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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일주일의 여정

2019.04.13 15:5604.13

내 책장에는 읽다 만 책이 즐비하게 꽂혀있다. 언제부턴가 마음에 드는 장면이나 대사, 문장이 나오면 책갈피를 꽂고 그대로 덮어둔 탓이었다. 나중에 친구와 함께 읽으며, 내가 고른 문장을 읽는 친구의 반응을 보는 것이 내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독서도 좋지만 조금 더 입시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자고 담임 선생님이 설득하곤 했지만, 모의고사 몇 번 치르고 나니 그만두셨다. 부모님 또한 1로 가득한 성적표에 만족하여 내 독서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학원 하나 다니지 않는 내가 똑똑하다고만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많을 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울리는 휴대폰 알람에 눈을 뜬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월요일 오전 7시. 지금부터 바지런히 준비하면 버스를 제때 탈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졸렸다. 나는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

충분히 밍기적거리고, 얕은 잠에 꿈도 좀 꾸고 나니 일어날 만한 상태가 되었다. 다시 울리는 알람을 끄며 시간을 확인했다. 월요일 오전 7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정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겨울 방학이라며.”

회식의 여파로 얼굴이 퉁퉁 부은 엄마가 아침 인사처럼 묻는다. 상을 차리던 아빠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보충이 있대, 여보.”
“참 내, 요즘 애들 참 힘들어. 방학인데 놀지도 못하고. 그거 강제로 하는 거니?”
“선생님이 내가 참여하면 면학 분위기가 좋아진대서. 일단 이번 주는 가보려고.”
“장하네, 우리 딸. 별로면 그냥 안 한다고 해. 무리하지 않는 거 알지?”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남들보다 세 시간은 더 잘 수 있다는 걸 부모님은 아직 모른다. 시간 여행자가 나타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자기 자식이 그런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드물 것이다.

느긋하게 밥을 먹다가 늦겠다는 아빠의 등쌀에 시간을 10분 정도 돌렸다. 미리 골라놓은 책을 가방에 넣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학교 갈 때 타는 녹색 버스가 마침 도착한다. 나는 그걸 그냥 보내버렸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어른스럽다는 평가를 받던 나를 깊이 신뢰하셨다. 남몰래 그 신뢰를 저버리곤 했지만 학교 일정을 속인 건 처음이다. 거짓말에서 오는 짜릿함이나 죄책감, 불안함은 없었다. 보충수업이 다음주부터라는 걸 알아도 크게 신경 쓰실 분들도 아니고.

나는 5분 뒤에 온 파란 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20분 거리의 대학병원이다. 그곳에 승아가 입원해 있다.

병원 앞에서 승아네 어머님께 보호자 출입증을 넘겨받았다. 이걸 얻기 위해 일주일만 간병을 맡겨 달라고 며칠을 설득해야 했다. 걱정과 피곤으로 가득한 그분을 한 번 꼭 껴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이 죽 늘어선 복도는 환자와 보호자가 뿜어내는 건강하지 못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낯익은 간호사 선생님에게 눈인사를 하며 고만고만한 문 중 가장 익숙한 문으로 들어갔다. 침대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내가 들어가자 가장 안쪽 창가 침대의 커튼이 열렸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니까.”

아침 인사처럼 승아가 투덜거렸다. 나는 씨익 웃으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 침대에 올려놓았다.

“일주일 정도는 괜찮아. 알잖아. 우리 엄마 아빠 무심하신 거. 들켜도 절대 안 혼나.”
“그래도……. 너 힘들까 봐 그러지.”
“전혀 안 힘들어.”

가방에서 교과서나 문제집 대신 체육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교복 바지는 불편하고 병원에서는 너무 눈에 띄었다. 승아가 자기도 교복 입고 싶다고 조르길래 조금 놀려주었다.

“내 바지로 바닥 청소하려고? 좀 봐줘라. 비싼 바지야.”

승아는 씩씩대며 바지를 빼앗더니 제 몸에 대보았다. 진짜 화낼까 봐 재보지는 않았지만 밑단이 적어도 내 손 한 뼘은 남아돌았다. 나는 우리 반에서 제일 키가 컸으니 당연했다.

“잘됐네. 바지 하나 사서 밑단 자르면 반바지도 하나 만들 수 있겠어.”

참지 못하고 깐족대다가 바지로 얼굴을 얻어맞고 말았다. 우리는 다른 보호자 분이 주의를 줄 때까지 야단스럽게 투닥거렸다.

침대에 커튼을 치고 있자니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느낌이었다. 창문으로 비치는 겨울 햇빛은 승아의 창백한 피부를 따뜻하게 덥혔다. 승아는 조금 놀았다고 지쳐서 잠들고 말았다. 아마 점심시간이나 되어서야 일어날 것이다. 이 애는 잠이 아주 많으니까.

승아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짧게 깨어있는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채우고, 실컷 웃게 만들고, 병의 고통을 잊게 할지 고민하다 보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중간중간 얕은 잠에서 깨어 눈을 맞춰오는 승아에게 웃어주며 나는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억지로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먹어야 체력이 회복될 텐데 승아는 입이 짧은 편이었다. 잘 먹여야 한다고 승아네 부모님도 당부하셨기에 나는 내기를 하나 제안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라 바로 받아들였고, 예상보다 훨씬 잘 통했다.

“오, 승아가 다 먹는 거 처음 보네?”

약을 챙겨주던 간호사 선생님이 감탄할 정도였다. 승아는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터졌다.

“기승아, 너 무슨 소원을 빌려고 이렇게 싹 다 비우냐?”
“자, 이제 내 소원 들어줄 준비 해라!”
“알겠습니다요. 근데 일단 양치하러 가자.”

링거대 끌고 같이 화장실에 다녀온 뒤 승아는 내 등을 밀며 병실을 지나쳤다.

“너도 밥 좀 먹고 와. 그게 내 소원이야.”
“뭐?”
“너 나 챙긴다고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나 또 자면 편의점에서 때울 거 다 알아.”
“아니, 요즘 편의점 음식 좋아. 맛있어.”
“병원 밥 말고 나가서 맛있는 것 좀 먹고 사진 찍어 와. 너 휴대폰 카메라 화질 좋으니까 기대한다.”

승아는 기어코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를 데려갔다. 거창한 소원, 예를 들어 교복 바지 밑단 잘라서 자기 바지 만들어 달라던가 하는 소원을 빌 줄 알았던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승아는 언제 챙겼는지 출입증까지 쥐여 주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다녀와!”

문이 닫히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냥 부탁도 아니고 신신당부도 아니고, 내기로 따낸 소원을 빌었으니 정말 맛있는 걸 먹어야 할 터였다. 휴대폰으로 병원 근처 맛집을 검색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8층입니다.”
“으응?”

그러고 보니 1층을 누르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탔다. 상대는 나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1층 버튼을 눌렀다. 나는 달아오른 뺨을 식히려고 애썼다.

8층은 VIP 병실만 모인 층이었다. 돈이 많아도 어지간히 위중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던데, 지금은 면회 시간도 아니고 저 사람은 아파 보이지도 않으니 보호자인 모양이다. 키가 정말 크고 복잡하고 화려한 셔츠가 눈에 띄어서 흘끔흘끔 훔쳐보다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약간 뒤처져서 걸으니 위화감이 명확하게 보였다. 저 사람은 뭔가 포토샵으로 어색하게 합성한 것처럼 주변과 어우러지지 않았다. 움직이는 배경 위에 사진을 붙여 놓은 느낌이었다. 호기심이 고개를 들어 뒤쫓으라고 속삭였다. 나는 로비까지만 따라갈 거라고 선을 그었다.

키 크고 이상한 사람은 로비에서 멈추더니 한쪽 구석으로 이동했다. 나는 조금 당황해서 머뭇거리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저요?”

입 모양으로 되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훔쳐봐서 기분 나빴나 싶어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먼저 사과하고 빨리 도망가려는데 로비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환자복을 입고 외출하려던 할아버지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고 겁먹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마치 기다린 것처럼 응급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 선생님들이 이동식 침대를 끌고 달려 나왔다. 할아버지가 응급처치를 받으며 응급실로 들어가기까지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사람은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고 나를 마주 보았다.

“이제 가도 돼. 공원 정문 건너편에 순대국밥집이 맛있어.”

그렇게 말한 뒤 그 사람은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버렸다. 나는 얼이 빠져서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는 8층에서 멈추었다.

정말 이상했다. 승아는 갑자기 밥 먹고 오라고 성화더니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말을 했다. 원래 로비에서 쓰러진 할아버지가 이토록 빨리 응급실로 실려 갔던가?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응급실에서 침대가 튀어나온 건 처음이었다. 무언가 변한 것이다.

생각은 뒤엉켰지만 순대국밥은 정말 맛있었다. 나는 먹기 전에 한 번, 그릇을 싹싹 비운 뒤에 한 번 사진을 찍었다. 공원을 지나가다 까만 턱시도 고양이도 만나서 사진을 찍고 승아에게 보여주었다. 승아는 기뻐하며 칭찬하더니 자세한 맛 평가를 물었다. 나는 온갖 비유에 표정과 몸짓과 효과음까지 곁들여 그 애를 만족시켰다.

승아는 내가 가져온 책을 호기롭게 펼치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내가 깨우면 한 문단 정도 읽고 졸고, 다시 깨우면 반 문단 읽고 졸기를 반복했다. 나는 몇 번 정도 깨우다가 책을 뺐고 재웠다. 그대로 가야 할 시간까지 자게 두었다.

항상 똑같이 흐르던 시간이 변하기 시작했다면 좋은 징조일까, 아닐까?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병실에서 나왔다. 1층 로비에서 승아네 아버님께 출입증을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 앞에서 열심히 공부한 척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 애써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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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전 7시. 눈을 뜨자마자 오늘 벌어질 일을 떠올렸다. 승아와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가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져서 사망한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중환자실로 옮기지도 못하고, 가족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커튼을 넘어오는 급박한 발소리와 요란한 호출음에 나와 승아는 한참을 껴안고만 있었지.

힘든 하루를 각오하고 병실로 들어섰는데 침대 하나가 텅 비어있었다. 어리둥절해 하며 자리에 앉으니 승아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오늘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간호사 선생님들이 1인실로 모셔갔어.”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승아를 안아주었다. 호출음이나 쉼 없이 오가는 발소리 없는 상황은 처음이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오늘도 맛있는 거 먹고 와.”

승아의 점심을 다 챙긴 나는 망설이다 병실에서 나왔다. 점심도 점심이었지만 승아가 웃을만한 것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어제 본 고양이를 보러 공원으로 갔다. 녀석은 인적 드문 벤치 위에서 햇볕을 쬐곤 했다.

어렵지 않게 찾았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이 보였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멈추었는데 눈이 마주쳤다. 어제 그 이상한 사람이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안녕.”

이상한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눈이 아플 정도로 셔츠가 화려하다. 나는 겨우 고개만 꾸벅 숙였다.

이상한 사람은 다시 고양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양이는 접시에 담긴 습식 사료를 싹싹 비우고는 이상한 사람 발치로 다가가 머리를 부볐다. 너무나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다행히 그 사람은 별말 없었다. 그가 몸을 숙여 고양이를 쓰다듬자, 귀여운 녀석이 발라당 드러눕더니 골골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 사람 얼굴이 찍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가여운 녀석.”

아주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사진 찍던 걸 멈추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양이 엉덩이를 툭툭 쳐주고 접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순대국밥은 맛있었니?”
“네? 어……, 네!”
“그쪽 골목 끝에 갈비탕집도 맛있어.”

그 사람은 얼빠진 나를 두고 유유히 떠났다. 방향을 보아하니 병원으로 가는 모양이다. 그가 가자 고양이도 떠나버려서 나는 터덜터덜 갈비탕집으로 갔다. 정말 맛있기는 맛있었다.

승아는 고양이와 갈비탕 사진을 보며 기운을 차렸다. 나는 그것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는 게 분명했다. 작은 근심을 금세 눈치챈 승아가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재촉했다.

“아까 고양이한테 밥 줬다는 사람 말이야, 뭔가 이상해.”
“뭐가?”
“일단 맛집 마스터야.”

승아는 깔깔 웃으며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로비 할아버지 얘기를 빼도 충분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승아는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장 가능성 큰 건 시간 여행자 아니야? 네가 길을 헤매는 걸 보고 도와줬다던가.”
“나도 그 생각 해 봤는데, 그래도 좀 이상해. 굳이 먼저 드러내는 이유가 뭐지?”

나는 다른 시간 여행자를 만나본 적 없다. 현실에서는 이상한 오해를 살까 봐 항상 숨겨왔고, 인터넷 카페나 SNS에는 되도 않는 가짜가 넘쳐났다. 그래서 진짜 시간 여행자가 있다면 어떤 사람일지 항상 궁금했다.

“캣맘에 맛집 마스터면 괜찮은 사람일 것 같은데. 네가 뭔가 들킬만한 행동한 적 없어?”
“그랬다면 당장 돌렸지.”
“그래. 어쩌면 그걸로 알아챈 거 아니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시간을 돌리면 다른 여행자도 느낀다던가.”
“겪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다.”

나는 좁은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베개를 빼앗긴 승아는 내 팔을 베고 누웠다.

“한 번 물어봐.”

승아 목소리에 졸음이 가득했다.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당기자 눈이 감긴다. 손쉽게 잠들며 그 애는 한마디를 더 남겼다.

“너도 궁금하잖아.”

엄청나게 궁금했다. 존재를 알아도 허상 같기만 하던 시간 여행자가, 나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이 실제로 나타났으니까. 나는 곯아떨어진 승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사람이 시간 여행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다. 너무나 시간 여행자가 할 법한 접근 방법이지 않은가.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다. 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복잡한 생각을 밀어내며 오늘 찍은 사진을 꺼내 보았다. 귀여운 고양이 뒤로 배경처럼 손이나 발이 보인다. 손이 고양이 턱을 긁는 사진을 보던 나는 하마터면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금속 손목 시곗줄의 버클에 한자가 석 자 적혀 있었다. 한자를 잘 몰라 한참 검색해서 겨우 음독해냈다.

千一遇. 천일우.

그 사람 이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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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로 보이지 않았으니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가기 전에 친한 간호사 선생님한테 슬쩍 물어봤을 뿐이다. 어느 병실로 가보라는 말에 놀란 건 나였다. 상대 손에 놀아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것도 나였고.

“천일우야. 갈비탕은 맛있었니?”
“네, 덕분에요……. 길여정입니다.”

나는 왜 병원 부속 카페에서 천일우와 마주 앉아 있는 걸까? 병실 창문으로 훔쳐보다 걸렸을 때 그냥 도망갈걸. 따라오라는 말에 쫄래쫄래 쫓아가지 말걸…….

“여기는 머핀류가 좀 퍽퍽하지만 케이크는 다 맛있어. 샌드위치보단 파니니가 더 맛있고 음료는 무난해. 아메리카노는 산미가 적어서 좀 씁쓸하더라.”

맛집 마스터께서 맛 평가를 줄줄이 읊으시더니 샷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유자차를 주문하셨다. 멋대로 내 음료까지 시키는 작태에 경악했으나 얌전히 받아마셨다. 이제 와 거절하는 것도 웃겼다.

추운 겨울밤이었다. 아무리 실내여도 얼음을 꽉꽉 채운 아메리카노를 먹을 날씨는 아니었지만 천일우는 입에 문 빨대를 놓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낼 거란 내 생각과 달리 그는 사람을 앞에 두고 좀 멍해 보였다.

“저기, 저는 왜 부르셨어요?”
“나도 생각 중이야.”
“네?”
“정말 따라올 줄은 몰랐거든.”

그러니까 따라온 내가 바보였다. 거절할 거라 생각하며 던진 제안을 덥석 물다니. 내 호구력에 스스로 감탄하는 사이 천일우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아니?”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요. 언니도 제가 뭐 할 수 있는지 알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리카노는 벌써 반이 사라졌다.

“더 만나고 싶니?”
“많아요?”
“내가 아는 사람들만 열댓 명 정도.”

정부에서 시간 여행자를 찾는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천일우는 그런 일은 하는 사람일까?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어제 로비에서 할아버지 쓰러질 거 미리 알고 있었죠?”
“응.”
“오늘 608호 환자가 갑자기 사망할 것도요?”
“응.”
“어떻게요?”

천일우는 기어코 아메리카노를 끝장냈다. 얼음을 뒤섞는 그의 눈은 카페인을 과다 섭취했음에도 지독하게 피곤해 보였다.

“그게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이야. 사건을 미리 겪은 뒤 하루 단위로 되돌려서 더 나은 상황을 만드는 거지.”
“정부에서 그런 일도 해요?”
“아니. 이 일로 날 고용한 곳은 병원이야. 정부는 여행자들의 도움을 받아 시간을 연구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초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떤걸요? 얼마나 많이 연구했나요? 뭔가 알아낸 게 있어요?”
“시간 여행에 관한 모든 걸 연구하고, 20년 가까이 연구했지만, 지금껏 알아낸 건 딱 하나야.”

천일우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어떤 결과는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바뀌지 않아.”

심장도 속내도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천일우는 시간을 돌렸는지-버퍼링 걸린 동영상처럼 움직임이 미세하게 끊어져 보였다- 내 손에서 유자차를 빼앗았다. 하마터면 쏟아질 뻔한 유자차는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이건 안 바뀌잖아요.”
“어떤 결과는 그렇지. 만약 이걸 쏟아서 누가 죽었다면 우리가 손대지 않아도 쏟아질 거다.”

결국 그 소리다. 죽을 사람을 살리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내 얼굴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천일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너도 이미 알잖니.”
“몰라요.”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될 거야.”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말투였다. 시간 여행자라면 신체보다 정신적 나이가 훨씬 많겠지만 왠지 아니꼬웠다. 나는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같은 시간에 이리로 와. 그리고 요 앞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갈치구이가 맛있는 집이 있어.”

그놈의 맛집 리스트.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카페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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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아침 일찍 병원에 가자마자 승아에게 천일우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말은 안 했지만 오늘 만나러 가야 할지 말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승아는 하루 내내 가보라며 나를 설득했다.

“같은 시간 여행자니까 공통점이 많을 거 아니야. 평소 궁금했던 걸 물어봐. 대답해주지 않을까? 하다못해 내일은 뭘 먹을지 물어볼 수도 있고.”

맛집 추천만큼은 신뢰가 갔고-오늘 인생 갈치구이를 먹었다- 승아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조금 무거운 발걸음으로 카페로 향했다. 천일우는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를 들고 카페 앞에 서 있었다.

“따라와.”
“어디 가는데요?”
“공원.”
“왜요?”
“고양이 보러.”

벌써 해가 진 시각이라 고양이를 볼 수 있나 싶었지만 일우는 쉽게 고양이를 찾았다. 고양이는 우리를, 정확히는 일우를 보고 냥냥 울며 다가왔다. 그는 고양이를 몇 번 쓰다듬고는 상자에서 캔 사료를 꺼냈다.

“언제부터 이렇게 챙기셨어요?”
“월요일부터.”
“언니를 엄청 잘 따르네요. 키우실 생각은 없어요?”
“얘까지 돌볼 자신 없어.”

상자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과 두꺼운 담요도 들어있었다. 고양이가 배를 채우는 동안 일우는 상자를 비우고는 뚜껑을 덮어 단열재와 테이프로 둘둘 감기 시작했다. 미리 뚫어 놓은 입구로 담요를 쑤셔 넣자 공원에서 가장 인적 드물고 덜 추운 곳에 임시 고양이 집이 생겼다.

“이걸로 며칠은 얼어 죽지 않겠지?”
“그렇겠죠.”

수요일 밤은 고양이가 얼어 죽던 날이었다. 하지만 오늘 살아도 목요일엔 쥐약을 먹어 죽고, 금요일엔 차에 치인다. 몇 번을 구해도 고양이는 금요일을 넘기지 못했다. 아마 일우도 알 터였다.

“안 바뀐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고양이를 챙기는 거예요?”
“네가 살리고 싶어 하니까.”

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고양이 털이 잔뜩 붙은 바지는 쉽게 깨끗해지지 않았다.

“얘 살리려고 루프 만들었잖아, 너.”
“루프가 뭔데요.”
“네가 이번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계속 반복하는 일 같은 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반복하는 시간 여행 그 자체 말이야.”

역시 다 알고 접근한 거다. 일우의 목적은 나를 멈추는 거였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났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같은 시간 여행자면 다 알아요?”
“아니. 나는 특수한 경우야.”
“제가 루프를 그만두게 하려고 고양이를 살리려는 거예요?”
“반은 그래. 어제도 말했다시피 한번 결정된 죽음은 바뀌지 않아. 나는 네게 미련이 덜 남을 때까지 도울 생각이야.”
“제가 끝까지 버티면요? 안 돼도 계속 하면요?”
“그러면 내가 더는 어쩔 수 없게 되겠지.”

일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프의 결말은 두 가지야. 자의 또는 타의로 루프가 끊어지거나, 여행자가 루프에 영원히 갇히거나.”
“갇힌다고요?”
“루프에 갇힌 여행자는 시간에게 버려져.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지. 그렇게 되면 아무도 구할 수 없어.”

그제야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를 꼭 살려야 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

목요일에는 틈틈이 공원으로 가 고양이를 살폈다. 일우는 거의 온종일 공원에 있었는데 캔 사료와 간식을 잔뜩 챙겨서 고양이 배를 빵빵하게 불렸다. 뭐에 쥐약이 들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포만감에 만족한 고양이는 일찍부터 임시 집에 쏙 들어갔다. 근처에 간식을 잔뜩 숨기고 할 일이 없어진 나와 일우는 병원 카페로 갔다.

“연구소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어요?”
“안타깝게도 없어.”

몇 번이나 겪은 시간이었지만 금요일이 다가오니 초조해졌다. 루프의 시작점을 월요일로 정했기에 이번에도 실패하면 다시 월요일로 돌아가야 했다.

“언니는 루프된 시간을 전부 기억해요?”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이번 주는 분명 기억해. 너랑 만났으니까.”
“언니 말고 다른 여행자 중엔 특수한 경우가 없어요?”
“내가 알기론 그래.”

일우는 고민하다가 잘 보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위화감이 점점 커졌다. 아무리 시간 여행자라도 사람이 저렇게까지 정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맙소사.”

나는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지금 자기 시간을 멈춘 거예요?”
“‘지금’한 건 아니야.”
“그러면…….”
“20년쯤 됐어.”

입이 절로 벌어졌다. 20년이라니, 내 평생보다 긴 시간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닐텐데.”
“그래서 특수한 경우인 거야.”

일우는 조금이나마 위화감을 죽이려고 복잡한 무늬의 셔츠를 입는다고 했다. 나는 떠오르는 질문을 모조리 꺼냈다.

“그 상태로도 시간 여행이 가능해요?”
“물론이지. 처음에만 힘들고 10년쯤 지나니까 익숙해지더라.”
“신체 활동은요? 심장은 뛰어요?”
“완전히 정지한 건 아니라서 뛰어. 20년 전 어느 하루를 육체만 반복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다른 사람의 시간도 정지할 수 있어요?”
“아니.”

일우는 손을 들어 내 질문을 멈추었다. 나는 연구소의 존재를 알았을 때보다 훨씬 흥분한 상태였다.

“하는 법 가르쳐 주시면 루프 끊을게요.”

그러나 일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발요. 진짜 약속해요. 알려주시면 뭐든 할게요.”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해도 일우는 요지부동이었다.

“네가 쓰려고 해도 안 가르쳐 줄 거지만, 다른 사람한테 쓸 생각이잖아. 네게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니야.”
“그럼 제게 필요한 게 뭔데요? 죽음을 이기려면 뭐가 필요하냐고요.”
“죽음은 이겨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깨달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바꿀 수 없는 걸 바꾸는 법’이 아니라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야.”

그럴 수 있다면 루프를 만들지도 않았다. 도저히 포기가 안 되는데 어쩌란 말인가. 나에게는 깨달음이 아니라 확신이 필요했다. 고양이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 승아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나는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금요일이 되고, 고양이는 차에 치이지 않았다. 그저 자기 집에 누워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월요일로 돌아가면서 나는 일우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양이는 두 번 쥐약을 먹고, 한 번 차에 치였으며, 세 번 내 품에서 죽었다. 그냥 잠드는 것처럼 눈을 감더니 서서히 차가워지는 것이다. 보기 힘들었지만 승아를 위해 참았다. 노력하면 언젠가 결실을 맺을 거라고 믿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니까.”

승아가 슬프게 속삭였다. 나는 작게 웃으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한 번도 끝까지 읽은 적 없는 책이었다.

“일주일 정도는 괜찮아. 알잖아. 우리 엄마-”
“아니야. 안 괜찮아.”

내 말을 자른 승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발작인가 싶어 호출벨을 누르려는데 승아가 내 손을 붙잡았다. 차갑고 마른 손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약했으나 뿌리칠 수 없었다.

“네가 뭘 하는지 알아. 시간 돌리고 있지? 계속 무리해서 시간을 반복하고 있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너를 모르니? 시간 여행을 몰라도 너를 모르겠니? 네 얼굴 보자마자 다 알았어.”
“승아야, 잠깐만.”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거야? 이번 주를 몇 번이나 반복했어?”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난 그냥 좀 피곤한 것뿐이야.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 보다. 괜찮아. 정 걱정되면 나중에 진료라도 받아볼게. 여기 병원이잖아.”

애써 웃어도 승아는 도통 물러서질 않았다. 쇠약한 얼굴에 어느 때보다 단단한 표정이 씌워졌다.

“도망가지 마.”

승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가 상하니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뒤이어 나올 말이 두려웠으나 멈출 수 없었다.

“더는 도망가지 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너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아니야. 괜찮아. 포기하지 않아.”
“포기하라는 게 아니야. 놓아주라는 거야. 너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해. 내가 각오한 것처럼.”

먼저 눈물을 터뜨린 건 승아였다. 나는 내게 매달려 우는 승아를 달래지도 못했다. 울음소리를 듣고 같은 병실 환자와 보호자가 기웃거리다, 간호사 선생님까지 달려왔다. 나는 입도 벙긋 못하고 도망쳤다.

언제로 도망가지? 생각 뒤에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도망가지 마. 루프를 유지하려면 멀리는 안 된다. 오늘 아침이 좋을까? 도망가지 마. 다시 한번 시도해도 승아가 눈치챌까? 언제부터 안 거지? 도망가지 마!

내 도망은 8층 병실 앞에서 멈추었다. 문에 달리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니 눈에 익은 화려한 셔츠가 보였다.

일우는 침대에 누운 환자의 손을 꼭 잡았다. 침대 근처에 잔뜩 붙은 기계나 개인 물품이 가득한 수납장을 보니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어쩌면 20년 정도 됐을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일우는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눈이 창문 너머 나를 보고 조금 커졌다. 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네가 날 찾아올 줄은 몰랐어.”

일우는 이미 나와 승아의 일을 알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지만 조금 화도 났다.

“경고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어. 속상했다면 미안하다.”

불합리한 화풀이에도 사과하는 모습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우는 나를 자기 사무실로 데려갔다. 이곳은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겪고, 돌리고, 떠나보내야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끝없이 시간을 물고 늘어지다가 들키고, 화풀이하고, 소파에 엎드려 우는 것뿐이었다.

실패해서 우는 건 아니었다. 이미 지겹도록 울었으니까. 승아가 내 노력을 몰라주는 것 같아 조금 서럽긴 했다. 그래도 제일 힘든 사람은 승아였다.

그냥 힘들어서 눈물이 나왔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나 혼자 해야 하는 일이고, 결국 이렇게 끝나게 되어버려서 울었다.

머리가 띵할 때까지 울고 나니 배가 고팠다. 이런 내가 한심해서 다시 머리를 뜯자 일우가 이거나 먹으라며 김밥을 쥐여 주었다. 김밥이 맛있는 게 또 서러워서 울었다.

“맛있어?”
“……네.”
“천천히 먹어.”

따뜻한 장국을 내 앞으로 밀어주는 손을 보며, 그 손이 잡고 있던 다른 손을 생각했다. 일우처럼 시간이 멈춘 손. 그는 얼마나 많이 그 손을 잡았을까.

“언니는 왜 20년이나 시간을 멈춘 거예요?”
“약속 때문에. 이렇게 오래 멈출 줄은 몰랐지만.”

8층 환자의 이름은 천진애였다. 20년 전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진 일우의 동생. 일우도 그를 위해 루프를 만들었었다.

“이상하지. 수십, 수백 번 돌리면 여행자가 아니어도 뭔가 알 수 있나 봐. 진애도 나를 뜯어말리더라고. 나도 그제서야 그만두었어. 대신 깨어날 때까지 이 모습 그대로 기다릴 테니 빨리 일어나라고 했지.”

약속을 더럽게 안 지키는 동생이라며 일우는 속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아는 후배랑 시간 연구를 시작했어. 지금은 옛날보다 규모도 커지고 지원도 많이 받지만 여전히 소득은 없지. 시간을 관측조차 할 수 없으니까. 여행자조차 시간 여행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지 설명 못 하는데 어쩌겠니. 다들 우리 세대에선 불가능할 거라고 결론 내렸어.”
“그런데도 계속 연구를 해요? 결과를 볼 수 없는데도?”
“시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끝을 보는 사람이 있는 거지. 끝없는 과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일우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지금은 그걸 생각해야 하는 때라면서. 나는 일단 병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세수를 했지만 퉁퉁 부은 눈은 영 가라앉지 않았다. 승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간을 돌리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최고의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승아를 즐겁게 하고, 일우와 맛집 탐험도 가고, 고양이를 돌보았다. 모든 시간을 승아와 함께할 수 없는 게 슬펐지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주면 승아는 날 듯이 기뻐했다. 그 모습이 나에겐 보상이었다.

그래도 마음에 가시가 박힌 듯 따가울 땐 일우에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데 시간을 돌릴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능력은 결국 아무 소용 없지 않나요?”
“너는 수십 번 시간을 돌렸지만 다 다르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니? 그 모든 시간 중에서 지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고. 상황은 바뀌지 않아도 너와 나는 바뀌었지.”

나는 일우의 깊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보이는 나이보다 현숙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다정하게 반짝였다.

“즐거운 순간을 잡아둘 수는 없지만, 괴로운 순간도 마냥 머무르진 않아. 전부 흘러가지. 우리는 그 흐름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야. 순간과 흐름을 알고,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 시간을 되돌려도 바꾸지 못한다면, 흘러가는 모든 시간을 사랑하는 건 어떨까?”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금요일, 고양이는 내 품에서 눈을 감았다. 일우와 나는 미리 봐둔 자리에 고양이를 묻었다.

“편안하게 눈 감았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우리가 고양이 생각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병원으로 가는 내내 월요일에 가져온 책을 생각했다. 아직 승아는 책갈피에 다다르지 못했다. 덕분에 나도 결말을 알지 못한다. 그걸 놀리니 이번 달 안에 다 읽겠다고 선포했지.

내일은 같이 책을 읽어야겠다. 그러다 승아가 잠들면 책 속 문장보다 더 다정하고 고운 말을 속삭일 것이다.

어두운 병실로 들어가 가장 사랑하는 침대를 찾았다. 커튼을 열고 들어가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워있다. 그 옆에 앉아 손을 찾아 조심스럽게 잡았다. 마르고 작은 손은 따뜻했다.

곧 손을 마주 잡으며 승아가 눈을 떴다. 승아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나도 미소로 답했다.

잡아둘 수 없는 순간이 우리 곁에 오래도록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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