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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칼이빨 사냥꾼

2019.06.06 23:2606.06

라제쉬는 흙바닥 위에 가만히 앉아 몸을 웅크리고, 머리 위로 오가는 고성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어른 둘이서 라제쉬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여자는 라제쉬를 사고 싶어 했고, 남자는 라제쉬가 자기 조카이며, 아무렇게나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금화 열 닢이라면 모를까."

남자는 라제쉬를 팔아 한 재산 톡톡히 챙길 생각인 것 같았다.

라제쉬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먹을 것을 훔치러 마을에 들어갔을 때 몇 번 보았던 남자였다. 남자의 곁에 서 있는 아이는 어제 저녁 라제쉬에게 팔을 물어뜯긴 남자애였다. 매일같이 라제쉬를 따라다니며 도깨비 년이라느니 괴물 계집애라고 놀려대었다. 라제쉬가 항의하려고 입을 열면 어눌한 말들이 튀어나왔고, 그 때마다 남자애는 왁 하고 웃었다.

물어뜯은 건 어제 한 번뿐이었는데. 라제쉬는 아랫입술을 찌르는 송곳니를 혀로 밀어보았고, 송곳니가 흔들리는 것 같아 더욱 초조해졌다. 눈앞의 여자가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흥정을 멈춘 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여자가 갑자기 남자애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남자애는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물러났다. 라제쉬는 둘을 힐금거렸다. 어제 라제쉬에게 물린 남자애의 팔이 퉁퉁 부어 있었다.

"네가 쟤 오빠야?"

여자의 목소리는 독특할 만치 낮았다. 남자아이가 즉시 소리 질렀다.

"쟤는 내 동생 아녜요! 우리 동네 바깥쪽에 사는 괴물딱지라고요."

아이 아버지가 입을 막으려고 했을 땐 이미 늦어있었다. 여자가 차분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까 나에게 저 애는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했지?"

아이 아버지는 낭패한 낯이었다.

"의사 부를 돈이나 줘."

아들자식 팔이 썩어 들어가게 생겼는데. 투덜대는 남자 쪽으로 동전 한 닢을 던진 후에, 여자는 라제쉬에게 눈길을 주었다. 라제쉬는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가까이에서 보니 남자아이가 왜 눈앞의 여자를 보고 겁을 집어먹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그들의 뒤로 투덜거리며 멀어져가는 아이의 아버지보다도 키가 컸고, 얼굴빛이 어두운데다 눈매는 날카로웠다. 등 뒤엔 천으로 둘둘 말린 길고 무거운 어떤 것을 매고 있었는데, 아마 칼이지 싶었다.

라제쉬는 여자가 제게 이름을 물어볼까봐 걱정이 되었다. 라제쉬는 제 이름을 똑똑히 발음할 수 없을 것이고, 키 큰 여자가 제 목소리를 듣곤 웃음을 터뜨릴 것이었다.

라제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여자는 이번엔 라제쉬의 입을 들여다보았다.

"입이 이래갖고 말은 제대로 하나."

라제쉬는 터질 뻔한 울음을 꾹 눌렀다. 여자의 목소리는 마을의 여자들이 제 자식들을 부를 때 내는 그런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을 아이들이 저에게 돌을 던질 때 내는 그런 목소리도 아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무감동했다. 그 목소리가 라제쉬에게 알 수 없는 용기를 주었다.

라제쉬는 여자의 손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여자의 눈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라제쉬는 여자의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뒤집고, 거기에 가위표를 쳤다. 라제쉬는 여자의 손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단단하고 마디가 굵은 손이었다.

여자는 잠시 라제쉬의 손가락이 지나간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귀는 멀쩡하구나. 글자 쓸 줄 알아? 이름은 있고?"

라제쉬는 망설였다. 당연히 읽고 쓸 줄은 몰랐고 이번엔 여자의 손바닥을 쓸 수 없었다. 제 입을 써야했다. 결국 몇 번 입속말로 중얼거리다 목소리를 내었다.

"라제쉬."

라제쉬는 갈라진 제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러나 여자는 라제쉬의 목소리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단지 라제쉬의 이빨만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나랑 같이 가자."

따뜻하고 거친 손이 라제쉬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여자의 손에 이끌려 마을을 벗어나는 동안 라제쉬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게 꽂히는 시선들이 따가웠다.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살아온 마을이지만 누구도 라제쉬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라제쉬도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서글프지는 않았다. 단지 여러 해동안 겨울을 나는 데에 유용했던, 낡은 폐가의 모습만은 마음에 담아두었다.

마을 어귀까지 걸어 나오자 라제쉬는 저와 여자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와 풀벌레 우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잘 했다. 이빨이 있으면 물어뜯을 줄도 알아야지."

여자가 말했다. 라제쉬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라제쉬는 여자가 자기에게 말을 한 것인지 혼잣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괜찮았다. 라제쉬는 여자에게 잡힌 손에 마주 힘을 주었다.

 

여자의 이름은 키란이라고 했다. 라제쉬는 키란과 함께 오래오래 걸어서 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들어가기 전, 키란은 제 짐에서 가볍고 하늘하늘한 검은 천 쪼가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라제쉬의 코와 입, 턱과 목이 가려지도록 두른 후, 풀리지 않게 잘 묶었다.

여관에 들어가자 주인이 라제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저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거요? 병이라도 걸렸소?"

여자가 대답했다.

"입으로 짓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재갈을 물린 거요."

주인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더 묻지 않았다. 라제쉬와 키란은 이층의 빈 방으로 올라갔다.

키란이 대나무자리가 깔린 바닥에 짐 보따리를 풀었다.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 작은 갈색 가죽 주머니가 하나 있었다. 둥그렇게 말린 누런 종이가 한 뭉치 있었고, 송곳이나 무명실타래 따위도 굴러 떨어졌다. 낡은 천으로 꽁꽁 싸맨 길쭉한 꾸러미들도 몇 개 있었다. 그리고 입구가 봉해진 조그만 유리병도 하나 있었다.

키란이 집어든 것은 무명실타래였다. 라제쉬는 키란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키란이 실을 길게 풀어내 끊고 라제쉬에게 다가오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라제쉬는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지만, 키란은 어느새 라제쉬의 코를 쥐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라제쉬의 혓바닥 위로 올라왔다.

"깨물지 마."

그 말에 라제쉬는 훌쩍이면서도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실이 송곳니에 감기고, 단단히 묶였다. 턱으로 침이 흘러나왔다.

"다 됐다. 문가에 저게 뭔지 한번 봐."

라제쉬는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라제쉬의 머리로 둔탁한 통증이 달려들었고, 위턱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갔다. 라제쉬는 놀라서 입을 헤 벌린 채 키란을 바라보았다. 키란의 손엔 실이 쥐어져 있었고, 실 끝엔 길고 더러운 이빨 하나가 묶여 달랑거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아프진 않을 거야."

키란은 위턱의 송곳니 하나를 또 뽑았다. 라제쉬는 머리통과 입안이 얼얼했다. 바닥에 놓인 송곳니 두 개는 어른 검지손가락만했다. 표면에 희고 누른 딱지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는게 꼭 더러운 송곳 같았다.

이런 게 내 입 안에 붙어있었구나. 라제쉬는 제 이빨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키란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까 그 자식이 팔이 썩는다고 했던 게 완전히 공갈은 아니었던거같다. 너 양치라는 거 한 번도 안 해봤지?"

"그런 것 같아."

라제쉬는 제가 그럭저럭 명확한 발음으로 대답을 했다는 걸 알고 놀랐다. 키란이 씩 웃었다.

"송곳니가 그 모양이니 말하기도 힘들었겠지. 오늘 뽑은 건 젖니야. 뽑힌 자리에 새로 날 이빨은 간니라고 부르는 건데, 그게 다시 네 아랫입술을 누를 정도로 길게 자라기 시작하면 제대로 말하는 일이 다시 힘들어질 거야. 그때까지 말을 많이 해둬."

키란은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깔린 바닥의 빈 곳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웠다. 어느새 창밖은 푸르스름한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어둠과 습기 어린 바람이 방 안으로 쏟아지고, 바깥에선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치고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가 빠진 자리를 찬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라제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키란은 뭘 하는 사람이야?"

키란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치과 의사야."

라제쉬가 조금 뜸을 들이다 물었다.

"왜 나를 데려온 거야?"

키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제쉬는 키란이 잠에 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라제쉬는 창문을 닫고 키란의 곁에 누웠다. 대나무자리가 깔린 바닥이 서늘했지만 라제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운 잠자리가 하루 이틀 일이던가. 그보단 잘 짜인 튼튼한 지붕, 그리고 처음으로 제 곁을 지키는 누군가에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제 것이 아닌 숨소리를 헤아리다가, 라제쉬는 잠이 들었다.

그 날 라제쉬는 잠결에 일찍이 들어본 소리를 들었다. 나무의 거친 면을 사포로 밀 때 나는 소리였다. 라제쉬는 목수가 가구에 사포질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암흑 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리만은 손에 톱밥이 만져질 듯 생생했다.

다음 날 아침, 라제쉬는 눈을 뜨고 잠시 동안 제가 어디에 누워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멀쩡한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해냈다. 라제쉬는 벌떡 일어났다. 키란이 창문가에 서 있었다.

창문가로 햇살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까마귀가 창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키란은 품에서 작은 천주머니를 꺼내 까마귀의 한 쪽 발목에 매달았다. 날개를 쭉 뻗은 까마귀가 허공으로 발을 내딛었다.

라제쉬는 검은 새가 멀리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키란의 옷을 잡아당겼다. 키란이 불에 덴 듯 놀라며 라제쉬를 내려다보았다. 눈매가 날카로운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라제쉬는 얼른 손을 떼어냈다. 키란이 눈을 감고 이맛살을 구겼다. 잠시 후 주름 잡혔던 콧등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펴졌다.

"왜 그래?"

"뭘 하는 건지 알고 싶어서."

라제쉬가 대꾸했다. 궁금했다. 키란은 왜 기분이 나빠 보였을까? 그러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걸까?

라제쉬는 자신이 키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저 마을을 떠난다는 사실에 들떠서, 키란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치 라제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키란이 입을 열었다 .햇빛 때문인지, 창밖을 바라보는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조금 뒤에 이야기 해줄 테니 일단 이리 와 봐."

키란은 어제와 같이 라제쉬의 입을 벌린 후 작은 끌 같은 것으로 이빨 표면을 긁기 시작했다. 혓바닥과 혀 밑으로 딱딱한 가루 같은 것이 떨어져 내렸다. 조금 피맛이 나기도 했지만 심하지는 않았으므로, 라제쉬는 계속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제 키란은 굵은 소금 몇 알로 이빨을 문지르고 있었다. 라제쉬는 이빨과 혀끝이 아려와서 자꾸만 목으로 침을 삼켜야 했다.

"다 됐다."

검은 그릇에 담긴 물로 입을 헹구게 한 후에, 키란은 라제쉬의 입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라제쉬는 그릇에 담긴 물에다 제 얼굴을 비추어보고 놀랐다. 분홍색 잇몸에 연한 파란 빛이 도는 옥석 같은 것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위 턱의 빈 자리 두 개는 어제 송곳니를 빼며 생긴 것이었다.

"어제 왜 너를 데려왔냐고 물었지? 네 뼈 때문이야."

"…….파란 색이라서?"

"너는 네 뼈 중에 손톱으로 드러난 일부만 보아 왔겠지. 너무 얇아서 손톱으로는 네 뼈가 무슨 색인지 알기 힘들었을 거야.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이빨엔 고름과 찌꺼기가 엄청나게 들러붙어있어서 너도 다른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한 걸 거고."

키란은 그렇게 말하며 전날 라제쉬가 보았던 가죽 주머니의 매듭을 끌렀다. 주머니 속은 파란 이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라제쉬는 이빨 하나를 끄집어내 손바닥에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반투명한 푸른빛의 이빨 가장자리가 빛을 받아 노란색을 띠었다.

"너같이 뼈가 푸르고 송곳니가 길게 돋아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왔어. 그 주머니에 들어있는게 그 사람들의 젖니들이야."

"이것들을 왜 모으는 거야?"

"비싸서."

키란은 눈도 깜작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단단하고 빛이 아름다우니까, 사람의 몸에서 돋아나는 금강석이라고들 해. 너와 같은 사람들의 뼈는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몇 배는 튼튼해.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송곳니가 아주 길게 자라고, 턱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거든. 나는 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해. 젖니를 뽑아주고, 지나치게 자라난 이를 갈아주고."

라제쉬는 다시 주머니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빨들은 하나같이 작았다. 개중 다른 이빨들과 달리 두 세배쯤 길게 자라난 송곳니들도 눈에 띄었다.

"돈을 받지 않고 도와주니까 젖니는 내 수입으로 챙기는 거야."

키란이 손을 내밀었다. 라제쉬는 주머니를 키란에게 넘겨주었다. 키란이 송곳니 하나를 집어 들어 라제쉬에게 내밀었다.

"높으신 분들은 이 이빨들을 일람이라고 불러. 그 중에서도 송곳니는 칼이빨이라고들 부르지."

"이것 때문에 나를 사들이려고 한 거야?"

라제쉬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자신의 존재가 키란에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니, 키란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란 믿음도 커졌다.

"그래. 네가 있는 마을엔 이빨이 도깨비처럼 길게 나 있다는 여자애의 소문을 듣고 찾아간 거야. 그리고 너를 발견했지. 나는 네 이빨이 필요했을 뿐이지만, 네가 그 마을에서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기에 조금 도왔을 뿐이고."

"…….나를 어디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지 궁금하네."

라제쉬는 키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키란에게 제 간절함이 전해지길 바랐다. 키란의 날카롭고 검은 눈도 라제쉬를 마주보고 있었다.

"너는 어디까지 가고 싶니?"

 

우기가 끝나갈 무렵까지 키란과 라제쉬는 그 여관에 머물렀다. 라제쉬의 송곳니가 새로 돋기 시작했다. 송곳니는 점점 자라 아래턱의 송곳니를 완전히 덮었고, 아랫입술을 찌르기 시작했다. 키란은 라제쉬의 이에다 끈을 동여맸다.

"이게 도움이 돼?"

라제쉬가 물으면 키란은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안 하는 것 보다는 낫겠지."

라제쉬의 발음은 서서히 도로 어눌해져갔지만, 그 전에 키란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라제쉬는 자신이 새로 보게 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키란은 라제쉬가 아직 보지 못한 것들,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라제쉬는 자신이 누가 통치하고 있는 나라에서 살아왔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두 개의 강줄기 사이에 자리잡은 비옥한 땅의 수도에서 살고 있는 왕족과 귀족이었다. 왕족들은 '뼈 궁전'이라는 곳에서 산다고 했다. 라제쉬는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지만 여전히 뼈 궁전이라는 단어만 들을 수 있었다. 키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뼈 궁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라제쉬는 젊을 적에 뼈 궁전을 보고 왔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어렴풋하게 뼈 궁전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노인은 뼈 궁전이 하얀 대리석과 상아를 깎고 다듬어 쌓아올린 벽에 오색찬란한 보석을 박아넣은 아름다운 궁전이라고 했다. 대리석과 상아 때문에 뼈 궁전이라고들 하는 모양이지. 라제쉬는 생각했다.

"뼈 궁전에 사는 왕족들이야말로 지난 삶에서 진실 된 덕을 쌓은 이들이다. 그들의 이번 삶은 전생의 선행에 대한 신의 보상인 셈이야."

그러나 정말 그렇냐고 라제쉬가 물으면, 어떤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흥청망청 쓰며 살 수는 없는 일이지."

라제쉬가 들은 바론, 뼈 궁전은 왕족들의 집을 이르는 말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수도를 가리키는 말도 되는 것 같았다. 그 뼈 궁전과 일부 몇 지방을 제외하면 나라 전체가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을 정도의 빽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곡물을 심기엔 썩 좋지 못한 기후였지만, 유독 푸르름을 사랑하는 왕은 제 영토를 무척 사랑했다. 왕은 탁월한 마술 솜씨로 벌목하는 이들을 찾아내 가벼이는 추방, 심하게는 사형시키며 엄중하게 처벌했다.

그러나 라제쉬는 왕에게 심한 욕을 퍼붓는 이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무리 외진 곳의 허름한 오막살이에서 홀로 사는 이가 내뱉은 말이라 해도, 새를 부리는 왕의 귀를 피해갈 수는 없다고들 했다. 사람들은 날개 퍼덕이는 소리만 들려와도 입을 다물었다.

라제쉬는 다른 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키란에게 전하던 중에 새 울음소리를 들었다. 까마귀 한 마리가 이층방의 창가로 날아오고 있었다. 라제쉬가 얼른 입을 다물자, 키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키란이 창 너머로 손을 뻗자 까마귀가 내려앉았다. 발목에 작은 주머니가 매인 새였다. 라제쉬는 그 주머니를 보고 여관에서의 첫 아침에 보았던 까마귀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왕은 너를 반길 거야."

키란이 중얼거렸다.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아?"

"왕은 직접 만나지 않고서도 다 알 수 있어. 날개 달린 눈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

왕은 푸른 것을 좋아해. 뼈 궁전의 가장 높은 곳에다가도 푸른 것을 두려고 하지. 그 말을 마치고 키란은 입을 다물었다.

라제쉬는 키란의 짐 보따리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뭔지 전부 알게 되었다. 키란은 라제쉬와 처음 만난 날 제 등에 매고 있던 것이 톱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키란의 톱은 여느 톱처럼 납작한 쇠붙이의 양쪽에 지그재그 모양 날이 달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두 개의 심에 감겨있는 납작한 쇠사슬 같은 것이 톱날 역할을 한다고 했다. 라제쉬는 원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키란은 그 톱이 맹수를 물리치는 데에 퍽 효과가 좋다고 말했다. 또 작은 병에 든 것은 독약이었는데, 역시 짐승들의 접근을 막는데에 유용했다. 그 외의 자질구레한 도구들은 이빨을 뽑고 갈고 다듬는데에 쓰였다.

바람이 서늘해지자 키란과 라제쉬는 길을 떠났다. 종종 마을에 머무르며 사람들의 썩은 이빨을 뽑아주는 것도 어느 정도 지갑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키란과 라제쉬는 숲에서 머물렀다. 날아가는 새들조차 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져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숲이었다.

라제쉬가 신기하게 여긴 것은 어떤 짐승도 그들을 해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에는 악어가 있고 동굴에는 호랑이가 있었지만, 악어는 물속에서 눈만 빼놓은채 라제쉬와 키란이 강을 건너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고, 호랑이는 그들과 마주칠때 그저 어슬렁거리며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너를 씹어 삼키려고 했다간 역으로 씹어 삼켜지리란 걸 아니까."

키란이 말했다. 라제쉬는 키란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물려본 적이 없었으니. 한 번도 물어뜯은 적도 없었을 뿐더러.

허가 없이 나무를 베는 일이 금기인데다 맹수로부터 습격당하는 일도 없었으므로, 키란의 톱이 제 구실을 한 날은 거의 없었다. 짐승과 마주치지 않는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냇물을 받고, 먹을 수 있는 열매나 식물 뿌리를 모으거나 빨래를 하고도 시간이 남자, 키란은 라제쉬에게 읽고 쓰는 법을 알려주었다. 읽을 만한 책이나 글귀가 주변에 널린 것은 아니었지만 소일거리하기에 좋았다.

라제쉬는 숲이 마을보다 좋았다. 숲에서는 입을 가리는 천을 두르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과 달리 동물들은 라제쉬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송곳니가 유달리 길든 짧든 인간이라면 동물에게 경계의 대상이기 마련이었다.

마을에 있을 때보다 잘 먹고 잘 잔 덕인지, 라제쉬는 키가 부쩍 자랐다. 말라빠졌던 몸에 살이 붙고, 거칠고 뻣뻣했던 검은 머리카락에도 윤기가 돌았다. 키란은 라제쉬의 이빨뿐만 아니라 키나 팔 다리 길이에도 신경을 썼다. 수시로 줄을 대어 키를 재고는, 전달에 비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했다.

"한 달에 손가락 마디 하나씩 자라는 것 같네."

라제쉬는 키란이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좋았다. 키란을 보아 온지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나 제법 키란에 대해 아는 것이 늘었다고 자부했다. 라제쉬는 키란이 누구에게나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키란은 단지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인내심이 발휘되는 대상은 주로 라제쉬였다. 그것이 이해타산에서 우러난 것이든 다른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든 라제쉬는 키란의 인내심에 늘 고마웠다. 그러나 라제쉬는 마음 한편으론 자신이 키란에게 있어 그저 참아줘야할 어린 애 이상의 존재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라제쉬로선 키란과 더 가까워질 방도를 알 수 없었다. 라제쉬가 아는 것이라곤 키란이 때때로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럴 때 라제쉬는 홀로 숲 속을 탐험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홀로 발 들일 엄두도 못 낼 깊은 숲까지 산책을 갈 수 있다는 것은 라제쉬의 큰 즐거움이었다.

숲 속에서 사람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건 큰 실책이었다. 라제쉬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어떤 남자와 마주치고 적잖이 놀랐다. 남자는 잠시 라제쉬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씨근대며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고 라제쉬에게 다가왔다. 라제쉬는 뒷걸음을 치다 소리를 질렀다.

"키란!"

키란이 톱을 들고 달려왔다. 당황한 남자가 칼을 키란을 향해 휘두르자, 라제쉬는 저를 붙들고 있던 팔을 물어뜯었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피를 뒤집어쓴 라제쉬도 놀라서 헐떡였다. 고작 한 번 물었는데 그렇게 많은 피가 뿜어져 나올 줄은 몰랐다. 입 안 가득 역한 쇠맛이 퍼지는 것이 섬뜩해서, 라제쉬는 계속 침과 함께 피를 뱉어냈다. 그러다 귀를 찢을듯 요란한 굉음에 고개를 들었다. 팔이 잘린 남자가 더 많은 피를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키란은 여전히 웅웅대며 돌아가는 톱을 들고 있었다. 잠시 남자를 굽어보던 키란이 다시 톱을 쳐들었다. 라제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어."

라제쉬는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렇게 피를 많이 흘리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아프게 해서 나를 놓아주게 하려는 거였는데."

"네 이빨에 살짝만 물려도 간지럽게 느껴지지는 않아. 이제 그런 수준은 지났지."

라제쉬는 온 몸이 벌벌 떨려왔다. 어깨에 따뜻하고 무거운 것이 올라왔다. 키란의 손이었다.

"이빨이 있으면 물어뜯어야지."

눈을 감고 있던 라제쉬는 키란의 목소리에서 잔뜩 억눌린 무언가를 읽어냈다. 그러나 키란은 더 말하지 않았고, 라제쉬는 목소리에 대한 생각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 자는 강도였어. 우리에게 무기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했겠지."

라제쉬는 키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자신에게 달려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 이빨이 비싸다고 했었잖아."

라제쉬가 말했다.

"그랬지.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이빨을 노리던 거였겠지."

키란이 라제쉬에게 검은 천을 내밀었다. 라제쉬는 천을 입과 턱이 가려지도록 둘렀다. 자꾸 손에 힘이 풀려서 헛손짓을 하다가, 라제쉬는 눈물을 쏟아냈다. 키란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라제쉬가 진정이 될 때까지, 자리에 주저앉아 묵묵히 톱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많을 거야."

키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견뎌 내. 계속 나와 같이 다니고 싶다면."

라제쉬는 잠자코 서 있다가 주먹을 들어 눈가를 훔쳐냈다.

앞에서 걸어가는 키란을 따라 걷던 라제쉬는 남자의 시신에 눈길을 주었다. 더위 속에서 시체는 빠르게 부패했고, 냄새를 풍겨 송장벌레와 번쩍이는 파리 떼를 꼬여냈다. 남자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거멓게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꼭 살아있는 사람을 버려두고 가는 기분이 들어, 라제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인가, 키란은 라제쉬의 키를 재는 것을 그만두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라제쉬의 키도 키란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더 자란 후에 성장이 멎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있던 까마귀의 방문도 끊겼다. 라제쉬는 아마 더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대부분의 나날을 숲 속에서 보내고 있기 때문일 거란 결론을 내렸다.

둘은 점점 뼈 궁전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와 말이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를 걷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키란과 라제쉬의 이동 속도는 매우 더뎠고, 사람과 마주치는 일도 드물었다. 가끔 강도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라제쉬가 입을 가리고 있는 한 키란이 톱으로 사람을 두동강 내려 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야생에서 견뎌온 열 네살의 라제쉬는 이제 손 쉽게 성인을 제압할만큼 강했다.

강도가 아닌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호랑이나 악어에게 당하지 않게 위해 칼잡이를 대동하고 숲을 건너는 상인 행렬을, 라제쉬는 수년 동안 두어번 본 적이 있었다. 벌을 치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상인들보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들은 꿀을 채취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숲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라제쉬는 같은 사람을 몇 번씩 마주친 적도 있었다.

오랜만에 까마귀가 다녀갔던 날 밤, 키란은 또 한 번 낯선 이와 마주쳤다. 자신을 아미타브라고 소개한 치과 의사는 키란처럼 등 뒤에 톱을 차고 다녔는데, 키란과도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러나 라제쉬는 키란이 아미타브를 탐탁치 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은 아미타브가 싱글싱글 웃으며 라제쉬를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는 그 거치적거리는 입가리개를 치워도 돼."

라제쉬는 키란을 바라보았다. 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제쉬는 목 뒤로 손을 뻗어 매듭진 천을 풀어냈다. 아미타브가 휘파람을 불자, 라제쉬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미타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얘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잖아, 키란."

아미타브가 난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키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미타브는 라제쉬에게 직접 사정을 해야 했다.

"잠깐만, 네 칼이빨 길이를 재 봐도 될까?"

라제쉬는 키란이 제 행동에 난처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미타브가 품에서 줄자를 꺼내어 송곳니의 길이를 재도록 내버려 두었다. 일전에 키란이 그랬던 것처럼 송곳니에 이어 머리와 팔 다리 길이를 재는 동안 아미타브는 라제쉬의 이빨을 힐금거렸다.

"내가 봐온 것들 중에 최고로 길군."

좋겠어, 키란. 아미타브가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라제쉬가 물었다.

"뭘 봐왔는데?"

"어른에게 반말을 쓰면 못 써."

라제쉬는 아미타브를 향해 한 발짝 내딛었다. 아미타브가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뒤에 서 있던 키란이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키란보다 키가 더 큰 아미타브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키란의 눈동자가 모닥불의 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아미타브가 두 손바닥을 내어 보였다.

"수년간 숲 속에서만 생활했다더니, 꼭 토끼마냥 예민하군. 긴장 풀어."

아미타브는 키란과 라제쉬를 따라 뼈 궁전 쪽으로 가고 있었다. 라제쉬는 그가 싫었지만, 아미타브는 라제쉬를 자꾸 귀찮게 했다. 끝내 라제쉬는 아미타브가 자기 곁에서 이야기를 하도록 내버려 두게 되었는데, 그가 키란에 대해 라제쉬가 모르는 것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가는 곳에 대해 알고 있니?"

라제쉬가 아미타브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짧게 대꾸했다.

"뼈 궁전에 대해선 나도 들은 게 있어."

"왕이 푸른색을 아주 좋아한다는 얘기도 알겠구나."

"맞아."

라제쉬가 덧붙였다.

"키란 말로는, 왕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무서워하지 않을 거래. 오히려 반길 거라고 했어."

"당연히 그는 너를 반기겠지. 왕은 닐람을 아주 좋아해."

라제쉬는 호기심을 들키기 싫은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하늘을 가린 무수한 나뭇가지들 덕에 땅바닥으론 별빛조차 들지 않았다. 키란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어가 버렸고, 언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었다. 모닥불가에 앉아있는 것은 라제쉬와 아미타브 둘 뿐이었다.

라제쉬는 조금 더 대화를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어?"

왕은 뼈 궁전의 가장 높은 곳에 푸른 것을 두고 싶어 한다고. 아미타브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키란이 네 몸에서 가죽을 벗겨내 왕에게 팔 거야. 뼈 궁전이 왜 뼈 궁전이라고 불리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 왕이 수집한 네 혈족의 뼈가 대리석과 상아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걸 봐야 내 말을 믿어줄까. 키란은 늘 그랬어. 너희 족속들은 뼈가 통째로 보석이니까."

라제쉬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계속 헛소리 가만두지 않겠어."

"키란을 데려와 봐. 우리 둘이서 동시에 네게 이야기를 할 거야. 그럼 누구 입이 먼저 막히는지 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게다."

라제쉬는 모닥불을 등지고 몇 발짝 걷다가 멈추어 섰다. 입술이 떨렸다.

"네 말은 틀렸어. 키란이 그런 사람이라면, 왜 수년 동안 나를 그냥 살려뒀겠어?"

라제쉬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미타브가 걸어오고 있었다.

"네 몸 속에 있는 닐람이 자라는 걸 기다린 거야. 더 자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때까지."

라제쉬는 아미타브를 밀쳐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라제쉬의 숨통이 단단히 틀어 막혔다. 아미타브가 라제쉬의 목에 가죽끈을 감고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라제쉬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목에 감긴 끈을 풀어내려고 손을 버둥대는 동안 아미타브가 라제쉬의 귀에다 속삭였다.

"금방 끝나. 칼을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네 뼈에 흠이 나지만 않는다면……."

"그 앨 내려놔."

키란이 조용히 말했다. 손에 톱이 들려 있었다. 아미타브가 코웃음을 쳤다.

"나도 사냥꾼이야. 톱은 내게도 있어. 그깟 걸로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

아미타브가 라제쉬를 옆으로 밀어놓고 톱을 집어 들었다. 아미타브의 톱날도 키란의 것처럼 굉음을 내며 빠르게 회전했다. 라제쉬는 숨을 고르느라 둘의 싸움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른 것은 키란이 아니었다. 라제쉬가 고개를 들어보니 복부를 깊이 베인 아미타브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배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피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아미타브의 톱은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내 톱엔 칼이빨 조각들이 붙어있어."

키란이 말했다. 아미타브에게 하는 소리인지 라제쉬에게 하는 소리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톱에 걸린 마법을 강화해준단 얘길 왕한테 들었거든."

키란이 톱날을 아미타브의 목에 갖다 댔다. 목 쉰 울음소리도 잠시, 아미타브의 머리는 깨끗이 몸통에서 잘려나갔다.

라제쉬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오래전, 키란을 처음 만난 날 밤에 처음으로 던졌던 질문을 기억해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인거지."

키란이 물끄러미 라제쉬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 속 동공엔 놀란 기색이라곤 없었다.

"저 자의 이야기를 다 듣진 못했지만, 나에 대해 좋지 못한 이야기들을 마구 해댔겠지."

키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 입을 다시 열었다.

"그럼 그 말은 사실이야."

라제쉬는 제 목을 더듬었다. 더는 가죽 끈으로 졸리고 있지 않았지만, 여전히 숨 쉬는 것은 힘들었다.

"왕의 명을 받아 지방을 탐색하던 중에 푸르고 단단한 뼈를 가진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발견했지. 부러뜨린 송곳니 하나를 받았는데, 그게 보석이었던 거야."

키란의 생기 없는 시선이 침착하게 라제쉬를 향하고 있었다. 라제쉬는 그 눈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왕은 그 마을에서 귀족들과 함께 몸소 사냥꾼 놀이를 했어."

나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말릴 수도 없었고, 동참할 수도 없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화살을 맞고, 코끼리 발에 짓밟히고, 창에 찔리고 칼과 톱에 베여 죽어갔다. 내가 살린 건 아기 하나 뿐.

키란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두 눈은 라제쉬를 향하고 있었지만, 라제쉬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왕은 내가 아기 하나를 빼돌린걸 알아냈어. 그는 무척 화를 냈지. 닐람이 성한 채로 죽은 자는 하나도 없었던 거야. 모두 저항하다 죽었으니까."

라제쉬는 울었다. 키란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것은 키란의 얼굴이었다. 라제쉬는 키란의 얼굴에서 공포와 혐오를 읽어냈다. 그리곤 더는 키란과 전과 같이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 너를 그에게 데려가는 중이었지."

키란이 말을 마쳤다.

"여기서 죽이지 그래."

라제쉬가 눈을 깜박이며 눈물을 털어냈다. 키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지금 너를 죽이지 않아."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가죽이 벗겨지고 싶지는 않아. 적어도 나에게, 조금이라도……."

목으로 자꾸만 뜨거운 것이 치밀어 말을 똑바로 맺을 수가 없었다. 라제쉬의 머릿속으로 키란과 처음 만난 날에 제 발음이 비웃음을 살까 두려워하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나를 조금이라도 아꼈다면."

"나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죽였고, 걷지 못하는 아이들도 죽였어. 너에겐 다를까봐?"

키란이 톱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한 번 뿐인 기회야. 가."

지쳤어. 그 말이 허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라제쉬는 그때서야 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라제쉬는 숲 속으로 달렸다. 나무 가시가 뺨을 할퀴고, 덩굴이 머리에 엉켰다. 그러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라제쉬는 땅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다친 짐승처럼 울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언제였는지, 키란이 처음으로 톱으로 사람을 죽이던 모습을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 때 키란은 라제쉬더러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고 했었다. 그 때 떠났어야 했을까. 라제쉬는 아픈 머리로 정신없이 생각했다.

키란은 왜 나를 보내주려 했을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기 때문이었나?

한동안 훌쩍이던 라제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척거리며 발걸음을 떼어냈다. 키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 키란이 거대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모닥불은 사그라들었지만, 기침을 하는 키란의 모습을 라제쉬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새벽이었다.

키란이 피를 토해냈다. 라제쉬는 뒤늦게 키란의 발치에 떨어져있는 작은 병을 발견했다. 마개가 열려 있었다.

라제쉬는 키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란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보따리를 풀어 모포를 꺼냈다. 그러다 제 옷깃을 잡아끄는 약한 힘을 느끼곤 손을 멈추었다.

키란이 입을 달싹였다. 이빨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

라제쉬는 침묵했다. 키란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리 위로 새들이 떼 지어 날아갔다. 숲은 새들의 울음소리 외엔 더없이 적막하고 평화로웠다.

라제쉬는 키란을 안아들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너무도 명확했다. 라제쉬는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벌 치는 이도, 상인들의 행렬도 마주치지 않을,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을 악어와 호랑이만이 가득한 숲 속으로.

 

뼈 궁전이 불타오르자 벽에 박혀있던 닐람은 새카맣게 사위었다. 사람들은 조상들의 어리석음에 놀랐다. 보석은 영원해야 보석인 것인데, 그들은 고작 불에 타서 재가 될 것들을 애지중지 했단 말인가? 현명한 이들은 과거의 존재 가치를 미래의 예측 가능한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것에 두었고, 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피 흘릴 가치가 있는 것에 피를 흘렸고, 결국 지난날의 모든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어찌됐든, 라제쉬라는 명사는 왕관의 주인이란 의미로 오래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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