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렇게나 큰 여자

2019.03.06 21:1203.06

그렇게나 큰 여자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고 여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여자는 언제나 1분정도 격정적으로 울리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알람으로 쓰는 음악은 초반 조용하고 단순한 멜로디가 연속되다가 중반에서 격정적으로 변했다. 갑자기. 여자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초반의 조용하고 단순한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짧은 찰나에 한줌의 잠을 더 청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 한줌의 잠. 손가락사이로 새어나가는 고운 모래 같이 의미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었다. 여자는 실제로 그 시간동안 잠을 더 자는 것이었고 그 사실이 여자를 만족시켰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 음악에 익숙해지면서 그 안위의 시간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알람으로 쓰는 음악을 바꾸기 위해 이런 저런 음악들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음악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여자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과 기분으로 ''하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걷어내고 단숨에 상반신을 일으켰다. 며칠간 계속된 겨울 폭우로 눅눅해진 이불은 만질 때마다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서 해가 나야할텐데.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알람을 끄기 위해 핸드폰을 조작하다 멈칫했다. 요새 들어 핸드폰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것이 단순히 기분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여자는 알람을 끄고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휴대폰이 작아졌어요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다가 피식 웃고는 이내 핸드폰을 베게로 던지고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침대를 벗어나 바닥에 요가매트를 깔고 그 위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언제나 몸은 부드럽게 받쳐주던 요가매트는 간신히 그녀의 등을 받쳐주고 있었다. 이것 역시 요 며칠사이 계속해서 느껴오던 것이었다.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나 화장대로 향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전신을 비춰주던 화장대의 거울은 이제 여자의 이마 위를 잘라내고 있었다. 여자는 불안한 기분이 들어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의 슬리퍼에 발을 구겨 넣다시피 하고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 여자는 화장실의 슬리퍼가 본인의 사이즈보다 한 치수 큰 걸 산거라는 것을 계속해서 기억해냈지만 애써 머릿속에서 그 사실을 지우며 샤워에만 열중했다. 화장실의 거울로 보이는 자기의 모습에 이유 모를 섬찟함을 느꼈지만 온수가 뿜어내는 김이 이내 거울을 가려주었다.

 

출근했을 때 사물함에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는 것을 보고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재미없는 장난이군. 항상 입던 블라우스는 여자의 팔을 완전히 가려주지 못했다. 짧아진 블라우스 밑으로 배꼽이 살짝 드러났다. 도대체 어떻게 세탁을 했길래. 여자는 다시 한 번 그러면 모든 일이 잘 되기라도 할 거라는 듯이 몸에 있는 힘을 얼굴에 집중해 인상을 찌푸렸다.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오늘 할 일. 새 블라우스 구입.'이라고 적고 수첩을 닫았다가 다시 수첩을 열어 '세탁소에 항의할 것.'이라는 문구를 더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마칠 때 즈음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여자는 수첩과 펜을 넣고 있는 힘껏 블라우스를 내려 입은 다음 최대한 치마를 추켜올렸다. 무릎 밑까지 가려주던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왔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물함의 문을 닫았을 때 이름이 더 연해져 있었다. 여자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황급히 도망치듯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걸을 때마다 구두가 발뒤꿈치의 살점을 벗겨내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가 일하는 레스토랑은 금요일이 되면 유난히 음악을 크게 틀었다. 손님들이 많기도 했고, 손님들이 많은 만큼 레스토랑의 격조에 어울리지 않는 소음들이 레스토랑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었다. 레스토랑의 사장은 최근 수입을 올리기 위해 테이블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수를 늘렸다. 덕분에 서빙을 하는 직원들은 테이블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쳐야했다. 여자는 그 곡예를 볼 때마다 오랜 전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존재하는 파티, 정장과 예의 그리고 공손함이 간신히 난장판을 숨기고 있는 곳. 홀 매니저인 여자는 바삐 주문을 체크하고 서빙하는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세 명의 손님이 들어와 스프와 파스타를 주문하자 주문을 받은 직원이 동료직원을 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서빙하기 힘들다는 표시였다. 여자는 그 직원을 보며 표정으로 주의를 주었지만 직원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따라가서 말로 주의를 주려던 찰나 시끄러운 소리가 홀을 메웠다. 구석 쪽에 있는 테이블주위로 접시가 떨어져 있었고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며 사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그 테이블로 빠르게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다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테이블에는 노년의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있었다. 그들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직원을 달래고 있었다.

 

"아이고 괜찮아요? 내가 의자를 움직이는 바람에 아가씨가 부딪혀 실수를 한 모양이구려."

 

손님 중 남자가 직원을 위로하고 있었고 여자가 손수건을 꺼내 직원의 옷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거 괜히 젊은 아가씨가 야단맞는 거 아닌 가 몰라요. 우리는 괜찮으니 천천히 주면 되요."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주일치 식대를 한 끼에 써버리는 이 곳 손님들은 재력의 정도에 상관없이 완벽한 서비스를 원했다. 실수에 대한 관용이나 이해, 용서는 식사의 가격과 반비례했고 이곳의 가격은 그런 것들을 완전히 차단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착한 손님들에게 실수한 것은 레스토랑이나 여자나 직원이 금요일의 레스토랑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금방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매니저님."

 

손님의 호의로 마음이 안정된 직원이 무전기로 여자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직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얘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나는 바로 옆에 있는데?

 

"아 이렇게 바쁘니 매니저도 바쁘겠지요. 천천히 해요. 천천히."

 

남자손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자가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한 발짝만 움직이면 서로 부딪힐 거리에 내가 있는데?

 

"일단 치워드리고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여자의 대답을 듣지 못한 직원이 서둘러 접시를 정리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여자가 무전기로 직원을 불렀다.

 

"은주씨. 대답하세요."

 

몇 번을 불렀지만 직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당황한 상태로 직원의 어깨를 잡았다.

 

"은주씨!"

 

직원이 깜짝 놀라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머리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 매니저님. 계속 연락드렸었는데,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내가 이 아가씨가 오는 걸 못보고 의자를 움직이다가 이 아가씨가 거기에 부딪힌 거예요."

 

남자손님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여자는 멍하게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손님들에게 사과를 하고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원과 함께 접시를 치우고 테이블 주변을 청소했다. 야단을 맞지 않자 직원은 신이 나 보였다.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과 서비스가 나가고 한참이 지나도 여자는 그 상황이 너무 불쾌하고 의아했지만 이내 잊으려 애썼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그랬겠지. 금요일의 레스토랑이 문을 닫고 여자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갔을 때 사물함의 이름은 훨씬 더 연해져 있었다. 여자는 이름표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펜을 꺼내 거칠게 자기의 이름을 써넣었다. 펜을 꾹꾹 눌러가며 몇 번이나 계속해서. 결국엔 펜의 심이 빠지고 몸통이 부서질 때까지.

 

여자는 남자친구와의 약속장소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남자친구는 몇 번이나 여자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짜증이 솟구친 여자는 전화를 끊어버리려 했지만, 왠지 남자친구를 만나면 아침부터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일들이 사라질 것 같아 화를 참고 남자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이미 시간은 새벽이었다. 통화할 때의 짜증은 언제였냐는 듯 여자는 남자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차의 푹신한 조수석에 앉아 선잠을 자며 집으로 향할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끔찍한 금요일의 레스토랑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남자친구가 설명해 준 카페를 찾지 못해 헤매면서도 여자는 오늘의 약속이, 남자친구의 유쾌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따뜻한 커피를 마신 후,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잠들 수 있는 행복이 다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다시 길을 묻기 위해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간신히 찾아낸 카페는 어두운 조명 아래 작은 테이블이 몇 개 있는 아담한 곳이었다. 남자친구는 한쪽 구석에 앉아있었다. 그는 여자가 지난 생일에 선물한 코트를 입고 있고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기에 여자의 마음에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여자는 조심스레 남자친구에게 다가가,

 

내가 많이 늦었지?”

 

라는 인사를 건넸다. 여자는 늦지 않았다. 애당초 약속 시간을 정해놓고 만나는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만나는 장소가 남자친구의 회사 근처였기 때문에 남자친구의 기다림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친구의 심각한 표정에서 하루 동안 반복된 이상한 일들과 느낌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을 걸었던 것이다. 여자의 말을 들은 남자친구는

 

!”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당혹감과 의아함이 혼재되더니 잠시 후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새 내가 좀 이상해. 누구랑 약속했는지 까먹고 있었지 뭐야.”

 

남자친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으며 그건 자기 때문에 아니라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나저나 좋아하는 게 있었지? 뭐였지?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네.”

 

여자가 좋아하는 커피나 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여자는 무언가를 마신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입술이 마르기전에는 물도 마시지 않았고, 커피나 차는 단지 그 가게의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대가로 당연히 지불해야 되는 가격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항상 가장 싼 메뉴를 주문했다. 남자친구의 말을 들은 여자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싼 음료를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이것도 반 이상 남기겠군. 여자는 음료를 받아들고 다시 남자친구에게로 돌아왔다. 남자친구는 다시 핸드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자는 슬쩍 남자친구의 핸드폰을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조용히 남자친구를 불렀다. 남자친구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 미안. 여기에 정신이 팔려서.”

 

남자친구가 핸드폰을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여자는 이해한다는 의미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친구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학교를 함께 다닌 거지? 아 이런, 당연히 초등학교나 대학이려나? 중학교 고등학교는 남자들만 있었으니.”

 

남자친구의 말을 들은 여자는 말없이 카페에서 허락된 시간을 한 모금 들이켰다. 둘은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다. 남자친구의 지인의 소개로 만났고 사귄지 2년이 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자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뭐라고? 농담이야?”

 

라고 말했다. 그 말은 들은 여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자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테이블 사이가 지나치게 좁은 빌어먹을 레스토랑도, 자기를 앞에 두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친구의 행동도, 사물함에 이름표를 지워놓은 장난도 그 모든 것이 다. 여자는 남자친구에게 소리를 질렀다. 남자친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이 여자의 역정을 받았다. 여자는 그동안 둘이 함께 한 일상들을 보여주기 위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다가 핸드폰이 여자의 손 안에 쏙 들어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자의 핸드폰은 시중에서 나온 핸드폰 중에서도 남지친구가 왜 노트북으로 전화를 거냐고 놀리곤 했을 정도로 가장 큰 사이즈의 모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자의 손 안에 완벽하게 들어와 있었다. 여자는 당황하며 핸드폰을 켰다. 아마도 레스토랑에서 다른 사람 것과 바뀐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게 맞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나 핸드폰은 여자의 것이었다. 바탕화면과 설치된 어플리케이션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자는 현기증을 느끼며 핸드폰을 넣고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던 가방은 겨드랑이에 간신히 끼어있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카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카페 안에 있던 몇몇의 손님들은 여자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아무도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여자의 뒤꿈치를 공격하던 구두가 기어이 여자의 살점을 벗겨놓는 데 성공했는지, 양쪽 발뒤꿈치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밖으로 나간 여자는 고개를 돌려 카페 안의 남자친구를 바라보았다. 남자친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핸드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자는 머리를 감싸고 대로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금요일 밤 번화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중 여자의 비명에 관심을 보이며 돌아보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 여자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한 것을 보고 여자는 전력으로 달려 버스에 올랐다. 발뒤꿈치에서 피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는 버스비를 결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여자는 카드리더기 쪽으로 가서 버스 기사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버스카드를 읽혔지만 카드리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여자는 버스 기사를 연신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는 결국 버스비 결제를 포기하고 뒷자리로 이동했다. 언제나 잡기 위해 팔을 쭉 뻗어야했던 버스 손잡이는 이제 여자의 귀 바로 옆에 있었다. 여자는 버스 창문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토요일. 여자는 늦잠에서 깨어났다. 몸에서는 약간의 열기가 느껴졌고 자신의 팔과 다리가 침대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싱글침대. 아담한 그녀의 몸을 뉘이고도 뒤척일만한 충분한 공간을 제공해 주던 침대.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몸통만 간신히 눕히고 받치고 있을 뿐이었다. 길어진 팔과 다리는 침대 밖으로 뻗쳐 있었다. 여자는 침대에서 구르듯이 내려와 몸을 일으키다 천정에 머리를 박았다. 여자는 자신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런 저런 옷을 걸쳐보던 여자는 단 하나의 옷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레스토랑으로 병가를 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에게 자신이 누군지 한참을 설명해야했다. 나는 그 레스토랑에서 10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물함까지 10년째 같은 걸 쓰고 있으며, 어젯밤에 우리는 금요일 밤의 전쟁을 함께 치러냈죠. 아니 그쪽이 입사한 지 4년째니까 4년째 함께 치러내고 있는 중이죠. 여자가 비난조로 내뱉는 속사포 같은 말에 당황하던 직원은 20분여 지나서야 여자가 누군지 알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 병가처리를 하겠다고 말했다.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10년째 일하고 있는 직장에 자신이 누군지 설명하는 데 20분이 걸리고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인 토요일에 병가를 내는 데 30초가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전화를 마친 여자는 다시 한 번 전화기를 손으로 꼭 쥐었다. 이제 전화기는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가 되었다. 여자는 닥치는 대로 자신의 증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결국 병원을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여자는 어제부터 일어났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커지는 것과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점점 잊어가는 일과의 관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어떻게 이 넓고 넓은 우주라는 공간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물리적 공간이 넓어질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좁아지고 있는지 아무런 결론도 얻어내지 못했다. 여자는 입을 수 있는 옷을 찾아내기 위해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간신히 남자친구가 놓고 간 몇 벌의 옷들 중 입을 수 있을 만한 옷들을 찾아내고 입으려는 순간, 여자는 자신의 손과 발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이나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아닌 실제로 여자의 선명한 시야, 그 바로 앞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무언가 희미해지는 것이 이토록 선명하게 보일 수가 있을까? 여자는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얼기설기 옷을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자가 잠든 사이 며칠간의 폭우는 잠잠해지고 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불면서 해가 쨍하게 떠 있었다. 점점 커지고 있는 여자는 목 아래로는 매서운 바람을 느끼고 얼굴과 머리로는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갔다. 대충 구겨 신은 바람에 운동화 밖으로 휑하니 드러난 발뒤꿈치가 연신 아스팔트 바닥을 스치고 밟아 통증을 느낄 때마다 여자는 발을 최대한 운동화안쪽까지 찔러 넣었지만 커지고 희미해져가는 발이 들어가기에는 운동화가 너무 작았다. 여자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고개를 숙이고 버스를 기다렸다. 간혹, 아주 간혹 어떤 사람들이 여자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자신이 왜 놀랐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는 한 올의 머리카락도 잃을 수 없다는 듯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너무 세게 움켜쥐는 바람에 몇 올의 머리카락이 빠지고, 빠진 머리카락들은 여자의 손안에서 사라졌다. 버스가 오자마자 여자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버스에 올랐다. 여자에게 밀쳐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왜 밀었냐며 싸움이 붙었다. 버스 기사가 그만하고 빨리 타라고 화를 냈다. 그 광경을 보던 여자가 그들에게 다가가

 

내가 밀었어! 내가 그랬다고!”

 

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싸우던 사람도, 그것을 말리던 사람도, 그리고 화를 내던 버스 기사도 그 누구도 여자를 보지 않았다.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빈 좌석으로 향했다. 너무 낮은 버스의 천청 때문에 끝에 있는 좌석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허리가 아파왔다. 여자는 좌석에 맨 끝, 맨 오른쪽 좌석에 앉았지만 그래도 천정이 낮아 허리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통에 시달리던 여자는 결국 창문을 열고 상체를 밖으로 내밀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희미해져가는 여자의 머리를 헝클어놓고 피부를 창백하게 만들었다. 아직 막히지 않는 도로를 차들이 마구 달리고 있었다. 어떤 차들은 여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고 어떤 차들은 여자의 턱밑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경적을 울리는 차는 없었다. 여자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투덜거리며 창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여자와 몸을 부딪히자 사과를 했다. 잠시 후 남자는 다시 창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의 몸에 걸려 창문이 꽉 닫히지 않자, 남자는 버스 기사에게 이렇게 추운데 고장 난 창문을 단 버스를 운행하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했다. 버스 기사는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느냐며 응수했다. 여자는 버스 기사의 말을 듣고 창밖으로 내밀었던 상반신을 다시 버스 안으로 집어넣어 기대에 찬 눈으로 버스 기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버스 기사가 고개를 흔들며 자기가 잘못 본 것 같다며 다시 한 번 세게 닫아보라고 말했다. 남자는 창문을 아주 세게 닫았고, 창문은 탕 소리를 내며 닫혔다. 옆자리의 남자가 창문을 닫더니 자리를 여자 쪽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다 여자와 부딪히고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미처 보지 못했다고. 여자는 다시 창문을 열어 몸을 밖으로 내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는 점점 커지면서 사라지고 있는 자신의 몸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여자가 향한 곳은 고향집이었다. 아마도 엄마라면 나를 기억해 줄 테지. 나를 알아봐 줄 테지. 여자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향집으로 뛰어갔다. 몇 번 신발이 벗겨지자 나중에는 신발을 벗어버렸다. 대충 걸치고 나온 남자친구의 코트가 여자의 점점 커지는 몸을 감당하지 못하고 걸리적거리자 코트도 벗어버렸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 고향집으로 향하는 동안 여자는 그녀의 정신을 옥죄고 있던 과거의 몸이라는 것에서 점점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맨발로 달려가던 중에 돌을 밟았지만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길거리에 흔하게 구르는 돌마저 여자를 외면하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부지런히 고향집으로 향했다. 이윽고 고향집에 다다랐을 때 여자는 충격을 받았다. 고향집에는 멀리에서 사는 오빠가 어머니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여자는 오늘이 엄마의 생일이라는 것과 자신은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안감에 커다란 손으로 커다란 얼굴을 감싸고 고향집 대문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빨리 해가 저물었고 밤이 찾아왔다. 그런 계절이었다. 해는 평소의 노동에 3분의 2만 수행하면 되었으며, 해가 외면한 시간만큼 달과 별들이 노동시간이 길어졌다. 밤바람이 여자의 몸을 통과하며 세상을 차갑게 만들 동안, 여자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그나마 위태롭게 여자의 몸을 가려주던 옷들을 모조리 빼앗아간 것도 모른 체. 여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물은 얼굴에서 얼어붙어 있었고 머리를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는 얼굴만이라도 남아 있을 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대문을 성큼 넘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두발걸음이면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어렸을 때는 뛰어놀기에도 넉넉했던 마당을 순식간에 지나 문을 열었다. 녹슨 경첩에서 끼익하는 소리와 아귀가 맞지 않는 모서리가 철컹하는 소리를 내었다. 집안은 온기와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엄마와 오빠는 이야기꽃을 피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여자는 생각했다. 원래 엄마와 오빠가 저리 친한 사이였던가? 여자의 기억이 맞는다면 오빠는 엄마를 거의 경멸하다시피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빠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아빠는 오빠가 군대에 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 힘든 그저 불행한 일일뿐이었지만, 오빠의 죄책감은 희생자를,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때 여자는 너무 어렸다. 오빠는 조금이라도 덜 비겁해지기 위해, 그러면서 참으로 비겁하게도 그 책임을 지워도 도망칠 수 없는 사람을 찾았고, 그것이 엄마였다. 아빠가 죽고 20여 년 동안 여자는 오빠가 엄마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모습을, 엄마가 오빠를 차마 원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며 슬퍼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오빠는 간다는 말도 없이 커다란 가방에 옷가지를 쑤셔 넣고는 집을 떠났다. 보란 듯이 아빠의 생전 얼굴이 담긴 액자를 옆구리에 낀 채였다. 사진 속의 아빠는 마지못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해 여보. 근데 뭐 어쩌겠어? 그럴 때마다 아빠의 모습은 저열해 보였지만 그것은 여자의 상상일 뿐이었다. 여자는 오빠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엄마를 한심해하지도 않았다. 단지 절대로 저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절대 저렇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여자가 레스토랑을 직장으로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도망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은 마치 다른 집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였다. 엄마와 오빠는 그렇게 친밀해 보일 수 없었다. 집을 떠난 후 엄마의 생일에 무미건조한 축하인사조차 보내지 않았던 오빠가 꽃다발과 케이크와 선물을 엄마에게 한아름 안겨주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이 함박웃음으로 가득 했다. 둘은 서로 맥주잔을 마주 하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가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여자는 둘의 모습이 지금 서서히 커지고 사라져가는 자신의 모습보다 더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귀를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예전이었다면 한걸음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움찔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만 다가갔다.

 

"죄송해요. 아내와 애들은 이번에 못 왔어요. 기말고사 기간이라. 방학하면 꼭 데리고 올게요."

 

"아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 늙은이 생일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저 건강하게만 있으면 다 되는 거지."

 

"그나저나 혼자 지내기 쓸쓸하거나 무섭지 않으세요? 웬만하면 저희 근처로 오시지."

 

"뭔 소리냐? 내가 이 동네, 이 집에서만 40년을 넘게 살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내 친구잖아. 요 앞 슈퍼 아저씨 얼굴에 난 점이 몇 개인지도 알고 있는데. 쓸쓸할 건 또 뭐야? 이 동네 돌부리 하나까지 다 알고 있는데 무서울 건 또 뭐가 있고?"

 

"그러세요? 저는 아직도 저 방이 무서워요. 이 나이 먹고도 그렇다니까요."

 

"? 저 빈 방 말이냐?"

 

". 어릴 때 이 집이 가장 싫었던 게 그거에요. 꼭 저 방 앞을 지나야만 화장실을 갈 수 있으니까요. 화장실 가는 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무서운 뭔가가 쾅!하고 나타나는 꿈을 한두 번 꾼 게 아니에요."

 

"그랬지. 그런데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다. 왜 저 방을 저렇게 오랫동안 비워놨을까? 지금이야 늙어서 못한다지만 너 어릴 때는 하숙을 줘도 됐을 텐데."

 

여자는 어머니와 남자가 말하는 방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방은 여자의 방이였다. 여자는 처음 자기 방을 가지게 되었을 때를 기억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 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그 수많은 밤들을 기억했다. 감기에 걸렸을 때 머리에 젖은 수건을 얹어주기 위해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오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했다. 여자는 그 방의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여자가 밖을 내다보며 즐거운 공상을 펼치게 해주었던 창문은 판자로 가려져 있었다. 그 판자만이 그 방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여자는 보이지 않는 손을 뻗고 더듬으며 그 판자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여자는 손길은 단단히 못 박힌 판자를 떼어낼 만큼 강하지 않았다. 판자는 견고했고 여자는 약했다. 여자는 다시 몸을 구겨 넣다시피 접어 엄마와 오빠 곁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이고. 딸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요. 저도 항상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너네 아버지는 왜 그렇게 꽉 막혔는지 너 태어나니까, '애는 이제 그만!'이라고 선언하지 않았겠니. 나는 술 취해서 하는 농담인 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 날 엉기적거리면서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꿰맸어.' 그러더라."

 

"하하! 아버지 답네요."

 

여자는 눈을 부릅뜨고 어머니와 오빠에게 점점 사라져가는 그 큰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 질렀다. 당신은 딸을 가지고 있다고, 당신은 동생을 가지고 있다고, 오빠가 당신 생일을 무시할 때 매번 와서 축하해주고 위로해주던 게 바로 나라고, 여기에서 그 먼 거리를 달려가 당신네 부부 놀러 갈 때 조카들을 봐준 게 나였다고, 오빠에게 무시당하고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소주잔을 기울일 때 술 친구가 되어준 게 바로 나였다고, 당신 부인을 소개시켜 준 게 바로 나였다고, 이 빌어먹을 오빠가 말도 없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려했을 때 당신을 대신해 싸워준 게 나였다고, 당신이 뻔뻔스럽게 어머니 생신이라고 찾아와서 시시덕거릴 수 있게 둘의 사이를 위태롭게 지탱해준 것이 바로 나였다고, 당신의 딸이고 당신의 동생이라고. 내 방에 있는 물건들을 어디로 치웠냐! 내 추억을 어디로 버렸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어디로 불살라 없어버린 거냐! 아무도 모른다 하더라도 당신들은 알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나는 점점 커지고 사라지고 있으며 이제 당신들이 빛바랜 사진 몇 장으로 나를 추억하려고 해도 몇 분 뒤면, 단 몇 분 뒤면 그 빛바랜 사진마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여자는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이대로 소리 지르다 죽어버렸으면.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엄마와 오빠가 여자의 시야에서 퇴장했다. 서로 다정해 보이는 인사를 남기면서. 오빠는 화장실을 가다 여자의 방을 흘깃 보더니 문을 한번 쿵하고 찼다. 그 모습을 보던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의 웃음에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내려놓은 듯 행복한 술기운을 느꼈을 때 여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여자는 굳이 허리를 펴지 않아도 5층짜리 아파트를 눈 밑에 둘 수 있을 만큼 커지고서야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주변 사물들을 보면서 여자는 자신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여자가 그렇게나 커지는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여자를 잊었다. 그 많은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자연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과거와 미래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를 자각하는 와중에 오직 여자만을 자각하지 못하는 지옥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매일 뜨고 지는 해를 보며 어서 빨리 생각이라는 것을 못하게 되길,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길 바라고 또 바랬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여자는 어느 순간 혹시나 지나가던 사람을 밟을까봐 조심하던 것을 멈추었다. 여자는 그들을 밟을 수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세 들어 살던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사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한 것도 알게 되었다. 레스토랑의 테이블수가 줄고 테이블마다의 간격이 늘어난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은 치렁치렁 길어져버린 걸레 같은 머리를 하고 퀭한 눈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여자는 가끔 아무런 목적지 없이 걷다가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혹시 방금 내 어깨에 부딪힌 것이 나처럼 커지고 사라져버린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 일이 처음 일어났을 때, 여자는 이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상실한 뒤였다. 여자는 오직 자신만의 생각 안에 구속당한 크고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형벌인지, 왜 하필 자기가 그 형벌을 받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불현듯 자신이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하던 곳에서 정말로 도망쳤음을, 무엇보다 지금의 상태를 가장 원하던 것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매정한 깨달음을 얻은 여자는 세상을 떠돌았다. 여자는 아마도 영원히 그렇게 떠돌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만이 여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알던 사람들은 가끔씩 창밖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퀭하고 커다란 눈, 잠결에 코와 머리를 간지럽히는 지저분하고 얇은 머리카락절망과 실의에 빠진 표정으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애처로운 표정원망과 분노에 차 홱 돌아설 때 생긴 쌀쌀한 바람, 어두운 밤 긴 팔과 다리를 허우적대면 걸어가고 있는 모습 같은 것으로 그녀의 존재를 아주 가끔씩 느끼긴 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렇게나 큰 여자를 알지 못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19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02.26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2490 단편 목숨줄 좀 주시겠어요 차원의소녀 20시간 전 0
2489 단편 트리거 (trigger) 후안 2019.03.21 0
2488 단편 시간을 접으며 김성호 2019.03.16 0
2487 단편 나홀로 바젤 2019.03.11 0
2486 단편 상인의 딸 바젤 2019.03.11 0
단편 그렇게나 큰 여자 윤상민 2019.03.06 1
2484 단편 치킨게임 후안 2019.03.06 0
2483 단편 네 이름을 말하라 노말시티 2019.03.05 0
2482 단편 백일몽 (1~20) yohjison 2019.03.01 0
2481 단편 보고 있다 Insanebane 2019.02.28 0
2480 단편 적송의 서재 윤상민 2019.02.26 2
2479 단편 C 김성호 2019.02.26 0
2478 단편 쓰레기 줍는 남자 김성호 2019.02.26 0
2477 단편 차별금지법 김성호 2019.02.26 0
2476 단편 야간 경비원 윤상민 2019.02.26 2
2475 단편 내비게이션 키스 이회시 2019.02.25 3
2474 단편 소설가의 소설가의 소설가의 문그린 2019.02.25 0
2473 단편 적멸(寂滅)의 경계에서 우르술라 2019.02.24 0
2472 단편 껍데기의 기만 yohjison 2019.02.23 0
2471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수평으로 무한해야 한다  yohjison 2019.02.23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5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