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외지인

2019.07.31 09:2507.31

1

혼유 세 번이면 잘린다, 소장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걸레에 기대어 선다. 동료 한 명이 제네시스 운전자에게 연신 고개를 숙인다. 무엇을 잘못한 모양이다. 아마도 혼유. 떠나는 제네시스 뒤에 대고 동료 남성은 욕을 지껄인다. 씨발, 지가 잘못 말해놓고선.

오후 11시다.

나는 다시 청소를 시작한다. 소장은 말했다. 너는 키가 크니 천장을 닦으라고. 천장에 먼지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며, 귀신은 먼지를 먹고 산다며. 천장에서 귀신을 본 게 한 둘이 아니라며. 대걸레를 손걸레마냥 쥔 뒤 천장을 쓱쓱 문질러 닦는다. 문득 냄새가 난다. 악취, 음식물쓰레기 아니면 지린내. 나는 대걸레를 내려놓는다. 가만히 천장에 귀를 갖다 댄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발자국 소리, 아니면 벌레들이 서로 교미하거나 잡아먹는 소리. 나는 대걸레로 천장을 쿵, 쿵 두드려본다. 석면가루가 날린다. 목구멍을 간질이던 기침이 튀어나온다.

사무실에서 나온다. 나는 주유기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혼유를 했던 동료 남성은 나를 보더니 뭔 일 있느냐고 묻는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꺼져. 나는 그를 내려다본다. 그가 키 230센티미터짜리인 내 몸뚱이를 올려다본다. 그의 눈길엔 경멸과 혐오가 일렁인다. 저도 해보고 싶은데. 내 말에 그는 뭘, 되묻는다. 주유하는 거 말이에요. 그가 푸하하 웃는다. 그 몸뚱아리로 뭘 하겠다는 거야. 기름 구분이나 할 수 있어? 동료 남성의 조롱은 새롭지 않다.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나를 힐끔 보고는 또 다른 동료 남성이 있는 곳으로 가버린다. 나는 가만히 주유기로 눈길을 옮긴다. 팔을 뻗어본다. 거리가 멀다. 나는 쭈그리고도 한참 아래로 손을 내민다. 커다란 손에 잡힌 주유기는 문구점에서 파는 조그만 장난감 같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해. 주임이 말했더랬다. 운 좋은 줄 알아. 사장이 네 아버지하고 친해서 그렇지. 안 그러면 너 같은 사람이 어디 취직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재빨리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댄다. 동생의 목소리다. 올 때 핫식스 캔 두 개 사다 줘. 나는 잠깐의 침묵 뒤로 말을 숨긴다. 핫식스 꼭 사와. 전화가 끊어진다. 노조 활동으로 한창 바쁜 모양이다. ‘약자와소수자의노동조합’. 줄여서 약소노. 100명이 채 안되는 노조. 정식 허가를 받지도 못한 노조. 우리는 뭉치기 위해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볼모로 잡았다.

일순 경적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란다.

아반떼 한 대가 내 앞에서 멈춘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남자는 만땅이요, 하며 카드를 내민다. 어, 어, 나는 카드를 받아든다. 결제하는 방법을 몰라 꾸물댄다. 동료 남성들이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쓴다. 카드 기계에 카드를 꽂고 5만원을 입력한다. 나는 카드와 함께 영수증을 아반떼에게 건넨다. 그리고 주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주유 손잡이를 가까스로 잡는다. 내 손가락만한 크기다 차 기름통 뚜껑을 열어야 하는데. 차 주위를 헤맨다. 보다 못한 아반떼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온다. 여기 있잖아요, 여기. 남자는 직접 주유기를 꽂았다 뺀다. 그리곤 수고하세요,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진다. 수고하세요, 말을 되뇐다. 내가 수고할 것이 있는가. 멍하니 생각하다 나는 퇴근 준비, 아니 출근 준비를 한다. PC방으로.

 

2

햇빛이 거칠다. 달을 잃은 하늘에서 가느다란 흰 구름이 샌다. 나는 거실 소파에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 남동생은 옆에서 시위에 쓸 피켓들과 슬로건을 제작 중이다.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본다.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는 작은 머리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매일 깎지 않으면 가시처럼 수염이 돋아나는 턱. 가느다라면서도 핏줄이 불거진 단단한 팔. 여자애들이 좋아할 법한 상이지만 안타깝게도 동생에겐 여자친구가 없다. 대신 남자친구가 있다.

이거 만드는 것 좀 도와줘.

나는 몸을 뒤척이며 싫다고 답한다.

내가 치킨 사줄테니까 해줘.

얼른 몸을 일으켜 동생의 맞은편에 앉는다. 피켓의 문구는 다양하다. 여성 임금차별 반대, 회사 내 성소수자 아웃팅 및 임금차별 반대, 장애등급제 폐지, 다문화가정상담소 설치 확대, 장애인 복지시설 건립, 등등. 약자와소수자의노동조합. 동생은 약소노의 제1대 위원장이다. 그는 쉴 새 없이 전화를 걸고, 받고, 메시지와 메일을 주고받기를 반복한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피켓의 글자를 오려붙이고 목줄을 매단다. 이번에도 삭발식 할 거니? 나는 묻는다. 키가 162인 동생이 난쟁이처럼 느껴진다. 해야지. 삭발식. 누나도 할래? 나는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아. 동생은 나도 했잖아, 대꾸한다. 괴물처럼 보일 거야. 나는 말한다. 이 긴 머리까지 포기하면 말이야. 무심코 나는 내 몸을 살핀다. 귀신처럼 기다랗고 커다란 사지가 뿌리째 흔들리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3

라면을 서둘러 갖다 준다. 주문이 연이어 달려든다. 천장이 낮다. 카운터도 보고 주문 들어온 음식도 만드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뉘이거나 숙인 채 다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천장에 부딪힌다. 삐딱하게, 아래로 내리깔며 보는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아틀라스 마냥 건물을 통째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다. 종종걸음 치며 구역을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면 꼭 웃음소리가 따라붙는다. 대개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이다. 저 키면 남자가 그냥 서서 빨아야 될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웃는다. 나는 못 들은 척 그들 사이를 지나가고, 그들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한다. 어떤 미친놈이 음식을 7만원어치 주문한다. 알고 보니 먹방 BJ이다. 회오리 감자, 핫바, 토스트, 라면, 짜파게티, 초코파이, 셀 수조차 없다.

간신히 숨을 돌린다. 카운터 의자에 앉는다. 바닥에 앉은 것과 다를 게 없다. 이어폰 한쪽을 낀다. 씨야와 SG워너비의 노래가 차례대로 흘러나온다. 입 모양을 뻐금거리며 소리 나지 않게 따라 부른다. 주말이라 손님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자리는 없다. 어쩌다 자리가 나면 나는 행주와 페브리즈를 가져가 키보드를 대충 청소한 뒤 순서대로 손님들을 들여보냈다. 사장은 일주일에 한 번 PC방에 들른다. 최저시급 절반에 주유소와 마찬가지로 야간수당 주휴수당, 퇴직금, 4대 보험 등은 없다. 그래도

일한다. 동생은 즉각 시위를 벌이겠다며, 노동청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이내 쏙 들어갔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누가 밥벌이를 할 것인가.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동생은 취업도 아르바이트에도 관심이 없다. 오직 노조활동만 신경 쓴다. 복직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약소노를 만들기 전 거대노조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어 웬만한 회사나 가게들에선 그를 알아보고 일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기침을 한다. PC방의 공기가 좋지 않다.

한 남학생이 카운터로 찾아온다. 컴퓨터가 고장 났는데요.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뒤 남학생 자리인 41번 좌석으로 향한다. 걷다가 쉬기를 반복한다.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이 마치 슬랜더맨 같다. 고개에 다시 통증이 인다. 똑바로 머리를 들고 다니고 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저들은 모를 것이다. 컴퓨터 전원을 확인한다. 꺼진 상태다. 전원 버튼을 다시 누른다. 부팅이 되더니 아무런 문제없이 게임이 실행된다.

아무 문제 없는데요, 손님.

하고 돌아보지만 그 남학생은 없다, 아니, 카운터에서 다른 애들과 함께 돈을 털고 있었다. 나는 저기요! 소리치며 카운터로 달려간다. 하지만 이따금씩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 때문에 걸음이 꼬인다. 남자애들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그들은 날다람쥐처럼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간다. 나도 속도를 내려고 하지만 계단을 헛디뎌 굴러 떨어질까봐 두려웠다. 나는 쭈그리고 앉는다. 2층 창문으로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는 남학생 무리가 보인다. 나는 PC방으로 되돌아간다. 카운터에 남아있는 현금은 동전뿐이다. 아무리 현금결제 하는 사람들이 적다지만, 그래도 몇 만원은 될 텐데. 하루 치 일당이 다 날아가게 생겼다. 혹시나 해서 경찰에 신고를 해본다. PC방 돈을 턴 10대 남학생 무리가 있는데요. 스피커 건너편에선 못잡으셨어요? 반문한다. 네? 못잡으셨냐구요. 그런 거 저희도 잘 못잡아요. 푼돈이고 이미 다 써버렸을 걸요. 그냥 액땜 했구나, 생각하세요. 전화가 끊긴다. 나는 마른세수를 한다. 두 눈을 꾹 누른다. 부연 시야에 둥근 보랏빛 잔상이 떠다닌다.

 

4

옥상이다. 초록색 페인트가 깔린. 나는 얼굴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인다.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에 높이 세운 철조망이 보인다. 그들은 외치고 있었다.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죽어! 죽어! 죽어! 그 리듬은 묘하게 익숙했다. 어디서 들은 걸까, 생각하기도 전에 그들은 또 다시 한 걸음, 세 걸음 내게로 붙어선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우산이 없다. 그들은 우산 대신 망치를 꺼내든다. 나는 난간 위로 올라섰다. 철조망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본다. 까마득하다. 여기가 5층 높이 맞나. 누군가 무릎을 망치로 후려친다. 억눌린 비명이 튀어나온다. 그 순간 꿈임을 나는 깨닫는다. 나는 철조망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듯하다. 그러나 철조망은 높고, 두 손과 두 발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얼마만큼의 시간을 삼켰나, 철조망 위로 고개를 내민다. 나는 빗줄기 사이로 투신한다.

천장이 내게로 달려든다. 한순간 숨이 막힌다. 눈을 뜨고 잔 것처럼 안구가 뻑뻑하다. 비를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축축했다. 나는 볼을 꼬집고 손등을 꼬집는다. 아프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아픈 적이 있어 나는 불안하다. 불을 켜고 방을 나선다. 부엌에서 물을 따라 마신다. 답답했던 속이 한순간 뚫리는 기분이다. 묽은 꿈이다. 채 잠기지 못한 수도꼭지에서 새는 물방울 같은 꿈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리듬으로. 얼굴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점차 기억난다.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에버랜드로 수학여행을 갔더랬다. 나는 같은 조 애들이 노는 것만 지켜봐야 했다. 키 195센티미터 이하의 ‘나라’에서 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선다.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수십 개의 피켓이 담긴 파리바게뜨 봉투를 든다. 우리는 지하철을 탔고, 두 번의 환승을 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건 이제 내 의무이다. 동생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전화를 했고, 나는 끊임없이 졸았다. 오늘은 야간 근무라 출근 시간이 오후 두 시다. 우리는 시청 광장으로 향한다. 벌써 약소노 조합원들이 한가득 몰려 있었다. 그래도 사람이 적어 서로의 얼굴을 익히는 데 별 시간이 걸리진 않을 듯싶었다.

동생이 위원장 자격으로 무대에 올라선다. 어제 밤 설치된 임시무대였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죽 뻗어 나온다. 나는 사람들 틈에 뒤섞인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이 모든 게 쓸데없는 일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를 위한 노동조합, 이라는 점은 흥미롭고 또 지지할만 하지만, 그뿐이다. 성과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거대노조에 들어가 활동하는 게 더 이득일 듯싶었다. 그러나 술김에 이 얘기를 했을 때, 동생은 극렬히 화를 냈다. 여태까지 이런 노조는 없었어. 오로지 우리 같은 약자들을 위한 노동조합 말이야. 거대노조들이 퀴어와 연대한다는 건, 장애인과 여성과 연대한다는 건 말 그대로 ‘연대’일 뿐이야. 우린 우리만의 노조를 만들어야 해. 그리고 목소리를 내야 해. 우리만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몇 사람이 무대에 설치된 의자로 올라와 앉는다. 나도 뒤따라 올라간다. 동생이 바리깡을 건네준다. 나는 흰 천을 두르고 앉은 사람들 뒤로 다가선다. 뒤에서 바리깡을 든 사람들이 의자 뒤로 바짝 붙는다. 전원을 키고, 바리깡을 조심스럽게 뒤통수에 가져다 댄다. 위이잉, 머리카락이 갈 곳을 잃고 흰 천 위로 우수수 떨어진다. 손이 떨린다. 한 사람의 목숨이 내 두 손에 맡겨진 기분이다. 말끔하게 드러난 두피가 보인다. 축구공을 닮았다. 발로 차면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갈 듯하다. 나는 몸에 두른 흰 천을 벗긴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한 성냥개비 같다. 불을 질러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머릿속을 더듬거린다. 조합원들이 박수를 친다. 삭발한 몇몇은 눈물을 흘린다. 나는 무대 바닥을 바라본다. 길쭉한 얼굴 하나가 흐릿한 점으로 비친다.

 

5

코뼈가 으깨진 건 아니길 바랐다. 웃음소리는 사방에서 산발적으로 튀었다. 내 눈앞에는 쓰레기통에서 굴러 나온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땅따먹기 게임이라도 하는 양 얼른 눈에 보이는 족족 쓰레기를 집어 올렸다. 맥주캔은 반쯤 먹다 버렸는지 음료 몇 방울이 얼굴에 튀었다. 역한 냄새에 나는 숨을 참는다. 동료들은 내 엉덩이를 주먹으로 쳐대며 지나갔다. 그들의 손에서는 진한 기름 냄새가 났다. 나는 손을 들어 코끝으로 가져갔다. 누군가의 침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냄새도 풍겼다. 나는 몸을 일으킨다.

머리가 어지럽다. 졸립다. 야간 근무는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해, 청소 안하고?

어느 새 나타난 소장이 말한다. 나는 화장실 청소를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이 전부다. 지린내와 곰팡내, 묵은 쉰 내 등 온갖 것이 뒤섞인 악취가 곳곳을 차지한 화장실이다. 천장을 본다. 검갈색 덩어리가 지저분하게 천장에 퍼져있었다. 똥이다. 어떻게 똥이 천장에 있을 수 있지. 여기에 똥칠하는 치매 환자라도 있나. 나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한 후 물을 튼다. 천장의 똥덩어리를 겨눈다. 그것은 조금씩 핏방울인 양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수도꼭지를 잠근다. 나는 천장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똥 냄새다. 그러나 낯설지 않다. 언제부터 천장에서 똥 냄새가 풍겼지.

누가 휴지를 훔쳐가기라도 하는지 변기칸의 휴지는 항상 비어있다. 매일 채워 넣는데도. 나는 대걸레를 빤 뒤 타일바닥을 힘주어 닦기 시작한다. 장갑을 끼고 물에 적신 스펀지로 소변기를 박박 문지른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사무실에서 가져온 페브리즈를 곳곳에 뿌린다. 디퓨저 하나라도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뭘 건의할 사람이 못 되었다. 처음 주유소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소장은 내게 동료 시급의 3분의 1만 줄 건데 그래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남들처럼 뭘 건의하지도 말라고 했다. 노동청이니 노동법이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청소만 하면 된다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곧 돈으로 보였다. 동생은 모르는 일이었다.

화장실 청소를 마친 뒤 사무실로 간다. 동료들이 치킨을 먹는다. 그 냄새에 나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한 조각 세 조각 다섯 조각 베어 물고 싶다. 사무실 쓰레기통을 비운다. 동료 한 명이 뭘 먹는 옆에서 청소를 하느냐고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다른 동료들도 그에 동의한다. 나는 애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한다. 그러나 다음 들려오는 말,

근데 민예 씨는 그거 해본 적 있나?

그들은 웃음을 참기 바쁘다.

어떤 거요?

에이, 뭔지 알잖아. 근데 하면 몸집이 크니까, 거인처럼. 꼭 거인한테 강간당하는 기분이겠다. 그렇지 않아?

뭘 말하는 거예요?

내가 묻자 그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 몰라? 섹스잖아, 섹스.

남자 만나본 적은 있나?

없을걸.

그들은 다시 웃는다.

나는 그들 중 누군가가 피운 담배꽁초를 줍는다.

채 불씨가 꺼지지 않고 남아있다.

 

6

동생을 따라 퀴어문화축제에 왔다. 서울시청 앞 광장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흘러넘친다. 거대한 스피커와 무대가 눈에 띈다. 행진 시간이었다. 전국 각지의 성소수자 모임 깃발들이 새파란 하늘을 뒤덮었다. 동생은 약소노 깃발을 든다. 로고 없이 그냥 이름만 새겨진 깃발이다.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종로 광화문을 기점으로 돌아 내려오는 4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행진이다. 각 노동단체들의 깃발도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간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환호성을 지르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그 혼란의 틈 속에서 동생의 손을 꽉 잡는다. 가히 10만은 족히 넘을 듯한 인원이다. 몇몇 사람들이 약소노 깃발을 보고 아는 체를 한다. 동생은 신이 나 노조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쏟아낸다. 약자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성도, 퀴어도, 장애인도 다른 비퀴어 사람들과 같은 노동자니까요. 나는 불안하다. 사람들의 발에 치여 넘어지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나는 점차 걸음 속도를 늦춘다. 동생이 멀어진다. 사라진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지우고 또 지운다. 그 속에서 동생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행진 한 쪽으로 빠져나온다. 구역질이 치민다. 나는 허공에 대고 연신 헛구역질을 한다. 누군가 와서 괜찮으냐고 묻는다. 나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붙잡을 것이 없다. 의지할 데는 내 두 무릎이 전부다.

편의점 안은 물과 음료를 사기 위한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사지 않고 가만히 차례를 기다린다. 내 차례가 온다. 50대 남성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맞이한다. 나는 얼마 받냐고 묻는다. 예? 남자가 되묻는다. 편의점 일 하시면서 얼마 받으세요. 일주일에 몇 번 쉬세요. 나중에 퇴직금이나 정규직 전환 됩니까. 야간수당, 주휴수당 다 받으시죠. 식대 있고, 중간에 쉬는 시간도 있죠. 남자는

미친년 보듯 나를 쳐다본다.

 

새벽 네 시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소파에 누군가 누워있다. 동생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병 한 개를 꺼내 마신다. 거실 탁자엔 각종 피켓과 물품들이 널브러져 있다. 나는 천천히 거실로 발을 옮긴다. 동생을 내려다본다. 잘생겼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동생은 꿈쩍하지도 않는다. 죽은 듯 잠을 잔다, 새우처럼 두 다리를 오므린 채 잔다. 불안해 보인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아무도 누구도 없는데 불안해 보인다. 동생도 제 밥벌이 했던 적이 있었다. 중소 출판사였다. 한 직원이 동생이 게이라고 아웃팅을 해버렸다. 회식 자리였다. 동생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아웃팅 후의 침묵을 나름대로 즐겼다. 퇴사하고 싶다고 난리를 치던 때라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동생은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 후 회사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동생을 피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례한 질문을 던지기 일쑤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해성 씨는 남자 역할이야, 여자 역할이야? 혹시 트랜스젠더 아냐? 나 해성 씨가 트랜스젠더 같다고 생각했었거든. 물론, 다 추측이고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우리는 잘 모르잖아. 네가 이해해줘야지.

그들은 그렇게 말해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동성애자한테는 월급을 우리보다 적게 줘야 되는 거 아니냐며, 부양할 가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말을 뱉었다. 부장은 동의하냐고 동생에게 물었고, 동생은 웃었다. 그 얘기를 듣는 나도 웃었다.

 

7

경적 소리와 함께 주유차가 들어선다. 나는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주위를 둘러본다. 동료들은 보이지 않는다. 주유소에는 나 혼자다. 주유차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는 게 없다. 트럭의 둥근 벽면에는 조그만 사다리만 달려있다. 차 귀퉁이에 꽂힌 확인서를 집어 든다. 제대로 왔는지 체크를 해야 한다. 나는 동료들이 주유차를 확인하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기억이 흐릿하다. 나는 사다리를 조심스레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꿈틀대는 기름의 홍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름 냄새에 질식할 것을 참고 주유통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180도로 뒤집히는 느낌과 함께 차갑고 미끄덩한 무언가가 나의 몸을 휘감았다. 나는 사다리 대신 허공을 내딛은 왼발의 감각을 선명히 느꼈다. 나는 기름의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나를 집어삼킬 듯 온 몸의 구멍에 들러붙는 기름이었다. 겨우 주유통 둥근 바닥에 발을 디딘 나는 머리 위 뚜껑이 닫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뚜껑 근처에 손톱마냥 삐져나온 사다리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출렁거리는 기름만 나의 얼굴을 때릴 뿐이었다. 기름방울이 나의 눈동자에 스며들어 각막처럼 덧씌워졌다. 기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손은 어디에도 녹아들지 못한 채 허공을 긁어댈 뿐이었다. 어째서 뚜껑이 닫힌 거지. 나는 일순 들려온 바깥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트럭 엔진음이 들렸다. 둥근 원형의 주유차 천장은 기름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심연이었다. 내가 디디고 있는 기름 속 허공은 언제 무너질지 몰랐다. 나는 문득 기름이 점점 차오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유차 운전자가 나를 발견한 것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어느 순간이다. 그는 휘발유가 아니라 경유가 왔다는 주유소 직원의 말에 다시 되돌아가고 있던 중이라고 했다. 그 직원이 확인을 다 했다길래, 이런 줄은 몰랐지. 운전자는 화물 휴게소의 샤워실을 빌려 쓰라고 말했다. 나는 휴게소 안의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기름처럼 둥둥 떠다녔다. 샤워실에 따로 성별이 있지는 않았지만 벌거벗은 남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냥 옷을 벗는다. 맨몸으로 샤워실로 향한다. 샤워 꼭지는 너무 멀리 있다. 물줄기는 내 몸에 닿지 않고 욕실 타일만을 두드린다. 나는 세면대 아래의 받침대를 밟고 올라섰다. 미끈거리는 기름은 비누로 아무리 박박 문지르며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수증기로 뿌연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오른손으로 거울을 닦아낸다. 거울은 나를 비추지 않는다. 나는 영원히 내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란, 예감. 늘 나를 낮추지 않으면 이방인이 되고 마는 세상.

괜찮아.

나는 내게 말한다.

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때서야 눈물이 흘렀다.

 

PC방으로 늦은 출근을 한다. 사장이 나와 있다. 그는 내게 내일부터 나올 필요 없다고 통보한다. 수익이 적어 이제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지난 한 달치 월급을 달라고 한다. 사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만원짜리 몇 장을 세더니 내게 던지듯 준다.

이게 전부인가요?

그럼, 전부지. 뭐 얼마나 일했다고. 그마저도 애들한테 돈 털리지 않나, 원.

저, 열심히 했는데요.

목소리가 떨린다.

좀만 더 주시면 안돼요?

피부에 오일이라도 발랐어? 피부 좋아 보이네. 이왕 그렇게 된 거 푹 쉬어.

사장은 오천원짜리 한 장을 더 내민다.

이걸로 저녁이나 사드시고요.

그가 존대를 한다. PC방 일자리도 다 끝났다는 얘기였다.

집 월세를 또 미룰 수 있나. 나는 집주인의 전화번호를 천천히 되뇌어본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한 마리에 오천원! 라고 적힌 커다란 팻말이 눈에 띈다. 옛날 통닭집에 새로 생긴 모양이다. 한 마리에 육천원, 두 마리에 만 천원이다. 현금가다. 카드 결제는 천원이 더 붙는다.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지갑을 꺼낸다. 반의반으로 접어둔 지폐들을 센다. 만원. 이천원이 부족하다. 나는 가게 사장을 내려다본다. 창문에 가려 사장의 턱만 보인다. 나는 허리를 숙인다. 눈이 마주친다. 저, 이천원이 모자란데 계좌........ 말을 끝맺기도 전에 사장은 만원만 받겠다고 말한다. 그의 눈길이 빠르게 내 몸을 훑는다.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통닭 두 마리가 담긴 봉투를 건네받는다. 맛있게 드세요. 가게 사장이 큰 소리로 말한다.

집에 돌아오니 동생이 소파에 누워 누군가와 한참 떠들고 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는다. 책상 앞에 주저앉는다. 나는 통닭을 한 마리 꺼낸다. 두 손으로 잡는다. 먹기 시작한다. 기름이 입에 묻든 닭껍질이 바닥에 떨어지든 상관 하지 않는다. 먹는 데 집중한다. 껍질을 뜯고, 뼈에 붙은 살을 쪽쪽 빨아먹는다. 한 가닥의 살점도 양보할 수 없다. 뼈를 뱉고, 뼈를 쌓고, 뼈와 살을 발라낸다. 퍽퍽한 살은 이 사이에 잘 끼고 잘 넘어가지 않는다. 콜라도 사올걸, 후회하며 의식적으로 턱을 더 힘차게, 자주 움직인다. 닭기름이 뚝뚝 떨어진다. 오돌뼈까지 꼭꼭 씹어 먹는다. 오도독, 오도독, 뼈가 부러지도록. 두 개의 닭을 모두 해치운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나는 시선을 동생에게로 옮긴다. 뭐야. 치킨 사왔어? 그가 말한다. 근데 왜 혼자 다 먹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날 바라보던 사장의 눈길을 기억한다. 그 시선을, 눈알을 도려내고 싶은 욕망이 너울대던 순간. 동생을 응시한다. 이천원 깎아주더라. 동생이 왜? 묻는다. 몰라, 나도. 나는 실소를 터뜨린다.

 

8

주유소는 한적하다. 동료들은 밀려오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느라 정신이 없다. 세차장 역시 대기하는 차들로 붐빈다. 나는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소장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책상 앞에 앉아있던 주임과 시선이 닿는다. 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비웃는다. 나는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간다.

소장님 어디 가셨나요?

당신이 알아서 뭐하게요?

그는 바깥을 힐끔거린다.

여기 직원이니까요.

직원?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올려다본다. 주임의 모난 돌 같은 머리가 좌우로 흔들린다. 그리고 실룩이는 눈썹과 줄다리기 하듯 움직이는 입 선.

멋대로 주유차 확인하고, 기름통에 빠지고. 사고 쳐놓고 와서 돈을 달라고?

돈 달라는 소리 안했는데요.

그게 그 소리지. 직원이면 돈을 받잖아.

소장님 어디 계세요.

여기 안 계셔. 모친상 때문에 지방 내려가셨지.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하지만 그건 상관없지. 어차피 당신은 이미 잘렸어.

누가 그래요?

소장님이 그랬어.

그의 얼굴은 이목구비를 망가뜨리는 미소를 띤다.

그리고 말야, 나한텐 안 대줄 거야? 보니까 다른 놈들한텐 다 다리 벌리고 다녔다는데, 그러면서 밥 얻어먹고 교통비 챙기고. 뭐, 그런 짓 하고 나서 받은 것 치곤 약소하다만. 나한텐 왜 아무 말이 없어? 내가 그렇게 우스워?

저릿한 떨림이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치닫는다. 전류라도 흐르는 듯 손이 가만히 있질 못한다. 거를 수 없는 난잡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유영한다. 몸속에서 커다란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 같다. 주임은 나를 내려다보듯 올려다본다. 내려다보듯, 그러니까 나는 분명 책상 앞에 앉은 170센티미터짜리 주임보다 높은데, 근데, 그는, 내려다본다.

기름 값 청구할 거야. 그 거대한 몸뚱이로 기름 다 엉망진창 된 거 알고 있겠지.

나는 등을 돌린다. 사무실을 나선다. 씨발년, 낮게 중얼댄 목소리가 발뒤꿈치를 좇는다.

처음엔 걸었다.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뛰었다. 달렸다. 사람들과 부딪혀도 사과하지 않는다. 앞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뜀을 멈춘 건 이름 모를 뒷산 입구에서다. 이미 날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다. 달은 텅 빈 내 속을 샅샅이 드러내 보이며 나뭇가지들에 전시한다. 뒷산 등산로의 가로등은 길바닥에 내 그림자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친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그림자를 밟고 지나간다. 그림자는 몇 번째인지 모를 나무에까지 걸쳐져 있다. 나는 산을 오른다.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순간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이닥친다. 고개를 돌리니 운동기구 앞에서 놀던 아이들 몇이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아이들은 등산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 그쪽엔 길이 없을 텐데, 하며 발을 떼는 순간 나는 내 자리를 기억해낸다. 나의 자리 밖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리를 벗어나면 나는 목줄이 풀린 개가 될 것이다. 나는 다시 달린다. 넘어진다. 땅바닥에 안면이 부닥친다. 흙냄새가 콧구멍을 파고든다. 낯선 냄새다. 그게 좋아 나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게 세상의 냄새구나. 사람들의 냄새구나.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따금 들려오는 사람들의 놀란 소리와 비명은 냄새에 묻혀 사라진다.

 

9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나와 동생, 우리만의 냄새가 나를 끌어안는다. 선우야. 어디 있니. 나는 목을 옆으로 뉘인 채 집 안을 살핀다. 부엌에 딸린 작은 방 앞에 선다. 닫힌 문을 두드린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다시 두드린다. 반응이 없다. 문고리를 쥐고 돌린다. 침대에 앉아있는 동생이 눈에 들어온다. 동생이 어디선가 묻혀온 낯선 그림자들의 잔해로 방은 어둡다. 나는 잔해들을 발로 걷어낸다. 무슨 일이야. 나는 묻는다. 아까 엄마가 왔다 갔어. 엄마가? 응. 잠깐의 정적을 딛고 묻는다. 여길 어떻게 찾아냈지? 나더러 아직도 동성애 같은 거 하냐고 물어보더라. 그러면서 돈을 벌라는 거야. 노조 같은 거 그만하고. 네가 하고 있는 짓들 이미 백만년 전에 사람들이 다 하다 실패한 것들이라고, 하더라. 동생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고개 좀 들어봐. 나는 말한다. 희미한 동그란 실루엣이 움직인 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을까.

난 주유소 잘렸어. PC방도.

그 말에 우린 소리 내어 웃는다. 더 크게 웃는다. 소리만은 어둡지 않다.

그럼 이제 뭘 먹고 살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그럼 노조는 어떡하지. 누나 말대로 삭발만 한 괴물이 됐어. 다 허무해. 차라리 그 시간에 엄마 말대로 돈을 벌었다면.......

나는 동생을 안는다.

너까지 포기하면 안돼.

누나는 이미 포기했어?

응, 아니. 아니....... 응.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서커스단에라도 들어가야지.

동생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진다.

라면 끓여줄게.

나는 동생의 방을 나서며 묻는다.

계란 넣을 거야?

 

10

아파트를 올려다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애엄마 둘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린다. 아이들 중 한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아저씨는 왜 이렇게 커? 아저씨도 우리랑 똑같애? 애엄마들은 이미 현관 밖을 나서고 있다. 나는 고개를 내젓는다. 안 똑같아. 우린 달라. 같이 놀자. 여자애가 말한다. 그 애는 공사장 놀이 장난감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나는 그 애를 따라간다. 애엄마들은 정자에 앉고,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모래를 갖고 논다. 여자애는 덤프트럭에 모래를 가득 담는다. 나는 다양한 모양의 삽으로 모래를 퍼낸다. 타원형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그러자 여자애는 무덤 싫어! 소리친다. 우리 집 만들 거야. 여자애는 내가 만든 아이스크림을 모두 흩뜨려 놓았다. 집을 짓자. 트럭이 움직이고, 집을 만들 터에다 모래를 쏟아놓는다. 여자애는 그것을 네모나게 단단히 뭉치기 시작한다. 나 역시 여자애를 따라한다. 그러나 모래는 금방 부서져 내리고 만다. 물이 필요해. 내가 작게 말한다. 엄마한테서 물 좀 가져올래? 여자애는 응, 하며 제 엄마에게로 달려간다.

여기.

나는 트럭에 담긴 모래에 물을 붓는다. 그리고 조물조물 매만진다. 아까보단 더 잘 달라붙게 되었지만, 금방 부서지는 건 똑같다. 어쩔 수 없었다. 여자애는 집을 짓지 못하자 울기 시작한다. 울지 마. 말을 꺼낸다. 집 없어도 돼. 그냥 여기 눕자. 나는 모래밭 위에 눕는다. 너도 누워. 편해. 여긴 천장이 없어서 좋아. 여자애가 따라 눕는다. 여기가 집이야. 나는 말한다. 물이 마르면 엄마에게 가면 돼. 배가 고프면 모래를 한 움큼 퍼먹어. 놀고 싶으면 트럭을 움직여. 모든 게 너의 것이고 네 맘대로 할 수 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뒤에서 여자애가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집에 가지.

여기가 집이라고 했잖아.

네 집이지. 내가 살기엔 난 너무 커버렸어.

엘리베이터를 탄다. 닫히는 문 사이로 여자애의 얼굴이 보였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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