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의뢰

2019.06.27 11:5706.27

1

그는 입을 가리는 버릇이 있었다. 돌멩이를 감싸쥐듯 입 주변을 작게 오므려 감쌌다. 나는 손을 입에서 떼라고 말했다. 그러면 건조해 껍질이 갈라진 얇은 입술이 드러났다. 시든 꽃처럼 허물어진 입술. 나는 다시 입을 맞췄고, 까슬까슬한 그의 입술에 나를 맡겼다. 그게 나의 버릇이었다.

 

2

소금 주머니를 챙긴다. 15년 된 아반떼 XD를 몬다. 신호등을 몇 번 거쳐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은정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선다. 30년 이상 된 아파트다. 새로 칠을 한 탓에 겉보기엔 기껏해야 10년 정도 되어 보인다. 작은 세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통 10평에서 15평 정도이다. 단지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햇빛이 비스듬히 내 차를 흘겨본다. 피부에 스며든 칼바람에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2단지, 207동, 나는 중얼거리며 핸들을 꺾는다. 그곳에 의뢰자가 있다. 의뢰자, 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하다. 왜냐면 의뢰자는 이미 죽었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이웃집 여자가 의뢰인이지만, 어쨌거나 정리할 유품들의 주인은 죽은 사람이니 말이다.

원래는 동료들 두세 명과 함께 해야 하지만, 받지 않겠다는 걸 억지로 받은 의뢰라 나 혼자 온 것이다. 대부분 고독사한 사람들이 의뢰인이었다. 집을 청소하고, 유품들을 정리하는. 귀신이 나온다는 곳 아니냐. 소장은 그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거기로 갔던 태진이하고, 누구냐, 그래 정민이도 귀신 봤다잖아. 터무니없는 얘기라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더랬다. 무슨 귀신이에요. 나이 오십 가까이 먹은 사람들이 귀신 얘길 하니 신빙성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 쪽이 선뜩한 건 사실이다.

주머니 속의 소금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207동 1-2라인 계단을 올라간다. 의뢰인은 6층에 있을 것이다. 602호, 나는 호수를 다시 확인했다. 호수 위에 대한장로회 십자가가 걸려 있다. 나는 문을 두드린다. 노크 소리에 누가 문을 열까 잠깐 기대를 했다, 말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의뢰인은 죽었으므로. 문고리가 걸림 없이 돌아갔다. 익숙한 냄새가 콧속에 들어찬다. 집안은 좁았지만 동시에 넓어보인다. TV 한 대와 3인용 소파 하나가 전부인 거실엔 맞은편 208동 아파트의 그림자가 짙게 쌓이고 있었다. 냄새의 원인은 방의 침대다. 소금 주머니를 꺼낸다. 하얀 가루를 잠시 쳐다본다. 아무런 변화도 없다.

 

3

영혼의 무게가 얼마라고 했더라.

나는 짜장면을 두 젓가락 연이어 빨아들였다. 어느 케이블 TV에서 본 과학 프로그램을 떠올려보지만 기억이 흐릿하다. 시체가 있던 공간에서 짜장면을 먹으니 연쇄살인범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텅 빈 그릇을 비닐봉지에 싸 문밖에 내놓는다. 베란다 창을 연다. 찬바람이 훅 끼친다. 유품 정리를 해야 했다. 집안은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아 각종 먼지와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흡사 거대한 청소도구함 같았다.

청소도구함, 문득 나는 갑갑함을 느낀다. 억지로 목을 긁어 헛기침을 한다. 먼지를 한껏 들이킨 탓이다. 그때 나는 자주 갇히곤 했다. 10년 전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남자친구와 나는 숨바꼭질을 했다.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결정했다. 야자시간이었고, 우리는 감독 선생님들을 피해 놀기 바빴다. 아무도 없는 청소도구함에서 키스를 하고,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때우다 심심하면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나는 매번 가위바위보에서 졌고, 청소도구함에 갇혀 60초를 세야 했다. 그동안 남자친구는 숨을 곳을 찾아 학교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자습실이 있는 층을 제외하면 전부 소등한 상태였다. 나는 어둠이 주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작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벽을 만지며 움직였다. 나뭇가지가 이파리를 떨구며 베란다 난간을 두드린다. 나는 창을 닫는다.

책이 빈 틈 없이 들어찬 커다란 책장 네 개가 문제다. 책을 전부 꺼내야 한다. 나는 한 칸씩 통째로 책을 꺼내 바닥에 쌓아놓는다. 어두운 배경에 붉은 색으로 적힌 'STEPHEN KING‘라는 글자가 눈에 자주 띈다. 나는 잠시 그 옆에 앉아 책을 들춰본다. 샤이닝, 미저리, 그린 마일 등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제목들이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던 작가였다.

왜 그 작가가 좋은데?

언젠간 우리가 마주칠 공포거든. 미리 알면 덜 무섭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우리가 언젠가 마주칠 공포, 그게 뭘까. 원서까지 포함해 스티븐 킹의 책들은 수십 권이 넘어 보인다. 책은 중고서점에 가서 팔 생각이다. 나는 책장의 책들을 빠른 속도로 비우기 시작한다. 못해도 십만원 이상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눈에 잘 띄는 작가들을 나열하자면 이렇다. 스티븐 킹, 정유정, 윤이형, 편혜영, 등이다. 나는 앞페이지를 넘겨 조금씩 읽어본다. 잔혹하고 끔찍한, 슬픈, 그런 묘사가 시야를 떠다닌다. 나는 책을 덮는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남자친구가, 그 애가 왜 이런 책들을 좋아했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책장을 옮기는 건 어렵다. 무게가 웬만큼 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책장 아래에 수건을 깐 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민다. 이따 부를 중고트럭이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현관 전실 벽에 기대어놓는다.

땀이 난다.

땀이 났다. 그 애와 섹스를 하는 날이면 늘. 그 애는 섹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섹스보다는 맨 몸으로 서로 껴안은 채 키스를 하거나 몸을 애무하는 걸 좋아했다. 역시 왜냐고 물어봤다. 섹스는 좋긴 한데, 너무 요란피우는 것 같아. 난 조용한 게 좋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그런 놀이.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해결하는 일이 많았다. 야동을 보며 자위를 하거나, 어플로 파트너를 구해 원나잇을 하거나. 죄책감, 느꼈다. 몇 번이나 양심 고백을 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내 입술은 무거웠다. 혀끝만 앞니 근처를 맴돌다 가라앉을 뿐이었다. 책장을 모두 옮겼다. 나는 가전제품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4

횡단보도 앞에 우리는 서 있다. 달빛마저 삼켜버린 새벽이다. 초록불로 바뀌고, 그 애는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 뒤를 쫓는다.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거리가 조금씩 내게로 움츠러든다. 마침내 그 애와 만난다. 그 애가 자전거에서 내린다. 나는 그 애를 마주본다. 팔을 벌려 안으려 한다. 그 애는 뒷걸음질 친다.

나는 그런 거 아냐. 너처럼, 게이 같은 거.

그러고는 도망친다. 나는 울기 시작한다. 나는 침인지 눈물인지를 삼키는 목이 아프다. 부은 목젖이 들썩이며 쓴맛을 흘린다. 잠에서 깬다. 눈가가 촉촉하다. 소파에서 잠시 잠이 든 모양이다. 뭘 중얼거리고 있었는지 입안이 말라 천장에 붙은 혀가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물을 찾아 부엌으로 간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신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며 뱉어낸다. 물속에 떠다니는 알 수 없는 이물질들이 거슬린다. 뒷면의 수질검사표를 보니 몇 달 전부터 체크가 되어있지 않았다. 남자는 이런 물을 마시고 살았던 것이다. 차라리 수돗물이 훨씬 낫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고보면 그 애가 그랬다. 그 애는 일반 생수나 정수기 물보다 손 씻는 수돗물을 좋아했다.

체육시간이 끝난 뒤였다. 모두가 물을 마시러 학생식당으로 달려가는데 그 애 혼자 운동장 한 구석의 수돗가로 갔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손을 씻거나 입안을 헹구는 정도인줄 알았는데 냅다 수돗물을 들이키는 것이었다. 나는 먹지 말라고 그 애를 수돗가에서 떼어냈다.

멀쩡한 물 놔두고 왜 수돗물을 먹어?

난 수돗물이 더 맛있어.

수돗물에 약품 처리가 되어있어 몸에 좋지 않다고 설명하니 그 약품 냄새와 맛이 좋다고 했다. 황당했다. 평소에도 수돗물 마시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런 거 있잖아. 본드나 석유 냄새, 페인트 냄새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야.

수돗물 특유의 약품 처리된 맛, 벌컥벌컥 쏟아져 나오는 모습, 차가워 시원한, 그런 점들이 좋다고 그 애는 말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야.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그렇게 말했다. 그 애는 너도, 라고 대꾸했다. 내가 뭐가 이상하냐고 묻자 그 애는

나 같은 애랑 사귀잖아.

오글거린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래도 사실인 걸 어쩌겠느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싱크대로 다가선다. 수도꼭지를 틀어 컵에 물을 받는다. 마신다. 텁텁하고 찝찝한 뒷맛에 헛구역질이 난다. 한 모금 정도 삼키고는 다 뱉어낸다. 컵을 그대로 놓으려다 원래처럼 뒤집어 놓는다. 편의점에 가서 사이다 한 캔을 사 마신다. 소형 가전들은 바깥에 쌓아두었다. 냉장고나 식탁 같은 대형 가전들은 이따 중고트럭을 부를 생각이다.

나는 방으로 향했다. 책상과 침대, 조그만 책장이 있었다. 아무런 친구도, 가족도 없는 고독사 의뢰라 별다른 물건은 없다. 나는 컴퓨터를 켜본다. 트위터 화면이 뜬다. 알림이 가득 쌓여 있다. 나는 알림을 확인한다. 낯선 이들의 메시지가 잔뜩 있다. 뭐하세요? 오랜만이네요. OO님 괜찮으신가요? 계폭하셨나. 모두 1년 전의 메시지들이다. 그동안 남자는 SNS 활동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친구 계정들이 모두 퀴어다. 무지개 깃발을 배경으로 찍은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었다가 소금 주머니가 만져진다. 나는 꺼내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처럼 아직 새하얗다.

그 애는 아직 없다.

 

5

남자는 꽤 유명했다. 트위터 퀴어들 사이에서 말이다. 트위터 활동기록들을 몇 시간 째 살펴보고 있는 나로선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독사라니. 나는 침대 쪽을 흘깃했다. 남자는 누굴까.

나는 컴퓨터를 끈다. 모니터와 본체를 챙긴다. 꽤 값이 될 것이다. 침대는 살펴보니 매트리스도 꽤 탄탄하고 목재 틀도 무너진 곳 없이 완전하다. 하지만 혼자 쓰기엔 조금 좁아 보인다. 나는 침대에 눕는다. 손으로 만졌을 땐 푹신했던 매트리스가 딱딱하게 느껴진다. 마치 관 속에 누운 기분이다. 이대로 잠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누군가 내가 누운 침대를 들고 이동하는 상상을 한다. 내 주위에 모여 기도를 건네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기독교도인 내 주위엔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으며 선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도 있다. 개중엔 그 애도 있고, 내 입에 억지로 자기 성기를 쑤셔 넣던 스물 두 살짜리 D도 있다.

17살 때, 퀴어 가출팸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더랬다. 게이 커뮤니티와 퀴어 커뮤니티에 올라온 가출팸 모집글을 봤었다. 나는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자마자 감금 생활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부모가 자식이 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여느 경험담이나 영화에서처럼 따뜻하게 안아주리라는 기대를 안 한 건 아니었다. 기대가 죄악이 되는 순간은 예상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돈을 훔쳐 집을 나왔다. 알지도 못하는 동네의 낡은 PC방 구석으로 도망쳤다. PC방에서 며칠을 지새웠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퀴어 가출팸 글을 보게 되었고, 나는 주소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얼마나 잔건지 알 수 없다. 안방과 연결된 베란다 창에서 벌건 노을의 타다 남은 재가 흩뿌려지고 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색이다. 나는 서랍 속의 잡다한 물건들을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퀴어문화축제 등 퀴어 행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쏟아져 나온다. 진행요원, 임원, 일정표, 로고 시안, 무지개 깃발 등등. 이건 돈이 얼마나 될까 생각한다. 그래도 침대나 컴퓨터, 책들은 돈이 꽤 될 것 같은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지개들이 너무 많다. 나는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그것들을 한 데 모아 집어넣는다. 그렇게 10 리터짜리 봉투 두 개가 꽉 들어찼다. 미리 불러놓은 중고트럭 사람을 불러 함께 물건을 옮긴다. 돈을 받는다. 책들과 컴퓨터는 내 차에 싣는다.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집안을 둘러본다. 위협받지 않은 침묵, 그 위에 쌓인 불안한 감정의 탑이 보인다. 내가 쌓았고 내가 무너뜨릴. 가출팸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를 사로잡던 느낌이었다.

나를 맞이한 건 잘생겼다, 말할 수 있는 남자였다. 스물 두 살의 D였다. 각자 역할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와 집안일을 하는 아이들. 나는 그중 집안일 역할을 맡았다. D는 오토바이 한 대로 퀵서비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모두 다 성소수자였다. 게이, 레즈비언 등 6명의 가출팸 식구는 벼랑 끝에서 서로가 서로의 손을 붙잡아준 것처럼 보였다. 동지애와 연대감도 느꼈다. 그때 행복이란 단어를 처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퀴어와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았고, 동시에 트랜스젠더를 멸시했다. 게이인 F는 내게 트랜스젠더 한 명이 우리 가출팸에 들어왔다 어떻게 쫓겨났는지를 자랑스레 얘기해주기도 했다. 알몸으로 벗기고, 여자라면서 달린 고추는 뭐냐고, 살쪄서 나온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가슴 성형할 필요는 없겠다고, 그런 말들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돈 2만원을 훔쳐 달아나버렸고, 욕을 하며 인근 일대를 다 찾아봤지만 어디로 튀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때 그 말을 웃음거리로 소비할 수 있는 위치였다. D는 페미니즘을 욕하며 이퀄리즘이 진짜 양성평등이라고 주장했다. 길을 걸을 때면 침을 뱉고, 담배꽁초는 도로 아무데나 버렸다. 지나가는 여성들을 볼 때면 꼭 계산도 약한 숫자를 들먹이며 외모에 점수를 매겼다. 나는 그곳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6

집에 들어선다. 방 하나가 있는 10평짜리 아파트다. 나는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뒤 누우려다 깨닫는다. 집에 침대가 없다. 나는 아직 의뢰인의 집에 남아있는 침대를 생각한다. 창고트럭 남자는 그건 안 받는다며 거절했다. 꺼림칙하다고 했다. 죽은 사람이 쓰던 침대라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 귀신을 보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대체 무슨 귀신을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건 몰라요. 하여튼 귀신 나온다는 아파트니까. 밤엔 있지 마요.

직접 보셨어요?

그건 아니고. 사람들이 귀신 나온다 하고, 본 사람도 많다니까 그런 거지.

소금 주머니를 습관처럼 들여다본다. 여전히 하얗다. 나는 다시 차를 타고 의뢰인의 집으로 향했다. 경비가 알려준 도어락 비밀번호를 까먹지 않은 탓에 집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침대는 조립식이었다. 나는 나사를 풀어 침대 틀을 분리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다. 전등 하나가 위태롭게 흘리는 거실의 빛무리 사이를 건너다본다. 달라진 건 없었다. 텅 빈 거실과 반쯤 문이 열린 화장실은 그대로였다. 아니, 화장실 문이 열려있었던가? 방과 바로 연결되어있는 부엌으로 나가본다. 일순 싱크대 위의 수저통이 개수대 안으로 떨어진다. 부서진 정적의 조각들에 귀가 베인다. 움찔거리는 몸을 진정시킨다. 누가 있는 걸까. 나는 재빨리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다 열어 뒤진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은 없다. 강아지나 길고양이도 없다. 숨을 고르려던 찰나,

이번엔 화장실의 욕조 선반이 무너져 내린다. 비명이 기도까지 차올라 숨이 막힌다. 나는 소금주머니를 서둘러 꺼낸다. 소금에 붉은 빛이 돈다. 나는 그 애의 이름을 부른다. 더 크게 부른다. 돌아오는 대답도, 모습도 없다. 화장실 문간에 서서 욕조를 바라본다. 눈에 힘을 준다. 노려보다시피 응시한다. 적막과 싸우듯이. 남은 건 무너진 감정의 탑의 잔해들뿐이다. 고개를 돌린다. 매트리스와 침대 틀을 천천히 옮긴다. 거실의 불을 끈다.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한 집안에선 낯선 썩은 내가 풍겨온다. 코를 막는다. 의뢰인의 시체는 이곳에 없는데, 무슨 악취지, 하며 현관문을 닫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매트리스는 뒷좌석에, 침대 틀은 가지런히 모아 트렁크에 실었다. 밤 9시였다.

그날도 9시였다. 나와 D만 집에 있었다. 양성애자인 D는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였다. 여자친구도 다른 가출팸에 속하는지는 몰랐다. 나는 TV를 보며 졸고 있었고, D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잠시 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상태로 D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러더니 나를 툭툭 발로 차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성기를 보자마자 아래가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다. 그가 성기로 내 뺨을 건드렸다. 그리고는 죽 뻗은 내 두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더니 발기한 성기를 내 입술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방으로 가려 했다. 그가 날 붙잡아 꿇어 앉혔다. 힘줄이 두드러진 가느다란 그의 팔은 힘이 셌다. 나는 억지로 그의 성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래는 두려움에 오줌을 찔금찔금 흘렸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뒤이어 발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왔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누는 얘기들이, 말소리가 내 사지를, 몸뚱이를 조금씩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끝내 나는 굳어버린 돌덩이처럼, 무력한 인형 따위로 전락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침대를 다시 조립한다. 매트리스를 끼워 맞춘다. 옷장에서 얇은 이불 패드를 꺼내 깐 뒤 이불과 베개를 놓는다. 그 위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긴다. 졸린 건 아니다. 보통 새벽 한 두 시에 자니 잠잘 시간도 아니다. 밤 10시 30분, 의뢰인의 침대는 처음 누웠을 때와 달리 푹신하고 안정감 있다. 언제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푹신함이 몸을 감쌌다. 그때 내게 필요했던 편안함이다. 그 일을 당한 다음 날, 나는 도망친 트랜스젠더 여자애처럼 2만원을 훔쳐 도망쳤다.

 

7

빈소는 고요하다. 나는 의뢰인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 애를 닮으려 애쓰는 의뢰인의 얼굴이 안쓰럽다. 시선을 옮긴다. 나는 서낭당 나무 마냥 아무도 오지 않는 빈소를 지키고 있다. 발인은 내일 오전 11시였다. 장례식은 철저히 내 사비를 들여 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빈소에서 나는 홀로 절을 한다. 한 번, 두 번. 온 몸을 숙인다. 나는 손을 모아 입에 갖다 댔다. 내가 내뱉는 숨이 손바닥을 뜨겁게 지진다. 나는 빈소 밖으로 나간다. 죽 벽과 벽이 맞대어 이어지는 빈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런 의미 없는 행렬. 나는 복도를 걷는다. 다른 빈소를 기웃거린다. 통곡소리가 들리고, 검은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 간다. 울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빈소로 돌아와 의뢰인을 마주본다. 목구멍이 까끌거린다. 나는 침을 쑤셔넣듯 목 뒤로 삼킨다. 눈물을 한 방울 한 방울 주워 담듯 통곡이 예열되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눈알인지 쥐어짜도 찌르르한 통증만 느껴진다. 나는 숨을 헙 들이키며 뱃가죽을 당긴다. 몸 속 내장들을 머리까지 끌어올리는, 살가죽과 내장들과 뼈에 흡수된 모든 수분을 다시 역으로 되마시는 그런 호흡이다. 그렇게 해서 눈물 두 줄기가 쪼르르 흘러나온다. 운다. 이게 우는 건가. 이런 걸 울음이라고 할 수 있나. 울음이라기 보단 발광에 가깝지 않나.

아무도 없는 빈소에서 육개장만 식어간다.

나는 의뢰인의 무엇을 믿고, 무엇을 보고 빈소까지 차려준 건가. 그 애를 닮으려 하는 의뢰인의 애씀에 동정을 표한 것이라고, 나는 결론을 내린다. 발인까지 10시간이 남아있다.

 

8

침대는 불편했다. 평생을 바닥에서 자왔던 터라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침대를 치울 생각은 없다. 휑했던 방 한 구석을 차지한 침대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크고 무거워보인다. 나는 무심코 물을 마시다 얼떨결에 삼켜버린다. 수돗물을 말이다. 특유의 쓴맛은 여전하다. 나는 한 컵을 더 따라 마신다. 그 애가 말했던 것처럼 시원하지도 않은데, 좋은 점이라곤 없는데. 나는 컵을 세워놓는다.

비가 내린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작은 손톱처럼 차 지붕을 두드린다. 따다닥, 따다닥, 오싹한 느낌에 목덜미가 괜히 간지럽다. 잿빛 하늘은 묽어진 구름을 타고 지구 한쪽으로 고이는 것 같다. 계속해서 도는 것 같다. 오늘도 홀로 의뢰를 받아 작업을 해야 한다. 나는 다시 아반떼 XD를 몰고 새빛 마을로 들어선다. 60대 남성이 죽은 자기 자식의 유품을 정리해달라고 의뢰했다. 자신도 정리에 참여하겠다는 말에 나는 조금이나마 고인에 대한 동정을 던다. 연고가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에.

4층이 제일 높은 층인 빌라 단지에 들어선다. 나는 뒷머리가 백발로 성성한 남자와 인사를 나눈다. 304호에 들어간다. 남자는 점차 말을 꺼내며 수다스럽게 떠들기 시작한다. 자기 딸의 삶에 대한 짧은 단상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여잔데 자기는 남자라며 남자 같이 행동하고 남자 같이 입고 남자 같이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가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학생이 생각해도 참 이상한 애지요? 나는 조그맣게 네, 한다.

10평짜리 집은 좁고 지저분하다. 배달 음식 쓰레기들이 부엌을 한 가득 차지하고 있다. 개지 않는 빨랫감들과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발에 챈다. 딱 봐도 남자용 같은 옷들이 대부분이다. 남자는 대학생 때 집을 나간 이후로 계속 수소문을 한 끝에 집 주소를 알아낸 것이라고 말한다. 근데 돌아온 건 부패한 시신뿐이라고. 나는 묵묵히 쓰레기와 남길 것을 분리하여 정리한다. 매일 아침마다 D가 아르바이트를 가고 나면 하던 일이었다.

PC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나는 후회했다. 그냥 견딜걸, 참을걸. 그게 참아야 할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죽기로 결심했다. 퀴어 커뮤니티에 올라온 동반자살 모임에 갔더랬다. 나와 같은 성소수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악몽 하나쯤은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잇대는 다양했다. 나 같은 10대에서부터 30대까지.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바이 등등. 우리는 어떻게 죽을지 의논했다. 가장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투신, 익사, 목 매달기, 칼로 찌르기, 베기, 연탄가스, 목 조르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검토했다. 다음 생에는 꼭 백인 시스젠더 헤테로 비장애인 비퀴어 남성 부자로 태어나기를 서로 약속했다.

사진은 다 나 주시오. 그거라도 가져야 하니까.

나는 책상 밑 책꽂이의 앨범들을 전부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어렸을 때는 말도 잘 듣고 참 이뻤는데.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돼서 애비보다 먼저 떠나냐. 학생은 이해가 되시오? 남들처럼 결혼해서 애 낳고 살면 얼마나 좋았을까. 쥐어 패도 말 안 듣고 집 나가더니.......

문득 나는 남자를 바라보고 선다. 남자친구, 그 애의 아버지와 언뜻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애의 아버지지만, 외모도 그렇고, 말투도, 그리고 하는 말도....... 남자친구는 동반 자살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그가 내게, 주위의 ‘우리’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우리들이 놀라 다치지 않게 어르고 만져 순해진 악몽을 조금씩 꺼내어 보일 때, 그 말들을. 나와 그 애는 투신하기로 했다.

20층이 넘는 높이에서 떨어지면 고통 없이 죽는대.

아주 잠깐, 영점 일초의 순간만 지나면 말이야.

몸이 산산이 부서지겠지. 우리는 우리가 만났다는 걸 기억도 못할 거야.

우리는 적당한 높이의 아파트를 찾아 걸었다. 그 사이에 우린 서로가 동갑이라는 걸, 매우 닮았다는 걸, 그리고 서로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마침 고장 나 있었다. 우리는 옥상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힘들었다. 10층 언저리에 왔을 때 그 애는 주저앉았다. 나도 다리에 힘이 풀려 옆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 애는 물었다. 죽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까? 내가 죽겠다는데, 오랜만의 사람으로서 쓸모 있는 일인데, 왜 그것마저 이렇게 힘들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입술을 가린 그 애의 손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그 애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건조해 거친 입술이었다. 나는 입을 맞췄다. 혀를 뒤섞으며 우리는 서로의 심장박동을 확인했다.

우리는 살아있었다.

가전제품이나 이런 것들은 다 가져가실 거죠?

그럼, 다 써먹어야지. 둘째가 써야지.

나는 허리를 펴고 섰다. 통장 뭉치를 집어든다. 일정 주기로 돈 수만 원이 입금되었다. 아마 트랜지션에 쓸 돈이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남자는 자기 딸이 어렸을 때부터 자살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진짜 자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죽었느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문다. 남자가 말을 끊고 목을 맸어, 라고 했으므로.

줄이 잘 풀어지지도 않더래. 어찌나 꽉 맸던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더래요.

그 틈을 생각해본다. 새끼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그를 꽉 조인 것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나마 우리에겐 그런 틈 하나 있었다. 우리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고, 지하 창고 복도에서 섹스를 했다. 그 애의 살결은 무너지기 쉬운 고운 햇볕 같았다. 매끈한 배에서부터 긴 목까지 우리를 가로막을 것은 없었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죽으면 따라 죽겠다는 마음으로, 서로의 생사를 매 순간 1분 1초 확인하며 버티는 삶이었다. 삶, 사람, 그런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앨범을 펼쳐 의뢰인의 얼굴을 내게 보여주었다.

단발에 옅은 화장을 한 얼굴. 못생겼다고도, 예쁘다고도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너무 평범해 그림자 같은 얼굴. 그 애는 잘생겼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떨지 몰라도 그 애는 내 눈에 잘생겨 보였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는 내게 욕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동시에 내게 어떠한 관심도 표하지 않았다. 밥이 있으면 조용히 와서 먹고, 나갈 일이 있으면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용돈도 꼬박꼬박 주었다. 기대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나에 대한 어떤, 모든 종류의 기대들.

그들은 더 이상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9

유급을 겨우 면하고 다시 들어간 학교에서 나는 그 애와 모든 것을 나누었다. 아직 나누지 못한 것이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여행을 다녔다. 그 애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인권 활동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안 될 거 그 시간에 섹스를 한 번 더 하겠다는 주의였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자주 싸웠고, 그 애는 내게 그런 활동들을 강요했다. 같이 하자고, 그래서 바꾸자고. 나는 대체 뭘 바꾸냐고 되물었다. 굳이 우리까지 나설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나 드랙? 그런 이상한 애들 좀 그만 만나. 우리 같은 사람들을 만나란 말이야.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라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니. 대체 그게 뭔데. 뭔데?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책은 두 권 빼고 팔지 못했다. 의뢰인의 집에서 가져온 스티븐 킹이나 정유정, 윤이형의 책들은 거절당했다. 이미 한 물 갔다고, 재고가 너무 많아 염가로도 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애는 그런 책들을 읽었던 것이다. 나는 버스에서 조금 읽어보려다 만다. 멀미가 난 때문이다.

나는 207동 의뢰인의 집으로 다시 향한다. 경비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내 짐을 놓고 간 게 있다고 둘러댄다. 현관문을 연다.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책꽂이 옆에 아직 고물상에 내다 팔지 않은 책들이 쌓여있다. 나는 책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의뢰인의 앨범을 찾는다. 고등학교 앨범이 나온다. 펼쳐본다. 의뢰인을 본다. 눈을 비빈다. 마른세수를 한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다. 어디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 마냥. 그 애는 실종되었다. 인천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였다. 축제가 무산될 정도로 혐오세력의 범죄를 기반으로 한 방해가 엄청났다. 그 애는 게이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던 참이라, 부스 운영을 위해서 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라져버렸다. 그때 나는 이미 그 애와 헤어진 뒤였으므로 그 애가 실종되었는지조차 몰랐다. 그 애의 실종 사실은 1년이 지난 뒤에나 알게 되었다.

소금주머니를 꺼낸다. 나는 젖은 눈가를 소매로 찍어 누른다. 젖어들 눈물이 없는데도 눈가가 시큰거린다. 소금이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나는 의뢰인이 누워있었다던 안방을 향해 소금을 흩뿌린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나는 죽은 의뢰인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 애가 보였지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살아있는 그 애의 얼굴만을 봐왔기 때문에, 그 애가 죽었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 한 번 한 적 없으므로, 그 애를 닮으려 애쓰는 낯선 얼굴, 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본다. 방 안, 부엌, 화장실, 거실, 현관, 창고, 마치 이 집이 그 애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뒤집어지고 거꾸로 서며 그 애의 신체 일부분으로 작동할 것 같다. 입을 조그맣게 감싸쥔 채 그 위로 나를 쳐다보는 두 눈. 그래서 나를 집어삼킬 것 같다. 나는 담배 라이터를 꺼낸다. 거실 커튼에 불을 붙인다. 조금씩 일기 시작한 불길이 거세게 커튼을 집어삼킨다. 소파로 옮겨간다. TV로 옮겨간다. 새하얀 민무늬 벽지를 어둠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그 애는 헤어질 때 내게 말했다. 여기까지 살아온 건 네 덕이라고. 고맙다며. 그 이후엔 어떻게 지냈을까. 나와 같은 이를 만나 그 사람 덕을 보며 또 살아낸 걸까. 그리고 왜 사라졌을까. 혼자 죽기까지, 그러고보니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의뢰인은, 그 애는, 아니 의뢰인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의뢰인은.......

불은 수백 개의 팔을 뻗치며 소금을 태웠다. 탄내가 진동한다. 나는 아직 그 애에게 이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멀리 떨어져있던 것뿐이라고, 아직 이별의 단어 뜻조차 이해하지 못했다고, 나는 중얼거린다. 소금이 녹아내려 붉은 핏방울을 흘린다. 불이 옷에 달라붙는다. 나는 타들어간다. 그 애를 만나기 전, 그 애가 두 눈으로 보던 절망의 소실점으로 나는 타들어간다. 사라진 그 애가 보인다. 의뢰인의 의뢰를 완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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