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신화의 종말

2019.07.31 00:3007.31

그날 오후에 시프는 도서관에 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은 날씨가 아주 좋았고 도서관의 낡은 목재 냄새보다는 수영장의 달궈진 찬물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시프도 번민에 빠져있던 차였다. 누군가 시프를 불러세웠다. 뒤에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왕궁 시종 제복을 입었고 피곤한 얼굴이었다. 행정부처에서 일이 잘 안 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프는 그를 동정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전하께서 부르셨다. 너한테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단다.”

 

시프는 모나비를 따라갔다. 복도를 걷는 동안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유리가 전부 설명해줄 것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모나비와 시프가 입장했다. 커다란 탁자 뒤에 유리가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유리는 방에 들어오는 시프를 직접 일어나서 맞이했다.

 

유리는 1세대의 일원이었다. 지상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인 사람이었으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강대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소년인지 청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용모를 지녔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소년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 나이는 겉보기보다 훨씬 많았다. 그의 눈동자는 무지개빛을 품었다. 백금발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반사하며 후광처럼 불타올랐다.

 

유리는 전세계를 통치했다. 모두 그가 불가능해 보이며 힘든 과업을 맡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 번 겁화로 불타오른 뒤에 폐허가 된 세상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시프는 유리를 사랑했고 존경과 경의로 대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전하, 저를 부르셨다고요?”

 

유리는 부드럽고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로드브리스에 사절을 보낼 생각이야. 네가 그곳에 사절로 가서 루인에게 편지를 전달해주었으면 해.”

 

시프는 귀가 뜨였다. 로드브리스는 세상에서 유일한 요정들의 나라였다. 요정 여왕의 통치 아래 왕국 중에서 가장 번성하고 부흥했으며 강대했다. 특히 요정 여왕은 유리의 연인이기도 했다.

 

시프는 자신이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들뜨기보다는 그 무게에 먼저 겁을 먹었다.

 

“제가 그 일을 맡아도 될까요? 저는 아직 어린데요.”

 

“그 점은 이미 고려했어. 하지만 지금은 여력이 있는 사람이 없어.”

 

시프는 동감했다. 인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관료가 아니라 겨우 학생인 시프라면 며칠 자리를 비워도 괜찮았다. 지금 시점에서 시프는 적당한 인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저 혼자 임무를 수행해야 할까요?”

 

문제는 로드브리스로 가는 길이었다. 여행길은 온갖 위험으로 가득했다. 길가에는 여행자를 노리는 습격자들이며 흉폭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즐비했다. 과연 혼자서 로드브리스까지 갈 수 있을까?

 

유리는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러지는 않을 거야. 길이 많이 위험하니까. 모나비가 함께 동행할 거야.”

 

옆에서 모나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프는 수긍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유리는 시프에게 단단히 봉인된 편지를 건넸다. 가운데 왕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시프는 편지를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었다.

 

“전하, 저를 위해 축복해주세요.”

 

“카마니시프, 그대를 왕국의 사절로 임명하니, 로드브리스의 여왕에게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위험할 때 자신을 믿으렴.”

 

시프는 유리에게 무릎을 꿇었다. 유리는 시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리의 손은 따뜻하게 뒤통수를 덮었다. 그것은 시프가 평생 잊지 못하는 순간이 되었다. 나중에 시프는 언제라도 뒤통수를 감싸던 손길과 유리의 손길에서 흘러나오던 온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유리는 갑자기 멋쩍은 듯이 뺨을 긁으며 말했다.

 

“그리고… 혹시 답장을 받아올 수 있다면 받아오겠니?”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프는 왕의 사무실에서 즉각 물러나서 모나비와 함께 여행을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챙겼다. 가방에 급하게 옷과 꾸러미를 쑤셔 넣었다.

 

돌아서 나오니 모나비는 이미 준비를 끝내고 자동차를 준비해서 왕궁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던게 분명했다.

 

자동차는 오래된 구식 물건이었지만 쓸만한 물건이었다. 그럭저럭 잘 굴러갔고 잘 고장나지 않았고 연비도 좋았다.

 

모나비가 트렁크에 식량과 물과 무기와 연료를 실었다. 모나비는 시프에게도 장전된 광선총을 건넸다. 무법자들과 싸울 때는 스스로의 몸을 지켜야 했다. 시프는 문명을 거부하고 세상의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강대한 힘을 가진 소년왕 유리조차도 세상을 되살리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프는 자동차에 타서 창가에 매달렸다. 시프는 요정의 나라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수도 바깥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 몹시 기대됐다. 요정들은 나무에서 기거하며 용모가 아름답고 몸놀림이 날렵하다고 했다. 또 몹시 사랑스럽다고 했다. 한때 인간과 요정은 오랜 교류를 나눴지만 지금은 교류가 끊어져 소문만 무성했다.

 

학교에서 그것을 전쟁의 여파라고 배웠다. 옛날에는 도시와 도시, 국가와 국가가 자유롭게 교역했고 교통이 편리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선대 사람들은 항상 후손들에게 전쟁 전이 얼마나 풍요로웠고 살기 좋았는지 얘기했다.

 

그러나 전후에 태어난 시프에게 그 모든 얘기들은 신화적 허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시프는 이민자들이 행성에 정착하고 나서 처음 태어난 세대였다. 그 이전의 이주 선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으며 행성 바깥의 존재도 하나도 몰랐다. 그 세대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일이었다. 곧 정착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무사히 살아남은 시프는 발랄하고 쾌활한 성격에 키가 훤칠한 미인으로 자랐으며 내부에 혼탁한 돌연변이 물질도 적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발현할 가능성도 적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기형과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도시를 벗어나자 녹색 구릉지가 잠시 동안 나타났다. 낮은 크기의 수풀이 길가를 따라 우거졌다. 양떼가 저 멀리 능선에 구름처럼 덩어리진 질감을 형성했다. 목동과 양치기 개가 양떼를 몰았다.

 

처음에 시프는 그 광경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아무 사람도 없는 곳을 달리다 보니 풍경도 지겨워졌다. 사람 사는 곳은 앞으로도 수백 킬로 미터를 더 가야 나올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조차도 수도만큼 번영하지 못했고 발전이 뒤쳐져 있었다. 유리는 가능한 시설을 복구하고 영역을 확장하려고 했지만 속도는 몹시 더뎠다.

 

지루해진 시프는 운전대에 탐을 냈다. 왕국에서 자동차 운전은 특정한 권위자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의 영역에서 벗어났으니 한 번쯤은 시도해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모나비, 내가 운전해봐도 돼요?”

 

모나비는 잠시 어두운 상상을 하는 듯 하더니 단호히 거절했다.

 

“아니, 안돼.”

 

시프가 다시 졸랐다.

 

“30분만요. 잘할 자신 있는데.”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쳇.”

 

시프는 포기했지만 아쉬워하는 눈길을 계속 보냈다. 심지어는 계속 운전대를 탐내다가 모나비에게 손등을 호되게 얻어맞았다. 모나비는 절대로 운전대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운전해.”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요.”

 

“순식간일걸.”

 

“언제나 그런 식이죠. 엄숙한 얼굴을 해서는 안 돼, 안 돼.”

 

시프가 모나비를 흉내냈다. 모나비는 자신이 언제 그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시프는 창틀에 턱을 기대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문득 시프가 물었다.

 

“모나비는 요정 나라에 가본 적 있어요?”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얼마나 오래 전인데요?”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야.”

 

“아하.”

 

시프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곳이었나요?”

 

“글쎄. 수십 년이나 흘렀으니 지금은 내가 아는 곳이 아닐 텐데. 직접 가보고 확인하는게 낫지 않을까?”

 

시프는 뾰루퉁했다.

 

“저는 이번이 처음으로 수도 밖으로 나가는 거잖아요. 바깥 구경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요. 엄청 궁금하니까 예전 모습이라도 들려주세요.”

 

“예전이라.”

 

모나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모나비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로드브리스는 아주 거대한 도시인데 아름다운 곳이야. 그 요정들의 도시는 숲 속에 감춰져 있고 모든 재앙의 시기가 오기 전에는 외부의 방문을 환영했었지. 그거 아니? 요정들은 나무에서 산단다.”

 

“에이, 제가 무슨 다섯 살 어린 애도 아니고. 너무 뻥이 심한데요.”

 

“진짜라니까. 내 말 믿어. 그 도시엔 거대한 나무가 수십 그루가 있어.”

 

아무리 봐도 허황된 소리였지만 모나비는 진지하기만 했다. 작정하고속이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시프는 속아준다는 티를 내며 재촉했다.

 

“알았어요. 그래서요?”

 

“요정들을 만나본 적 있어? 없지? 하긴 네가 태어났을 땐 이미 요정들과 관계가 끊겼으니까. 요정들은 아주 고귀하고 기품 있게 생겼어. 만나보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꼭… 인간 같지 않지.

 

그들은 온화한 성격에 날렵하면서도 우아하게 움직일 줄 알아. 그리고 요정들은 최고의 생명 공학자들이야. 어떻게 보면 환경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 행성에 지구 생태계를 복원하고 싶어했어. 처음에 이 행성은 상당히 황폐한 곳이었는데 요정들 덕분에 그나마 좀 살만한 곳이 됐지.”

 

그러자 시프는 요정 여왕에 대해 궁금해졌다.

 

“요정 여왕은 어떤 분인가요?”

 

“루인 센토?”

 

모나비는 그 이름을 불러놓고도 스스로 당황한 것 같았다. 마치 그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사실 타국의 왕의 이름을 친근한 듯이 부르는건 이상하게 들렸다. 시프가 옆에서 봐도 모나비는 난처해하고 있었다. 시프는 그런 반응이 의아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여왕님은 성함이 그렇게 되시는군요.”

 

모나비는 서둘러 당혹을 수습하고 얼른 대답했다.

 

“아름다운 분이지. 역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그 분이 유리 전하의 연인이었다는건 기억하고 있겠지?”

 

“역사는 제 전공이라구요.”

 

“…그리고 한때 행성 의회의 의장이고 행성 총독부의 환경부 장관이었어. 유리의 가장 강한 동맹이면서 협력자였지. 하지만 유리와 의견 차이로 물러나고 숲으로 돌아가야만 했어.”

 

“왜요?”

 

“얼핏 보았을 때 그들의 사상은 다른 사람들이 납득하기 힘들 만큼 과격해 보이기도 하거든. 그게 다른 사람들과 문제를 빚으면서 실각하고 말았지. 아쉽게도 그 후에 분리주의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요정들하고 외교가 단절되고 말았지만.”

 

“그렇다면 우릴 반겨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모나비는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잠시 후에 말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지.”

 

도시를 빠져나가고 두 시간 정도 지나자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움푹 파인 곳을 지나갈 때마다 자동차는 안정감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포장도로를 만드는 공사가 예정에 잡혀 있었지만 예산이 부족해서 자꾸만 미뤄지고 있었다.

 

녹지가 드물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황갈색의 지평선이 길게 이어졌다. 한참 황야가 나왔다. 적막 속에서 자동차가 내는 배기음만 들려왔다. 마치 무중력 공간 속을 끝도 없이 유영하는 것 같았다.

 

밤이 오자 헤드라이트를 켜고 어두운 길을 달렸다. 그들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차를 세우고 야영 준비를 했다. 첫 여행의 낭만에 가려져 있던 현실이 고개를 내밀었다.

 

일단 음식은 최악이었다. 그들은 짐꾸러미 속에서 가열 기구를 꺼내서 동결 건조 음식을 데워먹었다. 볶음밥 종류를 구현하려고 한 듯 했으나 어설펐다. 양념을 진한 맛으로 덮어서 간신히 삼킬 정도였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모나비는 가열 기구에 작은 냄비를 끓였다. 냄비 입구에서 증기가 펄펄 솟았다. 가열 기구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자니 시프는 졸음이 슬슬 밀려들었다.

 

하지만 주위 환경이 그러게 내버려두질 않았다. 불빛을 보고 날벌레들이 다가와서 귀찮게 굴었다. 시프는 손을 내저어서 벌레들을 내쫓았다. 벌레물린 듯 다리가 근질근질했다. 게다가 땅에서는 한기가 올라와서 엉덩이가 시려웠다. 앞으로 이렇게 6일을 더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암담해졌다.

 

그래도 밤하늘은 볼만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유난히 진하게 빛나는 별들이 있었다.

 

시프는 별들의 항행을 관찰하며 가상의 선으로 별 사이를 이어보았다. 별의 움직임을 보고 위치를 계산해보려는 것이었다. 시프에게 있어서 세상은 점과 선으로 표시한 지도와 하얗게 채워진 백지의 세계였다. 이곳은 새로 발을 딛은 곳이었다.

 

모나비가 다가와서 물었다.

 

“여행 첫 날의 소감이 어때?”

 

시프는 솔직하게 말했다.

 

“기대하고는 많이 틀리네요. 이럴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모나비는 냄비에 끓이던 차를 나눠주었다. 온기가 올라오는 컵을 붙잡았다.

 

시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모나비가 놀렸다.

 

“벌써부터 겁 먹은 거야?”

 

“네 맞아요.”

 

“전하께서 평소에 눈 여겨 보고 계셨기에 너한테 임무를 맡긴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시켰겠지. 좋게 생각해.”

 

“으음.”

 

시프는 차를 홀짝였다. 그 뒤로 대화가 끊겼다. 모나비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 날 밤은 그렇게 끝났다.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모나비와 시프는 폐허가 된 도시 근처에서 휴식을 취했다.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도시는 오래 전에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더 이상 살아있는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오염 구역이었다.

 

모나비는 요리를 준비하면서 그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때 지상 최대 도시였으며 번영을 누렸던, 그러나 그 명성은 평화 시기에는 몰라도 전쟁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분리주의자와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 도시는 집중적으로 핵 공격과 생화학 공격을 받았다.

 

시민들은 개전 초기에 기습을 받아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외곽으로 도망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염이 심각해지는 바람에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도시에는 웃음 소리는 시들었고 공격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만 들려왔다.

 

시프는 수백 킬로 미터에 걸쳐 지평선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도시가 어떤 영화를 누렸는지 알기 힘들었다.

 

한 때, 살아있던 모든 것은 부스러져 먼지가 되어 땅 위를 하얗게 덮었다. 골격만 남은 거대한 건물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때 시프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무너진 골조 사이에서 음영이 다른 그림자들이 바람에 휘날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시프는 그 그림자 속에서 눈동자 같은 것을 보았다.

 

“모나비, 저 도시에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어요?”

 

모나비는 스프를 끓이느라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아니. 어떤 용감한 사람도 저곳엔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했어. 복구반이 도시를 복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지. 이젠 아무도 돌아갈 수 없어.”

 

“그럼 저건 뭐죠?”

 

“뭐?”

 

시프는 어두운 도시를 가리켰다.

 

모나비는 고개를 들었다.

 

“저기 뭔가 있어요.”

 

“나한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눈 잘 뜨고 봐요. 뭔가. 움직이고 있잖아요.”

 

모나비는 한참 후에 대답했다.

 

“잘못 본 거겠지.”

 

“움직이고 있는걸?”

 

“천 조각이 어디 걸렸다거나. 그림자가 착시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건 말이 안 돼요. 모나비는 노안이 왔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직 젊다구요.”

 

“웃기시네. 이렇게 밤이 어둡고 달도 떠있지 않은데 뭔가가 보이는게 더 이상하잖아. 와서 밥이나 먹어.”

 

시프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도시를 향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안에서 뭔가가 계속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식사를 하면서 모나비가 말했다.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고 지상을 걷는건 환상에 지나지 않아. 인류의 수백만 년 역사 동안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어. 그런건 고대의 암흑기 때나 믿었던 일이야.”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뭐?”

 

“지난 전쟁에서 돌연변이 같은게 나타난 거라면요?”

 

“그건 아직까지 보고된게 없어. 만약 정말로 그런게 돌아다녔다면 환경부에서 이미 조치를 취했을 거야.”

 

바람이 무너진 건물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로 변했다.

 

시프는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도시 생각에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한참 밤을 뜬 눈으로 보내다가 살짝 밤하늘이 회색 빛으로 바뀔 때 간신히 잠에 들었다.

 

꿈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들이 다가와서 시프에게 말을 걸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귓가에 대고 속삭이고 속삭임은 절규와 비명으로 바뀌었다. 시프는 미칠 것만 같았다. 유령들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말이 아예 통하질 않았다. 그것들은 부서지고 찢어진 얼굴을 들이밀며 계속 비명을 질렀다. 시프는 잠에서 깨려고 했지만 몸이 아예 말을 듣질 않았다.

 

그때 누군가 따뜻한 손을 이마에 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손은 빛을 담고 있었다. 그러자 온몸에 있던 무거운 느낌이 사라지고 귓가에 절규하던 악령들도 모습을 감췄다. 시프는 한결 편안한 기분이 되어 잠에 들었다.

 

시프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잠에서 깼다. 모나비가 아침을 준비 중이었다.

 

시프가 따져 물었다.

 

“대체 왜 잠을 안 깨웠어요?”

 

“무슨 일 있었어?”

 

시프는 꿈을 얘기했다.

 

“엄청난 악몽을 꿨어요. 유령들이 나타났고. 저한테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여댔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제 머리에 손을 댔는데. 혹시 간밤에 제 머리에 손을 올렸어요?”

 

“아니. 나는 안 했어. 내가 볼 때는 너는 아주 잘 자고 있는 것 처럼 보였거든. 젊은 애가 왜 그렇게 기가 허하냐.”

 

“그럼 뭐였을까요.”

 

“어제 헛것을 봐서 그래.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거야. 와서 아침이나 먹어. 그럼 기분도 나아질 거고.”

 

시프는 어리둥절한 채로 무의식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돌아보았다. 폐허는 햇살을 받아 하얀색으로 반짝였으며 어제 곳곳에 일렁이던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시프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고 금방 잊혀질 것도 같지 않았다.

 

시프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오전의 도시는 새하얗게 햇빛을 반사하며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네 번째 날에, 그들은 도로 한복판에서 도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아스팔트 도로가 가운데 움푹 파여서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었다. 모나비는 혀를 차면서 차를 세우려고 했다.

 

그 순간 언덕 바위 뒤에 숨어있던 도적들이 나타났다.

 

도적들은 얼굴에 방독면을 쓰고 넝마가 된 갈색 옷가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네 발로 달리는 원시 생물을 타고 나타났다. 손에는 한 세대 전에 사용하던 구식 탄환 무기를 들고 있었다.

 

도적들은 총을 쏘며 자동차를 향해 달려왔다.

 

시프는 그들을 보고 다른 의미로 놀랐다. 도시에서 자란 시프는 생물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모습은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시프가 정신이 나가서 아무 것도 못하는 동안 모나비는 노련한 베테랑답게 즉각 대응했다. 시프에게 호통쳤다.

 

“무기를 가져와!”

 

시프는 정신을 차리고 침낭 사이에 처박혀 있던 광선총을 꺼냈다. 그리고 모나비에게 한 자루를 던지고 자신도 한 자루를 장전했다.

 

“쏠 줄 알지?”

 

“걱정 마요.”

 

시프도 충분히 무기 훈련을 받았다. 비록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사격에는 그래도 자신 있었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그렇세 속삭였다.

 

모나비는 자동차 본넷을 엄폐물 삼아 대응하기 시작했다.

 

시프는 자동차 아래에 숨어서 도적들을 겨누고 저격했다.

 

곧 사방에 광선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시프는 처음에는 긴장하는 바람에 실수를 저질렀다. 처음 발사한 광선은 흙더미를 맞췄다. 기수를 태우고 달려오던 원시 생물을 약간 놀라게 하는게 전부였다.

 

하지만 곧 조준이 능숙해졌고 금세 기수를 정통으로 맞춰서 떨어트리는데 성공했다. 주인을 잃은 원시 생물은 뒤돌아서 달아났다. 기수는 바닥에 떨어지고도 한참 끌려 다니다가 고통에서 벗어났다.

 

시프는 스스로의 실력에 만족감을 느꼈다. 가슴이 빠른 속도로 쿵쾅댔다. 살짝 희열이 들었다.

 

그 사이에 도적들은 자동차를 돌아서 모나비를 공격하려고 했다. 가장 빠르게 접근한 도적 하나가 모나비 근처에 접근해서 총검으로 내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모나비가 더 빨랐다.

 

광선이 발사되고 도적의 가슴께를 그대로 관통했다.

 

도적은 비명을 지르며 자동차 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자리가 시프의 코앞이었다.

 

갑자기 눈 앞에 창백한 사람 얼굴이 튀어나오자 시프는 비명을 지르며 자동차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모나비! 제 앞에 사람이! 으악!”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모나비가 시프의 머리를 붙잡고 내리 눌렀다. 시프는 차문에 머리를 박고 잠시 기절했다. 머리가 있던 자리에 탄환이 지나가면서 흙먼지가 튀었다. 모나비가 말했다.

 

“총 안 맞게 조심해라.”

 

예상 외로 모나비가 격렬하게 저항하자 도적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항이 이렇게 강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도적들이 약탈해오던 여행객들은 이보다 덜 준비가 되었고 약했다. 하지만 모나비는 숙련된 군인이며 무기도 강력했다.

 

자동차에 접근하기도 전에 동료들 몇 명을 더 잃자 도적들은 급격히 옆으로 선회하며 다시 언덕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자동차를 향해 총을 쏴대는걸 잊지 않았다.

 

짧은 전투 끝에 도적들은 언덕 너머로 완전히 달아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자욱하게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사라지자 도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덕 경사에 도적들의 피투성이 시체가 잡초처럼 늘어져 있었다.

 

시프와 모나비의 승리였다.

 

시프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끝난 건가요?”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은데. 싸워봐야 손해니까. 완전히 멍청한 녀석들은 아니라는 거지.”

 

모나비는 총을 어깨에 짊어지고는 언덕을 올라갔다.

 

심지어는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시프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모나비, 지금 뭐하는 거에요? 시체를 뒤지려고요?”

 

“이놈들이 누군지 알아야 할거 아니냐. 이런 놈들이 대규모로 떠돌고 있다면 순찰대를 파견해야 할지도 몰라.”

 

시프는 총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는 모나비를 따라갔다.

 

모나비는 시신들을 발로 차서 까뒤집고는 소매를 걷어보거나 귀 뒤를 살펴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예상대로야.”

 

“뭘 알았는데요?”

 

“와서 봐라.”

 

시프는 시체 하나의 손목을 걷더니 거기에 새겨진 문신을 가리켰다. 복잡한 양식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죠?”

 

“이놈들은 국제 연합 평화 유지군 제 1기병 사단이야. 즉, 지구 출신이라는 거다. 지난 전쟁 때 꽤 활약해주었지. 이젠 명예도 잃고 목표도 잃고 하잘 것 없이 타락했나보다.”

 

시프는 처음 들어보는 말에 의아해했다. 그 단어의 나열은 무의미하게 들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위험한 녀석들이라는 거죠?”

 

“만약 옛날 같았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이라면 도시에 위협이 되진 않아. 하지만 행상인들에겐 큰 위협이야. 나중에 순찰대에 알려두는게 좋겠어.”

 

그들은 자동차로 돌아왔다.

 

자동차는 여기 저기 구멍에 뚫려 있었다.

 

모나비는 보닛에 구멍이 뚫린걸 보고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엔진이 망가진건 아니겠지?”

 

모나비는 보닛을 열어보고는 절망했다.

 

우연히 엔진을 맞춘 모양이었다. 탄환이 부품을 관통했고 구멍으로 오일이며 냉각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둑놈들. 다시 돌아오면 모두 아작내버릴 테다.”

 

“심각해요?”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못 가겠다. 이걸 고치려면 한 나절은 걸리겠군. 이거 도와줄 수 있냐?”

 

“저는 자동차 공학 전문가가 아니라서요. 자동차에 대해서는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어쩔 수 없지. 가서 랜턴이랑 수리공구나 찾아와.”

 

모나비는 보닛에 랜턴을 걸고 자동차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주위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지평선 저편이 암적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모나비가 자동차를 수리하는 사이 시프는 주변을 감시했다. 도둑들이 복수를 노리고 다시 돌아올지도 몰랐다.

 

밤이 되자 주변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들판에서 맞이하는 밤은 추웠다. 시프는 모포를 꺼내서 둘러매고 모나비에게도 하나 갖다주었다. 하지만 모나비는 집중하느라 눈치채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도적들이 다시 나타날 기미는 없었다. 지루해진 시프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시프는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보다가 발이 총과 엉켜서 넘어지고 말았다. 모나비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쯧쯧. 경계를 서라고 했더니 졸고 있었어?”

 

“안 졸았거든요?”

 

“입가에 흐르는 침이나 닦고 말해.”

 

“에고.”

 

시프는 얼른 입가를 닦았다. 어느새 졸았던 모양이었다.

 

모나비는 몹시 지쳐 보였다. 어느새 하늘은 어슴푸레한 색상으로 바뀌었다.

 

“자동차 다 고쳤어요?”

 

“그래. 수리 끝났어. 얼른 자동차에 타. 이동할 거야.”

 

“어때요?”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이미 기한 수명이 지난 데다가 고장도 났으니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야. 무사히 돌아가면 다행이고 그나마도 폐차해야 할 거야.”

 

“고칠 수는 없고요?”

 

“이제 이걸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

 

“이런.”

 

시프는 자동차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자동차를 정말로 좋아했다. 그건 이 행성에 마지막 남은 내연기관 자동차였다. 이런 식으로 잃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들은 언덕을 떠났다.

 

모나비의 말대로 이미 자동차는 반쯤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이민 것 같았다. 자동차는 주행 내내 기침하는 노인처럼 골골거렸다. 총알이 엔진의 주요 부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때문에 달리는 속도도 절반쯤 줄었다. 모나비는 예전처럼 최대 속도를 냈다간 엔진에 불이 붙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 시간 정도 언덕에서 멀리 떠나온 다음에 모나비는 차를 세웠다. 평평한 지대였다. 주변 몇 마일 안에 살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다가오면 멀리서도 발견하기 쉬울 터였다.

 

모나비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우며 말했다.

 

“이쯤이면 되겠지. 잠깐 눈 좀 붙일 테니까 뭔가 발견하면 깨워.”

 

“예에.”

 

시프는 아직 새벽 하늘에 남아있는 별들을 보며 현재 위치를 계산했다. 왕궁으로부터 나흘 달렸는데 예상보다 멀리 이동해왔다. 원래 주어진 시간보다 훨씬 일찍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눈 앞에서 빛줄기 하나가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빛줄기는 느린 속도로 별무리 사이를 지나갔다. 시프는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빛줄기는 호선을 그리며 지평선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다시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별은 원래 궤도를 따라 왔던 대로 지나갔다. 시프는 자신이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 뒤에 모나비가 깨어났을 때 시프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말했다. 모나비도 자신처럼 놀라고 기뻐하기를 바랬다.

 

“모나비! 제가 대단한 천문학적 발견을 한 것 같아요!”

 

하지만 모나비는 길게 하품을 하고 나서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뭔데 그래?”

 

“저기 저편으로 움직이는 빛 줄기 보여요? 원래 별이 저렇게 빨리 움직이나요? 아니죠! 저건 뭔가 특이한 별인게 틀림 없어요.”

 

“아, 저거.”

 

모나비는 한참 별을 쫓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순간 시프의 마음 속에 한 줄기 빛처럼 기쁨이 담겨 있었는데,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낸 것이 아니라고 하자 금세 기쁨은 사라졌다. 실망한 시프는 입을 삐죽였다.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나는 오늘 처음 봤어요.”

 

모나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아주 전쟁이 심했을 무렵에 일이야.”

 

그것은 시프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임에 틀림없었다.

 

“어느 곳에 전쟁을 피해서 달아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하지만 이미 지상엔 그들이 도망칠 곳이 없었어. 아무도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 뒤에선 추적자들이 쫓아오고 그 사람들에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결국 그들은 거대한 새를 만들어서 지상을 떠나기로 결심했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새를 만들었지. 그 새는 수천 명을 태울 수 있었다고 해. 사람들은 그 새를 타고 추적자들을 피해 하늘로 떠났어.”

 

“그렇군요.”

 

“그 새는 날개짓을 하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날개짓을 하는 셈이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땅에 내려온 적이 없어. 저 빛은 그 새의 흔적인 셈이야.”

 

시프는 사라져가는 빛줄기를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그 사람들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까요?”

 

“모르겠다. 언젠가 평화로워지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내 생각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왜요?”

 

“그 사람들이 돌아오기로 결정했다면 벌써 돌아왔을 거야.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다는건 이미 그들이 지상에 애정을 잃어버렸거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럴까요?”

 

시프는 빛줄기를 쫓았다. 빛줄기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아갔다. 시프는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 사람들은 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걸까? 그곳엔 더 이상 다툼도 문제도 없는 곳인 걸까?

 

 

 

 

 

6일 후에 그들은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엔 그럭저럭 건물이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그래도 절반은 짓다 만 철골이 흉물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국경수비대는 본업에 충실했다. 즉,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월급만 타갔다. 모나비는 무뚝뚝한 얼굴에 기쁨을 떠올렸다.

 

“저 친구들이 저렇게 할 일 없이 있는데도 무사하다는건 사회가 안정되고 있다는 뜻이지.”

 

자동차가 다가오자 초소에서 국경수비대원들이 나왔다. 손을 흔들기도 했다.

 

모나비는 자동차를 주유소에 세웠다. 국경을 통과하기 전에 주유소에서 연료를 채우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일단 국경을 넘으면 주유소가 더 존재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고 같은 연료가 통용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왕이면 많은 연료를 채워갈 생각이었다. 모나비가 연료봉을 교체하는 동안 시프는 차에서 내려서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며 얼쩡댔다.

 

주유소 안에서 국경수비대원이 나왔다. 국경수비대원은 마치 오랜만에 사람을 본 것처럼 반가워했다.

 

“실례합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왕국에서 오는 길입니다.”

 

“여길 지나가시는건 목적지가 로드브리스겠군요. 맞습니까?”

 

“그런 셈이죠. 최근에 주의해야 할 사항이라도?”

 

“아뇨. 딱히 그런 것은 없습니다. 괜찮으시면 사무실로 초대하고 싶은데. 어때요? 다들 반가워 할겁니다. 왕국에서 돌아가는 얘기도 좀 들려주시고요. 요즘 무슨 일을 합니까?”

 

모나비는 주저했다. 시프는 찬성했다.

 

“이곳 사정 얘기도 좀 들어서 나쁠 거 없죠. 안 그래요?”

 

“나는 가끔 네가 어른스럽게 말하면 불안해진다.”

 

“어차피 몇 시간이잖아요.”

 

시프의 주장과 다르게 그들은 그날 밤을 아예 국경수비대 숙소에서 묵게 됐다. 어차피 시간이 늦어서 다시 출발하기도 어려웠다. 국경수비대원들은 정말로 여행자들을 반가워했다. 환대의 의미로 숨겨두었던 비장의 음식도 꺼내놓았다. 그 중에는 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전쟁 전에 생산된 정말 희귀한 물건이었다. 모나비와 시프는 둘 다 그것을 탐냈다.

 

대원들은 다들 왕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다들 새 소식을 궁금해했다. 로드브리스와의 통행은 오래 전에 끊겼고 요정들은 자신들의 안전한 숲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요정 나라로 가려고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국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곳 변두리에서는 왕국 중심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소식을 듣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왕국 정부에서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정치 얘기도 며칠 동안 화제가 될 정도였다.

 

“여긴 진짜 심심한 곳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아시다시피 저쪽에 눈에 들어오는 계곡은 전부 방사능 오염됐고 황무지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도둑이라 이쪽으로 오지 않으니까요. 요정들은 자기네가 만든 숲에서 나오질 않고요. 최근에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도 없어요. 사실 여러분이 나타났을 때 다들 환상인 줄 알았을 정도이니.”

 

“그럼 최근에 로드브리스 소식은 들어온 것이 없습니까?”

 

“아무 것도요. 아무 것도.”

 

대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질 않아요. 마치 아무도 없는 듯이….”

 

“요정들은 예전엔 많이 교류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다 옛날 일이죠. 지금은 거기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숲에 가까이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우리는 국경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잖아요. 순찰 범위도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움직임이 없다고 하니 되게 이상하네요.”

 

“그렇죠?”

 

그때 술에 심하게 취한 대원 하나가 붉어진 얼굴을 모나비에게 들이댔다.

 

“왜 그런걸 물어봅니까?”

 

아직까지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술에 취한 대원이 씨부렸다.

 

“전쟁 전에도 그렇게 캐묻던 인간들이 있었지. 정보부 말이야. 그러고 한 달 뒤에 전쟁이 터졌잖아.”

 

대원들은 당혹했다. 분위기가 냉각됐다.

 

“당신 정체가 뭐야? 요즘 같은 시절에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되게 수상해.”

 

“그냥 지나가는 여행객이요.”

 

“거짓말 아냐? 누가 신분증 확인해봤어?”

 

“그만하죠. 서로 얼굴 붉힐 필요가 어딨습니까?”

 

술에 취한 대원이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쳤다.

 

모나비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 내렸다.

 

“여기 있다 보니 좀 심심한가 본데 나는 불필요한 싸움은 안 해요. 여기서 그만둬요.”

 

“그래? 어디 실력 좀 볼까?”

 

싸구려 악당 같은 대사였고 그런 대사는 현실보다는 통속극에서 듣는게 더욱 좋았다.

 

술에 취한 대원은 싸움 자세를 취했다. 양손을 주먹 쥐고 허공에 올렸다. 만취한 상태였지만 자세는 확실했다.

 

시프는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라는 것을 알았다.

 

“아, 그래요?”

 

만취한 대원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온 시프가 필살 조르기를 먹였다.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이 순식간에 목을 휘감아 졸랐다. 아주 깔끔한 솜씨였다. 그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얼굴이 붉어졌다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더니 축 늘어졌다. 모나비가 칭찬했다.

 

“잘했어, 왈가닥아. 왕도로 돌아가면 초코바 잔뜩 사줄게.”

 

“됐어요. 야밤에 이게 무슨 소란이람. 아니, 어른들이 별 쓰잘데기 없는 일로 말다툼하고 있어요. 그럼 옆에서 말리던가.”

 

“네가 맞는 말 하니까 진짜 기분이 불안하다.”

 

분위기는 완전히 파장이었다. 다들 더 이상 잔치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고 그 날 밤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다른 대원들이 동료가 너무 술에 취했던 것 같다며 대신 사과했다. 그들에게 잔해를 대신 치우게 하고 모나비는 시프와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모나비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자러 간 줄 알았던 시프가 그 자리에 나타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 왜 거기 있었냐? 미성년자라서 술 못 마시게 한다고 안 불렀을 건데.”

 

시프는 눈을 굴렸다.

 

모나비의 머리는 순식간에 모종의 결론에 도달했다.

 

“너, 설마?”

 

“헤헤, 한 잔 밖에 안 마셨어요.”

 

모나비의 요정을 본 시프는 바로 줄행랑 쳤다. 그러나 시프는 생각과 달리 비틀걸음으로 걸었고 모나비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다음날 시프는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숙취로 인해 두통과 멀미를 동시에 겪으며 구역질난다는 표정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아쉽게도 숙소에는 정수된 물 밖에 없었다. 모나비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시원한 공기 냄새 좀 맡으면 나아질 거야.”

 

“주글거 가타요.”

 

“제발 차 안에다가 토하지만 마라.”

 

“노력해볼게요.”

 

“최대한 노력해야 할 거다.”

 

목적지까지 아직 열두 시간은 더 남아있었다.

 

그들은 국경수비대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국경을 넘었다.

 

맞은편 로드브리스 측에는 국경 초소고 수비대고 아무 것도 없었다. 건설하다 그만둔 건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전쟁 전의 국경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국경수비대가 없는데 왕국에서 사절이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리지? 그러려면 직접 가보는 수 밖에 없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여전히 불편한 표정이던 시프가 창밖을 가리켰다.

 

“아저씨, 저기 저거.”

 

“왜? 토할거 같아? 차 세워줄까?”

 

“아니, 저거. 나무 아니에요?”

 

모나비는 시프가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탑처럼 생긴 녹색 수직 구조물 여러 개가 보였다. 그것들은 얼마나 크고 높은지 끝이 구름에 가려져있었다.

 

예전에 로드브리스에 방문한 적 있던 모나비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로드브리스 나무다.”

 

“무슨 나무가 이렇게 멀리서도 보여요? 몇 시간은 더 달려야 전부 보이겠는데.”

 

“로드브리스 나무는 원래 그래 커.”

 

“고유 품종 같은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많지 않아.”

 

“로드브리스 사람들은 저 나무 속에서 생활한다던데. 진짜 그래요?”

 

“그래.”

 

울렁대는 표정이던 시프가 갑자기 히죽히죽 웃어댔다.

 

“로드브리스에 그렇게 미남이 많다던데.”

 

“넌 지금 그 상태에서 그 말이 나오니?”

 

“엘시던이 그랬어요. 로드브리스 남자랑 연애하라고.”

 

“걔는 그래놓고 정작 야스테랑 결혼했잖아. 야스테는 로드브리스 출신도 아닌데.”

 

“음, 그건 그러네요.”

 

로드브리스에 가까워질수록 나무의 크기가 점점 커져갔다. 동시에 울창한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은 우거지다 못해 검게 보일 지경이었다.

 

숲 가운데에 황토색 길이 나있었다. 자동차는 길을 따라 달렸다. 숲에서 나온 동물들이 도로 위를 거닐었다. 동물들은 자동차를 처음 보는 듯이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모나비가 동물을 피해가며 차를 움직여야 했다.

 

죽어가던 시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이 나서 살아났다. 시프는 도적들이 타고 있던 원시 생물을 제외하고, 살아있는 동물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면에 옛날에 동물을 본 적 있던 모나비는 심드렁해했다. 시프가 마구 질문을 던졌다.

 

“저거! 저거 무슨 동물이에요?”

 

“어차피 교과서로 봤을 거 아냐. 뭘 이름을 물어보고 그래.”

 

“그래도 눈으로 직접 보는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에요.”

 

“아, 그러냐.”

 

“저건 뭐죠?”

 

“사슴이네.”

 

“저건요?”

 

“판다인가?”

 

“모나비, 저것 좀 봐요. 저건 무슨 동물이에요?”

 

“달리는 차에서 창문 밖으로 팔 내놓지 마.”

 

“그게 동물 이름이에요? 되게 기네.”

 

“너보고 한 소리거든?”

 

아웅다웅하는 와중에도 모나비는 최대한 아는 만큼 답해주었다. 그래도 시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미 시프의 세대는 동물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세대였다. 그런 와중에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로 보게 되자 눈을 뗄 줄 몰랐다.

 

저 앞에 강이 나타났다. 비스듬하게 형성된 나무 수풀 아래로 거대한 폭의 강물이 흘렀다. 수십 미터는 될 법한 높은 폭포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이었다. 도시에서만 살던 시프로서는 그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프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강 가까이에서 자동차 배기음을 듣고 놀란 새들이 활개쳤다. 사방으로 새 그림자가 날아갔다. 시프는 여전히 흥분해서 외쳤다.

 

“저길 봐요. 새도 엄청 많아요.”

 

“새는 멀리서 볼 때나 예쁘지. 가까이선 별로야.”

 

“저 새 이름 알아요?”

 

시프가 가리킨 하얗고 깃끝이 형광 파랑인 새는 가지에 앉아서 깃을 다듬었다. 모나비는 잠시 생각하는 척 한 다음에 대답했다.

 

“닭이야. 아주 맛있는 녀석이지.”

 

숲에서 깊숙이 들어갈수록 로드브리스 나무의 존재감은 점점 커져갔다. 그 거대한 나무는 둥치에서부터 맨끝 가지에 이르기까지 단일종의 나무라고 하기보다는 식물의 집단 군락에 가까워 보였다. 덩굴이 주위에 겹겹이 둘러싸고 자란 것 같았다.

 

시프는 아예 창 밖으로 머리까지 내밀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주황색 커다란 덩어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덩어리는 노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서 집채만한 몸뚱이를 볕에 말리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노란 광채를 뿜었다. 이쪽에 관심이 없는 척 입을 쩍 벌리고 하품했지만 시선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시프는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시프는 모나비에게 물었다.

 

“모나비, 저건 뭐에요?”

 

“저건 호랑이야. 아주 위험한 녀석이지.”

 

“위험해요? 얼마나요?”

 

“동물 잡아먹는 녀석이야. 관심 끌어서 좋을게 하나도 없어. 세상에. 어쩌다가 저런 녀석이 나타났담.”

 

그때 가만히 있던 호랑이가 벌떡 일어섰다. 누워있던 털들이 바짝 일어섰다. 아무래도 움직이는 자동차가 관심을 끈 것 같았다. 호랑이가 고리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시프는 기겁했다.

 

“어, 저 녀석이 이쪽을 보는데요?”

 

“뭐?”

 

“속도 올려요.”

 

모나비는 신경질을 냈다.

 

“이게 최대야.”

 

모나비는 무리하게 악셀을 밟았다. 하지만 계기판의 눈금은 저속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상된 엔진은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배기구로 시커먼 연기를 뿜어댔다.

 

호랑이가 자동차를 향해 성큼 걸음으로 다가왔다. 위풍당당한 걸음에는 지배자의 위엄이 실려있었다. 노란색 동그란 눈에는 호기심이 어려있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앞발로 호기심 해소에 나섰다가는 상당히 잔혹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걸 누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거대한 털뭉치에 길쭉한 발톱이 달린 앞발은 자동차 따위는 통조림 따개로도 쓸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모나비가 악셀을 아무리 밟아대도 이미 맛이 가기 시작한 자동차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엔진은 흡사 죽은 자의 비명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기침을 토해내고는 속도가 절반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모나비는 절규했다.

 

“미치겠군. 시엘라, 잠깐 운전대 좀 맡아라.”

 

“뭘 하려고요?”

 

“총으로 호랑이를 쏘려고.”

 

“진심이에요? 호랑이를 죽였다가 요정들이 화내지 않을까요?”

 

“내 임무는 특사를 운반하는 거지 호랑이한테 생고기를 납품하는게 아니야. 저 앞발에 맞았다가는 온 몸이 산산조각 날걸? 그랬다간 전하께서도 실망하시고 나도 망하고 로드브리스도 망하는 거야.”

 

모나비는 이미 운전을 포기하고 뒷좌석에 처박혀있는 광선총을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시프는 잠시 생각하더니 모나비를 만류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총을 쏠게요. 만약 제가 호랑이를 죽이더라도 요정들도 특사한테는 아무 말 못하겠죠.”

 

“알겠어. 너한테 맡겨본다.”

 

광선총에는 저장된 에너지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서너 발 정도가 한계였다. 도적들하고 마주치는 바람에 에너지를 낭비한게 컸다. 그 정도로는 저 거대한 호랑이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시프는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호랑이를 향해 총을 겨눴다. 하지만 그 거대한 덩치를 마주하자 바로 그 기세에 압도당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힘들 만큼 내리 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었다. 이미 자동차는 속력을 잃고 느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호랑이 밥이 되는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경고조로 한 발을 쐈다. 그 광선은 호랑이 앞의 지면에 구멍을 내놓았다.

 

시프는 호랑이가 겁을 먹고 도망가길 바랐지만 오히려 그게 성질을 돋운 것 같았다. 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장난 자동차 따위 따라잡는건 순식간이었다.

 

시프는 머리 속에서 혼란이 일어나서 갈팡질팡했다. 대체 저기 어디를 맞춰야 하지? 맞춘다고 해서 물러나게 할 수는 있을까?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포효했다. 그 바람에 놀란 시프는 조준을 실수했다. 발사된 광선이 호랑이를 빗겨 지나갔다.

 

이제 광선총에 남은 에너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충전된 에너지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시프는 속으로 식은 땀을 흘렸다. 대체 어떤 미친 놈이 호랑이를 복원시키려고 한 걸까? 그 생물학자는 자신의 자기 만족적인 복원 생물이 지나가던 여행객의 목숨을 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그때 자동차 엔진이 덜덜덜 거리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엔진이 사망하는 소리였다. 모나비가 비명을 질렀다.

 

“악, 안 돼.”

 

“왜 그래요?”

 

“엔진이 죽었어.”

 

이제 자동차는 거의 거북이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관성으로 바퀴가 굴러가고 있을 뿐, 곧 동력을 잃고 멈출 것이었다. 모나비가 비명을 질렀다.

 

시프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호랑이를 향해 광선총을 쐈다. 그러나 하필 그때 자동차가 길가의 돌맹이와 부딪치면서 차체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조준도 흔들렸다. 시프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헉.”

 

발사된 광선은 그대로 호랑이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염 몇 가닥을 살짝 태운게 전부였다.

 

실패였다.

 

열 받은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날카롭고 거대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당연한 얘기지만 거기에 물리면 엄청나게 아플 것 같았다.

 

시프는 이를 악물고 최후의 한 발을 조준했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그때는 진짜 호랑이의 한 끼 식사가 될 판이었다. 목덜미가 식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어떡하지?

 

쏠까?

 

말까?

 

실패했다간 자기는 물론이고 모나비까지 죽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렵고 부담스러웠다.

 

호랑이는 어느새 50미터 안에 다가와 있었다. 몇 번 점프하기만 하면 자동차를 덮치는건 시간문제였다.

 

그대로 달려들까?

 

아니면 공중으로 뛰어올까?

 

호랑이의 노란 눈에는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시프는 급속도로 위축되었고 서둘러서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광선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시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위험한 물건은 집어넣으시죠.”

 

시프는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기이하게 생긴 사람이 서있었다.

 

그 사람은 외모는 중성적이었으며 갈색 머리를 뒤로 길게 넘겨 묶었다. 거인족의 혈통인가 싶을 정도로 키가 컸다. 아마 2m를 넘는 것 같았다. 눈은 청록색이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어깨는 다부졌다.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시프가 생애 처음으로 만난 요정이었다. 시프 세대에게 요정이란 전설적인 존재였다. 시프는 뜻밖에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총을 아래로 내렸다.

 

그 요정은 시프를 그대로 지나쳐서 호랑이 앞으로 나갔다.

 

시프가 만류했다.

 

“위험해요.”

 

호랑이가 시프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숨이 턱 막혔다. 그 시선은 너무나도 위압적이었다.

 

호랑이 앞으로 다가가는 요정이 걱정되었다. 아무리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호랑이는 그 정도쯤은 가볍게 해체해버릴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정은 호랑이를 향해 손을 휘저어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호랑이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는 한 번 포효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뒷걸음질치며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수풀은 오랫동안 흔들리다가 잠잠해졌다.

 

호랑이가 완전히 떠나고 나자 요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안심시키려는 웃음이 입가에 맺혀 있었다. 그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많이 놀라시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호랑이한테 등을 보이는건 위험한 일이라서요. 실례를 용서하시길.”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저는 산림 감시원 브린퀘도라고 합니다.”

 

“산림 감시원이요? 기사가 아니고요?”

 

“예, 그렇습니다.”

 

시프는 깜짝 놀랐다. 차라리 숙련된 전사나 레인저라고 하는 편이 옳아 보였다. 시프는 그가 다가올 때까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브린퀘도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러분은 이 근방에서 처음 뵙는 분들이군요. 외부에서 손님이 오는건 아주 드문 일인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느새 차에서 내린 모나비가 브린퀘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브린퀘도 씨. 저희는 왕국에서 로드브리스 정부에 파견된 외교 특사입니다. 저는 왕궁 시종 모나비이고 이 분은 왕궁 특사 시프 님이십니다.”

 

브린퀘도는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왕국이 아직 남아있습니까?”

 

모나비는 불쾌하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시프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예, 그렇습니다. 당신네 고립주의자들은 숲에만 틀어박혀 있느라 모르시겠지만 왕국은 아직도 건재합니다. 최근에는 행성을 복구하는데 집중하고 있고요.”

 

돌려서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빈정거리는 것이었지만 브린퀘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아니면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거나.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목적을 갖고 우리 왕국을 방문하신 손님이시군요. 제가 도와드릴게 있을까요?”

 

“잠시만요.”

 

모나비는 자동차를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동차는 더 이상 자력 주행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엔진이 완전히 퍼졌다. 수리 시설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유감스럽게도 자동차가 망가지고 말았으니 부디 귀하의 도시로 이송 가능한 수단을 제공해주시길 바랍니다.”

 

브린퀘도 역시 같은 판단을 했다.

 

“이래서는 도시까지 가는건 불가능하겠군요. 대체 어쩌다가 박물관에나 들어갈 골동품을 타고 계시는 겁니까? 또 이런 유물은 왜 이렇게 망가진 거고요?”

 

시프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도적들한테 습격을 받아서 망가졌습니다. 그 전까진 아주 잘 굴러갔어요. 정말로요.”

 

“유감입니다. 바깥 세상엔 아직도 무법자들이 돌아다니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도와드려야죠.”

 

브린퀘도는 팔 토시를 향해 뭐라고 말했다.

 

잠시 후에 근처의 수풀이 흔들렸다. 시프는 경계하면서 광선총을 움켜쥐었다. 브린퀘도가 긴장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수풀을 가르며 나타난 것은 브린퀘도와 같은 갑옷을 입은 요정 기사들이었다. 그들 역시 시프와 모나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브린퀘도가 설명했고 그들은 금방 납득했다.

 

그들은 순찰 차량을 갖고 와서 체인으로 자동차를 연결했다. 요정들의 자동차는 애초에 바퀴가 달려있지 않고 공중을 떠다녔다. 시프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것을 쳐다보았다. 모나비는 그것을 보고 흥분했다. 그에 비하면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물건이었다.

 

“그래. 저런게 진짜 자동차지. 보여, 시프? 예전에 인간은 저런걸 타고 다녔단다. 알아서 목적지까지 운전도 해줘.”

 

정작 시프는 심드렁했다.

 

“직접 운전도 못하는게 무슨 자동차에요?”

 

모나비가 한탄했다.

 

“이래서 개발 행성 출신이란.”

 

시프는 혀를 내밀었다.

 

“아이구, 지구 출신들은 왜들 그렇게 뻐기길 좋아하는지.”

 

그렇게 해서 시프 일행은 로드브리스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브린퀘도가 자동차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시프가 물었다.

 

“아까 그 호랑이는 뭐죠?”

 

“대단하죠?”

 

“예?”

 

브린퀘도가 웃었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녀석일 거에요. 산림 연구원에서 키우고 있는 아이랍니다.”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보이는데요.”

 

“이제 겨우 두 살인 걸요. 이름은 마리라고 해요. 암컷이죠.”

 

시프는 놀랐다.

 

“덩치가 그렇게나 큰데 두 살이라고요?”

 

“이 구역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또 다른 녀석들도 있다는 거에요?”

 

“예. 저희 목표는 생태계 복원이니까요. 이곳은 로드브리스에서 관리하는 산림 보존 지역입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300여종의 동식물을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계획대로 진행되기만 한다면 그 이상으로 유효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행성 전체를 녹지화하는게 목표입니다.”

 

시프는 충격을 받았다. 바깥 세상과는 관계없이 이곳은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다는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외부의 다른 나라들은 환경을 신경 쓸 겨를 조차 없이 절박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오염된 곳 없이 깨끗했으며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도시의 입구에 들어섰다.

 

로드브리스에는 무법자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이라는 것이 없었다. 경계선은 오직 표지판 하나 뿐이었다.

 

넓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목가적인 양식의 저층 건물이 나란히 서있었다. 통행로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수가 서있어서 도시에 녹음을 더했다. 도시 주변에 조성한 방풍림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하게 도시의 먼지를 흐트러놓았다.

 

건물 너머로는 로드브리스 나무를 넘겨볼 수 있었는데,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것은 나무라기보다는 탑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오래 자란 덩굴들이 탑을 감싸고 있었다. 탑은 구름까지 닿아서 상층부는 구름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과연 요정들이 나무 속에서 산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거리에는 요정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순찰 차량에 실려오는 오래된 골동품과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인간과 요정의 교류는 오래 전에 중단된 뒤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시프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이 자동차가 얼마나 아름다운데.

 

요정들은 인간의 외모를 초월한 모습이었다. 고귀하고 기품 있어 보이며 인간과는 이질적인 느낌을 띄었다. 다들 키가 컸고 얼굴과 눈동자에는 감정이 풍부하게 깃들어있었다. 우울해 보이거나 아파 보이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시프는 이미 이곳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모나비가 물었다.

 

“뭘 봤는데 그렇게 즐거워?”

 

“봐요. 저 사람들은 우리랑 달라요.”

 

“다르다는게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이야?”

 

“음, 저 사람들은 어딘가 아파보이지 않고 전부 다 건강해 보이잖아요. 제 말이 어떤지 아시겠어요? 우리들하고 완전히 달라요. 저건 좋은 일이에요. 어떻게 그런지 모르겠지만요.”

 

모나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과학 기술 덕분이야. 요정들은 그걸 잃어버리지 않았거든.”

 

“예?”

 

“세포 배양 단계에서 유전자를 조작해서 오염 물질과 손상된 부분을 건강한 대체 물질로 바꿔. 그리고 인공 자궁에서 아이를 키우지.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고 아프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거야.”

 

“그런게 가능하다고요?”

 

“예전엔 우리도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야. 지금은 기술을 잃어버려서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야. 만약 그 기술을 복원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아이를 구할 수 있을 텐데.”

 

가만히 있던 브린퀘도가 나섰다.

 

“바깥은 그 정도로 몰락해버린 겁니까?”

 

모나비는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후에 그 시선은 약간 누그러졌다.

 

“그래도 그나마 나아지고 있는 겁니다. 예전엔 대부분의 아이들이 질병을 갖고 태어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어요. 지금은 사망률을 30프로 대까지 낮추는데 성공했습니다. 여기 있는 시프는 드물게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지요. 몸 안에 오염 물질도 적고 기형이 유발될 확률도 낮아요. 하지만 모두가 이런 행운을 타고 나는 것은 아니지요.”

 

브린퀘도가 안타까워했다.

 

“미안합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줄 몰랐습니다.”

 

“아뇨. 당신이 미안해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만약에 기술을 복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오늘 방문하는 목적이…?”

 

모나비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릅니다.”

 

저 앞에 로드브리스 왕궁이 나타났다. 왕궁을 보는 순간 시프는 입을 벌렸다. 평평한 지면 위에 녹색 직사각형 건물과 여러 개의 탑이 서있었다. .

 

유리의 왕궁이 실용적이라면 로드브리스 왕궁은 화려했다. 한쪽 면에 햇살을 받는 부분이 나무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연두색으로 빛났다.

 

왕궁 도로 앞에 화려한 색상의 제복을 입은 의장대가 도열했다. 자동차는 그들을 지나서 원형광장을 반 바퀴 돌아 왕궁 건물 앞에 멈췄다. 의전관이 다가와서 자동차 문을 열어주었다. 모나비와 시프는 자동차에서 내렸다.

 

모나비가 의전관과 악수를 나눴다. 시프는 비로소 자신의 임무를 떠올리고 의전관에게 스스로를 소개했다.

 

“왕국 외교 사절 카마니시프입니다. 이쪽은 제 보좌 모나비입니다.”

 

“로드브리스 의전 담당 아카시아입니다. 로드브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카시아는 키가 크고 가느다란 몸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이었다. 시프는 그녀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는데 요정다운 느낌을 받았다. 요정들은 다 그런가?

 

옆에서 모나비가 말했다.

 

“저희는 루인 센토 여왕님께 전할 소년왕 유리 전하의 친서를 가져왔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왕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프는 브린퀘도와 작별을 나누고 아카시아 의전관을 따라서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 입구의 주랑 양쪽 기둥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금박 입힌 녹옥과 감람석, 녹수정, 온갖 장식들이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주랑 양편으로는 깔끔하게 정돈한 정원이 보였는데 분수대에서 사방으로 물을 쏟아내며 무지개를 만들었다.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는 수많은 방과 통로와 부엌으로 연결되었다. 실내도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미리 통보가 있었는지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한참 걸어가자 알현실이 나타났다. 거대한 문 앞을 경비병들이 지키고 서있다가 시프 일행이 나타나자 문을 열어주었다. 문은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내부가 드러나자 시프의 입도 크게 벌어졌다.

 

보석에 식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프는 요정들이 궁전 전체를 거대한 보석 광석을 깎아서 파내고 만든 거라고 확신했다. 그걸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장인과 예산이 필요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궁전 천장이며 대들보 바닥은 이음새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자연광이 통했다. 만약 날이 흐려서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기계 장치로 천장을 덮었다.

 

바닥은 보석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직조 무늬가 모자이크처럼 이어져 있었다. 벽이며 기둥에는 화려한 새김 문양이며 장식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 끝 알현실에 왕좌가 있었다. 왕좌는 세 칸의 계단을 밟고 오르게 되어 있었다. 계단에는 전설 상의 동물들이 새겨져 있었다. 자연광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속에서 동물들은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다.

 

왕궁에 사용된 공예나 장식에 비하면 왕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평범한 나무 의자였다. 그러나 그 위에 앉아있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요정 여왕 루인 센토가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인 센토는 요정족의 복잡한 전통 문양이 잔뜩 들어간 긴 옷을 입었다. 길게 자란 푸른 흑발이 발치까지 내려왔다. 피부는 석상처럼 새하얗고 푸른 혈관이 도드라져 보였다. 눈은 밤하늘의 그것처럼 칠흑 같이 어두우면서도 별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복숭아빛 입술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얼굴에선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총기가 엿보였다. 태도는 타고난 지도자처럼 오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권력과 권위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유리하고는 정반대였다. 유리가 친밀한 느낌이라면 루인에겐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장벽이 있는 것 같았다. 요정이 이해하기 힘든 존재라서? 다가오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그들의 지식과 탐구가 경이로워서? 너무나 낯선 존재이기 때문에?

 

시프는 루인 센토에게 경도되어 순간 인사를 하지 않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반면에 모나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인간식 예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과연 왕의 시종이라고 할만 했다. 뒤늦게 시프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아카시아 의전관이 말했다.

 

“왕국 사절단 대표 카마니시프와 보좌 모나비입니다.”

 

여왕이 입을 열었다.

 

“잘 지낸 것 같군요. 모나비.”

 

하대가 아니라 공대였다. 설마 왕이 공대를 사용할 줄 몰랐던 터라 시프는 당혹했다. 하지만 모나비는 이런 대우가 익숙한 듯 했다. 모나비가 살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덕분입니다.”

 

여왕은 시프를 가리켰다. 시프는 움츠러들었다.

 

“이쪽은 처음 보는데 누구인가요?”

 

자기 차례가 오자 시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저는 카마니시프라고 합니다. 왕의 내각에서 맡은 업무는 아직 없고 이번에 사절단 대표를 맡아 오게 되었습니다.”

 

모나비가 덧붙였다.

 

“시프는 우리가 정착하고 나서 처음으로 태어난 세대입니다.”

 

여왕은 놀란 듯 했다.

 

“이 아이가?”

 

모나비는 엄숙하게 말했다.

 

“사실입니다.”

 

“기쁜 일이구나. 그럼 아직 나이가 어리겠군. 그래서 업무를 맡지 못한 거구나?”

 

여왕의 목소리는 살짝 친근하게 들렸다. 시프는 불경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유리를 잘 부탁해. 가끔 덜렁대는 사람이라서.”

 

“황송합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시프는 의아했다. 유리가 덜렁댄다고? 시프는 유리가 덜렁대는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유리는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로봇 같은 사람이었다. 여왕이 말했다.

 

“나에게 가져올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시프는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아카시아에게 건넸다. 아카시아는 편지를 받아 루인에게 전달했다.

 

편지를 받은 루인의 눈에 언뜻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유리는 종종 내게 편지를 쓰곤 했지. 고집스럽게, 반드시 종이에다가 적어서 편지를 보내곤 했어. 예전에 내게 편지를 보냈던 일들이 생각나는걸.”

 

루인이 봉인을 개봉하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여왕이 말했다.

 

“유리는 여전히 신이 되려고 하는 구나.”

 

시프는 그 말뜻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있었다.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리고 질문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여왕이 대답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걸 뭐라고 하지?”

 

시프는 머리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기적이지요.”

 

“그렇다면 기적을 행사하길 바라는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시프는 대답을 망설였다. 섣불리 대답했다간 유리의 명예를 손상시킬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왕은 그런 기색을 이해한 듯 했다.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미안하구나. 하지만 인간은 기적을 행사할 수 없어. 그건 신의 영역이야. 신의 영역을 넘봐선 안 돼.”

 

시프는 황송해했다.

 

“저는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여왕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왕은 웃었다. 기분 좋기 보다는 자조적인 느낌이 강한 웃음이었다. 시프는 왜 여왕이 그렇게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마니시프라고 했나? 그냥 시프라고 불러도 될까?”

 

“예, 부디 그렇게 해주십시오.”

 

“싫어하는 사람이 있니?”

 

시프는 순간 몇 사람을 떠올렸다.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와서 싫어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타이른다면 어떻겠니?”

 

시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 내키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합리적인 보상을 제공한다고 해도?”

 

“조금은 낫겠지만 그래도 역시 내키지 않습니다.”

 

여왕은 알 듯 모를 듯 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그런데 개인과 개인의 일만 해도 어려운데, 그 이상의 단계인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의 일은 어떨까? 서로 성격이 다른 인간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어렵겠지요.”

 

“그렇지. 유리가 하려는게 바로 그런 거란다. 내가 유리가 신이 되려고 한다고 말한건 바로 그 때문이야. 인간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건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시프는 이해했다.

 

여왕이 계속 말했다. 그녀의 눈은 아련해진 채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이상주의자야. 항상 그랬지. 현실하고 타협할 줄을 몰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믿었고 이곳에 천국을 만들려고 했어. 하지만 거꾸로 그 이상이 유리의 눈에서 진실을 가리고 말았던 거야.”

 

그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유리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느니 차라리 서로를 죽일 방법을 찾을 존재들이라는걸 결코 깨닫지 못했어. 처음 행성에 정착해서 신들하고 전쟁을 할 때도, 분리주의자와 전쟁이 벌어질 때도, 끝을 모르는 탐욕이 이 행성을 무덤으로 바꿔버렸지. 모든걸 망쳤지!”

 

여왕의 감정적 분출에 시프는 놀라서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창백한 뺨이 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에는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여왕은 곧 감정을 자제했다. 뺨은 여전히 살짝 상기되었지만 애틋한 감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여왕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유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려는걸 막으려고 했다. 다툼과 언쟁이 있었고, 하지만 설득하는데 실패했어. 나는 그와 갈라섰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단다. 우리 모두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구나.”

 

여왕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유리가 스스로 왕으로 칭했을 때 나는 솔직히 기뻤어. 유리가 드디어 현실과 타협했다고 생각했거든. 더 이상 꿈을 쫓기보다 지금을 위해 살겠다고 선언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편지를 읽어보니 유리가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걸 알겠구나. 유리는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해. 그리고 유리는 그것 때문에 죽을 거야.”

 

불길한 예언에 시프는 등골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이 예언이 효력이 있을까? 정말 그렇게 될까?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여왕이 먼저 말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모두 이제 의미 없겠지. 우리는 이제 이곳을 떠날 테니까.”

 

그 말에 여왕의 신하들이 당황했다. 그것은 소수만 알고 있던 비밀인 듯 했다. 그것을 외국의 사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공표해버렸으니 파장이 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왕은 손을 저어 신하들을 가라앉혔다. 오히려 가장 동요하고 있는 것은 시프였다. 시프가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는 얼마 전에 가까운 성계에 거주 가능한 행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환경도 지구에 가깝고. 평화로운 곳이야. 우리는 가까운 시일 내에 그곳으로 이주할 계획이었다. 사실 며칠 남지 않았었지.”

 

시프는 요정들이 떠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말도 안 돼요.”

 

“우리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건 너무 무책임해요.”

 

순간 여왕의 눈가에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네가 뭐길래 그렇게 말하지?”

 

시프는 당당하게 말했다.

 

“당신이 떠날 자리에 남을 사람이요.”

 

여왕은 침묵했다.

 

잠시 후에 여왕은 쓸쓸히 말했다.

 

“오해하지 말길 바라. 이 행성에 처음 발을 들일 때, 우리는 풍요와 번영이 함께 할 것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순간이었을 뿐. 우리 역시 이 땅을 사랑했고 한때 행복했으나 이젠 축복의 때는 지나가고 황량한 폐허만 남았다. 나는 지도자로서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시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왕의 눈동자에는 확고한 결심이 실려있었다. 시프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세상과 작별하기로 결정했고 그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던 시프는 결심을 했다.

 

“그러면 저랑 약속 하나 해주실 수 있을 까요?”

 

“무슨 약속을?”

 

“언젠간, 다시 이 행성으로 되돌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기는 어렵겠지만 봄날 산들바람처럼 아름다운 시절이 오기를 기대하노라.”

 

“약속해요.”

 

시프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무엄한 행동이었지만 여왕은 꾸짖지 않았다. 여왕은 왕좌에서 내려와 시프와 손가락을 나눠 걸었다.

 

태양이 하늘 가장 끝에 걸리며 궁전의 바닥이 녹빛으로 불타오르듯이 환해졌다. 왕좌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여왕의 얼굴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시프는 만족한 듯이 환하게 웃었다.

 

여왕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하나만 약속해주렴. 우리가 떠나고 나면 우리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잊혀지고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존재가 되겠지. 하지만 너는 우리를 기억해주겠니?”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여왕은 아카시아에게 손짓했다. 미리 준비했던 듯 아카시아가 공손히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여왕은 시프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는 작고 가벼웠다. 시프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이건 유리가 원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주는 선물이다. 큰 도움이 될 거야. 반드시 그에게 전해주렴.”

 

“알겠습니다.”

 

“고맙다. 이제 가거라. 가. 우리도 바로 이곳을 떠날 테니.”

 

시프는 물러섰다. 문간을 넘을 때 시프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여왕은 뒤돌아 서있었다. 그 뒷모습은 몹시 슬퍼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경비병들이 문을 닫았고 시프는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시프가 목격한 여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왕궁 밖으로 나오자 브린퀘도가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새 자동차를 옆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왕님께서 먼 길 가시는 분들께 이 자동차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부디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그건 모나비가 원하던 진짜 자동차였다. 모나비는 당황했다.

 

“이렇게 귀한걸 받아도 됩니까?”

 

“괜찮습니다. 이제 저희들한텐 필요 없는 거니까요.”

 

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디 행운을 빌어요.”

 

브린퀘도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제 가십시오. 먼길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시프는 요정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무 한 그루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렸다.

 

첫 번째 나무가 수직으로 솟아오르더니 공중으로 치솟았다. 나무 둘레를 얽매고 있던 덩굴이 딸려나갔다. 덩굴 줄기가 끈질기게 버티다가 섬유 조직이 투툭 끊어져나갔다. 덩굴이 잘려나간 자리에 금속 표면이 드러났다.

 

나무 뿌리 아래에서 불꽃이 일었다. 연료가 연소되면서 생기는 연막이 커다랗게 일어났다. 연막은 주변을 안개처럼 덮었다. 시프는 마침내 그것이 정말로 나무가 아니라 광속 항해가 가능한 우주선임을 깨달았다.

 

첫 번째 나무는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가더니 이윽고 빛줄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나무들이….

 

나무들은 하늘에서 별이 되었다. 세상과 영원한 작별을 나눴다.

 

시프는 마음 한구석에서 깊은 실망과 상실감을 느꼈다. 요정들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세상에 요정들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자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지막 나무가 일어서더니 하늘로 올라가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빈 자리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세상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 때 시프는 루인이 선물로 남긴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곳엔 씨앗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것이 루인의 선물이었다.

 

시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강하게 움켜쥐고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나비. 요정들이 언젠간 다시 돌아올까요?”

 

모나비의 얼굴은 노을이 만든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모나비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간….”

 

모나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프는 모나비가 요정들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임을 알았다. 시프가 말했다.

 

“이제 가죠. 가서 우리의 일을 해요.”

 

그들은 왕국으로 돌아갔다. 국경을 지나갈 때 국경수비대에서 대체 로드브리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대체 그 굉음하며 하늘로 올라가던 것들은 무엇이었냐고 연신 질문했다. 하지만 시프도 모나비도 대답하지 않았다.

 

일주일을 걸려서 왕궁에 도착했다. 시프는 유리에게 요정 왕국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요정들이 떠났다고.”

 

“예. 그들은 떠났습니다.”

 

“어디로?”

 

“다른 차원으로 떠난 것 같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습니다.

 

유리는 한참 씨앗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가 흐느끼듯 떨리면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그의 어깨에 맞닿아 부서졌다.

 

“그럼, 우리는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거군.”

 

“여왕께서 전하께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시프는 루인에게 받은 씨앗을 내밀었다.

 

소년왕은 책상 위에 주머니를 쏟았다. 씨앗이 탁자 위로 둥글게 쌓였다. 소년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을 보고 시프도 놀랐다.

 

“이걸 정말 줬다고?”

 

“왜 그러십니까, 전하?”

 

“이건 보통 씨앗이 아니야.”

 

“그럼요?”

 

“이것 하나 하나가 데이터 저장 장치야.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르겠지만. 담겨있는 정보는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 같군.”

 

“그렇다면?”

 

“그래. 넌 네 일을 잘 해냈어. 고생했다.”

 

시무룩하게 쳐져있던 시프의 어깨가 위로 시프는 활짝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의 비어있는 부지에 새로운 건물들이 착공되기 시작했다. 시프는 건설 과정에 참여했다. 건물은 커다랗게 올라갔다. 대형 병원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사람들은 희망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들은 인공 자궁 안에서 안전하게 자랄 것이며 더 이상 아파하거나 기형으로 태어나서 죽어가는 것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건 전부 요정 여왕이 보낸 씨앗 덕분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시프는 사람들의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렸다. 그리고 요정들이 저 먼 우주 어디쯤에 도달했을지 생각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병원이 완성되고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건강했고 부모의 품에 안겨 새빨간 얼굴로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의사들은 아이가 유전적 질병이나 기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증했다. 다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복했다.

 

왕궁 뒤의 들판에 화사하게 꽃이 피었다.

 

그녀는 빛줄기가 되어 사라지던 나무들을, 누구에게도 들키려 하지 않았던 소년왕의 슬픔을,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버린 요정들을, 세상과 기나긴 작별을 나누며 느꼈던 메워지지 않을 상실감을 생각했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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