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보고 있다

2019.02.28 19:3502.28

1.

 

그것이 처음 나타난 날은 더운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얼마 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전의 내 삶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눈앞에 가방이 놓여 있다. 오늘 이 가방을 들고 어느 건물로 향할 예정이다.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원하던 대로의 결말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2.

 

그 해의 여름은 길었다. 열기는 하늘만이 아니라 땅 속 깊숙한 곳, 사람들이 모르는 열지옥에서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 점만 제외하면 별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당시 살던 자취방은 사건이 일어난 곳 근처였다. 토요일 오후 4시쯤으로 기억한다. 대학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휴학한 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무렵이라 주말에도 항상 독서실에 갔지만, 그 날은 왠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미지근하게 흐르는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반수면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여러 개의 작은 소리들이 뒤섞인 지글거림처럼 들렸다. 라디오 주파수를 바꿀 때 터지듯이 나오곤 하는 노이즈와도 비슷했다. 귀를 간질이던 소음 뭉치 한 가닥 한 가닥이 사람들의 목소리임을 파악했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설 아니면 고함, 가끔 흐느낌. 하나하나의 의미를 완전히 알아들을 만큼 뚜렷이 들리지 않아 구체적인 정황은 알기 힘들었다. 잠은 깼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자면서 입고 있던 가벼운 옷을 그대로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싸움, 아니면 다른 사고일까. 뭐가 됐든 심심할 때 그냥 지나치긴 어려운 일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거리는 의외로 한산했다. 꽤 규모가 큰 번화가 근처라 주민이 아니더라도 오가는 사람이 많은 동네였기에 텅 빈 길이 생경하게 보였다.

 

소리는 생각보다 더 먼 곳에서 나는 듯했다. 흐린 날은 맑은 날보다 소리가 더 잘 퍼진다고 했던가. 구름에 덮인 하늘이 을씨년스러웠다. 다시 돌아가 우산을 가지고 나올까 했지만, 오래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기에 그대로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 방향인지 짐작이 갔다. 대로변으로 나가 바로 오른쪽이었다. 다가갈수록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예상보다 많았다.

 

길을 나서자마자 큰길 쪽에서 달려온 30대 중반쯤의 여자와 부딪혔다. 뛰다시피 달려드는 기세에 놀라 한 발 물러서자 여자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당황한 얼굴로 끊임없이 흐느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잠시 여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다 앞을 돌아본 순간,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선 위치에서 100미터쯤 앞에 있는 쇼핑센터 건물. 외국계 기업의 대형 할인점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쇼핑센터 바로 위의 하늘.

 

초현실주의 화가의 악몽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풍경이었다.

 

하늘 위에서, 거대한 눈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축구 경기장 이상은 되어 보였다. 낮게 뜬 구름 속에 떠 있어 필터가 걸린 영상처럼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 크기 덕분에 진회색 홍채가 띈, 복잡한 형상으로 응결된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무늬가 똑똑히 보였다. 거대한 눈은 때때로 인간의 그것처럼 깜박이거나 경련했고, 그 때마다 사람들의 탄성과 비명,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동공은 진회색 산맥 위에 뜬 검은 섬처럼 보였다. 눈의 아래에 서면 동공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일까? 저 눈이 각막으로 덮인 보통의 눈과 같다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바로 아래의 쇼핑센터도 비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동공은 섬이라기보다 구멍이 아닐까. 응시하는 대상을 비추는 대신 그 안으로 빨아들여버리는 심연의 입구.

 

의심했다. 눈앞의 풍경은 진실인가? 악취미적인 장난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의도로?

 

당시의 정적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웅성거렸지만 나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때, 분명히 눈은 나를 바라보았다.

 

 

 

 

3.

 

눈이 처음 나타난 날 저녁부터 매스컴은 관련기사를 쏟아내었다. 인터뷰, 목격담, 추측, 무슨 분야인지 한 번 들어서는 파악이 안 되는 어떤 전문가의 소견, 종교계 반응, 무속인, 집단최면, 정신분석학적 진단, 기타 등등. 모두가 말을 필요로 했다. 그나마 말이라도 안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하루아침에 뒤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삶이란 방부제를 잔뜩 넣은 가공식품과 비슷해서 하늘에 눈이 떠 있건, 벽에서 귀가 튀어나오건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는 이상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물론 삶의 태도를 바꾸는 축들도 꽤 있었다.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직접 눈에 들어오는 대상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맘 놓고 부도덕한 취미생활(일반적인 관념에 비추어 봤을 때)을 즐기던 부류들이 대표적이었는데, 자취하던 집 주인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50대 중반의 적당히 보수적이고 적당히 닳아빠진 남자로, 그나마 말이 아주 안 통하는 상대가 아니어서 다행인 작자였다. 그는 자취하던 집을 포함해 네 개에 달하는 빌딩의 소유주였으며, 그 정도 경제 수준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 시도할 만한 일들은 빠짐없이 즐기곤 했다. 그는 나를 꽤 좋아했는데, 중년 남자가 젊은이에게 흔히 시도할 법한 권위욕 충족의 시도-주로 무용담 늘어놓기 내지는 설교-를 잘 받아줘서이기도 했지만, 첫째로는 어쨌든 집세를 꼬박꼬박 잘 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지간히 맘에 들었는지, 그는 내게 자신이 즐기는 몇 가지 취미생활의 장에 함께 하기를 권하고는 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경험해 봐야 하는 일들이 있어. 케케묵은 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당황하지 않으려면 여러 가지를 경험해 봐야 되거든. 살다 보면 그런 경우가 많잖아. 노는 것도 마찬가지야. 놀아 본 사람이 더 잘 노는 법이거든. 모두 즐기는 판에 혼자 당황해 쩔쩔매면 흥도 깨지고, 까닥하면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지 않겠어? 남자들은 특히나 그럴 일이 많잖아.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경험 많은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는 얘기지, 내 말은.”

 

간단히 말해 술과 담배 냄새 찌든 방에서 여자들 끼고 놀자는 이야기였다. 안타깝게도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취미라 정중히 거절해야만 했다. 그는 (그의 기준에서)꽤 혹할 만한 제안을 거절하는 나를 보고 약이 좀 올랐는지, 얼굴만 봤다 하면 예의 권유를 하기가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 끈질긴 권유가 눈의 출현과 그 이후에 있었던 ‘사건’을 기점으로 뚝 끊겼다. 하늘에 나타난 눈이 자신의 죄악을 주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신의 눈이 나타났다 한들 그의 시시한 죄상에 눈길이나 보낼까 싶었지만, 어쨌든 난처한 권유를 들을 시간이 줄어 좋았다.

 

그 정도의 소소한 변화를 제외하면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이때만 해도 눈은 나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4.

 

눈이 나타나고 이틀 후, 출현지점에 있던 쇼핑센터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전기 누전에 의한 가스 폭발 사고였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고 초동조치가 늦어 피해가 더 커졌다. 5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으깨진 사람들과 피에 젖은 몸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부상자들을 바라보며, 몇몇 사람들은 눈의 출현이 일종의 계시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 또 다른 눈이 교외의 아파트단지 상공에 나타났다. 첫 출현 때와 같이 구름이 많이 껴 흐린 날이었다. 사람들은 불안해했지만 여전히 눈의 출현이 가지는 의미를 확신하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고, 아파트 한 동이 붕괴되어 사건 당시 집에 머무르고 있던 입주민 전원이 사망했다.

 

쇼핑센터에서의 화재가 있은 다음 날 나누었던 집주인과의 대화를 기억한다.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취방 근처 편의점 앞에서 만난 그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홀로 맥주를 들이키는 중이었다. 고해성사를 하고 난 직후의 죄인이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의 짐을 덜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깊숙한 곳 어딘가 드리워진 그늘을 걷어내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쨌든 안색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에게 괜찮으냐고 말을 걸었다.

 

"아니, 전혀. 전혀 괜찮지 않아."

 

“충격적이셨나 봐요.”

 

“충격적이었냐고! 남 얘기하듯 말하지 마. 자네도 봤잖아. 그건 그냥 신기한 현상이 아냐. 신께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심이 입증됐다고! 시나 노래 가사같은 비유가 아니란 말이야. 말 그대로, 우리를 보고 계신다 이거지! 솔직히……그래, 지금 말하기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지만……의심했었어. 물론 난 꽤 괜찮은 신자였다고 생각해. 이게 좋은 표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건 보험이나 마찬가지였어! 언제나 의심했지.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했지만……. 이거 봐, 젊은 친구. 난 언제나 곧이곧대로 살아온 사람이야. 언제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판단을 내렸어. 내 능력을 과신하지는 않았지만, 쌓아온 경험을 무시하지도 않았지. 자신을 신뢰할 줄 알았다는 거야. 그런데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 밖에 내 운명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제기랄! 도대체 알게 뭐냔 말이야. 물론 찜찜한 마음에 마누라 따라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가긴 했어도, 내 나이쯤 먹고 나면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본성이 바뀌지 않아. 근데 그걸 보고 나서는 믿어야만 하게 됐어. 하늘에 거대한 눈이 나타났고……많은 사람이 죽었지! 아주, 아주 많이 죽었어. 나는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아.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야. 알겠나? 그건 징조고, 처벌이야. 신상필벌을 할 준비가 끝난 거지. 신이 우리의 죄를 들여다보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한 거라고!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완전히 믿지 못하면서도 막연히 두려워했던 존재가 대낮에 말 그대로 눈을 부릅뜬 채 나타났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어? 내 말 알아듣겠나, 응? 알아듣겠냐고?”

 

 

 

 

두 번째 눈의 모습은 첫 번째와 달랐으며 확실히 구별이 가능했다. 첫 눈동자는 홍채의 색이 진회색을 띄었지만 두 번째는 적갈색이었다. 크기도 중고등학교 운동장 정도로 지난번보다 작았다. 뉴스 보도도 이 점을 지적했다. 공통점이라면 TV화면을 통해 봤을 뿐인데도 여전히 눈이 나를 바라본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오랜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나도 모르게 초자연적인 현상에 기대어 풀려고 하나 싶었다. 그 즈음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공부를 시작할 때의 굳은 결심에 금이 가는 중이었다. 2년이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결과는 좋지 않았고, 부모님의 걱정은 점점 심해졌다. 하나둘씩 취직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조급증만 더해 갔다. 그래서일까, 눈이 나를 주시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허약해진 결과라고 생각해 조금씩 운동을 해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거대한 눈이 던지는 시선은 이미 내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단단히 뿌리를 내린 후였다.

 

 

 

 

두 번째 출현이 있고 얼마 후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나는 조금씩 꿈틀대는 붉은 빛의 다발이 끝없이 이어진 어느 복도를 걸어간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복도지만 불안감은 없다. 때때로 시야가 흐려진다. 짙은 안개가 복도를 가득 채운다. 어느 새 복도가 끝나고, 막다른 벽에 걸린 낡은 전신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의 남자가 나라는 확신이 없다. 거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잔잔한 파문이 인다. 파문 속에서도 거울은 남자의 얼굴을 흔들림 없이 비춘다. 단 한 부분, 남자의 눈을 제외하고는.

 

남자의 눈은 하늘에 뜬 눈이다. 실제보다는 한참 작은 크기지만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크다. 거대한 눈이, 움직이는 콜라주 영상처럼 얼굴 위를 불안하게 부유한다. 갑자기 눈이 가늘게 떨린다. 눈은 남자의 얼굴 위를 여기저기 헤집으며 뒤틀어 놓는다. 동공이 점점 확대되며 어둠이 입을 벌린다. 어둠은 거울 전체를 뒤덮어 가다 나를 삼키고, 그 속에는 수없이 많은 거대한 눈들이 내가 지나온 심연을 담은 채 사방에서 나를 노려본다. 또 다른 심연 속에 떨어지고, 다시 떨어지며, 끝없이 떨어져 간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잠을 깨면, 거기엔 또 다른 어둠―밤의 어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5.

 

세 번째 눈은 두 번째 눈의 사건이 있고 2주일 이후에 나타났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눈이 출현한 간격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또한 앞서의 눈들은 출현 위치를 정확히 지정 가능했던 반면, 세 번째 눈은 어디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 힘들었다. 그 크기 때문이었다.

 

출현 시기에 반비례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이전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출현시간 오전 11시 경, 사건발생시간 오후 7시 경.

 

출현 장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인터넷과 방송을 체크하고 있던 중, 1보가 터지자마자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눈이 나타났다는 장소로 향했다. 자꾸 마음을 어지럽히고 이상한 악몽까지 꾸게 만든 그 눈을 한 번 더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눈은 이번에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도시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길이 막힐 무렵 차에서 내려 몰려들기 시작한 인파를 헤치며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보였다.

 

세 번째 눈의 홍채는 첫 번째와 비슷하지만 보다 진한 암회색이었으며 더 거대했다. 앞서 나타난 두 눈도 컸지만 이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눈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전율했다.

 

그 날 죽은 사람들의 수는 눈의 크기만큼이나 많았다. 어느 광인의 방화로 인해 일어난 지하철 화재 사건으로 153명이 사망, 250명이 부상을 입었다. 눈이 나타났던 지역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이 사고를 기점으로 눈의 출현을 재앙의 징조로 받아들이는 데 회의적이던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입장을 바꾸었다.

 

나는 눈의 출현에서 어떤 패턴을 도출해보려 했다. 출현한 시각, 홍채의 색, 사고발생 시각, 두 사건 사이에 걸린 시간, 희생자의 규모, 출현 위치 등. 3회의 출현을 샘플로 삼기에는 부족했지만 최소한 몇 가지 가설은 세워 볼 수 있었다.

 

첫째, 눈은 어떤 대형 사건의 징조로써 나타난다. 둘째, 첫째와 같은 이유로, 출현지역은 인구수가 많은 대도시에 집중된다. 셋째, 눈이 사라진 시간과 사고가 터지는 시간의 간격은 점점 더 짧아진다. 넷째, 나타나는 눈의 크기는 희생자의 수에 비례해 대형화한다. 다섯째, 대형 사건의 경우 홍채가 회색, 규모가 작다면 적갈색을 띈다. 여섯째, 눈은 언제나 흐린 날에 등장한다.

 

세 번째와 다섯 번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스스로도 의문스러웠다. 희생자가 많아질수록 크기가 커지거나 색이 변한다니, 유치한 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때까지의 출현 패턴으로만 봐서는 들어맞는 것도 사실이었다. 홍채 색의 경우는 한층 의심스러웠다. 두 번째 적갈색 눈이 나타나고 벌어진 아파트 붕괴사고의 경우, 상당수의 주민이 출근한 낮 시간대였던지라 희생자의 수는 약 30명에 그쳤다. 확실히 가장 적은 수였지만, 대규모, 소규모를 따지기에 쇼핑센터 화재 희생자 수와의 20명 차이는 애매하게 느껴졌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을 뒤져 보았지만 쓸 만한 정보는 얼마 없어서, 대부분의 방송이나 신문에서 이미 내보낸 기사 수준이었다. 포털사이트나 인터넷 언론의 뉴스뿐만이 아닌 개인 블로그 등도 검색해 봤으나 소득은 없었다. 두서없는 사견이나 심리학, 신학적 관점으로 눈의 출현을 어설프게 분석한 글이 아니면 의미 없는 욕설이나 시시껄렁한 농담뿐이었다.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Eye in the sky>를 배경음악으로 언론보도나 개인이 촬영한 ‘눈’의 영상을 이것저것 긁어모아 편집해 만든 동영상 정도가 그나마 유머감각 비슷한 뭔가를 보여주었다.

 

눈을 바라보는 세상의 태도는 점차 바뀌어 갔다. 정부가 눈의 출현을 상당한 신빙성을 지닌 일종의 재해재난 예보로 받아들였으며, 추후 동일 상황 발생 시에는 눈 출현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시키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예방조치를 취하도록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초자연적 징후가 신뢰할 만한 위험신호로 인정되었다는 소식은 상당히 수가 늘어난 신비주의자들과 종교인들에겐 승리의 팡파레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의 불가해한 상황도 분명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하리라 생각한 사람들에겐 오랜만에 돈을 들여 비싼 술을 사 마시고픈 충동이 들게끔 만드는 우울한 패전나팔일 따름이었다.

 

비교적 주기가 짧았던 세 번의 출현 이후 눈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잠시 유예된 심판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불안에 떨었다.

 

나는 이사를 했다. 먼저 살던 집보다 유동인구가 더 많고, 교통이 편한 시내 중심가의 방이었다. 출혈이 컸지만 과외를 하나 더 해가며 겨우 계약을 마쳤다. 무리한 이사를 한 이유는 순전히 눈 때문이었다. 눈이 나타난 장소에 더 빨리 이동 가능하며, 출현확률도 높을 곳에 위치한 집이 필요했다. 왜 이렇게 눈에 집착하는지 스스로를 의아해 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거대한 눈의 시선은 잊으려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좀 더 자주, 가까이서 눈을 보고 싶었다. 눈이 어떤 존재인지, 왜 나를 바라보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사 후 한참이 지나서도 눈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공포와 혼란, 환희와 숭배가 들끓는 열탕 속을 멍한 눈으로 활보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6개월 후에야 끝났다. 이번에도 날씨는 흐렸다. 숭배자와 불신자 모두 새로운 눈의 출현을 기뻐했다. 뉴스를 접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출현 장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가였다. 이사한 보람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접근이 쉽지 않았다. ‘눈’을 직접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광신자, 과학자, 철학자, 몽상가, 소설가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눈의 출현을 직접 봄으로서 저마다의 영감을 얻길 소망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야 ‘눈’을 그럭저럭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는 거리까지 도달했다. 마음 같아서는 눈동자 바로 아래에 가고 싶었으나 차도까지 꽉 채우며 몰려든 인파를 뚫기는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멈춰선 자리에서 눈을 관찰하기로 했다.

 

크기는 첫 번째 눈과 비슷했다. 거리가 멀어서 눈이 출현한 장소를 정확히 판별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만큼 전체적인 모양은 더 잘 보였다. 두 번째와 유사하나 묘하게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의 홍채와 유선형의 눈매. 우습게도 여자의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벌건 얼굴로 열에 들떠 설교중인 중년 남자와 그의 발밑에 둘러앉아 머리를 조아린 채 기도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증오에 가득한 목소리로 설교자 무리와 눈 모두를 저주하는 창백한 사내도 있었다.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았다. 모두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눈을 받아들이며 경배를 보냈다. 거리는 사람들에게서 새어나오는 광기와 격정의 안개로 자욱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났다. 뉴스대로 조치가 취해진 모양이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서 있던 자리를 떠나 근처의 오피스 빌딩 안으로 몸을 피했다. 곧장 계단으로 올라가 3층 계단참에 난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건물 아래에 뒤엉킨 군중과 그들을 소개 및 대피시키기 위해 투입된 소방관, 경찰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인파 속을 헤집기 시작한 제복 입은 사내들에게 사람들은 녹아내린 젤리처럼 들러붙었다. 30분가량 지나자 군인들이 투입되었다. 소방관, 경찰, 군인들은 인파를 뚫고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든 군중들을 평화적으로 제압하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한층 더 혼잡한 눈의 출현지점으로 진출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점액질 용액을 헤집는 실험용 스푼처럼 보였다.

 

나는 아래에 펼쳐진 혼란의 바다와 먼 곳의 눈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제복 입은 남자들과 군중들 사이의 마찰은 심해졌고, 하늘과 땅을 오가는 나의 시선도 점점 빨라졌다. 눈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거리와 하늘의 눈 양쪽 다 잘 보였다. 몸을 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건의 발단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눈의 출현 장소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지점에서 사건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징조가 어김없이 재앙을 불렀으니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겼으리라.

 

폭발의 순간을 보았다. 한창 조직 사회의 생리에 적응 중이었을 젊은 경찰은, 난생 처음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을 목격한 어느 숭배자가 환희에 절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매달려오는 모습을 참아내지 못했다. 경찰은 뿌리치려 했지만, 피해가 안 가도록 봐 줘 가면서 광인의 몸부림을 제지하긴 힘들었다. 손짓은 점점 더 거칠어졌고, 마침내 그는 무기를 휘둘렀다. 비명과 동시에 핏방울이 튀었다.

 

대기를 채운 광기의 분말은 불씨가 튀기 무섭게 타올랐다. 군중은 괴성을 지르며 제복 입은 남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경찰과 군인, 소방관들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했고, 집단 속에서 유지되던 그들의 이성은 집단이 와해됨에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

 

인간들은 사라지고 짐승의 파도가 몰아쳤다. 사람들은 취할 수 있는 모든 공격수단을 동원해 눈앞에 선 상대방을 찢어발겼다.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거리는 서로를 파괴하려는 원시의 야수들로 가득 찼다. 상대방이 방금 전까지 함께 찬송하던 동료인지, 자신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려 한 소방관인지는 의미가 없었다.

 

초로의 목사가 주먹을 날려 양복을 빼입은 중년 남자의 턱을 부쉈다. 청바지와 폴로셔츠 차림에 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구둣발로 땅에 쓰러진 소방관의 가슴을 짓밟았다. 군인은 총을 들어 몸을 회전시키며 총알을 쏟아냈다. 안정된 자세를 잡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 군인의 몸은 불안정한 곡선을 그리며 인파 속으로 튕겨졌다. 순식간에 군인의 신체는 납작하게 으스러지고 잘게 해체되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젊은 여자가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 쥔 채 절규했다.

 

나는 어느 소방관이 토해낸 핏물이 허공에 그리는 붉은 궤적을 바라보았다. 대기에 떠도는 비릿한 냄새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피가 난무하는 거리의 풍경에서 고개를 돌려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사건의 징조일 뿐일까? 아니면…….

 

갑자기 공포가 몰려왔다. 서있기가 힘들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눈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저 시선 너머의 무언가를 알아내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솟아올라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무너져 내리는 몸을 간신히 창턱에 의지한 채 버텼다. 피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겨왔다. 하늘 위 동공에 비쳐 보이는 저 남자는 - 검은 구체의 표면에 떠 있는 사람은 나인가? 비친다고? 내가?

 

난생 처음 맞닥뜨리는 공포에 어쩔 줄 모르는 나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이 검은 원 속에서 일렁이다, 점점, 기묘하게 뒤틀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6.

 

깨어났을 때는 내 방의 침대 위였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절했던 걸까. 내 스스로 집에 온 기억은 없다. 누군가에게 구조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자세한 과정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기억을 일부러 지운 듯 묘한 부자연스러움이 불쾌했다. 겁에 질린 아이처럼 시트를 끌어당겨 쥐고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텅 빈 뱃속에서 뭔가가 스멀거리는 듯한 기분에 구역질이 났다. 한참을 쓰러져 있고 나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TV와 인터넷을 통해 몇 가지의 언론보도를 접했다.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173명. 부상자는 832명. 생각보다 많은 수였다. 기절한 이후 소요가 더 확대된 듯했다. 그 이외의 큰 사건이 터졌다는 기사는 없었다.

 

착란에 빠진 군중의 대규모 폭동. 주로 기성 종교의 방파와 사이비 종교단체가 주를 이룬 집단이 눈의 출현현장에서 무허가 불법 집회를 행하던 중, 예상되는 재난을 대비한 출현지역 주민 소개 및 불법 집회 해산을 시행중이던 군, 경 및 소방대에게 공격을 가해, 이에 대응하던 과정에서 벌어진 불행한 사태-사건에 대한 공식 발표였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초로 피가 흐른 이후, 그 곳의 모두는 야수가 되었다. 폭동도, 진압도 없었다. 광기의 질주가 있었을 뿐.

 

양상이 바뀌었다. 이전까지의 눈은 사고의 원인이 아닌, 불길한 예언이자 징조였을 뿐이다. 하지만 네 번째에 이르러 눈은 사람들을 다른 무엇으로 바꿔 놓았다. 아이러닉하게도, 징조를 목격하러 온 사람들 자체가 재앙의 도화선이 된 꼴이다.

 

그렇다면, 이미 눈은 그 자체로 재앙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당시의 군중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으리라. 저 눈이 우리를 우리가 아닌 뭔가로 바꿔 놓을 힘을 가진 존재임을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미 변한 후였다.

 

 

 

 

7.

 

다시 기다림이 이어졌다. 눈에 관한 정보를 계속해서 수집했지만 여전히 내용은 거기서 거기였다. 눈은 신의 강림이거나, 집단최면의 환영이거나, 테러리스트의 신형 무기, 질병, 예술 행위이기도 했다. 추측만 무성할 뿐 정답은 없었다.

 

하지만 눈은 마지막 출현 후 한 달, 석 달, 반년을 지나 1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출현의 간격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눈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해졌다. 공무원 시험 준비는 포기한 지 오래였고, 간혹 책을 잡는다고 해도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눈에 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긴 지 오래였다. 어느 새 자취방은 눈의 사진과 스크랩북, 관련 기사가 실린 잡지와 신문 등으로 가득 찼다. 어느 날 전화를 안 받는 내가 걱정되어 찾아온 부모님에 의해 대부분이 소실되긴 했지만 방이 예전의 풍경을 되찾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통곡을 하며 어떻게든 날 추스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취방을 옮긴 후 핸드폰도 없애버렸다. 어차피 올 전화도 없었다.

 

정신과를 찾아가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의사가 어찌해볼 문제가 아니었다. 근거 따윈 없었지만 확신했다. 의문은 천천히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다. 시간이 흐르고 집착이 커질수록 초조감도 불어났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눈의 숭배자들은 신에게 버림받았을까 두려워하며 통곡했다. 난 울거나 빌지 않았다. 알고 싶었을 뿐이다.

 

얼마 후,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마지막 해결책이었고, 결의이자 각오였다.

 

 

 

 

8.

 

눈앞에 가방이 놓여 있다. 오늘 이 가방을 들고 어느 건물로 향할 예정이다.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원하던 대로의 결말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처음 계획을 세울 때부터 바라온 일이 있다. 기묘하다고 할까, 염치없는 기대이다. 계획의 성공 여부를 미리 알게 되는 것.

 

나의 경우, 이 어처구니없는 명제는 성립이 된다. 목표가 달성되었음을 확인하는 시점이 계획의 시행 이전이 되어야 가장 좋다. 그렇지 않더라도 할 일은 정해져 있지만.

 

나는 눈을 불러낼 예정이다.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그리며 철저하게 준비해 왔다.

 

시간을 본다. 지금은 1월 중순의 어느 주말, 밤 10시이다. 모든 도구를 점검하고, 계획해 둔 사항들을 체크한다. 주변 정리도 깔끔히 해 뒀다. 방 정리를 한 지 오래 지났기에 청소는 제법 힘들었다.

 

샤워를 한 후, 잠들기 전에 뉴스와 인터넷을 다시 뒤져본다. 준비가 끝난 지금도 눈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맛살을 찌푸린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나? 준비가 부족했던 걸까? 몇 가지 의심이 피어오른다. 아니,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시작하기도 전에 낙심해봤자 도움은 되지 않는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눈의 출현에서 사고 발생까지의 시간은 점점 짧아졌었고, 마지막 출현 때는 눈이 떠 있는 와중에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그럴 확률이 높다.

 

사실 실패든 성공이든 상관없다. 최후의 순간에 눈을 목도하고 싶을 뿐이다. 거대한 눈동자를 마주보며,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꿋꿋이 서서 질문하리라.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눈을 떴다. 기분은 나쁘지 않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너무 일찍 일어났다.

 

창문 너머는 아직 어둡다. 잠시 창가에 서서 밝아오는 세상을 바라본다. 어두운 하늘에 점차 밝은 빛이 섞여들고, 한 순간 감청색을 띄며 암실 속에서 사진이 현상되듯 거리는 서서히 윤곽을 되찾는다. 새벽의 미명이 끝날 무렵, 공작새의 꼬리 깃 같은 햇살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낸다. 하늘에 떠 빛나기엔 이른 시간의 태양이지만, 왜인지 그마저도 눈이 부셔 똑바로 보기 힘들다.

 

TV를 킨다. 별다른 뉴스는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도 잠잠하다. 날씨는 맑다.

 

상관없다.

 

 

 

 

캐리어 안에 넣어놓은 장비를 재점검하고 옷은 셔츠와 바지, 코트를 전부 검은 색으로 통일했다. 오히려 눈에 띌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는 어울리는 복장이다. 색은 어쨌든 입고 나니 그리 튀어 보이지도 않는다.

 

오후 1시,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13층짜리 백화점이다.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성도 있기에 사람들이 너무 적어도, 너무 많아도 좋지 않다. 평일 이 시간대의 백화점이 적당하다.

 

거리를 걷는다. 숨을 들이키자 차갑게 식은 1월의 공기가 몸 안에 스민다. 백화점이 가까워질수록 가슴께 한 구석에 냉기가 차오른다. 긴장감도,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장 박동조차 꺼진 듯 몸 안의 모든 소리가 잦아든다. 하늘을 쳐다본다. 날씨는 여전히 맑고, 사람들은 길을 걷는다.

 

어느 새 백화점 문 앞에 다다랐다. 정문은 큼직한 유리문이다. 묵직한 중량감이 낯설다.

 

뭔가 하나 살까. 지갑도 가져 왔고, 돈도 있다. 준비는 완벽하지만 예비 장비가 하나 더 있어도 나쁠 일은 없다.

 

 

 

 

1층의 남자 화장실에서 마지막으로 정비를 한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식기류 코너에서 산 회칼을 바지 뒤춤에 집어넣고, 두 개의 아웃도어 나이프가 든 파우치를 허리띠에 묶어 허리 양 옆에 건 후 따로 폴딩나이프를 코트 안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회칼은 날 길이 30센티미터 정도로, 제법 길고 예리하다. 가격은 비쌌지만 어차피 이제 돈은 필요 없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별달리 소란해지거나 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계획 시행 직전까지 눈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낙심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면 다 끝난다.

 

들어와 있던 칸의 문을 연다. 세면대에서 한 남자가 손을 씻는 중이다. 깔끔한 갈색 치노 팬츠에 흰색 셔츠, 검은색 베스트를 걸친 20대 후반쯤의 평범한 남성이다. 평일 낮에 백화점에 있는 20대 남자. 아마도 백화점 점원이거나, 아무 때나 쇼핑 가능한 프리랜서일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남자의 뒤로 다가가 말을 건다.

 

 

 

 

“저, 죄송합니다만 뭣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아, 예. 무슨 일이시죠?”

 

“혹시, 백화점 밖에서 뭔가 보시지 않았습니까?”

 

“예? 봐요? 뭘 말씀하시는 건지…….”

 

“‘눈’이라던가.”

 

남자는 순간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친절하게 질문에 대답한다. 요즘이라면 딱히 누군가에게 묻기 어색한 질문도 아니다.

 

“눈이요? 글쎄요, 보지 못했습니다만……한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나타났으면 백화점 안도 소란스럽지 않을까요. 뭐 들은 얘기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그냥 느낌이랄까, 왠지 오늘은 나타날 것 같아서요.”

 

“아, 예.”

 

남자의 눈에 의혹이 비친다. 어딘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이다.

 

“괜한 질문 드려서 죄송합니다. 혹시나 해서요.”

 

“아뇨, 뭘…….”

 

내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남자는 당황해서 따라 고개를 숙인다. 남자의 시야가 땅을 향한 순간, 재빨리 허리의 아웃도어 나이프를 빼들고 남자의 뒷목에 찔러 넣었다. 외마디 신음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경직된다. 생명이 사라져가는 최초의 시점, 가느다란 떨림이 칼자루를 통해 전해져 온다. 자루를 꽉 잡은 채 남자의 입을 틀어막는다. 움찔거리며 몸부림칠 때마다 나이프를 더 깊게 찔러 넣었고, 점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남자는 마지막 힘을 다해 내 옷자락을 그러쥐고 고개를 들어 고통과 경악에 찬 시선을 던졌다. 무어라 말하려 하지만 컥컥대는 기침소리 말고는 뱉어내지 못한다. 남자의 눈빛이, 그가 아직 갑작스럽게 다가온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나이기에 나를 바라볼 뿐, 원망은 갈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남자의 눈 안에서 빙글빙글 맴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이다.

 

잠시 후, 남자는 죽었다.

 

 

 

 

들어오기 전 남자화장실 주위에 사람이 별로 없음을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여유부릴 만큼 시간이 충분하진 않다. 남자의 시체를 내가 나왔던 칸으로 옮겨 놓은 후, 화장실 바닥과 몸에 묻은 피를 미리 준비해 온 타월에 물을 적셔 대충 닦아낸다. 아직 칼을 뽑지 않아서 핏물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고, 검은색 옷은 피가 튀더라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다행히 모든 일처리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실엔 CCTV가 없으니 이런 일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다시 남자가 있는 칸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후 가방에서 페트병에 담긴 휘발유를 꺼내 남자의 시체 위에 뿌렸다. 휘발유의 역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화재의 규모가 얼마나 커질지는 확신이 없다. 방화에 대한 내 지식은 그리 대단치 못하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시간은 벌게 될 터다. 무엇보다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 계획은 의미가 없다. 그저 큰 참사를 일으킬 뿐이라면 차라리 폭발물이라도 구하는 편이 낫겠지만, 중요한 점은 사람을 얼마나 죽이느냐가 아니다. 살인은 눈을 불러내기 위해 벌이는 제사다. 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를 재앙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1층 남자 화장실을 나와 2층에도 불을 놓았다. 이번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두 번째 일을 마친 후 바로 푸드코트로 내려갔다. 식당가는 점심을 해결하러 온 백화점 근처의 직장인들로 1층, 2층보다 붐볐다. 햄버거로 늦은 점심을 때우려 했지만, 내가 주문할 차례도 되기 전에 비상벨이 울렸다. 사람들이 곳곳에서 술렁였다. 화재를 알리는 백화점 안내방송이 들려왔고, 곧 혼란이 찾아왔다. 점심을 먹기 전에 시작되어 유감이지만, 이만하면 그리 나쁘지 않다. 나는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갈무리해 둔 회칼을 뽑아 들고 물결치기 시작한 사람들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었다.

 

 

 

 

9.

 

몇 번을 찔렀을까. 열두 명, 열세 명 째. 혼란에 빠진 사람들 속에서 틈이 보이는 대로 찔러 넣는다. 찔린 사람들은 혼란의 와중에서 영문도 모른 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최대한 사람들이 밀집된 곳, 혼란이 심한 곳. 소음이 최고조에 달한 장소에서 조용히 살육을 집행한다. 쓰러진 사람들은 인파의 흐름에 짓밟히거나, 흘린 피로 주위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미 지나간 지 한참 지난 어느 곳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들키지는 않았다. 바라던 대로 일이 풀려간다. 지금 이 때를 이용해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며 옥상으로 향해야 한다. 옥상 문을 열었을 때, 그 위의 하늘에 눈이 있게 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람을, 지금보다 더.

 

푸드코트에서 가능한 많이 처리해야 한다. 사람들이 빠져나오는 비상계단은 인파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힘들고, 자칫 잘못하면 누군가에게 들키거나 도리어 내가 화재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논외다. 화재 상황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갖췄다. 뭣보다 올라가는 길에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몇 번의 사전답사를 통해 머릿속에 넣어 둔 경로를 따라 비상계단 입구로 향한다. 지하층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2층에서 1층의 비상구로 나가는 사람들이 만나는 지점은 위로 올라가기 위한 최초의 난관이지만 살인에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불은 내가 질렀어도 본격적으로 커지기 전에 지하로 내려왔으니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긴 힘들다. 무거운 캐리어를 팽개친 후, 따로 준비했던 작은 토트백에 만약을 대비한 여분의 타월과 생수, 몇 개의 칼을 더 챙겨 넣는다. 토트백을 둘러메고 비상계단 입구로 들어선다. 배연시설이 잘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예상대로 지하에서 1층 비상계단을 통과하기는 어려웠다. 가까스로 인파를 거슬러 가며 그 중 몇 사람을 더 찔렀다. 겨우 계단참에 올랐을 무렵 쓰고 있던 회칼을 놓쳤다. 찌른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인파에 휩쓸리는 바람에 칼을 회수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지금까지의 전과가 나쁘지 않은 칼이었기에 좀 섭섭했지만 되찾을 시간은 없다. 허리 오른쪽의 나이프를 빼들고 다시 올라갔다. 숨쉬기가 어렵지 않은 걸로 봐서는 연기가 아직 비상계단에 도달하지 않았거나, 화재 규모가 크지 않은 모양이다.

 

3층 계단을 지나가고 얼마 지나자 대피하는 사람들이 확연히 줄었다. 혼자 황급히 내려오는 사람도 보였다. 두 명 이상이 내려올 때는 그대로 피해 올라갔지만, 한 명만 내려올 때는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다.

 

몇 명이나 죽였을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닥치는 대로 급소를 찌르긴 했지만 모두 죽지는 않았겠지. 열다섯? 스물? 찌른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며 8층 계단에 다다랐을 때, 날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경찰인가. 생각보다 빠르다. 한 번쯤 만나지 않을까 예상은 했지만, 목표를 눈앞에 둔 지금 맞닥뜨리고 나니 역시나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다. 떼어내야 하지만, 일단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9층까지 올라갔다. 이제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은 없다. 계단참을 돌아 10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어이, 거기! 멈춰!”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아래층 계단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별다른 대꾸 없이 뛰기 시작하자 남자는 움찔하더니 욕을 내뱉고는 뒤쫓아 뛰어왔다. 어차피 옥상은 지척이다. 10층이 넘는 계단을 인파 속에서 칼을 휘두르며 올라온 탓에 기진맥진하지만 힘을 내야 한다. 잠시 후면 끝이 난다.

 

사내는 빠르게 거리를 좁혀온다. 그가 계단을 박차며 내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리듯 통로를 울려댔다. 있는 힘껏 뛴다. 어느새 12층이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가면 옥상이지만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남자의 발소리도 커진다. 결국 11층에서 1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쿵쾅대는 가슴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남자를 향해 나이프를 겨눴다. 남자도 헐떡대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날이 선 채 흐트러지지 않는다.

 

“후우, 하아……젠장.”

 

검은 색 가죽 재킷이 남자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따라서 오르내린다. 체격이 좋고 강인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다.

 

“경찰인가.”

 

“그래, 경찰이시다. 썅, 도대체 너 뭐하는 놈이야?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생각보다 일찍 왔군.”

 

“하! 이 새끼, 아주 작정하고 왔나 보네? 그래, 일찍 오셨다, 미친놈아. 아니, 진작 와 있었지.”

 

“무슨 소리지?”

 

“소매치기 잡으려고 짱박혀 있었다. 왜, 꼬와? 내 참, 갑자기 불이 나지 않나, 웬 미친놈이 사람들을 찌르면서 달리질 않나. 하여튼 너 이 미친 새끼, 그 칼 내려놓고 당장 이리 와. 내 참, 어이가 없어서. 형사 밥 먹으면서 너 같은 또라이 새끼는 처음 본다. 뭐야, 너? 정신병자냐? 요즘 자주 보이긴 하더라.”

 

“찔린 사람들은 두고 온 건가.”

 

“지랄, 진짜 제대로 돈 놈 아냐? 얌마, 네가 찔러 놓고 걱정해주는 거야, 뭐야?”

 

“그럴 리가. 죽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기왕이면 죽어줘야 하거든.”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씨발놈아, 너한테 찔린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우리가 알아볼 테니 신경 끄시고, 일루 와, 개새끼야. 널 좀 체포해야 쓰겠다.”

 

“별로 안 내키는데.”

 

“그러시겠지. 다들 그러더라고.”

 

남자가 왼쪽 허리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겨눈다. 권총이다.

 

“딱 세 번 경고한다. 칼 내려놔.”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한다.

 

“두 번째야. 칼 내려놔.”

 

최대한 천천히 오른쪽에 들고 있던 칼을 발밑에 내려놓았다.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하다. 잠깐이면 된다.

 

“좋아. 이제 이쪽으로 와.”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아주 조금만 더.

 

“싫어.”

 

“총 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좋은 말로 할 때 들어라.”

 

위로 디딘 왼쪽 발 위로 남아있는 계단은 두 단 정도. 그리 높지는 않다. 투척용 칼을 넣어 둔 파우치는 왼쪽 팔목에 차고 있다. 칼 하나하나의 정확한 위치를 머릿속에 되새긴다.

 

“따라오지 마.”

 

“너 같음 그러겠냐? 왜 따라가면 안 되는데요, 이 사이코 새끼야?”

 

“당신을 죽일 거니까.”

 

그 말을 내뱉으며 계단 위쪽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좁은 통로에서 발사된 총의 격발음이 귓전을 후려갈긴다. 첫 번째 사격은 빗나갔다. 12층 비상계단 출입구 앞에 쓰러지며 몸을 날릴 때 빼내 둔 투척용 칼을 남자에게 던졌다.

 

“악……이런, 썅!”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감싼 채 뒤로 물러선다. 얼굴을 스치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지체해선 안 된다.

 

“제기랄! 멈춰! 멈추라고!”

 

아니, 그렇게는 안 돼. 마지막은 바로 위, 멀지 않은 곳에 준비되어 있다. 거기서 계획의 결과를 확인하고 난 후 최후를 맞는다. 당신은 나의 죽음일지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보인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눈일까, 텅 빈 하늘일까.

 

온 힘을 다해 뛰어 문을 열어젖힌다.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세차게 뒹굴었다. 바닥에 쓰러져 눈을 뜨니 정원과 노천카페로 이루어진 옥상이 보였지만 곧 무언가 뜨겁고 끈적대는 것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린다. 바닥에 부딪히며 머리에 상처가 난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눈을 비벼 피를 닦아낸다. 눈앞이 흐리지만 일단 앞은 보인다. 하늘, 저 하늘 위…….

 

그곳에, 눈이 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백화점 옥상의 상공, 그토록 대면하고자 했던 눈이 떠 있다. 낮게 깔린 구름 너머로 보이는 압도적인 크기, 회색과 갈색이 뒤섞여 빛나는 홍채,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심연의 입구 ― 둥글고 검게 꿈틀대는 동공이.

 

가슴 속에서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해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는 오직 나로써 재앙이 되었다!

 

몸을 추슬러 일어선다. 긴 시간의 노력을 거쳐, 마침내 탑의 꼭대기에 섰다. 나는 승리자요, 살아있는 재난이다. 그러니 내겐 자격이 있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저 미지의 존재에게 질문할 자격이 있다!

 

“내가 너를 여기로 불러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인가? 왜 나타났는가?

 

너의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는가?

 

수많은 질문들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라 말하기가 힘들다. 잠시 헐떡거리고 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더 끄집어냈다.

 

“너는……!”

 

총성.

 

그 남자가, 쐈다.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았다.

 

다시 쓰러진다. 몸을 감싸고 있던 생명의 방벽에 틈이 생기고, 그곳으로 죽음이 새어드는 순간. 그 사이 익숙해진 감각이다.

 

눈은 여전히 하늘 위에 떠서 나의 종말을 주시한다. 그럴수록 시야는 더 명료해지고 주변 모든 풍경이 똑똑히 보인다.

 

남자가 다가와 쓰러진 내 머리 위에 선다. 그림자가 져 잘 보이지 않는 남자의 얼굴 위에 부유하듯 흔들리는 두 개의 눈이 보인다. 크기도 제멋대로이고, 남자의 얼굴에는 너무 크다. 그 두 개의 눈이, 하늘 위 거대한 눈과 함께 나를 내려다본다. 본 적이 있는 눈이다. 이전의 악몽, 거울 속에서 마주했던 그것.

 

―.

 

기척이 느껴진다.

누군가 말하려 한다.

형사인가, 아니면…….

 

― 나는.

 

그가 아니다.

낯선 목소리.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거친 비바람처럼 경계가 불확실하며 난폭하게 하늘을 울리는 소리.

 

― 네가 태어났으며.

 

……뭐?

뭐지?

 

― 돌아와 스러질 땅.

 

아니야.

뭔가 잘못되었다.

이건 내가 듣고자 했던 대답이 아니야.

 

― 시간이 되었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앗—!”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야!

나는 스스로 재앙이 되었다. 네가 만든 재앙의 부스러기 따위가 아니야!

 

“으아아아아—!”

 

바람이 휘몰아친다. 이지러지기 시작한 대기 속에서 몸이 뒤틀리고, 발끝부터 머리카락 하나까지 소용돌이 속에서 짓이겨진 채 뒤섞여 저 위로, 검게 열린 동공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눈은 고통에 차 절규하는 나를 바라본다. 동공 너머 끝없이 펼쳐진 심원이 보인다. 바람에 휩쓸려 돌아가게 될 먼 곳의 풍경이.

 

어둠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어둠 속을 부유하는 수천 개의 눈, 이오를 감시하던 아르고스의 그것처럼 내가 만든 모든 죄악과, 증오를 머금은 불길을 담고 나를 주시하는 눈들이 보인다.

 

그 때, 무전기의 교신 채널이 개통되듯 갑자기 수많은 영상들이 흐려져 가는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아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수없이 준비된 참사와 재난의 씨앗이 되기 위하여 생겨났다. 정해진 어느 시점, 단지 그것을 위해 나타나고 스러질 어둠의 일부였다.

 

나의 기원은 눈이다-눈은 먼 곳에서 왔다. 선도 악도 아닌 곳,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별의 바다 너머, 인간의 정신으로서는 감히 그려볼 수조차 없을 아득한 대륙과 산맥의 건너편에서.

 

짧은 시간 안에 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빛깔을 띤 가지각색의 풍경, 빛으로 둘러싸인 별들의 지류와 무궁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잔인한 깨달음으로 인한 절망, 밀려드는 무한한 정보가 흐려지기 시작한 정신에 가하는 압력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미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천천히 공간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나는 긴 여행을 떠난다.

 

그 끝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바다일 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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