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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妖狐) 설화

 


내 천년을 살며 아홉 꼬리를 얻고, 재물이 산천 가득 흘러넘쳐 살아감에 조금도 아쉬움이 없었거늘. 아, 한탄하도다. 안개 자욱한 산자락을 거닐다 그대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내 꼴이 이 지경으로 우스워지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이하여 그대는 내 눈앞에서 목을 매달려 하였단 말인가.

그래. 누구를 탓하겠느냐. 모두 내 선택이고 내 책임인 것을. 내가 밧줄을 끊어 그대의 목숨을 구했다. 연신 기침을 해대는 그대가 안쓰러워 차가운 시냇물도 떠다 주었다. 금방까지 생을 끊으려 했던 그대는 우습게도 그 물을 단 꿀처럼 벌컥 들이켰었지. 아아, 기억이 한낮의 햇살처럼 쨍하여 만지면 손을 베일 듯 하구나.

내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어찌 목숨을 놓으려 하는가?”

하자, 그대는 이리 답했었지.

“가문의 재화를 모두 잃고 벼슬길에 오르지도 못하여 부끄러워 그러오.”

그대가 설명하기를, 집안의 독자로 태어난 그대는 아비를 일찍 여의고, 기울어가는 가세를 일으키려 십수년간 과거에 매진하였더랬다. 손위의 누이가 혼례도 미루고 그대의 급제를 위해 집안의 모든 재화를 쏟았으나, 안타깝게도 그대는 향촌의 작은 관직조차 오르지 못하고 번번이 낙방하였다.

그대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서삼경 어디에도 벼슬을 돈으로 사는 법이 쓰여있지 않았던 탓이다. 지나친 순수함이 되레 짙게 눈을 가리고 있었으니, 동기들이 관직에 나아가는 동안에도 그대는 그 비결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 후에 그대를 딱히 여긴 자가 조용히 진실을 귀띔해 주었으나 때가 늦은 뒤였다. 재산이 이미 바닥을 드러내 감투 값을 치를 돈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연을 들은 나는 기가 막혀 그대를 질타하였다.

“배부른 소리 말거라.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해 부끄러운 짐승이 산천에 가득한데, 그깟 벼슬이 무어라고 귀중한 인간의 삶을 쉬이 내버린단 말인가. 광명한 햇살을 스스로 꺼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허나 그대도 기세 좋게 맞섰지.

“인두겁을 뒤집어썼다 하여 모두 인간인 것은 아니오. 서른이 되도록 학업도 완수치 못하고 누이가 벌어다 준 밥만 축내는 자가 어찌 사람이겠소. 이대로 부끄러움을 잊은 짐승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심히 두려워 그 전에 삶을 끊고자 했던 것이오.”

측은한 일이다. 천년을 살은 나도 산천을 누비는 소소한 재미에 만족하며 살아왔거늘, 그대는 한갓 인간 주제에 어찌 그리 고고하게 군단 말인가. 무엇이 그대의 혼백을 옥죄어 두 눈을 청아한 부끄러움으로 가득 채웠단 말인가.

그대의 눈빛에 혹해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따라오너라. 나의 집에 초대하마.”

산속 깊은 곳 커다란 솟을대문 앞까지 너를 데려왔을 때, 쑥스럽지만 나는 조금 의기양양해 있었다. 한껏 휘둥그레진 그대의 눈을 잊을 수가 없구나.

“놀랐느냐?”

“한양에서도 이런 집은 보지 못했소.”

“너희 임금이 산다는 궁궐도 아마 이보다는 작을 것이다.”

그러자 그대는 분노했다.

“어찌 조선 하늘 아래서 임금보다 사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의 순진함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구나.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 데 쓰인 수만금의 재화가 모두 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거늘, 너희 사대부가 어찌 나를 비난한단 말인가.”

“나라에는 정해진 법도가 있소. 한갓 금은보화로 하늘의 이치를 넘볼 수는 없는 법이오.”

“땅을 기는 짐승에게 하늘의 이치 따위 알게 무어란 말이냐.”

그제야 그대는 나의 정체를 꿰어보았다.

“지리산 깊은 곳에 매구가 한 마리 산다더니 그게 바로 너로구나.”

흥이 깨진 나는 손을 휘저어 환상을 지워버렸다. 대궐이며 비단이 모두 사라지고 어두운 굴만 남게 되니 그대는 더욱 확신하며 나를 몰아세웠다.

“역시 여우가 맞구나. 나를 여기로 데려온 저의가 무엇이냐?”

“너의 모습이 딱해 돈이나 좀 쥐어줄까 했지.”

“필요 없다.”

수만 냥을 비단처럼 팔에 걸고 유혹해 보았으나 그대는 단호했었지. 그대의 눈빛을 보아 고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더랬다. 잠깐의 유흥으로 시험해 본 것뿐이었으니, 다만 잠시라도 그대가 죽음을 잊게 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너에게 이르기를,

“돌아가는 길을 알려줄 터이니, 다시는 이 산에서 목숨을 끊어 그대의 피로 산천을 더럽힐 생각은 말지어다.”

하자, 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소.”

그대의 표정을 보아하니 당장 죽을상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아랫마을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을 그대에게 알려주었다. 허나 신경 쓰이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더구나.

“내 이 산을 두고 팔백 년 묵은 너구리와 다투는 도중이나, 그대를 차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그대가 원한다면 산자락 아래까지 안내하도록 하마.”

“그럴 필요 없소.”

그날, 그대는 차가웠도다. 그렇게 우리의 야속한 연이 끝을 맺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찌 어리석게도 늙은 너구리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단 말인가.

 


추후에 너구리가 전해주기를, 그대는 하산 길에 늙은 승려와 마주쳤다더구나. 승려가 그대에게 친절히 길을 알려주었다지.

“저쪽 기슭에는 산적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멀리 돌아서 가심이 옳을 것이외다.”

순진한 그대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커다란 바위산을 둘러둘러 걷다가 외려 산속 깊은 곳까지 빠져들고 말았다. 숲의 주박에 사로잡혀 같은 자리를 빙빙 돌기를 수 차례, 능선을 따라 어둠이 내려앉고 자욱한 잎사귀가 그믐달마저 가리게 되자 그대는 한 치 앞도 가늠치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을 따름이었다.

그대는 매서운 밤 추위를 피해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허나 그곳은 독사가 드글거리는 뱀굴이었다. 독니가 그대의 발목을 깨물고 살을 찢자 그대는 놀라 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피가 흐르는 다리를 질질 끌며 겨우 살아나오기는 했으나, 독기가 점점 올라 발은 퉁퉁 붓고 어지럼에 전신의 힘이 풀리는 모습을 보니 과연 아침까지 버티기나 할까 걱정될 지경이더구나.

게다가, 신선한 피 냄새를 맡고 금세 표범 무리가 몰려들었으니, 그야말로 여우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 격이 아니던가. 그대는 보이지도 않는 덤불길을 두 팔로 헤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허나 촌각도 버티지 못하고 숨이 목젖까지 차오르더니, 사슴처럼 가느다란 두 다리가 금세 고꾸라져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이내 쫓아온 범들이 둘둘씩 짝을 지어 다가와 그대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그러자 그대는 미련 없이 눈을 감았다. 대못 같은 이빨이 그대의 뒷 목을 찍어 누를 찰나였으니, 마침 내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대는 이미 송장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범들을 쫓아낸 나는 곧장 그대의 바짓단을 올려 입을 대고 발목에 깊게 빨았다.

“뭐 하는 짓이오!”

사정을 모르는 그대는 내게 소리 질렀다. 나는 그대의 입을 틀어막고 또 한 번 상처를 깊게 빨아당겼다. 검은 피를 입안 가득 머금어 양손바닥에 뱉은 다음에야 그대는 상황을 이해하고 얌전해졌다. 나는 핏방울 하나 남지 않도록 정성스레 그대의 발목을 핥아 소독하고, 하얀 치맛자락을 찢어 상처에 감아주었다.

이처럼 내가 연달아 세 번이나 그대를 구했음에도 그대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내게 이렇게 따져 물었지.

“어찌하여 나를 구했소.”

“산에서 죽지 않기로 약조하지 않았는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기로 했지 범과 싸워 이겨보겠다 하진 않았소.”

“그래. 그렇지. 그래서 내가 너를 구하러 온 것이다.”

그대는 말이 없었다.

“고마운 줄 알라. 내 너를 심려하여 뒤를 밟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너는 싸늘히 식어 너구리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중일 터이니.”

“너구리라니?”

“그대가 만난 승려는 너구리가 둔갑한 것이다. 이 산에 살면서 너구리를 섬기는 독뱀이며, 이빨 빠진 표범 무리나 보았지 산적 따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대는 너구리의 간계에 빠져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선 것이야. 도대체가 십수 년 글을 배웠다는 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없으니, 앞날이 걱정이구나.”

그리 말하자, 그대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이리 나약한 내가 정말 싫소.”

그날 그대는 밤을 새워 꼬박 흐느껴 울었도다. 잠시 울음이 잦아들 때면 그대는 나를 거칠게 노려보곤 하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여도 그 눈빛을 꺾진 못하리라. 그대의 심성은 나약한 것이냐, 아니면 강직한 것이냐. 나는 지금도 가늠할 수가 없구나.

날이 밝기도 전에 그대는 떠났다. 산 아래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몰래 뒤를 밟아가며 온갖 짐승들을 쫓아야 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그대는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로구나.

 

 


그 후로도 나는 이따금 아랫마을에 들러 그대를 지켜보곤 했었다.

과연 다 쓰러져간다던 그대의 집안은 몇 년째 흉작이 들어 곳간마저 텅텅 비었더구나. 먹을 것이 떨어질 때마다 노비를 하나둘 팔아 쌀과 바꾸어 먹으니, 그 많던 노비도 삽시간에 사라지고, 결국 밥 지어줄 솔거조차 떠나보내고 말았다.

본디 양반이란 작자들은 거드름에 자빠져 쌀알 한 톨 주울 줄 모르는 자가 태반이나, 그대의 심성은 조금 남달랐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그대는 부끄러움을 어깨 가득 짊어졌다. 낮에는 직접 드넓은 논이며 밭을 갈고, 밤에는 땔나무를 베어 팔았다. 때로 누이가 투정을 부릴라치면 그대는 부엌 문간도 서슴지 않고 들락거렸다.

그런 그대를 보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대와 같이 올곧은 자가 고통받고, 너구리처럼 약삭빠른 자들이 금은보화를 꿰차는 것이 이 나라의 실상이라면,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운 내게도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겪는 고통 하나하나가 모두 내 탓으로 생각되기 시작하니 도저히 그대를 돕지 않을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가끔 남정네 모습으로 둔갑하여 장사꾼들을 찾아가,

“저어기 최 씨 댁이 쌀을 팔면 넉넉히 쳐주시게.”

라며, 몰래 두어 냥씩 찔러주곤 했다. 아쉽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겨우 그 정도뿐이었다. 달리 내가 도움을 주었다 한들 그대는 어차피 거절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점점 자주 아랫마을을 찾게 되었다. 낙엽이 지고 새롭게 잎이 자라기를 수차례 반복하였으나 그대의 삶은 언제나 제자리였다. 그저 굶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겨우 연명할 뿐이니, 짐승보다 나은 점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딱 하나 다행인 점은 그대의 청아한 두 눈 또한 그대로였다는 점일 테지. 나는 그대의 눈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에 돌림병이 돌았다. 그대의 마을에도 삽시간에 병마가 번져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시체를 태우는 통에 시커먼 연기가 산을 가득 뒤덮어 굴속에 틀어박힌 내 코가 매울 지경이었다.

그대의 집안에도 여지없이 화가 들이닥쳤다. 다행히도 그대는 멀쩡했으나, 대신 누이의 가슴에 열이 올랐다. 이마에선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뱉는 숨은 불길처럼 뜨거웠다. 민들레 같은 누이의 손끝은 파르르 떨려 수저조차 쥐지 못했다. 참다못한 그대는 마지막 남은 옥구슬이며 가락지를 모두 꺼내 들었다. 누이의 혼사를 치르기 위해 아껴둔 보물이었을 텐데. 그것을 억지로 내다 파는 그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이 저릿하구나.

온갖 귀하다는 약재를 달여 먹여도 누이의 열병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누이가 눈을 감았다. 상실감을 이기지 못한 어머님께서도 거짓말처럼 딸의 뒤를 따라 영면하셨다. 마을 사람들이 볏짚으로 시신을 태우는 동안, 총명했던 그대의 눈에도 탁한 연기가 가득 차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내 더는 참을 수가 없어 그대 앞에 나서고 말았다.

늦은 밤 나는 그대의 침소에 몰래 숨어들었다. 그저 툭 하니 엽전 팔백 냥을 머리맡에 내려놓고 나올 셈이었다. 허나 내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대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있었을 줄은.

“받을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

예상대로 그대는 거절했으나, 이번엔 나도 물러서지 않을 셈이었다.

“이 많은 초상을 혼자 치를 셈인가?”

“남은 것이 나 혼자뿐이니 별수 없지 않소.”

“내일부터 손들이 찾아오실 터인데 쌀밥에 고깃국 올릴 돈도 없지 않은가. 장지까지 관을 짊어줄 장정이 열 둘이나 필요한데 이는 또 어찌 마련하려는가?”

나는 그대에게 다시 한번 돈뭉치를 내밀었다.

"대체 내게 왜 이리 잘 대해주는 것이오?"

그대는 내게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었지.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설명하지 못하겠구나. 그대의 순결한 눈동자에 현혹되어 그런 것인지. 천 년 동안 짊어진 외로움이 무거워 그랬던 것인지. 혹은 그대를 살려내어 다시 삶 속에 처넣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날도 결국 나는 답을 주지 못했다. 대신 이렇게 그대를 채근할 뿐이었지.

"어쩌겠느냐? 나는 그대가 마지막으로 자식된 도리를 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돕는단 말입니까. 또한, 무슨 명분으로 내가 그 돈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대가 한사코 내 재물을 거부하기에 그만,

“내 그대의 처가 되어주면 될 것 아닌가.”

하고, 또다시 후회할 말을 내뱉고야 말았느니라.

그날 밤 우리는 집사도 없이 부부의 연을 맺고 초야를 치루었으니, 천년을 넘게 살아온 내게도 이는 처음 있는 일이라 문득 설레기도 하고 많이 두렵기도 하여, 마치 모든 털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온몸이 떨리었다. 내 오직 의지할 데라곤 너의 깊은 눈동자뿐이었다. 너의 눈빛은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들의 상을 함께 치르고, 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을 무사히 버티어냈다. 봄과 함께 새로운 얼굴들이 마을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부부로 자리 잡았다. 나는 멀리 강원도에서 내려온 양갓집 자녀로 둔갑하여 그대의 안주인이 되었다. 정체를 속이고 사람행세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역병으로 팔 할이 죽거나 떠나버린 마을엔 이야기를 꾸며 속일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대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올곧았으므로, 금세 가문의 영광은 되돌아왔다. 우리는 가난으로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어느새 집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봄기운을 따라 한 해 농사가 시작되었다. 여름 내내 나는 입속에 머금은 보주를 굴려 한가득 풍요를 불러모았다. 단비가 대지에 촉촉이 스며들었고, 포근한 바람이 그 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그대는 연일 땀을 쏟으며 이 땅끝에서 저 땅끝까지 거름을 내리고 잡초를 뽑느라 허리 한 번 펴본 적이 없었다. 모진 노력의 결과 그해 가을에는 처음으로 지평선 끝까지 가문의 드넓은 논이 모두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대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기억하는가? 우리가 함께 언덕 위에 올라,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질리도록 논을 바라보았던 날을. 그대는 처음으로 내 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다. 그대의 손은 마르고 거칠었으나, 세상 무엇보다 아찔하게 뜨거웠었다. 그대는 내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부인. 처음에는 부인의 마음을 의심했었소. 진실하지 못한 혼례라 생각하며 후회한 적도 많았소. 하지만 지금 이렇게 돌이켜보니 참된 짝을 만났다는 것을 알겠소. 한참 부족한 내가 부인과 같은 이와 연을 맺은 것은 실로 하늘에 감사히 여길 행운이오."

이러한 말을 처음 들어본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말없이 그대를 품에 끌어안았다. 이토록 기분 좋은 말을 듣고서 한가득 눈물이 차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산중의 짐승으로 사는 동안엔 기쁘면 기뻐하고 화가 나면 화를 내면 될 뿐이었는데.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란 어찌나 복잡한 것인지. 나는 여전히 감정이란 것이 어렵구나.

수확을 마친 그대는 곳간 가득한 쌀가마니를 마을 모두와 나누었으니, 이 또한 세간의 존경을 받을만한 일이다. 관직에 오른 이들이 모두 그대와 같다면 이 나라가 그리 혼란스러워질 일도 없었으리라. 그해 겨울은 모두에게 따뜻한 계절이었다.

 

 

한 날은 그대가 나를 불러다 놓고 실없는 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부인. 내 그대의 낭군이 된지도 꽤 지났으니, 이제 존칭을 쓰셔야 하지 않겠소?”

나는 한껏 눈가를 찡그렸다.

“싫다. 내 너의 부인이 되어주었으니, 네가 나를 하대하면 되지 않느냐.”

“법도에 어긋나오.”

“낭군아. 그대가 말하는 법도라는 것은 고작 백 년 전에 생겨난 것이다. 낭군에겐 이러한 규칙들이 영원한 하늘의 이치처럼 보일지 모르나 내게는 잠시 스쳐 갈 아집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구나.”

한참을 싸우겠구나 생각했건만. 웬일로 그대는 더 고집 피우지 않았다. 그 대신,

“ ‘낭군아’라고 불러주니 듣기 좋소.”

라며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던가.

 

 

또 한 날은 그대가 서책을 읽다 말고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어찌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대는

“부인 얼굴이 하도 고아하여 잠시 글을 잊은 것이 아니겠소.”

라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기도 하였었다.

 

 

우리의 혼례일이 돌아올 때마다 그대가 선물해주는 가락지를 받아 들고 면밀히 살펴보며 쓰다듬는 일도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대는 잘 감추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대가 죽은 누이를 생각하며 내게 가락지를 주었다는 것을 안다. 나를 보는 표정 또한 마치 죽은 누이를 바라보듯 하였다는 것도. 허나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낭군의 빈 마음을 메우는 것 또한 부인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대 또한 내 천년의 공허함을 채워주었으니.

그대가 이처럼 나를 어여삐 여기고 아껴주니, 열 개가 넘는 가락지가 쌓이도록 부족함을 느낄 일이 없었다.

 

 


이렇게 소소하고 지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더구나. 결국 전란이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가니, 왜구가 바다를 건너 부산을 뭉개고, 쏜살같이 한양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왕의 목숨이 흔들리는 촛불과 같고, 백성의 삶이 한갓 구더기보다 처참히 짓밟힐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상우도 각지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이라는 자가 휘갈긴 초유문(招諭文)이 나부꼈으니, 어찌 그대가 나서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본디부터 이리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대가 반쯤 찢긴 초유문을 내밀며 내게 고하기를,

“국운이 기울어 온 나라가 바람결에 쓰러지려 하니, 나 또한 사대부의 후예 된 자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창의거병(倡義擧兵)함이 옳소.”

라고 하였다. 나는 기가 막히어,

“거병하여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인가.”

하고 물으니, 그대는 이리 답했다.

“진주성이 함락의 위기에 처했다 하니 구원을 나서야 하지 않겠소.”

“그깟 돌무더기가 뭣이 중요하다고 그러는가.”

“성이 무너지면 왜구가 서쪽의 논과 밭으로 쏟아 들어올 것이오. 나라의 곡창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란 말이오.”

나는 이대로 질 수 없어 거칠게 맞섰더랬다. 허나 너의 의지를 꺾을 수 없으리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

“내 동쪽에서 날아온 새들에게 전해 듣기로 왜놈들은 사람을 창칼로 찔러 죽이고 아녀자 겁간하기를 세끼 밥 먹듯이 하는 자들로 전쟁에 이골이 난 미친 망령이라 하더구나. 반면에 낭군은 어디 칼이나 한번 휘둘러본 적 있는가? 붓밖에 잡아본 적 없는 자가 어찌 전장에 나선다는 것인가.”

“집집마다 사람이 일시에 같이 일어나 싸우면 군세가 크게 떨쳐 창칼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니, 승세란 모르는 것이오. 동지들과 충의로 결속하고 성을 쌓아 지킨다면 하늘 아래 떳떳하니 무엇이 두렵겠소. 일이 이루어지면 나라의 치욕을 씻을 것이오, 이루지 못한다 해도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니.”

“낭군아. 그것은 너의 말이 아니다. 김성일이란 자가 쓴 격문을 그대로 읊어대고 있는 것이 아니냐.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듣고 짐짓 아는 체만 하지 말고 낭군의 생각을 말해보라. 그대의 진심을 말하란 말이다.”

그날 그대의 눈동자는 분명 떨고 있었느니라. 아니, 어쩌면 그대의 눈동자에 갇힌 내 혼이 떨고 있었는지도. 그대는 내게서 홱 고개를 돌리며 이리도 차갑게 말하지 않았더냐.

“주종의 관계는 부부의 연보다 천배는 중한 것이오. 이는 하늘의 이치란 말이오.”

“낭군아. 그대가 세상의 이치라 하는 말들은 삼백 년 전엔 흔적조차 없던 것이다. 내 겪어보기를 그대의 조상들은 훨씬 지혜로웠다. 힘겹게 고통받고 멸시받을지언정, 짐승의 시체를 빌어먹을지언정, 이처럼 가족을 저버리지는 않았더랬다.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법도가 아니더냐. 충절이며 순국이 다 무어란 말이냐. 어찌 한갓 말장난에 인연도 가족도 모두 버린단 말인가.”

허나 그대는 완강했다. 내가 그대의 바짓자락에 매달려,

“꼭 이래야 하겠느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이렇게 자존심도 긍지도 내려놓고 빌었는데, 너는 나를 어찌 대했느냐. 법도를 모르는 짐승이라며,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패악한 말들로 나를 멸시하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꾹 참고 그대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결국 그대를 떠나보내고야 말았구나.

얼마 뒤 첫 번째 전투가 치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식꾼은 그대가 고작 삼백의 병사를 이끌고 일만의 군세와 맞서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모인 병졸의 수가 너무 적어 모두가 그대를 말렸으나 그대는 듣지 않았다고 했다.

하긴, 설사 천 명, 이천 명이 그대의 편에 있었다 한들 어찌 그대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대라고 그것을 몰랐겠는가. 묵묵히 법도에 따랐을 뿐이었겠지. 대체 그대는 나약한 것이냐, 강직한 것이냐. 나는 여전히 가늠할 도리가 없구나.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 함께 죽자 하더니, 어찌 나를 두고 그리 쉽게 먼저 간단 말인가.

그 후로 내 꼬박 반년을 기다렸으나 한 조각의 갑옷조차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낭군아. 그대가 없었음에도 성은 굳건히 함락되지 않았더랬다. 커다란 철포가 천지를 휩쓸고, 진주성 높은 담이 그들을 비호하니, 삼천의 병사가 능히 삼만 왜군을 당해내었도다.

꼬박 엿새의 싸움으로 모두가 지쳐있었으나 그들은 동지의 죽음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은 이들이 모두 모여 먼저 떠난 자들을 기리기로 약조하니, 커다란 하천에 하얀 종이배를 띄워 등불을 이루기로 하였다. 나 또한 그대의 수급을 찾을 길이 없던 차에 천길을 한걸음에 달려와 그들과 함께 함께 등불을 올리려는데, 어디선가 입에 서책을 문 검은 여우가 나타나 배시시 웃는 것이 아니겠는가.

검은 여우가 내게 이르기를,

“아이야. 연모하는 이를 잃고 어찌 이제사 후회하는고.”

라고 하였다.

“검은 요호께서는 어찌 저의 이야기를 아시는가?”

하고 물으니, 검은 여우는

“내 나이가 삼천 년을 훌쩍 뛰어넘어 도술에도 통달하였는데, 그런 작은 일을 알아내는 것은 푹 젖은 다람쥐를 잡는 일 만큼이나 쉬운 것이다.” 하고 말하며, “삼천 년을 살은 나조차도 인간들과 엮이기를 두려워 이 산 저 산으로 은거하며 살아가고 있거늘, 자네는 어찌 천년을 겨우 채운 주제에 그리도 깊숙이 얽매이고 말았는고.”

라고도 하였다.

“내 자네를 딱히 여겨 딱 한 번 기회를 주려 하네.”

그가 그리 말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기에, 나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거늘 요호께서 무슨 기회를 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허공에 매달린 동아줄을 내게 내밀더구나.

“이는 시간을 되돌리는 동아줄이네. 세 번 절하고 일곱 번 당기면 자네가 원하는 과거로 되돌아갈 것이야. 그 대신.”

그리고 앞발을 들어 이렇게 제안하더구나.

“대가로 그대의 꼬리를 하나 내어주셔야겠네.”

 

 


낭군아. 나는 꼬리를 하나 바칠 수밖에 없었느니라.

꼬리를 건네고 동아줄을 당기니 과연 신묘한 기운에 감싸여 나는 시간을 거슬러 아래로 아래로 추락했도다. 정신을 차리니 그대가 다시 나의 앞에 서서 반쯤 찢긴 초유문을 내미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너무 놀라 그대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말았다. 부끄러움도 잊고 생전 처음으로 비 오듯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으니, 그대는 이승과 저승 어디에서도 결코 나의 울음을 알리지 말지어다.

그대는 또 한 번 내게 주장하였다.

“국운이 기울어 온 나라가 바람결에 쓰러지려 하니, 나 또한 사대부의 후예 된 자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창의거병(倡義擧兵)함이 옳소.”

이번엔 나는 그대를 말리지 않기로 하였다. 대신 산에서 가져온 남은 재화를 싹싹 긁어 건네었으니, 이는 능히 병사 삼백을 철갑으로 무장하고도 남을 재화였다.

“그리하시게.”

“정… 정말이오?”

“어찌 그리 놀라는가.”

“부인이 반대할 줄 알았소.”

“그대를 말릴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으니, 대신 이를 받으시오.”

내 그대를 붙잡아 입에 처음으로 입술을 맞추었느니. 아아, 다시 없을 어여쁜 감촉이여. 그대의 애정은 달콤하고 또 달콤하였도다. 천년을 들여 일구어낸 보옥이 미끈한 혀와 혀를 타고 그대의 목구멍 속으로 아찔하게 쑥 빠져들었으니, 그대는 이제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졌음이라.

나는 옷자락을 추스르며 그대의 눈을 가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 구슬을 삼킨 자는 처음 마주 보는 존재의 이치에 눈을 뜨게 되니, 처음 눈을 뜨고 하늘을 본다면 하늘의 이치를, 땅을 본다면 땅의 이치를 깨닫게 될지어다.”

하늘도 땅도 아닌, 나를 바라보아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허나 그대는 하늘을 택하였었지.

과연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그대는 승승장구하였다. 진주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왜군을 능히 무찌르니, 금세 또 한 번 삼만의 왜군이 성을 침공하는 날이 되었다. 그대가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산세를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여우불을 일으켰다. 환상에 미혹된 왜놈들은 산중 곳곳에 의병이 진을 친 것으로 오인하여 서둘러 성을 두드리다 되레 큰 해를 입고 말았다.

왜군이 진주를 포기하고 물러나니 드디어 사는가 싶더구나. 잠 한번 청하지 않고 꼬박 보름을 달린 탓에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시간이 반년이나 흘러있어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은 지리하게 계속되고 있더구나. 이미 명(明)에 패하여 그 끝이 보이는 전쟁인데도, 반심을 품은 왜군이 한갓 자존심을 보전하려 진주성 앞에 모여들고 있었다. 높은 산 위에서 굽어살피니 모여든 왜놈의 수가 십만을 훌쩍 넘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더구나.

나는 그대를 찾아 성 내를 수소문했다. 꼬박 반나절을 돌아다니고서야 성곽 그늘에 활을 안고 마른 볏짚처럼 늘어진 그대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랜 싸움으로 지쳤는지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더구나. 연모하던 청아한 눈동자도 피에 젖어 탁해진지 오래라, 다시는 본래의 색을 찾을 수가 없겠더라.

다시 만난 반가움에 그대를 품에 안으려 했건만, 그대는 차갑게도 고개를 돌려 내게서 거리를 두었다. 왜 그랬느냐. 나를 위함이었다 변명하지 마라. 내 그대의 불안을 모르고 상처를 모르겠는가. 그렇다 해도 어찌 나를 멀리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아픔을 잊으려 그대에게 말을 걸었다.

“낭군아. 왜구가 다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소.”

“이번엔 오합지졸이 아니라 고니시니 가토니 하는 명장들도 온다고 하더구나.”

“그렇다고 들었소.”

“겁을 집어먹고 떠난 이가 수만에 이르더구나. 그 대단한 곽가도 떠나지 않았더냐.”

“맞소.”

“어찌하여 그대는 떠나지 않는 것인가. 하늘의 이치를 꿰뚫어 보았으니, 결말이 어찌 될지도 알고 있을 터인데. 그대의 운명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이미 알지 않는가.”

그대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부인. 성안에는 아직도 오만이 넘는 백성들이 남아있소. 내 어찌 죽음이 두려워 이들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이번에도 역시 흔들리지 않았도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좋다. 정 여기서 끝을 보겠다면, 나도 그대와 함께하겠다.”

그때 처음으로 그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이리 말했었지.

“아내 된 자를 전장에 내미는 지아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서 떠나시오, 부인. 조상들께서 이를 아시면 저승에서 깊이 노하실 거요.”

“그대의 조상들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니 닥치거라.”

그대는 야속하게도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나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었더라면 그나마 속이라도 시원했을 것을.

 

 


목사도 죽었건만, 왜놈들은 어찌 그리도 집요하게 진주를 무너뜨리려 한단 말인가.

때는 음력 유월에 이르러, 종일 비가 쏟아졌다. 활줄이 녹고 화약이 젖으니 그 대단한 궁술과 철포도 모두 무용지물이라, 병사들은 어찌할 방도도 없이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빗물을 머금은 대지가 황토처럼 질척이니, 여기저기 성벽마저 가라앉고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때에 멀리서 왜군이 진격하는 나팔소리가 들렸다. 벼랑에서 구르기 시작한 돌을 어찌 멈춰 세울까. 왜놈들의 미친 물결이 백성의 핏물과 뒤섞여 남강을 붉게 적시니, 하늘의 이치를 깨우친 그대조차도 터진 둑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대가 비탄에 찬 눈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할 때, 내 마음은 또 한 번 무너져 내리고 말았구나.

낭군아. 너는 틀렸다. 왜군은 성을 함락했으나, 그저 돌무더기를 부수어뜨릴 뿐, 나라의 곡창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너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에 목숨을 던졌을 뿐이었다.

너희 남자들은 언제나 그랬다. 백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하늘이 새로 열리고 새로운 법도가 십수번 새로 쓰여졌어도 너희들은 달라지는 법이 없었느니라. 손안의 보석은 모두 내다 버리고, 덧없는 존심에 부나방처럼 생명을 던지는 일만을 반복하니, 어리석고 또 어리석도다. 어찌 천년이 지나도록 나아지는 일이 없단 말이더냐.

나는 물속에 뛰어들어 그대의 시신을 건져 올렸다. 젖은 몸으로 힘겹게 허덕이는 내게 검은 여우가 다가와 또 한 번 속삭이더구나.

“다시 해보겠느냐.”

나는 그릇됨을 알면서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느니라.

“다시 시간을 돌려주시게.”

그러자 검은 여우는 또 한 번 앞발을 내밀었다.

“이번엔 꼬리 세 개요.”

“이전엔 하나였는데 어찌 이번엔 세 개나 요구한단 말인가.”

그러자 그가 혀를 끌끌 차며 내게 이리 말하더구나.

“어찌 그리 가볍게 생각하는가. 시간을 두 번 되감는 일이 한 번보다 어려운 것은 당연하거늘. 만물의 연기(緣起)를 뒤집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는가.”

낭군아. 내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느냐. 나는 꼬리를 바칠 수밖에 없었느니라.

 

 


나는 그대의 갑주를 벗기고 간을 씹어 삼켰다. 그대의 혼을 으깨어 보옥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런 다음 검은 여우가 내미는 동아줄을 당겼다. 정신을 차리니 전투가 시작되기 전날이었다.

나는 그대를 설득하기를 포기하였다. 나의 부족한 언변으로는 결코 그대의 눈빛을 꺾지 못할 것이었다. 대신 나는 여우의 모습으로 왜군의 진영에 숨어들었다. 10만의 병사 중 가장 야심이 가득하고 눈에 마가 서린 자를 찾아내고서, 그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이렇게 유혹하였다.

“네 비록 이름 없는 병졸이다만, 야심만은 능히 삼황오제를 넘을 만 하구나.”

내 그자에게 제안하기를,

“천하를 움켜쥘 구슬을 그대에게 주마. 이것을 삼키면 땅의 이치를 모조리 깨우치게 되니, 그 도요토미란 작자의 위엄도 능히 뛰어넘어 정명가도를 이룸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다만,”

치욕스럽고 또 치욕스럽도다. 그대를 살리기 위해 그대가 지극히도 혐오할 제안을 하고 말았으니, 이 일로 그대의 미움을 얻게 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 대가로 진주성 하나만 눈감고 넘어가 주시게.”

그래. 내 그자에게 구슬을 건네었다. 그자는 땅을 보았고, 하계의 모든 법도를 깨달았도다. 하룻밤 사이에 일곱 왜장의 목을 치고 10만 병단을 통합하였으니, 누구도 그를 막지 못할 것처럼 기세등등하였다.

허나 그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땅의 이치를 삼킨 그 왜놈은 다음 날 새벽 일찍부터 무참히 진주성을 짓밟기 시작했다. 마수와 같은 파도 앞에서 그대들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성을 책임져야 할 목사는 그대의 눈앞에서 미쳐 실성했고, 용맹한 장정들도 하나둘 총칼에 스러졌다. 지쳐 쓰러진 그대 또한 왜놈들의 손에 붙잡혀 코를 잘리고 귀를 뽑히는 능욕을 당해야 했다. 나는 또 한 번 그대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고 말았다.

 

 


천년의 지혜를 쌓은 내가 어찌하여 이리도 바보천치가 되었단 말인가.

뿌리 깊은 나무 아래 그대를 묻은 나는 검은 여우를 찾아 이산 저산을 헤메었다.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대가 보고 싶었다. 이번엔 그대의 팔다리를 꽁꽁 싸매서라도 데려 나올 작정이었다. 그대가 거부한다면 그대의 뒷덜미를 물어서라도 성 밖으로 끌고 나오려 했다. 다시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깊디깊은 산속에 그대와 단둘이 숨어, 그대의 살결과 내 살결을 합치고 입술로 입술을 맛보며 하염없이 서로의 두 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리라. 그리 다짐하며 나는 온갖 산천을 내달려댔다.

몇 날 며칠을 수소문한 끝에야 나는 검은 여우의 뒤를 잡았다.

“이제 먼 길을 떠나려는데 어찌 본인을 붙잡으러 왔는가.”

그가 말했다.

“한 번만 더 돌려주시게. 딱 한 번만.”

“알고 있는가? 이번엔…”

“다섯 개를 드려야겠지.”

검은 여우는 한숨을 쉬었다.

“천년을 넘긴 여우가 꼬리를 모두 잃으면 한갓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는가?

“내 설마 그걸 모르고 이러겠소.”

내가 답하자 그가 탄식하며 내게 말하기를,

“속세의 연에 눈이 단단히도 멀었도다. 자네는 어찌 이다지도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한단 말인가.”

라고 하더구나.

“부탁하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돌려주시게.”

나는 네 발과 배를 모두 바닥에 대고 간절히 절을 올렸다. 내가 남은 꼬리를 모조리 입으로 물어 뜯어 바치니, 그는 새하얀 털 뭉치를 뱃속으로 집어넣으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검은 여우가 본색을 드러냈으니, 그가 둔갑을 풀며 팔백 년 묵은 너구리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찔하기 짝이 없는 일이도다. 너구리가 비웃음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내게 말하기를,

“얘 여우야. 너는 천년을 살았다는 것이 어떻게 그리 우둔한 생각을 하였니. 만물이 자연의 이치대로 흐르는 법인데, 물줄기 같은 시간을 어찌 거슬러 산중으로 향하도록 한단 말이니. 너의 꼬리는 잘 받았어.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한번 잘살아 보렴. 이제 나는 떠날 테니.”

하고는, 숲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아, 너를 구하기 위해 되돌린 모든 시간은 너구리의 덧없는 환술에 지나지 않았더구나. 이제 인간의 몸이 되어버린 나는 너구리를 쫓을 힘도 없이, 그저 그대를 떠올리며 서러운 눈물을 자아낼 뿐이니. 그저 통곡하고 또 통곡할 뿐이도다.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그대의 미소가 선연히 떠오르니, 내 이승에 숨 붙이고 사는 한 그대 향한 마음을 잊을 길이 없다. 꿈에라도 나타나 어여삐 웃어주면 좋으련만, 보름 밤낮 잠을 청해도 그대는 한 번을 찾아오지 않는구나. 그대 이미 영영 멀리 떠난가 싶어 서글프구나.

이름 모를 산자락에 파묻혀있을 나의 낭군아. 이제 너를 떠나보내련다. 마지막으로 그대 얼굴 떠올려 어루만지고 나면, 이제는 정녕 강 아래 다 묻어버리고 떠나려 한다. 너는 썩은 흙으로 돌아가 뿌리가 되고 나무가 되거라. 억만겁이 지나 환생을 이루더라도 다시는 인간의 삶 따위 꿈꾸지 말고 자연에 머물다 가거라. 그것이 그대와 어울리는 삶일지니.

낙하하는 노을이 강을 적시니, 이에 비쳐 떨리는 내 모습이 마치 치솟는 불길과 같구나. 진주성 누각 아래, 위암(危巖)에 올라서서 그대에게 뜨거운 춤을 지어 올리리다. 애틋한 맘 춤사위에 가득 실어 온 하늘에 새처럼 띄워볼까 하노라.

이리 춤추며 일각이 넘도록 저자를 노려보고 있으니, 이제 그 또한 나를 눈치채고 아래로 내려오는구나.

그자가 묻는구나.

“너는 기생이냐?”

참았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 땅에 하얀 옷을 입는 기생이 있겠느냐. 너희 품에 안기면 온몸에 검붉은 피가 배어들진대.”

그자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다시 한번 나를 살피는구나.

“오호라! 알겠구나. 너는 그때 내게 구슬을 준 요괴로구나.”

“이제야 알았는가.”

그가 “이제 와 무슨 볼일인가.” 하고 뻔뻔하게 묻기에, 나는 자연스레 그자의 코앞까지 다가서서 이렇게 고하노라.

“너는 비록 땅의 이치는 깨우쳤으나, 사람의 이치는 조금도 깨우치지 못하였구나. 사람의 감정에 깊은 골을 새길수록 더 큰 배신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인 것을.”

그자가 무어라 입을 열려 하기에, 손에 쥐고 있던 뾰족한 나뭇가지를 그의 목에 쑤셔 박았다. 더는 아무 말도 지껄이지 못하는구나. 속이 시원하다. 비틀거리는 그자의 뒤로 돌아가 허리에 팔을 둘러본다. 본래 천것 출신이던 그자의 삐쩍 마른 허리는 두툼한 갑주 위로도 충분히 두 팔에 감기는구나.

“내 너를 죽이는 것은 나라를 위함도, 충절을 위함도 아니니, 그저 상실한 자의 분풀이임을 알라.”

그자가 저항을 시작하나 이미 한참 늦었다. 열 손가락 가득한 가락지가 교접하듯 맞물려 마치 우리의 인연처럼 질기게 버티어 내는구나. 맞잡은 두 손은 이제 결코 풀리는 일이 없으리라.

 

가여운 나의 낭군아.

이제 저 강 깊이 잠기련다.

이 몸이 새하얀 배가 되어 등불처럼 그대의 혼을 연모하나니.

먼 후일, 흘러흘러 바다에 닿거든,

 

나 바다와 한몸되고,

그대 산과 한몸되어,

 

어여쁜 파도를 주고받으며,

못다 이룬 합일은 그때에나 이루어 보자꾸나.

 

<끝>

 

 

 

※ 참고한 이야기

 

-여우 앞에서 목을 매는 선비, 너구리와의 다툼 등 이야기의 골자는 '천년 묵은 여우와 팔백이' 설화를 기초로 꾸몄습니다.

 

-여우가 조선 건국의 재화를 제공하였다는 이야기는 조선 개국공신 배극렴의 일화를 참조한 것입니다.

 

-입에 서책을 문 여우의 모습은 규원사화의 구절에서 모티브를 따왔으며, 삼천 살 먹은 검은 여우라는 설정은 삼국유사 원강법사 이야기를 참조한 것입니다.

 

-여우구슬의 효능 및 여우굴에서의 환상은 여러 여우 설화를 참조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 상황, 초유사 김성일의 격문 내용 등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을 참조한 것입니다.

 

-주인공 여우의 모티브인 여성에 대해서는 실존여부를 포함해 이런저런 논란이 많으나, 의병장 최경회의 후처였다는 설을 참고했으며, 물에 빠져죽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에 대해서는 게야무라 출신의 서민 로쿠스케를 뜻한다는 설을 참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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