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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영원의 은둔처

2019.07.22 12:4407.22

달이 가득 차기 몇일 전, 나는 격전지 주변의 여관에 발이 묶여있었다. 전쟁통에 돌아다녔다가는 객사를 당할지도 모르고, 북부의 겨울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예 이곳에서 봄을 기다리려는 참이었다. 그럴 생각으로 선금도 두둑히 맡겼고.

 

"슬슬 선금으로 낸게 바닥입니다."

 

수십 년을 이곳에서 보낸 여관주인은 특유의 북부 억양으로 나를 재촉했다. 선금이 바닥날 리가 없다. 저번 달에 금화를 얼마나 맡겨놨는지도 모른다.

 

"어디 장부좀 봅시다. 하루 묵는데 금화 한 닢이였죠? 그럼 분명 꽃필 무렵 까지는..."

"방값은 한 닢이 맞는데, 물처럼 마신 술 값은 따로 계산해야죠."

 

그는 나에게 빼곡한 장부를 내밀었다. 삐뚤빼뚤한 서명에서는 술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 서명이 맞는 것 같다. 술이 웬수지, 한겨울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남아 있는 잔금으로는 나흘입니다."

"아이고 머리야... 한 잔 먼저 주시오."

"이제 사흘입니다."

 

나는 여관주인이 내려놓은 술 한 잔을 잽싸게 잡았다. 코에 그윽한 참나무 향기가 맴돌자 머리가 슬슬 돌기 시작했다. 연갈색 한 모금을 넘기자,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차갑게 그려졌다. 나는 아주 좆됬다.

 

"여기 사냥꾼 있습니까?"

 

자괴감에 빠져있을 즈음 쿵, 하니 문이 열렸다. 어깨 너머로 고고한 제국의 억양이 들려왔다. 나는 손님 한 명 없는 여관이지만 혹시나 나를 보지 못할까봐 오른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여기, 내가 사냥꾼이요!"

“따라오시오. 말을 준비했으니.”

 

전령을 따라 여관을 나오자마자 거쎈 로비사의 칼바람이 갑주를 뒤흔들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저 제국놈들이 무슨 일을 맡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숙박비를 땡겨놓지 않으면 사흘 뒤에는 얼어죽고 말 것이다.

 

쌓인 눈위로 말발굽 자국이 천천히 이어졌다. 닷새나 눈이 내리지 않은 덕분이었다. 천만다행이지, 조금만 더 눈이 내리면 말이 걷고 눕고의 문제가 아니라 설피를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신고 느릿느릿 걷다보면 아마 내년 봄쯤에 얼어죽은시체를 누군가 발견하겠지.

 

“얼마나 더 남은겁니까? 슬슬 손끝이 얼얼한데...”

“저 너머에 있는 붉은 깃발 천막이오.”

“참 아늑해보입디다.”

 

빈말이 아니었다. 아주 아늑해보이는 천막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의뢰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좋다, 좋아. 위험한 일이면 어떻겠나? 일하다 죽던 쫒겨나서 얼어죽던 똑같으니까 돈이나 많이 받아야겠다.

 

나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천막으로 뛰쳐들어가다시피 달려들었다. 두터운 천가죽을 젖히고 들어가니 얼굴에 따스한 기운이 와닿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제국군인은 나를 보고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나는 총사령관 파랄론이오. 추운길 고생 많았소, 술 한 잔 필요하겠군?”

“훌륭한 안목이십니다.”

 

이 사람은 찬바람에 시달린 몸을 덥히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윽한 참나무향기가 삼키자 식도의 위치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든다. 의뢰인은 술병의 마개를 닫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사냥꾼. 이 근방 지리 잘 아나?"

"사냥꾼 10년이면 자기 집 가는 길 말고는 다 압니다."

"그럼 은둔처라는 동굴도 알겠군. 이 근방인데."

 

은둔처, 알다마다.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거긴 들리는 사람마다 횡액을 당한다는 저주받은 동굴이었다. 어릴적부터 그런 흉한 곳에 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상세히 알고있죠. 위치와 악명까지도."

"그럼 잘됬네. 거기좀 다녀오게"

 

웃으며 그런 저주를 날리는 총사령관에게 욕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그는 묵직한 금화주머니로 내 말을 다시 눌러넣었다.

 

"이건 선금이고, 일 마치고 주둔지로 오면 두 배로 주지. 어떤가?"

"우리가 날품팔이 수전노라지만... 목숨이 달린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궁시렁거리긴 했지만 나는 선택지가 없었다. 임무를 거절하면 사흘 후에는 이 여관을 떠나야 한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군인들에게 위협받고, 해 떨어지고 매서운 밤바람이 불면 얼어죽는 수밖에.

 

"그래도 일이나 한 번 들어봅시다. 제국이 이렇게 후하게 처줄 사람들이 아닌데."

“47명, 어제 얼어죽은 내 병사들일세. 땅이 굳어서 매장도 못 해주고 있지."

"흠, 그렇다면 은둔처에 전쟁을 끝낼 방법이 있답니까?"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확고한 어조로 나에게 부탁했다.

 

"은둔처로 들어간 정찰대 생존자를 데리고 오게."

"생존자요? 거기서 뭐 난리라도 났답니까?"

"북부놈들에게 꼬리를 밟힌 것 같더군. 형국이 아주 불리해."

 

등 뒤에서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가까워진다. 그 소리를 들은 총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전령과 서로 한참을 속닥거리고나서야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일이 바빠지겠군. 가기 전에 선물 하나 주지."

"금괴였으면 좋겠는데요."

"헛소리 말고 조심히 받게, 날이 잘 드는 칼이니까."

 

총사령관은 자신이 차고 있던 칼 한 자루를 넘겨주었다. 흔한 제국군 칼 처럼 보였지만 은으로 세공된 문양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바쁜 일이 생겼다니, 또 로비사 사람들과의 전투가 다가온 것일까?

 

나는 선금을 받아들고 다시 추운 세상으로 나왔다. 하지만 주머니에 잔뜩 들은 금화가 제 스스로 열이라도 내는 것처럼 아까보다는 훨씬 따듯한 기분을 받았다. 여관에 도착한 나는 주인양반에게 금화주머니를 던지며 말했다.

 

"횃불 네 개에 식량 사흘치 챙겨주고, 남은건 장부에 적어두시오."

"챙겨는 드리겠습니다만, 어디로 가시나봅니다?"

"은둔처로 갑니다. 나도 내키진 않지만."

 

내 목적지를 들은 여관주인은 손사래를치면서 얼굴을 찌뿌렸다. 나도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여관주인이 쥐고 있는 주머니를 냉큼 받아버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 사람들은 그 동굴 얼씬도 하지 않아요."

"나도 내키지 않는다니까요?"

"그럼 부정 덜 타는 음식이라도 먹고 가시오."

 

여관주인은 허리를 굽혀 한참을 짐더미와 투닥거렸다. 그리고 나에게 내민건 해초 몇가닥이었다. 바다의 가호가 은둔처의 저주를 막아준다나 뭐라나. 헛소리로 치부하고 싶었다만, 나도 내심 불안해서 낼름 받아먹었다.

 

"그런데 이 일로 제국이 이기면 당신 영업에 문제 생기는거 아닙니까?"

"하!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오. 그 놈들은 결코 로비사를 가질 수는 없을꺼요. 두고 보시오."

 

거 참. 은둔처의 어둠속에서 다시 곱씹어보아도, 그보다 당찬 사람은 한 명밖에 더 없었다.

 


 

첫 번째 횃불이 절반정도 타들어갔을 무렵, 나는 로비사 추적자와 제국군 간의 교전지를 찾아냈다. 생존자를 찾는건 어려워보였다. 그저 꺼져버린 횃불과 주인 잃은 검과 방패. 그리고 그것을 쥐고 있었던 시체들 뿐이었다.

 

어느 편의 시체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내가 받은 임무는 제국군 생존자를 데려가는 것이지, 시체를 들추어 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횃불로 어두운 방향을 비추었고,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 살아 있어요?"

 

죽음의 문턱에 선 얫된 얼굴이 껄떡였다, 며칠을 어둠속에서 보낸건지 알 수 조차 없을만큼 초췌해보였다. 나는 내심 이 자가 제국군 생존자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제국군 생존자입니까, 아니면 북부?"

"무, 물좀..."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나라도 이런 뒤숭숭한 통로에 갇혀있다보면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에게 물과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생존자의 얼굴에는 곧바로 혈색이 도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은인이세요. 이 흉흉한 은둔처에는 무슨 일이시죠?"

"제국군 생존자를 찾으러 왔지만... 그쪽은 로비사 사람이군."

 

나는 쓰린 입맛을 다셨다. 갈증을 풀어낸 혀가 내뱉은 것은 나와 같은 차디찬 억양이었다. 하긴 돈을 그렇게 받아놓고 한 번에 일을 끝내려는건 도둑놈 심보였지.

 

"... 당신도 로비사 사람 이잖아요. 그런데 왜 침략자들을 위해 일하는거죠?"

"어릴때 살아서 말투만 배운거요. 그리고 그 침략자들은 돈이 꽤 많더군."

"우리가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도와준건 고마워요."

 

생존자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짧은 신음을 내뱉고는 다시 무너졌다. 정강이부분이 피로 물든 것을 보아 골절인 것 같았다. 어둠과 부상때문에 여기에서 죽어가고 있었군.

 

"난 내려가봐야겠는데 당신은..."

"마음같아선 기어서라도 나가고싶은데, 한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구조를 기다려야죠."

"지상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그럴 여유가 많지 않을겁니다."

 

그러니 제국마저도 자기네들 생존자 대려오는 일을 나에게 떠밀었지. 체급부터가 후달리는 로비사가 지원병력을 보낸다는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던지 살아남을겁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니까.”

 

생존자의 헛소리가 조금은 낭만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사람이 구조되는 것 보다 내가 구조되는게 더 빠르겠지. 나는 그에게 몇가지 선물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

 

"난 그런 헛소리 믿지 않아요. 여기 횃불 하나랑 독 미나리입니다."

 

나는 생존자에게 횃불과 말린 독 미나리를 넘겨주었다. 과연 독 미나리를 입에 무는 순간까지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그 다리로 여길 살아나가면 내가 술 한잔 사 드리지."

"좋아요, 그런데 독 미나리는 왜 주는거죠?"

"당신에게 포기할 기회를 주는겁니다. 잘 있어요."

"조심히 다녀와요. 내가 술이 맛있는 여관을 알고 있으니까."

 

어짜피 내가 구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는 다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생존자를 등졌다. 통로는 더욱 더 깊은 곳으로, 그리고 땅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의 덩쿨을 횃불로 쳐내며 천천히 내려들어갔다.

 

군데군데 핏자국과 한 두 구의 시체 말고는 찾을 수 있는게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어 시체의 상태를 확인했다. 두 진영의 시체 모두 부패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사후에 시신을 손 댄 흔적이 보였다. 이는 생존자가 남아 이 시신을 수습했다는 분명한 증거다.

 

나는 그 생존자를 찾아 더욱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횃불이 비추지 못하는 저 어둠 너머로 내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어둠속을 한참이나 걸었더니 속이 답답해져왔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었다. 저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메아리였던 것 같다. 서글픈 걸음을 한참이나 이어간 끝에 나는 비로소 통로가 아닌 어느 넓은 지하 광장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장은 돔처럼 둥글게 솟아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고대의 석탑이 서 있었다.

 

석탑의 몸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세밀한 음각이 되어있었다. 특정한 형태의 반복으로 보아 아무렇게나 새긴 것이 아니라, 어떠한 언어의 형태를 띈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일개 사냥꾼인 내가 파악할 수 있던건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확실해. 태곳적 이 땅을 거닐던 이들이 있었어."

 

그들은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은둔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종족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일까, 우리는 그들에 대해 추측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제국은 이곳으로 정찰대를 보낸걸까?

 


 

첫 번째 횃불이 거의 다 타들어갔다. 불빛이 흐릿해진 덕분에 두 번째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을 꽤 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내 목에 칼이 들어온 후에야 말이다. 무뎌진 횃불의 일렁임이 칼날 끝에서 반짝였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천만다행인 사실은 칼의 형태로 미루어보아, 나를 습격한 사람이 제국군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습격자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 내가 온 이유에 대하여.

 

"제국군 총사령관이 고용한 사냥꾼입니다. 생존자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헛소리 마라, 네 입에서 나오는게 북부 사투리인걸 모를 것 같나?"

 

염병할 혓바닥! 기억도 안나는 어린시절을 이딴 얼음지옥에서 보낸게 후회가 되었다. 어떻게던 이 습격자를 납득시키던지 아니면 맞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내 손은 은세공이 된 칼로 향했다.

 

아, 맞다. 칼.

 

"잠깐, 나에게 당신네들 총사령관의 칼이 있습니다. 한 번 확인해보시죠."

"칼이야 죽이고나서 가질 수도 있는거 아닌가?"

"확인이나 해보십쇼! 이 칼이 야전 장교가 들고다닐 칼인지, 아닌지."

 

그정도는 알고 있다. 은세공된 칼이 아무에게나 가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습격자도 모를리가 없다. 목을 베일 듯 겨누었던 칼이 조금은 멀어진게 그 증거다.

 

"좋아, 왼손으로 그 칼을 뽑아봐라. 단, 새끼 손가락은 펴고 뽑아."

 

나는 아주 천천히 칼을 뽑았다. 매끈한 검신에 붉은 횃불이 비추고, 장인의 솜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습격자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잠시동안 숨을 고르더니, 결국 칼을 거두었다.

 

"나는 정찰대장 아비소프요."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랍니까?"

"우리가 알아낸 것도 그리 많지 않소. 일단 계속 내려갑시다."

"잠깐, 내려가요? 난 당신을 데려가려고 왔단 말입니다."

 

다 잡은 토끼가 이번에는 나를 굴속으로 끌고 가려고 작정을 했다. 아무리 사냥꾼이 험한 곳과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지만, 목숨이 달린 일에는 예외가 항상 있는 법이다. 하지만 아비소프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내 일이 끝나지 않았네. 빈 손으로 돌아가면 잔금을 치뤄줄 것 같나?"

"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쇼."

"그런데 만약 나 홀로 가서 죽으면 어찌하겠나. 생존자를 데려가야하지 않나?"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게 뭡니까?"

 

슬슬 짜증이 나려던 즈음, 아비소프는 자신이 기다리던 질문이 나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와 같이 내려가지. 윗선에 이야기 해서 추가금을 받을 수 있게 하겠네. 더군다나..."

"더군다나 뭐요."

"자네도 궁금하잖나? 내려가는 길에 천천히 설명해주지."

 

나는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지만, 아비소프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 은둔처가 궁금했다. 왜 사람들이 이곳을 터부시하는지, 왜 제국군이 정찰대를 보낸 것인지. 그리고 이 전쟁도 끝낼 수 있다.

 

"좋습니다. 앞장 서시죠."

 

나는 두 번째 횃불을 높게 치켜들어 통로를 비추었다. 여전히 흐릿하지만 우리가 가야할 길 쯤은 비출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어둠속으로 더욱 깊게 들어갔다. 그 어둠속에서 아비소프도 슬슬 입이 간지러웠나보다.

 

“이보게 사냥꾼, 바깥 상황은 어떻던가?”

“로비사는 아직도 버티고있고, 어제만 제국군 47명이 얼어죽었다더군요.

“쯧, 대담하게 몰아치지 못한 까닭이지.”

 

아비소프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는 아까 자신이 한 약속을 떠올렸는지, 제국군이 은둔처에 온 이유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은둔처에 전쟁을 끝낼 만한 고대의 유산이 있다더군."

“정확히 어떤 종류의 유산이랍니까?”

“엄청난 힘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소. 잠시 횃불좀 빌리지.”

 

아비소프는 짙은 거미줄을 건네받은 횃불로 불살랐다. 이 밑으로 내려가는건 우리 둘이 처음일 것이라는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고대인의 유산을 최초로 보게되다니!

 

"고대인은 제 힘을 영원히 감출 수 있을거라 생각했겠지만, 그건 오산이야."

"이제 전쟁이 끝나겠군요. 그럼 당신은 앞으로 뭘 하실꺼죠?"

“글쌔, 나야 북부에 남아 치안유지를 해야겠지. 사냥꾼 당신은 금화를 쥐고 떠날테고.”

 

거미줄을 헤치고 나아가자, 아까와 같은 드넓은 방이 보였다. 그 곳에 장대한 크기에 석판이 서 있었다. 보는 이에게 묘한 어지러움을 주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그 크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지금껏 본 석판중에 가장 크군요."

"아주 좋아, 승리가 머지 않은 것 같군."

 

나는 천천히 다가가 석판에 손을 올렸다. 매마른 이끼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까와 같은 형태의 문장이 반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석판의 오른쪽 면에는 다른 형태의 문장이 써 있었다.

 

"이건 마치 다른 언어로 기술해놓은 것 같네요."

"읽을 수 있겠나? 고대의 유산이 어떤 종류의 힘인지 말일세."

"그정도로 학식이 높았으면 승냥이처럼 여관바닥을 기어다니진 않았겠죠."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려고 석판에 붙은 이끼를 때내었다. 감추어져있던 문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읽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점은 같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끽해야 '이 곳은 지배자의 잔해가 잠든 은둔처다. 이 문을 연 자, 죽음을 맞으리라.' 같은 내용이겠지만...

 

"어? 이건..."

"왜그러나?"

"이 부분은 읽을 수 있어요. 잠깐 횃불좀 잡고 있어봐요."

 

단어가 예스럽고 오래된 표현이 섞인 부분만 빼면 북부의 고어와 맥락이 비슷했다. 아비소프가 비추는 횃불로 나는 석판의 한쪽 면을 유심히 읽었다.

 

"온... 칼, 로. 고대인들은 이 곳을 온칼로라고 불렀어요."

"유산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건가?"

 

나는 내가 읽을 수 있는 부분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이 장소는... 명예로운 장소가 아닙니다. 가치있는 것은 여기에 없습니다."

 

마모된 음각 사이로 음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것 뿐입니다. 이 문자는 그 위험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이곳에 있다는 고대의 유산이, 위험하다고? 기묘한 표식과 해골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 위험이 내뿜는 힘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영원히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때 나는 마법에 홀린 것 처럼 환상을 보았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빛줄기와 굉음. 죽음의 연기가 버섯처럼 피어오른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증발한다. 이윽고 대지는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두 번 다시는...

 

"이봐, 괜찮나? 안색이 안좋은데."

"이건... 유산이 아니야. 고대인들마저 감당할 수 없어서 이곳에 방치한거요."

"아닐세, 자네가 방금 말했잖나. 이 힘으로 우리의 적을 죽일 수 있어."

"적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죽이고 말거요!"

 

내가 소리치자 아비소프는 당황한 듯 물러섰다. 하지만 침착하게 칼을 꺼내어 나에게 겨누었다. 나 역시 밀릴 생각은 없었기에, 총사령관의 칼을 꺼냈다.

 

"자네는 그저 사냥꾼이잖나? 돈만 받아 여기를 떠나면 될 뿐이잖아."

"목숨이 달린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죠."

"제국은 이 전쟁을 끝내고 하나된 대륙을 호령하게 될걸세."

"황무지가 된 벌판을 잿더미왕좌에 앉아 호령하게 될거요. 이 이상 우리가 다가가면 안됩니다."

 

아비소프는 들고 있던 횃불을 허공에 휘둘러 그 불빛을 꺼뜨렸다. 방 안은 완전한 어둠에 휩쌓였고...

 

발 딛는 소리와 함께 강철같은 주먹이 날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어둠이 덮힌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턱에 얼얼한 감각이 아직도 남아있다. 헌데, 저 멀리 붉은 빛이 아른거린다.

 

"거기 누구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붉은 빛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타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들겨 맞은 것 처럼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켜 그곳으로 향했다.

 

입안에서 비릿한 쇠맛이 난다.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이 더욱 강해진다. 미묘한 복통, 나는 천천히 죽음을 향해 걸어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점점 붉은 빛이 강해진다. 이미 한참을 타오른 횃불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횃불을 쥐고 있던 아비소프는 입에서 피를 흘린 체 쓰러져있었다.

 

"아비소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죽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원래 내것이었던 횃불을 다시 들어 주변을 살폈고, 이 곳의 정체를 다시 한 번 더 알게 되었다.

 

나와 아비소프는 수천 수만의 노란 강철통으로 둘러쌓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것이 고대인이 온칼로에 격리한 '유산'의 정체였다. 현기증이 났다.

 

노란 통 하나 하나에서부터 강렬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인중을 따라 뜨겁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뛰기 시작했다. 이곳에 조금만 더 있다간 진짜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때 열려버린 대형 문과 마주했다. 고대인의 망령이 천천히 세상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아까 보았던 환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망령은 로비사와 제국을 구분하지 않고 삼켜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고대인들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안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모든 것을 토해버릴 것 같은 불쾌한 힘에 맞서 문을 밀었다. 납으로 만든 육중한 문이 조금씩 움직였다. 하지만 너무나 무거웠다. 뛰쳐나오는 악령이 나를 덮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무거운 납덩어리는 수 만년 동안 그래왔듯 서로 다시 맞물리게 되었다.

 

문을 닫았지만 나는 아직도 죽어가는 것 같았다. 여전히 어지럽고 온 몸은 불에 타는 것 처럼 아팠다. 하지만 조금씩 몸을 움직여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는 있었다. 천천히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시야는 아까와 비교할 수도 없이 흐릿해졌다. 횃불이 점차 사그러들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죽어가고 있는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지쳐 쓰러졌다.

 


 

 

"나에게 해줄 말이 많을 것 같군, 사냥꾼."

 

나는 포근한 양모속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 눈에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내 곁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이 보였고, 그는 방금 들은 목소리의 주인일 것이다.

 

“여기가... 어디죠?”

“안심하게, 제국군 주둔지니까. 후발대가 자네를 모셔왔지.”

“후발대 보낼 여유도 있었습니까?”

“물론 없었지. 하지만 사냥꾼이 이틀이 넘도록 소식이 없으니 보낼수밖에.”

 

총사령관은 술잔을 권했다. 모진 고생 끝에 맡은 참나무 향기는 황홀하게 느껴졌고, 나는 단숨에 한 잔을 비웠다. 하지만 몸속의 찬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말해보게, 은둔처에는 무엇이 있던가?”

"그건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고대인의 저주였지요."

 

나는 내가 겪은 사실을 모조리 이야기했다. 비문에 적혀있던 고대인이 남긴 말, 아비소프의 행동과 죽음, 깊은 곳에 남겨진 저주에 대해서도. 총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소프는 호전광이었지. 그래서 우리측 생존자는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곳에 살아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총사령관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미소인지 통탄인지 구분하기에는 아직 내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 양피지에 빼곡하게 잉크를 흘려넣었다. 마지막으로 밀납으로 봉인을 한 끝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편지는 곧장 수도에 계신 황제에게 갈걸세.”

“고대인의 유산이 빚밖에 안 남았다는 보고서입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고,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혔지.”

 

이제 전쟁이 끝날 것이다. 유산만을 믿고 겨울까지 군사를 물리지 않은 제국은 버틸 재간이 없다. 수도의 호사가들부터 술집의 호색꾼까지 로비사의 패배를 예측했지만, 모두 틀렸다. 어떻게던 살아남은 그들의 방어전이 빛을 본 것이다. 잠깐, 어떻게던 살아남는다라...

 

“혹시 하나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문제있나?”

“혹시 은둔처에서 저 말고 다른 사람은 못 찾았습니까? 다리를 절고 어린 북부인인데.”

 

그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묵직한 금화주머니를 다시 한 번 여관주인 앞에 내려놓았다.

 

"살아올줄은 몰랐죠?"

"내가 준 해초가 부정을 막아준걸꺼요."

"고작 미역 한 줄기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술 한 잔단을 냉큼 달라는 손짓을 보여주었다. 맡겨놓은 금화도 많겠다, 이제 거리낄게 없었다. 아까 얻어마시고 온 술 보다는 덜했지만, 못지 않은 알콜향이 기분좋게 코끝을 울렸다

 

"그래서 일은 어떻게 됬답니까?"

"대성공이었어요. 이제 전쟁도 끝날겁니다."

"이제 막혔던 길도 열리겠군요. 그럼 곧 여관도 떠나시겠네요?"

"사냥꾼 일이 좋은게 뭐냐면, 급할게 없다는겁니다. 날 풀릴 때 까지는 굳이 나갈 생각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한 모금, 두 모금. 가슴속으로 따듯한 기운이 밀려들어와 추위를 몰아냈다. 아직 창 밖에는 겨울바람이 가득했다. 취해서일까? 나는 술잔을 들고 일어나 창문 너머로 휙 하고 뿌려버렸다.

 

"바깥도 이제 곧 따듯해질거요. 술이나 한 잔 더 따라주세요. 곧 친구가 올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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