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거래

2019.05.31 14:3405.31

  안경 낀 남자가 박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들어간 새끼, 이현승이 맞죠?’

  ‘예.’

  ‘두 시간 후에 거기서 봅시다. 서로 지저분하게 끝내지 말고요.’

  안경이 전화를 끊고 이현승을 뒤따라 클럽 디오로 들어갔다. 지난 일로 안경은 왼쪽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또 아닌 것도 같았다. 클럽 가드들은 오늘의 남자 드레스 코드인 정장 차림을 한 그 둘을 특별히 저지하지 않았다.

  클럽에서는 오데자의 <로열>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웅장하고 몰아치는 비트의 음악에 살짝 어긋나기도 하면서 반쯤 눈이 풀린 채로 춤을 추고 있었다. 안경은 혼란 속에서도 이현승을 시야 안에 두면서 계속 쫓아갔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이현승이 노출이 심한 의상의 두 여자 주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몸을 여자들에게 밀착시켰다. 놀란 두 여자가 욕을 하는 듯한 입 모양을 이현승에게 보이면서 자리를 옮겼다.

  안경은 이현승이 여자들에게 찝쩍거릴 때부터 한곳에서 거리를 두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현승이 혼자가 되자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경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엄지손가락만 한 양면 면도날이었다. 그가 이현승에게 다가갔다.

  안경은 곧 이현승의 왼쪽 대각선 뒤에 섰다. 그리고는 면도날을 든 오른손을 뻗어 그의 앞 목 오른쪽을 긋고 사라졌다. 이현승이 바로 자신의 목에 손을 갖다 댔다. 갖다 댄 손 위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주위의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박 팀장이 탄 자동차 창문을 두드렸다. 안경이었다. 그가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경이 정적을 깼다.

  “아 씨발 진짜 존나 머네. 붙은 사람도 없었는데 거기서 만나면 되지 뭐 하러 강화도까지 불러요. 사람을.”

  박 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여기. 새 신분증, 여권, 돈, 브로커 연락처. 인천항 근처 가서 그 번호로 연락해요. 이제 한국 들어오지 마시고.”

  안경은 묘한 표정으로 박 팀장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는 주위는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풍경을 보는 것처럼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경이 문을 열고 내리려다 말고 박 팀장에게 말했다.

  “박 팀장님. 뭐 특별한 건 아닌데 내가 조언 하나 할까요? 이게 다 끝난 게 아니에요. 뭐고 그거. 허무함? 허망함? 뭐 그런 게 존나 올 겁니다. 그런다고 정신 놓아 삐면 좆 되는 거지.”

  박 팀장은 그 말을 듣고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려 안경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그곳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안경 낀 남자가 오랜만에 침대에서 잠을 깼을 때 그는 악몽이라도 꿨는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숨은 몰아쉬었고 두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얼굴은 핏기를 잃어 창백했다.

  그런 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그리고 안경은 눈을 감고 떨리는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스스로 안정을 찾아 갔다.

  잠시 후 그는 랩톱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안경은 어제에 이어서 한참 동안 남자들의 신상 정보 따위를 훑어보다가 마침내 최종 한 사람을 가려냈다.

  그 사람은 안경이 전에도 골라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 안경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의 연락처와 주소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안경은 그 일을 계기로 신상 정보가 맞지 않는 남자들의 데이터를 최대한 갱신했다. 이번에 재차 간택한 사람의 경우 본인 명의의 휴대폰이 없었다. 안경은 자신처럼 그가 대포폰을 구입해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관련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의 포털 사이트와 SNS 계정 등을 털었다. 그것들은 대포폰을 구입할 수 있는 주요 창구이기 때문이었다. 안경은 그의 SNS에서 구입 흔적을 찾아냈다. 그는 판매자로부터 직접 대포폰을 건네받을 때 본래 명의자 정보도 같이 받아야 했지만 판매자가 실수로 빠트렸다. 그래서 해당 정보를 대포폰을 구입한 SNS를 통해 받았는데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안경은 그것을 토대로 추적해 그의 주소도 알아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그 사람의 데이터를 스마트폰과 연동한 안경은 두 가지 디바이스 모두를 이미 싸인 짐 사이에 넣고 샤워를 했다.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와 같은 무난한 옷차림으로 체크아웃을 마친 그가 숙소를 나섰다. 그는 숙소 뒤 주차장을 지나쳐서 주택가 쪽을 향해 걸어갔다. 빈 공간마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엉켜 주차되어 있었다.

  안경과 그의 짐까지 올라탄 낡은 차는 달리기가 조금은 버거워 보였다. 그는 짐 가방 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아까 보던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이내 안경은 차 시동을 걸었다. 의외로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골목길을 빠져나가 이태원 방향으로 운전대를 틀었다. 그리고 곧 간택된 그 사람이 있는 한남동에 다다랐다.

  주민 센터를 지나 한 주택 앞에 차를 세운 안경은 바깥을 확인한 후 스마트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걸어서 그 일대를 계속 돌았다. 오르막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날이 컴컴해질 때까지는 범위를 넓혀서 차로 그 일대를 이어 돌았다. 아까 차를 세워 두었던 곳을 기준으로 어느 방향이든 가 보았고 빠짐없이 시간도 쟀다.

  밤 아홉 시가 넘자 안경은 주택 앞으로 오후와는 반대인 방향에서 진입해 들어갔다. 원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주차를 해놓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택을 약간 지나친 자리에 주민 센터를 바라보고 차를 댔다. 안경은 요기를 그제야 조금 하다가 그마저도 열 시가 가까이 되자 그만두었다.

  안경이 랩톱과 스마트폰에 지도와 영상을 각각 띄우고 번갈아 가면서 주시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랩톱 화면의 빨간 점인 그 남자가 주민 센터 가까이 다가왔다. 안경은 기기들을 정리하고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차에서 내렸다. 어두운 골목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토바이 한 대만이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안경은 처음 주차했던 곳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곳을 조금 지나친 후 뒤돌아 멈춰 섰다. 곧 그는 왔던 방향으로 재차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부터는 빨간 점 남자가 오고 있었다. 그 둘은 주택 앞쯤에서 마주칠 터였다. 두 남자 간격이 더 좁혀지자 안경은 오른손으로 외투 주머니에서 작고 날카로운 물건을 꺼냈다. 면도날이었다.

  안경은 주택 입구를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튼 남자 오른편으로 밀착해 스쳐 지나가면서 손에 쥔 면도날로 그의 목을 그었다. 그는 수 초 후 비틀거리다가 쓰러졌고 안경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곳을 떠났다.

 

  일주일여가 지나고 날이 밝았으나 여전히 박 팀장은 안경을 쫓고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강력 1팀은 어제부터는 이태원 일대를 수사 중이었다.

  프로그래머였던 안경은 초여름에 용산에 위치한 자신의 집 근방에서 아내를 잃었다. 성범죄 전과자가 강간 살해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안경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용산 지역의 성범죄 전과자들을 죄질을 막론하고 찾아다니면서 면도날로 목을 긋는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해 오고 있었다.

  박 팀장이 동료들과 아침을 먹고 있는데 그의 전화가 울렸다.

  ‘예, 서장님. 예. 예⋯⋯. 예? 그래도 애들 밥은 먹여야죠. 아니, 그게 아니고⋯⋯. 예.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박 팀장은 택시를 타고 서로 가면서 눈을 조금 붙이려고 해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지 이내 눈을 떴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저런 뉴스 기사들을 대충 읽다가 어느 한 기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기사는 모든 근본적인 원인은 경찰의 무능함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안경이 마치 시민을 지키는 영웅인 것처럼 미화하고 있었다. 박 팀장은 스크롤을 내려 일반인의 반응을 살폈다. 안경을 지지한다는 댓글들이 적지 않았다.

  박 팀장이 서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서장이 일어나 소리쳤다.

  “야이 박 팀장아. 너 형사 짬밥 몇 년이야. 강력 2팀에 3팀까지 붙여 줬잖아. 나머지도 다 붙여줘? 어? 아니 도대체 왜 못 잡는 건데.”

  “⋯⋯.”

  “며칠 전에도 말했지만 그 새끼가 우리를 얼마나 물로 봤으면 이제는 모텔에서 쳐 자냐 이거야. 그것도 용산 바닥에서. 지랄 무슨 출장 다녀? 그리고 너. 제일일본지 뭔지 거기서 나온 기사 봤어 못 봤어. 쪽팔리게 진짜 씨⋯⋯. 그래. 안타깝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 아냐. 미친놈이 어디서 영웅질이야.”

  서장은 박 팀장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박 팀장은 아까부터 똑같은 자세로 계속 서 있었다. 한참 동안 답답한 적막이 흘렀다.

  “뭐하고 가만히 서 있어? 그럴 시간 있어 지금? 이거 우리 손 떠나는 거 한순간이다. 알아듣지?”

  “예.”

  “그럼 나가서 당장 잡아 와.”

  박 팀장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서장실을 나왔다. 2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박 팀장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머리를 긁으며 겸연쩍어 했다. 박 팀장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면서 밑으로 내려가자는 신호와 함께 말했다.

  “뭐 인마. 저 양반도 위에서 전화 받았나 보지. 너도 기사 봤어? 그 기사 터지고 밑으로 줄줄이 압박하는 거 아냐. 왜? 너도 한번 조여 줘?”

  “아이고, 형님 죄송합니다. 이거 독한 마가 낀 건지⋯⋯.”

  “죄송은 무슨. 나도 이러고 있는데. 됐고, 너희 구역 전과자들 신상 정보는 최신화 좀 했냐. 안 맞는 거 꽤 있지?”

  “죽겠어요. 이번처럼 방만 구하고 아예 사라진 놈들도 많고, 그게 아니어도 연락 잘 안 되고. 또 뭐야, 형님도 아시잖아요. 용산에 발찌 찬 놈들은 죄다 구형으로 갖고 있어서 파악도 빡세요.”

  “근데 그 새끼는 먼저 다 알고 움직였단 말이지. 얘 개화시켜서 사이버범죄팀에 처박아 두고 일 시킬 순 없나⋯⋯. 야, 차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들은 본관에서 나와 별관으로 향하면서 계속 말을 잇다가 박 팀장의 말에 차에 올라탔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요즘 서에서 눈치가 보여. 모든 사람들한테. 진짜 못 할 짓이다. 아, 3팀 뭐 좀 나온 거 있대?”

  “네? 아 그거. 일단 조기 폐차든 뭐든 물량 확보한다고 한국인 바지사장 밑에서 설치는 애들 캄보디아 조직 맞대요. 지금 관련된 놈들 증거 확보가 덜 돼서 확실하게 엮으려고 준비하고 있고요. 중요한 건, 그 새끼도 연관돼 있는 걸 최종적으로 확인했답니다.”

  “아니 그럼. 거기서 나온 차를 바꿔가면서 타고 다니기라도 했다는 건가?”

  박 팀장과 2팀장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다가 멈췄다. 2팀장이 박 팀장을 보면서 말했다.

  “형님. 형수님하고 식사라도 하고 오세요. 시동만 걸면 되겠네. 집에 못 들어간 지 한참 되셨잖아요. 1팀 애들은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

  박 팀장은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박 팀장은 깜짝 놀라게 해줘야겠다고 혼잣말을 하면서 연락도 없이 아내가 일하는 사무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가 자동차의 속력을 높였다.

  사무실 건물 주차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박 팀장은 웃음 띤 얼굴로 계속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가 지하 5층에 주차를 끝내고 1층 로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는 휴대폰 잠금 화면을 풀었다가 닫았다. 지하 1층을 누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문을 열었다. 저편 틈 사이로 꽃집이 보였다. 박 팀장은 닫히는 문을 재차 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꽃집으로 향하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꽃집에는 너무 많은 꽃들이 있었다. 박 팀장은 플로리스트로부터 여러 종류를 추천 받았지만 결국 빨간 장미를 골랐다. 플로리스트가 꽃을 손질하는 동안 박 팀장은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박 팀장은 꽃이 꺾이는 줄도 모르고 1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와중에 그는 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박 팀장은 아내가 전화를 세 번이나 계속 받지 않자 로비의 데스크로 가서 직원에게 연결을 부탁했다. 그는 아내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따로 저장한 적이 없었다. 직원이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아내 분이 건축설계팀 김은영 과장님이라고 하셨죠? 오늘 별도 연락 없이 출근 안 하셨다고 하는데요.”

  직원은 박 팀장이 다시 한번 확인을 부탁하는 통에 똑같은 통화를 또 해야 했다. 바뀐 것은 없었다. 박 팀장은 거듭 아내와 전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 정도로 연락이 안 된 적은 없었다.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곧 그는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주차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박 팀장은 아내의 친한 친구 두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명 모두 오늘은 연락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처가에는 연락하려다가 말았다.

  그가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선 후까지도 자동차의 속력을 줄이지 않는 바람에 사고가 날 뻔했다. 그러나 박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속력으로 더 들어가 마구잡이로 주차를 했다. 아내의 차는 그대로 있었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박 팀장이 현관문 도어록의 번호키를 누르면서 손을 떨었다. 집으로 들어와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아내를 찾기 시작했다. 침실 문을 열었다. 아내가 침대 위에서 온몸에 심한 타박상을 입고 알몸으로 죽어 있었다.

 

  다음날 새벽이 된 순간까지도 박 팀장은 부검실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척이나 퀭한 모습이었다. 복도 끝에서 2팀장이 그를 발견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다가왔다. 2팀장은 어젯밤에 용의자가 바로 자수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용의자는 SC건설 이현승 상무의 비서였고 SC건설은 박 팀장의 아내가 다니던 회사였다. 그리고 사건은 이현승 상무를 포함해 셋이서 술을 마시다가 벌어진 것이라고만 전했다. 2팀장은 할 말이 더 있는 듯 보였지만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말을 덧붙였다.

  “형님. 저기, 장례는 저희가 준비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서장님이 말씀하시겠지만 아무래도 형님 좀 쉬게 할 생각인 거 같아요.”

  박 팀장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검실에도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안경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예전에 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집에 갔을 때는 문을 열자마자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두통이 생겨서 되는대로 몇 가지 필요한 짐만 챙기고 나와야만 했다. 그때 집에서 나온 이후로 돌아가는 것이 처음인 그였다. 사실 정확히는 두 번째이지만 첫 번째라고 할 수 있는 그때에는 주위에 형사들이 너무 많았다.

  그가 지난번처럼 자신의 아파트 단지로 곧장 향하지 않고 근처 다른 단지로 방향을 바꿨다. 그 입구에는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세로로 올곧게 열린 채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안경은 손쉽게 지나쳐 갔다. 그리고는 단지 구석 자리에 차를 세웠다. 전방 비스듬히 보이는 경비실에는 사람은 없고 불만 켜져 있었다.

  안경이 짐 속에서 랩톱을 꺼내 잠깐 동안 어떤 작업을 했다. 화면 속에서는 작게 박 팀장과 2팀장 등 강력팀 형사들과 제복 입은 경찰들의 모습이 나왔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곧 그들은 파란 점들로 변해 지도 위에 나타났다. 많은 점들이 어느 한곳에 뭉쳐 있었다.

  안경이 자신이 있는 위치의 지도를 확대하자 두 개의 파란 점이 남았다. 그는 이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두 파란 점인 강력 2팀 형사는 지도상으로 지상에만 있는 안경의 아파트 주차장 끝자리에 있었으나 그들을 관찰할 만한 근접 영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안경은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또 쓸 일도 없는데 상관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랩톱에 다른 프로그램을 띄웠다. 그동안은 미완성에 불안정하고 역추적 위험까지 있어서 사용하지 않던 것이었다. 그가 데이터 리스트에서 하나를 실행시켰다. 그것은 2팀장 음성 데이터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그가 지금껏 2팀장의 전화를 엿들어 모아온 것이었다.

  안경은 몇 분간의 작업을 끝내고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존과는 다른 전화 연결 화면에 발신자는 2팀장, 수신자는 잠복 중인 두 형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 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둘 다 지금 바로 서계동으로 넘어와. 도서관 근처 와서 전화해.’

  ‘알겠습니다. 그 새끼⋯⋯.’

  진짜가 아닌 목소리는 도중에 전화를 끊어 버렸고 형사 두 명은 가짜 명령대로 안경의 집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안경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스마트폰의 손전등을 켰다. 예전에 급하게 나왔을 때보다 집은 더 어질러져 있었다. 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바로 그는 짐을 든 채로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침대장 위에 내려놓고 붙박이장 맨 오른쪽 문을 열어 흩어진 옷들 사이로 보이는 작은 어항만한 종이 상자를 꺼냈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제대로 닫은 뒤 양손으로 쥐고 몇 초간 서 있었다.

  안경은 남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상자와 스마트폰 모두를 짐 속에 파묻었다. 짐 가방이 부풀어 올랐다. 그는 다른 것에는 일절 시선을 두지 않고 그대로 집에서 나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안경은 짐 가방을 있는 힘껏 잡고 있었다.

  그가 1층에 사람들 목소리를 듣고 2층과 1층 사이 계단참에서 멈춰 섰다.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안경은 목소리가 사라지자 살며시 반층을 내려와 아파트 입구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가 아까 지나온 샛문 앞에 다다랐을 때 저편에서는 경찰차 한 대가 경광등과 사이렌을 모두 끈 채 접근해 오고 있었다. 안경은 서둘러 단지를 빠져나갔다.

  이내 그는 옆 단지에 세워 두었던 차에 짐과 함께 올라탔다. 그리고 지체 없이 시동을 걸었다.

 

  안경은 곧 정선에 도착할 참이었다. 밤늦게 출발해 국도를 돌고 돌아서 왔는데도 아직은 먼동이 트기 전이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이어진 시간 탓에 도로가 한산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탄 자동차가 정선 시내로 가는 길을 지나쳐 계속 달려갔다. 긴 터널을 통과해 북평면과 여량면도 지나쳐 갔다. 마침내 안경이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저수지였다. 그가 저수지 옆 비포장도로 끝에 차를 세웠다. 주위는 태초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했다.

  안경은 깊은 호흡을 하고는 짐 속에서 종이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는 뚜껑을 열고 안에 든 수많은 쪽지와 편지들을 만지작거렸다. 그것들은 그와 그의 아내가 어렸을 적 한동네에 살아 친구가 되면서부터 시작한 아주 긴 대화였다. 그는 그 대화의 끝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곧 안경은 정신을 차리고 종이 상자와 짐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먼저 차 뒤에서 라이터를 꺼내 종이 상자를 통째로 태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잿더미로 변한 그것을 안경은 발로 문질러 비틀었다. 그러자 재는 흙 속에 파묻히거나 바람결에 흩어져 갔다.

  날이 서서히 밝아옴에 따라 안경은 행동의 속도를 높였다. 짐 가방 속에 여러 물건들과 함께 있는 랩톱 컴퓨터와 스마트폰 세 대가 모두 꺼져 있는지 확인하더니 그대로 가방의 지퍼를 닫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다음에는 근처 나무 밑에서 꽤 큰 돌덩어리를 주워 와 곧바로 짐 가방을 내리찍었다. 그는 그 행위를 열세 번 정도 더 하고 너덜너덜해진 가방 안의 파편들을 살핀 뒤 돌덩어리를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지니고 있던 그 짐 가방을 저수지에 던져 버렸다.

  안경은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그가 속삭였다. 여보, 이제 거의 다 끝났다. 하나만 더 하면 된다⋯⋯. 그러면 곧 거기에 도착하겠지.

 

  안경은 비포장도로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아까는 어두웠던 길이 잘 드러나 보였다. 그가 저수지를 크게 감싸고 있는 이 차선 도로에 맞닿을 때쯤 저편에서부터는 빨간빛이 도는 검은 자동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주위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그 차는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같은 방향이나 반대 방향이나 다른 차들은 없었으므로 중앙선을 넘나들더라도 당장의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곧 안경은 더 큰 위험을 알아차렸다. 그 차가 자신의 차 앞까지 다가왔을 때 조수석의 한 여자가 반 이상 열린 창문으로 묶인 두 손과 얼굴을 내민 것이었다. 입도 움직였지만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안경은 쫓아가기 시작했다. 간격은 점점 좁아졌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빨간빛 검은 차의 뒤 범퍼와 안경이 탄 차의 앞 범퍼는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았다. 이내 간격은 다시 벌어졌다. 그의 추격은 그렇게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경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태껏 지은 적 없는 표정을 하고 발에서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떼지 않았다.

  잠시 뒤였다. 안경의 차 앞 유리창으로 점처럼 보이던 그 차가 덜컹거리더니 한순간에 큰 덩어리로 불어나고 있었다. 뒤이어 안경은 도로에 쓰러진 노루를 피하려고 하다가 중앙선을 넘어갔다. 그는 그대로 속도를 높였다. 그 차가 동일 선상에 놓였다. 안경은 바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으면서 그 차를 몰아붙였다. 그러자 빨간빛 검은 차는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전봇대를 들이박았고 안경이 탄 차는 180도를 돌아 멈춰 섰다.

  안경은 자신의 몸을 살피자마자 차에서 내려 다른 차로 향했다. 운전석에 남자는 기절한 듯했고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은 조수석으로 가서 에어백을 걷어 냈다. 여자는 얼굴에 갖가지 상처가 난 채로 손과 팔과 다리와 발이 모두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또 일부 풀린 흔적도 있었다. 그는 여자의 안전벨트와 노끈을 완전히 다 풀어준 다음 그것을 들고 곧장 운전석으로 갔다. 그리고 그 노끈으로 남자를 똑같이 묶고 안전벨트를 다시 채웠다. 뒷좌석에 굴러다니는 테이프로 두 손을 허벅지 위에다가 붙여 버리고 입도 막았다.

  안경은 빤히 남자를 쳐다보다가 그의 뺨을 세게 몇 번 쳤다. 남자가 꿈틀거리면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가 상황 파악이 됐는지 나오지 않는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었다. 안경이 오른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안경의 손은 면도날을 문 채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 손은 팔과 어깨와 함께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남자의 목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깊고도 천천히 그어 냈다.

  안경은 웃고 있었다. 그는 계속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차에 올라타 자리를 떴다.

  빨간빛 검은 차 안의 여자는 아까부터 깨어 있었으나 눈은 뜨지 않고 있었다. 안경이 자동차 굉음을 내면서 떠난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여자는 온몸까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박 팀장은 2팀장과 3팀장 그리고 후배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별 탈 없이 치렀다. 그들은 장례 기간에 따로 집 정리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바깥 상황은 엉망이었다. 정선 사건 탓이었다.

  박 팀장은 지금 타의로 긴 휴가를 보내기 전에 서에 들르러 가는 중이었다. 안경이 저지르고 있는 사건들로 한참을 집에서 나와 있었기에 챙길 것들이 꽤 있었다. 도착한 후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주위에 모든 동료들은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는 듯했다.

  박 팀장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짐을 챙기는 척하면서 아내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조리 복사했다. 그러나 불법 반출 경고는 뜨지 않았다. 자신이 속한 1팀은 평소에 번거롭다는 이유로 경고 프로그램을 꺼 두기 때문이었고 박 팀장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료를 포함한 짐을 다 챙긴 후에 그는 그것들을 차에 실어 두고 인사를 하기 위해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서장이 와 있었다. 그는 박 팀장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아무 말을 안 했고 다른 동료들도 모두 박 팀장에게 해줄 적당한 말을 여전히 찾지 못한 듯 헤매는 모습을 보였다.

 

  박 팀장이 서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반나절이 지나 새벽이 되었다. 그는 아까부터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수자 진술 자료만을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구토를 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지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복해서 보고 또 보았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방 안에 붉은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박 팀장은 자료 보는 것을 중단하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냈을 때 거울에 비친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서둘러 옷을 입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올라타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SC건설로 설정하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았다. 출근 시간 전이라 차는 그다지 막히지 않았고 금방 회사 근처에 도착했다. 박 팀장은 시계를 보고는 회사 건물 앞 카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오전 아홉 시가 되자마자 그는 데스크로 달려갔다. 그때 그 직원은 그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박 팀장이 경찰 신분증을 제시하자 직원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박 팀장이 말했다.

  “아내 동료들을 좀 만나 보고 싶어서 왔는데요.”

  “죄송합니다. 상부에서 종결 사건에 더 이상 대응하지 말라고 해서요.”

  박 팀장이 데스크 앞에 서서 직원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면서 다시 한번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똑같은 대답뿐이었다. 그가 신분증을 또 꺼내 보였다.

  “아니, 방금 이거 봤을 거 아니에요. 사람이 죽어서 뭘 물어보겠다는데 뭐 하자는 거야 지금. 그 사람들 안 되면 뭐 바로 이현승 상무 좀 만납시다. 윗사람 다이렉트로 만나면 나야 편하지. 저기요. 예? 뭐 가타부타 말이 없어.”

  박 팀장이 언성을 높이자 데스크 반대편 끝에서부터 검은 양복을 입은 키와 덩치가 큰 보안 요원들이 무리 지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박 팀장 앞까지 온 뒤 아무 말 없이 그의 주위를 둥그렇게 감쌌다.

  “뭐야 이거?”

  박 팀장은 소리치면서 비집고 나가기를 시도했지만 그들은 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박 팀장은 그 속에 묶인 채 출입구 쪽으로 떠밀려 갈 뿐이었다.

  출입구 밖으로 완전히 밀린 박 팀장이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들 중 한 명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 사람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떨어져 나갔다. 그가 선글라스를 주워 재차 쓰면서 말했다.

  “따로 문제 삼진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하시죠.”

  박 팀장은 오른손을 계속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와 그들 전부도 선글라스 안에서 박 팀장을 주시하는 듯했다.

  자신의 차로 돌아가는 박 팀장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깨물거나 몸 여기저기를 긁어대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가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2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형님. 좀 어떠세요.’

  ‘야. 비서 아니잖아. 이현승이잖아.’

  ‘네? 무슨 말씀⋯⋯.’

  ‘와이프 죽인 새끼, 이현승이잖아!’

  박 팀장이 휴대폰을 집어 던져 자동차 앞 유리와 휴대폰 액정에 금이 갔다. 휴대폰 스피커에서 형님, 형님 하는 소리가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그는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고 오랫동안 울었다.

 

  박 팀장이 거실 소파에 앉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집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찾아 헤맨 다이어리를 자동차 트렁크 구석에서 마침내 찾은 것이었다. 그는 안경을 수사할 때 서 관할 지역의 성범죄 전과자 정보를 다이어리에 기록해 두었다.

  곧바로 박 팀장은 자신의 집 위치와 가까운 순서대로 새로운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살아있는 자들이었다. 그는 명단을 컴퓨터 파일로도 만들었다. 서투른 듯 그 작업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작업을 끝낸 뒤 그는 여행을 가는 것처럼 세면도구와 옷가지와 컴퓨터 등을 명단과 함께 큰 가방에 쌌다. 그리고 평소에 즐겨 먹던 분식을 잔뜩 배달시켜 오랜만에 제대로 한 끼를 먹었고 깊은 잠에도 들었다.

  다음날부터 박 팀장은 렌터카를 빌려 명단 순서대로 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근무 중인 동료들을 피해 실제 거주지나 자주 가는 곳 근처에 잠복하여 최소 하루는 투자하고 밥과 잠은 차에서 대충 해결했다. 자신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2팀장이 남긴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는 휴대폰도 아예 꺼버렸다.

  그러나 그는 안경의 손에 닿지 않은 살아있는 전과자들을 겨우 발견해도 직접적으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뿐이었다.

 

  4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박 팀장은 정선으로 넘어가려다가 용산에서 한 명의 전과자만 더 확인하기로 하고 그가 사는 동네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박 팀장은 졸다가 길을 잘못 들어 미로처럼 엮인 좁은 골목길로 들어와 버렸다. 내비게이션도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었다. 목적지를 다시 설정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박 팀장은 길가에서 유일한 상가인 간판 없는 부동산집을 발견했다. 그가 차에서 내려서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고 불만 켜져 있었다. 박 팀장은 가게 벽면에 크게 걸린 보광동 지도를 한참 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차에 탔다. 그리고는 차량용 휴대폰 충전기와 방전된 휴대폰을 연결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지만 아직 켜지지는 않았다. 그는 전조등을 끄고 창문을 조금 연 뒤 좌석을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박 팀장은 짧은 보폭의 구두 소리에 눈을 떴다. 긴 머리에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가방을 앞으로 안고 걸음을 재촉하면서 그가 있는 방향으로 오다가 옆에 더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누군가가 쫓고 있었다. 박 팀장이 자동차 시동을 끄고 다시 휴대폰 전원을 눌렀다. 여전히 켜지지 않았다. 그가 점퍼의 지퍼를 올리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저편에서 전조등을 끈 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차는 여자와 여자를 뒤쫓던 사람이 들어간 더 좁은 골목길 앞에 멈춰 섰다. 차 안에서 한 사람이 내리더니 그 골목길로 들어갔다.

  박 팀장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향했다. 골목길에는 희미한 작은 가로등 두어 개 외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골목 안쪽도 그래 보였다. 분명히 세 사람이나 들어간 곳이었다. 그는 더 들어갔다.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길 안에 또 샛길이 있었다. 갑자기 샛길 안에서 여자가 머리가 헝클어진 채 맨발로 뛰쳐나와 정신없이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박 팀장이 샛길 입구까지 가서 고개를 살짝 들이밀고 안을 살폈다.

  안경이었다.

  달빛과 다 꺼져가는 샛길 가로등에 비친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또 다른 남자의 오른쪽 얼굴을 발로 밟고 서 있었다. 안경은 곧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그가 항상 사용하는 면도날인 것이 틀림없었다. 안경은 머뭇거리지 않고 남자의 목을 베었다. 그의 목이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박 팀장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박 팀장이 샛길 안으로 들어가면서 안경에게 말했다.

  “어휴, 한참 찾았는데 여기서 만나네.”

  “씨발.”

  안경은 그를 보자마자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도 안경을 쫓아 달렸다. 그들은 출구가 따로 없어 보이는 미로 골목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박 팀장이 마주 오던 배달 오토바이를 붙잡았다.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타고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올라탔다. 그 사이 안경과의 거리는 꽤 벌어져 있었다. 박 팀장은 속도를 높였다. 어느새 안경 바로 뒤까지 다가갔다.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그대로 안경을 치었다. 안경은 튕겨져 나갔고 박 팀장도 오토바이와 함께 널브러졌다.

  안경이 왼쪽 다리를 붙잡고 소리를 질러댔다. 박 팀장은 머리에 흐르는 피를 아무렇지 않은 듯 닦아 내면서 안경 곁으로 가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조용히 좀 해. 동네에 소문낼 일 있어? 근데 부러진 건가? 많이 아프겠네⋯⋯. 아무튼 저기. 내가 치료도 해주고 신분도 바꿔주고 돈도 줄 테니까 부탁 하나만 할게요.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안경이 박 팀장의 손을 뿌리친 뒤 말했다.

  “미, 미친 씨발 니가 왜. 원하는 게 뭔데.”

  “사람 한 명만 죽여줘요.”

  박 팀장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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