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에덴

2019.05.07 12:1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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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을 쓰다듬는 흰 빛이 느껴졌다. 감은 눈꺼풀 아래에서 안구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살포시 뜨니 희고 네모난 것이 가장 먼저 보였다. 하얗고, 굉장히 높은, 낯선 천장이었다. 처음에는 시각만 존재하는 듯, 다른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네모난 흰 색, 둥글고 네모난 물체가 보였고, 삼십 여초 후에 그게 납작한 조명이 달린 천장인 것을 인지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눈을 깜빡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코로 숨을 내뿜고 있다는 것과, 입 안이 바짝 말라 혀가 입천장에 들러붙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혀를 굴려 입안을 쓸었다. 쓴 맛이 났다. 맛을 느끼자, 정신이 들면서 내 몸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배가 무겁게 몸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고 알게 되었다. 묵직하다. 

 

배?

 

나는 본능적으로 배에 손을 얹었다. 배가 남산만했다. 나는 만삭이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런 것 같다.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고 온몸이 쑤시고 나른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누가 눈 앞에 그림 카드를 들이밀어 생각의 흐름을 끊기라도 하는 것 같이, '만삭 임산부의 컨디션'이라는 관념이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 찰나의 인지는 곧 사라졌고, 나는 곧 다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다.

 

[아이를 낳을 때가 다 되었으니 그럴만도 하지.]

 

그러니까, 지금 나는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와있는거였다. 그런데 속편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깜빡 잠이 들기라도 한 것인가? 그런데 내 아이가 아들이었던가, 딸이었던가? 이런 의문을 품는게 스스로 바보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전에 만삭의 몸을 낯설어하는 쪽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속 편하게 병원에서 자고 있었군.]

 

의식이 또 비집고 들어왔다. 내 것이면서 이질감이 드는, 어쩐지 색이 다른 것 같은 생각이 툭툭 섞여 들었다. 트럼프 패 속의 조커처럼, 뽑아내어 버려둬야할 것 같은 위화감을 주는 생각이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보았다. 자세가 기우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침대는 금속성이었고, 폭이 좁았다. 산모를 위한 침대라기 보다는, 수술대나 시신을 얹어두는 간이 침대처럼 생겼다. 게다가 침대의 높이가 이상하리만치 높았다. 이런 높이라면 앉았을 때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점프하듯 뛰어내려야 할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

 

본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병원같기는 한데, 여기에서 눈뜨기 전에 내가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단기기억상실이라도 된단 말인가. 남편은? 엄마나 아빠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제서야 침대 주변의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바로 직전까지 내 세계엔 차가운 금속성 침대와 내 몸뚱이, 시리게 하얀 천장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주변이 무슨 색이고, 얼마나 넓고, 무엇이 있는지가 아예 떠올려지지가 않았다. 공간 뿐 아니라 내 이름은 물론이고 내가 임산부였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러다가 다른 가족의 존재를 떠올렸을 때, 시야가 넓어지기라도 하듯이 주변이 선명해졌다. 사물이 색과 형태로 먼저 들어왔다. 누군가가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녹색과 회색이 섞인 얼룩덜룩한 캔버스같은 네모가 먼저 보였고, 은백색의 테두리가 그려지면서 얼룩덜룩하던 것들이 사람 모양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때서야 어둑한 사각 캔버스가 바깥이 내다보이는 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처럼 배가 부른 여자들이 밖에서 하얀 환자복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안 후에야, 나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자, 침대가 더 이상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우윳빛의 시트의 까슬한 느낌과 약간의 쿠션감이 느껴졌다. 높이도 낮아진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진 해부실습대라도 되는 양 삭막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분명히 진정제같은 것의 영향으로 정신이 몽롱했다가 돌아오는 중이겠지.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의식 하나가 스며들었다.

 

[나는 병원에 아이를 낳으러 왔다.]

 

그렇다면 왜 아무도 안 오는거지? 남편은 이럴 때 뭐하는거야? 가족들은 내가 출산하러 병원에 와있다는 것을 알까? 그런데 그들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떠오르는데, 그 중 누가 내 남편이고, 내 엄마이고, 아빠인지 확실치가 않았다. 무슨 약을 어떻게 썼길래 정신이 오락가락 한단 말인가. 임산부에게 이런 위험한 약물을 써도 되는건가, 어딘가에서 진정제 주사의 신경계 부작용에 대한 글을 읽은 것 같은데 따위의 생각이 어지러이 오갔다.  그러다가 순간, 여지껏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나에게 남편이 있었던가?‘

 

그 생각은 갑자기 떠올랐지만,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 감각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몸이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을 방해하기라도 하듯, 오른손이 어떤 감각 신호를 보내왔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뭔가가 닿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휴대폰이 갑자기 그 순간 손에 생겨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이전까지는 휴대폰을 들고 있다는 자각도 느낌도 전혀 없었다. 마치 생각을 따라 몸의 일부와 뇌가 깨어나는 것같았다. 어쩌면 뇌가 보려는 부분들이 여태 잿빛으로 있다가 인식을 할 때마다 색을 부여받듯 하나하나 깨어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휴대폰은 이십여년 전에 썼을 법한 구형의 핑크색 폴더형 휴대폰이었다. 가벼운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달렸다. 나는 휴대폰을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마치 그러고 있으면 그게 답이라도 토해내리라 믿는 사람처럼. 그때 띠링 소리를 내며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저녁 먹고 들어가]

 

텍스트 메세지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남편과 스님 복장을 한 남자가 식당에 마주보고 앉아서 카메라쪽을 보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 속 인물을 기억해냈다. 남편은 만나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나? 저게 내 남편이라고? 그리고 이 사진은 누가 찍어준거지? 사진을 자세히 보니, 식탁 위의 메뉴는 고기였다. 스님이 고기를 먹는다고? 남편이 이 사람과 아는 사이라고? 게다가 뜬금없이 웬 스님? 아내가 출산하러 병원에 왔는데 고기 먹고 저녁에 들어간다는 건 또 무슨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뒤져 연락처 메뉴를 열었다. 연락처 목록에는 남편만 덩그러니 등록되어 있었다. 엄마는? 아빠는? 이렇게 생각한 순간, 시야가 잠시 흐려졌다. 눈을 껌뻑여 초점을 맞추자, 한 줄이였던 목록이 세 줄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거지? 다른 사람들은? 하지만 어떻게 해도, 나는 이 세 사람 외의 다른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엄마가 아니라 아빠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아빠와 더 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 속에 어떤 이미지가 흘러드는 것 같았다. 엄마는 바빠서 어린 나에게 별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아빠가 그런 나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잘 놀아주고 내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었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영상 이미지가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뇌에 스미는 것 같았다. 나는 동전을 넣으면 캔음료를 토해내는 자판기라도 된 것처럼 '아빠에게 연락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켰다. 그냥 그렇게 일어난 일이었다. 영상 속 아빠가 처음 본 것처럼 낯설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 과정은 물흐르듯 자연스러울 터였다. 아빠가 보고 싶다거나 하는 식의 감정-이를테면 그리움, 애정 같은-은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의 회로가 끊어져 있는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아빠?“

 

[어 그래!]

 

"나 애 낳으러 왔어.“

 

[어 그래! 우리 딸이 아이를 낳는구나!]

 

"..엄마는?“

 

[어 그래! 엄마는 당연히 같이 가야지!]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로봇이라면 튜링테스트를 절대로 통과할 수 없으리라. 부자연스러워도 너무 부자연스러워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말투와 내용이 흘러나왔다. 나는 폴더를 탁 소리 내며 신경질적으로 접어버렸다. 뭐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이 사람은 내 아빠가 아니다. 사진을 보내온 남자는 내 남편이 아니다. 이 휴대전화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거칠게 원피스를 걷어 올렸다. 불룩 솟은 배가 거기 있었다. 만져보고 꼬집어보고 쓸어도 보았다. 손은 배를 분명히 느꼈고, 배도 손을 느꼈다. 이 몸이 내 몸인가? 나는 나인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빌어먹을..“

 

악문 이를 비집고 욕지기가 새어 나왔다. 대체 무슨 약을 맞았기에 정신머리가 이 모양인거지? 아니면 사실 내가 정신병동에 입원한 망상증이나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식의 반전영화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이제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치료되었다고 우길 차례인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지금을 설명해보려 했지만 다 미친 생각같을 뿐이었다. 그래, 남편이 고기 먹는 땡중이랑 친구일 수도 있고,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라 마누라가 애낳으러 온 와중에 저러고 있을 수도 있지. 세상엔 이보다 더한 또라이가 많으니까,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일게다. 남편이 하도 개차반이라 잊고 싶어서 가장 나중에 기억해내려는 뇌의 자기보호반응일지도 모른다. 과하게 쾌활한 아빠가 애 낳는 딸을 보러 오는 중이라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은가. 막말로 우울하고 무서운 아빠보다는 낫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진정제건 뭐건 내가 맞은 약물때문에 뇌가 잠시 느릿느릿 움직이는 중인게 분명하다. 어쩌면 만삭이긴 해도 출산할 때는 아직 안 되었고 검사를 받으러 왔다가 급히 처치가 필요해서 수면주사같은 것을 맞고 이제 몽롱하게 깨어났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나씩 생각날거고, 명료해질거다. 그게 더 간편한 설명이니까. 뇌가 조금은 더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의사는? 간호사는?‘

 

조커인지 스페이드인지 모를 카드가 또 툭 던져졌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물어봐야겠어. 나는 몸에 이상이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지 확인하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내려왔다. 흰색 슬리퍼를 꿰어찬 발을 질질 끌며 문 밖으로 나가자, 예상하던 병원 풍경과 비슷한 것이 펼쳐져 있었다. 흰 복도, 역시 흰 인조 가죽을 씌운 대기용 벤치의자, 수납처로 보이는 카운터, 만삭의 배를 하고 걸어다니는 여자들, 그리고 또 배가 나오지 않은여자들. 모두 똑같은 흰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분만병동이라 출산 전후의 여자만 있는 것인가. 흰 색만 가득한 가운데, 카운터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간호사만이 살구색 옷을 입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갔다.

 

"저기요.“

 

간호사는 날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날 찬찬히 뜯어 보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아니었어도 간호사는 충분히 이상했다. 성형을 과하게 한 것 같이 부자연스러운 미인형 얼굴을 가진 그녀는, 성형 부작용이라도 있는지 안면근육이 마비된 듯 표정이 어색했다. 요즘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은색 펄 섀도우와 형광핑크색의 립스틱도 이상했다. 뭐지 이 여자?

 

"의사는 어디있나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데스크 아래에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꼬불대는 줄이 달린 복고풍의 민트색 다이얼 전화기였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 미친년은, 하는 짜증스러운 생각과 함께. 난 몸을 돌려 지나가는 만삭 임산부의 어깨를 잡았다.

 

"저, 죄송한데요. 여기가 무슨 병원이죠?“

 

"안녕하세요? 저는 아이가 곧 태어나서 기뻐요.“

 

나는 흠칫 놀라며 여자에게서 떨어졌다. 몹시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여자가 나를 향해 행복하다는 듯 인사를 해왔다. 그러더니 곧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숨이 거칠어졌다. 뭐야, 이것들 사람이 아닌거야? 그러고보니 이 공간엔 오로지 여자밖에 없었다. 임산부의 가족으로 보이는 이도, 의료진도 없었다. 난 떨리는 손을 맞잡아 진정시키려 애쓰며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엘레베이터나 출입문으로 보이는 것을 찾았지만, 내가 나온 방을 제외하면 오로지 벽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인사를 해올 것 같은 임산부들을 제치고 복도를 이리저리 누볐지만 출입문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복도는 가운데 공간을 둘러싼 원형태로 이어져 있었다. 이제 보니 임산부들은 목적지 없이 그 원형의 복도를 웃으며 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이 여자들처럼 복도를 돌고 있는게 안전할까?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그녀들이 갑자기 웃는 얼굴로 달려들면?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나는 일단 무기가 될만한 것을 챙기기로 했다. 복도엔 아무 것도 없었고, 방으로 돌아가서 뭔가를 찾는게 나을 것 같았다. 방에는 침대와 철제 의자 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의자를 집어들어 방패처럼 앞을 막아 세웠다. 나온 배때문에 의자를 들기가 버거워 의자의 네 다리에 배를 끼우다시피해서 의자가 배를 감싸는 모양새가 되었다. 여차하면 팔을 뻗어 의자 등받이로 찌르거나, 내던질 수는 있겠지만 영 탐탁치가 않았다.

 

"이건 꿈일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임신한 적이 없어.“

 

꿈이라면 얼른 깨길 바라면서도, 난 본능적으로 의자를 꽉 움켜쥐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위험 또한 현실로 다가왔다. 다시 출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리를 옮기려는 순간, 입구에 나이 지긋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의자를 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것 참 흥미롭군요.“

 

남자는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의 괴상한 여자들을 보고 겁에 질렸던 나는 그 말투만으로도 정상적인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반갑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당신 누구죠? 여긴 어디고요?“

 

"그러는 당신은 누굽니까?“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내가 먼저 물었어요.“

 

내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애써 감추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이곳의 관리자입니다. 당신같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돕지요.“

 

"나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그렇게 겁내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을 해치지 않으니까요. 우선 이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이 자를 믿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여기가 어딘지 알고 싶지 않나요? 그리고 당신이 누군지도.“

 

난 잠시 멈칫했다. 내 망설임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남자는 여유롭게 다음 말을 꺼냈다.

 

"괜찮습니다. 모두 당신처럼 처음에는 당황하고 겁에 질립니다. 지금 내 말이 거짓말이고 데리고 가서 해치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을 해칠거라면 굳이 내가 여기에서 시간낭비하고 있을 이유가 없죠. 간단하게 제압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나는 그의 말 뒤에 있는 더 큰 위험을 감지했다.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하고 있지 않다는 것. 힘의 우위 앞에서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나는 의자를 껴안은채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그 의자가 당신에게 안정감을 준다면 그렇게 들고 가도 괜찮습니다. 단, 섣불리 휘두르진 않았으면 좋겠군요. 당신이 다칠테니까요.“

 

그 말이 더 무서웠다. 무력감에 얼어버릴 것 같았지만, 호랑이 굴에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의자를 움켜쥐고 남자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남자는 내 태도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당신의 공간입니다. 여긴 이런 공간이 아주 많아요. 당신같은 산모들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남자가 손에 든 작은 리모콘을 눌렀다. 그러자 방을 빙빙 돌던 임산부들이 일제히 뚝하니 동작을 멈췄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 밖에 없었다.

 

"놀라셨나요? 네, 이들은 로봇입니다. 당신이 방에서 일어나서 밖을 보면 이들이 복도를 걸어다니는게 보이지요. 당신같은 임산부들이 많다는 것에 안심했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 속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그저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하지만 처음 깨어났을 때, 이 로봇들을 보고 안심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방에서 이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별다른 의심없이 편해지지요. 당신은 예외였지만.“

 

"이게 다 뭔데요.“

 

너무 긴장해서 딱딱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건 아주 허술한 세트장같은겁니다. 당신은 잠에서 깨어나고, 만삭인 상태로 병원에 와있다는 것을 깨닫지요. 그리고 곧 친절한 의료진이 들어와 당신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립니다. 진정제를 맞고, 다시 눈을 뜨면 출산 후가 됩니다. 그리고 일종의 산후조리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가 또 잠에서 깨는거죠. 모두 부드럽고 평화로운 과정입니다.“

 

"세트장이라뇨? 아기는요? 대체 왜..“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지만 곧 망문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시적해서 뭘 물어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이곳은 당신네들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사후세계입니다. 이승의 삶은 한 편의 긴 꿈과도 같아요. 당신은 당신의 꿈 속의 인생을 모두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온겁니다.“

 

”사후세계? 내가 죽은거라고요?“

 

그러고보니, 어렴풋이 마지막 호흡의 느낌과 병원 냄새가 코 끝에 어려 있는 것도 같다.

 

”네. 꿈 속 인물에게는 죽음이지만, 이곳에선 그냥 잠에서 깬 것일 뿐이지요. 여성의 경우, 꿈을 다 마치고 꿈 속에서 죽으면, 모든 기억을 잃고 이곳에서 깨어나 출산을 합니다. 꿈은 태아의 발육을 위한 양분이 되어주죠.“

 

”내가 죽는 꿈을 꾼거고, 자고 일어나면 아이를 낳는다고요?“

 

나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앵무새처럼 되묻기만 했다. 남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꿈은 곧 삶입니다. 당신이 꾼 꿈은 지구에 사는 어떤 여자의 삶이에요. 그 꿈에서 생겨난 에너지가 태내의 아이를 자라게 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당신의 꿈을 자기의 인생으로 받아갑니다.“

 

"내가 꾼 꿈이 내가 낳는 아이의 인생이라고요?“

 

"이곳의 여인들은 모두 삶의 꿈을 꿉니다. 아주 다양하게 꾸지요. 아름답고 고귀한 꿈, 평범한 꿈, 악몽까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모두 다양한 삶 하나하나가 되지요. 지구상에 육신이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이 꿈을 수집해서 하나하나 그 개체의 뇌에 주입합니다. 이른바 꿈이 무의식이 되는거죠. 그러면 그들은 태어나서 자기도 모르게 운명이라 불리우는 어떤 방향을 향해 살게 되는데 그게 바로 당신들이 그들에게 준 꿈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꾼 꿈이 누군가의 삶이 된다고? 지금 난 몹시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중일거다. 그게 더 현실성있다.

 

"정확히는 큰 영향을 주는 겁니다. 당신의 꿈대로 사는게 아니라요. 인간에겐 자유의지라는 선택권이 있어서 당신의 꿈이 부여한 방향에너지에 따르거나 저항할 수도 있죠. 요컨대, 당신은 지도를 주지만 인간은 그 지도에 적힌 길대로 여행하진 않는단거죠. 지구인들은 이걸 두고 카르마나 윤회라고 부릅니다. 아직 진실에 접근하진 못했지만요.“

 

"그럼 나는 뭐죠?“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는 잠시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것처럼 뜸을 들였다.

 

"당신은 인간에게 삶과 영혼을 주는 여신이지요. 이곳엔 많은 여신이 자기의 창조 에너지를 가지고 수태하여 생을 낳고 있어요.“

 

여신?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남편이 애 낳는 마누라 팽개쳐두고 놀러 간 줄 알고 열받아하는 그렇고 그런 수준의 인간 말이다. 삶과 영혼을 어쩌고 하는 여신같은게 아니라. 남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가끔 당신같은 여신이 있습니다. 꿈 속 자아의 삶에 깊이 동화되어서 깨어난 후에도 그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요. 우리 말로는 아직 링크가 덜 끊어졌다고 하는데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 넘치는 여신이지요. 내가 꾸고 낳은 영혼을 깊이 사랑해서 나처럼 느끼는거니까요. 지구에선 당신같은 존재를 보살이라고 하더군요.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고 연민을 느껴서 직접 지구로 내려가서 꿈을 살아내는 존재들요. 어떻게든 지구인을 돕는 꿈을 적극적으로 꾸는 자각몽의 대가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더 잘 자각하는거에요. 당신이 원한다면 또 지구 생의 자각몽을 꾸어도 좋습니다만... 그건 당신의 선택이니까요. 그리고 이젠 때가 되었어요. 지구에서 곧 아이가 태어날거에요. 당신이 생을 부여할 시간입니다.“

 

남자는 긴 말을 마치고 내 배를 쳐다보았다. 내가 출산을 해야 지구의 한 생이 영혼의 청사진을 받고 태어난다. 아직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난 반쯤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할 것만 같았다.

 

"우리가 넥타라고 부르는 음료입니다. 마시고 잠시 자고 일어나면 모든게 끝나 있을거에요. 여신의 출산은 지구상의 그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으니까요. 별과 성단과 은하의 멜로디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과정이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개미만한 소리로 물었다.

 

"배 안의 아이가 내 아이인가요?“

 

"당신이 꾼 꿈입니다. 에너지지요.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이 고통스럽게 떠나보내야 할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꿈에너지가 출산으로 형상화되어 보일 뿐입니다. 사실 무언가를 낳는다는 것은 저차원 세계에서나 육신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지요. 여신들은 저차원 지구의 꿈을 꾸기 때문에 영혼을 낳는 행위를 저차원의 상징적인 출산으로 받아들일 때 보다 편하게 느껴요. 긴 꿈을 꾸다보면 저차원 인식에 너무 익숙해지거든요. 갑자기 우리 차원의 이미지를 접하게 되면 충격으로 영혼을 내보내는 것에 문제가 생깁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의 아이를 빼앗기거나 하는 식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테니.“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유전자에 새겨진 어떤 힘이 나로 하여금 '새끼'를 확인해서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한 것 같았다. 남자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말에 담긴 묘한 카리스마 탓인지,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가 건네준 호박색 액체를 마셨다. 달큰한 꿀물같았다. 그리고 그 후로는 기억나지 않았다.

 

눈이 떠졌다. 그리고 몸이 가벼워졌다. 배 안에 있던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흔적없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배에 느껴졌던 묵직함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의 몸에 익숙해졌다. 내가 임신했거나 엄마였을리가 없다. 이상한 꿈을 꾸고 난 것이길 바라며, 내심 주변이 익숙한 풍경이길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나는 여전히 하얀 방 침대에 누워 있었고, 문 밖으로는 여자들이 웃으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들은 분홍색 옷을 입고, 배가 나와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도 어느샌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출산, 아니 꿈을 지상에 내려보낸 후에는 색이 다른 옷으로 구분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집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게 문제였지만, 이 곳이 집이 아니라는 것만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어느새 남자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당신은 잠들지 않는군요.“

 

"무슨 말이죠?“

 

남자는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흔치 않은 일입니다. 당신이 여신이라는 것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가요?“

 

"솔직히 말하면 여신이니 뭐니에 관심이 없어요.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고, 난 내 집에 가고 싶어요.“

 

"여기가 당신 집입니다만.“

 

"아뇨, 집은 편하고 안락하고 자연스러운 곳이에요. 내가 나인게 이상하지 않은 곳이요.“

 

남자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몸짓을 했다. 난 그를 따라 긴 복도로 향했다. 복도의 왼편에는 문이 여러개 있었고, 그 안쪽에는 큰 방이 보였다. 그곳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큰 호스가 연결된 전신우주복같은 것을 입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방마다 그런 이들이 적게는 하나, 많게는 댓 명씩 있었다.

 

"이 사람들은 뭐하는거죠?“

 

"당신처럼 집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눈을 떴더니 내가 내가 아니고, 집이 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신들은 저렇게 모여서 명상에 잠깁니다. 자면서 꿈을 꿔서 영혼을 잉태하고 키우진 않지만,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명상을 통해 자기가 누군지, 무얼 해야할지를 탐색하는 것이죠. 당신이 계속 혼란을 겪는다면 한 템포 쉬면서 저들처럼 스스로를 되찾는 시간을 가져도 좋아요.“

 

아니, 이건 아니다. 머리 속에 경계 경보가 울렸다. 아무런 근거가 없었음에도, 나는 등줄기에 전율이 이는 것을 통해 이 남자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은 자기 자신이나 집을 찾는게 아니라 다시 스스로를 의심하는 생각을 지우고 그 여신이라는 역할로 돌아가기 위해 세뇌를 받는 중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대체 이런 일들를 왜 하고 있는걸까? 무얼 위해서? 내가 이를 악물고 주변을 살피는 것을 눈치 챘는지, 남자가 좀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오른쪽은 휴식을 위한 곳이에요. 당신처럼 영혼을 출산한 사람들이 쉬거나 놀면서 재충전하고, 다음 여정을 떠나기 전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죠.“

 

오른쪽 방은 단체 숙소처럼 보였다. 여럿의 침대나 책상 등 소소한 가구가 있었고,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쇼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운데 원형 테이블에 앉아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들 사이에 눈에 띄게 푸른 튜닉을 입은 여자 하나가 보였다. 그녀는 이들을 돌보는 간호사나 매니저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푸른 튜닉을 입은 여자는 다른 여자들이 지루해할 틈도 없이 계속해서 흥미로운 것들을 갖다 주며 이를 즐기도록 격려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일종의 간수같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뭔가를 계속해서 밀어 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에 가서 쉬겠습니까?“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부드럽게 물었다. 나는 쉽게 선택할 수가 없었다. 가부좌의 방에 가면 수상한 증기를 쐬면서 세뇌 당할 것 같았고, 푸른 튜닉을 입은 간수가 돌아다니는 휴게실로 가면 정신 없이 휩쓸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약이라도 맞고 잠이 들어 또 만삭인 채로 깨어나서 이 짓을 반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는 선택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어 질문을 했다.

 

”남자들은 왜 안 보이죠?“

 

”남자들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들은 여신처럼 출산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영혼에 생을 부여하는 일을 돕지요. 그들은 일을 합니다.“

 

”일이요?“

 

”네. 육체 노동이요.“

 

이 말을 할 때 남자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서리는 것 같았다.

 

”당신들의 종교적 신화에 그런 내용이 있지요. 남자는 일을 하고 여자는 출산을 할 것이라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은 기록 말입니다.“

 

남자는 창세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형벌처럼, 여자는 죽은 후에 영혼을 낳고, 남자는 죽은 후에 일을 하면서 이 영혼 공장 시스템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는 것인가? 천국이나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는 없단 말인가. 그저 꿈꾸고 애 낳고 자고 애 낳고 일하는 쳇바퀴같은 것이 윤회의 진실이라고? 나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내가 여기서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둘 다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그 말을 한 순간, 휴게실에 있던 간수같은 여자들 몇 명과 분홍 원피스를 입은 소위 ‘여신’ 몇 명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적의를 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차갑고 무표정한 것이 더 선뜩하게 느껴졌다. 내가 한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이었는지 그녀들의 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여신의 임무를 버린다는 말인가요?“

 

”여기 식으로 말하자면, 네. 그래요.“

 

”그렇다면..“

 

남자는 한쪽 벽에 달린 금속 판넬같은 것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벽에 테두리가 생기더니 슬라이딩 도어로 바뀌었다. 문이 열리자, 바깥의 풍경인지 평범한 들판과 나무 몇 그루가 보였다.

 

”이 쪽으로 나가면 됩니다. 단, 먼저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어느새 빨간 사과를 하나 들고 와서 내게 건넸다.

 

”이걸 문 너머로 던져보십시오.“

 

남자가 건네준 사과를 문 너머로 던졌다. 그리고 난 바로 숨을 들이켜야 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사과가, 문 밖 풍경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문 밖으로 가면 존재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듯, 사과가 문에 의해 잘려나가는 것처럼 풍경에 먹혀 버렸다.

 

”이게 무슨...“

 

”이곳에서 나가는 것은 자유입니다. 누구도 강요하거나 붙잡아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신의 존재는 영혼을 낳을 때만 그 의미를 가집니다. 이곳을 나가는 여신은 무로 돌아가는게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제서야 나는 선뜩한 시선으로 날 바라본 여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상관없이 포커를 치고 웃고 있던 여자들은 나처럼 자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물론 남자도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이들은, 나처럼 의심을 해본 적이 있었던게 틀림없다. 그리고 이 ‘존재를 먹어 삼키는 문’ 앞에서 여신의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저 문을 통과하면 무로 돌아간다고? 아주 없어진다고? 거짓말은 아닐까? 정말 영혼의 꿈을 꾸고 출산을 하는 숭고한 임무를 가진 여신이라면 이런 감옥같은 곳에서 조악한 로봇 세트장까지 꾸려가며 속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이런 사후세계라면 지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심장 박동이 빨라져 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일부러 더 두렵고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풍경을 확인하러 조심스럽게 쳐다보러 가는 연기를 했다.

 

”저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나는 긴장감이 실리지 않게 신경을 쓰며 중얼거렸다. 몸은 떨려왔지만 감각은 예민해지고 정신은 더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당신들의 종교적 신화에 그런 내용이 있지요.]

 

남자는 ‘당신들’이라고 했다. 여지껏 여신 운운하며 고상하게 말하다가, 남자들의 노동과 창세기의 내용을 읊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그에게 잠시 스쳐지나간 것은 비웃음과 경멸이었다. 나는, 그리고 여기 있는 여자들은 여신같은게 아니다. 어딘가에 있는 남자들도 영혼의 탄생에 기여하는 숭고한 신같은게 아니다. 우리는 그냥 지구인이다. 창세기가 적힌 텍스트를 하나의 종교로 삼는 지구 상의 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 여신이니 뭐니 하는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 내면서까지 속이는 이유는 단 하나, ‘이용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우리는 그냥 인간 배터리일지도 모른다. 윤회라고 알고 있었던 영적이고 숭고한 시스템은 이들이 만들어낸 가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것 뿐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나 대범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이곳을 나가야 한다고 충동질하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몸을 돌려 문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근육을 한껏 긴장시켰다. 단번에 도움닫기 해서 뛰어 나갈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한 여자가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어쩌면 그녀들은, 내게서 희망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아니야!!“

 

나는 나 자신에게 되새기듯 소리를 쳤다. 그리고 몸으로 창문을 깨고 나가는 연기를 펼치는 영화배우라도 된 것처럼 문으로 뛰어 들었다. 새된 비명소리와 어수선하게 물건이 흐트러지는 소음이 내 귀로 흘러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가 불에 타는 듯 뜨거워졌다. 설마 정말 사라지는건가? 남자의 말이 맞았나? 나는 타서 없어지고 있는걸까?

 

”안돼!!!!!!“

 

감았던 눈을 와짝 떴다.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몸이 크게 출렁였다. 심장-심장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면-이 튀어나올 듯이 세차게 뛰었다. 아니, 온 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퉁퉁 울려댔다. 까만 어둠 속에 전자 시계의 빨간 숫자가 빛나고 있었다.

 

헉,헉.

 

어두운 공간에 얕고 거친 숨소리만 울려퍼졌다. 손발을 움직여보았다. 사라진 것은 없었다. 감각이 돌아왔고, 내 몸에 닿은 천의 감각과, 마시다만 커피의 향기가 느껴졌다. 전신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허무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악몽이었던 것이다. 욕지거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이 솟아 올랐다. 지옥에 다녀온 것 같았다. 나는 전두엽을 작동시키기 위해 세상의 지식을 자꾸 불러 들였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에게 내려진 벌이, 이브는 잉태하는 고통이고, 아담은 종신토록 일을 해야 땅이 내어주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내용이 분명히 창세기에 있었다. 꿈 속의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내비치며 말한 것처럼, 그 구절이 영혼을 찍어내는 출산 기계, 노동 기계를 의미할 리가 없었다. 악몽도 참 이상하게 꾸네, 그치? 나는 스스로를 달래듯이 혼잣말을 했다.

이승에서 죽으면 거기서 깨어난다고? 그럼 난 아직 살아 있으니 꿈 꾸는 중이겠네. 나는 누가 꾸는 꿈이라는거잖아. 아니면 이미 누가 꾼 꿈대로 살고 있는건가? 혹시 내 꿈 속의 여신이 꾼 꿈이 내 삶인가? 그 여신이 나에게 알려주는건 아닐까? 죽고 나서 속지 말고 깨어나라고? 지금처럼, 문 밖으로 뛰쳐나가서 꿈에서 깨어났듯이, 죽은 후에도 문 밖으로 뛰쳐 나가라고 알려주는건 아닐까? 계속 생각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지만,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얼마 전에 영화 매트릭스를 다시 본 탓일게다.

 

개꿈도 화려하게 꿨네.

냉수라도 마셔야겠다-

 

눈이 서서히 어둠에 적응되기 시작했다. 빛을 받지 못해 제 색을 내지 못하는 물건들이 저마다의 명암으로 모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한동안 굳어 있었던 몸을 문지르다가, 자세를 바로 잡기 위해 손을 엉덩이 옆에 짚었다. 그러던 중에 손에 딱딱한 물체가 걸렸다.

 

어스름한 푸른 빛 속에서도,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침대 위에 있을 리가 없는, 그리고 있어서도 안될, 작고 빨간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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