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레이저와 센서 기술의 시대에서, 아직까지도 태엽으로 돌아가는 아주 옛날 시대의 시계를 노인은 아주 손쉽게 해체한 다음에 문제들을 찾아내었다.
그런 모습이 방문자에게는 너무도 신기하고 마법처럼 느껴졌다. 작은 부품들을 하나하나 탁자 위에 펼쳐 놓으면서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놈 니가 으쨌길래 부품들이 다 박살 났냐, 박살 났어? 태엽들 죄다 뽀개져서 지들끼리 맞지 않아 못 돌고 있으야. 그리구 나사도 휘었구. 보니까 상당 부품들이 틀어졌네, 니 척추도 틀어져 봐야 이게 뭔 상태인지 알긋지. 쯧."
시계가 망가진 원인을 사람의 몸에 빗대 말하고 있는 말에 방문자는 살짝 소름이 돋았지만, 기계는 사람의 몸과 달리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솔직하게 입 밖으로 꺼냈다.
"…… 그, 그렇…… 겠는데…… 기, 기계잖아요. 고, 고치면 그만이니까……."
'기계니까 문제가 없지 않냐'는 말에 노인은 확대경에서 눈을 떼고는 방문객을 쏘아보며 말했다.
"암. 고치면 그만이지! 근디, 이게 고칠 수 없는 상황인 놈이니까 그러잖여! 이놈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방문객은 여러 차례 들었던 '부품의 단종'을 떠올리고는 노인에게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아이고... 제발, 제발 고쳐주십시오. 이거. 정말이지 저에게 소중한 시계입니다."
"... 내만큼 늙은 놈이, 왜 니놈에게 소중허냐?"
자신과 비교하면 아직 장장한 나이의 중년이 벌벌 떨면서 빌기 시작하자 노인은 궁금해져서 시계가 소중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방문객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시계에 담긴 사연을 애절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께서 결혼기념일 선물로 아버지께 선물한 시계였고, 그것을 아버지는 늘 차고 다녔었다고.
그런 아버지의 시계는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서 다시 어머니께 돌아왔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늘 차고 다녔다.
그렇게 또 수년의 시간이 흘러서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자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억하고자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시계를 쓰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거의 가족 대대로 돌려쓴 것이었기에 손목시계는 미세하면서도 많은 기스가 있었고, 그가 말한 만큼이나 주인들을 거치면서 부품들이 마모되고 녹슬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계속 그 시계는 멀쩡하게 돌고 있었다.

가족 대대로 시계를 썼다는 사연을 들은 노인은 더는 방문객을 나무라지 않았다.
"... 이거. 고칠 수는 있긴 한디, 시간이 많이 걸려."
"시간이 걸려도 괜찮습니다."
"진짜냐?“
"예. 어르신. 정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는 방문객을 보고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핀셋이 아니고서는 집기 힘든 톱니와 나사들을 하나하나 구부러진 핀셋의 끝으로 더듬으면서 숫자를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에 손가락들을 하나씩 곱으면서 뭔가를 계산한 다음 자신의 가게를 찾아온 상대에게 말했다.
"6개월. 아니,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몰러. 이거, 엄청 옛날 물건이다 보니 이놈 몸이랑 사이즈 맞는 부품들을 찾아봐야혀. 시간이 많이 걸릴 겨."
"어, 어르신…… 제가 시곗방을 다녔는데……."
말을 더듬으면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하기도 전에, 노인이 먼저 그가 말하려던 말을 뱉었다.
"다들 없다고 그러지?"
"…… 예. 그래서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그 말에 노인은 코웃음을 치더니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게 요즘 것들이지. 니놈처럼, 내처럼 '소중한 옛것'을 가진 인간들이랑 다르게 '한순간에 나오는 것'의 반짝 매력에 홀려 막상 열심히 찾지 않는 기야. 왜냐면 옛것은 옛날 것이니만큼 낡았고, 못나게 되었고, 그리고…… 멋 없다고 말여. 그래서 안 찾으면서, 없다고 그러는 겨. 젊은것들은 새 거 팔고 사는 게 쉽지."

 

그는 노인의 목소리에 담긴 약간의 증오를 알아차리는 한편, 공감이 갔기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노인의 가라앉았던 목소리는 점차 들뜨기 시작했다.
"내는 니놈이 마음에 든댜. 그러니 마 주변에다가 물어 보구 찾아다 주마."
"감사합니다! 어르신!"
"빨리 수리해주려고 하겠는디, 말했지만 시간이 걸려. 이건 알아두라."
"알겠습니다!"
그는 계산을 하려고 했지만, 노인은 아직 수리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니 돈은 수리가 끝난 후에야 받겠다고 말한 다음에 방문객과 함께 가게를 나왔다.
나오면서 노인은 그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고, 그는 가계를 찾아다니느라고 굶었다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에 노인에게 '저녁을 사드리겠다'고 말하며 시계를 고쳐줄 유일한 수리공과 저녁을 먹고자 시내로 향했다.

 

* * *

 

다행히 음식들은 먹음직스러웠고, 식사를 마친 남자는 노인이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확실히 자신의 어머니보다 노인이 훨씬 연세가 많아 보였다.
"어르신. 연세가 어찌 되십니까."
식사를 하고 있던 노인은 질문을 한 상대를 보고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 니 눈엔 내 나이가 몇으로 보이냐?"
"음…… 글쎄요."
쉽사리 나이를 밝히지 않는 노인을 보고 그는 쩔쩔매면서 말을 흐렸다. 그런 조심스러운 태도에 노인은 재밌다는 듯이 낄낄 웃으면서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아직 180살밖에 되지 않았다고.
"어르신…… 엄청, 나이가…… 많으십니다만……."
노인의 나이를 들은 그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생각 이상으로 정말 건강하게 오래 살고 있는 노인이었다.
자신의 나이를 듣고는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노인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허허허. 그래두 니눔은 나보다 더 오래 살 기야. 왜냐믄, 내가 니놈만한 나이에는 최대 수명이 200살이었거든. 근디, 이젠 아니잖여. 가만 보자…… 요즘 뉴스로…… 최대 수명이 몇이라 했지?"
"현재 260살이 최대 수명으로 전망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는 회사로 출근하기 전에 아침 뉴스로 들었던 인간의 최대 수명을 떠올리고는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노인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계속 말을 이었다.
"맞다, 그랴. 그 말대로 인간은 계속 살 날이 길어질겨. 살 날만 많아진디야. 그러니 내 같은 인간은 계속 일을 해야혀."
"어르신……."
노인의 말은 틀리지가 않았고, 변하지 않은 사실이 깃들어 있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일을 해야 하는 시기도 길어질 것'이라고. 사람은 살아가는 이상 돈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저렇게 나이를 먹고서도 아까와 같은 수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그는 노인의 낡은 공방이 지저분한 것이 약간 이해가 되었다. 늙은 몸으로 그것들을 전부 치우기에는 벅찼으리라.
식사를 다 마친 노인이 후식을 밥그릇에 뜨거운 물을 부어 불린 쌀로 우려낸 물, 숭늉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슬쩍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 어르신께서는 왜 그런 일을 하십니까?"
"뭐여. 시비여?"
구수한 쌀물을 벌컥벌컥 마신 노인이 언짢아져서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다음에 대답했다.
"아니…… 어르신. 대개……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들은 수예나…… 공예 쪽으로 일하신다고 들어서……."
물론 기계가 자동으로 수를 놓고, 선을 그리는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그러한 조작을 하는 것은 나이 든 여성들의 일자리로 거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뉴스를 통해 보았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기계 부품을 조립하는 일을 선택한 이유를 노파에게 물었다.
그의 말에 노인은 재미난 농담을 들은 것처럼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옛날에 말여. '세계 2차 대전'이라카는 이름이 어마어마한 전쟁이 있었단 말여."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꺼내는 노인의 말에 그는 귀를 기울였다. 뭔가 그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생각대로, 노인은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그 전쟁, 누가 전투에 나가서 싸웠겠냐?"
"어…… 아무래도, 남자겠죠?"
그는 솔직하게 생각을 말했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어. 그럼, 그 전쟁의 군수품은 누가 만들었겠어?"
"음…… 글쎄요."
100년이 훨씬 지난 과거의 일이었기에, 그는 '고대 역사'에는 관심이 없어서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가 노인의 비웃음을 받았다.
"공부 좀 하구 살어…… 그야 그것도 남자들이 했겠지. 근디, 시방 이놈의 전쟁이 1년으로 땡! 이런 게 아니었단 말여. 아주 여러 사람 잡고도 남았지…… 그러니까 말여, 전쟁에 나간 남자들이 싸우고 있으니 집에서 일하고 있던 여자들이 군수품을 준비하는 사람이 된 거시야."
노인은 자신이 그렇게 기계와 여성의 관계는 그리 먼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눈을 살포시 감으며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전부 그에게는 낯선 사람의 이름이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노인은 다시 따뜻해진 물을 컵에 담으면서 말했다.
"지금 내가 말한 이름들, 전부 여자 기술자들이여. 근디, 아니 시방 이게 아주 '일부'라네?"
"예? 일부라고요?"
그는 한참동안 노파가 중얼거리던 이름들이 '일부'였다는 말에 당황했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다수의 이름은 과거에 묻혀 사라졌다'고 대답했다.
"나는 시방…… 그렇게 남은 '일부의 이름'과 사라진 '여성 기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이고. 이거 ‘나라도 이름을 남겨야 것구나……’ 하고 생각하고 살았고, 그래서 계속 이 일을 해왔으야."
"그러셨군요."
그는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이름이 남지 못한 여성 기술자들이 많다는 것에 뭔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겐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준 사람이 있었을 터인데 영영 사라졌으니 말이다.

 

* * *

 


시계를 찼던 손목이 너무 허전한 까닭에 결국 최첨단 시계를 샀고 그것의 편리함에 익숙해졌지만, 그는 계속 낡은 수리점에 자신이 맡긴 시계가 고쳐졌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고 노인이 약속한 시간이 6개월이 지나고, 여러 달이 지났을 무렵에 고대하던 연락이 왔다. 시계가 고쳐졌다는 것이었다.

시계가 이제 쌩쌩하게 돌아간다고, 일하고 싶다는 놈 어서 데려가라며 연락에 그는 퇴근 시간이 어느 때보다 간절해졌다. 퇴근할 시간이 되자마자 가슴이 뛰기 시작한 그는 퇴근할 시간을 알리는 시계의 알람과 똑같은 타이밍으로 회사를 빠져나와 낡고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수리점으로 달려갔다.
노인은 허둥지둥 달려온 그에게 시계를 보여주었다. 확실히 예전에 맡겼던 시계가 옛날의 제 모습 그대로가 되어서 본래대로 초침을 움직이며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이거 고친다구... 중고, 고물 시장 을매나 뒤졌는지 니는 모른댜. 어?"
노인은 연신 허리를 숙이면서 감사의 인사를 퍼붓는 방문객을 보고는 만족스러움에 환히 웃으며 말했다.

 

"니 귀 똑바루 열구 들으라. 이거, 내가 최대한... 어? 최대한 고쳤는디... 부품이 아주 100% 맞아 떨어지지가 않어. 그래서 용접두 하고... 어? 중고, 고물들에서 추려낸 부품이 최대한 맞물리게 내가 깎았어. 근디 원래 쓰던 부품은 아니니께 말여... 저번보다 약한 충격을 받아두 고장날지두 몰러. 그니께, 시계 차면 조심하구. 부품들을 깎은 만큼 방수는 안 되어. 물론 이만큼 낡은 놈. 물에다가 넣음 이미 뒈져."

 

노인이 하나하나 조심해야 할 주의 사항들을 들려주자 그는 고개를 유아용 모빌 인형처럼 끄덕이며 이번 같은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부모님의 흔적이자, 자신의 인생을 함께 해줄 시계의 수리 비용에 대해 물었고 그것이 턱없이 비싼 가격임에도 아쉬워하지 않고서 지불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조용히 공구를 손질하는 노파의 등 뒤로 제법 훤칠한 정장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 니는 손해보구 장사 혀?"
앙칼진 투로 묻는 말에 노파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니가 지랄이여…… 손해를 본 건 낸디, 니가 왜 지랄이여."
"아…… 그야 그 시계 고춰주겠답시고, 우리 박물관에 있는 시계들을 죄다 뜯어냈잖여!"
정장을 입은 노인이 신경질을 내면서 노파의 곁에 다가가 등을 툭 치면서 말했다.
"니가 받은 그 돈, 내 박물관 시계값 1개도 안 되어!"
"알어."
알고 있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수리점 주인의 태도에, 정장을 입은 노인은 짜증이 더 솟구쳤다.
"근디 니년은! 그런 푼돈으로!"
"이년아…… 니도 봤잖여. 자기 부모님…… 못 잊겠다고…… 시계 갖고 다녔다는 그 아 얼굴 봤잖여……."
시계를 되찾으러 온 사람의 밝은 얼굴을 보지 않았냐고 묻는 말에 짜증을 내던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이년아…… 우리 같은 옛날 사람, 그리고 옛날 물건…… 그게 얼마나 쉽게 잊혀지는지 알고 있잖여. 그걸 소중히 여기는 놈을 간만에 만났으니,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해주고 싶었다 이거야."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431 단편 스토아적 죽음 비나인 2019.09.17 0
2430 단편 나는 좀비를 이렇게 만들었다 비나인 2019.09.17 0
2429 단편 샌디크로스-0-3 비에러 2019.09.10 0
2428 단편 샌디크로스-0-2 비에러 2019.09.01 0
2427 단편 별 헤는 밤 백곶감 2019.08.31 0
2426 단편 샌디크로스-1- 비에러 2019.08.31 0
2425 단편 샌디크로스-0- 비에러 2019.08.29 0
2424 단편 샌디크로스 비에러 2019.08.28 0
2423 단편 말명귀 의심주의자 2019.08.27 0
2422 단편 문초 진정현 2019.08.26 4
2421 단편 레시 천선란 2019.08.22 0
2420 중편 노인의 낡은 공방 - 2. 버려진 개는 기억한다 (2)1 미네나인 2019.08.18 0
2419 중편 노인의 낡은 공방 - 2. 버려진 개는 기억한다 (1) 미네나인 2019.08.18 0
중편 노인의 낡은 공방 - 1. 시계 (2) 미네나인 2019.08.18 0
2417 중편 노인의 낡은 공방 - 1. 시계 (1)1 미네나인 2019.08.18 0
2416 단편 지귀, 불귀신 한켠 2019.08.14 0
2415 단편 당직 라그린네 2019.08.07 0
2414 단편 신화의 종말 이준혁 2019.07.31 0
2413 단편 리멤버 미 이준혁 2019.07.23 1
2412 단편 어떤 만년필 매니아의 소망1 이준혁 2019.07.23 0
Prev 1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