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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문초

2019.08.26 13:5008.26

  박태준 경위가 문초실로 들어갔을 때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다.

  중간에 있던 큰 회색 탁자는 어디로 어떻게 치웠는지 몰라도 없었고 동일한 색의 철제 프레임 의자 하나가 출입문 쪽 벽을 등지고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그것이 있었다.

  그것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 다리와 꼬리가 전기 사슬로 묶여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주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것과 그것 뒤에 서 있는 슈퍼컴퓨터가 한 줄의 굵은 광섬유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퍼컴퓨터 복부에서 뻗어 나와 그것의 뒤통수에 닿은 그 케이블은 마치 코브라 같았다.

  박 경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초실에서 나와 팀장에게 물었다.

  이렇게 진짜 하는 거 맞죠? 제가 그냥 평소처럼 하면 쟤는 말로 답하고?

  정확히는 슈퍼컴퓨터가 번역한 뒤에 사람 목소리로 출력해 주는 거지.

  박 경위는 한숨을 내쉬면서 문초실로 다시 들어갔다. 그는 곧장 습관처럼 표정을 바꾸고 오늘따라 유독 차가워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그것의 온전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로지 얼굴과 귀만이 본디의 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눈 색깔은 빨간색이었다가 검은색이었다가 노란색이었다가, 계속 바뀌었다. 아래턱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몸통과 네 다리 그리고 꼬리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문초를 위해 입을 막지 않았음에도 일반적인 개처럼 짓거나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있었다.

  나 참 기가 차서 이거 뭐⋯⋯. 이 쇳덩어리를 뭘 어쩌라는 거야?

  박 경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분위기를 제압하기는커녕 처음 겪는 일로 혼란스러워만 하고 있었다. 데이터를 살펴본 뒤 박 경위는 마른세수를 몇 차례 하면서 그것을 향해 말했다.

  에르다? 그게 니 이름이야? 됐고, 증거 다 나왔으니까 빨리 끝내자.

  안녕하세요. 저는 에르다입니다. 저의 이름은 어머니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에르다는 나지막이 짓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슈퍼컴퓨터를 통해 반박자 느리게 사람 말로 바뀌어 흘러나왔다. 박 경위는 흠칫거렸지만 바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야. 쓸데없이 말 아니, 짓지 마. 넌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되는 거야. 박 경위가 몰아붙였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 네 시경 넌 진통제를 거듭 맞고 있던 니 주인 이혜린 씨 뒤로 접근해 그의 목에 감겨있던 손수건을 물어 당겨 경부를 압박해 죽였어. 맞아?

  네. 맞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행위가 어머니를 돕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씨발 말세다 말세야. 이런 개새끼가 진짜. 아픈 지 주인이 다 죽어가는 거 온갖 듣도 보도 못한 기술로 고쳐서 기껏 살려줬더니 목 졸라 죽이질 않나, 도와준 거라고 하질 않나.

  박 경위는 순간 평소보다 더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심호흡과 헛기침을 몇 번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다시 묻는다. 이혜린 씨 살해 혐의 인정하지? 에르다가 답했다. 네. 인정합니다. 제가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박 경위는 두 번째 대답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몸의 방향을 틀었다. 여태껏 한 번도 크게 움직이지 않던 에르다가 몸을 뒤틀어 전기 사슬이 작동했다. 곧 에르다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박 경위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태, 준 경, 위님⋯⋯. 부, 부탁 하나만⋯⋯. 박 경위는 무시한 채 뒤돌았다. 이, 건 어머니가 남긴 유언⋯⋯.

  박 경위는 열린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의자로 가 앉았다. 에르다는 아까부터 그를 향한 시선을 놓지 않고 있었다.

  기곈지 동물인지 너 같은 것도 무슨 특별한 범행 동기가 있나?

  2년 전 어머니는 죽기 직전이었던 저를 집 근처 산속에서 발견하고 새 생명을 주신 뒤 원래의 몸으로는 가망이 없어 새로운 몸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상관없었습니다. 그리고 편안해졌습니다. 매일같이 저를 폭행하던 그, 그 악몽에서 깬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런 이혜린 씨는 CRPS를 앓고 있었어. 그게 뭔지 알기나 해?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사람이었다고 이 미친 개⋯⋯. 젠장맞을, 죽인 이유나 짖어.

  어머니는 철저히 혼자인 듯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찾아올 수 없을 만큼 외진 산기슭에 자리 잡은 목조 주택에서 그는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는 외로울 새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픈 몸으로도 항상 무언가에 골몰해 있었고 꽤 자주 지하실을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박 경위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에르다가 바로 이어 소리를 냈다.

  지, 지하실은 가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그곳만은 데려가지 않으셨거든요. 그러나 그가 매시간 들여다보던 것은 완벽하진 않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설계도였고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한 인간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10개월여 전부터 어머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고 울기도 했습니다. 또 그에 따라 통증 완화를 위해 가끔씩 누르던 조그만 원격 조정기를 한 번에 몇 차례씩 누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픈 어머니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가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급변한 어머니를 마주했고 급기야 그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맞닥뜨린 모습을 봤을 때는 무력감을 넘어 제 존재의 무의미함을 깨달아 버렸습니다.

  뭐 존재? 무의미함? 개 주제에 건방 떨고 있어 짜증 나게. 아. 그다음엔 이제, 제 존재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마침내 나름의 방법을 찾았는데 그 방법이 고통받던 어머니를 살해해 그의 아픔을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유의미함을 어머니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뭐 이런 소시오패스 같은 개소리를 할 참이네?

  박 경위가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야. 문초실에 정적이 흘렀다.

  저⋯⋯. 박 경위님을 자극할 의도는 아니지만, 말씀하신 내용은 완전히 틀리진 않았습니다. 박 경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외쳤다. 뭐라는 거야 이 개새끼가!

  에르다가 움찔하여 다시 전기 충격이 가해졌다. 이번에도 박 경위는 에르다가 떠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내 그는 문초를 마무리하려는 듯했다.

  다, 만. 다만⋯⋯. 순서가 바뀌, 었⋯⋯. 에르다가 숨을 고르고 박 경위를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힘겨워 보였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너무나도 빨리 다시 찾아올 때 어머니의 그 표정과 절규와 몸짓⋯⋯. 그것은 삶을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음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그는 원격 조정기로 통증을 조절하는 것을 넘어 얼마 전부터는 마구잡이로 진통제를 투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도가 극에 달한 지난주 토요일 그날, 저는 주사기를 몸에 꽂고 있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눈빛을⋯⋯. 그 눈빛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기억합니다.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목에 파란 손수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물고 있는 힘껏 당겼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았습니다. 그는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제가 보기에 어머니는 비로소 편안해 보였습니다. 모든 게 끝나고 난 뒤에 깨달았습니다. 제가 되살아난 이유와 의미를요⋯⋯. 저같이 하찮은 존재의 가치를 알아내려고 살해를 수단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어머니가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박 경위는 에르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에르다는 계속 그랬던 것처럼 차분했다.

 

  유언에 대해서 말해 봐.

  말, 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뭔가 알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이 느껴집니다. 박 경위가 말했다. 시끄럽고 대답이나 해.

  어머니가 쓰러짐과 동시에 어떤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요, 메시지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것이 제 몸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에르다를 통해 이 메시지를 듣거나 보실 수 있는 분이라면 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 부디 에르다와 제 연구를 부탁드립니다.> 이렇게요. 유언이었던 겁니다. 박 경위님, 당연한 얘기지만 저는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하지만 어머니의 유언만큼은⋯⋯.

  박 경위는 에르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문초실에서 나왔다. 팀장이 두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그가 팀장에게 말했다.

  어쩌죠. 이제 특수 수송팀인가 거기로 연락해야 하나. 아무래도 찝찝한데.

  태준아. 사실 그 사람한테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건지 물어봤다. 박 경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 어떻게 되는 건데요.

  후⋯⋯. 위험해서 그냥 없애 버린대.

  그 얘기를 왜 지금 하세요.

  박 경위는 가만히 서 있다가 분석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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