서 깨 일어나 앉는다. 피부는 거칠지만 비바람에 침식된 듯 온화한 표정을 한 영락없는 어부의 얼굴이다.  

 

"..운이 좋았으~ 오늘도 사람 못구허나~ 허구 돌아 들어가던 참에, 왠 여자가 물에 떠 있어서 식겁했구먼~ 으떻게된것이여?"

"제주도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오다가 목포항 근처에서 기름이 떨어져서요, 헤엄쳐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바다에 뛰어 들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어르신."

"여자 혼자 몸으로 참 용허네~ 평생 바닷밥을 먹고 살었는디, 갑자기 세상이 이렇게 됭께 바닷사람이나 구해야것다 싶어서 아들놈허구 며칠째 돌어댕기는디~ 다 뒤져브렀으~ 자네가 처음이여~" 

 

*

 

다음날. 목포 시내 중심가의 한 대형 식료품 마트 앞. 

할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고 효진이 폭격을 맞은 듯 시커멓게 타고 입구가 부서진 마트 안으로 들어간다. 음식이 있는 진열대를 찾아 앞장서 가던 아들이 갑자기 깜짝 놀라며 할아버지의 뒤로 숨는다. 

효진이 조심스럽게 앞쪽을 살피며 가보니 진열대 사이에 경계심으로 몸을 잔뜩 움추린 한 20대 여성이 있다. 

 

"아..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효진이 인사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여성. 

 

"안녕하세요.. 전 목포시청 재난관리과 직원이에요. 저 말고 살아있는 사람을 본게 처음이라.."

 

그때 근처에서 갑자기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움직이는 소리에 긴장하는 사람들. 곧이어 열살쯤 돼 보이는 여자애 한명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배고파서 왔는데, 저도 데려가주시면 안돼요?"

 

마트 앞 주차장에 둘러앉아 꺼내온 음식을 먹는 생존자들. 

배가 많이 고팠었는지 여자애가 걸신 들린것처럼 손으로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 먹는다. 

입맛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여자애가 먹는걸 보던 시청 직원이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따로 있는것 보다 같이 모여 있는게 안전하니까, 괜찮으시면 시청 강당으로 같이 가시죠. 강당에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물건들이 있어요." 

 

*

 

목포 시청 청사부지에 도착한 효진과 생존자들. 

시청 직원이 앞장서서 비행기 격납고처럼 반원 모양의 지붕을 한 강당 안으로 들어간다. 

강당의 문을 열자, 정면에 무대 단상이 보이는 천장이 높은 텅빈 공간이 나타난다. 

시청 직원이 벽면의 두꺼운 커튼을 걷자, 밖의 빛이 들어오며 강당 내부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듯 부서진 곳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 시청 직원이 무대 단상 뒤쪽에서 재난 구호용 매트리스와 담요들을 가져와 생존자들에게 쉴 자리를 만들어 준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서로를 마주보는 생존자들. 다들 아무 말이 없다. 

괜히 만화책을 보는 척 하는 20대 남자와 따분한 표정으로 쭈그려 앉아있는 여자아이, 

그리고 마주 보며 눈만 꿈뻑이는 할아버지. 

시청 직원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개는 아까 했으니까 됐고요, 하고 싶은 얘기들 서로 하도록 하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이라든가, 서로 궁금한 거 있으면 얘기 나눠요."

 

효진이 말을 받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아세요?"

"..생리통 때문에 하루 휴차내고 오피스텔 방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터지고 불이 붙고 난리가 났어요, 신발도 못 신고 밖으로 뛰쳐 나와보니 더 심하고. 시청 와 보니 전부 다 죽어있구요." 

"..나랑 내 아들놈은 아침에 배타고 나그서 저녁때 해지믄 들어오는디, 그날은 저녁때 들어오는디 배마다 불이 잔뜩 붙어서 물 위를 그냥 둥~둥 떠나니고 있더라구~ 나가 죽을때가 다 디서 헛긋이 보이나~ 힜는디 그긋이 아니라, 이늠의 기계가 다 터져쁘러서 그 옆에 있든 사람덜 싹 다 디져뿐개비~"

"..엄마랑 집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화장실 갔는데.. 갑자기 불나서 그냥 집 밖으로 뛰쳐나왔어요. 흑흑흑 엄마아!~ 으아앙!!~" 

 

각자 폭발 당시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는 생존자들. 얘기를 할 수록 당시의 끔찍한 느낌이 떠올라 더 이상 말을 못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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