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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고독(蠱毒)

2019.01.03 18:3901.03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이다.

 

닳고 닳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낡은 문짝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어깨를 덮은 도롱이 끝에 매달린 빗방울을 털어내며 중년 사내 하나가 객잔 안으로 발을 디뎠다. 슬쩍 구석 빈 탁자로 가 그대로 앉으며 커다란 삿갓을 벗어 내려놓는다. 늦은 밤이지만 객잔 안에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점원이 쪼르르 달려와 꾸벅 인사한다.

 

“주문하시게요?”

 

“음. 여기가 [하락객잔]이 맞소?”

 

“예이. 근방에 객잔은 저희밖에 없습죠. 비가 이렇게 쏟아지면 저희는 장사도 더 잘되고 좋답니다.”

 

“확실히 늦은 시각에 손이 많군.”

 

기다란 앞머리가 양쪽으로 갈라져 얼굴을 덮을 정도로 내려온다. 코밑의 수염은 단정하다. 뭔지 모를 중후하고 우아한 풍채가 느껴져 점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멍하니 사내의 얼굴을 쳐다만 본다. 그건, 객잔 안에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사내가 허리춤에 찬 검을 들어 탁자 위에 놓는다. 바로 그 검집에 대부분의 시선이 쏠리는 것.

 

“술은 필요 없네. 간단한 요리만 부탁하오.”

 

“사천(四川)에선 고추죠. 고추 볶음이 잘 나갑니다.”

 

“좋네.”

 

검집은, 어느 고목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품이 있다. 드러나는 손잡이는 짧은 흑색과 백색의 끈들로 치장되어 있다. 흑백이라. 강호인의 대부분은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알 것이다. 흑과 백. 음과 양.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객잔 안을 쓱 훑던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톡톡. 톡톡. 준비된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사내는 계속할 요량이었다. 톡톡. 톡톡. 톡. 톡. 톡톡. 잠시 후 점원이 뜨듯한 김이 모락 풍기는 접시를 손에 들고 쪼르르 달려온다.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탁자 위에 내려놓자마자, 사내가 젓가락으로 하나 집어 들어 그대로 입에 가져가 씹었다. 잠깐 우물거리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맵구먼.”

 

“타지에서 오신 분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한답니다.”

 

점원은 뒤이어 들릴 객잔 내 웃음소리를 기대하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타지인들에게 일부러 가장 매운 고추만 골라 볶음으로 내놓고 신고식을 하는 건 하락객잔의 대표적인 풍습 중 하나다. 비웃는 소리가 가득 들어차야 하는데, 점원의 생각과는 달리 너무도 조용했다. 고요한 그 정적에 점원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얼른 사내에게 되물었다.

 

“아이고. 그, 아주 매우십니까? 요리를 다시 내어드릴까요?”

 

“이렇게 강렬하니 그만큼 성도(成都)의 차가 좋은 법이지. 사천의 차가 최고라 들었소. 어디, 그 유명한 차는 뭐가 있나?”

 

“차, 차요?”

 

객잔에서 술과 요리 말고 차를 청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점원은 적잖이 당황했다. 물론 있기는 하지만 식전 입가심과 식후 마무리의 용도로 그냥 내주는, 차라고 하기에도 뭣한 녹찻물이 전부다. 점원이 우물쭈물하는 걸 보며 사내가 큰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없으면 말게. 객잔에서 차를 청하는 이 또한 얼마나 우습겠나. 이래도 웃지들 않으니 김이 새는구먼. 나는 그저 방랑객일 뿐이오. 그리 경계하시지들 말게나.”

 

사내의 말에 뼈가 있어 점원은 황급히 몸을 숙여 요리 접시를 얼른 들었다. 분명 요리로 골탕 먹이려던 점원과 객잔 안에 있는 이들을 비꼬며 말한 것이 분명했다. 서둘러 물러나는 점원의 등 뒤로 사내의 요청이 들렸다.

 

“비는 피해야 할 터이니 요기는 해야겠고, 안 맵게 다시 부탁함세.”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앉아있던 탁자 주변 이들도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황색 도포를 입은 그들은 한 집단의 무리로 보였다. 가장 먼저 일어선 사내가 천천히, 하지만 절도있게 사내가 앉아있는 탁자로 다가와 포권(包拳)을 취하며 예를 갖춘 후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지만, 무당파(武當派) 선배님이 아니신지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 손잡이에 달린 흑과 백의 끈을 슬쩍 쳐다본 뒤, 인상이 굳어진 황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후배 이검삼 인사드립니다.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청성파(靑城派)의 그 유명한 이검삼 대인 되시오? 기골이 장대하고 호기심이 있으면 바로 풀려 하니 결단력도 좋구려.”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앉아서 답하는 사내를 보며 이검삼의 인상은 점점 더 구겨졌다. 먼저 예를 갖췄는데 마땅히 예를 취해 답하는 것이 도가 아닌가. 지켜보던 다른 황색 도포 인들이 수군거렸다. 청성파 대 제자인 자신을 알면서도 이리 거만하다는 것은 분명 청성파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다. 이검삼이 수군거리는 수하들에게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이검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중원과는 멀리 떨어졌으나, 저희 청성파는 명문정파로 강호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생면부지(生面不知) 소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존함을 알려주시죠.”

 

“내 이름을 알아 어찌하려고 그리 물으시나?”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도의입니다.”

 

“그렇게 도의를 시시콜콜 따지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소?”

 

이검삼이 노려보자 사내가 껄껄 웃는다. 톡톡거리며 탁자를 치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밝히고 싶지 않은데 상대가 먼저 밝혔다고 내 밝히지 않음이 예의가 아니라는 건 그 어느 지역 도의요? 이건 예의가 아니라 강요 아니오? 나는 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소만. 내가 무당파 문하라는 건 내 검을 보고 아신 걸 테지. 뭘 그리 꼭 확인하려 하오? 나는 단지 비만 피하고 바로 떠날 이오. 오늘 이검삼 대인의 얼굴을 잘 봤으니 돌아가면 풍채가 당당하다 잘 말해 드리겠소. 훌륭한 장문인이 되실 거외다 하고 말이지. 대 제자라 함은 결국 장문이 될 것 아닌가? 벌써 명성에 신경 쓰는 모습이 참으로 명문정파답소.”

 

“무례하다!” 뒤에 서 있던 이검삼의 일행이 소리치자 이검삼이 다시 손을 들어 제지했다. “흥. 굳이 밝히지 않으시려면 그렇게 하시오.” 이검삼이 코웃음을 치며 뒤를 돌아 자신의 탁자로 향했다.

 

비는 여전히 몰아치며 내리고 있었다.

 

“저리 건방진 놈은 처음 보네.”

 

“거렁뱅이가 무당파인 척하는 걸 수도 있다.”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먼.”

 

황색 도포를 입은 이들이 담화를 나누는 사이, 점원이 다시 요리 접시를 들고 부리나케 사내에게 다가왔다. “여기, 다시 대령합죠.” 이번에는 그리 맵지 않은지 사내가 우물거리며 만족하는 표정을 짓는다. 몇 번을 말없이 씹던 사내가, 꿀꺽 삼킨 뒤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탁! 그 소리에 객잔 안의 사람들이 사내에게 시선을 쏘았다.

 

“그래도 맵네. 확실히 사천은 불의 맛이 있어. 거기 분들은, 청성파 도사들을 빼면 나머지는 사천당가(四川唐家) 문하요?”

 

멀리 떨어진 탁자에 앉아있던 몇몇이 흠칫 놀라며 사내를 주시했다. 중간에 앉아있던,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내려뜨린 독특한 차림새를 한 이가, 슬쩍 일어나 포권을 하며 답했다.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인사가 늦어 송구합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 늦은 시각에 검을 차지 않고 나와 있다는 건, 무기가 아닌 다른 것에 자신 있다는 뜻이겠지. 사천 제일 무림세가(武林世家)인 사천당가의 가전 무공이 바로 독과 암기 아니오? 나는 그저 비를 피하려 들렀을 뿐인데, 쟁쟁한 고수분들이 여기 모여계시니 그 영문을 모르겠소.”

 

“절묘한 안목입니다.”

 

“이리 유명한 분들과 함께하는데 이에 걸맞은 맛좋은 차가 없는 게 아쉽군.”

 

“술이라면 대접할 용의가 있습니다. 소인은 당문의 당인봉 이라 합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소이다. 당인봉 대인이면 사천당가의 장자 아니오? 호오. 사천을 양분하는 청성과 당문의 두 후계자분이 우연하게도 이 허름한 객잔에서 함께 하는구려. 영광이오만.”

 

“안목이 탁월하신 무당의 선배님과 담소 나누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됩니다.”

 

“흠. 저기 대 제자 분과는 다르시군.”

 

사내의 비꼼에 황색 도포 무리 중 하나가 탁자를 쿵 내리쳤으나, 이검삼은 눈살만 찌푸릴 뿐 모른 척했다. 당인봉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풀고 사내에게 물었다.

 

“이 오지까지는 어인 일로?”

 

“그야 당연히 차지! 자고로 차 하면 사천(四川)과 운남(雲南)이 제일이라 하지 않소. 차의 기원, 차의 명문. 맛깔난 요리를 먹고 마지막으로 들이키는 그 미묘함이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지. 소인은 그저 차를 따라 유랑하는 방랑객일 뿐이네. 신경 쓰지 마시게나.”

 

“기회가 된다면 저희 가문의 명차를 대접해드리고 싶군요.”

 

사내가 눈을 빛내며 당인봉을 쳐다보았다. 사내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개완차(盖碗茶)를 말씀하시는 건 아닌지?”

 

“아, 저는 차에 대해 잘 모르나 저희 아버님이 차도에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사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이런, 개완차를 모르시다니. 차를 좋아하시지 않는구먼. 사천 성도 출신들이 개완차를 모르다니. 나 참.”

 

당인봉의 표정도 살짝 구겨진다. 마지못해 억지 미소를 띠며 당인봉이 인사했다.

 

“소인이 자질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이번 일이 끝나도 계속 머무르고 계신다면 꼭 당문으로 초청하여 명가의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개완차도 모르는데 무슨 명가의 차요 차는. 쯧.”

 

역시 사내의 비꼼에 당인봉도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흠.” 헛기침하고 자리로 돌아가자 사내가 다시 탁자를 톡톡 치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차의 명문에 왔건만 다들 차를 모르니 실망이군. 실망이야. 다들 술이나 퍼마실 줄 알지. 요리의 마무리는 차지 술이 아니라고. 술은 요리의 맛을 가리지만, 차는 요리의 맛에 여운을 주는 걸 왜 몰라? 정말 아무도 모르오? 거기 청성파 대 제자이신 이검삼 대인도 모르시오?”

 

대답이 없다. 한탄하며 사내가 한숨을 내쉰다.

 

“안타깝구먼.”

 

맨 구석에 앉아있던 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내가 쳐다보니, 청색 도포를 멋지게 차려입고 단정하게 관모를 눌러 쓴 귀공자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멀뚱히 쳐다보는 사내에게 공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재완(三才碗) 말씀입니까?”

 

사내가 듣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검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청색 도포를 입은 공자가 앉아있던 탁자로 향한다. 조금 전까지 시무룩하던 표정은 이미 구름 걷힌 햇살처럼 환하게 변했다. 검을 내려놓고, 바로 자리에 앉으며, 사내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합석이오.”

 

“마음대로.”

 

“역시, 없을 리가 없지. 이 큰 성도에 명차를 모르는 이가 없을 리가 없지.”

 

“듣다 보니 답답해서 말입니다. 성도에서 개완차를 모르면 이 무슨 망신입니까? 저기 도사들과 명문세가 라고 자부하는 촌부들은 잊으시지요. 제가 다 창피할 따름입니다.”

 

이검삼 일행과 당인봉 일행 모두가 인상을 쓰며 청색 도포의 공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상관치 않고 입을 여는 공자를 보며 사내는 담대하고 기강이 드높다는 걸 느꼈다.

 

“후배 같은 인재를 만나니 감개무량일세. 존함이 어찌 되는가?”

 

“아까 선배님도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잖습니까? 그 논리라면 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하하! 내가 한 방 먹었군그래. 좋소. 좋아. 마음에 드는군. 내 소개를 하지. 무당의 속가제자인 장연청 이라 하네.”

 

아무 반응 없는 공자의 표정과는 별개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청성파의 도사들과 사천당문 수하들 모두 깜짝 놀라 장연청을 쳐다본다. 이검삼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장연청에게 물었다.

 

“장, 장대협께서는 그 유명한......”

 

“유명세는 내 관심 밖이오.”

 

“하지만 장연청 대협이라면, 무당파 속가제자 중 가장 고강한 무공을 지녔으며, 차기 장문인에 가장 유력했으나 모든 걸 버리고 은거한 그, 강호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 말라니까? 관심 없대도?”

 

당인봉도 일어나 한마디 거들었다.

 

“장연청 대협은 총명하고 기재가 뛰어나 많은 사건 사고를 해결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관가에서도 의견을 구한다는 소문이 여기 사천 지역까지 자자합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이름 안 밝힌 거 아닌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싫어하네. 나는 그저 차 마시러 온 거야.”

 

답하는 장연청의 눈은 앞에 앉은 공자만 살피고 있었다. 오호라. 내 이름을 들었는데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중원 무림과는 별개의 인물인 것 같군. 재밌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는 귀공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연청은 또 다른 점을 눈치챘다. 설마? 모든 여인이 한 번 보면 빠져 들만한 희고 고운 피부, 살짝 보이는 보조개, 호리호리한 몸매, 뛰어난 외모. 그럼 그렇지. 장연청이 공자에게 물었다.

 

“자, 내 소개를 했으니, 아까와는 다르지. 이제 공자의 존함은 어찌 되오?”

 

“왜 저 도사들과 명문이라 치부하는 이들에게는 안 알려주고 저에게는 알려주십니까?”

 

“마음에 드는 이에게만 나를 소개하오.”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연청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청색 도포의 귀공자가 깔깔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좋군요! 인정해주시니. 저는 남영이라 합니다.”

 

“남영 후배. 내 탄복했네. 딱 봐도 젊은 나이인데 차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는가?”

 

남영이 웃으며 입을 가렸다. 입을 가리고 웃는다라. 연청이 역시 하고 속으로 웃었다.

 

“사천 성도에서 가장 유명한 차를 모른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개완차는 삼재완 이라고도 불리며, 찻잔 덮개가 하늘, 찻잔 받침이 땅, 찻잔 그릇이 사람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그리 부르지요.”

 

“식견이 탁월하네. 유래는 아는가?”

 

“당나라 덕종 시절이지요? 서천 절도사를 했던 최영의 딸이 늘 뜨거운 찻잔에 손가락을 뎄는데, 어느 날 쟁반으로 찻잔을 바치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고, 이후 찻잔 덮개로 찻잎을 걸러냈죠. 이렇게 차를 마시면 안전하고 또 행동이 우아하게 보이죠. 사천 고유의 차도 예법이죠.”

 

“대단하네. 차를 정말 좋아하는구먼. 여기서 지기를 만나다니.”

 

“선배님도 객잔에서 차부터 찾는 게 심상치 않다 싶었습니다. 명문정파라고 으스대는 저들이 제일 유명한 차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 제가 다 부끄러워서 그만,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실례를 범하게 됐어요.”

 

명문정파라고 으스댄다? 자, 이제야 정체를 알겠군.

 

장연청이 살짝 고개를 숙여 남영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살짝 놀란 남영의 귓가에 연청이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격식을 따지지 않으니 이제부터 그쪽도 그리하게.”

 

“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를 떠나는 게 좋겠는 걸 그래? 비도 이제 그쳤고, 방금 한 말들로 여기 일행들과 척을 지었으니까. 강호는 거친데, 그렇게 생각 없이 입을 열면 큰일 나지.”

 

“흥! 알 바 아니오. 덤빌 테면 덤비라지.”

 

 

 

“달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주변을 밝게 비추나,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지는 알지 못한다.”

 

 

 

“무슨 말이죠?”

 

“어설프게 남장을 했단 말이오. 아무리 꾸며도 드러나는 그 미모는 어찌하오? 낭자.”

 

남영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입을 꾹 다무는 게 보인다. 장연청이 일어나 큰 소리로 말한다.

 

“차를 아는 지기를 만났으니, 이제부터 차를 음미할 시간만 남았구나! 하하하!”

 

얼른 남영의 팔을 잡아 이끌며, 연청이 검을 집어 들고 기존 탁자위에 있던 삿갓을 찾아 집어 들어 썼다. “그러니까 시작은 개완차부터? 바로 떠나야지. 안 그러오 후배?” 쉴새 없이 입을 열며 연청이 차림을 갖췄다. 남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런 연청의 행동에 따를 뿐이다. 지켜만 보던 당인봉이 서둘러 소리쳤다.

 

“장대협! 저희는 악랄하고 요사스러운 독룡교(毒龍敎) 교주를 벌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디 힘을 보태주시면…….”

 

이검삼이 제지했으나, 당인봉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사천 지역에 큰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침 사건 해결로 소문난 장대협께서 방문하시니 천호의 기회입니다. 명문 중의 명문인 무당파의 고수가 도운다면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회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악한 사파인 독룡교의 암수가 이미 사천 곳곳 퍼졌습니다. 비열하게 독을 쓰는 그런 요녀들이 모인 곳은 이 중원 무림에 발도 디디지 말아야 합니다.”

 

“당후배. 말씀이 지나치오. 굳이 장대협의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끼리 충분히 가능하외다. 어차피 장대인은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이검삼이 장연청을 슬쩍 쳐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남영의 찡그려진 표정을 본 연청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잘 아시는군. 그런데 독룡교라, 운남성 오독문(五毒門)이 언제부터 독룡교라 불렸지? 그리고 독술은 사천당가도 마찬가지잖소? 독을 쓰는 이가 독을 비난하면 제 발등 찍는 격이지.” 당인봉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뒤에 서있던 당인봉의 일행 중 하나가 화를 내며 고함을 쳤다.

 

“도련님에게 이 무슨 말버릇이냐!”

 

연청이 검집을 잡고 가슴 부위로 올려 빙글 돌렸다. 순간,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검집에 튕겨 옆 탁자 위에 박혔다. 암기다. 언제 날렸는지도 모르게 신출귀몰했다. 당인봉이 놀라며 고함을 친 사내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게 무슨 짓이냐!” 바닥에 자빠지는 사내를 걷어차며 당인봉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어딜 감히 무당파 선배에게 수를 쓰는 것이냐! 미쳤느냐!”

 

“가문을 욕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네가 감히!”

 

연청이 검집을 내리며 당인봉에게 말했다.

 

“됐소. 당후배는 중원에서도 정의롭기로 소문나 신진 소협으로 이름을 떨치는 거 잘 압니다. 내가 좀 직설적이라. 대부분 그런 반응들을 보인다오. 어차피 나는 무당에서 떠났고, 지금은 무당파 소속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게. 용건 끝났으면 이제 가도 되나?”

 

“정말로 사죄드립니다. 수하가 철이 없어서 선배님의 명성을 모르고 흉수를 펼쳤습니다. 행여 상해라도 입었다면 이 어찌 가문에 먹칠을…….”

 

이검삼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끊었다.

 

“당후배. 저분은 장연청 대협이야.”

 

“그럼 그렇지. 나는 장연청이고, 실력이 꽤 좋네.” 연청이 껄껄 웃었다.

 

“만나서 반가웠네들. 이만 물러가오.”

 

연청이 객잔의 문을 벌컥 밀고 재빨리 나섰다. 엉겁결에 딸려 나온 남영이 객잔 문이 닫히는 걸 보자마자 잡고 있던 연청의 손을 뿌리쳤다. 비는 여전히 주룩 내리고 있다. 입을 살짝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던 남영이 뾰로통한 얼굴로 연청을 쏘아본다.

 

“비가 여전히 내리지 않습니까?”

 

“폭우는 그쳤으니, 이건 하늘의 통곡이 끝나 눈물이 메말라가는 시기일세. 곧 그칠걸?”

 

“번지르르하게 말씀은 잘하십니다. 제가 남자가 아닌 건 어찌 아셨습니까?”

 

남영이 묻자 연청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깨 위에 걸쳐진 도롱이 보푸라기가 바르르하며 떨렸다. 대답 없이 걷는 연청을 향해 남영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비 맞기 싫습니다!”

 

연청이 삿갓을 벗었다. 그대로 남영의 머리 위에 씌워주려다 관모를 쓰고 있는지라 멈칫했다. 잠깐 고민하던 연청이 그대로 삿갓을 남영에게 들이밀었다.

 

“우산 대용이라 생각하시게.”

 

노려보던 남영이 관모를 벗고 삿갓을 푹 눌러썼다. 가뜩이나 작은 얼굴이 커다란 삿갓을 쓰니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다. 연청이 껄껄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낭자는 뭘 걸쳐도 그 미모가 변치 않는구먼.”

 

“제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남영의 매몰찬 대답에 연청이 입술을 쭉 내밀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걸.”

 

“나름 신경 썼는데 한 번에 파악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듣고도 반응이 없다. 즉, 중원 사람이 아니다. 혹은 강호의 흐름을 모르는 서생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청성파와 사천당가의 무리 들이 죽일 듯이 노려보는 와중에도 당당하게 자신감을 풍긴다. 그렇다면 일반 서생은 아니겠지. 명문정파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그럼 정파도 아니겠지. 달이 강림한 외모의 서생이라. 내 사십 년생에 그런 서생은 한 명도 본 적 없소. 더군다나 박식함을 자랑하니, 사천과 운남 지역의 특산품을 잘 아니 이 지역 출신이겠고, 독룡교라는 말이 나오자 바로 표정이 구겨졌지. 그럼 답 딱 나오지 않는가?”

 

남영의 대답이 없자 연청이 걸음을 멈추고 남영의 삿갓을 슬쩍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오독교(五毒敎) 남효정 교주는 안녕하신가?”

 

토끼 눈을 하며 쳐다보는 남영에게 연청이 눈웃음을 지었다.

 

“낭자는 오독교 사람이지?”

 

남영이 손을 뻗어 공격했으나 연청이 더 빨랐다. 어느새 자신의 목을 겨누고 찔러 들어 온 남영의 긴 손톱을 보며 연청이 혀를 찼다. “아니, 다짜고짜 찌르면 어떡하오?” 손목이 잡힌 남영이 이를 악물며 노려보자 연청이 쯧쯧 하며 입을 열었다.

 

“남장을 하려면 이 손톱도 잘랐어야지.”

 

“천하의 기재시네요. 단번에 맞추시다니. 그리고 내 공격도 바로 간파하고. 아까 그 촌부들이 왜 야단법석을 떨었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아니 잠깐. 나는 낭자와 싸울 생각도 없고, 그저 차를 잘 아는 지기를 만난 것에 만족하는 것뿐이네. 왜 오해하시나?”

연청이 손을 놓았다. 잡혔던 손목을 어루만지며, 남영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런 연청을 살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겠다. 남영은 생각했다. 정말 모르겠어. 중원 이대 문파인 무당파의 고수라고 하지만 그저 농담을 즐기는 풍류남아로 보이는데? 카악 하는 소리와 함께 장연청이 가래를 모아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뭔가 분위기랑 맞지 않아 남영은 당황스러웠다. “입안이 메말랐어. 메말랐다고.” 연청이 중얼거리며 머리를 다시 벅벅 긁었다.

 

“이 시간에도 차를 파는 곳이 있나?”

 

“......”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남영을 본 연청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구해준 거 아닌가. 아까 그놈들은 독룡교, 아니 오독교 인을 잡아 족치려 하지 않았냐고. 어쨌든 내가 구해준 거 아니냐. 그러니까 어서 나를 차의 성지인 이 사천 성도의 명가로 모셔주게. 낭자. 부탁이야. 그렇게 쏘아 보지 말고.”

 

여전히 흘기는 남영을 보며 연청이 목소리를 죽였다.

 

“아니, 화난 건 아니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격식 차리지 말자고. 나부터 그 격식을 증오하는 사람일세. 지긋지긋하게 겪었거든. 내가 지금 너무도 차가 고파서 그러니 이해해주게나. 자꾸 그렇게 쏘아만 보면 눈 가운데로 몰린다고.”

 

한숨을 내쉬며 남영이 답했다. 궁금했던 거였다.

 

“다 알면서 왜 오독교가 아닌 오독문이라 칭하셨죠?”

 

“그게 그거 아닌가?”

 

“교와 문은 다르죠.”

 

“글쎄. 본질은 같으나 표현이 다르면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보이겠지. 명문정파라는 이들은 교단보다는 문파를 선호하지.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야.”

 

“정말 무당파 출신 맞아요?”

 

“예전에. 지금은 아니야.”

 

“좋아요.” 남영이 삿갓을 살짝 들어, 연청과 눈을 맞췄다.

 

“성도에 아는 찻집이 하나 있어요. 거기로 가죠. 그리고, 격식 차리지 말라 하셨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그 격식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라니까?”

 

남영이 살짝 미소 지었다. 행여 웃음이 보였을까 서둘러 삿갓을 내려쓴 남영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하! 그럼, 오라버니라 부를게요. 어쨌든 악의는 없는 것 같으니까. 나 같은 어여쁜 동생이 있는 것도 오라버니에게는 좋겠죠? 사파의 동생은 싫은가요?”

 

답은 안 했지만, 연청의 입이 헤벌쭉 벌어진 걸 보며 남영은 적잖이 놀랐다. 명문정파 출신도 이렇게 감정에 충실한 이가 있던가? 뭔가 달랐다. 수도 없이 보던 딱딱한 정파 인들과는 다른. 남영이 다시 한번 말했다.

 

“오라버니. 그렇게 입 벌리고 웃으면 빗물 다 들어가요.”

 

“하늘이 마지막으로 쥐어짠 눈물을 흘리는데, 이것 또한 천혜의 차 아니겠는가. 총명하고 아름다운 동생이 생겨 나는 기쁘니, 단지 하늘과 같이 울어줄 수 없는 게 미안할 따름이네. 그나저나 역시 묘족(苗族) 여인들은 당차구먼. 적극적이고.”

 

“말 한번 참 청산유수네요. 한족(漢族) 남자들은 다 그런가요? 많은 여인이 따랐겠네요. 오라버니.”

 

“내가 유달리 독특한걸세. 얼른 가자고.” 연청이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얼른 차를 마셔야 할 것 같아.”

 

 

 


 

 

 

의외로 남영이 소개한 찻집은 초라한 민가였다. 탁자도 없고, 아예 장사하는 것 같지 않았다. 밤이 늦은 시각이었지만 문을 두드리자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얼굴을 내밀더니, 남영이 보여준 흑패를 보고 놀라며 서둘러 문을 열었다. 연청이 살짝 훔쳐보니 고(蠱)라는 문자가 새겨있다.

 

“성도 곳곳에는 오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연청이 무심하게 물었다.

 

“그렇겠지. 가까우니까. 그런데 뱃속벌레 고(蠱)라. 정말 실존하는 독인가?”

 

“비전은 전수되나 너무 악랄해서 오독교 내에서도 시전은 금지입니다. 중원의 소문은 다 거짓이죠. 사람을 그렇게 해치는 흑도(黑道) 무리가 절대 아닙니다.”

 

문을 열어주었던 사내가 황급히 허리를 숙여 남영에게 절을 했다. 놀란 연청을 향해 남영이 살짝 웃으며 흑패를 들고 말했다.

 

“이건 교주님의 영패입니다. 교주님을 접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지라. 나한테 절을 하는게 아니고요.”

 

“음. 동생은 왜 그런 강력한 패물을 가지고 다니는 거지?”

 

“일단, 차부터 마시고 말씀드릴게요.” 남영이 삿갓을 벗어 내려놓았다. 머리를 짧게 보이기 위해 쪽을 진 끈을 풀자 긴 머리가 어깨 위를 가린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연청을 보며 남영이 다시 쏘아붙인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차를 잘 아는 이쁜 동생이 생기니 내 기분이 좋아 그러네.”

 

“오라버니는 명문정파 중에서도 명문인 무당파의 속가제자라고 하던데, 무당파에서는 남녀에 대한 예의범절을 굉장히 강조하지 않던가요?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오라버니는 딱 바람둥이 풍류객입니다.”

 

“예절은 나도 잘 지킨다고. 무당파의 명예를 실추시킬 일은 평생 한 적 없네. 내 이름을 그래서 안 밝히고 다니는 거야. 어차피 소속이 없으니 내 마음 아닌가?”

 

“위선을 떠는 것 같지는 않아 그 점은 마음에 듭니다.”

 

옷깃의 빗물이 마를 동안 남영이 품에서 노끈으로 묶여 접힌 뭉치를 꺼냈다. 주인장이 찻잔 두 개와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져왔다. 남영이 천천히 노끈을 풀고, 포장을 풀었다. 찻잎이다. 색을 본 연청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아. 눈부터 호강하는구먼. 전홍(滇紅) 이잖소.”

 

“전홍의 특징을 아십니까?”

 

잔을 두 개 놓고 남영이 찻잎을 덜어냈다. 물을 붓자 금방 농후한 향기를 풍긴다. 연청이 코를 가까이 대고 향을 맡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하던 연청이 답한다.

 

“향과 색이 보통의 차와는 달리 아름답고 매우 요염하지. 빛을 비추면 황금색으로 보일 정도로 일반 차와는 다르지. 운남을 대표하는 명차라 옛날 운남 지역을 지배했던 전나라의 이름을 따서 전(滇)이라는 이름을 붙였지.”

 

“잘 아십니다. 그럼 드시지요 오라버니.”

 

연청이 찻잔을 들어 한 입 들이켰다. 만족한 표정의 연청이 다시 한번 향을 맡으며 입을 열었다.

 

“농강선(濃强鮮)이라. 농후하고, 강렬하고, 신선하오.”

 

다시 눈을 감으며 연청이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몇 번을 반복하며 맛과 향을 즐긴 연청이 만족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여운이 가시자 연청이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제 동생에게 답례해야 할 텐데. 무슨 의도로 이런 명차를 대접하는가?”

 

남영이 그런 연청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탁자를 두드리며 연청이 남영을 마주 보았다. 톡톡. 톡톡. 톡.

 

연청이 입을 열었다.

 

“청성파와 사천당가가 동시에 움직일 만한 큰일이 벌어졌고, 그들이 생각하는 그 원인은 오독교다. 즉, 독이라는 것인데, 청성파의 대 제자와 사천당가의 장자가 움직이는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지. 그들이 직접 행동해야 할 정도가 되는 위치의 사람과 관련되었다는 거지.”

 

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연청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셋으로 정리된다. 첫째, 독에 중독되었고 그걸 오독교의 짓으로 본다. 둘째, 중독된 이는 최소한 청성파의 대 제자와 사천당가의 장자를 움직일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 셋째, 오독교의 교주를 벌하겠다고 했다. 이 셋인데, 떠오르는 사람이 딱 둘밖에 없네. 청성파의 장문인인 이검풍 대인과 사천당가의 당주인 당형비. 둘 중 하나가 독에 당했다는 거고, 당문은 독과 암기에 뛰어나 그리 쉽게 당할 리 없으니 결국 한 명으로 추려지는군.”

 

“맞습니다. 청성파 장문인이 독에 당했습니다.” 남영이 답했다.

 

“광인이 되어 하인을 죽이는 바람에 현재 폐관치료를 받는 상태랍니다.”

 

“중원에는 알려진 바 없으니, 철저히 비밀로 했겠군. 동생은 그런 비밀을 어찌 알았나?”

 

남영이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저희 오독교는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독을 다루기는 하나 그것은 방어를 위함이지, 공격을 가함이 아닙니다. 독이라는 것 자체가 악랄한 수고, 중원에 진출하지 않으니 정파라는 이들은 우릴 매도하는 것이지요. 사천당가도 독을 쓰지만, 중원 무림세가(武林世家)로 이름을 날리지 않습니까. 같은 집단이냐 아니냐에 따라 이렇게 평가가 갈리는 겁니다.”

 

“인정하오.”

 

연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그런 연청을 바라보던 남영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가족 같은 언니가 있어요. 초초 언니는 저와 같이 자랐습니다. 제일 친했죠.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됐어요. 자신에게 그렇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너무 좋아했어요. 그리고 결국 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교단을 떠났습니다. 그 남자는 정파의 일원이었기에,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거죠. 그 남자는 언니를 데리고 자신의 문파로 돌아갔습니다.”

 

톡톡. 톡. 탁자를 두드리던 연청이 행동을 멈췄다.

 

“남자는 청성파 소속이다. 그렇지?”

 

남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사천과 운남은 가깝고, 청성파의 장문인이 중독되었고, 오독교에 원한을 가졌다면 그 초초라는 여인과 연관이 있겠지. 다짜고짜 독을 쓴다고 해서 오독교를 의심할 일은 없지 않은가. 나름 각 지방의 세력가들인데.”

 

남영이 손등으로 살짝 눈물을 훔쳤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연청은 객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말 그대로, 객잔에 잠깐 비를 피하러 들어간 것뿐이었다. 청성파와 사천당가와 오독교라는 사천과 운남을 대표하는 세력들의 인물들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기연이라면 기연이지. 연청은 이런 우연이 좋았다. 삶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느낄 때쯤, 항상 하늘은 도움을 주신다. 무당에서 강조하는 음양조화(阴阳调和)의 기운인 셈이다. 훌륭한 차와 더불어.

 

“전홍은 정말 마시고 싶은 차 중 하나였지.”

 

“좋았다니 감사합니다.” 남영이 추스르며 살짝 미소 짓는다.

 

“초초라는 이는 지금 어찌 됐나?”

 

“언니는 청성파에 갇혀 있습니다. 오독교 출신이니 혐의가 유력했겠죠. 저는 교주에게 부탁하여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언니를 구하기 위해 중원에 출두한 겁니다. 이 흑패가 그 증거고요. 교주님도 초초 언니를 아끼시기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막상 성도에 도착하니, 막막하고, 방법이 없어 객잔에서 소문이라도 주워들을까 하던 차에, 오라버니를 만난 것입니다.”

 

“차에 대해 답례를 해야 하니, 내일 일찍 우선 청성파에 방문해야겠군.”

 

남영의 표정이 환해진다. 하지만 곧 시무룩하며 금세 어두워졌다.

 

“도와주시는 건 고맙지만, 아까의 객잔 일로 오라버니를 밀어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위험에 빠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동생은 잘 모르는데, 내가 좀 명성이 있네.” 연청이 씩 웃었다.

 

“적어도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을 사제로 둔 사람의 개입이라면, 어느 명문정파에서 반기지 않겠나. 아까 일은 아까 일이고, 본격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면 그들도 반길 것이 자명해. 사천당가의 당인봉도 도와달라고 했으니, 명분은 충분히 있네.”

 

남영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가, 점점 진지하게 변했다.

 

“저도 꼭 동참하게 해주세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나는 위험하니 동생은 빠지시게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적어도 이것은 독에 관련된 사건이고, 나보다 독을 훨씬 잘 알 텐데 뭐하러 동생 같은 인재를 방구석에 두는가? 평소처럼 남장하고 내 곁에 있어. 그런데 몇 가지는 내가 손을 좀 봐야 하겠는데, 일단 그 표정 변화부터 시작하지. 뭔 말만 하면 욹그락 붉으락 울었다 진지해졌다 변화무쌍인가?”

 

남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연청이 킥킥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도 다시 머리를 묶을까 봐. 길게 풀어 놨더니 자꾸 눈을 찌르네.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자자고.”

 

남영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아니 나는 당연히 다른 데서 잘 거고. 이상한 생각 한 거 아니지?”

 

손사래를 치는 남영의 얼굴이 더더욱 빨개져 홍조가 된다.

 

연청은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훈련이 많이 필요하겠어. 가짜 수염이라도 붙여야 하나?

 

 

 


 

 

 

청성파의 위치는 성도 끝자락에 있었다. 북서쪽에 있는 청성산(青城山) 중턱이 그곳이다. 중간중간 황색 도포를 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성도 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차분히 관찰하며 걷는 연청과는 별개로 남영은 그런 청성파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를 갈았다.

 

“자꾸 그렇게 표정 드러내면 안 된다니까.”

 

“언니가 저들에게 잡혔다는 생각만 하면 모두를 쳐 죽이고 싶습니다.”

 

“하하. 오독교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청성파는 명문정파에서도 명문인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소속이니 동생 혼자 싸우는 건 무리네. 언니는 꼭 구할 테니 안심하게.”

 

“오라버니는 무공이 고강하십니까?”

 

뜬금없는 남영의 질문에 연청은 깊이 고민하지 않고 바로 껄껄 웃었다.

 

“겸손 떠는 건 싫어하네. 내 별호가 뭔지 아는가?”

 

“저야 모르죠. 저는 중원 출두가 이번이 처음입니다.”

 

“불초과십수(不超过十手) 장연청. 이게 바로 내 별호지.”

 

남영이 픽 웃으며 입을 가린다. 진지한 표정으로 연청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이라니까? 어떤 싸움이든 십 수를 넘지 않는 내 무공을 보고 남들이 지어준 별호일세.”

 

“그러면 무림맹주라도 되시는 겁니까?”

 

“아니, 일단 싸울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다르고, 또 별호가 망가질 상대라면 싸우지를 않지. 무엇보다도 나는 머리가 좋거든.”

 

“이렇게 위선을 떠나 자신감이 넘치는 분은 또 처음 봅니다.” 남영이 계속 웃자 멋쩍어진 연청이 대뜸 나무란다.

 

“흠. 우선 그 웃을 때 입을 가리는 버릇부터 고치게.”

 

“아이고 오라버, 아니 대형. 잘 알겠습니다.”

 

무공을 배운 그들에게 산행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신을 쫓아오면서도 전혀 지치지 않는 남영을 보며 연청은 내심 놀라운 경공에 감탄했다. 독을 다룬다는 것은 정공법이 아니기에 은밀하고 재빠른 행동이 필수다. 그래서 그런지 남영의 경공은 절륜했다. 툭탁거리며 어느새 둘은 청성문파 건물 앞에 다다랐다. 거대한 건물 주위로 높은 벽들이 늘어져 있고, 대문 앞에는 경비를 서는 청성파 문하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화를 나누고 있다. 연청과 남영이 인기척을 내자, 그들을 발견한 청성파 문하인 하나가 다가오며 용건을 물었다.

 

“청성파에 용건이 있으십니까?”

 

“이검삼 대인을 뵈러 왔네만.” 연청의 대답에 문하인이 장연청의 위아래를 훑는다. 머리도 풀어헤치고 떠돌아다니는 초라한 행색이라 구걸이라도 하러 온 거지를 보는 마냥 표정에 비웃음이 담긴다.

 

“대사형은 바쁘셔서 자리에 안 계십니다.”

 

“이런 이른 시각에 문파를 비우다니. 내가 알기로는 이 시각에는 제를 지내며 향을 태우는 거로 아는데? 설마, 나를 거지로 본 건 아니겠지?”

 

문하인의 표정이 굳었다. 뜨끔했는지 포권을 하며 좀 더 정중한 태도로 되묻는다.

 

“어느 분이라 전해드릴까요?”

 

“장연청이라 전하게.”

 

“그냥 그리 전하면 됩니까?” 문하인이 옆에 서 있는 남영을 보며 말을 걸었다.

 

“옆에 공자분은?”

 

“내가 새로 사귄 지기이니 신경 쓸 것 없네. 성도 구경을 도와주기로 했으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문하인이 안으로 들어간 후, 남영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연청에게 말했다.

 

“별로 반응이 없는데요? 정말 명성이 높은 거 맞습니까?”

 

“그럼! 저놈들은 어려서 몰라. 내 또래면 다 알지. 불초과십수의 별호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저만치서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검삼이다. 도복을 차려입은 걸 보니 제를 지내다가 서둘러 온 것 같았다. 전달해주러 갔던 문하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런 이검삼의 옆에서 연청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검삼이 예를 갖췄다.

 

“장선배님!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저희 문파를 방문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봤느냐? 콧대가 높아진 연청과는 별개로, 거지꼴이라 비웃던 문하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간다. 이검삼이 문하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재차 묻는다.

 

“혹시 저희 문하가 실수라도......”

 

“아니오. 나야 은거하고 십 년 동안 놀고 지냈으니 뭐 나를 모르는 거도 당연하지. 복장도 거지꼴이니 거지로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암. 깨끗한 정복으로 다녀야 하는 건데. 암. 거지꼴이니 거지 취급이나 당하지. 암.”

 

이검삼이 문하인을 노려보자 문하인 재빨리 엎드리며 큰 소리로 사죄한다.

 

“아이고 대인! 잘못했습니다!”

 

“네 이놈. 겉 차림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거지라도 개방(丐幇)의 일원이자 대선배님일 수 있다. 이 분이 누군지 아느냐? 바로 그 불초과십수로 유명한 무당의 장연청 대인이다.”

 

“네? 불초과십수? 열수를 쓰기 전에 이긴다는 그 무림고수 말입니까?”

 

“네 놈은 수행이 덜 됐으니, 오늘 하루는 굶어라.”

 

울상이 된 문하인을 보며 연청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연청의 옆에 서 있던 남영을 발견한 이검삼이 연청에게 사죄하며 물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옆은 어제 그 공자인가 봅니다. 어느새 지기가 되셨습니다. 역시 장선배는 호탕하십니다.”

 

“음. 남영이라고 차에 대해 기막힌 식견이 있어서 내 성도 유람을 동행하기로 했다네.”

 

남영이 꾸벅 인사했으나, 이검삼은 받아주지 않는다. 남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쪼잔한 정파놈들.

 

“선배는 어쩐 일로 방문을?”

 

연청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제 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좀 무례했다 싶어서. 차기 장문이 될 사람에게 막 대한 것도 있고. 또 오랜만에 성도에 방문했으니 이검풍 장문인께도 인사드려야 할 테고. 사천당가의 당인봉의 말도 마음에 걸려서.”

 

이검삼이 입술을 꾹 깨문다. 잠시 말을 멈추고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곧 표정을 풀고 연청을 안으로 안내했다.

 

“아버님은 매우 편찮으셔서 인사드리기가 어려우실 겁니다. 우선 자리로 드시죠. 마침 식사가 준비 중이니 요기를 마친 후,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네.”

 

이검삼이 문하인들에게 손짓해 지시했다. 연청과 남영은 이검삼의 안내에 따라 청성문파 안에 들어섰다. 커다란 장원 곳곳에서 검진을 펼치며 수련 중인 문하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대열을 맞춰 공격하는 무리와 방어하는 무리로 훈련이 체계적이다. 연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보는 것을 이검삼이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역시 청성파는 검진이 대단하네. 송풍칠진의 위력이 매섭군.”

 

“과찬입니다. 장선배에 비하겠습니까?”

 

“일곱 개의 검날이 바람처럼 꽂히면 아무리 나라도 공격은커녕 막기에 급급하겠지.”

 

“하하하. 칭찬하시니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정파 어디라도 저 검진을 혼자서 깰 수 있는 이는 각 파 장문인들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연청이 갑자기 남영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남영이 멀뚱히 보자 연청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동생. 동생은 저 검진에 대치할만한 방법이 있겠는가?”

 

“......저는 일개 서생이라 무공은 잘 모릅니다만. 질문하신 의도가?”

 

“하하하. 만약 그저 필부라면 저 때 어떤 방법을 취할까 잠시 생각했을 뿐이네. 무공을 아는 이라면 자신의 무공으로 대적하려 하겠지만, 무공을 모르는 이는 살려 발버둥을 치며 어떤 방법이든 쓰겠지? 그것이 독일지라도.”

 

남영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연청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검삼의 표정이 굳어졌다. 떠본 것이다. 과연 이검삼의 표정은 창백함을 넘어 사색이 되고 있다. 말없이 셋은 대청을 향해 걸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고 있는 이검삼을 향해 연청이 질문했다.

 

“오독문과는 왜 척을 지게 된 건가?”

 

“저희 문파인 중 하나가 독에 당했는데, 그것이 독룡교의 짓이라 판단 됩니다.”

 

“청성파는 독을 잘 모르지 않는가? 어째서 오독문이라고 생각했지? 그들은 중원에 잘 나오지 않아.”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대청 한가운데 커다란 식탁이 있고 위는 진수성찬으로 가득하다. “대접이 소홀하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일단 준비할 수 있는 진미는 다 끌어모아 요리했답니다. 아침이 너무 거창해 부담될까요? 허허허.” 연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준비라고는 하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아니다. 즉, 평소에도 이렇게 먹고 마신다는 얘기다. 이검삼과 장연청이 각각 자리에 앉자, 남영도 연청 옆에 앉으며 탁자 위를 살핀다.

 

“처음 보는 요리들로 가득하군요.”

 

“사천에는 많은 요리법이 있지. 그렇기에 재료들도 많이 쓰고.”

 

“호화롭군.” 연청이 곰발바닥 요리를 몇 점 집어 입에 넣었다. 닭볶음, 새우볶음, 민물 가재 볶음 등 대부분이 강렬한 향을 풍기는 맵고 기름진 음식들이다. 탕마저 맵다. 연청이 중얼거렸다.

 

“이러니 차가 흥하지. 차 없이는 못 살겠구먼. 이 기름진 것들을 마무리하려면.”

 

“저는 술을 좋아하나, 차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검삼이 조용히 답했다.

 

“송구스럽지만, 차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내가 듣기로는 이검풍 장문인께서는 차를 즐겨 한다 들었는데?”

 

“아버님과 저는 조금 다르죠. 모두가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검삼의 말투가 차가워진다.

 

“그러는 선배님도 술을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장문인이 즐겼던 차들은 다 누가 공수했나?” 연청이 탁자를 두드린다.

 

톡톡. 톡톡. 톡. 이검삼의 젓가락이 닭볶음으로 향한다.

 

“제 사제인 방용화입니다. 방사제는 아버님이 매우 아끼셨죠. 그 차를 좋아하는 성향이 같아서 말입니다.” 이검삼의 젓가락이 이번에는 새우볶음으로 향한다.

 

“저보다는 한참 어리지만 능력이 출중해서 아버님이 많이 기대하던 제자였습니다.” 젓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톡톡. 톡톡. 톡. 연청은 유심히 살핀다.

 

“나도 차를 좋아하니 소개해줄 수는 없는가?”

 

“방사제 말입니까?” 이검삼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고개를 들어 연청과 눈이 마주친 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방사제는 벌을 받고 있어서 당장 만나시긴 힘듭니다.”

 

“벌? 무슨 잘못이라도?”

 

“하. 아주 큰 잘못을 했지요. 요녀에게 홀려 문파에 커다란 위협을 안겼습니다.”

 

남영의 안색이 굳어지는 걸 이검삼은 바로 눈치챘다. 연청은 계속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검삼의 젓가락이 다시 들리더니, 민물 가재 볶음으로 향했다. 하나를 집어 든 이검삼이 순간 놓쳤는지 가재가 미끄러지며 그대로 남영 쪽으로 튕겼다.

 

‘내공이 실렸다!’

 

남영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지만, 무공을 모르는 서생으로 위장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일부러 연청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모르는 척해야 해. 그냥 맞더라도. 시험하는 거다. 순간, 연청의 젓가락이 가재를 허공에서 잡았다. 이검삼이 당황해하며 연청에게 사죄했다.

 

“이런 제가 실수를. 하마터면 공자의 옷에 붉은 양념이 잔뜩 묻을 뻔했습니다.”

 

이놈 보게. 이대로 맞았다면 양념이 아니라 피가 튀었을 거다. 연청은 짐짓 모르는 척 가재를 그대로 입에 가져가 씹었다.

 

“맛있네. 뭐 젓가락질을 실수할 수도 있지. 맛있군. 그런데 말이야. 그 요녀란 누구인가?”

 

“방사제가 데려온 정인입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그 여자는 사파의 인물입니다. 바로 독룡교 출신이죠.” 이검삼이 술을 잔에 따라 한 모금 들이킨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대충 알고 오신 듯한데,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도와주시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사부님은, 아니 아버님은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짐작은 했네. 증상은 어떤가?”

 

“처음에는 별거 아닌 거로 보였습니다.” 이검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련을 지도하시던 도중 배가 아프다며 측간을 자주 들락거린 게 시작입니다. 단전이 아프다며 자주 기를 운용하여 명상수행을 하시곤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니,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고, 검을 제대로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평소라면 약을 짓고 처방에 따라 운기 하실 텐데, 왠지 모르게 몹시 불안해하고 몸을 자주 떨었습니다.

 

의원들을 다수 데려와 진료를 맡겼으나 전부 이 병의 원인을 모르더군요. 증상은 점점 심해져 누워계셔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괜찮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아버님이 저희를 안심시키곤 했는지라, 차도가 좀 보인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아버님의 무공은 아주 많이 고강하여, 명문정파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골이셨으니까요.

 

오판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증상은 시작도 안 했던 것입니다.

 

잠복기를 거친 후, 독은 점차 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물집들이었습니다. 점차 물집들이 하나둘 터져 나가더니, 피부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쯤 아버님도 저희도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죠. 이런 병은 처음이었고, 고통이 심한지 아버님도 구토를 심하게 했습니다. 명문정파의 장문인이 병에 걸려 허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건 문파의 명예도 걸려있는지라, 아버님은 절대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붉어지다 못해 새빨갛게 변해가는 피부를 보며, 그때부터 저는 이게 혹시 독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태는 더 심해졌습니다. 그동안은 잘 참아오던 아버님도 더는 고통을 버틸 수 없었는지 통증을 가라앉히는 진통환을 수도 없이 먹었습니다. 당시 아버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고통과 가장 비슷한 건 바로 불에 타는 아픔이라고 하더군요. 붉게 달아오른 피부와, 불에 타는 고통. 끔찍했습니다. 증상은 점점 심해지고, 고통도 점점 올라갔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누워 있지 못할 정도로 아버님은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 독의 가장 큰 증상은 바로, 고통도 고통이지만, 광기(狂氣)의 주입이었던 것입니다.

 

음식과 진통환을 가지고 아버님의 방으로 들어간 하인의 비명이 복도를 찢을 정도로 소름 끼치게 울렸습니다. 보고를 받고 도착한 제가 아버님의 방에 들어서니, 바닥과 벽이 온통 피 칠갑이 되었고, 아버님이 검을 들고 하인의 시신을 마구 베고 있었습니다.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는데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자가 내 몸에 불을 질렀다. 이 자가 내 몸에 불을 지르려 한다.

 

방이 불탄다. 불에 타고 있다. 내 몸이 타고 있다. 팔과 다리가 타들어 가고 있다.

 

 

 

아버님은 광인이 되신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 불을 연실 외치며 검으로 십 년을 알고 지낸 하인의 몸을 도륙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점혈을 하여 아버님을 재운 뒤,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게 거동에 제한을 두고 결박했습니다. 평소라면 손도 못 댔을 아버님의 몸인데, 이미 광인이 되어 버려 그 고강한 무공은 온데간데없더군요. 저는 독이라 판단했고, 이 증상의 시작 지점부터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딱 들어맞는 뭔가를 알아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녀. 방사제가 그 요녀를 정인이라며 들여온 후부터 아버님의 증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말렸습니다. 사파의 인물을 들이는 것은 큰 명예의 실추이지요. 하지만 이미 독룡교단을 떠났고,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방사제의 정인이 된 것이니 상관없다며 흔쾌히 청성문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 요녀는 참 잘했습니다. 하인들의 일거리도 마다치 않고 도와주고, 방사제와도 잘 지냈습니다. 점점 문파 내의 그 요녀의 평판은 올라가고, 반대로 아버님의 증상은 심해졌습니다. 아버님의 그 살인을 목격한 뒤, 저는 장문 대리로서 그 요녀를 가두었습니다. 독룡교 교주의 지시를 받고 방사제를 유혹하여 우리 청성파를 몰살시키려 한 악랄한 마녀이자 요녀입니다. 아버님은 사실 이제 더는 가망이 없습니다. 제자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저 뜨겁다며, 불탄다며 고통에 괴로워만 하고 계십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바로 그 요녀를 처단할 계획입니다. 당장 죽여버리려 했지만, 방사제가 간곡히 막아 지금은 감금만 해놓은 상황입니다. 방사제는 요녀가 누명을 썼다며 한사코 곁에 남겠다고 자진해 요청했습니다. 두 연놈들 다 증오스러웠지만, 사제의 연이 있는지라 일단은 하고 싶은 대로 놔둔 상태입니다.

 

비열하고 악랄한 독룡교 사파놈들은 수습되는 대로 총공격을 가할 것입니다.

 

 

 


 

 

 

이검삼이 말을 멈췄다.

 

연청의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다. 그것은 남영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연청이, 조심스레 이검삼에게 물었다.

 

“장문인을 뵐 수 있겠나?”

 

“송구스럽지만 누구도 만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에 거짓은 없습니다.”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그 증상에 대한 건 자세히 설명했으니 그리 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그 요녀와 방사제를 좀 보고 싶은데?”

 

이검삼이 고개를 들어 장연청을 노려보았다.

 

“무슨 이유로?”

 

“배후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나. 생각대로 오독문 소행이라면 그들과 대화를 해봄으로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나도 힘껏 도울 테니.”

 

잠시 생각에 잠긴 이검삼이 손짓을 해 하인 한 명을 불렀다.

 

“과거 장선배님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어려운 사건들을 자주 해결하신 그 총명함도 명성이 드높았지요. 모든 걸 아셨으니 장선배님에게 기대해 보겠습니다. 검을 쓸 확실한 명분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보기 싫으니 하인에게 지시하겠습니다. 따라가시면 됩니다.”

 

“고맙네.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 이검풍 장문인은 천하의 군자셨는데 말이지.”

 

“그 요녀를 받아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검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영과 연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검삼은 술을 연달아 따라 마시고 있다. 하인을 따라가며 연청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 상황이면 누구라도 남영의 언니라는 그 여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남영의 말대로라면 언니는 누명을 쓴 거라고 했다. 남영은 아무 말 없이 연청의 곁을 따르고 있었다. 듣는 귀가 있는지라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것 같았다. 연청도 물어볼 게 산더미다. 독의 증상을 들었으니, 그게 무슨 독과 비슷한지 알 것이다.

 

하인이 장원 뒤쪽 으슥한 곳의 창고 하나를 가리켰다. 문은 굳게 잠겼고, 창살이 드리워진 작은 창 하나가 전부다. 누군가 힘없이 늘어져 문 앞에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로 그가 청성파의 이제자인 이검삼의 사제, 방용화로 보였다.

 

“이보게. 방사제 맞는가?” 연청이 말을 걸자 약간 풀린 눈으로 연청을 쳐다본 방용화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누구십니까?” 술냄새가 진하게 풍겨 남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연청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무당파 속가제자였던 장연청이라고 하네. 방금 이검삼 대인을 만나고 오는 길일세.”

 

“아, 불초과십수 장연청 대협이십니까!”

 

“그렇네.” 방용화가 황급히 엎드렸다. 몸을 부들거리며 떨던 그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살려주십시오! 제 아내를 살려주십시오!”

 

“아니 갑자기 통곡을 하면......”

 

“제 아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저를 위해 태어나서 자란 가족들과 지인들과 사부를 버리고 따라온 여인입니다. 제가 설득하지 않았다면 저희 청성파에 들어올 운명도 아니었습니다. 뭐하러 독을 쓰겠습니까!”

 

방용화가 무릎으로 기어 장연청의 발목을 붙잡고 흐느꼈다.

 

“아내와 저는 행복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를 않습니다. 아들같이 키워주셨던 사부님도 그렇게 되고, 죽고만 싶은 심정입니다. 당장 자결을 해도 마땅치 않지만 아내가, 아내가 너무 불쌍하고 억울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장대협의 명성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사건도 해결하시는 기재라고 들었습니다. 제발요!”

 

“진정하시게. 이렇게 다짜고짜 매달린다고 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야.” 연청이 계속 타일렀다. 흐느끼던 방용화가 붙잡았던 손을 놓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옆에 서 지켜보던 남영도 눈물이 났는지 살짝 손등을 눈가에 가져가는 게 보였다. 연청이 쭈그려 앉았다. 흙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톡톡. 톡톡. 톡.

 

“자네는 사부의 그 증상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평소 강골이셨던 분이라 가끔 걸리던 감모(感冒)는 아닌가 했죠. 그럴 때마다 차를 찾으셨는데 제가 사부님의 차를 담당하던 차라 좋다는 명차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증세가 심해지더니 사형께서 사부님의 영접을 금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 독에 중독되셨으며 그 독이 바로 제 아내가 손을 쓴 것이라 말씀하시더군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아내는 비록 오독교 출신이나, 저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은 여인인데, 사부님을 독살하려 했다니요.”

 

“음. 사부님은 어떤 차를 좋아하셨나?”

 

“사부님께서는 기름진 음식에는 오룡차가 딱 맞는다며 항상 복건성(福建省)의 명물인 철관음(铁观音)을 선호하셨습니다. 구하기가 힘들어 비용이 많이 들기도 했지만 사부님은 그 차가 없으면 요리마저 입에 대지도 않을 정도로 매우 애용하셨습니다.”

 

“철관음이라. 관세음보살이 철처럼 강해지라고 선물했다는 그 명차 말이지?”

 

“그렇습니다.”

 

“혹시 남아있다면, 내게 가져다줄 수 있겠나? 참고될 것 같은데.”

 

“도, 도와주시는 겁니까?”

 

연청이 목소리를 낮췄다.

 

“사형에게는 비밀로 합세. 일단 차를 가져오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방용화가 서둘러 일어나 어디론 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일어선 연청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남영을 바라보았다.

 

“일단 언니를 만나보지.”

 

남영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창가를 향해 뛰어갔다. “초초! 초초! 안에 있어?” 연청이 곧 뒤를 따랐다. 남영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초초! 초초! 괜찮아?”

 

조용했지만, 천천히 뭔가 바닥을 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아 남영이 창살 안쪽으로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초초! 남영이야!” 이름을 듣자마자 안에서 힘은 하나도 없지만 반가움이 풍기는 청초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 남……. 남영? 남영? 어떻게 여기에…….”

 

“구해주러 왔어! 몸은 괜찮아?” 남영이 울컥하며 창살을 구부리려 했지만, 연청이 조심스레 그 행동을 막았다. 눈물 젖은 눈으로 노려보는 남영에게 연청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지금은.”

 

창살을 쥔 손에 힘을 풀며 남영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초초. 조금만 기다려. 내가 꼭 구해줄 테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저 못된 놈들이 괴롭히지는 않는 거지?”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남영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다치기라도 한 거야? 저 정파 놈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아무 짓도 안 했어. 그저 가둬만 뒀을 뿐이야. 그가 막아줬거든.”

 

“그? 방용화? 아직도 그를 좋아하는 거야? 그놈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거잖아!”

 

“그는 잘못 없어.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중얼거리는 초초의 대답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남영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연청이 가만히 남영의 어깨를 감싸고 잠시 피해달라 요청했다. 연청이 창살 안쪽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초 낭자. 나는 장연청이라 하네. 지금 남영과 같이 행동하는데 한가지 물어볼 게 있어.”

 

“남영이 정파 인과 함께 한다고요?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남영은 어디있죠?”

경계 서린 목소리에 연청은 잠시 뜸을 들였다. 울던 남영이 다가와 초초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초초. 괜찮아.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야.”

 

“정파 인은 믿으면 안 돼. 믿으면 안 돼.”

 

“그러는 초초는 왜 그를 따라간 거야? 그도 정파 인이잖아.”

 

말이 없는 틈을 타 연청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초 낭자. 나는 도우려 하는 걸세. 남영과는 차로 친분이 생긴 거야. 우리 둘 다 차를 좋아해서 단지 차로 엮인 지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작지만 명성과 재능이 좀 있어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거든.”

 

대답이 없었다. 연청이 재차 물었다.

 

“하나만 묻겠네. 청성파 장문인이 무슨 차를 마시는지 아는가?”

 

대답이 없었다. 남영이 곁에서 대신 대답했다.

 

“초초는 차를 잘 몰라요. 차를 좋아하는 건 우리 교단에서 저뿐입니다.”

 

“좋네. 그러면 진지하게 묻겠네.” 장연청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청성파 장문인에게 독을 쓴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남영이 놀라 연청을 쳐다보았다. 연청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독기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검삼 입니다.”

 

“왜지?” 창고 벽을 두드리며 연청이 물었다. 톡톡. 톡톡. 톡.

 

“이검삼이 청성파 장문인의 후계자로 보이지만, 실상 정식 후계자로 그이가 유력했습니다.”

 

“자신의 장자가 아닌 이제자를?”

 

“그렇습니다. 탐욕스럽고 표독하다 해서 장문인께서는 그이를 더 아꼈습니다.”

 

“됐네. 고맙네. 조금만 기다리게. 꼭 구해줄 테니.”

 

연청이 자리를 피하자 남영이 다시 붙어 소리쳤다.

 

“초초! 조금만 기다려! 꼭 우리가 구해줄 테니까.”

 

계속 힘없이 들리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달랐다. 귓가에 파고드는 음성은 또렷하고 맑았다. 초초의 마지막 대답은 그랬다.

 

“내가 죽이지 않았어. 살아 나간다면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

 

저만치 뭔가를 들고 뛰어오는 방용화의 모습이 보였다. 연청과 남영은 창가를 피해 그를 기다렸다. 숨을 몰아쉬며 방용화가 종이로 접은 뭉치 더미를 건넸다.

 

“이것이 철관음 입니다.”

 

“조금만 얻어가겠네.”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사부님은 더는 드시지 못하니…….”

 

“알겠네. 다시 돌아올 테니 참고 기다려 주시게나.” 연청이 품에 집어넣고 남영에게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떠나는 둘의 뒷모습을 방용화가 힘없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대청을 향해 걸으며 연청이 남영에게 물었다.

 

“증상으로 무슨 독인지 파악되는가?”

 

“확실히 우리 오독교의 독은 아니에요. 저렇게 긴 잠복기를 거치지는 않아요.”

 

“나도 알기로는 빠르고 강력한 효과가 오독교의 특징이라 들었네.”

 

“저희 독의 특징은 벌레예요. 벌레에서 뽑아냅니다. 벌레는 동물이라 강하죠. 그래서 빠르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저 증상만 들었을 때는 천천히 시작되다가, 환각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런 종류의 독이라면 짐작 가는 게 있어요.”

 

“느리게 서서히 말려죽인다라.”

 

남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버섯입니다.”

 

연청이 이마를 탁 치며 웃었다.

 

“사천당가 맞는가?”

 

남영이 고개를 돌려 연청을 쳐다보았다.

 

“정말 그들을 의심한단 말입니까?”

 

“나는 명문정파니 사파니 그런 거 관심 없는 사람이야. 독에 당했다면 독술에 강한 이들부터 조사해야지. 모든 사건 해결의 가장 큰 중점은 왜 죽였는가, 어떻게 죽였는가, 누가 이득인가 이 셋뿐이야. 초낭자도 물론 포함이었고. 허나 금방 제외했지. 너무도 의심받을 상황이 많았으니. 천치가 아닌 이상 제 발로 드러내며 죽일 일도 없고, 그 동기도 부족해.”

 

“그들도 명문정파입니다. 사천당가는 무림세가 중 최고로 치지 않습니까?”

 

“그렇게 뒤로 수많은 사파 인들을 독살했지. 크게 보면, 다를 게 없지 않나.”

 

남영이 가만히 연청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않자 연청이 당황해 물었다.

 

“왜 갑자기 쳐다보나?”

 

“오라버니는 참 신기한 사람입니다. 정파도 사파도 아닌 그저 오라버니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아니 뭐가. 신기하다기보다는 세상 통달했다고 치세.”

 

어느새 둘은 대청에 다다랐다.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던 이검삼에게 연청이 다가가자 붉게 물든 얼굴로 이검삼이 물었다.

 

“단서는 잡으셨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게. 거의 다 정리되었네.”

 

“어서 빨리 저 요녀를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남영을 노려보며 이검삼이 잔을 내려놓는다.

 

“방금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늘 내일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요녀의 목을 단숨에 벨 것이외다. 사제가 막는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만일 막는다면, 사제의 가슴도 뚫어버릴 것이외다. 술주정이라 생각하십니까? 술주정일 수도 있소. 하지만 이제 장문 대리로서 더는 방관할 수 없어. 당한 것은 갚아야 하지. 그리고서 모든 문하를 총동원하여 독룡교를 칠 것이외다. 사천당가가 협력해 준다면 가능하오.”

 

이검삼이 일어나 장연청에게 포권을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때 선배님의 고강한 무공이 필요하니 꼭 도와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알겠네.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오겠네.”

 

연청이 남영에게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둘은 대청을 나섰다. 돌아보니 여전히 이검삼은 탁자에 앉아있었다. 그의 노려보는 눈빛이 아직도 보일 정도로 매서웠다. 남영이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하렵니까 오라버니?”

 

“동생의 정체를 눈치챘어. 오독교 인줄은 모르겠지만 무공을 숨기고 있다는 건 이미 아는 것 같아. 확실히 초 낭자의 말대로 표독스러운 놈이야. 시간이 없네. 곧바로 사천당가로 가야 할 것 같다.”

 

연청이 품에서 방용화에게 받은 철관음을 꺼냈다. 남영에게 건네주며 연청이 말했다.

 

“이 철관음의 성분을 조사해줄 수 있겠나?”

 

“물론이에요. 독의 유무는 판단이 쉽습니다.”

 

“부탁할게. 사천당가는 나 혼자 다녀오지. 촉박해서 임무를 나눠야 해. 술시에 만나는 거로 하지. 장소는 그때 그 찻집.”

 

“알았어요. 저는 그 증상을 토대로 독의 성분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보를 좀 더 캐볼게요.”

 

“오! 그게 가능한가?” 연청의 감탄에 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에 쓰이는 재료는 한정적입니다. 유통되는 곳이 반드시 있을 거고, 그곳을 캔다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어요.”

 

“좋아. 역시 동생은 대단해. 사천당가와 청성파와의 관계가 좀 수상하니 나는 그 부분을 조사해보겠네. 그럼 있다 보자고 동생.”

 

“조심하세요. 오라버니.”

 

연청이 손을 들어 답했다.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남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천당가의 저택은 으리으리했다.

 

거대 문파인 청성파 못지않은 위용이다. 호화롭게 치장된 금장들이 벽과 문 곳곳에 새겨져 있고, 향기로운 꽃들과 여러 알 수 없는 식물들이 곳곳에 심겨 있다. 저택 내부에 커다란 밭이 있고, 수많은 식물을 재배한다. 그러니까 저것이 다 독초지? 대문은 열려있었다. 이상하게 지키는 호위도 하인도 없다. 연청은 그대로 저택 안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소?”

 

연청의 외침에 가장 가까운 별관 문이 열렸다. 기다란 수염을 한 등이 굽은 노인이 연청을 보며 물었다. “누구요?” 포권을 하며 연청이 큰소리로 답했다.

 

“불초과십수 장연청이 사천당문주 당형비 대협을 뵈러 왔소!”

 

“호오. 정말 불초과십수가 맞는가?” 노인의 질문에 연청이 더 큰소리로 답했다.

 

“그렇소만! 노협께서는 누구신지?”

 

“정말 십 수전에 싸움을 끝내는가?” 노인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그렇게 어이없는 별호는 또 처음 듣네만. 농인 줄 알았더니.”

 

“노협께서는 저보다 선배이신 것 같으니 마음껏 비웃으셔도 상관없소이다! 문주만 뵙게 해주시오.” 껄껄 웃으며 연청이 받아쳤다.

 

“나를 보러 왔다면서 왜 몰라보나?”

 

“아, 당선배님이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그 별호 말이지, 불초과십수라는 거 정말 믿을 수가 없는데, 네 놈이 장연청이라는 것도 못 믿겠고, 요즘은 하도 이놈 저놈 사칭해대니까.” 노인이 구부렸던 허리를 천천히 편다.

 

“내 시험 함 합세.”

 

손을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분명 뭔가를 던졌다.

 

날아드는 무엇이 공기를 가르는 게 느껴진다. 정면에서 보고 있었으나 연청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날아든다. 대단한 암기술이다! 검집에서 검을 빼내며 동시에 뒤로 물러선다. 한달음에 1장 남짓 뛰는 연청의 경공을 보며 당형비가 감탄 했다. 하지만 던진 것은 그대로 계속 날아간다. 어찌 막으려나?

 

바닥에 착지하며 연청이 검을 곧게 위로 뻗어 명치 쪽부터 세웠다. 곧 팔을 죽 뻗으니 정면을 겨냥한다. 빙글 돌리며 허공을 가른다. 둥그런 원과 굴곡지게 휘는 가운데와 위아래로 점을 찍으니 하나는 음, 하나는 양.

 

“태극검법 이로구나.”

 

반복하고 반복한다. 반복하고 반복한다. 원은 점점 선명해지고 굴곡은 점점 요동치고 커다란 태극이 드러난다. 거대한 태극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태극검법의 진수는 방어에 있다. 투두둑 하며 검에 튕긴 것들이 바닥에 쏟아진다.

 

“대추 씨였다. 이번에는 좀 더 큰 것들이다.” 당형비가 중얼거린다.

 

이렇게 빠를 수가! 연청은 이번에는 집중했으니 던지는 손이 아예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니나, 상하좌우로 던지는 손이 거의 동시로 보였다. 단숨에 네 번을 던진 것이다. 검의 속도를 올린다. 빙글빙글 도는 태극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내공을 모아, 삼시 방향으로 검무를 펼친다. 음양이 조화로워 모든 것이 평안하니, 그것이 만고의 이치로다. 강하고 약함은 그 차이에 있다. 모두가 같다면 모두가 강한 것이고, 모두가 같다면 모두가 약한 것. 엄청난 수의 호두알들이 공중에서 박살이나 흩뿌려진다.

 

“대단하군!”

 

당형비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이번에는 무얼까? 길쭉하고 날카롭다. 그저 나뭇가지일 뿐인데, 매섭기가 단검에 비할만하다. 절정의 암기술이다. 막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온몸에 박힐 테다. 연청이 이를 악물며 검을 힘껏 쥐었다. 흔들거리던 연청의 손목이 엄청나게 요동친다. 떨리는 손으로 검을 흔드니 수십 수백 개의 검신이 우아한 자태를 이룬다. 검의 장막이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와 같이, 하늘과 땅을 잇는 검의 파도가 된다. 천지합일. 모든 것은 조화롭다.

 

나뭇가지들이 조각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거의 동시에 당형비도 착지했다.

 

“장연청이 맞군. 무당파의 검법 잘 봤네.”

 

맺힌 땀방울이 굴러떨어진다. 연청의 몸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검을 거두며 검집에 꽂고, 다시 한번 제대로 예를 갖춰 포권을 한다. 이번에는 노인도 포권으로 답한다.

 

“대단하고 고결한 무공입니다. 역시 사천당가의 암기는 천하제일이라 칭함이 맞습니다.”

 

“당문을 대표하는 절기는 암기보다 독이지. 허나 같은 식구한테는 쓰질 않으니.” 당형비가 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어인 일로 왔는가?”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연청이 답하자 당형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연청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강호에 총명함으로 이름을 날리는 자네가 노부에게 뭐가 궁금한지?”

 

“청성파의 일입니다.” 연청의 대답에 당형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노인이 몸을 돌려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했다. 연청이 뛰어 당형비 곁에 섰다. 둘은 걸으며 담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청성파와 우리 가문은 문제없이 잘 지내는데 뭐가 궁금하지?”

 

“당문주께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데?”

 

“청성파의 장문인이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연청이 숨기지 않고 답하며 당형비의 얼굴과 행동을 순식간에 살핀다. 당형비의 눈이 커졌다.

 

“독이라고? 병이 났다고 들었는데?”

 

“모르셨습니까? 혹시 아드님한테 어떤 말도 들으신 적 없습니까?”

 

“아들놈? 인봉? 그놈은 요즘 뭘 하는지 통 집구석에 없어. 에잉. 못난 놈이야 못난 놈.”

 

침을 칵 뱉으며 당형비가 투덜거렸다. 본채에 다다라 마루에 오르면서 당형비가 연청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 차 좋아한다지?”

 

“차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나도 차를 좋아하지. 사천에서 차를 좋아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거야. 그 못난 놈은 차를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속이 타네 속이 타. 내가 죽으면 당문을 대표할 놈이 그러면 쓰겠나. 안 그런가?”

 

“이렇게 정정하신데 앞으로 이십 년은 더 그런 걱정 하실 테니 지금 당장은 걱정을 내려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당형비가 낄낄 웃었다.

 

“청산유수네. 청산유수야. 이렇게 무공도 고강한 데 밖으로만 싸다니니 안타깝구먼. 안타까워. 자네 같은 기재가 말이야. 무당 장문도 속 많이 썩을 테지.”

 

“아버님은 저를 쳐다도 안 보려 하십니다.” 연청이 웃으며 말하자 당형비가 자리를 권했다.

 

“앉게나. 그래도 아들놈인데 자식 걱정은 다 똑같은 거야. 가만히 있으면 무당의 장문이 될 터인데 싸돌아다니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나? 내가 지금 인봉 못난 놈 생각하는 거랑 똑같을 걸세.”

 

하인이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 그리고 주머니 하나를 가져왔다. 당형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린다.

 

“이검풍 장문은 독에 당한 게 맞는가?”

 

“제가 봤을 땐 독인 것 같습니다.”

 

“유일한 내 지기였는데. 차로 통하는.”

 

“진정 모르셨습니까?” 연청의 질문에 당형비가 주머니 안에 든 뭉치를 꺼냈다. 조심스레 펼치자 찻잎들이 자태를 드러낸다. 연청이 보자마자 손뼉을 짝 쳤다.

 

“몽정황아(蒙頂黃芽)!”

 

평편하고 곧다. 길쭉하며 노랗다. 다른 찻잎들과는 달리 황색을 띤다. 황차. 사천 최고의 차이며 조정에 바치는 공품 이기도 하다. 즉, 최고의 명차.

 

찻잎을 잔에 넣고 우려내자 깊은 향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절로 드러눕고 싶은 기분에 연청의 마음도 포근해진다. 이렇게 깊은 향이 날 수 있다니. 이건 마치 꽃을 다려낸 것과 다름없다. 꽃밭에 둘러싸인 느낌이다. 눈을 감고 향을 음미하는 연청의 귓가에 당형비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다 무슨 소용인가. 알아주는 이 없거늘. 아무리 명차라 해도 지기와 나누지 못하면 의미 없지. 자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허이. 독술이니 독에 대한 의견을 구하려 했겠지. 아니면, 나를 의심했거나. 허나 명심하게.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어. 만약 그랬다면 이 몽정황아를 마실 가치가 없지.”

 

연청은 귀를 기울였다.

 

“죽인 놈들은 모두 악인뿐이다. 사람을 해쳤거나, 도둑질했거나, 겁탈했거나. 그놈들은 모조리 죽였지. 하지만 평범한 이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칠십 평생 단 한 번도 없어. 적어도 이 노부는 그랬다.”

 

조심히 찻잔을 들어 한 입 마신 당형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무슨 증상인가?”

 

연청이 탁자를 두드린다. 톡톡. 톡톡. 톡.

 

“긴 잠복기가 있었습니다. 물집, 붉게 변색 된 피부, 구토와 떨림.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환각을 보며 미쳐갑니다.”

 

“버섯이네. 그런 악독은 버섯밖에는 없어.” 당형비가 고개를 흔들거렸다.

 

“하지만 우리 당문에 그런 독술은 없지. 우리가 키우는 독버섯들은 그런 다양한 증세를 보이지 않아.”

 

“당문주님도 모르시는 증상입니까?”

 

“오독교의 독은 벌레와 저주가 태반이지. 그들은 좀처럼 독을 쓰지는 않지만 정말로 죽이고 싶을 때는 단숨에 무서운 고통을 주는 방법을 선호한다. 천천히 말려 죽이는 건 선호하지 않아. 예전에 오독교 전대교주와 친분이 있었다. 그도 차를 아주 좋아해서 종종 같이 마셨어. 서로 독술도 통했으니 얘깃거리가 많았지. 그러니 오독교의 독도 아니야.”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연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문주님도 모르실 정도면 이건 중원의 독이 아닐 테군요.”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먼. 아마도 서역에서 건너온 것일 게야. 버섯인 건 확실하네. 광기를 주입하는 건 버섯밖에는 없어. 혹시 미쳐서 뭘 봤다고 하던가?”

 

“불에 타는 것 같다고 했답니다. 불이 타오른다면서.”

 

“불이라. 불.”

 

당형비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연청 또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톡톡. 톡톡. 톡. 사천당가의 독이 아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청성파와 양대 세력을 이루기에 사천당가가 독점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봤으나, 문주는 그런 욕심이 없다. 적어도 자신을 가리려 한다면, 오독교와의 친분을 꺼낼 이유가 없다. 의심이 가는 사람이 좁혀진다.

 

청성파의 장문이 죽으면 누가 이득을 볼까?

 

당인봉은 왜 말하지 않았는가?

 

누가 독을 구해줬는가?

 

어떤 방법으로 독을 주입했는가?

 

“예전에 서역에 방문했을 때 잠깐 소문을 들은 게 있네.” 당형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게 변한 보리알을 쓰는 독이 있다고.”

 

“보리 말입니까?”

 

“불에 타 죽는 독이라 했어. 하지만 보리는 그런 환각 증상이 없네.”

 

검은 보리라. 연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주님. 깊고 훌륭한 최고의 몽정황아를 대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할 일이 생겨서 이만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벌써 가나. 섭하게.” 당형비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곧 떠날 테고. 지기들도 모두 먼저 가니 울적하기만 하구나. 죽어서 지옥에 갈 테지만 끝까지 각지의 명차를 찾아 달여 마시며 남은 삶을 달래리…….”

 

 

연청은 내공을 끌어모아 달리는 속도를 올렸다. 단서를 찾았다.

 

검은 보리라는 단서를.

 

 

 


 

 

 

공급원을 찾으면 누군지 알 수 있다.

 

흐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남영은 성도 곳곳에 정체를 숨기고 지내는 오독교 인들을 찾아다녔다. 교주의 흑패를 보여주면 모두는 반항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지내오고 봐온 것들이 독에 관련된 것들인지라 독술의 재료가 되는 것들을 많이 취급했고, 사천당가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철관음에는 독은 없었어. 순수한 찻잎뿐이다.’

 

금세 파악한 남영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어떻게든 독의 단서를 찾아야 했다. 벌레와 동물은 제외하고 철저하게 버섯의 공급 흐름을 쫓았다. 분명 그 증상은 독버섯이 분명하다. 식용이 아닌 독버섯의 재료가 모이는 곳을 찾기란 쉬웠다. 중원에서 독초와 버섯을 쓰는 독술은 사천당가만이 존재한다.

 

여섯 번째로 들려서야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최근까지 버섯과 독초들을 공급하던 허관이라는 이였는데, 그는 오독교 내에서도 다른 이들이 취급하는 독에 관심이 많기로 유명했었다. 흑패를 보여주자 엎드리는 그에게 남영이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허관. 자네는 사천당가에 물건을 자주 건넸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독교의 비술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밝히면 죽음이니 당연하지. 내가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아 왔네. 교주의 명이 곧 내 명이니 받들라.”

 

“분부 받들겠습니다.”

 

남영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개를 들라.” 허관이 고개를 들자 남영이 흑패를 탁자에 내려놓고 허관의 눈을 내려보았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허관이 다시 숙이자, 남영이 재차 명령했다.

 

“고개를 들라. 눈을 보며 말하고 싶네.”

 

“분부 받들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든 허관의 눈을 보며, 남영이 진지하게 물었다.

 

“사천당가와의 거래에 대해 보고하라.”

 

“네. 사천당가 당주인 당형비와 오래 거래했으며, 종종 차도 구해주고는 했습니다.”

 

“차? 당형비가 차를 좋아하는가?”

 

“차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사실 저나 다른 동료들이 오독교인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남영은 깜짝 놀랐다. 알고 있다고? 그래도 거래를 했어?

 

“사파라면 치를 떠는 영감 아닌가?”

 

“아닙니다. 당문주는 정 과 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본 악인만 죽였습니다. 저희의 정체를 아시고도 혼자만 알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고 계속 거래를 해왔습니다. 저희 정체는 오직 그분만이 아십니다.”

 

남영은 의외라 생각했다. 사천당가의 독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최근 이상한 점은 없었나.”

 

“실은, 원래라면 당문주님과 거래를 하지만, 그 최근에 다른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뭐지?”

 

“서역에서 물건을 구해달라 하였습니다.”

 

서역. 서역도 독으로 유명하지. 남영의 머리가 번쩍 트였다. 왜 중원만 생각했을까? 나조차도 중원 인이 아닌 것을!

 

“그렇다면 그것이 버섯의 종류인가?” 질문하는 남영의 가슴이 몹시도 두근거린다.

 

“서역에서 건너온 버섯이었나?”

 

 

 

“버섯이 아니었습니다.”

 

 

 

허관의 대답에 남영은 혼란스러워졌다. 숨을 가다듬고 남영이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리였습니다.” 허관의 대답에 남영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버섯이 아니라 보리라고? 보리는 그런 독성이 없어.

 

“검은 보리였습니다.”

 

“검은 보리? 허관 자네는 타지방의 독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지 아마? 혹시 그 검은 보리에 대해 아는 게 있나?”

 

허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리 싹 중에 종종 검게 변색 된 알들이 존재합니다. 그 검은 보리를 빻아 독을 만듭니다. 그 독에 중독되면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습니다.”

 

“어떤 고통인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불에 타죽는 고통입니다.”

 

아. 증상과 일치해. 그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보리는 절대 그런 독이 될 수 없다.

 

아니야. 단지 모르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서역의 독술은 무궁무진해서, 뱀을 다루기도 한다 했다. 오독교가 벌레, 사천당가가 버섯과 독초라면, 서역은 워낙 넓어 이루 셀 수가 없다. 중원이 넓다 하나 세상에 비하겠는가. 사람을 죽이는 독의 가지 수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다. 방금 남영은, 한 단계 성숙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남영이 다시 물었다.

 

“누가 그 검은 보리를 요청했는가?”

 

“바로 당인봉 소문주 입니다.”

 

당형비가 아니라, 당인봉 이었군. 오라버니는 괜찮으려나?

 

“검은 보리를 가지고 있나?”

 

“남은 게 있습니다.”

 

“가지고 오게.”

 

허관이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은땀이 흘러 속옷까지 젖을 정도다. 남영이 흑패를 품에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 도포는 너무 답답하군. 어서 빨리 남장을 풀고 싶어. 시간이 많지 않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남영이 다급한 마음에 소리쳤다.

 

“허관! 아직인가!”

 

대답이 없다. 뭔가 이상하다. 남영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교주의 명을 거역하는 것인가?”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남영이 천천히, 허관이 들어갔던 주방으로 향했다.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고 있는 허관이 보인다.

 

팍! 어깨에 뭔가가 박혔다. 남영이 비명을 질렀다. 암기가 또다시 날아든다. 재빨리 옆으로 피하며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니 이미 사라지고 없다. 천장 구석에 붙어 기다리다가 수를 쓴 것이다. 안 돼. 검은 보리는? 이미 가져간 듯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기를 맞은 어깨 부위가 저리기 시작한다. 옷이 검게 변색 된다.

 

독이다.

 

도포 어깨 부위를 찢어버리고 즉시 점혈을 해 피가 도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허관의 시체를 뒤졌다. 어떻게든 그 단서를 찾아 가져가야 해. 내가 아니면 초초는 죽는다. 도와주는 오라버니에게도 보답해야 해. 아무것도 없다. 절망감에 빠진 남영의 눈에, 허관의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보인다. 서둘러 남영이 허관의 주먹을 폈다.

 

검은 보리 알이 하나.

 

죽기 전까지 교단에 충성한 것이다.

 

검은 보리를 챙기고 행여 잃어버릴까 꽁꽁 쟁여 품에 넣었다. 슬슬 독 기운이 올라온다. 빨리 치료해야 한다. 하지만 이 치료법은 내가 혼자 할 수 없어. 일단은 어서 오라버니에게로.

 

미친 듯이 달렸다. 남영은 내공을 최대로 올렸다. 그렇게 되면 독이 더 빨리 퍼지겠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독의 원천을 찾았으니 오라버니에게 전달해야 했다. 먼저 도착해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먼저 도착하면 기다리다가 죽을 거야. 그건 개죽음이다. 도착해도 없다면 사천당가로 찾아가야 해. 한시가 급하다. 어서!

 

눈앞이 조금씩 침침해진다. 오독교인 내가 독에 당하다니. 이런 창피한 일이 어디 있담. 드디어 도착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오라버니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아. 더는, 버틸 수가 없는데, 그래도 사천당가로 가야 해. 나는…….

 

쓰러지는 남영을 누군가 품에 안았다.

 

장연청 이었다.

 

 

 


 

 

 

“남영! 남영!”

 

혼미해진 듯 눈이 풀린 게 독에 당한 것 같다. 연청이 얼른 몸의 상처를 살폈다. 찢어진 어깨 부위가 시커멓게 변색 되어 있다. 혈도를 먼저 막아 독이 가슴으로 퍼지는 것은 막은 것 같다. 하지만 연청은 독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침상에 눕히고 안절부절못했다.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일단은 자책하기 전에 사람부터 구해야 한다. 남영을 깨워야 해. 뺨을 치며 연청이 소리를 질러댔다. “일어나 동생! 남영! 낭자! 일어나시오 낭자!” 몇 번을 후려치며 소리 치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가늘게 눈을 뜬다. 반가운 마음에 연청이 다급히 외쳤다.

 

“정신이 드오? 남영! 나 알아보겠어?”

 

“오......라버니......품에......”

 

“아니야. 뭐가 중요해. 지금 중요한 건 너야.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어찌 해야 하는지 알려 주게. 빨리! 해독제가 있나?”

 

“......입으로 빨아야......그리고......품안에......오독환을......”

 

“독을 빨아내야 한다고?” 연청이 물었다. 남영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너무도 위험한 일이기에 다시 힘겹게 고개를 젓는다. 끄덕이다 젓는 남영을 보며 연청이 울화통이 터지는지 야단친다.

 

“내 그리 말했거늘 이 지경에도 변화무쌍인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연청이 남영의 어깨를 깨물었다.

 

있는 힘껏 빨아낸다. 그 백옥같던 피부가 새까맣게 변하다니. 다 내 탓이야. 연청은 눈을 질끈 감고 남영의 어깨를 빨아댔다. 독액이 입으로 넘어오는 게 느껴진다. 따뜻한 피도 넘실거리며 같이 몰려든다. 혀끝이 얼얼해진다. 행여 몰라 피의 흐름을 늦추는 점혈을 해두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피와 독에 입안이 가득 차 잠시 바닥에 뱉어낸다. 비우고 재차 깨문다. 빤다. 또 깨물고, 빨아낸다. 부드러운 살결이 조금씩 색을 되찾는다. 그에 비해 연청의 입술은 점점 검게 물든다. 그래도 힘껏, 빨았다. 뱉어내고, 빨았다.

 

남영의 눈빛이 맑아진다. 정신이 점점 돌아온다. 그에 비해 이제는 연청이 혼미해진다. 남영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런 연청을 보며 얼른 품에서 오독환을 꺼냈다. 이 환약을 씹어 삼켜야 해독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혼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처 부위도 그렇거니와, 독을 빨아내다 보면 환을 씹을 힘마저 남지 않을 테니.

 

남영은 환을 자신의 입안에 넣었다.

 

씹어 걸쭉하게 만든 뒤, 그대로 연청의 입술로 향했다.

 

늦지 않았기를. 남영이 연청의 입을 틀어막고 혀로 환액을 밀어 넣었다. 삼키세요 오라버니. 제발. 어떻게든 목구멍으로 넘기기 위해 남영은 애를 쓴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여기서 멈추면 안 돼요. 제발. 입술을 떼지 않고 그대로 연청을 안는 남영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오라버니.

 

연청이 눈을 떴다.

 

남영이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정신이 드세요?”

 

“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일단은 괜찮은 것 같은데…….”

 

품에 안겨있는 자신의 상황을 그제야 눈치챈 연청이 얼른 남영에게서 멀어진다. “아니 이게…….” 남영이 방긋 웃었다.

 

“비약을 먹었으니 이제 괜찮아요. 절 살려주셨어요.”

 

멋쩍은 표정으로 연청이 남영을 애써 외면하자 남영이 살짝 놀리는 투로 말한다.

 

“여인의 품에 안겨있던 게 창피한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 그 울다가 웃다가 좀 변화무쌍은 언제까지 변화무쌍인가? 그렇게 말해도 듣지를 않네.”

 

되려 소리를 높이는 연청에게 남영이 뾰로통해 한마디 던진다.

 

“이제야 오라버니 같네요.”

 

“동생도 괜찮은 거지? 독에 당하다니 누가 그랬나?”

 

“아마도 당문이겠죠. 당인봉의 소행일 거예요.” 남영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생각난 듯 남영이 품에 챙긴 그것을 꺼냈다.

 

“이게 뭐지?”

 

“그 독의 원천을 알아냈어요. 서역에서 건너온거에요.”

 

“검은 보리?” 연청의 답에 남영이 놀라며 물었다.

 

“오라버니는 어찌 그리 다 아십니까?”

 

“나도 당문주에게 들은 거야. 하지만 이걸 구하다니 동생이 더 놀라운데?”

 

“그렇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보리는 그런 독을 낼 수가 없어요.”

 

힘겹게 몸을 일으킨 남영이 탁자 곁에 앉아 보리 알을 살폈다. 연청도 곁에 앉으며 유심히 관찰했다. 검은색으로 변한 보리라. 남영이 조심스럽게 성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여러 가지 집기들을 꺼내는 걸 보며 연청이 신기해했다.

 

“뭔가 굉장하구먼.”

 

“쉿! 집중해야 해요.”

 

남영이 계속 손을 움직였다. 몇 번을 반복하던 남영이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고개를 돌려 연청을 쳐다보았다.

 

“이건, 보리가 아니에요. 보리처럼 생긴 버섯이에요.”

 

“뭐라고?”

 

“버섯이 맞았어요. 이 검은 보리가 바로, 청성파 장문인을 중독시킨 겁니다.”

 

연청이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톡톡. 톡톡. 톡.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먹였을까. 요리에 넣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모두가 먹는 요리에 그대로 독을 넣기란 위험한 일이고. 오직 장문인만 먹는 음식에 독을 탔다면.”

 

연청과 남영 모두 동시에 소리쳤다.

 

차!

 

오직 장문인만 즐겼던 차에 독을 탔다면?

 

“동생. 그 철관음에서 이 성분이 나왔나?” 남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그냥 찻잎이었어요.”

 

“오룡차는 분명 반 발효시켜서 색이 검붉지?”

 

“네. 특히 청성파 장문인이 즐겨 마셨다는 철관음은 철의 색을 띤다 해서 철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도 했죠.”

 

“이런. 이제야 모든 걸 알겠군. 잘못 짚었어.”

 

남영이 어리둥절 쳐다보자 연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약한 놈일세. 계획적이었어. 처음부터 계획했던 거야.”

 

연청이 몸을 일으켰다.

 

“가자고. 어서 청성파로 가야 해. 모든 걸 밝히고 초 낭자를 구해야지.”

 

 

 


 

 

 

청성파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문하인들이 무장한 채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서둘러 달려온 연청이 들어서려 하자, 앞을 가로막으며 제지한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셨습니다.”

 

“당장 들어가야 한다. 한시가 급해.”

 

“안 됩니다.”

 

남영이 살짝 담벼락 위를 올려봤지만, 눈치챘는지 청성파 문하인들이 검진을 취했다. 송풍칠진. 칠인의 검이 바람처럼 공격하고 바람처럼 흘려보내는 청성파 최강의 진법이다. 뛰어들기라도 하면 당장에 도륙할 심산이다. 연청은 다급해졌다. 분명 장문인과 관련 된 주요 사항일 테지. 아마도 장문인은 돌아가시고, 그 후사를 잇는 이검삼이 복수를 위해 초 낭자를 죽이려는 것이 분명해. 어쩐다? 검을 뽑지 않고 검집을 쥔 그대로 들며, 연청이 소리쳤다.

 

“이제부터 손을 쓰겠네. 검을 뽑지 않겠네만 상해는 입을 것이다.”

 

“송풍칠진을 우습게 보지 마라!”

 

이얍! 기합 소리가 들리며 그들이 검진을 펼친다. 둘은 정면, 둘은 좌우, 둘은 후면, 하나는 위에서. 동시에 공격한다. 송풍이 지나가듯 빠르게, 태풍이 불어오듯 강하게. 검의 끝은 모두 연청의 가슴을 노린다. 수천 번을 반복해서 수련한 그들의 움직임은 일치단결 그 자체다.

 

그 무엇이 다르며, 그 무엇이 같은가. 연청의 손목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떨리는 검신이 수백 개가 된다. 연청이 검을 부드럽게 노를 젓듯, 휘두른다. 그 검을 따라 수백 개의 검의 분신들이 꿈틀대며 넘실댄다. 그 검신의 파도로 연청은 커다란 원을 그리고, 커다란 굽을 그리고, 커다란 점을 찍고, 커다란 음과 양을 만들고, 커다란 태극을 그린다. 음양조화. 천지합일. 바람은 약해도 바람이며, 강해도 바람이니, 지나가도 바람이라.

 

일곱 명이 동시에 나동그라진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 그것은 앞의 공세를 뒤로 전환하고, 뒤의 공세를 좌로 전환하며, 좌의 공세를 우로 전환하고, 우의 공세를 위로 전환함이 전부였다. 그들은 그들에 패했다.

 

 

이것이 태극검법 이다.

 

 

그리고 내가 바로 불초과십수(不超过十手) 장연청이다.

 

 

남영이 감탄하며 소리쳤다.

 

“정말 십 수전에 끝내는군요!”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야. 일단은 내가 만든 별호도 아니라고. 다들 그렇게 불렀지.”

 

둘은 담을 뛰어올랐다.

 

대청 쪽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달릴수록 그 울부짖음은 점점 커져 왔다. 흐릿하게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검삼과, 그를 말리는 방용화와, 죽음을 기다리는 초초 낭자다. 연청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사자후를 내질렀다.

 

 

 

“멈추시게!”

 

 

 

검을 내리치려던 이검삼이 고개를 돌렸다. 울부짖으며 그를 말리던 방용화가 반색하며 연청을 향해 소리쳤다.

 

“장대협! 구하러 와주셨군요! 장대협!”

 

이검삼이 검을 내리고 자세를 취했다. 연청과 남영이 겨우 도착하니, 사태는 일촉즉발이었다.

 

“장대협. 나를 막지 마시오. 아버님의 원수를 갚겠소.”

 

“일단은 그 원수가 누군지 알고 갚아야 하지 않겠나?”

 

“물론 잘 알아. 요녀지. 독룡교의 악랄한.” 검을 바꿔 잡으며 이검삼이 연청을 노려본다.

 

“방해하면 출수하겠소.”

 

“방해할 생각은 없네. 자네와는 용건이 없어.” 연청이 고개를 돌렸다.

 

방용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어리석었지. 아주 훌륭한 경극이었네.” 연청이 남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파악한 남영이 재빨리 방용화의 곁으로 다가가 목을 겨누었다.

 

“참고로 내 동생은 무림고수라네.”

 

“흥. 이미 알고 있었소.” 이검삼의 대꾸에 답하지 않고 연청은 계속 말을 이었다.

 

“독을 탄 것은 방용화 자네야. 모든 건 다 밝혀졌네.”

 

축 늘어져 있던 초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찢어지는 목소리로 연청을 노려보며 괴성을 지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남영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런 초초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초초가 눈에 불을 켜며 연청을 쏘아보았다. 이검삼도 표정이 굳어진다. 연청이 품에서 검은 보리 알을 꺼냈다.

 

“이것은 서역의 독이지. 생긴 것은 보리 알이나 실상은 버섯이네. 불에 타 죽는다는 환각을 일으키지. 처음에는 사천당가의 독술이라 봤네. 청성파와 사천당가의 세력싸움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사천당가는 연관이 없었다. 개인이 벌인 짓이야.”

 

이검삼이 검을 거두었다. 고개를 좌우로 살피며 방용화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뭘 어찌했다고?”

 

“닥쳐라!” 남영이 독기어린 목소리로 외치자 방용화가 부들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연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실망이 가득한 숨이다.

 

 

 

“청성파 장문인의 자리는 원래라면 장자인 이검삼 대인이 계승해야 마땅하네. 하지만 이검풍 장문인은 둘째 제자인 방용화를 더 아꼈지. 심지어는 후계자를 바꿀 생각도 했던 모양이네만. 차를 좋아하고 선한 인성의 장문인은 독하고 매서운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러나 무공은 훨씬 고강하다. 방용화가 장문의 자리를 계승한다고 해도, 청성파 내부는 바람 잘 날이 없었을 거야. 확실히 해야 했지. 장문인의 후계 지정은 절대불변이다. 이대로면 자신이 장문인이 된다 해도 청성파를 한 손에 장악하지는 못해. 그렇다면, 우선은, 이검삼 대인이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

 

방용화의 표정은 점점 검게 변하고 있다. 이를 부딪치며 오한에 걸린 듯 바들거리며 몸을 떤다. 뒤에서 듣고 있는 초 낭자의 얼굴도 창백해진다.

 

“독을 쓰기로 했어. 하지만 누명을 씌울 상대가 필요했지. 초 낭자. 애초부터 방용화는 낭자를 사랑하지 않았소. 그저 이용한 거요. 일부러 접근한 거외다. 오독문은 독을 쓰니, 그리고 사파 인이니, 가장 알맞은 상대였던 거지. 이검풍 장문인의 인성 상 맺어지겠다고 들여온 여인을 매정하게 내쫓지 않을 거고. 그렇게 준비하고 천천히 독을 주입시켰다. 바로 이 검은 보리를 통해서 말이야.”

 

“장대협. 그럼 그 독은 누가 구해준 겁니까?” 이검삼의 질문에 연청이 답했다.

 

“당인봉 이지. 성인군자처럼 행세하나 위선으로 가득 찬. 이놈과 동종인 거야. 추측건대, 이검삼 대인께 오독문을 치자 종용한 것도 그 같소만?”

 

“맞소이다.”

 

“목적은 오독문의 멸살이네. 청성과 사천당가가 힘을 합치면 오독문을 멸문할 수 있겠지. 그리하면 중원 최강의 독술은 사천당가만이 유일하네.”

 

연청이 철관음을 꺼내 펼쳤다. 철처럼 검은, 발효 된 찻잎들이 보였다.

 

“방용화는 검은 보리를 이 철관음에 조금씩 섞었다. 보다시피 색이 검기에 소량을 섞으면 잘 티가 나지 않아. 요리에 넣기란 모두에게 위험했을 테고, 방법은 차에 독을 타는 것이다. 마침 이검풍 장문인만 차를 즐겼고. 차 시중을 들기 위해 여러 가지 차도의 기법과 차를 연구했을 것이야. 그렇게 장문인의 차를 준비하며 조금씩 이 보리를 섞어 중독되게 만든 거지. 이 검은 보리 독은 불에 타죽는다는 환각과 불에 타는 고통을 일으킨다네. 이것은 사천당가 당문주와, 오독문에 공인받은 것이야.”

 

듣고 있는 초초의 표정은 넋이 반쯤 나간 채다. 남영이 걱정되어 자꾸 돌아보자 연청이 잠시 말을 멈추고 남영에게 말했다.

 

“방용화의 혈을 찍어 제압하게나. 초 낭자 보살펴야지.”

 

점혈하니 방용화는 꼼짝도 못 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남영이 초초에게 달려가 껴안았다. 눈물을 흘리는 남영과는 별개로 초초는 그저 멍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내가 장문인이 되고, 독룡, 아니 오독교를 멸문시켰다면, 그 이후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이검삼의 질문에 연청이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음 불에 타 죽는 광기를 보이는 건 이대인의 몫이었겠지. 가루를 빻아 술에 타는 정도야 간단하오. 술은 향이 강해 모든 걸 가리지.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거야.”

 

“......”

 

“이제 초 낭자를 풀어줘도 되겠나?” 연청이 묻자 이검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영이 초초를 부둥켜안고 부축해 일어섰다.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팔과 다리가 혼이 나간 듯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용화를 바라보던 초초의 흐릿한 눈이,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입술이 열리며, 무섭게 깔리는 목소리가 그런 방용화를 향해 꽂힌다.

 

 

 

“고독(蠱毒).”

 

 

 

그렇게, 다시 고개를 돌려 남영을 바라본다. 남영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인다.

 

초초가 의식을 잃는다.

 

“일단 휴식을 취하게 해야지. 몸이 너무 많이 상했네.” 연청의 말에 남영이 초초를 부축해 방을 향해 데려간다. 이검삼이 쓰러져 꼼짝 못 하는 방용화를 보며 말했다.

 

“사제는 제가 책임지고 처벌하겠습니다. 당장 죽여야 마땅하나, 내부적으로 수습이 된 후에.”

 

“이제는 자네가 장문인이야.” 연청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네의 눈에는 탐욕이 가득해. 이제 원하던 걸 얻었으니 만족한가?”

 

이검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곡을 찔렸다는 사실과, 그런데도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다는 점이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당인봉은 알아서 하겠지. 당문주의 성격이라면, 제 명에 못 살 거 아니까. 내 직접 찾아가 찢어 죽이고 싶지만, 당문주의 얼굴을 봐서 참겠네.”

 

연청이 몸을 돌려 남영과 초초가 들어간 방으로 향했다.

 

이검삼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으나, 입은 웃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떠날 채비를 하고 짐을 싸는 연청을 보며, 남영이 밝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지켜보던 초초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남영과 연청을 번갈아 쳐다본다.

 

“왜 그래? 이제 다 끝났어. 집으로 가야지.”

 

“오라버니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처음 만났던, 그리고 독을 해독하던, 그 민가에서 둘은 마주 보고 섰다. 남영의 얼굴이 살짝 홍조를 띤다. 연청의 표정이 밝아진다.

 

“설마 차?”

 

“그럼요! 차가 아니고서야 그 어느 것이 오라버니를 밝게 웃게 할까요?”

 

“뭐 동생의 미소도 그중 하나지.” 초초가 입까지 벌리며 둘을 계속 번갈아 쳐다본다.

 

새빨개진 얼굴로 남영이 선물을 건넸다.

 

“저희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물려주신 거예요. 기일에만 먹으라고.”

 

“아니 아버님의 유품을 주는 건 좀 선뜻 받기 그런데…….”

 

“오독교에서 가장 차를 아꼈던 분이에요. 저도 많이 배웠고요. 이제 아버님은 안 계시고 좋은 날에 먹으라 했으니 오라버니에게 드릴게요. 초초를 구했고, 오라버니를 만나 같이한 시간 하나하나가 소중했어요. 제겐 가장 큰 기일이에요.”

 

“독과 차는 한 끗 차이라, 하나는 죽게 하고 하나는 살게 하니 독술의 대가들은 전부 차를 사랑하는구나. 동생 아버님도 그랬겠지. 하지만 받을 수 없네. 더 큰 기일이 있을 거야.”

 

“일단 열어보세요.”

 

연청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종이를 풀어 펼쳤다.

 

은색으로 빛나는 잔털이 가득한 찻잎들이 뾰족한 자태로 옹기종기 모여있다. 은빛이 도는 침과 같다 해서 이를 군산은침(群山銀針)이라 한다. 용왕이 선물한 여의주를 땅에 심으니 그 위로 은침모양의 차나무가 자랐다고도 하고, 군산에 거주하는 신선이 만들어 먹었다고도 하는 천하제일 차.

 

“어, 이건, 어, 음.”

 

말을 잇지 못하는 연청을 보며 남영이 입을 가리고 깔깔 웃는다.

 

“드셔보셨나요?”

 

“황제가 먹는 차인데 어찌 보나. 구경도 못 했네.”

 

“이제 드시면 되죠.”

 

“그, 그럴까?” 연청의 표정이 밝아지며, 서둘러 투명한 잔을 찾는다. 짝! 남영이 손뼉을 치니 이미 찻주전자와 유리잔을 들고 하인이 나타난다. “아아. 군산은침을 드디어.” 연청의 표정이 허물어진다. 재밌다는 듯 남영은 계속 웃고 있고 그런 남영을 보는 초초의 표정은 이미 경악을 넘어 충격 그 자체이다.

 

“어서 물을 붓자고. 내 삼기삼락(三起三落)이 그토록 보고 싶었어.”

 

“저도 처음 봐요. 찻잎이 춤을 추듯 떠오른다면서요?”

 

“세 번을 뜨고 세 번을 가라앉으니, 이를 삼기삼락이라 하지.”

 

“찻잎 점을 치는 데 딱 맞겠네요.” 남영의 말에 연청이 근엄한 표정으로 답한다.

 

“이런 명차로 점을 치는 건 천벌을 받을 일이지. 어디 보자. 오! 뜬다 떠!”

 

“우와.”

 

“이런 명차를 마실 수 있다니, 역시 사는 게 제일이야.”

 

향을 음미하며 연청이 중얼거렸다. 남영도 같이 향을 음미한다.

 

그리고 둘은 마주 본다.

 

 

 

깊고 그윽한 향이라. 사람을 살리는 향이라. 맑고 상쾌한 향이라. 그 색깔만큼 청량하도다. 연청은 속으로 생각한다. 이 군산은침이야말로, 남영 동생과 딱 어울리는 차야.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이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향이라. 명차답게 기품있고 우아한 색이도다. 남영은 속으로 생각한다. 이 군산은침이야말로, 연청 오라버니와 딱 어울리는 차야.

 

 

 

잠시 더 마주 본다.

 

그렇게, 연청은 돌아선다. 방긋 웃고 있는 남영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금봉황(金鳳凰)을 찾아가야지. 아, 이것도 차인 건 알지? 진짜 봉황 잡으러 가는 건 아니고.”

 

“오라버니답네요.”

 

연청이 고개를 돌려 남영을 바라보았다.

 

“다시 만날걸세. 동생. 아주 진귀한 차를 가지고 꼭 방문할 테니까.”

 

연청은 떠났다.

 

인연은 우연히도 오는 거고 필연으로도 가는 거고 그것이 언제인진 알 수 없고 그것을 안다 해도 잡을 수 없으니. 다시 만나길 빌게요. 남영이 눈물을 닦았다.

 

 

 

초초가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됐다. 일어나라. 아직 몸이 성치 않은가.”

 

“교주님이 직접 강호로 출두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남영이라는 가명을 쓰면 교주 자신인 줄 알라고 했던 건 기억했지만, 갇혀 있을 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너무 놀라 혼절할 뻔했습니다. 비천한 저 같은 몸을 몸소 구해주시니 감격에 감격만 올라올 따름입니다.”

 

“흠. 됐다. 나머지는 교단으로 돌아가 얘기하지. 그리고 그것. 정말 후회 안 하겠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너는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을 죽일 것이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정말 후회하지 않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남영, 아니 오독교주 남효정이 흑패를 들어 윗부분을 돌렸다.

 

뚜껑이 열렸다.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게 보인다.

 

“이 고독(蠱毒)은 오독교 최고의 비기이자, 절대 공개해서는 안 될, 천하제일의 맹독이다. 당하는 자는 단 하루 동안 모든 고통을 겪고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죽을 것이다. 그 고통이란 수백 개의 침으로 찌르고, 수천 개의 칼로 살점을 도려내며, 수만 개의 불꽃이 전부 태우는 고통보다 더할 것이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초초의 증오 서린 눈빛을 본 남효정은 가만히 흑패를 건넸다.

 

 

 

 

 

그 벌레가 오늘 밤,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잘 알고 있었다.

 

 

 

 

 

 

후기

 

고독은 항아리 안에 온갖 독충들을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살아난 독충을 이용해 저주를 거는, 실제 중국 묘족의 토속 주술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중국의 차들은 모두 실존하는 것들입니다.
오룡차는 우롱차 이며, 과거 오룡차로 불렸습니다.(작 중 등장하는 '철관음'이 우롱차 계열입니다.)

남영의 아버지가 기일에 먹으라고 남긴 군산은침이 마지막에 애틋한 이별을 장식하죠? 아버지가 말했던 기일은 바로 남영의 혼인날이랍니다!

검은 보리 알은 [성 안토니오의 불 - 맥각중독증]을 참고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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