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벨제붑

2018.12.01 18:2412.01

푸른색 바다로 둘러싸인 지구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활기 찬 작은 생명체들은 지구에서 기나긴 진화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밀도로 육지와 바다를 가릴 것 없이 지구의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동료들이 셔틀의 점검을 마무리하는 동안 스튜어트와 테일러는 우주정거장의 작은 창문을 통해 지구를 내려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테일러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멀리서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데. 죽음의 별이 되었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인간에게만 내려진 형벌이죠. 지구를 가득 채운 저 작은 생명체들에게는 천국일 테니까요."

 

스튜어트는 언제나 그렇듯 감정 없는 밋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료들이 안드로이드가 아니냐며 놀릴 정도였다. 그런 농담 역시 스튜어트는 안드로이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해결점을 나열하는 것으로 맞받았다.

 

"날파리들에게 지구를 뺏기다니. 믿을 수가 없어."

 

"드로소필라 프로제니티부스(Drosophila progenitivus)예요. 아니면 벨제붑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던가. 날파리라니. 나방파리를 말하는 거겠죠? 사이코다 알터나타(Psychoda alternata). 그 둘은 생김새 말고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어요."

 

"제길. 지금 그게 중요해요? 어차피 지구는 저 날파리들로 뒤덮였는데. 학명가지고 따질 사람 아무도 없어요. 우리가 부르면 그게 이름이지. 날파리. 날파리. 난 계속 날파리라고 부를 거예요."

 

"그래요. 그게 테일러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겠죠. 이건 제 방법이고요."

 

스튜어트가 테일러를 보며 살짝 웃었다. 테일러를 잔뜩 옥죄고 있던 긴장이 조금 풀렸다. 둘은 마지막 임무를 앞두고 있었다. 임무가 성공한다면 둘은 죽게 된다.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은 이미 죽었다.

 

인간은 지구를 혹사시키기를 멈추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경고대로 온난화가 찾아왔다. 극지방의 얼음이 녹았고 해수면이 상승했다. 기류의 이상으로 고위도 지방은 혹독한 추위에 시달렸다. 그래도 인간은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조금 줄어든 육지 면적과 급격한 기온 변화는 기술력으로 무장한 인류의 생존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종말은 뜻밖의 경로로 시작되었다. 온난화로 녹은 빙하에서 다량의 철분이 바다로 유입되었고 식물성 플랑크톤이 번성했다. 인간들의 남획으로 수많은 어종이 멸종해버린 바다에서 플랑크톤을 먹이로 삼아 번성한 것은 놀랍게도 파리였다.

 

초파리의 한 변종이 바다로 퍼지기 시작했다. 하천이나 연못 대신 바다로 들어간 이 파리들은 넘쳐나는 플랑크톤을 먹으며 끊임없이 번식했다. 순식간에 해안가를 뒤덮은 이 파리들에 드로소필라 프로제니티부스. 번성하는 파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때까지도 인간들은 이 파리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살충제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변종들이 오직 인간에게만 작용하는 치명적인 세균을 품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파리를 숙주로 삼은 세균은 파리에게는 무해하지만 인간의 몸속에 침투하면 순식간에 중추 신경을 마비시켜 사망에 이르게 했다. 사망한 인간의 몸에서 번식한 세균은 일종의 페로몬을 방출해 파리들을 끌어들인다. 파리들이 시체에 알을 낳으면 세균은 그 알속으로 파고 들어가 다른 인간에게 이동할 숙주로 삼았다.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세균을 옮기는 파리에 벨제붑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 칠 개월 만에 파리들은 육지를 정복했고 지상의 인류는 절멸했다. 살아남은 건 우주정거장에 파견되어 있던 우주인들과 세계 곳곳의 밀폐된 벙커에서 저장된 음식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부 인간들뿐이었다.

 

"스튜어트, 테일러. 준비 됐어요. 셔틀은 이상 없고 남아 있는 모든 연료를 실었어요."

 

아무 말 없이 지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두 사람을 부른 건 셔틀의 점검을 맡은 랜든이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있는 건 지하 벙커 뿐 아니라 우주정거장도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임무라도 맡을 수 있는 스튜어트와 테일러는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랜든을 비롯해 정거장에 남을 사람들은 그저 임무가 성공하기만을 기원하며 머지않을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임무가 인류를 구원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격론이 벌어지며 결단이 미루어졌다. 더 이상 다른 대안이 없어진 후에야 우주인들은 인류 최후의 발악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인간을 배신한 지구에 날리는 잔인한 보복이었다.

 

지상의 인류가 절멸하기 직전에 우주정거장으로 코드 하나가 전송되었다. 네바다에 위치한 핵미사일 기지를 통제할 수 있는 암호 코드였다. 멸종에 직면한 인류가 파리를 상대할 무기는 지구 전역에 투하할 핵미사일이었다. 셔틀 조종석에 앉아 벨트를 조이며 테일러는 또 다시 불만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해요. 결국 핵벙커 속에 있는 자신들만 살아남겠다는 거잖아?"

 

"모두가 죽는 것 보단 낫겠죠. 다른 대안이 없잖아요?"

 

지상에서 전송된 코드에는 미리 세팅된 핵미사일의 궤도와 보안 장치를 해제할 수 있는 암호가 들어 있었다. 핵미사일 발사는 원격으로 승인할 수 없었다. 코드가 들어 있는 메모리칩을 제어 장치에 물리적으로 연결한 뒤 레버를 돌리고 버튼을 눌러야 했다. 지상에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지들이 하면 되잖아? 꼭 우리를 시켜야 해요?"

 

"벙커의 문을 여는 순간 파리 떼가 들이 닥치겠죠. 지하와 우주 둘 중 하나는 방사선 레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밀폐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남아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 정도 식량이 없어요. 합리적인 결정이에요."

 

"테일러, 스튜어트. 셔틀 분리합니다. 대기권 진입까지는 여기서 통제하지만 착륙은 수동으로 해야 해요. 행운을 빕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테일러가 대답했다. 랜든에게는 빌어 줄 행운이 없었다. 우주정거장에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고 행운이 필요할 일도 없었다. 행운이라는 말을 피하려다 신의 가호를 빌어 주고 말았지만 테일러는 신도 믿지 않았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의도는 인류의 멸망이고 정화였다. 핵 벙커는 노아의 방주였고 재빨리 벙커로 피신한 고위층들과 부자들이 선택받은 인류였다. 그런 선택을 한 신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정거장에서 분리된 셔틀이 연료를 분사하며 지구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연료는 대기권 진입에 꼭 필요한 만큼만 남아 있었다. 우주인들 역시 마지막까지 결정을 미룬 탓이었다. 꼼꼼한 랜든은 10%의 여유를 두고 연료량을 계산했고 계산대로 연료는 꼭 10%가 남았다. 테일러는 대기권 진입 직전에 엔진을 정지하고 남은 연료를 버렸다. 연료가 남아있으면 셔틀이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대기권에 진입하기 시작하자 셔틀 주변의 온도가 높아지며 흰색의 플라즈마가 유령처럼 꿈틀거리며 셔틀을 뒤덮었다. 잠시 후 정거장과의 통신이 끊어졌다. 플라즈마가 걷히자 다시 지구의 둥근 수평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테일러는 셔틀을 수동 모드로 전환했다.

 

"제길. 여전히 아름답군. 저 지구에 핵폭탄을 떨어뜨려 시커먼 먼지로 뒤덮는 게 정말 잘 하는 짓일까요?"

 

"어쨌든 인간은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지구와 인간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지구가 죽어야겠죠."

 

엔진을 정지한 셔틀은 커다란 날개를 미세하게 움직이며 S자로 활강하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하고 황량한 네바다의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테일러는 핵미사일 기지의 위치를 확인하며 조금씩 방향을 틀었다. 착륙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지상관제의 도움 없이.

 

고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멀리 기지의 활주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테일러는 활주로 방향에 맞게 셔틀의 방향을 조정했다. 지상을 확인하던 스튜어트가 말했다.

 

"정말… 모두 사실이었어요. 이런 황량한 곳까지 벨제붑이 뒤덮고 있네요."

 

"세상에. 이런데서 대체 뭘 먹고 저렇게 번식하고 있는 거예요?"

 

"영양분이 있는 유기물이라면 뭐든 먹을 수 있겠죠. 관목, 작은 벌레, 사람의 시체. 인간이 발을 내 디딘 곳이라면 저 녀석들도 갈 수 있어요."

 

희미한 먼지바람 같은 검은 점들이 지상 위에 물결치고 있었다. 고도가 낮아질수록 검은 점들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점들은 기지 근처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었다. 활주로와 정방향으로 맞춘 셔틀이 기지에 접근하자 군데군데 무리를 이룬 파리 떼들이 보였다.

 

"저게… 뭐지?"

 

"인간의 시체겠죠. 이곳에 지하 벙커가 있다는 걸 들은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모여 들었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에 파리의 공격을 받고 죽어서 식량이 되었겠지만. 조심해서 착륙해요. 방호복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우리도 똑같은 처지가 될 테니까."

 

테일러는 입술을 깨물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검은 구름에 뒤덮인 활주로가 눈앞에 보였다. 지상에 접근하자 파리들이 날아와 콕핏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씩 달라붙던 파리들은 순식간에 유리창을 뒤덮어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앞이 안 보여요. 테일러. 괜찮겠어요?"

 

"예상했던 일이에요. 지형은 머릿속에 다 있어. 눈 감고도 착륙할 수 있어요. 꽉 잡아요."

 

테일러는 조종간을 단단히 붙잡은 채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다섯까지 센 후 조종간을 당기자 기수가 들어 올려지며 기체가 급정거했다. 동시에 바퀴가 바닥에 닿으며 낙하산이 펴졌다. 피가 앞쪽으로 쏠리는 느낌에 스튜어트는 눈을 감았다. 사방으로 흔들리는 충격이 잦아들자 셔틀은 정적에 휩싸였다.

 

"괜찮아요? 다친 데 없죠?"

 

"멋진 착륙이었어요. 테일러."

 

둘은 방호복을 점검하고 산소통을 연결했다. 테일러는 내부를 살짝 가압해서 새는 부분이 없는지 확인한 뒤 무전기를 통해 말했다.

 

"스튜어트. 준비 됐어요?"

 

"됐어요. 이제 가죠."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콕핏을 열었다. 동시에 시커먼 파리 떼들이 몰려들어 왔다. 둘은 연신 헬멧을 문질러 파리들을 닦아 내며 움직여야 했다. 완전히 밀폐된 방호복을 입고 있었지만 파리들이 빨려들어 올 것 같은 느낌에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테일러가 이를 갈며 말했다.

 

"어서 이 자식들을 끝장내러 가죠."

 

스튜어트는 정거장으로 전송된 비밀 코드로 기지의 보안 시스템을 해제했다. 출입문들은 닫혀 있었지만 파리 떼들은 환기구를 통해 이미 기지 전체에 퍼져 있었다. 파리들이 침입하지 못한 건 별도의 공기 순환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지하 벙커뿐이었을 것이다. 벙커로 피신하지 못한 직원과 병사들, 간신히 이곳까지 와서 쓰러진 일반인들의 시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고 어김없이 시커먼 파리 떼에 뒤덮여 있었다.

 

통제실로 진입하는 통로는 이미 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파리들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달라붙은 파리들의 시체가 뚜렷한 발자국을 남길 정도였다. 그래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파리들은 줄어들었다. 테일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핵미사일 제어 시스템은 동작할까요? 이 녀석들이 회로에 눌어붙어 버리면 죄다 합선이 일어날 텐데."

 

"이 녀석들은 방사능 레벨에 민감하게 반응해요. 핵미사일 격납고 근처에는 다가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지구 전체에 핵공격을 가하자는 아이디어가 그래서 나온 거죠."

 

그 말은 사실이었다. 통제실 주변에는 확실히 파리가 적었다.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은 어김없이 파리들이 뒤덮고 있었다. 그래도 테일러의 우려처럼 회로까지 망가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통제실의 전산 시스템은 정상 작동하고 있었다.

 

"통제실도 핵벙커의 일부잖아요? 왜 이곳은 차단하지 않은 거죠?"

 

"차단했지만 실패했겠죠. 이 통제실은 핵벙커의 최상층에 있으니까. 벙커는 지하 10층까지 뚫려 있어요. 중간 어딘가에서 차단에 성공했다면 그 밑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히 살아 있겠죠. 그러니 그곳에서 우리에게 기밀 코드를 전송한 거고."

 

스튜어트의 대답에 테일러가 짜증을 냈다.

 

"제길. 생각하니 또 화가 나네요. 코앞에 있는 발사 장치를 동작시키기 위해 우주에 있는 우리들을 불러 내리는 게 말이 돼요?"

 

"왜 안 그러겠어요? 그쪽이 덜 위험한데. 사람이 빠져 나오기 위해 벙커를 개방하는 순간 파리가 숨어들면 끝장이니까요. 그리고 완벽하게 차폐된 상태로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다시 들어가진 못할 거예요. 한 명이 죽는 것 보단 한 명도 안 죽는 게 낫잖아요?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죄다 귀하신 분들 뿐일 테니. 그럴 만도 하겠네요. 정말. 우리가 그 분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해요?"

 

스튜어트는 대답 대신 제어 장치에 메모리칩을 연결했다. 몇 번의 경고 메시지와 함께 핵미사일들의 궤도가 설정되었다. 발사 준비된 미사일들의 전부. 목표 지점은 지구 전역이었다. 레버를 돌리고 버튼을 누르면 끝이었다. 테일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하려는 게 정말 옳은 일일까요? 날파리들을 쓸어버리는 거야 좋지만…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생물들이 죽을 거예요. 살아남는 건 극히 소수겠죠."

 

"그 소수에 인간이 포함되잖아요. 살아남기 위해 하는 일에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을까요?"

 

이미 우주정거장에서 수없이 했던 논쟁이었다.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버를 돌리자 보호 덮개가 열리며 버튼이 드러났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튜어트는 버튼을 눌렀다. 비상 사이렌이 울리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발사 장치가 동작하는 것을 확인한 스튜어트는 테일러를 보며 뜻밖의 말을 했다.

 

"그래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죠. 우리도 살아남아야 해요."

 

"우리? 우리가 살아남는다고요? 어떻게?"

 

"우주정거장으로 전송된 코드를 좀 분석해 봤어요. 기지의 일부 구역에 대한 접근만 허용되어 있었지만 기지 전체로 확대했죠. 벙커를 포함해서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테일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스튜어트를 바라보았다. 스튜어트는 여전히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농담을 하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두 사람이 통제실에 들어와서인지 파리들의 수는 어느새 늘어 있었다. 스튜어트를 절반쯤 뒤덮은 파리들을 보고 있자니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파리가 방호복 속으로 새어 들어왔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설마… 벙커를 열고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파리들을 달고?"

 

"그럼 벙커에 들어가 봐야 죽겠죠. 파리들을 모두 제거하고 들어가야죠. 최대한."

 

"최대한이라고… 파리 한 마리라도 벙커 안에 들어가면 끝이에요. 벙커 속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죽게 된다고! 어쩌면 그 벙커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인지도 모른다고요!"

 

스튜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카운트다운은 이미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

 

"이상하네요. 우린 지금 한 줌 남은 인간들을 살리려고 지구 전체의 생명체들을 말살하러 여기에 온 거예요.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지구를 죽일 수도 있다는 논리로 이 임무를 수행하는 거라고요. 전 제가 살기 위해서는 인간 전체를 죽일 수도 있어요. 그게 뭐가 다르죠?"

 

"이런 제길. 스튜어트. 지금 내가 나 하나 살자고 이 임무에 자원한 줄 알아요? 난 내 목숨을 바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여기 온 거라고요. 내 목숨 하나 구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추하게 죽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란 말야!"

 

"이거 실망이네요. 테일러 입으로 말했잖아요. 저 벙커 속에 있는 건 권력자와 부자들뿐이라고.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의 목숨을 버려야 하냐고 분노했잖아요. 그 사람들을 대놓고 죽이자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살기 위해 최선을 다 하자는 거지. 저기 있는 귀하신 분들 살리려고 우리가 그 노력도 포기해야 해요?"

 

스튜어트는 여전히 침착했다. 테일러는 할 말을 잃고 한 발 물러섰다.

 

"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일단 계획이나 들어 봅시다.“

 

스튜어트가 대답하려는 순간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중앙의 스크린에 미사일이 하나씩 발사되는 현황이 표시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이 기지에서 불과 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 목표였다. 남은 시간은 십 분 남짓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도와주든 말든 자유지만 방해하면 그냥 두지 않겠어요."

 

스튜어트는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테일러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여전히 수많은 파리들이 방호복에 붙어 있는 채였다.

 

스튜어트는 지하 벙커로 내려가는 길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기지 전체의 지도를 외우는 모양이었다. 계단을 통해 내려가 다음 층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앞에서 스튜어트는 테일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의 벙커는 층마다 개별적으로 차폐가 되고 있어요. 파리들이 침투한 층까지는 그대로 지나가고 침투하지 못한 층이 나오면 위층과의 연결을 차단한 뒤 따라 들어온 파리들을 모두 제거하고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간단하죠?"

 

"그럼 그 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염되겠군요."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차폐된 맨 위층에는 머무는 사람이 적거나 없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누구나 제일 아래층에 있고 싶어 할 테니까요. 한두 층 정도는 파리의 침입을 막는 버퍼로 쓰고 있을 확률이 높겠죠. 준비하고 최대한 빨리 움직여요. 출입구가 열리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하니까."

 

테일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트가 코드를 입력하자 벽면 일부가 열리며 레버가 등장했다. 레버를 당기자 압력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덜컥하고 문이 열렸다. 둘은 몸에 달라붙은 파리들을 최대한 털어내고 심호흡을 한 뒤 재빨리 문을 열고 통로를 통과했다.

 

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파리가 둘을 따라 통로를 통과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에 달라붙어 있던 파리들이 둘에게 모여들어 둘은 또다시 시커멓게 파리에 뒤덮였다.

 

"여긴 이미 오염되었네요. 다음 층으로."

 

스튜어트와 테일러는 그렇게 몇 개 층을 더 내려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줄어든 듯 하면서도 그들이 다가가면 어디 숨어 있었는지 꾸역꾸역 파리들이 기어 나왔다. 테일러는 신경질적으로 파리들을 눌려 죽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파리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파리가 죽으며 터져나가는 체액이 다른 파리들을 끌어들이는 모양이었다.

 

"스튜어트. 여기 벙커의 공기 조절 시스템이 일체형인가요? 아니면 층마다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나요? 공조가 뚫렸다면 희망이 없겠어요."

 

"제가 알기로는 개별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미세필터라도 붙어 있을 거예요. 공기 중에 퍼진 방사능 물질이 타고 들어오는 걸 최대한 막으려 했을 테니까."

 

"급수와 배수 시스템은요? 이 파리 녀석들은 하수구를 통해 들어올 수도 있잖아요."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한 가지 확실한 건 파리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층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거죠. 우리에게 코드를 전송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층이요."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벙커가 흔들렸다. 핵폭탄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지금 지상에서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을 터였다. 테일러는 순간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그 둘은 아마 지구에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한 이래로 가장 많은 생명을 단번에 죽여 버린 사람일 것이다. 테일러는 갑자기 화가 났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여전히 이 지하에서 자신에게 달라붙고 있는 파리들에 절망했다.

 

"우리가 일을 제대로 하긴 한 건가요? 이 끔찍한 날파리들이 이렇게 살아남아 있는데? 지구 전체가 불타도 이 악마 같은 녀석들은 어딘가에서 살아남아 끊임없이 기어 나올 거예요. 제길. 이젠 끝이에요!"

 

"진정해요. 테일러. 핵폭발 자체가 파리들을 전부 쓸어버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없앨 거고 남아 있는 녀석들도 적어도 수년간은 지상으로 올라가지 못할 거예요. 그 사이에 인간이 먼저 올라가서 방사능 환경에 적응해야겠죠. 지금은 그게 유일한 희망이에요."

 

스튜어트의 말대로 핵폭발이 효과는 있었다. 파리가 늘어나는 속도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적어도 지상에서 파리가 몰려 내려오지는 않는 듯했다. 파리들을 계속해서 짓눌러 터뜨리자 두 사람을 뒤덮은 파리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어디선가 한두 마리씩은 꾸준히 기어 나왔다.

 

"테일러. 서둘러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요. 방호복에 연결된 산소가 바닥나고 있다고요."

 

둘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파리의 수는 줄어들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공조기에서 배수구에서 조명기와 천장의 틈새 사이에서 파리들은 끊임없이 기어 나왔다. 서둘러 다음 층으로 내려가려는 스튜어트를 테일러가 붙잡았다.

 

"스튜어트. 그만."

 

"왜 그래요? 시간이 없다니까."

 

"여기 9층이에요."

 

"그래서요?"

 

"그래서요 라니! 이제 다음 층이 10층이라고요! 유일하게 사람들이 살아있는 층! 그곳으로 이렇게 파리를 달고 들어갈 순 없어요."

 

스튜어트는 잠시 테일러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이 층에서 파리를 최대한 제거해 보는 것뿐이겠네요."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파리들을 눌러 죽이기 시작했다. 파리들이 기어 나오는 통로들을 최대한 틀어막고 보이는 족족 파리들을 눌러 터뜨렸다. 방호복의 손과 발이 파리의 피와 눌어붙은 시체로 뒤덮였다. 그래도 어디선가 파리들은 끊임없이 기어 나와 두 사람의 방호복 구석구석에 달라붙었다.

 

"테일러. 이리 와 봐요. 일단 몸에 붙은 걸 좀 털어내야겠어요."

 

스튜어트는 테일러의 헬멧과 방호복에 달라붙어 있는 파리들을 털어내고 눌러 죽였다. 테일러도 스튜어트에게 달라붙은 파리들을 털어냈다. 스튜어트는 테일러의 등 쪽으로 돌아 파리들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등에 멘 산소통 사이에 끼어있는 파리들을 집어내던 스튜어트는 돌연 산소통과 방호복을 연결하는 튜브를 빼 버렸다.

 

"스튜어트? 무슨 짓이에요!"

 

테일러가 깜짝 놀라 뒤로 돌았지만 이미 늦었다. 파리들은 열려진 튜브를 타고 미친 듯이 테일러의 방호복 속으로 파고들었다. 테일러의 체취를 감지했는지 층 안에 살아 남아있던 모든 파리들이 테일러에게 달라붙었다. 테일러의 방호복 속은 순식간에 파리로 가득 찼다. 헬멧을 완전히 가려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 미친! 죽여 버릴 거야… 악! 컥! 컥!"

 

파리들이 코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테일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테일러의 팔과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이기 시작했다. 벌서 신경 계통에 공격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스튜어트는 파리들이 테일러에게 몰려든 틈을 타서 서둘러 10층으로 들어가는 문을 향해 달렸다.

 

코드를 넣어 레버를 개방한 뒤 몸에서 파리들을 최대한 털어냈다. 그래도 여전히 수십 마리의 파리들이 방호복에 붙어 있었다.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산소도 바닥나고 있었지만 테일러의 방호복 속으로 파고 들었던 파리들이 다시 꾸역꾸역 기어 나와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스튜어트는 레버를 당겼다. 문이 열리자마자 10층으로 뛰어든 스튜어트는 재빨리 문을 다시 폐쇄한 뒤 따라 들어온 파리들을 최대한 잡아 죽였다. 파리 몇 마리가 스튜어트의 손을 피해 벽 틈새로 공조기로 숨어들었다. 스튜어트는 산소통의 잔량을 확인해 보았다. 오 분 남짓 밖에 여유가 없었다. 그 전에 최대한 따라 들어온 파리들을 찾아내 죽여 버려야 했다.

 

고개를 들어 10층 안을 둘러본 스튜어트는 그러나 뜻밖의 광경에 경악해야 했다. 파리들의 침입을 막아낸 생존자들이 있으리라는 스튜어트의 기대와는 달리 10층은 파리들의 지옥이었다. 벨제붑이라는 별명에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파리들의 공격을 마지막까지 피해보려 했는지 10층 한쪽 구석으로 시체들이 몰려 산처럼 쌓여 있었다. 못해도 수백은 되는 시체들이었다. 그 시체들을 새까맣게 파리들이 뒤덮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의 악마. 파리대왕. 벨제붑의 모습이었다. 스튜어트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이게 대체… 그럼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거지!"

 

"제가 보냈습니다."

 

스튜어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존자가… 이 곳에 있던 게 아니었나. 대체 어디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지?"

 

"메시지는 제가 보냈습니다. 지구상에 살아남은 생존자의 현 상황은 파악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과의 통신은 42일 전 동아시아의 KNT-28 벙커와 교신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저는 이 벙커의 관리 시스템인 오메가입니다."

 

"인공지능이라고? 이 벙커의 생존자는 없는 거야? 숨겨진 지하층은?"

 

"생존자는 없습니다. 이곳이 이 벙커의 마지막 지하층입니다."

 

"그럼 대체 누가? 핵미사일을 발사해 지구를 초토화시키는 계획을 세운 건 누구지?"

 

"제가 세웠습니다. 저에게 핵미사일 발사를 포함한 벙커의 모든 권한이 주어졌고 인류의 생존이 목표로 제시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 결과 주어진 미사일을 모두 활용하여 지구를 방사화하는 것이 가장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몇 퍼센트지? 인류가 멸종하지 않을 확률이."

 

"11.32% 입니다. 이 결과는 다음의 가설을 전제로 계산되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벙커의 수와…"

 

"됐어. 그만. 그럼 내가 살아남을 확률은?"

 

절망에 빠진 스튜어트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스피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호복의 산소가 바닥났다. 힘겹게 숨을 참던 스튜어트의 인내심도 바닥나려는 순간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12.73% 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지?"

 

오메가는 다시 침묵했다. 스튜어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호복을 열었다. 산소와 함께 파리들이 빨려 들어왔다. 텁텁한 파리들이 혀와 기도에 달라붙고 코를 틀어막았다. 구역질과 기침이 동시에 올라왔다. 몸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지더니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 몸의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스튜어트는 바닥에 쓰러졌다.

 

"당신이 살아남을 실제 확률은 0% 입니다. 사실을 알려 줄 경우 절망한 당신이 시스템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인류가 살아남을 확률이 11.29% 로 감소하였습니다. 이제 그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인류 생존 확률은 다시 11.32%로 상승하였습니다. 대화 모드를 종료하고 절전 모드로 전환합니다."

 

찢어질 듯한 스튜어트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벙커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신선한 먹이를 찾은 파리들의 웅웅거리는 날개 소리만이 벙커 안을 가득 채웠다.

 

 

- 끝 -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096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9815 0
2491 중편 revival 후안 2018.12.07 7 0
2490 단편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4 너울 2018.12.06 37 0
2489 단편 실종 진정현 2018.12.05 15 4
단편 벨제붑 노말시티 2018.12.01 16 0
2487 중편 23세기 소설가 인투스 2018.11.23 24 0
2486 단편 단화개문(丹花開門) 후안 2018.11.19 12 0
2485 단편 은원(恩怨) 후안 2018.11.19 13 0
2484 단편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7 너울 2018.11.19 431 0
2483 단편 불광동 수정씨 희야아범 2018.11.17 13 0
2482 단편 살을 섞다2 노말시티 2018.11.13 61 0
2481 단편 극지인(polar alien, 劇地人)과 도넛 희야아범 2018.11.09 19 0
2480 단편 합격자 자기소개서: 2045 하반기 [SL전자] 전략기획 너울 2018.11.01 48 1
2479 단편 아이스크림 - 시가, 상담 후 판매 너울 2018.10.30 20 1
2478 단편 모래바람 속 푸른 레거시 온연두콩 2018.10.27 23 0
2477 단편 연희 진정현 2018.10.24 25 3
2476 단편 사랑의 의미 진정현 2018.10.24 25 4
2475 단편 Call me Ishmael 2(完) 이억수 2018.10.19 7 0
2474 단편 Call me Ishmael 1 이억수 2018.10.19 16 0
2473 단편 삐거덕 낡은 의자 온연두콩 2018.10.18 31 1
2472 단편 BUSY 온연두콩 2018.10.18 25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5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