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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정원의 겨우살이

2019.05.31 12:3405.31


이 내용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아마 네퓌드거나, 우연찮게 이 기록을 손에 넣은 고대어 연구자거나, 아니면 만사를 태연하게 관망할 수 있는 전지하고 존귀한 분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네 성소 앞마당의 상수리나무, 그 아래에 조용히 묻힌 무식하게 큰 돌덩이를 파내서, 고대에나 쓰던 라소프 말로 새겨진 이 글을 구태여 들여다볼 이유가 나로서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네퓌드라면 (속세에서는 얼치기 마법사들이 우리를 '드루이드'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나는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기에 이렇게 적겠다) 다시 묻어두고 갈 길 가시기 바란다.

 

이렇게 미리 밝히는 이유는 이 기록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그런 은밀한 비밀 따위는 적혀 있지 않다. 그저 나 자신도 네퓌드라서, 이 은밀한 행각에 관한 변명거리를 마련하고 싶다는 것이 알맞은 고백이리라. 우리 네퓌드는 발정난 다람쥐처럼 근원의 지혜와 진리라는 도토리를 추구하며, 으슥하고 그늘진 곳에서 말로만 전수하는 것을 중대한 원칙으로 삼는다.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이것을 남기는 이유는, 글쎄,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다. 숨긴 것을 토해내어 나누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그럭저럭 내 욕구가 설명이 되려나 모르겠다.

 

우리는 정식 네퓌드로 인정받은 후에 특정 주기마다 자연의 모습으로 세계를 관조하는 시기를 갖는다. 이 관조의 시기가 되면 동물이나 식물, 혹은 자연의 일부로 다시 태어나는데, 선택의 권한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보통 바람이 되면 많은 세계를 다닐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여겨지며, 작은 자갈이 되면 매일 차이는 신세가 되기에 성격이 좀 변하기도 한다. 동물이라도 회색늑대 정도 되면 최상위 포식자이자 무리 내의 조직 문화를 상당히 경험할 수 있고, 동시에 야성적 본능에도 눈을 뜨기 때문에 긍정적이다. 때가 되거나 죽음을 맞으면 다시 팔다리와 눈, 코, 입이 있기는 한 존재로 환생하게 된다. 뭔가 하나가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섭리라는 것이 보통 그 모양이지 않은가?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기에 우리는 서로를 구별하는 방법을 두고 있지만, 여기에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기록을 남기는 시점에서 네 번의 주기를 겪었다. 처음은 곰, 두 번째는 독수리, 세 번째는 강물로서 연배가 비슷한 (계속해서 새로 태어나는 우리들에게 연배라는 말은 좀 이상하지만) 동료들이 그럴싸한 시기를 보냈다며 나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 번째 주기 직전에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 말 그대로 최악의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바로 겨우살이다.

 

물론 겨우살이는, 비록 새똥에 의해 옮겨진다는 불쾌한 면이 있지만은 여전히 숲과 자연의 일부로서 의미 있는 존재다. 내가 최악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 겨우살이가 남부 어딘가에 있는 귀족 저택의 정원에 심어진 높다란 상수리나무의, 그것도 하필 삐딱하게 구부러진 가지 밑동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정원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말해서 저 문명인들이 사육장이라고 불리는 장소와 비슷하다. 세상에, 정원수에 기생하게 되다니! 자갈로 태어나도 이리저리 치이면서 굴러다닐 수는 있다. 하지만 야만스러운 남부인들이 그 저급한 문화를 신들에게 증명이라도 하듯 우악스럽게 구겨넣은 이 식물 감옥에서는 관조는 커녕, 내 영혼이 저 가지 생김새처럼 아래 세계를 향해 굽어버리지는 않을까, 끙끙 앓으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열 번의 겨울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겪었던 한여름에 정원사가 바뀌었는데 그즈음부터 시작하는게 좋겠다.


내가 있던 상수리나무는 아주 훤칠한데다 내 앞을 제외하면 잎도 무성해서 조용히 저택의 사건을 관망하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이 파베팡티 가문이란 집안은 예전에는 세도가 당당했던 모양인데, 당시에는 가세가 기울었는지 주인 내외는 언제나 이런 문제를 두고 고민하곤 했다.

 

"여보, 우린 곧 말라죽을 처지에요. 지력이 다 떨어지고 비도 잘 내리지 않는 곳에 뿌리내린, 비극이 예정된 식물같은 처지라고요."

 

"화초 하나 키워본 적이 없는 당신이 말하니 이상하군. 우리 상황에 썩 어울리는 비유기는 하지만. 자자, 걱정마시오. 정원사 노인이 그러던데 세상에는 선인장이라는 것이 있다지? 물을 얌전히 모아두어서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놀라운 식물이라고 하던데, 우리에게도 아직은 약간 남은 물이 있으니 뿌리가 썩기 전에 한 번은 기회가 있을거란 말이야."

 

선인장에 관한 단편적 지식을 보유한 남편은 이어서 두 딸을 부른 다음 세 여자에게 희망에 찬 장광설을 늘어놨는데, 혼인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였다. 사실 남편이 아니었다면 앞선 부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말라죽기는 커녕 물과 음식은 물론이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난잡한 양식의 옷이나, 특정 광물을 골라 쓸모 있는 부분을 다 쳐내고 반짝이는 부분만 남긴 물건 등, 거론하기도 힘든 불필요한 자원들이 주기적으로 척척 마련되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 대부분은 직접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끙끙 앓고 있음이 확실한 외부인들이 실어 오고 있었다. 영지라거나 세금같은 개념과 함께 그들의 낭비에 가까운 생활 습관을 한동안 접한 후에, 나는 성씨가 파베팡티인 이 사람들의 걱정거리는 생존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양반들은 주기적으로 큰 연회나 행사같은 일을 벌였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기에 그랬을 것이다. 주인 내외는 맏아들이 어린 시절 사고를 당해 죽고 그 밑으로 딸만 둘이었는데, 시종이고 부인이고 할 것 없이 일이 벌어지곤 하는 날이면 손님들이 오기 한참 전부터 자신을 꾸미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극적 변신이란 수컷 공작과 다를 바가 없어서 깃털을 펼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딴판이라고 해도 좋다. 기묘하게도 인간을 비롯한 몇몇 종족은 이 점에 있어서 암수가 거꾸로 되어 있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이 부분은 덧붙이지 않겠다.

 

때는 늦여름 저녁으로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계절이었다. 그날 저녁에도 파베팡티 저택은 아주 북적거렸다.

 

"오늘은 너희 외숙부 지인들이 아주 많이 들린 모양이다. 독서회니, 검술 교류회니 하는 사교회 말이다." 입었다 벗어던진 옷가지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커다란 방에 들어선 부인이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두 딸에게 말했다.

 

"공들인 보람이 없으면 아버님이 무척 실망하실게다."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데 말이죠, 어머님."

 

거울을 통해 시선을 마주치며 부인의 말에 대꾸하는 것은 이 집안의 막내인 네블라였다. 네블라는 눈에 띄는 금발 머리, 하얀 피부에 팔다리가 가느다란 젊은 인간 암컷이였다. 물론 나도 아가씨라는 용어는 알고 있긴 하지만, 이게 더 적합할 것 같다. 우리가 나무 밑동을 감쌀 때 쓰는 듯한 기묘한 천으로 허리를 꽉 조였는데, 피부에 난 털을 매일 같이 신경질적으로 뽑아대는 것을 꽤 자주 보았다. 내 입장에서는 비실비실한 늙은 사자처럼 보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그런 비실비실한 늙은 사자를 잘나가는 공작새로 취급하고 있었다. 물론 암수는 다르지만 남자였다고 해도 내 평가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숙부님 일가의 잘난 사교 관계에 대해서는 질릴만큼 들었어요. 그걸 상기시키려고 오신건 아닌 것 같고......"

 

네블라 맞은 편의 언니되는 아가씨가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막내보다 두세 살 정도 나이를 먹은 느낌의 그녀는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에 통통한 체형으로, 곁의 옷걸이에 늘어선 의상들도 동생의 것과는 달리 계절을 증명하는 것 같은 시원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그녀를 곁에서 돕는 시종들의 열기도 네블라의 그것과는 좀 다른 듯이 보였다.

 

위아래로 길쭉하게 뻗은 유리 창문 너머로 내가 자리잡은 가지를 바라보고 있는 그 녹색 눈빛에서, 이 얄팍한 문명인들은 놓치기 쉬운 진득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파블라가 앉아 있는 의자는 어두운 그녀의 시선과는 반대로 모양새가 꽤 우스꽝스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의자의 다리 대신에 둥근 쇠가 돌아가는 장치, 소위 '바퀴'란 것을 달아놓은 의자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 기묘한 의자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고명한 현자 선생이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고안한 물건이라고 한다. 내 입장에서야 아랫도리가 불수가 된 동물은 개체로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대지로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보는데, 아무튼 인간은 이상한 부분에서 감상적이다.

 

"무언가 전해주실 것이 있으시겠죠. 전갈이든, 물건이든." 그렇게 말한 파블라의 옆모습을 흘깃 바라보던 부인이 말을 이었다.
"맞다. 어렵사리 구한 물건이 있지."

 

부인의 말에 맞춰서 곁에 있던 여자가 장식이 박힌 상자를 가져와서 열었다. 그러자 그 속에 있던, 금강석을 줄줄이 달아놓은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상실에 있던 시녀들은 물론 두 아가씨도 잠시 숨을 멈추고 놀라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리 흔한 물건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북부 화산 지대에 가본 적은 없는게 분명했다. 거기서는 화산이 토악질을 하다보면 어쩌다가 저런게 우수수 떨어지기도 하니까.

 

"외국에 사절로 계신 너희 외조부께서 보내온 목걸이다. 만 닢 정도는 줬다고 하더구나."
"세상에, 어쩜 이렇게..." 네블라가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터트렸다.
"두 개 구하려고 했지만, 황제 폐하가 아니고서야 2만 닢을 한 번에 마련하기는 힘드니까 말이다. 알다시피 우리도 그 정도 여유는 없고."

 

흥분한 좌중을 진정시키듯 주변에 시선을 던지며 그렇게 말한 부인은 금발의 아가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블라, 이건 네가..."
"이번에는 제 차례라고 생각하는데요."

 

의자에 앉아 밖을 쳐다보던 파블라가 시선을 돌리면서, 부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내뱉었다. 날카로운 그 말에 잠시 의상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시녀들은 폭풍 전야의 조짐이라도 느꼈는지, 아니면 이런 전개에 익숙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건넛방으로 총총 물러갔다.

 

"하지만 파블라, 네 동생은 근래 몇몇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중이란다. 어쩌면 조만간에 청혼을 할지도 모르지."
"그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게 반년은 된 것 같네요."
"다음에는 꼭 널 위한 것을 마련할거야. 내 약속하마."

 

잠시 실랑이를 벌였지만 부인은 이미 마음을 정했는지 하일릭 산맥 노천광에서 나는 금강석처럼 태도가 견고했고, 파블라의 불만은 이후에 보상하겠다며 형식적으로 달래기만 했다. 부인은 감독해야 할 다른 일도 있었기에 언제나처럼 일방적인 통보로 마무리를 지을 것이 뻔했다.

 

그 동안 목걸이 상자를 들고 있던 네블라는, 부인이 자신을 찾는 남편의 목소리에 방을 나서자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시녀들이 다시 본격적인 치장 준비에 임하기 전에 얼른 네블라에게 다가가 살짝 몸을 굽힌 채 자매된 자의 얇은 종아리를 위로하듯 매만지며 말을 건넸다.

 

"어쩌겠어. 슬프지만..."
"좀 떨어지겠니? 피부가 닿는 느낌이 싫어서."
"꽁꽁 싸매고 있으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하네. 여하간에, 이런건 어울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거야."

 

화려한 금발 머리 처녀는 상쾌하지만 악의가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녀를 불러서 상자 속의 목걸이를 꺼내 자신의 목에 걸어보라 말했다.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기 싫다는 듯이, '바로 나처럼.'을 말하기 전에 파블라가 스스로 바퀴를 굴리면서 거칠게 의상실을 나선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에는, 나무와 광물을 억지로 뒤틀어 짜맞춘 악기라는 물건들이 내는 괴이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왁자지껄한 담소와 열기로 가득찼다. 의자 바퀴를 스스로 돌리며 정원에 나온 파블라는 내가 있는 나무 바로 근처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커다란 회랑을, 길쭉한 유리 외벽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서는 사람들이 춤을 추면서 서로 털을 골라주는 듯한 교류의 기회를 갖고 있었는데, 과연 그걸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무도회는 싫어하시는 모양입니다."

 

깜짝이야......네퓌드에게는 특수한 감각이 있어서 오감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주변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다.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똥이 소박한 기습을 해오거나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뀐다거나, 뭐 그런 것들. 그런데 이 자는 기척도 없이 나무 근처로 누군가 다가온 것이 아닌가. 만약 겨우살이에 발성 기관이 있었다면 저택의 모두가 눈치 챌 정도로 큰 소리를 냈을 것이다.

 

파블라도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모양이지만, 바퀴를 슬쩍 움직여서 돌아보는 것이 나보다는 훨씬 침착한 것이 분명했다. 사실 이 아가씨는 가시철망이 덮힌 을씨년스러운 저택의 높은 담장이나 어두컴컴한 그 벽돌 따위의 풍경에 어울린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제나 가라앉은 느낌이다.

 

"영감, 놀래지마."
"좀 신경쓰이는 잔가지들을 정리하고 있었습지요. 놀라셧다면 부디 용서를......" 남자가 비굴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자기 옷에 붙어 있던 가지와 꽃가루 흔적을 조금 털어냈다.

 

남자는 머리털이 허옇게 센 늙은이로 주머니가 여럿 달린 가죽 조끼에 다소 품이 넉넉한 바지를 입고, 한쪽 손에는 작은 가위를 들고 있었다. 얼굴에 잡힌 주름에 비하면 체격은 제법 좋은 편이었다. 얼굴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잔가지가 보일 것 같지는 않은데. 연회장의 불빛은 여기까지 확실히 닿지도 않고."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것도 보이게 되지요."

 

동물은 모두 어느 정도 적응 능력이 있긴 하지만 인간 노인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아마 파블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 이 노인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간이 사닥다리를 내가 있던 상수리나무에 기대더니,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름날 저녁에 겨우살이를 발견하는건 매의 눈을 갖고 있어도 힘든 일이지만, 어쩐지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시중드는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암흑가 출신이라지."
"그건, 아주 옛날 일이니까요. 마약을 파는 조직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저 늙은 정원사일 뿐입니다." 정원사가 탁한 눈동자로 내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는데, 그 다음에 아가씨가 한 말이 아니었다면 겨우살이로서의 내 짧은 삶도 그때 끝났을지 모른다.

 

"사람 죽여본 적 있어?"

 

돌풍처럼 갑작스레 내던진 그 말에 정원사가 가위를 들고 있던 손을 멈칫하고, 허리를 돌려서 파블라를 내려다보았다.

 

"아가씨야 말로 사람을 놀래키십니다. 그런 질문에는 답을 드리기가 곤란하지 않을런지요? 있다고 하면 듣는 귀가 있거나 말이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 곤란해서 안 될 것이고, 없다고 하면 아랫사람으로서 제 출신에서 비롯된 아가씨의 사소한 의문을 풀어드릴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있다는 소리네."

 

정원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가위를 주머니에 넣더니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쉿, 괜히 문제라도 일어나면 이 늙은이가 곤란하게 됩니다요. 이전에 모시던 부인이 기분 좋게 추천하신 덕에 이 댁에서 겨우 일하게 된 것을 모르시지는 않잖습니까."
"걱정마.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파블라는 의자 바퀴를 움직여서 연회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평소에 뭘 하는지 알고 있어?"
"젊은 처자들이 말하는 것을 얼핏 듣기는 했습니다."
"그렇겠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대로 떠드는게 시녀들의 여가 활동 중의 하나니까. 그 아이들만 비웃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살짝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난 소재를 찾고 있어. 평범하고 지루하지 않은......강렬한 것 말이야."
"이를테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글쎄, 다리를 쓸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라던가."

 

연회장에서 네블라의 것임이 분명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남성들의 환호도 함께. 당시에는 나도 이 지역 풍습에 익숙했기 때문에, 저것이 짝을 찾는 무리들의 준비 운동이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더위를 달래듯이 한차례 불어온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칼이 날렸다. 정원사 노인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지 한참을 대꾸하지 않고 있었는데, 곧 파블라가 한숨을 쉬고 힘겹게 의자 바퀴를 굴리며 돌아섰다.

 

"됐으니까 잊어버려. 소재가 될까 싶어서 물어봤을 뿐이니까. 정리할 나무가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도..."
"아주 많습니다."
"시간 뺏어서 미안하게 됐군."
"아니, 방법 말입니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살생의 방법이. 하지만 강렬한 것을 원하신다니 독살이니 분살이니, 역살 같은 것은 성에 차지 않으실테죠."
"성에 차는 방법이란건 뭘까?"

 

정원사는 둥그렇고 챙이 있는 모자를 벗어서 가슴팍에 얌전히 모은 후에 몇 걸음을 옮겼다. 파블라의 정면에 선 그의 표정에 내게도 살짝 보였는데,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눈먼 암살자」라는 약물이 있지요."
"마약이라면 잘못 정한 이름 아닐까. 팔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바닥 사람들의 감성이 좀 다르긴 하지만......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압니다. 예전에 눈이 먼 암살자가 있었는데 그 자가 자주 사용해서 유래한 것입죠."
"눈이 멀었는데 암살자를 할 수 있어?"
"잠깐 동안 눈을 뜰 수 있었다고 하지요, 그 약물을 통해서. 정신적으로도 위안이 된다는게 본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겠지." 바퀴 의자에 앉은 채 파블라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사실입니다. 그 눈먼 양반은 제가 만난 적이 있으니까요."
"죽었다니 유감이네. 이야기라도 들어보려고 했는데."
"약물을 구해다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 말에 의자 바퀴를 쥔 파블라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중독자가 될 생각은 없어."
"직접 체험 해 보시는 것도 글을 쓰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 약간이라면 큰 부작용도 없고 말입니다. 어쩌면......" 정원사가 쭈뼛대며 파블라의 의자를 슬쩍 가리켰다.

 

"바퀴 의자."
"예. 그 바퀴 의자에서 잠시라도 일어나실 수 있을지도 모르고."

 

달빛이 구름에 가리는 통에, 그 말을 들은 파블라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곧 연회장에서 들려오던 요란한 잡음이 멈추었는데, 이어서 서너 명 정도의 남자들이 슬며시 땀을 닦으면서 야외로 걸어 나오는 것만 보였다.

 

"네가 젊을 때는 이런 곳에서 물건을 어떻게 전달했어?"
"전달이라면......아아, 책을 쓰거나 했습니다. 속을 잘라내서 말이죠."
"식물 도감이 좋겠어. 정원사에게 부탁할 만한 책이고 말이지."

 

대화가 끝났는지, 파블라는 여전히 모자를 가슴에 모은 채로 몸을 숙이는 정원사를 뒤로하고 남자들이 걸어나온 연회장을 향해 힘차게 의자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뒤의 일은 모르겠으나, 파블라가 공작들의 짝짓기 대회에 참가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연회가 있은 후 몇 주가 지나, 어느 가을날 저녁에 파베팡티 내외가 조용히 잎을 달인 물을 마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직접 무언가를 하는 법이 잘 없기에 대신 달이는 사람이 언제나 대기하고 있다. 솔직히 이 저택의 가족을 보살피는 자들은 무슨 보상을 받는건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래도 큰 아이를 다시 수도원에 보내야 할 것 같아요." 부인이 수심에 찬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경문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당신도 그곳이 어떤 곳인지 가봤으니 알지 않소." 남편이 목 주변에 아주 답답하게 매듭지어진 천을 살짝 당겨서 풀어헤치고 말을 이었다.

 

"거긴 감옥이야. 약간 느슨하고 경건한 감옥말이지." 그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잔에 담긴 것을 후루룩 들이켰다.

 

"하지만 저 아이의 불안한 기질이 날로 심해지는게 불안해서 견디기 힘들어요. 조금 실수한 몸종들에게 사납게 굴지 않나, 이제는 식물 도감 같은 두꺼운 책을 문 앞에 쌓아두어서 청소도 못하고 있지요. 근래에는 창문에도 늘상 휘장을 치고 있는데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특히 파블라하고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다투고 있으니."

 

"그 허무맹랑한 글 따위를 다시 쓰는거겠지. 심지어 당신이 처가에서 받아서 온 영지, 거기 마름하는 젊은이도 지난 번에 와서 묻더군. 큰 아가씨가 거짓된 이야기를 쓰신다던데, 수도원에서 경문 필사를 하시는게 더 온당한 길이 아니냐고."

 

비슷한 복장을 한 처녀 중 하나가 남편의 잔을 다시 채우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제 오라비가 떨어져 죽었던 그 사건이 역시 영향이 있는거야......한동안은 괜찮았는데. 네블라와 사이가 저 모양인건 쉽게 해결이 안 되겠지."
"나도 하는데까지 해봤지만 할 수 없어요. 책망하기엔 둘 다 너무 어렸으니까, 이제와서는." 부인도 남편을 따라 잔을 비웠다. 이곳에도 잎을 달인 물은 조심스럽게 음미한다는 풍습이 있긴 했는데 그날따라 두 사람은 잠시 습관을 잊은 모양이었다.

 

"몇 달 정도만 보내는게 어때요. 길어도 1년. 싸구려같은 글이라면 그곳에서도 쓸 수 있고, 어쩌면 필사쪽에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일이 잘 풀려서 작은 아이가 시집을 가고 당신이 다시 의원이 되면, 우리가 좀 더 신경을 써 줄 여유가 생길테니까."
"생각해보지."
"최대한 빨리 결정하도록 해요."

 

부인의 어조는 제법 단호했다. 그리고 이어서 선언하듯이 한마디를 하고 방을 나섰다.

 

"선인장에 가지란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라 죽은 뒤에는 가지를 쳐낼 수도 없으니까요."

 

내외가 대화를 나누고 며칠 뒤에 늘 이맘때면 찾아오는 돌개바람이 불어왔다. 이 난폭한 손님이 오면 나는 사시나무 떨듯 우리 거목 선생이 쓰러지지는 않을까 근심하며 보냈다. 바람이 어찌나 심한지 한동안은 같은 신세인 정원의 식물들이 살아남기는 할런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약간의 사건이 있었다. 돌개바람이 한창 난장을 치기 시작한지 사흘째에 갑작스럽게 파블라 옆 방의 길쭉한 창문이 한 뼘 정도 열리더니만 내가 있는 가지 근처로 무언가 잽싸게 날아드는게 아닌가. 불행히도 나라는 겨우살이 때문에 양분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던 이웃의 투덜쟁이 가지가 그것에 맞고 잘려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녀석에게 종말을 고한 그 물건은 좀 더 날아가서 정원의 작은 미로에 떨어졌는데, 내가 보았기로는 피 범벅이 된 예리한 단검이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고 있을 때 단검이 날아든 창문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걷혔다. 열린 창문 뒤에는 파블라가 가만히 '서서', 기묘하게도 검게 물든 눈으로 정원 미로쪽을 건너보았는데, 아마도 단검이 날아간 쪽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책상 근처에는 목의 상처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금발의 네블라가 쓰러져 있었다. 그 가느다란 한쪽 손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들을 쥐고 있었는데 죽은 표정이 마치 무언가를 비웃다가 절명한 것 같았다.

 

파블라가 옆으로 시선을 돌려 쓰러진 동생을 바라보았다. 거센 비바람 덕분에 날린 잎이 나를 향해 날아들어서,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모른다. 건방진 이파리가 날아간 다음에 보니 파블라가 쓰러진 아가씨의 목에 걸려 있던 예의 반짝이는 목걸이를 거칠게 잡아당겨 품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자 책상 위의 종이 뭉치들이 방 안에 흩날리는 동시에, 방에 들어차 있던 수상한 연기가 뻐끔 새어나와 곧장 바람에 몸을 실었다. 날씨가 그 모양이라 정확히 표현 할 수는 없지만 불길하고 음습한 기운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파블라는 서너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자신의 바퀴 의자로 걸어갔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양쪽에서 지팡이를 대신 짚어주는 것 마냥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의자를 걷어차고 바닥에 스스로 엎어진 그녀가, 폭풍을 잠재울 기세로 날카롭게 내뱉은 그 거짓된 비명만큼은 아주 기가 막힐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결국 이렇게 떠나게 되셧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어느 쪽 말이지?"

 

파블라가 정원사의 말을 질문으로 받았다. 파베팡티 집안에 남은 유일한 자식인 이 젊은 아가씨는 평소보다 훨씬 더 검은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검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죽음과 그 이후를 상징하는 색깔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지역에서도 이것만은 한결같다.

 

"두 분 모두."
"그래도 명계로 떠나는 것 보다야 수도원이 더 낫지 않아?"
"그럴지도요."

 

저택 마당에는 나무를 억지로 뒤틀어서 짠 관에 네블라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차례대로 줄을 서서 조신한 꽃을 한 송이씩 놓고 갔는데 망자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은 나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지난 폭풍의 밤 다음날에 사건을 조사한다며 뻣뻣한 표정으로 방문했던 남성 집단을 향했다.

 

"살인범의 행방은 묘연하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들었어."
"무척 난감한 사건이라고 조사관 나리들도 한숨을 쉬시더군요. 공범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네블라가 죽은 다음 날, 두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남자들이 저택을 방문했었다. 그들은 작년부터 귀족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 사건을 쫓고 있었는데, 단서를 잡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복면을 한 이 살인범은 「투명한 여왕」이라고 불리는 예의 보석을 노리고 있었고, 창문으로 들어와 네블라를 살해하고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를 목격한 파블라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급히 도주......이것이 그들이 밝혀낸 것의 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파블라가 녀석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지만, 쏘아보는 듯한 눈빛이 폭풍이 치던 그 날 밤과 같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가시철망같은 눈빛.

 

정원사가 시선을 마주하면서 그런 파블라를 안심시키듯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늙은 몸으로 온갖 고초를 겪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을거야."
"하기야 그렇겠군요."

 

파블라는 손님들이 파베팡티 내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정말 쉽게 죽는단 말이야. 사람이란건......수도원에 가면 나도 그렇게 되겠지. 그러니까 육체말고 정신이 말이야.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에는 말라 죽을거야."
"신의 일꾼들이 쓰는 방법이 아가씨께는 맞지 않나 봅니다. 듣자하니 그 수도원은 치유의 기적으로 유명하던데요. 젊은이들도 자주 오간다고 하고."
"제법 떨어진 곳인데도 신의 축복을 바라면서 들리지. 기도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다들 잘 꾸미고서 말이야."

 

몇몇 손님들이 그 다음으로 파블라에게 다가와 짤막한 유감의 인사를 건네고 갔다. 계절을 느끼게 하는 낮은 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수국이 물결처럼 흩날리는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세계는 나무라고 하더군요." 갑작스럽고 엉뚱한 소리에 파블라가 다시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정원사의 시선이 파블라가 아니라 어딘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작은 아씨께서 향하는 망자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던데, 맨 위의 가지에는 형언하기 힘든 존재들이 기거하는 정원도 그려져 있었죠."

 

처음에는 어딘가에서 접한 것을 설명하는 듯하던 정원사의 어조가 점점, 단정적으로 바뀌어 갔다.

 

"나무인 이상 이를 유지하는 양분이 있을테지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곳에서는 영혼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면 그 육신을 떠난 혼은 저승으로 내려가 일생을 차례로 심판 받고 줄기를 타고 올라가, 거기에 걸맞는 열매를 맺게 되지요."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어서 말을 맺었다.

 

"그 열매를 먹는 자. 그것을 신이라고 합니다."
"정원사가 아니라 마법사였는지 이제야 알았네."
"주워들었을 뿐입니다. 드루이드들이 그렇게 주장한다지요. 물론 그들은 신이 아니라 섭리, 질서, 율법......그 밖에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곤 합니다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 즉 존재라는 것이 거대한 나무의 거름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사실이라면," 여전히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은 그 누군가들을 살찌우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키워지는 셈입니다."
"그건......" 파블라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했다.
"사육장이잖아."
"네. 무언가를 죽인다는 행위가 예정된 감옥이지요."

 

아까부터 불던 산들바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정원사는 조용히 몸을 굽혀서 발치에 피어 있던 수국 한 송이를 꺽어서 손에 들었다. 수국은 본래 토양에 따라서 그 색이 천태만염인데, 이 저택에 핀 수국은 검은 빛깔이었다.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검은 수국을 본 적이 없다.

 

"주신 글은 전부 읽어 보았습니다. 저야 꾸며낸 이야기에 대해 안목 있는 편은 아니지만, 열정을 느낄 수는 있더군요."
"이상하게 아주 잘 써지던걸.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그렇다면 네블라님의 죽음이 아가씨의 빈 부분을 잠깐이나마 메워버린 겁니다. 거룩하고 성스러우며 공고한 이름을 위한 열매를 먹은 것 마냥......죽음에서 맺히는 열매로만 스스로를 채울 수 밖에 없는 인간도 있으니까요."

 

정원사는 파블라가 대답하기 전에 그녀에게로 돌아서서 몸을 살짝 굽히고, 들고 있던 검은 수국 하나를 무릎께의 치맛단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끼의 작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서 아가씨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눈먼 암살자」는 검은 수국을 갈아서 혼합한 분말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조법입니다."
"선물인걸까."
"네. 수도원의 정원은 이곳보다 좀 더 실용적인 구조겠지만, 수국을 키울 정도는 될 겁니다. 그것을 겨우살이가 있는 나무, 그 그림자가 정오에 드리우는 곳에 심으셨다가 여기 적힌대로 차로 달여서 드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리라 믿습니다."
"고맙지만......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지 물어봐도 될까?"
"이상하게 다들 그런걸 묻더군요. 원래라면 딱히 말씀드리지 않지만......앞으로 뵙기 힘들테니 말씀드려도 좋겠죠. 제가 드린 도감을 약간은 읽어 보셧지요? 거기에 보면 겨우살이는 나무의 수액을 훔쳐내니 얼른 잘라내는 것이 좋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를 망칠 수도 있다면서."

 

그리고는 정원사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냉담하면서도 잔혹한 시선에 온 가지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겨우살이로서의 마지막 감각이었다.

 

"하지만 저는 어쩐지 겨우살이가 피우는 꽃이 보고 싶어서 말이죠. 몇몇 가지가 말라 죽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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