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너 편지 써 봤어?”

쉬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원버튼 게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성이가 내 앞자리로 와서 불쑥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지성이가 먼저 날 찾아와서 놀랐다. 녀석한테 말을 걸 사람이 나밖에 없긴 하지만, 보통은 내가 지성이 자리로 가서 얼쩡거리는 편이었다. 지성이가 먼저 찾아오는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내 사회친화적인 능력이 필요한데 내가 잠을 자느라 저한테 가지 않을 때, 딱 그때뿐이었다.

그리고 지성이가 한 말 때문에 놀랐다. 뜬금없이 편지라니. 요즘은 물론 그때라고 편지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낼 일이 그리 흔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색하게 편지?” 하고 되물었다. 녀석이 또 잘못 말한 게 아닌가 했지만 지성이의 표정은 결연해 보일 정도로 분명했다. 결국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한 번 편지하고 중얼거렸다.

있지.”

지성이의 얼굴에 빛이 비췄다. , 3교시가 끝난 시간이기도 했다.

자세히 말해 봐.”

, 중학교 1학년 땐가? 백일장으로 부모님한테 썼지. , 그때 그냥 그림 그리는 건데. 준비물 챙기기 귀찮다고 뭣도 모르고 편지 쓴다고 했다가 원고지 10장 채우느라 죽을 뻔 했잖아. 근데 넌 왜 그러는데?”

지성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거 말고.”

그럼 뭐? , 요새 누가 편지 같은 걸 써? 쓸 사람도 없지만 있다 해도 버디버디 뒀다 뭐하는데?”

참고로 버디버디는 그 시절 유행하던 메신저 프로그램이다.

지성이는 머리를 뒤로 젖혀 벽에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살짝 기분 나쁘려다 뒤늦게 나의 희귀한 자아가 내게 속삭였다. 지금 지성이는 나한테 조언을 구하는 거라고. 그건 내 희귀한 자아만큼이나 희귀한 일이었다.

지성이는 뭐든 스스로 결정하는 편리한 녀석이다. 하지만 가끔 엉뚱한 것을 물어보곤 하는데, 가령 이런 것이다. 내가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는 동안 꾸준히 순대를 소금에 찍어 먹다가 마지막 순대가 남아서야 나한테 조용히 묻는다. “어느 게 맞는 거야?” 지성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해 우리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들을 스스로 결정하면서도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일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결국 지성이가 내게 묻고 싶었던 건, 너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편지를 써 본 적이 있느냐는 거였다. 안타깝게도, 없었다, 당연히. 말했지만 버디버디가 있으니까. 하지만 인정하는 바, 낭만과는 거리가 먼 대답이었다. 지성이가 원할 만한 대답 또한 아니었고.

나는 나의 낭만적인 친구가 제법 귀여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군데?”

정색해서 관두자고 할 줄 알았는데, 웬걸, 지성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얕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요놈 봐라? 진심인 거였다. 그러고 보니 지성이가 자기 외의 인간한테 그토록 진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내가 유일한 친구이기는 하지만 진심을 담아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는 아니었고(이 설명을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영이한테도 했는데, 아영이는 끝까지 우리 사이를 의심했다.). 호기심이 동했다. 어떻게든 그 대상이 누군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제법 심각한 친구를 상대로 내 충동적인 욕구나 해소할 수는 없었다. 이 친구가 보인 모처럼의 인간적인 면모가 반갑기도 했다. 나는 지성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지성이는 단도직입적인 게 잘 먹혔다.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조금 안쓰럽기도 했지만, 내가 그때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대답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성이의 어깨를 툭 쳤다.

일단 보자고.”

 

안녕.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

일단은 내 소개부터 할까 해. 넌 나에 대해 잘 모를 테니까. 내 이름은 최지성이야. 너랑 같은 반이고, 37번이야(그거 알아? 29번이잖아. 2937 둘 다 소수야). 그리고 부반장이고.

 

소수라니? 고백 편지에 소수가 웬 말인가. 대략 이렇게 이어지는 편지의 끝엔 반전이 숨어 있었다.

 

이번 주 일요일 정오에 1번가 다운상가 앞에서 기다릴게.

 

갑자기?”

지성이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가끔 내게 하는 말을 했다.

이게 맞는 거냐?”

신은 지성이에게 높은 지식(고지식)’을 준 대가로 그 나머지 모든 것을 앗아간 듯했다.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사이코패스라는 강력한 근거였다.

신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건 결국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오만방자한 생각이었다.

 


다운상가 벽에 기대 핸드폰 게임을 하던 나는 눈가로 보이는 움직임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고 서 있던 지성이가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 지성이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걸 보고 나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 정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 지 벌써 한 시간이 됐다는 뜻이었다.

그 애는 나오지 않았다. 슬쩍 지성이의 얼굴을 살폈지만 원체 속을 알 수가 없는 놈이라 기분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나 같은 단순이(지성이 작품이다)’는 죽었다 부활해도 모를 것이다. 왠지 알면 제정신으로 못 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지성이는 마치 버스라도 기다린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한테 말했다.

가자.”

그러고는 다운상가 2층에 있는 당구장으로 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왠지 앞서 계단을 올라가는 지성이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여 그냥 입 다물고 따라 올라갔다. 일요일 정오의 당구장은 한산했고(그냥 장사가 안 됐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성이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깨끗해서 나쁘지 않긴 했다. 주인 형도 마음에 들고.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신문을 읽고 있던 주인 형은 우리를 슬쩍 보는 것 이상의 인사는 하지 않았다. 좋지 아니한가.

창가 자리로 간 지성이가 먼저 큐대를 잡았다. 늘 자기가 이기면서 한 번쯤은 선을 양보할 법도 한데. 지성이는 한결 같은 면이 있었다. 가끔 울화통이 치밀 만큼 답답한 때가 있을 때만 빼면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다.

공을 대충 던져 자리를 잡기를,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먼저 가서 기다렸다가 곧장 탁 쳐 버리는 모습은 전의를 상실케 했지만, 잔상을 남기며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허둥지둥 눈으로 좇다가 들려오는 경쾌한 공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건 분명 핸드폰 게임과는 또 다른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다. 신문 읽기에 열중이던 주인 형도 어느새 와서 뒷짐을 진 채 지성이가 그려내는 그림을 감상했다.

세상이 뭐래요?”

내가 물었다.

관심 끄래.”

그날 이후 2주에 한 번꼴로 일요일 정오에 당구를 치는 일은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 나의 위대한 지성이가 편지를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3달째인 거였다. 부친 편지만 일곱 통인가 여덟 통은 되지 싶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애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천생연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음이 곧 밝혀졌지만.

 

네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질리도록 생각해 봤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조금은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 같아. 그렇게 내 자신을 설득해 봤지만 쉽진 않네. 일종의 연습같은 게 필요할 것 같아. 미안한데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나까지 덩달아 바람 맞는 건 사실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지성이가 특별히 잘난 구석도 없고 성격은 모나기가 천하제일검 못지않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퇴짜 놓을 녀석은 아니건만.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도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애의 태도였다. 그 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완전히 똑같이 행동했다. 한 번은 지성이와 그 애가 대화 비슷한 걸 했다(이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 원인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두 사람은 학급 간부였다. 그 애가 반장, 지성이가 부반장. 그 아웃사이더 최지성이 어떻게 간부가 됐냐고? . 귀찮은 거 싫어하는 애들 몇 좀 구워삶았지. 지성이가 간부를 맡으면 학교생활이 수월해진다. 아쉽게도 반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핸드폰 게임을 하는 척 둘 가까이에 자리 잡고 귀를 기울였다. 교무실에 갔다 온 지성이가 그 애한테 말했다.

.”

뭐래? 저 등신.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못 듣기는 그 애도 마찬가지였는지 문제집을 풀다 말고 지성이를 쳐다보며 ?” 하고 물었다.

담임이 너 오래.”

?”

몰라.”

그 애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일어나서 나가 버렸고 지성이는, 내가 보기에 약간 멍 때리는 얼굴로, 한동안 가만히 서서 그 애가 풀던 문제집만 내려다봤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어이가 없어 지나가면서 어깨로 툭 치며 중얼거렸다.

, 대신 풀어주기라도 하게?”

자리로 돌아가면서 보니 지성이는 그래야 하나?’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전히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신이시여, 저 바보가 어째서 2등급인 것입니까! 왜 저는 4등급이고요.

그날, 하굣길에 지성이는 깜짝 놀랄 만큼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 바보한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모른 척할 수 없어 아까 내가 느낀 점을 이야기했다. 실은 이 글의 핵심이기도 했다.

, 걔 너무 아무렇지 않은 거 같지 않냐?”

지성이는 대꾸할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너처럼 개싸가지도 누가 손으로 쓴 고백 편지를 받으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있겠지. 넌 그럴 수 있어. 근데 걘 너처럼 개싸가지는 아니잖아. 안 그래?”

지성이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걔에 대해 알아?”

잘은 모르지. 그래도 너처럼 개싸가지일 리는 없어. 그건 불가능해. 아무나 그럴 수는 없거든. 그랬다간 이 사회가 돌아갈 수가 없으니까. 인정?”

녀석은 침묵으로 수긍을 대신했다.

아니면 그 정도로 별로인 건가?”

나는 지성이와 마주서서 뒷걸음을 걸으며 오랜만에 나의 친한 친구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성이는 만화에 나오는 차갑고 시크한 남자 주인공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고백 편지를 받고도 개무시할 정도로 찌질한 스타일도 아니었다.

차 와.”

지성이가 내 팔을 잡고 안쪽으로 당겨 줬다. 버스가 오고 있었다. 우리가 탈 버스였다.

 

여전히 네 생각이 나.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편지지와 펜을 꺼내지. 습관처럼.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또 한 통의 편지가 내 앞에 놓여 있어. 결국 또 편지를 보내는 이유야.

 

나 전학 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원버튼 게임 때문에 글자가 다 지워진 ‘OK’ 버튼을 누르다 말고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잘못 들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 저 자식이 잘못 말한 게 분명했다. 가끔 지성이는 생각과 입 간의 소통 불화로 인한 부조리극을 연출하고는 했다. 대부분은 그저 그런 실수에 불과했지만, 어쩌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뺨치는 장면을 보여줘 모두를 경악케 하기도 하는데, 한 번은 창밖을 바라보며 누구 말대로 자신의 존재자체에 집중하던 지성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선생님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왜 사는 걸까요?” 분명 자신의 삶에 대한 물음이었을 테지만, 하필이면 그 날이 선생님의 생일이었고 우리는 한창 축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과 아이들, 심지어 나조차도 지성이의 말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몸을 사리지 않는 우정이 아니었다면 지성이의 비극은 피로써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

그러니 나로서는 지성이와 눈을 맞추고 녀석의 생각을 들여다본다는 마음으로 집중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뭘 간다고?”

전학.”

견학 아니고? , 너 잘 가는 데 있잖아. 그 뭐야, 전시회 같은.”

지성이는 날 조금 딱하다는 듯 보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아빠 지방 발령 났어.”

이거야말로 비극이었다. 나야 지성이처럼 친구가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성이는이렇게 말하긴 쑥스럽지만 나의 소울 메이트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녀석의 니체스러운 심연처럼 깊고 어두컴컴한 정신세계는 그와는 반대로 파랑새처럼 자유롭고 한없이 가볍기만 한 정신의 소유자인 내게 일종의 학교 같은 의미를 지녔다. 썩 달갑지만은 않지만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그런 지성이가 내 옆에 없다면? 나는 더 이상 배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인간으로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오버고, 지성이가 없어도 나는 인간이다. 다만, 지성이가 없는 내 삶을 그동안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막연히 허전할 것만 같았고, 실제로 그랬다. 녀석이 나처럼 부지런히 누군가와 소통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더더욱.

그렇게 모처럼 비장함에 젖어 있던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소리쳤다.

편지는?”

버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지성이가 당황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문득 아영이가 떠올랐다. 나는 아영이 때문에 저렇게 진지했던 적이 있던가? 바로 생각나지 않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전학 날이 이번 주인 거였다. 이 녀석 무신경한 거 모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섭섭해서 나는 놈의 조인트를 갈기고 먼저 버스에서 내려 버렸다.

통신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요즘 같은 시대에도 지방으로의 전학은 물리적으로 분리되는 이별임이 분명할 것이다. 하물며 컴퓨터 메신저로 이제 막 소통의 혁명이 시작되던 때에는 그 상실감이 오죽할까. 나는 식식거리며 지성이가 따라오든 말든 먼저 우리가 사는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상가를 기점으로 오른쪽은 우리 집, 왼쪽은 지성이네 집 방향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놈 성격에 먼저 연락하지 않을 텐데 그럼 학교에서 얼굴을 마주할 때까지 이 어색한 상태가 유지될 거고 그대로 인사도 못하고 나의 소울 메이트를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분식집 앞 붕어빵 기계 앞에 서서 잘 익은 놈을 집어 꼬리부터 뜯어 먹었다. 지성이도 와서 돈을 낸 뒤에 붕어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붕어빵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한참을 멀뚱멀뚱 보다가 말했다.

이거 맞는 거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도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마지막 기다림 역시 허사로 끝나고 우리는 당구장으로 올라가 당구를 치고(정확히는 지성이의 원맨쇼를 관람하고)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물론 돈은 게임에서 진 내가 냈다.) 노곤한 기분으로 상가를 나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아영이와 문자 중이었고 지성이는걔야 뭐 책을 읽거나 그냥 존재하고있었겠지.

또 당구?’

아영이도 지성이의 악취미를 알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한 건 아니다, 절대.

지금 가는 중. 이따 뭐 할까?’

오늘은 안 돼. 나 지금 1번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그때, 지성이가 날 툭 쳤다.

간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옆쪽 길로 내빼듯 가버렸다. ‘?’?’ 같은 말조차 할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뒤이어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영이가 누군가와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았지만 그 애를 잘 알았다. 이름은 장유진.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는 한 올도 빠짐없이 뒤로 묶었고 테가 얇고 알은 두꺼운 안경을 쓴 얼굴은 계란형보다 동글동글했다. 키는 아영이보다 작았지만 평균에 가까웠고 특별히 말랐다거나 뚱뚱하다고 할 수 없는 평범한 체형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아영이를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보이게 했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은 내가 묘사한 애가 지성이가(그리고 나도 덩달아) 몇 주째 기다려온 약속 대상임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지성이가 사라진 골목을 힐끔 보았다. 지성이가 아영이와 장유진을 발견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던 걸까? 머지않아 알게 될 진실이 그 해답이 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판단은 이 글을 쓰는 내가 아닌 읽는 사람의 몫이다. 사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 유난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0년도 더 지난 오늘날 새삼스레 지성이가 했던 조금은 황당하고 또 약간은 귀여운 구석도 있었던 행동을 불현듯 떠올려 보는 건 뭐랄까, 그 자체로 낭만적인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그 기분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다. 비록 내가 헤세나 피츠제럴드가 아니고, 지성이가 크눌프나 개츠비는 아니지만 말이다.

조금 화가 난 채로(이해해줄 거라 믿는다.) 나는 장유진한테 말했다. 그 애한테 직접 말을 건 건 처음이었다.

너 편지 못 봤어?”

옆에서 아영이가 보고 있으니 왠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성이가 떠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편지 못 봤냐니깐?”

편지?”

장유진은 지성이가 편지 써 봤냐고 물었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되묻고는 눈까지 동그랗게 치켜뜨고서 나와 아영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장유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러 몸을 살짝 떨고 말았다. 전에 지성이와 대화하던 장유진을 보고 느꼈던 감각이었다. 저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한 허탈감. 이번에는 그저 생각이 아니었다. 확신이 들었다. 나는 두 사람한테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달렸다. 아직까지 핸드폰이 없는 지성이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이대로 고속버스 터미널로 갈까 하다가 지성이가 편지를 부치는 우체통이 근처라는 사실이 떠올라 나는 거의 즉흥적으로 방향을 꺾어 내달렸다. 그때의 심정은 대부분이 분노였던 것 같다. 바보 같은 내 소울 메이트에 대한, 그 바보를 바보로 만든 우체통, 집배원, 우체국, 뭐가 됐든. 그리고 나 자신한테도. 글쎄,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색이 소울 메이트라는 친구가 불나방처럼 전등으로 뛰어드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기분이 자꾸만 내 목을 조였다. 최소한 편지가 전달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표시하기만 했더라면.

소용없는 생각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고, 어쨌거나 사실이었다.

 

편지를 쓰면서 몇 번이고 내 자신한테 묻고 또 물어. 나는 왜 계속해서 편지를 쓰는 걸까? 조금씩이지만 그 이유가 손에 잡히는 느낌이야. 이런 과정이 내겐 꽤나 행복함을 줘. 그래서 너한테 고마워.

 

우체통을 발견한 나는 멈춰 서고 말았다. 온몸을 가득 채운 분노가 압력밥솥의 추를 뚫고 터지는 김처럼 어디론가 빠져 나가 버렸다. 남은 거라곤 허탈감뿐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을버스 한두 대가 겨우 지나다니는 강변가에 위치한 우체통은 그마저도 하늘 높이 치솟은 버드나무와 목련나무 사이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도 않았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는지 보기만 해도 온기와 설렘이 느껴지는 우체통 특유의 빨강색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녹이 슬어 누렇게 변색된 우체통은 누가 차로 들이받기라도 했는지 심하게 일그러져 있어 발로 툭 차면 뿌리째 뽑혀 옆에 있는 낙엽 더미 쪽으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 그래도 구분조차 안 되겠지만.

우체통 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게 이상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냥 이대로 돌아서서 버스 터미널로 가고 싶었다. 가서 지성이한테 말해줘야 했다. 장유진은 네 편지 받지 못했다고. 네가 몇 달을 죽치고 앉아서 공들여 쓴 편지를 집어넣은 우체통이 사실은 버려진 것이었다고.

하지만 막상 저 처참한 꼴의 우체통을 보고 나자 또 다른 생각이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과연, 지성이가 저런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을까? 지성이가 편지를 부치러 이리로 온다고만 알았지 편지를 넣는 걸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우체통 앞에 섰다. 옆에 쌓여 있는 낙엽 더미 안에 일반 쓰레기가 섞여 있는지 말 그대로 썩은 내가 코를 찔렀다. 나는 일단 하나씩 확인하자는 마음으로 우체통 쪽으로 손을 뻗었다. 우체통 옆면에 있는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지만 우그러진 탓에 이가 안 맞아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 안이 비어 있으면 이대로 터미널로 달려가 감히 이 형님을 놀려먹은 죄로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면 될 일이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나는 우체통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편지가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대충 계산해 보니 지성이가 그동안 쓴 편지가 그대로 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하릴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다니는 산책로가 강을 따라 이어졌다. 조금 더 가면 작지만 분명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빌라도 있었다. 그런데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우체통은 마치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 추하게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지성이는 그런 우체통에 편지를 집어넣었다. 무려 3개월 동안이나!

나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움켜쥐고 우체통에 달려 있는 자물쇠를 내리쳤다. 자물쇠도 오래되기는 마찬가진지 한 번 만에 떨어져 나갔다. 나는 지성이가 쓴 편지를 몽땅 챙겨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어쩌면 내가 십여 통의 손편지를 들고 버스 터미널로 가면서 느꼈던 수많은 의문과 그것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억지로 끌어들인 빈약한 반박들, 결국 그로 인해 생겨나는 또 다른 의문들로 숨이 막힐 만큼 고통스러웠던 것은 다소 과한, 나의 엉뚱한 소울 메이트만큼이나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진실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문득문득 떠올라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하게 할 정도로.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건 말 그대로 나한테일 뿐이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한테 역시 중요한 것일 리는 없다. 여러분한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전말, 그리고 이야기의 끝일 테니. 얼마 남지 않았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지성이를 찾아 뛰고 또 뛰었다(이쯤 되면 여러분도 지성이가 자기가 가게 될 곳이 어딘지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을 거라는 걸 쉽게 짐작했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아마 본인도 자신의 목적지를 알지 못했을 거다. 알려고도 안 했을 거고.). 드라마였다면 그 이름에 걸맞게 드라마틱한 재회를 했겠지만, 나는 비교적 쉽게 지성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자신이 기특하게 생각될 정도로 과학적인 행동이었다. 평소 지성이라면 출발 시간이 30분이나 남은 상황에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해 봤다. 곧바로 머릿속에 지성이가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고, 바로 그렇게 지성이가 터미널 밖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허무한 웃음을 터트리며 지성이한테 다가갔다.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먼저 내려가 지성이를 기다리고 계실 터였다.

나는 지성이 옆에 앉았다. 가방을 다리 위에 놓고 주섬주섬 편지를 꺼내는데 뒤늦게 지성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편지들을 발견하고는 늘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을 앙다물었다.

우체국에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그 우체통 폐기 예정이더라. 예정 치고는 너무 오래 방치됐지만.”

곧 반 년 돼.”

지성이의 대답은 그때까지도 내가 희미하게 잡고 있던 희망의 끈을 싹둑 잘라 버렸다. 나는 편지를 차곡차곡 쌓아서 녀석이 읽고 있던 책 위로 거칠게 놓았다.

난 네가 진심인 줄 알고 장유진한테 말까지 걸었다가 괜히 설명할 거리만 잔뜩 생겼잖아. 옆에 아영이까지 있었는데. 이제 어떡할 거야,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돼?”

네가 설명할 일이 아니야.”

그 말은 조금 아팠다. 꼭 나한텐 그만한 자격이 없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지성이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편지들을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보다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시간 다 됐어. 간다.”

아직 조금 남았어! 가기 전에 말해!”

?”

저 편지!” 나는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도대체 왜 쓴 건데? 너 걔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지성이는 얼굴을 붉혔다.

맞아.”

근데 왜 버려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어?”

지성이는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몰라.”

뭐야?”

지성이가 들고 있던 책을 세게 움켜쥐더니 내가 처음 보는 모습으로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몰라. 모른다고, 나도. 쓰고 싶어서 썼고, 쓰고 나니까 보내고 싶었고, 근데 왠지 무섭고, 그래서 그냥 거기 넣은 거야. 그것만으로도 그냥 좋아져서, 행복해져서 또 쓴 거고, 또 넣고, 계속해서 한 거라고. 됐냐?”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웃었다.

그 정도로 좋아하면서 왜 그랬냐니깐?”

지성이는 금방이라도 돌아설 것처럼 몸을 반쯤 돌리고 서서 쓰레기통을 쳐다봤다.

편지를 쓰다 보니까 든 생각이 있어. 내가 정말로 그 애를 좋아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 한 통 두 통 쓰면 쓸수록 그 생각 때문에 너무 혼란스럽더라고. 그러다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지.”

지성이가 또 한 번 손목시계를 보고는 뒷걸음을 걸었다.

진짜 시간 다 됐어. 간다.”

그 결론이 뭔데?”

내가 거의 애원했다.

지성이가 씩 웃었다.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고, 지성이의 다음 말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었다.

내가 정말 좋아한 건 그 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 그 애를 좋아하며 느끼는 감정, 그 애를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 그 애를 좋아하는 내 자신을 좋아한 거 같아. 어쩌면 말이야.”

그게 뭔 개소리야?”

나는 억울함을 담아 소리쳤다. 지성이는 또다시 씁쓸한 미소를 보이고는 돌아섰다. 버스 창가에 앉은 녀석은 날 한 번 보고는 책을 보는지 시선을 떨궜다. , 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가 지성이를 데리고 떠나 버렸다.

정말로 지성이는 본인이 말했듯 누군가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기를 좋아했던 걸까? 그래서 편지를 썼던 걸까? 글쎄. 한 가지 분명한 건 지성이가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감히 내가 생각하기에, 지성이한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스스로한테 묻는 것이다.

맞는 거야?’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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