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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얼음뿔

2019.05.11 00:3705.11

#1 해는 떨어졌는데 이미 허벅지에 이르도록 눈이 쌓였다. 옥련은 얼어죽기 전에 사람 사는 집을 찾아 살았다고 생각한다. 오두막 문을 두드렸는데 한참 조용하더니, 다시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어올리자 슬쩍 열린다. 수척한 얼굴이 반만 나와서 밖을 노려본다.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군. 어쩌다 왔소?]

억양은 낯설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다.

[고드름 광산에 일하러 가는 중에 눈보라가 심해서 일행과 떨어졌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말을 아는군. 숲 한가운데잖소. 길에선 한참 먼데.]

[보시다시피 지금 길을 찾을 수가 없잖아요.]

[얼굴 보면 사막 사람인데 예까지 와서 뭘 하는 거요.]

[광산에 새로 고용됐으니까요. 얼어죽을 사람 좀 살려주시겠어요?]

주인은 옥련을 흘겨보다가 문을 마저 열어준다. 오두막 안은 어수선하다. 한쪽 구석엔 그물과 통발이 제멋대로 쌓여 있고, 통나무를 짜맞춘 벽에는 손도끼며 낫 따위가 걸려 있다. 바닥은 흙땅을 다져서 가죽 깔개를 얹었을 뿐이다. 문을 여는 바람에 기름등이 꺼져서 주인이 다시 불을 붙일 때까지 정적이 감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북쪽이 추운 거야 당연하대도 겨울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요.]

[나도 몰랐소. 원래 아직 모기가 나올 계절인데, 난데없이 눈이 내리니. 겨울 나기는 글렀지. 뭐라도 먹겠소?]

[괜찮습니다. 짐까지 잃어버리진 않아서요. 하룻밤만 묵게 해주시면 사례할게요.]

[눈이 그칠 때까지는 있어야지. 사례는 됐고, 남쪽 소식이나 들려주시오.]

옥련은 등짐과 활을 벽에 기대어놓고는 자신이 살던 초원에 대해 얘기한다. 그다지 얘기할 게 없노라고.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어느 날 북쪽에 광산을 소유한 사막의 대상이 찾아와 인부를 모집했다. 지루한 야쿳 초원을 떠나 광산에서 돈이나 만져볼까 하는 생각에 북쪽에 왔다는 것이다.

[남쪽은 여전히 별볼일 없는 모양이군.]

[눈보라 치는 숲에서 길을 잃어보니 그 편이 나은 것 같기도 하네요.]

[그야 그렇지. 여기선 사람이 죽어나니까. 나도 아예 떠날까 생각 중이오.]

[그보다 말이에요. 여기 오기 전에 설인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그게 사실인가요?]

주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설인? 그게 무슨 소리요?]

[북쪽 광산에 간다 하니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설인이 나와서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별 소리를 다 듣는구만. 설인 같은 게 없어도 이미 많이들 죽고 있지. 도적떼다 뭐다 해서.]

[도적이 나오나요?]

[모르고 왔소? 속았구만. 날씨나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섭지.]

[그러면 도적들이 광산에도 쳐들어오고 그러나요?]

[산 위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요. 멋모르고 다니다간 화살 맞아 죽소. 광산에는 용병들이 들어왔다지.]

[용병이요? 못 들은 얘기 투성이네요. 혹시 그럼 설인이 나온다는 소문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설인이란 건 처음 듣는다지 않소.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여기 살았는데 설인은 들은 적이 없소. 흰털늘보라면 몰라도.]

[흰털늘보라는 것도 처음 듣네요. 이 땅에 사는 맹수인가요.]

[그것도 옛날 이야기요. 실제로 본 사람은 없지. 키가 소나무만하고 눈은 퍼렇게 빛나는데,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밤에 나와서 사냥을 한다는 괴물이오. 뭐, 눈보라 칠 때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라 생각은 하지만.]

[무서운 옛날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죠. 초원에도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괴물이 있었는데.]

오두막 문을 쿵쿵 두들기는 소리 때문에 옥련의 말이 끊긴다. 주인과 옥련은 시선을 교환한다.

[손님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올 줄은 몰랐소.]

[제 일행들일지도 몰라요. 실례지만 도움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나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대와는 다르다.

[문 열어.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주인처럼 억양이 심한 야쿳 남자 목소리다. 주인은 표정이 싹 굳더니 옥련을 돌아보며 말한다.

[저기 구석에 잘 숨어있으시오. 절대 들키지 말고.]

옥련은 주인이 시킨 대로 통발과 그물 더미 뒤에 웅크린다. 문 밖에선 보이지 않을 터이나 이쪽에선 그물 사이로 조금이나마 시야가 확보된다. 주인은 손도끼를 들며 한숨을 내쉬더니 문을 연다. 문 밖에서 그림자 둘이 보인다.

[무슨 일로 오셨나.]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말이야. 들어가서 얘기해도 될까?]

[싫은데.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쇼.]

그들은 주인이 손도끼를 들어 흔드는데도 아랑곳 않고 오두막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덩치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장정 둘이다. 외투에 눈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냥 새하얀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다. 외투 두건에는 푸른색 뿔장식이 달려 있다. 등에는 활을 매고 키보다 한 뼘 정도 긴 창.

[우리도 바쁘니까 용건만 말하지. 혹시 요 근래 이방인을 본 적 있나? 남쪽에서 올라온 이방인.]

옥련은 숨을 죽인다. 자신이나 일행을 말하는 것일까.

[무슨 이방인? 누가 미쳤다고 이 땅에 오나?]

[그래도 우리 고향인데 그리 말하면 섭하지. 남쪽에서 온 사기꾼 놈들이 용병까지 불러들여서 농성을 하고 있잖아. 지주님들이 화가 많이 나셨어. 근데 최근에도 또 몇 놈이 기어들어왔거든. 마침 오늘 한 놈을 붙잡아서 심문했지.]

옥련은 누가 붙잡혔을지 생각한다.

[그래서 혹시 여길 찾아오지 않았을까 궁금해서 와 본 거야. 당신은 늘 이방인에게 친절했잖아.]

[찾아오는 이방인이 있어야 말이지. 사람 그림자도 못 봤으니 가쇼.]

하얀 털가죽 외투를 걸친 남자가 창을 들어 오두막 구석에 있는 옥련의 물건을 건드린다.

[이건 누구 짐이지? 이사라도 갈 생각인가?]

옥련이 미처 가지고 숨지 못한 등짐이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봐도 별다른 수가 생각이 안 난다.

[가야지. 겨울이 이렇게 빨리 왔으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남자는 피식 웃는다.

[이 겨울은 축복이야. 적에겐 죽음이며 우리에겐 가호지.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당신도 참전해. 이 땅에 오래 살지 않았나. 비겁하게 도망칠 생각 말고.]

[돌았군. 내 친구들은 다 너희 때문에 떠났어. 그런데 날더러 너희와 함께 싸우라고? 지주놈들을 위해?]

[놈들도 결국은 이 땅에 기어든 이방인이었지. 치울 수고를 덜어줘서 다행이야. 하지만 당신은 달라.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지 않나. 함께 싸우면 숙소와 식량도 제공해주지. 사기꾼 놈들을 몰아내고 나면 당신 몫도 챙길 수 있고.]

[나가.]

남자는 창을 고쳐든다.

[배신자로군. 이방인은 숨겨주면서 우리와 함께 싸우기는 거부하다니.]

주인은 자신을 찌르려던 창대를 붙잡고 힘을 겨룬다. 그 사이 옥련은 벽에 걸린 낫을 집어들고 다른 한 명에게 달려든다. 누군가 등불을 쳐서 쓰러뜨리자 기름이 쏟아져 불이 번진다. 주인과 대치 중이던 남자는 털가죽 외투에 불이 붙은 걸 알고는 놀란다. 주인은 그 틈을 놓지지 않고 남자의 이마에 도끼를 박아넣는다.

옥련과 상대는 몸싸움을 벌이며 바닥을 나뒹군다. 옥련이 불리한 자세로 제압당해 심장에 칼이 박히게 된 순간, 적의 목덜미에 창이 꽂힌다. 주인은 시체를 치우고 옥련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세운다. 불은 이미 오두막 지붕까지 옮겨붙었다.

[고, 고마워요.]

[일단 밖으로.]

옥련이 먼저 짐을 들고 밖으로 나온 후 주인도 물건과 옷가지를 챙겨 탈출한다. 눈은 더 거세게 퍼붓고 있다. 오두막에 밖에 쌓아둔 장작 더미에까지 불이 번진다. 옥련은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사죄해야 할지 고민한다. 주인은 외투를 껴입고 눈신발을 덧신으며 말한다.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소.]

[어디로요?]

[남쪽으로 가야지. 어쩌면 옛 친구를 찾을 수도 있을 테고. 댁도 같이 갈 텐가?]

[여기서 할 일이 있어요.]

[뭐, 그러면 알아서 하쇼. 죽지나 말고. 이거 신으쇼.]

주인은 짐에서 눈신발 한 짝을 꺼내 던져준다. 옥련은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한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여서 답례하고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간다. 옥련도 불타는 오두막에서 멀어진다.

 

#2 날이 밝아오자 일단은 눈보라가 멎었으나 숲에는 허리께까지 눈이 쌓여 걷기 힘들다. 북쪽을 향해 간다고는 하지만 숲이 언제 끝날지조차 알 수 없다. 새 한마리 울지 않아 고요한데, 어디서 나뭇가지 부대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난 방향에서 뭔가 움직인다. 나무 위쪽 가지에 닿아 흔들리는 걸 보니 필시 몸집이 크다. 여차하면 눈 속에라도 숨을 생각을 하는데, 지켜보니 딱히 옥련을 쫓아오는 건 아닌 듯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푸르고 투명한 뿔 한 쌍이 보인다. 외투에 달린 뿔장식이 아니라, 얼음 같은 뿔이 달린 진짜 순록이다. 털색은 새하얗고 얼룩 하나 없는데, 눈은 비취색 구슬과 같다. 다리 길이만 해도 옥련의 키를 넘기는 짐승은 쌓인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걷는다.

옥련은 혹시라도 순록을 자극할까 걱정하여 미동도 않는다. 저 정도 크기면 다 자란 것이겠지. 새끼를 데리고 있지는 않아서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얼음뿔 순록은 옥련이 보일 정도로 접근해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느긋하게 활보하며 낙엽이 질 새도 없이 가지에 붙은 채 얼어버린 자작잎을 뜯어먹는다.

식사 중인 얼음뿔 순록의 목덜미에 굵은 화살이 날아와 꽂힌다. 순록은 놀라서 겅중대더니 숲 저쪽으로 달려간다. 화살은 등뒤에서 날아왔고, 옥련은 인기척이 가까워짐을 느낀다. 돌아봤더니 하얀 외투를 입은 북방인이 스키를 타고 눈 위를 미끄러져 온다. 크고 무거워보이는 활을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사막 사람이 이 땅엔 무슨 일로?]

역시나 억양은 낯설어도 분명 야쿳 말이다. 이미 하얀 외투를 입은 자들에게 공격받은 바 있기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한다.

[길을 잃었어요. 광산으로 가는 중이었죠.]

[우리 말을 하네? 하는 정도가 아니라 초원 사람처럼 말하잖아.]

딱히 적의를 내보이지는 않지만.

[초원에서 오래 살았어요. 광산에 고용되어 왔는데, 북쪽은 겨울이 엄청 빠르네요.]

[아하. 원래 이렇지는 않아. 올해 겨울은 좀 이상하긴 하지.]

[이상하다고요?]

옥련이 반문하자 북방인은 시선을 돌린다.

[날씨만 문제가 아니니 조심해. 위험한 인간들이 다니거든.]

옥련은 자신을 공격한 남자들에 대해선 말하지 않기로 한다.

[사냥 중이었나보죠? 나도 초원에선 사냥꾼 노릇을 했어요.]

[사냥꾼 치고는 가냘픈 거 아냐? 하여튼 난 저걸 쫓아야 하니까 실례할게. 광산 근처는 특히 더 위험하니 조심하고.]

북방인은 그러더니 스키를 타고 미끄러지며 가버린다. 외지인인 옥련을 위험하게 여기거나 옥련에게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다. 하얀 외투를 입었어도 다 같은 족속은 아닌 걸까. 그들의 외투에 달려 있던 뿔장식은 분명 순록 머리에 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방금 만난 북방인은 순록을 사냥한다. 사냥꾼이 직접 옥련을 해치려 들진 않았더라도 이들이 관계가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북방인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옥련은 움직인다. 계속 북으로 향한다. 대지의 경사가 조금씩 느껴진다. 광산은 땅끝 고원 깊숙이 위치했다고 들었다. 눈이 안 내려서 길을 따라갈 수 있었다면 훨씬 편하기야 했겠지만 멀기는 매한가지.

얼어붙은 숲이 끝나자 드넓은 산자락이 펼쳐진다.

 

#3 외지인은 들어오지도 못할 험한 산중. 목책을 둘러세운 야영지 주위로 횃불과 창을 든 전사들이 순찰을 돈다. 순탈대는 썰매에 사냥감을 실어 끌고 오는 체이에게 손인사를 건넨다. 썰매를 끄느라 팔을 못 쓰는 체이는 고개만 까닥여보인다. 순찰 구역을 통과해 대문에 다가가자 문을 지키던 전사들이 체이를 알아본다.

[어마어마한 놈을 잡았구만.]

[잔치해도 되겠어.]

체이는 입을 비죽 내민다.

[고기가 다 누구 뱃속으로 들어가는지 알면서 그래.]

쓴웃음 짓는 전사들. 목책 내부는 부산스럽다. 공터에선 크고 작은 대열로 전투 훈련이 벌어지고, 개들이 천막 사이를 돌아다닌다. 야영지의 안쪽은 절벽에 면했는데, 절벽 속 동굴은 그대로도 훌륭한 냉동 창고가 된다.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으니 고기를 오래 보관하려고 소금에 안 절여도 문제없다.

절벽 속 동굴엔 또한 주술사와 지주들이 산다. 체이의 동족을 구슬려 이 혼란을 부추긴 자들이다. 동굴 앞엔 지주의 호위병이 늘 경비를 선다. 털가죽 외투가 아니라 초원에서 입는 양식의 격자무늬 망토를 두르고 굽은 검을 찼다. 체이와 체이가 잡아온 사냥감을 확인한 호위는 거만하게 고갯짓을 해보인다.

순록 뿔과 고기를 처리한 후 체이는 야영지를 뒤진다. 체이의 반토막만한 아이들조차 모여서 무기를 쥐고 어른이 가르치는 동작을 따라 나무기둥을 찌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다.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돌리는데 허연 수염이 덥수룩한 늙은 전사가 체이를 불러세운다.

[간만에 왔군.]

[하누는 어딨어?]

[훈련 중이겠지. 젊은이가 당연히 그래야 하듯.]

늙은 전사의 짙은 눈썹 밑으로는 눈빛이 곱지 않다.

[또 시작이야. 백날 해 봐. 난 싸움엔 절대 안 끼어.]

[도망쳐도 전쟁은 언젠가 널 찾아올 거다. 우리가 살기 위한 싸움인데 왜 거부하는 게냐.]

[저 돼지같은 놈들이 오기 전엔 아무도 서로 죽이지 않았어. 어린애들한테 창 쓰는 법을 가르치는 건 누구 생각이야? 그게 살기 위한 싸움이야?]

[잃은 땅을 되찾으려면 애들이라도 힘을 보태야지. 너도 마찬가지고.]

[순록 한 마리를 통째로 가져왔으니까 된 거 아냐. 하누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

[네가 짐승이나 잡아다 바치며 싸움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주술사들이 사냥하러 다닐 만큼 한가하지 않은 덕인 줄 알아라. 네 어린 남편은 아주 말귀를 잘 알아먹더만.]

체이는 땅에 침을 탁 뱉고 돌아선다. 처음부터 들을 필요 없는 말에 시간만 낭비했다. 사냥감을 가져오면 주술사들은 하누가 체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준다. 가족 중 전사가 있는 사람은 다 그렇게 생활한다. 집도 없이 천막에 살며 전쟁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면 함께 있을 수 있다.

야영지 밖에도 사람은 살지만, 산사람들이 겨울 대비를 채 마치기도 전에 주술사가 눈보라를 불러왔다. 할멈들이 정령의 보복을 받는다고 경고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체이는 어린 전사들이 맨몸으로 육탄전 훈련을 벌이는 진창에서 하누를 찾는다.

[하누!]

검은 진흙으로 범벅된 소년이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선다. 누가 자길 불렀나 보더니 얼굴에서 흙을 닦아내고는 달려온다.

[체이!]

[옷 입어. 머리 좀 식히자.]

 

#4 눈 쌓인 골짜기 양쪽으로는 가파른 바위절벽. 옥련은 지붕이 무너진 집을 지나친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꽤 된 듯하다. 한때 마을이었던 듯 계곡 안쪽에는 폐가가 더 있다. 돌을 쌓고 진흙을 발라 벽을 올렸는데, 지붕이 멀쩡한 집은 하나도 없다. 썩었거나 눈의 무게 때문에 내려앉았으리라.

사람들이 집을 버린 이유는 뭘까. 옥련을 도와준 집주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산 위는 전쟁터라고. 아마도 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떠났거나, 혹은 죽어서 눈 속에 묻힌 신세. 옥련 자신도 이대로는 머지않아 동사체가 되게 생겼다.

헤어진 일행 중엔 광산 가는 길을 아는 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잡혔거나 도망갔을 터.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찾아가면 광산에 닿는다 했던 말을 단서로 삼았지만 택도 없었다. 결론은 산을 몰라서 막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옥련 혼자서는 산중에서 나아갈 방향조차 찾을 수 없다.

그래도 마을을 지나쳤으니 사람이 다니던 길 위라는 뜻이다. 허나 계곡의 끝이 어디로 열리는지는 도달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흰 토끼 한 마리가 굴에서 기어나왔다가 사람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숨는다. 등짐에서 딱딱하게 언 건육 조각을 꺼내 입 안 넣고 녹인다. 음식을 씹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이가 상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하는 생각은 몇 번이고 들었으나, 어디로 가겠는가? 초원에선 마땅한 일이 없고, 지금 고용주는 옥련에게서 소식이 없다면 다른 사냥꾼을 고용할 뿐이다. 옥련 자신이 결과를 들고 가야 했다. 그래야 그 다음도 있는 법.

설인의 정체를 밝히러 왔는데, 정작 현지 사람은 설인이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고용주는 북쪽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도 안 해줬다. 진작에 속았음을 깨닫고 손을 뗐어야 하건만. 하지만 그 자에게 밉보이면 미래가 없다. 특히나 사막 출신에게는 더 그렇다.

 

#5 야영지 근방의 절벽지대엔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는 굴과 틈새가 많다. 체이는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니다 발견했던 바위굴로 하누를 데려온다. 전쟁이 시작된 후로는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때 찾는 장소다. 산 중턱에 움푹 패여 있어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비바람도 피할 수 있다.

체이는 모닥불을 피운 후 야영지에서부터 품 속에 챙겨온 꾸러미를 꺼낸다. 삼베로 감싼 순록 뒷다리살이다. 젊은 부부는 시선을 교환한 후 킬킬 웃는다. 욕심 사나운 지주 놈들이 고기를 독차지하더라도, 사냥꾼의 몫마저 빼앗지는 못하는 법.

불 위에 올려둔 돌판이 달아오르자 체이는 고기를 익히기 시작한다. 은신처 구석에 미리 숨겨두었던 술과 향초를 꺼내 곁들이니 근사한 만찬이 된다. 체이가 단검을 꺼내 고기를 썰어주자 하누는 허겁지겁 집어먹는다. 전사들이 평소 먹는 거라고 해봐야 토끼 반 마리와 풀 한 줌을 넣고 끓인 국물에 쿠미스가 고작이니까. 먹고 마신 뒤엔 느긋하게 쉬면 그만이다. 야영지에선 휴식도 사치라 숨이 막힐 지경이다.

[누나는 왜 안 싸워?]

하누가 그 질문을 던지는 일이 잦아졌다.

[너도 싸우지 않아도 돼.]

[나라도 싸워야 해. 대장님은 동족이 어려울 때 나서지 않으면 비겁자라고 했어.]

[동족을 이용해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놈들이야말로 비겁자야.]

[무슨 뜻이야?]

체이의 한숨. 먹고살 방법이 마땅찮았어도 그들에게 하누를 맡겨서는 안 됐다. 쿠미스를 마신 하누는 늘 그렇듯 표정이 풀어진다.

[다른 전사들이 누나를 흉봐.]

이미 아는 바이다.

[내가 목책 안에 갇혀있지 않아서 그래. 자기들도 집이 그리워서.]

[밖은 위험하잖아. 나는 체이가 걱정돼. 거기 같이 있으면 안돼?]

[걱정은 내가 걱정이지. 그놈들이 너한테 쓸데없는 소릴 자꾸 하잖아.]

[그냥 사람들이 싫은 거 아냐? 날 찾기도 덜 찾아오는 것 같고.]

[사냥감이 귀하니까. 사냥감이 귀한 이유는 이른 겨울 때문이고, 겨울이 이른 건 누구 탓이지?]

[대장님은 주술사들이 축복을 내려서 겨울을 불러왔다고 했어. 우릴 숨겨주고 적을 떨게 하는 눈보라를 치게 만들 거라고.]

[주술사들이 하는 말을 다 믿지는 마.]

체이는 얼음뿔 순록의 뿔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지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할멈들이 옳다. 정령을 속이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게다가 전쟁을 위해 불러온 겨울이 상관없는 산사람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지 않았는가. 체이는 하누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털가죽 망토 위에 몸을 뉘인다.

[아주머니 아저씨가 보고 싶지는 않아?]

[엄마랑 아빠? 보고야 싶지. 그런데 돌아오지 않잖아.]

[그분들이 오지 않으면 우리가 남쪽으로 찾으러 갈 수도 있지.]

하누는 체이의 품 속에서 머리를 들어 올려다본다.

[떠나자는 말이야?]

체이는 대답하지 않지만 하누는 떨쳐일어난다.

[안 가. 대장님과 형님들을 배신하는 거야. 비겁자라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결국 한숨만 토해내는 체이. 하누 또한 복잡한 감정이 드는지 표정이 계속 바뀐다. 그러다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 뭔가를 봤는지 벌떡 일어선다.

[저거 사람 아냐?]

하누의 말에 체이는 몸을 일으켜 눈밭을 내다본다. 작은 점 정도로 보이지만 확실히 사람이 고원을 건너고 있다.

 

#6 바위 언덕을 오르던 옥련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괴한에게 습격당해 나동그라진다. 역시나 흰 털가죽 외투에 푸른 뿔장식 두건을 뒤집어쓴 북방의 전사다. 단검을 뽑아 저항하려 했지만 상대는 이미 옥련의 목에 창을 겨누고 있다.

[그만! 죽이지 마!]

또 다른 북방인이 다급하게 외치며 바위를 타넘는다. 털가죽 외투를 입었는데 뿔장식은 없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싶어 얼굴을 봤더니, 산 아래 숲에서 마주쳤던 사냥꾼이다.

[당신은.]

[엇?]

창을 겨눈 전사는 옥련과 동료를 번갈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이다.

[왜 그래?]

북방인 사냥꾼은 전사의 팔을 붙잡아 무기를 거두게 한다.

[뭐하는 거야? 이방인이라고.]

[널 공격하진 않았잖아.]

[우리 땅에 들어온 이상 적이지. 붙잡아서 데려가야 해.]

[기다려 봐, 좀.]

옥련은 창날이 완전히 거두어진 후에야 자세를 추스른다.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언니 아직 안 죽었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아는 것까진 아니고, 마주친 적 있어.]

[그럼 적을 보고도 그냥 보내줬다는 뜻이잖아.]

[난 전사가 아니야. 내가 전사였더라도 아무나 죽이지는 않아.]

[나는 전사야. 죽이진 않더라도 그냥 보낼 수는 없어.]

[그럴 필요 없다니까. 적어도 나랑 있을 때만큼은 정신 좀 차려.]

전사는 표정을 구기며 동료를 쏘아본다. 사냥꾼은 옥련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세운다.

[광산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이 앞으로는 길이 없는데.]

전사가 끼어든다.

[광산 쪽 인간이면 진짜 보내줄 수 없잖아.]

북방인 사냥꾼은 동료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보인다.

[보면 알겠지만 산 위는 정말로 위험해. 다른 전사를 만나면 그 때는 살지 못할 거야.]

[도움만 받는 것 같네요.]

뒤에서 어린 전사가 발을 구른다.

[그냥 풀어주려는 거야? 안 돼. 적이라고..]

사냥꾼은 금방이라도 도로 달려들 기세인 동료를 한번 쳐다보고는 옥련에게 말한다.

[어쩔 수 없지. 활을 내놔. 식량도.]

[그렇게라도 해야 면이 선다는 건가요. 뭐, 좋아요.]

옥련이 자신의 활과 화살통, 등짐을 풀어 건네주는데 북방인 사냥꾼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인다.

[북쪽 길로는 광산에 못 닿아. 동쪽으로 가면 계곡에 유적이 있어. 돌탑을 찾아. 유적을 지나 얼음굴을 통과하면 광산이야. 그리고 얼음굴에선 절대 큰 소리를 내지 마.]

옥련은 딱히 대답을 하지는 않는다. 사냥꾼은 옥련의 물건을 회수하고는 가죽 자루를 하나 던져준다.

[자, 이제 떠나. 이걸로 됐지? 식량도 무기도 없이는 곧 죽을 거야.]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어린 전사. 옥련은 눈신발을 고쳐신고는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 소리친다.

[화살통에 새 울음소리를 내는 화살이 있어요. 나는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죠.]

다시 돌진하려는 동료를 뜯어말리며, 북방의 사냥꾼은 바위틈으로 사라진다. 가죽 자루가 출렁대길래 열어서 내용물을 마셔봤더니, 목구멍에 불이 나는 듯한 술이다.

 

#7 땅끝 광산은 고용주에겐 이 모든 소동을 불사할 만큼 중요하다고 들었다. 거기서 나는 광물을 사람들은 고드름이라고 부르지만 진짜 성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장신구로 만들면 성을 살 수 있을 만큼 귀하고, 마술사의 손에 들어가면 불로장생하는 약재로 쓴다던가. 세상 끝이라도 찾아가서 돈 벌 궁리를 하는 사막의 대상이니 광산에도 눈독을 들였을 것이다.

허나 옥련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황폐하기만 하다. 광산촌은 옥련이 지나온 버려진 마을보다 더 상태가 처참하다. 기둥뿌리만 남긴 채 불타 없어진 집이 태반. 그나마 형태가 온전한 집엔 얼어붙은 시체들이 쌓여 있다. 눈밭에선 부러진 창대와 말뚝들이 솟아나 있다.

광산촌 너머 산비탈 위에는 돌벽을 쌓아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 용병들이 주둔한다고 들었는데, 숫제 요새를 지은 모양이다. 옥련은 화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 걸음을 재촉한다. 인사 대신 화살이 먼저 날아오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 외부에서 사람이 오는 걸 알아챈 용병들이 벽과 망루로 달려나온다.

[이름을 밝혀라.]

망루에서 옥련을 확인한 초병이 사막 말로 소리친다.

[옥련이라고 해요. 사냥꾼이고, 대상의 일을 처리하러 왔어요.]

초병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울타리를 열어준다. 요새 내부엔 지키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누비옷을 입은 병사들이 둘씩 짝을 지어 진지를 순찰하거나, 눈더미를 퍼내는 인부가 몇 명 나와 있을 뿐이다. 병사들이 특이한 무기를 들었길래 봤더니, 불을 뿜는 화창이다. 용병을 고용할 때 돈을 아끼지 않은 모양이다.

옥련처럼 사막 출신인 병사가 광산 시설 내부로 안내한다. 채굴 작업은 중단되었는지 갱도 입구에 수레며 공구 따위가 아무렇게나 쌓인 채 방치되어 있다. 갱도 안에는 거적데기를 덮고 누운 사람들이 빼곡하다. 자는 건지 앓는 건지.

판자를 짜맞춘 계단을 올라 판자로 지은 건물에 들어간다. 가구가 거의 없는 방 안에는 용병 몇 명이 바닥에 널부러져 자고 있다. 제일 안쪽엔 남자 한 명이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쓴다. 그는 옥련과 병사를 보고는 일어난다. 새치도 새치거니와 전신에 재대로 된 갑옷을 갖춰 입은 게, 딱 봐도 지휘관이다.

[못 보던 친구로군. 사막 사람인데?]

[광산 밖에서 왔습니다. 대상의 일을 보러 왔다는군요.]

[옥련이라고 해요. 여기 계약서가 있으니 참고하시길.]

옥련은 품에서 손가락 두 개 정도 되는 통을 꺼낸다.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들었고 종이에는 사막 문자로 쓰여진 서한과 함께 대상의 인장이 찍혀 있다. 지휘관은 대상의 서한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든다.

[지금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설인의 진상을 조사하러 왔다고?]

[맞아요. 내 고용주는 광산 감독관에게서 설인이 나와 인부들이 겁을 먹었으니 대처할 수 있는 병력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았죠. 몇 번이나 확인을 요구하는 답신을 보냈는데 첫 편지 이후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왔죠.]

[금시초문이군. 자네는 그런 소문 들은 적 있나.]

[없습니다.]

[그보다 대체 어디로 온 건가. 고원을 지나려는 사람은 전부 잡혀 죽는데. 우리도 고립되어 있건만.]

[유적과 얼음 통로를 지나 왔어요. 관심 있나요?]

지휘관과 용병은 눈을 휘둥그레 뜬다.

[관심이 있다마다. 자세히 말해보겠나.]

[그 전에, 혹시 광산에 온 게 나 하나뿐인가요. 동료가 더 있었는데 눈보라 때문에 흩어졌어요.]

[다른 사람은 온 적 없네. 광산 감독관이 편지를 보냈다고 했지? 헌데 야만족이 우릴 완전히 고립시켜서 외부와 연락을 못 한 지가 오래야. 그게 언제쯤 일인가.]

[몇 년 된 일이라던게요. 아무래도 그 자에게 물어봐야 빠르겠네요. 감독관은 어디 있죠.]

[없어. 도망쳤네.]

 

#8 체이는 지주의 호위병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끌려간다. 다음 사냥을 위해 야영지를 떠나려는데, 문 앞에서 잡힌 것이다. 이유를 물어도 호위병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니 검을 뽑아들고 위협하지 뭔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고 일단 잠자코 있는다.

호위병들은 체이를 지주와 주술사가 거하는 절벽 동굴로 데려간다. 굽이치는 통로를 몇 번이나 돌아들어가니 원형으로 파낸 방이 나오고, 거기 지주들이 모여앉아 있다. 화려하게 수놓은 외투를 둘둘 감고 있어서 커다란 털뭉치 같다. 주술사도 몇 보이는데, 무엇보다도 의아한 부분은 하누와 하누의 대장이 같이 있다는 점이다. 그제서야 체이는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아찔함을 느낀다.

[이 아이인가?]

지주 중에서도 제일 늙어 꼬부라진 자가 묻자 호위병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네가 짐승 쫓아다니는 솜씨가 좋다는 얘기는 들었다. 주술사들이 도움을 많이 받았다지.]

[내가 여기 왜 끌려온 거야?]

묻기는 지주에게 물으면서도 체이의 시선은 하누를 향한다. 하누는 시선을 피한다. 지주도 체이의 어린 남편을 슬쩍 보더니 비릿하게 웃는다.

[전사들은 비겁자를 용납하지 않지. 하물며 배신자는 어떻겠나.]

[누가 배신자라는 거야.]

[네가 잘 알겠지. 여기에 시비를 가리려고 부른 게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쳐죽여야겠지만, 주술사들이 뜯어말리더군. 뿔을 구해올 사람이 없다고. 해서 네게 기회를 주겠다. 여기서 죽던가, 아니면 전사가 되어 동족을 섬겨라.]

[난 댁들 싸움에 끼지 않아.]

[잘 가게.]

지주가 손짓하자 호위병들은 검을 뽑아든다. 체이는 늙은 지주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잇는다.

[이건 어때? 광산으로 잠입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줄게.]

[무슨 소리지.]

[댁들이 모르는 길이 있어. 이 방의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는 길.]

[그런 길을 너는 안다는 게냐.]

[사냥꾼이면 다 알아. 짐승을 쫓아서 여기저기 다니게 되거든. 다만 사냥꾼은 다 떠나거나 굶어죽었지. 누구 때문에.]

[얄팍하구나. 그럼 네가 직접 안내해라. 사실이면 죽이지는 않으마. 아, 물론 전투에서 살아남아야겠지.]

 

#9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눈보라가 휘몰아치지만 용병들은 바쁘다. 출정이 코앞이므로. 옥련은 망루를 지키는 사막 출신 초병들을 찾아간다.

[만약 밖에서 뿔새 우는 소리를 듣거든 나한테 알려줘요.]

[뿔새? 사막에 사는 그 뿔새요? 이 추운 데 뿔새가 어딨습니까.]

[정확히는 뿔새 우는 소리 같은 화살 소리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화살이라면 누가 온다는 뜻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요.]

초병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망루에서 내려온 옥련은 무기고에서 찾은 쇠뇌를 점검하며 용병들이 도열한 언덕으로 향한다. 옥련의 정보에 따라 정찰대가 먼저 달려가 얼음 통로를 살폈다. 상세한 보고를 들은 지휘관은 감시망을 피해 서신을 보내거나 적을 기습할 때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훈련을 받기는 잘 받은 모양인지 반나절만에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다.

목표는 얼음 통로를 지나 북방인의 감시망을 돌파할 수 있도록 거점을 찾는 것이다. 적을 만나면 죽이거나 혹은 사로잡거나. 옥련 입장에선 감수할 필요 없는 위험이지만 지휘관이 옥련에게도 힘을 보태라했다. 그 자의 의사에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광산에서 유일하게 통제력을 가진 작자니까.

[정말 아무도 설인이 나온다는 소문 들은 적 없어요?]

용병 무리에 질문을 던져봐도 돌아오는 침묵은 무안할 지경이다. 사막 말과 야쿳 말로 번갈아 외쳐도 용병들은 의아한 눈으로 옥련을 쳐다볼 뿐이다. 코웃음이라도 흘리는 이가 없다. 마침내 누군가 반응을 보인다.

[광부들한테 물어보쇼.]

옆에 선 용병이 돌아보며 반문한다.

[그치들이 그런 얘기를 했던가.]

옥련은 더 자세히 묻기 위해 다가간다.

[광부들 사이에 무슨 소문이 도나요?]

[자세히는 모르오. 저치들은 자기들끼리만 쑥덕대니까. 감독이 도망친 후로는 일도 안 하고 밥만 축내지.]

하기사 광부들이 용병들보다 오래 있었으니 아는 게 더 있을지도 모른다. 헌데 지금 거길 찾아갈 형편은 못 된다. 지휘관의 부관이 나서서 대열을 호령하며 이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옥련은 마지막으로 항의의 몸짓을 해보이지만, 지휘관은 머리를 좌우로 젓는다.

대열은 재와 시체 뿐인 광산촌을 지나, 잘 숨겨진 바위틈으로 향한다. 제대로 된 길이 아니다보니 헤매기도 하며 얼음 통로 입구에 도착한다. 얼음 통로는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날 수 있을 만큼 높고 넓다. 처음엔 동굴 벽에 얼음이 낀 정도였으나, 더 깊이 들어갈수록 지층 자체가 거대한 얼음덩어리임을 깨닫게 된다. 용병들이 든 횃불의 빛이 얼음벽을 통과하고 반사되어 그 내용물이 비춰보인다. 얼음층 안에는 뼈가 들었다. 사람 뼈가 아니라, 커다란 짐승들의 유해. 이름 모를 짐승의 해골이 벽에서 튀어나와 있다.

[여길 혼자서 지나왔다고? 담도 크시구만.]

오는 길엔 급해서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지만, 얼음층 속 짐승 뼈들은 들러붙은 가죽도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발려 있다. 바닥에 드러나있는 뼈들도 성하지 않다. 큰 짐승 뼈마다 뭔가 긁히거나 상처난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이런 자국은 사냥당한 먹잇감의 뼈에 남는 것이다.

[어쩌다 이놈들이 다 여기 와서 죽었을까?]

[코끼리 무덤 같은 거 아냐?]

사막 사람에겐 친숙한 미신이지만 옥련은 경우가 다름을 알아챈다.

[죽은 게 아니라 죽임 당한 거에요.]

[뭐에?]

[뭐겠어요. 포식자.]

대열 앞쪽이 술렁인다. 옥련의 발언 때문은 아닌 듯하다. 선두에 선 용병들은 방패를 들고 전방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 뭔가를 본 것일까. 부관이 양손에 검과 횃불을 들고 나선다. 다음 순간 화살이 날아와 그의 미간에 꽂힌다.

 

#10 체이는 제대로 겨누지도 않고 허공에 화살을 날린다. 이 얼음굴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자살행위지만, 말리기엔 너무 늦었다. 화창이 폭발하며 불꽃을 뿜는다. 뿔장식 두건을 쓴 전사들은 털가죽 외투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뒹굴거나, 그대로 적에게 달려든다.

남쪽에서 온 용병들은 기습에도 전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방패벽을 세웠다. 전사들은 화살이 더는 소용없어지자 창을 들고 돌격했지만 방패벽을 무너뜨리기엔 무리였다. 계속해서 어둠 속에서 화살을 날려 적의 기세를 깎으려 든다. 얼음굴 한가운데서 대치하며 욕설과 저주가 오간다. 방패벽이 한 걸음 전진했다가도 화살세례에 멈칫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좁은 장소에선 승산이 없음을 체이도 느낀다. 전사들은 눈보라에 숨어 화살을 퍼붓고 흩어진 적을 하나씩 잡아죽이는 식으로 싸워왔다. 주술사들의 가호가 서린 뿔장식 눈보라로부터 지켜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굴 안에선 시야를 가려줄 눈보라도 없고, 적이 흩어지지도 않는다. 화살로는 방패벽을 절대 뚫을 수 없다.

전사들이 점점 밀리다가 커다란 공동에 이르러 몸을 숨길 곳조차 마땅치 않게 되었을 때, 체이는 이방인에게서 받은 우는살을 뽑아든다. 적 방향이 아닌 동굴 깊은 곳을 향해 쏘자 새되고 기이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우는살은 동굴 저 안쪽까지 날아가며 메아리친다.

난데없는 소리에 모두가 멈칫하지만, 이내 싸움은 계속된다. 체이가 우두커니 서있는 것을 본 전사가 달려와 어깨를 잡고 다그친다. 체이는 팔을 들어올려 귀기울이는 시늉을 해보인다. 전사는 체이를 따라 어둠 속을 응시한다. 깊은 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곰이나 표범 따위가 아니라, 아랫배가 내려앉는 듯 지축을 울리는 괴성이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용병과 전사들을 뭔가가 덮친다. 이야기 속에서나 들었던 괴물이다. 괴물은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털로 전신이 뒤덮였다. 동굴이 좁아 구부정하게 서야 할 정도의 덩치에, 앞다리는 땅에 닿을 만큼 길다. 그 끝엔 사람 키만한 발톱이 다섯 개. 괴물은 도망가던 털가죽 외투를 입은 북방인을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가더니, 상체부터 뜯어먹는다.

산 채로 먹잇감이 된 전사의 내장이 흩뿌려진다. 뻣뻣한 털에 화살이 튕겨나오자 전사들은 창을 들고 덤비지만 전부 괴물 뱃속으로 들어가는 신세다. 다음은 용병의 차례. 화창이 불을 뿜는다. 그러나 털끝이나 그슬렸을까. 괴물은 긴 팔을 내리쳐 귀찮게 구는 인간들을 두동강낸다.

방패벽 따윈 이미 박살이 났다. 북방인과 용병은 무기를 내팽개친 채 달아난다. 용병들의 지휘관은 어떻게든 부하들을 통제하려 해보지만 어림도 없다. 옥련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혼란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다. 뿔새 울음소리를 내는 화살을 쏜 사람이 분명 여기 있을 테니까.

괴물에게서 달아나는 북방인 중, 두건에 뿔장식이 없는 사람이 있다. 커다란 활을 들었다. 옥련이 달려가자 체이도 알아차린다.

[그거 벗어요!]

[뭐?]

옥련은 더 말하지 않고 체이의 하얀 털가죽 외투 밑자락을 잡고 들어올린다. 체이는 영문도 모른 채 허물 벗듯 빠져나온다. 옥련이 털가죽 외투를 공중에 던지자, 괴물의 팔이 나타나 외투를 낚아채간다. 외투는 그 주둥이 속으로 사라진다. 두 사람은 구르듯 달려 구석진 곳에 납작 엎드린다.

 

#11 얼음굴 밖으로 나왔을 땐 눈보라는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난도질당한 시체 조각이 사방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옥련과 체이는 눈을 헤치며 광산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다. 혹시라도 괴물이 돌아올까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그런 낌새는 없다.

광산촌이야 원래부터 폐허였다지만, 진지의 돌벽과 울타리마저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 여기도 저기도 용병과 전사들의 시체가 널려있다. 잘 보니, 창칼에 찔리거나 화살을 맞아 죽은 이가 많다. 괴물에게서 달아나서는 자기들끼리 죽인 모양이다.

두 사람이 갱도 앞에 도달했을 때 모포로 둘둘 만 인부들이 고개를 내민다. 괴물이 여기까진 쫓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먹잇감을 찾아갔으리라. 옥련의 얼굴을 본 사막 출신 광부가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저도 알고 싶네요.]

몰려드는 인부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달려나온다.

[체이! 체이 아냐?]

북방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체이에게 달려오더니 양손을 마주잡는다. 체이는 옛 친구를 끌어안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라니?]

[다들 벌받은 거야. 무사해서 다행이야.]

옥련의 의문.

[여기에도 아는 사람이 있어요?]

[용병이 오기 전엔 광산촌에 드나들었으니까. 이 사람들도 집을 잃은 신세야. 전쟁한답시고 다 불태워버렸어.]

옥련은 광부들이 저마다 귀며 목덜미에 반짝이는 물건을 달았음을 눈치챈다.

[저게 그 고드름인가요? 아주 귀하다고 들었는데.]

[남쪽에서 지주들이 온 뒤 귀해졌지. 그 후엔 사막 사람들이 나타났고. 내가 어릴 땐 아무도 저것 때문에 싸우지 않았어.]

[광산은 대상의 소유인 줄로만 알았는데, 역사가 있는 모양이네요.]

[우리는 반짝이는 부적 정도로나 여겼거든. 사막 사람이 와서 쫓겨나게 됐을 때 여기 남은 친구들에게 선물로 줬지. 어쨌든, 이제 어쩔 생각이야?]

옥련은 기지개를 켠다. 뻣뻣하게 언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돌아가야죠. 고용주에게 이 모든 일을 보고해야 해요.]

체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럼 혹시 증언해줄 사람이 필요해?]

시선이 마주친다.

[그럼 도움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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