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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백일몽 (1~20)

2019.03.01 17:1903.01

1. 1夢

눈이 와 있다.
테라스에 얇게 치즈 발린 듯하다.
그보다는, 그리 질퍽하진 않으니…
밀가루가 뿌려진 듯하다.
아니다, 좀 더 사각사각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설탕가루가 뿌려진 듯하다.
얼었다 녹아 유지방이 날아간 아이스크림 바닥 같다.

밟을 수가 없었다.
날릴 만큼 잘 갈린, 무수한 땀방울이 흘린 솜사탕을 그저 무심코 망칠 수는 없었다.
떨어진 담뱃재가 담뱃재 크기만큼 하얀 환상을 깨뜨렸다.
회색빛 '하루'를 점찍듯 떨어뜨린 류머티즘 검지.

외투 주머니에 그 검지가 떨며 들어갔다. 금방 깨질 금연에 대한 결심이 담뱃갑 모서리에 긁혀 흩어지며, 자신의 타액을 찔끔 남겼다. 다음을 기약하며.

나는 귀가 찡해져 다시 문턱 너머로 돌아왔다.

발가락이 근질거렸다.

 

 

2. 2夢

노란 참새가 그려진 머그컵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레몬을 짠 시원한 물.
이를 닦기 전이지만 한 모금 한 모금이 기가 막히다.

참새의 노란 꽁지가 내 콧수염을 간지럽혔다. 달고도 신 이맛이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오늘이 없어지는 맛. 이가 먼저 느끼고, 다음에 잇몸, 혀가 차례차례. 나의 해감인 '오늘'이 레몬 물 한 잔에 빠지고 있다.

그저 컵만큼 들어있는 레몬 물이었는데, 목젖이 열 차례나 전율한다.

살짝 씹힌 레몬 알갱이가 잘만하면 온전히 사라질 '하루'의 머리채를 잡고 그를 내 코앞에 들이댔다.

참새가 그려진 컵은 어제 그 컵이 되고 말았다.

참새가 노란 머리를 들고 날 뻔했는데, 내 혀가 '오늘'을 자각했다.

혀가 문제다.

아니 그 덜 갈렸던 알갱이가 문제였다.

 

 

3. 3夢

라디오 소리에 잠을 깼다.
시끄러워서가 아니다. 라디오를 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 켜고 잔 것이 아니다. 평소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 라디오를 어떻게 켜는지도 모른다. 라디오가 집에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라디오를 보자 낯설었지만, 거기에 원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럴듯해 보였다.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가 이상해서 방으로 돌아왔다.
라디오가 꺼져 있다.
침착하게 방 불을 켜본다. 켜졌다.
두꺼비집으로 가서 두꺼비집을 확인해 본다.

스위치는 모두 ON.

다시 화장실로 돌아가 이를 헹궜다.

빌어먹을 '하루'가 죽지 않고 시작되었다.

 

 

4. 4夢

소독차 냄새가 났다.
마약 같은 그 냄새.
구슬치기를 멈추었다. 놓칠세라 그의 뒤를 쫓는다.
버선발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이 골목 저 골목 아우성을 모으며 양떼구름 솜이불에 나를 태우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날갯짓으로 헤쳐봐도 누에고치 짓듯 구불대며 나를 도로 감싸 안는 꿈의 미로.

나비가 솜사탕에 빠져 점점 '하루'가 사라져 간다.

'밥 먹어'

아는 음성이 나를 솜이불에서 추락시켰다.

추락한 곳에서,
'오늘'이 또 내 곁에 엉겨 붙어 뒹굴고 있었다.

 

 

5. 5夢

나는 땅바닥에 납작 붙어 어딘가 있을 딱지와 땅 사이 틈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펙터클을 가득 실은 수레가,
달팽이 지나가듯,
코끼리 밟는 듯,
내 허리를 지나갔다.

떼굴떼굴 구르는 동안 바퀴의 주인은 내 위에서 그날 장사를 시작했다. 딱지 치던 그 자리가 목이 좋았나 보다.

반으로 쪼개진 나. 다리는 집으로 가고, 허리 위는 수레 밑에서 계속 딱지치기를 했다. 다리가 없으니 그 틈이 훨씬 잘 보였다. 집에 간 다리는 돌아올 줄 몰랐다. 눈 없이 또 한 번 수레에 깔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대로라면, 오늘은, 잘하면 오늘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늘'과 작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엎어진 심장이 땅을 울렸다.

바퀴의 주인이 장사를 마치고 내 머리 위를 떠났다. 머리 위로 달이 떠오르고, 달은 비구름에 갇혔다. 비 냄새에 이미 나와 딱지는 젖어 있었다. 비를 빤 땅의 냉기가 잘린 허리를 타고 내 코끝으로 올라와 외쳤다.

'엣취.'

엣취 한마디로 뇌가 흔들렸다.
뇌는 진저리 치며 추운 '하루'의 끝, 저녁을 지각했다.
분하다.
오늘도 '하루'가 꼬박 나와 함께 있었다.

 

 

6. 6夢

놀지 말라는 빈 공장에서 동네 바보 아저씨에게 쫓겨, 옥상에 다다랐다. 옆 건물 지붕으로 뛰는 수밖에.
분명히 날았는데 땅이 꺼져버렸다.
찰나였다.

나는 시간이 멈춘 채, 기억할 수 없는 자궁 속에 포근히 감싸져, 언제까지고 떨어져 내리고 있다.

다시 기회가 왔다. '하루'가 사라져 간다.
여기서, 이대로, 사라져 버려라.

갑자기 그늘져 보이지 않던 벽에서 나타난 창문이 ‘드르륵’하고 화를 낸다.

"아유 시끄러워. 얘, 너 어디 사는 놈이니?"

집으로 가는 동안 모르는 엄마의 별의별 잔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엄마들은 늘 그렇게 '하루'를 깨운다.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 

'하루'를 악착같이 깨워내는 그들을.

 

 

7. 7夢

개의 성난 이빨에 쫓기고 있다.
이대로 잡히지 않으면 '하루'가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용케도 나는 발을 땅에서 띄웠다. 독을 품은 이빨이 나에게 침을 날려도 나는 붙잡히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가능하다. 가능해. 오늘에야 말로 나는 '하루'없이 무사할 것이다.

봄기운 가득한 날에 떨어질 수 없는 낙엽이 내 눈을 스쳤다.
동공에 바짝 다가온 낙엽이 잎맥을 각막에 지지 듯 찍었다.
찍힌 자국은 그물이 되어, 나를 낚아 탕에 내동댕이 쳤다.

목욕탕의 뿌연 김이 떼들을 불려 이태리타월과 함께 그것들을 나에게서 떼어낸다. 그 알싸한 감촉에 피부가 잠을 깨자, '하루'가 내 앞에서 능글맞게 웃는다.

이빨은 가고 없고, 싸고 간 오줌에 '하루'가 비친다.

망할 낙엽.
망할 봄.
망할 떼

망할 마려움.

 

 

8. 8夢

개눈박이 눈에 빠진 내 귀가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 희망으로 근질거린다. 그는 나에게 '천일야화'를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하루'만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이 사라져 간다. 이번에는 정말 가능하다. 가능해.

나는 천일의 마지막 날에 그에게 부탁했다. 개눈박이와 나의 눈을 바꾸자고.

그는 승낙했고, 나는 천일동안 '하루'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천일의 마지막 날에 혼자 듣던 내 귀가 나에게 속삭였다.

'내일이 되면, 넌 '하루'를 맞이하는 외눈박이가 되어 있을 거야. 듣고 싶지 않은가 보군. 듣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 외눈박이 놈아.'

'오늘'은 천일에 천일을 더한 날만큼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불사신.
저승사자.
찰거머리.

 

 

9. 9夢

커튼 너머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그를 피해 커튼 너머로 숨어들었다.
커튼 안은 비좁았다. 비좁은만큼 아무것에도 여지를 주지 않았다. '오늘'한테도.

좋아. 됐어.

커튼 너머로 그의 칼 그림자가 일렁인다.
그의 기척이 칼 끝을 흔든다.
그의 숨결이 칼 등을 타고 피를 토해낸다.

맨손인 내가 먼저 커튼을 열어젖히는 건 무모하다.
그의 칼이 내 몸에 들어오기 전에, 얼른 사라지자.

물을 틀었다.

김이 서리면 커튼이 열려도 들키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잘하면 나는 김과 함께 증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커튼이 열리고, 그의 칼부림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이미 김과 함께 증발하고 있었다.

'오늘'의 칼이 나를 피 흘리게 할지라도 나는 '오늘'로부터 사라지고 있다. 마침내 나의 승리다.

갑자기 이가 덜덜 떨렸다.
나는 순식간에 응고되어 '오늘'에 엉켜 피 흘리고 있었다.
열린 창문이 내 피부에 삶의 한기, '오늘'을 끼얹어 버렸다.

창문을 닫았어야 했다.

 

 

10. 10夢

그 나무는 가짜였다.

향기가 없고,
긁힌 자국이 없고,
떨어진 잎이 없었다.

그렇다. 저 나무에 나를 접붙이자.
재빨리, 그리고 신중하게, 나의 팔을 잘라내자.

'오늘'이 오기 전에.

먼저 나무의 가지를 잘랐다. 그다음으로,
나의 팔을 잘라 던져버리고, 나를 나무에 접붙였다.

가짜가 썩어 들어갔다.

내가 그의 수액을 받아야 하는데 이 멍청한 가짜가 나의 혈액을 받아먹고 있다.

아차,
그는 수액이 없구나.
가짜가 끈끈함을 가질 리가 없지 않은가!

빌어먹을.

나는 아퍼 퍼덕거렸고,
그 소리에 '오늘'이 찾아왔다.

신음소리에 '오늘'이 태어난다.

 

 

11. 11夢

드디어 바벨의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의 진열실 중앙, 무한히 뚫린 통풍구에 몸을 던졌다.
여기라면 '오늘'이라 하더라도 나를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끝없이 올라가는 도서관의 층들 때문에 어지러워 눈을 감으려고 하는 순간, 좁은 복도에 있는 거울이 보였다.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복제했다. 나는 순간, 그 거울을 보며 이 곳이 무한하지 않다는 의심을 했다.

그 의심의 실마리를 타고 입에서 절규의 꼬리가 나왔다.
그 꼬리 끝에 매달려 요동치는 무언가가 점점 분해되는 나를 꽁꽁 묶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토록 지겨운 그것은,
'오늘'이었다.

 

 

12. 12夢

들판에 아무렇게나 핀 버섯이 정말 아무렇게나 있다.
햇빛에 하얀 그것은 '하루'를 밀어낼 정도로 하얗다.
그 하얌에 '하루'를 매달아보기로 했다.

눈이 풀에 찔릴 정도로 납작 엎드려 버섯 지붕 아래로 들어갔다. 과연! 
여기서라면 '하루'를 물리칠만했다.
어떤 궁전보다도 있기 좋았고, 숨기 좋았다.

'하루'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줄지어 선 지붕들 아래, 골목길을 돌아서고 돌아섰다. '하루'를 그렇게 잘도 따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윙"

소리는 비단 고막만을 떨게 하지 않았다.
환상적인 그 소리는 지붕 밑의 환상을 깨뜨렸다.
그 소리가 뾰족한 침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벌 소리가 내 귀와 눈을 통하여, 순식간에 나를 '걸리버'의 육신으로 바꾸어 놓았고, 불행히도 그 육신이 도착한 곳은, '브롭딩낵'이 아닌 '릴리퍼트'였다.

'어째서 꿀 없는 버섯 마을에 벌이 날아든 것이지?'

이유를 알기 전에, 이미 벌은 내게 '오늘'을 일깨웠다.

'윙' 하며.

 

 

13. 13夢

바다 별 따라 들어간 곳은 소금쟁이의 발 밑.
숨쉬기는 힘들지만 나를 굴절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오늘'만 헷갈리게 할 수 있다면 몸이 퉁퉁 불어도 좋다.
게다가 나는 점점 가라앉고 있으므로, 숨 막히는 '오늘'도 여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도중에 연어를 만났다. 그를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갔다. 난 떠내려 가야만 하는데, 그의 힘찬 몸짓에 잠깐 홀렸었나 보다.

그는 안타깝게도 한걸음을 앞두고 억센 곰의 발톱에 내장을 쏟아냈다. 

'알을 부탁해.'

죽어가며 뻐끔거린 그의 유언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의 썩어가는 눈에서 나온 뜨거운 물이 나의 염통에 스며들어 피를 끓게 했다. 

나 또한 곰의 발톱에 무사하지 못했다. 그의 발톱에 세로로 두 동강이 난 몸의 왼쪽을 이끌고 마침내 연어가 태어난 자리에 도착했다. 알을 무사히 심었다.

저쪽에서 반쪽 난 나의 오른쪽을 들고 누군가가 오고 있다. 그는 반토막난 나를 붙들어 매었다. 
누구겠는가?

'오늘'만이 나를 붙들어 맨다.
걱정 붙들어 매란 듯이.

 

 

14. 14夢

나는 '하루'가 멀어질 때까지 죽도록 사정하고 있었다.
여자가 나의 말라가는 뼈를 느끼자 감싸던 골반을 빼고 도망쳤다. 모두 도망쳤다. 나는 혼자라도 사정해야 했다.

'오늘'을 멀리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빼냈다.

'팔루스'가 드디어 비상구가 되었다. 
그것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깨가 들어가고,
허리가 들어가고,
발목이 들어가고 있다.

거의 막바지다.

누군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누구지? 내겐 쌍둥이 야곱 같은 건 없는데…'

배가 부른 여인의 갈고리 손이,
나의 발목을 빼고,
허리를 빼고,
어깨를 빼고,
머리를 빼내었다.

나를 통째로 끄집어낸 그녀는 나의 어깨 위에 '오늘'이라는 멍에를 씌웠다.

여인의 배가 부를수록 하루가 다르게 내 멍에는 무거워져만 갔다.

 

 

15. 15夢

9층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자살행위인가?
밤마다 생생하게 나는 뛰어내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땅이 울리는 소리,
발바닥이 터지는 듯한 아픔.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난 자신이 있었다.
결과가 어떠하든지, 난 '오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층에서 시험 삼아 뛰어내려보고,
삼층에서 시험 삼아 뛰어내려보고,
사층에서 시험 삼아 뛰어내려보고,

마침내 구층에 이르렀다.

발바닥은 꺼멓게 멍이 들었지만, 뼈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번 한 번만 견디면 된다. 이번 한 번만.

그런데, 오늘은 왠지 찝찝하다.
내일 뛸까 했지만, '오늘'과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에, 불안한 예감에도 맨발로 9층 창가에 올라섰다.

뛰어내리기 직전에, 나는 보았다.
8층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고, 곧이어 7층에서도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2층을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위에 누군가가 여섯 번 포개지며 지면에 피떡을 터뜨렸다. 

9층 높이였지만 제대로 보인다.
내가 본 그것,
엎어진 그들의 등은 살면서 종종 보아온 내 쳐진 등짝이었다.

일곱 번을 죽고도 이렇게 서있는 나는 살아있는 것이 맞는가?

나는 또 살아날까 봐 혹은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까 봐 뛰어내리지 못했다.

뛰어내리지 못했으므로 '하루'를 참아내야 했다.

 

 

16. 16夢

나는 깨고 나온 알을 '오늘' 몰래 차곡차곡 모았다. 내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들어갈 계획이다.

깨알만 한 조각까지 다 모아 붙이기 시작했다.
아래와 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붙였다. 
마침내 아래와 위는 완성되었고,
아래의 껍질 안으로 들어가 위의 껍질을 씌우려 하는데,

앗뿔싸,

알껍질이 너무 작았다.
아니 내가 너무 커져 있었다.

어떻게든 '오늘'과 작별하고 싶어서, 몸을 있는 대로 구겨 넣었다. 거의 다 들어갔는데, 날개가 꺾이질 않았다.

'가만, 나에게 날개가 있었나?'

날개를 꺾으려는데, 문득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이 가슴속에 차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이 찾아왔다.

희망과 함께 하는 '오늘'한테 늘 잔인하게 당하면서도,
나는,
날고 싶었다.

 

 

17. 17夢

천일동안 나는 우물에 빠져 있었다.
우물에서 나오지 않으려면 비가 올 때까지 목말라야 한다.
그 비를 다 받아 마셔야 하니까.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오늘이다.
해가림이 내 머리 위로, 우물 위 하늘 위로 시작되고 있다.

조금 있으면 우물의 뚜껑이 완성된다.
둥그런 우물과 둥그런 해 사이로 둥그런 달이 
야금야금 들어차고 있다. 거의 다 됐다.

'그런데 왜 이리 불그스름한 거지?'

'검음'이어야 할 우물 뚜껑은 '붉음'이었다. 

이래선 나는 '오늘'에게 들추어내 지는데…

해가림인 줄로만 알았던 뚜껑은 달가림이었다.

달가림의 붉은 그림자는 내가 서있는 곳이어서, 나의 눈을 붉게 충혈시켰다.

충혈된 눈으로 '오늘'을 시작하고,
충혈된 눈으로 '하루'를 마친다.

 

 

18. 18夢

친구네 집은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방바닥이 갯벌처럼 밟는 대로 푹푹 들어갔다.
창문에는 유리 대신 비닐이 붙어 있었고, 싸구려 벽지도 비싸 신문지가 벽에 덕지덕지 발려 있었다. 

어디선가, 어디에든 녹슨 물 냄새와 눅눅한 곰팡내가 진동했고, 쓰레기통에 있을만한 것들이 손바닥만 한 집에 널브러져 실내를 미로로 만들었다.

그래도 소주를 살 수 있었다.
젊었고, 가난했어서 취할 리 없었다.

소주잔을 녹슨 물 냄새와 눅눅한 곰팡내로 채웠다.
안주 없어 불쌍했는지, 혹독한 겨울이 비닐 바람 노래를 불러 주었다. 창문을 부술 기세로.

둘이 얼어붙은 '하루'를 힘겹게 밭아 내며,
얼어 죽을 꿈을 얘기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개미가 나왔다.

정확히 팔만 마리.

친구가 곯아떨어진 사이,
팔만 마리로 '오늘'을 없애볼 참이었다.

팔만 마리가 거의 '오늘'에 달라붙어 그것을 어두운 구멍으로 가지고 들어갈 참이었다. 

"우지끈"

잔인한 겨울바람 때문인지, 과연 무허가 판잣집의 명성 때문인지, 집의 반이 허물어져 내렸다.
무너질 건더기도 없는 집이어서 우린 무사했다.

엄청 춥다고 불평했던 실내가 바로 그리워졌다. 이제는 정말 추웠다. 반이나 바깥이 되어 버렸으니.

개미도 반이 날아가 버렸고,
어두운 구멍도 반이 허물어졌는데,
'오늘'만 온전했다.

 

 

19. 19夢

그 집 수돗가는 씻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물로 하는 건 다 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좀 그렇지만 부끄럼 없는 애들은 목욕도 가능했다.

날씨 좋은 어느 날, 그곳에서, '팜 파탈'이 물을 끼얹는다.

들키지 않게 그녀를 볼 수 있도록 눈을 실같이 떴다. 실 같은 눈 틈으로 우겨 들어간 나는 그녀를 나의 사타구니 사이에 차곡차곡 쌓았다.

하얀 비누 거품이 그녀의 몸을 핥듯이 미끄러져 내리닫는다. 망울망울 복숭아 엉덩이 같은 봉우리가 봉긋이 솟아난다. 두 달을 돌아 나온 타액 속의 정액이, 벌어진 꽃길을 골짜기로 가른다.

아쉬운 듯 끈끈하게. 
후회 없다는 듯 매끈하게.

나는 거품을 따라 하수구 구멍으로 씻겨 내려가기로 했다.
저 수챗구멍이 '오늘'을 걸러낼 법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왔는데, 일그러진 창으로 햇살이 강도같이 들이쳤다. 강도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 눈길 대지 못하자, 앙심 품고 아무도 못 보게, 그 치명적인 굴곡들을 하얗게 태웠다.

발정이 사라지고, 따라서 정액이 사라지고, 따라서, 타액이 말랐다. 나의 거품 되기가 복숭아뼈를 남기고 실패로 돌아갔다. 

누군가가 수챗구멍을 탈탈 털었고, 나는 털려 나왔다.
나를 끄집어낸 그는 그렇다고 하수구 냄새나는 나를 씻기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저 나를 끌어내기만 할 뿐이다. 
시궁창에 빠져있든, 슬픔에 빠져있든, 행복에 빠져있든, 사랑에 빠져있든, 어디에 빠져있든 무심하게 끌어내기만 한다.

'오늘'은 무심하다. 무심하게 나에게 '하루'를 던진다.

 

 

20. 20夢

팬티스타킹을 손으로 훑어보았다.
팬티스타킹만 입은 그녀가 그 망 안에서 채워졌다.
그 팬티스타킹을 벗기자, 그녀는 사라졌다.     

속이 빈 스타킹을 나로 채웠을 때, 
그녀들 둘이 나타났다. 팬티스타킹만 입은 내 앞에.

둘은 팔짱을 끼고 나를 둘러쌌고 나는 당황하여 급히 스타킹을 벗어던졌다.      

'나에게 입혀줘.'

둘은 한 목소리로 나에게 요청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두 여인의 네 유방이 질식시키려고 한다. 그것들을 찔러 터칠 창이 필요하다. 하지만 팬티스타킹이 발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둘은 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발기가 안 되는 너는 우리를 입을 자격이 없다.'

팬티스타킹이 어깨를 들추며 끼어들었다.
'음란한데 발기가 안되니 너는 들킨 게로구나.'

'오늘'이 말했다.
'누구한테 들킨 게냐? 흐흐, 그야 나한테 지.'

그의 말대로 나는 '오늘'의 응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어제나 내일은 내가 보는데 오늘만은 그가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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