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23세기 소설가

2018.11.23 13:0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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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아직도 나의 글자들은 공중에 떠오르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언제쯤 이 지루한 나날들을 끝장내 버릴 수 있을까. 손목이라도 그어버려야 되나? 퍽퍽 튀는 자신의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써야 비로소 이 쪽팔리고도 개 같은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까?

천정에 붙은 거미 한 마리가 두루루룩 달려간다. 다리가 아주 긴 녀석. 그에 비해 몸뚱이는 아주 자그마하다. 저 녀석은 좋겠다, 조금만 먹어도 멀리 다닐 수 있을 테니까.

끙, 허리야. 침대에 누워있다 앉자 쿡쿡 쑤시는 통증이 올라온다. 젠장, 며칠을 굶어서 속이 쓰린 건지, 너무 누워 있어 허리가 아픈 건지 모르겠다.

벌써 4년 하고도 3개월 10일, 더럽게 길고도 길구나. 천만다행인 건 내 주변에 나의 도움을 요청할만한 지인들이 없다는 뜻... 하지만 바꿔 말하면, 내가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역시나 없다는 거. 제기랄!

처음에는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고 일, 이년이면 그럴듯한 작품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리라 여겼다. 씨발 내가, 미쳤지...

풍부한 아이디어들부터 소설가, 시인, 고전 등 꽤 많은 독서량과 작문 기법들, 모방과 필사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연마하고 닦아 온 세월들을 생각하면 번듯이 잘 나가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시작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평범했던 회사원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니! 죽어도 싫다, 퉤!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해 친절히 뱉어주자면, 뜨지 않는 게 문제다. 불과 몇 백여 년 전까지는 이러한 표현이 뜻하는 바는 달랐을 것이다. 당시 꼰대 작가들에게 있어서 '뜨지 않는다'라는 표현이란, 심혈을 기울인 검은 물로 문자를 찍어낸 종이책이나 두껍디 두꺼운 판때기에 전기적인 신호를 주어 문자의 형태를 표현한 출판물들이 '팔리거나 읽히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엔 조금 달리 받아들여야 할 표현이다. 이렇게 주절주절 친절하게 혹은 구질구질하게 과학의 변천사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잘근잘근 설명해 주는 것도 나의 본업이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며, 한 술 더 떠 고전 문학을 본떠서라도 뭔가 어필하고 싶은 숨겨진 욕망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웃기지도 않다, 내 자신이.

말 그대로 내가 쓴 글들, 나의 분신과도 같은 문장들은 여전히 공중에 떠 오르지 않는다. 공간상 위치가 확보되어야 출판이든 홍보든, 적어도 응모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니드냐, 썅!

X-Y-Z 좌표가 있어야 뭔가를 해볼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다듬고 다듬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혹여 중고로 구매한 음성 전환기와 공간 전이기에 문제가 있나 싶었지만 기술자들은 어떤 문제도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내 목소리의 음역대를 질책하거나 조언할 뿐이다. 개 미친 것들. 니들이 글을 알아? 니들이 소설을 아냐고!

공간으로의 전이기에도 문제가 없고, 문장 자체의 구성에도 시간상 오류나 언어의 문법적 모순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무지 뜨지를 않는다. 정보를 공간상에 시각적으로 띄워 전송이 가능한 시대, 이 융성하고도 화려한 문화의 시대에서 명함이라도 내비치려면, 아니 최고의 작가로서 성공하려면 반드시 띄워야만 하는데, 제기랄.

당장 먹을 것이 떨어졌다. 배때기와 등짝이 조금만 있으면 조우할 판이다. 두 눈알이 툭 튀어나와선 '어이, 배에 아무거라도 던져만 준다면 당장이라도 제자리로 돌아가 주지. 안 그럼 재미없어!' 라며 말을 걸어온다. 확, 터뜨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귓구녕에 처박을 수도 없지 않은가?

한 시간 전, 출장나온 공간 전이기 기술자가 나의 두 달치 식비를 '이상 없음'이라는 문장 한 개와 맞바꾸어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신발을 신으며 룰루랄라 철수하는 그 자의 뒤통수를 망치로 두들겨 대며,

'니미, 니 뚝배기 강도는 이 망치보다 무르구나!'

라는 상상이 수 백번 두뇌 속을 벌레 기어 다니듯 쑤셔댔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밭에서만 자란다는 단백질만 섭취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차마!

그때 시작한 욕이 지금껏 뚝배기 속 양념이 튀겨지듯 팔팔 끓고 있다니... 개 사기꾼 새끼 같으니라고. 저 고철덩어리를 사는데 빚진 돈이... 아참, 햄머파! 내가 미쳤지, 그 새끼들한테 돈을 빌리다니. 며칠 내로 내 몸을 가지고 장기자랑을 해주겠다며 달겨 들 텐데... 어휴, 어휴.

안 되겠다. 냄새라도 맡으면 덜 배고파질라나? 점퍼를 주섬거리며 두 팔을 옷이 찢어져라 쑤셔 넣으며 신발을 구겨 신고는 구형 문짝의 패널을 손바닥으로 퍽퍽 찍어댔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나가서 바람이나 쐬보자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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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이동식 로컬 푸드마트에 진열된 무수한 음식들을 바라보며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고대의 속언에 며칠만 굶어도 훔치는 건 합법이라고 했던가? 내 손은 의지와는 달리, 아니 본능의 탈을 쓰고는 남의 것을 탐하기 직전이었다. 젠장, 더럽게 느린 이 손모가지... 그때였다.

"이 보세요, 저기요..."

말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귀찮았다! 한편으론, 콩밥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먹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아가리에서 튀어나온 말은 생각과는 달리 매우 '유교적'이었다.

"오해예요, 오해! 그저 냄새나 한번 맡아보려 했을 뿐이라고요. 딴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이라고요!"

호들갑, 호들갑, 호들갑.

한동안 꽤나 사람들과 교류나 대화가 없었나... 뭔 대답이 이 따위일 수 있나? 창피하고 화끈거리는 얼굴로 침착하려 무던히 애쓰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는 다소곳이 돌아왔다.

"아, 아뇨. 죄송해요. 뭐라 그러려는 건 아니었어요. 저도 지나가는 사람이에요. 이곳 마켓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걸요."

내 기준이 맞다면 꽤 미인이라 여겨지는 그녀는, 적의보다는 호의를 지니고 말을 걸어오고 있는 듯했다. 맙소사, 더 화끈거려오는 내 볼따구니라니. 아, 쪽팔려... 그녀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 혹시 시간 되시면 제가 빵이랑 차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멀뚱멀뚱 쳐다보는 나를, 그녀는 긍정의 대답으로 여겼던 것인지 가녀린 손등을 페이 체커기 위에 대고는 음성으로 결제를 한 후 내 눈치를 살폈다.

"올갱이, 스탠바이 페이..."

'풋, 음성 인증 텍스트가 '올갱이'라니...'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어린 거지 아이에게 친절함을 베풀면서 최대한 덜 미안함을 느끼도록 배려하는 자원봉사자의 눈빛과 손길 같았다. 순간, 존경심과 식욕이 동시에 맞붙었고 엎치락 뒤치락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상황을 제 멋대로 지척이던 나의 의지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머릿속은 거절의 말을, 손은 감사의 모습을 한 채 대가를 취하고 있었다. 덥석 잡은 것은 달콤한 크림을 섞은 슈크림 빵 반 조각과 따뜻한 합성 티백, 그리고 컵 한 개였다.

아차, 이럴 땐 '고맙습니다!'라든지 혹은 '왜요?', '누구세요?'라는 말이 먼저 아니든가?

그녀가 살짝 웃음 지으며 작게 혼자 속삭였다.

'그거, 나도 좋아하는 차인데.'

그제야 긴장이 풀린 내 머리는 정상궤도의 언어를 내놓았다.

"가,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대답을 내뱉자마자 게걸스레 처먹기 시작했다. 우걱, 우석. 내 눈깔아, 등짝아, 위장 떼기 들아, 이제 만족했냐? 나의 내장들을 향해 복수를 쏟아내기라도 하듯 머릿속은 의기양양해지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그녀를 보고는 그제야 한 타임 늦게 이유를 물었다.

"으런에 에에 이런 오의를 에부시는 이유가 어죠?"

자존심이 약간 상한 건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이 이기고 있는 상태였지만, 한 편으론 부끄럽지만은 않은 기분이 묘한 승패의 끈을 나누며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풋..."

그녀가 웃더니 곧 표정을 고쳐서는 공손히 물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글을 띄우시는 일에 종사하시나요?"

꿀꺽, 냠냠. 우적우적. 꿀꺽. 호로로록. 휴우...

"아, 예.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근데 그걸 어떻게 아셨죠?"

사실, 글을 띄우는 일은 상당히 고도의 기술에 속한다. 테크니컬 한 부분에 어느 정도 사이키델릭한 기술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머리에 든 게 많고 동시에 매우 정신적인 면에 발달이 이루어져 있어야만 한다는 것.

따라서 근대 시대에서 작가라는 직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천 년 전 고대 전설에 전해 내려오는, 르 다빈치 정도의 기술과 아이디어를 지녀야 된다는 것과 맞먹는다고나 할까? 핵심기술인 공간상 무제한 이동기술과 더불어 물질과 비물질 간 접착 기술을 떠나서라도 이를 이해하고 응용할 줄 아는 일종의 엔지니어 겸 글을 쓰는 작가란 직업은 매우 희귀했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 한 사람이 의학, 법학, 물리학, 정치 등까지 거의 전분야에서 완벽에 가까운 업적을 남기는 것과 맞먹는 일이라 할 수 있겠지 싶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러한 능력에 대해 자격을 인증해주는 것도 아니고 정규코스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증명할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자신이 써 놓은 글자와 문장들, 즉 글자들을 공간상에 띄우는 것.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외향이 제대로 된 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이렇게 길거리 아무 데서라면 찾아보기는 더 힘들 테지. 이 오밤중에 거지꼴로 푸드 마켓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침을 삼키는 이들은 딱 봐도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작가나 그지 새끼? 전자가 더 확률이 높겠다, 요즘 세상엔.

"호오~호오, 아~맛있다. 따뜻해서 좋네요."

그녀도 티백을 하나 컵에 풀더니 호호 불며 호로록거렸다.

'아... 이 여자... 음, 음... 예쁘구만.'

상상 속의 나도 부끄러웠는지 아가리로는 또 딴 청을 피워댔다.

"먹어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물론 제 돈으..."

"혹시 글자를 띄우실 수도 있나요?"

그녀가 다시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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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글자를 띄우는 작가들은 약 1,600여 명 정도이다. 다시 말해, 작가라는 무한히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지닌 이들의 숫자는 20억 총인류의 숫자 중 겨우 1,600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인류를 웃게 하고 울리거나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형태의 출판이 가능한 이들의 숫자. 고대의 다빈치와도 같은 능력의 소유자겸 현대 기술의 최고 정점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이들. 뼈를 깎는 노력과 더불어 타고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한 영의식-과학 융합적 인재들.

그들이 써 내려가는 글자와 단어, 그리고 문장들은 공간상에 떠오른다. 그리고 과학과 심학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인류의 머릿속으로 전송되는 것이다.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시각, 손놀림 따위의 도움이 필요 없이 순간적인 전송과 심학적 이식을 통해 구매한 독자의 머릿속, 즉 기억의 일부로 순식간에 인식된다.

과학적 표현으로는 <심학적 기억의 전이>라고 부른다. 문자와 문장들 하나하나가 그의 과거가 되는 것이며, 기억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읽고 이해한 과거에 대한 해석적인 기억이 아닌, 말 그대로 자신에게 일어난 실제적 기억이 되는 과정이다. 단지 엑시트-프레임에 의해 소설 속 살인자의 모습은 용서받았다거나 혹은 도피, 탈출, 은거에 성공한 모습으로 순화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미 그건 그의 기억 중 실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20억 중 1,600이라는 숫자는 곧이어 창작의 한계 상황을 가져왔다. 갖가지 주제들이 부족해지는 추세란다. 도무지 글을 쓰는데 필요한 이야깃거리가 동이 난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마도 자극적이고 흥미를 끌만한 주제들을 뜻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이런 점만은 문자 문화나 의식 문화나 다를 바가 없나 보다.

어찌 됐든, 소재 거리가 줄어듦에 따라 천재들의 방황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나보다. 다빈치가 유일한 천재는 아니었으며 천재란, '이단'이나 '미친'이라는 단어와 고립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어느새'라는 얼굴을 지닌 가난과 고독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참, 다빈치는 굶진 않았잖아?

어쨌든 손대서는 안 될지도 모를 영역은 이러한 연유로 언제든 깨어지는 것이다.

일부에서 발생한 천재 이단들의 짓거리였다. 소재란 소재는 전부 다 써버렸다고 생각한 그들은 해서는 안될 것들로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소재란 물질과 시간으로 구성된다. 물질이란 일종의 사건, 상황이며 시간 속의 사건이란 인간적인 판단이다. 무한수의 사건들 중 그 어떠한 것에 인간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소재이다.

물질만 있어서라면 사실일 뿐이며, 시간만 있어서라면 의미 없이 보이는 변화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소재가 떨어졌을 때 한 미친 작가가 특이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소재로서 물질과 시간을 머릿속에서 지어내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던 살아있는 물질과 의미 있는 시간의 결합물을 그것으로써 만들려는 시도를 말이다.

과학을 넘어 심학이 발생한 계기는 시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라는 시간에 걸쳐 여러 명의 과학자들이 세대를 넘고 넘어 자신들의 연구와 결과들을 다음 세대로 넘겨줌에 의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연구에 의해, 시간의 속성이 드러남에 의해 순간적으로 전체가 발견된 것이다.

즉, '고작' 발전한 게 아니라 '마침내' 드러난 것뿐이다.

소요된 시간은 발견에 쓰인 것이지 진화에 쓰인 것은 아니었다.

심학의 영역에서는 물질을 시간으로 측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시간을 배제한 확장 가능한 공간으로 남겨둘 뿐이다.

과학은 공간이 확장한다는 의미를, 또 다른 공간이 추가된다고 여겼으나 심학에서는 현재 존재하는 공간이 비틀어져 숨은 부분이 있을 뿐, 펼치는 방법만 알게 된다면 얼마든지 공간은 확장,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심학에서의 중요 측정 수단으로써, 시간은 배제되고 시간의 확장선 상에 있는 공간 역시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심학은 비틀어진 순공간의 발견을 위한 기준으로써 <단위공간>이라는 토대를 제공하는데, 이는 곧 현 세계의 모든 물질은 물론이고 시간마저 <단위공간>으로 쪼개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작가들, 특히 미친 작가들은 이를 응용해마지않았으며 이를 통해 무한한 기쁨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나아가 새로운 소재를 찾을 수 있었다. <가역-비가역>의 범주가 없는 심학에서 얻은 기술은 소설의 소재로써 마침내 생명, 시간과 물질을 모두 포함한 완벽의 소재를 발견한 것이다.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심학의 특성상, 실험과 실험에 따른 결과의 확인은 <즉시>이다. 시간이 소모되거나 필요한 학문은 과학의 범주이지 심학의 범주가 아니다.

심학 분야에서의 발견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점이며 과학과 만나는 접점에서라면 과학이 대부분의 것들을 해결해 주곤 했다.

피와 살점이 튈라치면 전자기적으로 분해하여 가시화시켜주며 핵융합의 에너지가 발생할 때라면 공간 시차 정지기가 운용되면 그만일 뿐이다.

소재와 작가가 일정 공간상에서 함께 존재한다. 공간 전이기와 작가는 뇌파와 음성으로 연결되고, 소재에게 강한 자성을 가한채 작가의 이해를 기다리면 된다. 이해가 발생할 때 자장 내부에 존재하는 소재는 전자신호로 분해되기 시작한다.

분해된 전자기적 입자는 작가의 이해 작용에 의해 문자화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는 그것들을 띄우는 것이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소재로써 사용된 생명의 특성상, 비가역적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소재가 된 생명체는 다시 원래 조합으로의 복원이 불가하다는 점뿐이다. 이는 동시에 심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연구대상이기도 하지만.

처음에 그들이 심학적 분해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초식동물이었다. 기억의 이식 대상, 즉 독자는 그들 자신들이었으므로 확실한 동의를 얻었음은 물론이었다. 기억 속에 초식 동물로 살아온 기억이 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물론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살아온 경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점차 도전 수위를 높여 육식 동물을 분해했다. 그때 그들은 생명의 창조에 대한 강렬한 유혹을 느끼게 되었다. 누구의 잘못이랴, 가능만 하다면 모든 것을 시도하는 모습이야말로 과학을 일궈낸 인간 호기심의 본체인 것을.

최초의 육식 동물로서의 실험 대상은 아프리카 수사자였다. 암컷이 아닌 수사자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인간의 지배 본능이 그것 일부를 포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식욕의 본능은 그 어떤 생명체도 피해갈 수 없는 깊은 욕망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존에 대한 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인간과 달리 사자는 순수한 육식동물이다. 잡식을 위주로 하는 생명체가 느끼지 못하는 육식 전유의 본능을 탐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육식 동물 한 마리가 가시적 입자로 전자장 내부에서 분해된 후 문자화 되자 붉은 문자들이 공중에 그 형체를 띄게 되었다. 드디어 작가가 해리된 그것의 삶을 이해한 것이다.

순식간에 공간상에 확장되어 시계방향의 구체로 서서히 회전하던 그것은, 첫 번째로 구독을 희망했던 아홉 시 방향의 작가에게로 전이되었다. 독자가 된 작가는, 순간 입에서 침을 흘리며 눈알을 반쯤 까뒤집은 상태로 엎드렸다.

그리고 희열에 젖은 표정으로 공중을 응시하고는 뭔가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침을 삼키고 있었다. 사자의 기억, 그는 지금 사자가 된 것이다.

"으르르.. 릉."

주위에 있던 모든 관련자들은 희열에 차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후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여느 독자가 그러하듯 첫 번째 구독자가 된 작가는 눈을 감은 채 추슬러 드는 기억의 감정을 음미하는 듯했으며 잠시 후 스스로 기억화 된 것들에 대해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감동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어... 이거, 이거..."

"대단하군, 대단해."

"드디어, 드디어 우리 인류는 진화했다! 성공이라고!"

여기저기서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함성과 환호들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살아있는 생명체와 그것의 삶 전체를 소설화, 정확히는 분산 가능하고 재배포가 가능한 기억화의 성공에 한 발자국 다가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칠 수 없었다.

이단을 자처한 그들이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이단이었다.

그렇다. 최종 목표는 생명체,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마지막에 자리한 것은,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목표이기도 하다. 생명체의 특성은 비가역적이며 심학에서조차도 미분 명한 영역이었다. 알 수가 없는 가역과 비가역의 경계선. 바로 인간의 삶.

그 누가 인간의 삶 전체를 생명의 가역적 변화를 통해 맞바꾸고자 하겠는가? 생명은 가역의 선을 넘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비가역을 위한 탐구는 과학이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심학은 그것을 연구대상에서 제외했다.

과학은 한계를 체감했기 때문이며 심학은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의 비가역적 활동은 더 이상 시도되거나 탐구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 작가들은 이 자리에서 뭔가 영감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위험한 발상이자 아이디어였다.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한 소설의 탄생이라니. '미친 짓이다!'라며 마음 한편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명, 그것도 인간의 생명을 경시할 만큼 나의 글은 소중한 것이던가?

적어도 내게는 소중할지 모르지만 이것만큼은 해서는 안될 짓이며 얼른 유혹으로부터 빠져나오라는 소리는 계속 외쳐졌다. 그러나 한 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해보라!

지금 당장 기회가 있을 때 해보라! 윤리적인 문제는 거대하고 위대한 발견들의 바로 앞에 있어왔고 그 고귀한 희생을 통해 언제나 증명되어 오지 않았던가?

나 자신이라고 해서 다르단 말인가? 게다가 내가 아니라도 언젠가 인류는 어떤 이유를 들이 대서라도, 과학이든 전쟁이든 어떠한 목적을 들이대서라도 유사한 도전을 분명 해내고 말 것이다. 이를 모르는 이단의 작가들이 아니다. 명분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이 비단 과학자 들일 필요는 결코 없지 않은가?

싸우고 또 싸우는 소리가 작가들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다. 과연 누구의, 어느 쪽의 승리일까? 한 동안 소리 없는 싸움이 지속되었고 고요한 전투와 합리화가 이어졌다.

누가 승리자란 말인가? 누가 정의를 구현할 것인가! 작가들은, 인간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았든가? 누군가는 이 짓을 하리라는 사실을. 그 첫 번째를 빼앗길 수는 없다. 자칫하면 2등이 되어 이름 없이 묻혀버릴 수도 있는 이 순간을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첫 번째는 우리들, 아니, 내가 되어야만 한다!

그제야 갈등이 수그러들며 어떤 결단들이 고정화되어 일어났다. 작가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데서 한 걸음 나아가 비장한 눈빛으로 눈들을 마주치고는 고개들을 끄덕였다. 이단의 벽조차 깨부순 것이다.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결론은 형상화되었고 남은 일은 한 가지이다. 누가 기억화 소설에 자신을 내어줄 것인가. 자신의 생명을 소설책 한 권과 맞바꾸어 영생을 택할 자는 누구인가? 그것도 무한반복의 삶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무한반복은 아닐 것이다.

기억화되고 나면 생명은 분자 단위로 해리되어 메모리 입자로 변형되므로 더 이상의 자아는, 기억을 생성해낼 주체는 사라진다. 즉, 물리적으로는 죽음이며 심리적으로는 정지이다.

쉽게 말해, 죽는다! 적어도 해당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한 명성과 이름은 남길 수 있다. 인류가 수백 년 전 퀀텀 이론에 의해 과학적 도약을 한 이후로 심학이라는 분야에 의한 두 번째 도약이다.

심학이 앞장서면 과학이 증명한다는 현시대의 보편적 사건들 중 으뜸이 될 것이다. 자, 이제 누가 그 첫 번째가 되어줄 것인가?

침묵이 흐른다. 그 누구도 다르지 않을 고민들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이곳, 이때라는, 여기에서의 생명은 단 하나뿐이므로 굉장한 숙고의 대상이 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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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아직입니다."

"그렇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있을 줄 알았지만... 아주 미묘하게, 그녀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마치 평생을 동물원에 살다 새벽께 탈출한 암사자처럼.

"분명 기계적 결함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만 해결할 수 있다면..."

하지만 창피한 건 창피한 거다. 작가 정도 되는 인간이 고작 할 수 있다는 변명이 기계 탓이라니, 제기랄!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했다. 돈만 넉넉했다면 절대 느끼고 싶지 않은 수치심이 끓어올랐다.

"혹시... 혹시요."

"네, 말씀하세요."

솔직히 무슨 말을 여자가 던질지 관심도 없었지만 빵과 따뜻한 차 한 잔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기에 나온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져오는 것을 느꼈다.

이단 작가들에 대해 아느냐는 말에 연이은 그녀가 소재가 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제안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제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생명을 내놓겠다는 의미였다.

아, 역시나 공짜밥에는 미친놈이나 광년이들만 관련돼 있다더니...

"미, 미쳤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사주신 빵값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갚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저기 강이 보이는 구동식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관리소 같은 데서 제 생김새로 언어 스캔하세요. 그럼 이만!"

미친 여자다! 죽으려면 오만가지 방법이 넘쳐나는 시대에 하필 왜? 왜, 나라는 방법을 찾은 것일까! 몸을 돌려 황급히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그녀의 뼈만 남은 것 같은 손이 내 팔에 감겨 왔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이... 시발, 시발...

차마 뿌리칠 수 없던 나는, 조용한 공원 근처로 그녀를 데리고 가 옆에 앉히고는 묵묵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연이 흘러나왔다. 슬픈 노래 같았지만 서막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끝나지 않을 곡조로 흐르는 음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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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 아닌지는 몰랐지만, 그녀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는 죄수였단다. 6년 동안의 수감생활 끝에 돌아온 집에는 두 달을 넘기지 못할 투병생활 말기의 엄마뿐이었다고 했다.

모든 건 그녀의 누명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였고 그걸 벗어버려야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속죄가 될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녀의 생을 소설로 만들어 인류에게 공유할 수만 있다면 생에 대한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단다.

누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하는 내내 그녀의 억울함이 내 피부를 다 벗겨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게 나를 가해자로 만들 이유는 될 수 없다. 전혀!

"저는 소재가 되고 싶어요, 아니! 소재가 되어야만 해요. 반드시! 돈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러니 제발..."

한숨이 나왔다. 난 아직 글조차 띄우지 못한 작가이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당신이 소재가 되건 말건 그건 좀 안타깝지만 내가 왜 그걸 해줘야만 하는데? 비록 굶어 죽기 일보직전의... 아참, 햄머파 새끼들... 아이 썅, 미치겠네.

그래도 왜 하필 나란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나에 대한 정보는 알아냈는지, 하필 왜 나인지 궁금해졌다.

"근데 왜 하필 저죠? 저는... 글자를 띄울만한 능력이 못 됩니다. 궁상맞은 작가 희망생일 뿐이라고요."

조금 전이라면 '아직'이나 '지금은'이라는 단어를 활용해 여전히 희망이 보이는 작가임을 피력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잘못 엮이면 작가 협회는커녕 공안청의 조사를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은... 제가 필요할 거예요. 꼭 필요할 지도... 몰라요. 제가 막아드릴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예요."

이 여자의 말을 따랐다가 일이라도 틀어진다면, 그건 내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범죄자를 떠나 경찰서를 들락날락한 사람의 글을 도대체 누가 읽고 싶겠느냔 말이다. 한 마디로 인생 뭐 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인 것이다. 하지만 햄머파 놈들을 생각하자면... 에엥? 이 여자, 내 뒷조사를 했던가?

"..."

미친... 계획적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 머릿속 안에서는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그녀에게서 최대한 떨어지려고 몸을 비벼댔다. 도망쳐 내달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햄머파 녀석들만큼 억셀 정도로 내 손을 죽어라 잡고는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

그냥 글 못쓰는 정신적 병신이라며 넋두리를 해버리고 말까? 큰 소리로 노래를 하거나 양말을 입에 물어볼까? 땅에 엎드려 거품을 물고 기절한 척해볼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입에 욕을 가득 담고 우물거리며 사고를 한 판 치려는 찰나, 타이어가 급정거한 자국처럼 눈두덩에 눈물 자국도 지우지 않은 채 그녀가 말했다.

"우리 어디 가서 술 한잔 하죠. 빵값 대신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할게요."

절망으로 추락하다 희망으로 날아오르는 불새인 줄 알았건만 더한 불안감만이 엄습해왔다. 젠장, 빵 따위, 거지처럼 얻어먹는 게 아니었는데!

두 시간 후, 앞에 앉아 취해 뭔가를 주절거리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술 때문에 몇 시간 전의, 누구와의, 어떤 맥락에서 이어져있는 내용인지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었다. 몽롱한 내 눈망울에 비친 여자는 그저 진하디 진한 스킨십을 해보고 싶은 대상일 뿐,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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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눈을 떴을 때 아련한 추억들과 절망적인 현실 외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어린 시절에 친구들끼리 여행을 떠나 맡아본 깊은 산중의 새벽 내음이 떠오르다가는, 당장 내일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너무나도 안이하게 이 바닥에 뛰어든 것이었을까? 남들 하는 만큼만 노력하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는 생계형 자세가 문제였던 것일까? 아직 결실을 맺기에는 통계적으로 한참 멀었음에도 걱정만 앞선 것일까? 어찌 되었든 뭐가 뭔지는 몰라도 바깥이 시끄럽다.

분명 이곳은 나 혼자 살고 있는... 집인데?

"어서 일어나 꿀 한 잔 마셔요."

"우악! 다, 당신 누구야?"

"어수선 떨지 말고 어서 자리에 앉아요. 여기 빵 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따뜻한 차예요."

"그러니까, 다... 당신 누구냐고?"

여자는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머머... 자기 와이프를 몰라보다니요?"

"와이... 뭐, 뭐라고요?"

"자꾸 이러면 화낼 거예요? 왜 그래요, 당신?"

어이없어하는 내가 오히려 틀렸다는 듯, 자신은 자상한 여자라는 듯, 한두 번의 경험도 아니라는 듯, 여자는 빙긋 웃으며 옆에 놓인 방석을 손으로 툭툭 쳐 밀어주며 내게 미소 지었다.

미치겠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냔 말이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저께까지는 기억이 확실하다. 굶어 죽기 직전이었고, 자기실현에 싫증이 나버린... 나버린, 그러니까... 뭐였던 거지, 난? 내 직업이 뭐였지?

담요를 걷어차고는 낯선 여자를 피해 다시 방으로 뛰쳐 들어온 나는 당장 책상 위를 살폈다. 책상 위라면 항상 내가 뭔가를 하는 곳일 테니 가재 집계 류가 되었건 필기구가 되었건 뭐든 기억을 되살려줄 것이다. 그렇게 당황한 채 뒤적이는데 뭔가 기억이 하나둘 툭툭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 방이 내 방이라는 건 어찌 알고 있는 거지?'

'책상? 난 방바닥에 앉아 글을 작업했는데... 아, 내 나이가 곧 육십이지.'

'지난주에 차를 하나 샀지... 와이프가 내 생일 선물이라고 보태준 돈으로.'

'아참, 오늘 아침 중역 회의가 있었군? 안건은... 그래, 바로 매출 실적이야. 요즘 새로 출시된 그리드-디스크 판매 실적이 작년의 다섯 배여서 허수가 있는지 회장님을 모시고 브리핑을 하기로 했었지. 늦으면 안 되는데. 그리고 오후엔 작은 녀석이 귀국을 하고... 늦은 밤 11시쯤 심야 검진을 받기로 했었지. 그렇지, 맞아 그랬지."

안심이 되며 갑자기 화들짝 놀래 허둥댄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뭔가 매우 인상 깊은 꿈을 한 바탕 꾼 탓인 것만 같다. 지난 40년 전, 한 때는 작가로서 평생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절이 있었고 또 한동안 실제로 준비도 했던 기억이 났다.

'아, 그때의 기억이 꿈이 되어 나타났던 모양이야. 허허, 이제 나도 늙은이가 다 되었군. 하지만 어제 꿈은 정말이지 악몽이었어. 만약 그때 꿈을 이뤄보겠다며 회사를 그만두었다면 정말 어젯밤 꿈처럼 비참하게 살아갈 모양이었을지도 모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흰머리를 다정히 빗어 내린 사랑스러운 여인이 방으로 뒤따라 걸어 들어왔다.

"당신, 오늘 일찍 출근하신다면서요, 어서 준비하세요. 자정에 검진 있는 거 잊지 마시고요, 이번에도 이상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훗."

'저 여자는... 아참, 내 사랑하는 아내 모나... 그리고 둘째 딸 칸! 어서 준비해 출근해야겠군,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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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둘째가 귀국한 날이 내 마지막 남은 인생의 시간을 확인하는 날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의사는 자정을 넘겨 끝난 검사 후 내게 선고를 내렸다. 무슨 병명이었지는 잊어버렸지만 3개월을 선고받았다. 고통 없이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했지만 그게 대수인가? 빌어먹을! 그런 약과 기술을 개발할 시간에 병을 치료할 시간이나 돈을 더 쏟아부을 것이지...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의료보험상의 발달로 인해 이미 자신의 상태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통보를 받은 아내와 딸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은 한동안 깊은 슬픔에 공감하며 한없이 흐느꼈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가족이 우는 모습이란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통이 없어서였을까? 죽는다는 것, 삼 개월 후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게 회사에 퇴직서를 내고 집에 돌아와 삼 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역시나 몸의 상태는 입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치닫고 말았고, 병상에 누워 전혀 어색하지 않은 병든 60대의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감사해야만 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옆모습이 어디선가 아릿하게 그리움을 자아냈다. 정말 익숙한 얼굴 선과 눈매였다. 그것도 슬프디 슬펐던 기억 속의. 어디에서였을까? 도대체 언제였을까? 딸아이의 얼굴이 생각나지를 않는다. 잠시 눈을 감은 사이, 가족들의 외침과 누군가들의 발소리, 의료 기기 소리가 점점 작아져만 갔다.

그리고 비로소 기억이 났다, 내 죽음이.

후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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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떠세요?"

눈이 게슴츠레 떠지며 그녀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숙취로 머리가 깨어질 듯했고,

'어제고 방금이고 울렁거리는 속은 도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야, 이 등신아!'

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뱉어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었기에 최대한 넘어오는 울렁거림을 참아가며 기억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죄송해요. 당신께서 제가 어젯밤에 말씀드린 것을 확인하고 싶다며 강요하셔서... 하는 수없이..."

뭘? 내가 뭘 강요했다는 거지? 아무리 취하더라도 난 그런 놈은 아닌데... 젠장 아이고 머리야.

"이제 믿으시나요. 믿어주세요, 그리고 저를..."

아! 기억났다. 난 어제 취중에 그녀의 말에 화가 났던 것이다. 그녀는 글을 띄울 수 있다고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공간 전이기조차 지니고 있다고. 문제는 내가 믿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못하는데 감히 너 따위가!'

라며 매몰차게, 홧김에 그녀를 가혹히 쏘아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 동안의 언쟁 끝에 그녀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내 집으로 향했고, 그리고... 그리고, 조금 전 술에서 깨어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나의 죽음'을 경험한 동시에 기억해 낸 것이다.

병상에서 바라본 슬픔에 잠긴 내 아내의 옆모습이 왜 그리도 눈에 익숙했었나 싶었다. 그 이유는 스스로를 묘사한 소설에 등장한 나의 아내가 다름 아닌,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정말 지금까지도, 아니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답고 서글프고 아릿아릿한 기억이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슬픈 영화의 엔딩 배경 음악보다도 더 슬픈.

이 여자, 천재였다. 그냥 천재가 아니다. 나 따위는 발끝조차 쫓을 수조차 없는 그런 천재 작가다. 절망보다 외경심이 느껴질 만한, 그럴 자격이 충분한 작가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광적인 팬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가져다준 두통제를 손등에 붙이며 아쉬운 나머지 혼자 조용히 지껄여 보았다.

"아... 그렇군. 그런 거였군, 당신... 작가였어."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다음 말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미안해요, 제게 실망하셨죠... 정말 미안합니다, 정말요..."

그녀가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숙인다.

"아뇨, 사과하지 말아요. 더 비참해질 뿐이니까."

잠시 방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태양빛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거미가 싫어졌다. 천정에서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 그나저나 엄청난 소설이구만. 뻔한 스토리인데도 막상 현실로 느끼고 나니, 그것도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끼고 나니 카타르시스라는 단어조차 모자랄 정도네. 섬세한 묘사와 감정의 일렁임들, 아쉬움과 서러움 그리고 작은 희망, 절망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쓰는 거지...?'

그날 그녀는 자신의 요구를 더 이상 입밖에 내지 않았다. 멋들어진 감상평을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내게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해서였을까. 마치 완성을 앞두고, 빗어진 얼음조각을 그대로 하루 정도 더 얼리는 작업 마냥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을까. 자칫 욕심 어린 얼음 조각칼의 빗나감을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던 그녀는 한 시간을 더 있다가, 문득 일어나서는 돌아가버렸다. 거미가 되기는 싫었지만... 녀석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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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삼일째다. 아직껏 가슴 한편이 어른거린다. 차마 죽어가는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창밖으로 향한 아내의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병상에 누워 있던 기억 속 나는, 그녀로 인해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아직 그녀로부터의 연락은 없다. 소설 속 그녀가 나의 그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기억의 끝마다 떠 오르곤 했다. 그럴 리도,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작가를 수소문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의 그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잔잔히 흘러갔다.

얼마나 잠이 들고 깨고를 반복하며 기억 속에서 울었던가. 오늘이 며칠인지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보고 싶을 뿐이다. 무슨 문제가 있다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원에 이르도록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구원이란 내게 있어 절망임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잡을 수도 없을 만큼 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속은 갈등과 슬픔의 구렁텅이 그 자체였다.

삐릭, 삐릭.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며칠 전이라면 햄머파 놈들이 귀찮고 또 무섭기도 해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제발...'

내 몸뚱이는 알아서 벽에 붙여놓은 싸구려 테이핑형 화상을 향해 내달렸다. 주인의 말과 생각이 아닌,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지워지기 직전의 너덜거리는 테이프 위의 수신 버튼을 눌렀다. 지직 거리는 신호와 함께 화면 위 픽셀들은 한 사내의 모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뿔싸!'

급히 끄려 했지만 이미 연결된 후였고 듣기 거북한 대역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 형씨, 잘 지냈수. 형수님은 잘 계시고? 아참, 없든가? 기억이 가물거려, 가물거려."

"아, 안녕하세요..."

"왜 전화했는지 알지요오? 어떻게 돈은 잘 준비되고 있는감?"

비꼬는 사내의 외곽지역 사투리 말투에 짜증이 확 밀려왔다. 곁에서 다른 목소리도 들려오자 놈이 얼굴을 구기며 화면 밖 어딘가를 보며 씨부렸다.

"짜샤, 잘 봐 둬. 우린 갱단이나 양아치가 아니거든. 이 형님께서 고객분을 어떻게 다루는... 아니지, 아니지. 고객 상담을 어떻게 하는지 잘 봐 두라고."

"키키, 뭘 상담씩이나. 알겠수, 어서 해보셔."

아마도 어디선가 끌어들인 또 다른 양아치겠지. 골치가 아파졌다. 한 놈도 귀찮아 죽겠는데 앞으론 두 놈이 번갈아가며 괴롭게 하겠지.

"언제까지 갚을 거요?"

"그, 그게 그러니까요..."

"아시다시피 우리 보스 아니, 회장님께선 성격이 무척 얌전해. 알죠? 근데 취미가 장기자랑이기도 하지. 그것도 남의 장기를 잘도 들춰내신단 말이야. 일명, 재. 능. 발. 견. 알면서 왜 그래요, 형씨... 아니, 고객님."

"휴..."

"안색이 왜 그래, 고객님? 난처한 일 있어? 걱정 마, 돈이 더 필요한 거야? 큭큭, 이거 내가 연락 잘 했구만. 걱정 말고 두 개 있는 것들 중에는 하나 정도는 없어도 되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하시고."

"..."

"그럼 내일 또 봅시다. 우리가 몸소 방문할 테니 이자 포함해 준비해 두셔. 여의치 않으면 미리 말해, 의사 양반도 함께 가려면 약속을 잡아둬야 하니. 그럼 내일 봅시다, 고객님."

테이프 위에 떠 있던 픽셀들이 힘을 잃었는지 사라졌다.

아... 이걸 어쩐다. 분명 저 새끼들, 내게 돈이 없다는 걸 알고서 빌려준 게 틀림없던 거다.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내기 어려운 상황에, 게다가 내일이면 내 장기들 중 하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젠장! 어떡하지, 어떡하지. 씨발, 위장 하나 떼내 주고 나면 배고픔을 잊을 순 있을까? 미쳤나 보다, 미쳤...

삐릭, 삐릭.

젠장, 또 누구야! 테이프 위를 신경질적으로 긁는 순간, 그 순간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픽셀이 다 모여들기도 전에 마치 한눈에 빠져버린 첫사랑을 두 번째 본 순간마냥 내 얼굴은 환해졌다.

"안녕... 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내 목소리는 막상 나오지를 않았다. 그냥, 그저 그녀의 모든 것들을 듣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예요."

가냘픈 숨소리, 작고 귀여운 억양, 말을 마칠 때 살짝 내려가는 말꼬리, 그날 그녀가 들려준 글과 기억들. 단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기분을 그녀가 알아채 주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사치일까? 나를 벌레만큼도 여기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을 테니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두 문장 들었을 뿐인데.

"생각해... 보셨나요. 아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만약 거절하신다면..."

그녀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한다. 내 목소리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곤 외쳤다.

"알겠어요. 당신의 제안! 그 제안, 받아들이겠어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저 흐느끼는 마냥 약간의 멍한 표정과 안도한듯한 모습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 대답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은 아닐까?

잠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웃는 대신, 입꼬리를 올리는 대신 비를 뿌리는 방법에 기댄 것이다. 그 비를 다 마셔버리고만 싶었다.

그리고 그날 밤, 태어나서 그렇게 심한 후회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찢어져라 부서져라 차댈 뿐이었다. 배고픔 따위? 개나 줘버려! 사랑은 위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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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아침 9시도 안 됐는데 누군가 문 밖에 와있다. 잠에서 막 깬 직후라 문 밖을 비추는 패드 화면이 희미하게 보였다. 젠장, 계속 흐릿흐릿하게 보이니 누군지 알 수... 앗! 그녀다.

"네! 네! 나갑니다. 빨리 나갈게요!"

내뱉고 나니 도저히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 먼저 나가 있을 때나 외칠법한 문장 구조인데?

우당탕.

아이고, 무릎이야. 공간 전이기와 담요가 꼬여버린 채 내 몸뚱아리를 김밥처럼 말아버렸다. 썅, 팬티만 입은 상탠데, 이를 어째, 이를 어째.

좁아터진 방에서 좁아터진 싱크대를 지나 좁아터진 신발장과 현관까지 다다르는데 자그마치 1분이나 넘게 걸리다니, 겨우 4미터 좀 넘을 거리 이건만.

딸깍.

앗! 바지, 바지 입었지? 휴...

"아,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

맛있는 냄새가 한가득 그녀의 양 팔 안에서 풍겨왔다. 고장 난 패널 때문에 그녀가 뭘 들고 있을 거란 생각은 미처 못했는데.

"어서요, 어서. 이것 좀 받아 주세요."

"이, 이게 뭡니까?"

"빵, 빵이요. 그리고 모닝커피."

그녀가 예쁜 입술을 옹알거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꼭 담배... 아니, 구름 같구만.

"그, 그래요. 이리 주세요."

갓난아기를 넘겨받듯 맛있는 냄새가 나는 커다란 빵 봉지와 인스턴트커피 세트를 한 아름 받아 드니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핑 돌았다. 이유야 상황이야, 뭐가 어떻게 되었든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먹어보는 아침이냐.

그녀는 익숙한 모양새로 문을 들어와선 신발을 다소곳이 벗고는 멀뚱멀뚱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이 들어가야 손님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라는 표정이었다.

사랑과 빵은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아, 아참! 어서 들어가세요, 많이 춥죠?"

잠깐 얼이 빠졌던 나는 황급히 그녀의 눈으로부터 얼굴을 돌린 채 방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아무렇게나 놓인 담요와 이불을 벽면장에 발로 밀어 넣고는 접힘 스위치를 발로 퍽퍽 차 댔다. 그녀가 보기 전에 치웠어야 했는데.

"앉으세요, 저..."

"레아, 레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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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 후룩. 쩝쩝. 냠냠냠.

아, 너무 맛있다. 달콤한 슈크림과 생크림, 그리고 바베큐 양념들이 순서를 가리지 않고 입속과 혀를 간지럽힌다. 어디서 쏟아지는지 침도 한 바가지씩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다.

"천천히, 천천히 드세요."

"히..."

잠깐 웃음을 지어 보인 내 얼굴 근육들은 곧장 하던 일을 계속해 댄다. 이쯤 되면 내 양심은 먹을 걸 주는 이에게 제물을 바칠 양 비굴 비굴한 듯싶었지만, 뭐 어떡하라고. 배고픈 건 심심한 것만큼이나 숨겨진 욕망 덩어리인걸.

그러고 보니, 이 여자와 함께 있으면 항상 뭘 먹고 있다. 그것도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감사해하며. 기도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제, 제 이름은, "

"이거도 좀 마셔보세요. 새로 나온 커피인데 향이, 정말 끝내줘요."

꿀꺽, 꿀꺽.

아차, 향을 먼저 마셔야 하는 건데...

"풋, 호호호."

"아하하하."

우리 둘은 잠시 동안 근심 걱정 없이 웃어봤다. 처음 만난 사이 같지가 않았다. 꼭 엄마 같기도 했고 잊힌 여동생, 아니 여자 친구만 같았다. 이런 여자 친구 하나만 있었다면 이런 글쟁이질 하지 않고 다니던 회사나 열심히 다녀서 집도, 차도 사고, 또 미래도 그려보고 그랬을 텐데.

제정신이 돌아올 무렵, 빵 봉지와 커피잔은 비어있었고 왠지 그녀의 마음도 텅 비어 보였다. 뭘 말해야 할 지도 텅 비어버렸다.

"제 이름은 리테에요."

"리테... 리테군요."

"좀 무섭죠? 그리스 고대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 그 말 그대로예요."

"아뇨, 무섭지 않아요. 오히려 멋...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네? 멋있어요? 처음 들었네요 그런 말은. 어쨌든 어머니가 그리스 신화 마니아였는데 하필 제가 뱃속에 있을 때 하데스 편을 읽고 있었데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잊고 싶은 과거가 꽤 많았나 봐요. 제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죠."

"저도 신화 참 좋아해요."

"아, 그래요?"

그다음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신화에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필사적으로 두뇌를 돌려댔다. 처먹었으면 일을 해라, 뇌수들아! 만약 여기서 화젯거리가 끊긴다면, 진짜 니들 신변에 화재를 내 버리리라!

어버버대는 나를 보며 그녀가 또 웃었다. 문득, 거미 새끼를 불러다 자랑하고 싶어 졌다.

'에헴, 내 여자 친구이시다. 다리만 긴 네겐 무리일지 모를 미모의 이 아가씨가 바로...'

문득 현재의 내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다. 글도 못 띄우는 작가에, 돈은 한 푼도 없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욕이나 퍼붓는 쫌생이에, 게다가 오늘 빚쟁이 두 마리가 몸소 돈을 돌려받으려 찾아올 예정에... 어휴, 어휴.

나도 모르는 새 표정이 구겨져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부턴가 말을 멈추고는 등에 맨 가방으로부터 뭔가를 꺼내기 위해 뒤적거릴 뿐이었다.

"아, 여깄다."

그녀는 가방에서 몇 백 년 전 한 때를 풍미했다고 하는, 교과서에 실린 구식 장비를 하나 꺼내 들었다. 저걸 뭐라 더라... 음, 헤... 헤드 뭐라 던데.

"이게 뭔지 아세요? 한번 이렇게, 이렇게요."

지금 우리 둘, 뭔가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시점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녀는 생뚱맞게 몇 백 년 전 유행하던 기계 하나를 내 머리에 씌우려는 시늉을 하며 뭔가를 권하고 있었다.

"아, 기억났다. 그거 '헤드폰'이라는 거죠?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나요."

"딩동댕! 한 번 써 보실래요?"

"그거 음악 듣는 기계 맞죠?"

"네, 요즘처럼 테이프를 귀 근처에 붙이는 거 보다는 한참 후지긴 했지만 그래도 낭만이 있는 거 같아서 한 번 보여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써 보세요. 그리고 거기, 그 기다란 선을 제가 가져온 엠피쓰리 플레이어라는 거에 연결하면요..."

"어, 어랏?"

"들려요?"

"네, 오우! 신기하다, 신기하다."

뭔가 웅웅대는 소리가 손바닥만 한 빵 덩어리 같은 곳에서, 그것도 두 개 모두로부터 흘러나왔다. 분명 저걸 귀에 대고 듣는 방식일 거다.

"이렇게, 둥근 부분을 머리 위에 대고 나머지 둥그런 부분을 귀에 덮으면..."

"오, 오, 오!"

귀가 쫑긋거렸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고전 음악이 꽤나 신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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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서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내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 저 자의 칼자루가 내 가족과 식솔들을 모두 베어버린 찰나였기 때문이다.

모든 건 내 잘못이다. 내 사랑하는 여동생을 품에 안고는 아직 숨이 붙어있길 간절히 바라며 그녀를 살폈지만 부질없었다. 그녀는 방금 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각을 다투며 달려왔건만, 저 자는 잔혹하게 내 모든 것들을 깡그리 말살해버린 참이었다. 피눈물이 흐르고 흘렀다. 대체 평생을 수련하며 검을 갈고 갈아오며 살아온 이유가 뭐란 말이더냐. 모든 것을 잃은 이 마당에.

"검사, 네 이름은 모르겠지만...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게지?"

상대는 검은 갓과 두건 사이에 희번덕거리는 눈알을 굴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날을 땅에 대고는 살살 긁어 대고 있을 뿐이다.

"내게 원한이라도 있는 겐가? 내 무공이 탐이 났던 건가? 아니면, 누가 시킨 겐가?"

"후..."

놈의 한숨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내 팔은 등에 실린 육중하고 기다란 창을 붕붕 돌리며 오른편에 내다 꽂았다. 그리고는 내 입술을 읊었다.

"죽어라. 편히!"

놈이 달려오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건 내가 만든 봉술로부터 파생된 검법이라는 것을, 발돋움도 검을 쥐는 법도 달려오는 자세도. 그렇다면, 난... 제자들 중 하나로부터 배신을 당했던 거로구나.

내가 잘못 살았구나, 잘못 살았어... 잊고 싶...

채챙!

내 오른손은 매우 빠른 속도로 창을 뽑아서는 돌리며 놈의 공격을 튕겨냈다. 연이어 창을 정면으로 온 힘을 다해 던지며 발을 내닫았다. 몇 걸음 내딛지는 않았으나 당황한 녀석의 검을 부러뜨리고는 그대로 왼쪽 가슴을 뚫고 반대쪽 나무 기둥 몇 개를 박살 내며 날아가 박히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커헉!"

놈이 쓰러졌지만 더 이상 이유도, 시킨 자도 묻고 싶지 않았다. 내겐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무와 명예를 누렸건만 남은 게 없었다. 깊은 슬픔과 눈물만이 나를 감싸 앉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내 등 뒤로부터 살기 어린 활시위를 당겼지만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끝을 가진 화살촉이 내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 오히려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 느낌일 뿐이었다.

내 죽음은 그렇게 시작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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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내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눈물범벅인 상태였고, 몸뚱이는 방바닥에 엎어진 채 가슴 한가운데 극심한 고통이 있을 뿐이었다.

"뭐, 뭐지...?"

"실존 인물이에요. 그 사람, 1,400년대 초에 살았던 한 동양 나라의 무관이었죠. 실력은 최..."

"아, 아니! 대체 이 상황이 뭐냐고!"

그때였다.

쾅쾅쾅!

"이봐, 형씨! 이보라고, 고객니임!"

가슴이 너무 아파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또 큰일이었다. 햄머파, 어제 화면으로 조우했던 양아치 두 놈이었다. 놈들이 무력을 쓴다면 대책이 없다. 그렇다면 핑계라도 대야 하는데... 아이 씨발!!! 게다가 이 상황은 또 뭐냐고! 이 여자가 정말!

쾅!

문의 전자 잠금장치가 부서지며 뚱뚱한 놈 하나가 문짝을 다 막아서고는 들이닥쳤다.

"꺄악!"

그녀의 비명소리에 놀란 건 나, 뚱뚱한 놈, 그리고 뒤에 가려있던 얇은 놈, 모두였다. 목소리가 너무 맑았다.

"아이고, 손님이 계셨구만? 이야 형씨, 이렇게 귀한 날 여자랑 같이, 것도 아침부터? 캬하, 진짜 부럽구만 부러워."

"크히, 괜찮아. 수의사 선생도 좀 있으면 도착한다고 하니 어서 갚을 수 있는지 빨리 물어나 봐."

수의사? 미치겠다, 이것들 진심이었어, 진심. 어째야 하나.

"어머, 누, 누구세요?"

아차, 그녀도 있지 참...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선 몸뚱이는 여전히 한가운데가 죽고 싶을 만큼 아파올 뿐이다. 하지만 설득이라도 해야만 한다.

"이... 있다가, 있다가 오후에... 쿠, 쿨럭. 몇 시간 후에 이야기 합..."

"크흐흐, 고객님 미쳤수? 우리 바쁜 사람들이야, 바쁜 사람들. 갚을 돈은 있어, 없어?"

"안 되겠수다. 묶자고. 저기, 저기 저 의자에 묶어 일단. 비켜, 가시나야! 꺼져 얼른."

"꺄악!"

그녀가 벌벌 떨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순간, 내 눈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넘쳐흘렀지만 동시에 작은 혼동을 일으켰다. 그녀의 올라간 두 손은 얼굴을 가리며 겁먹은 채였지만, 잠깐 스쳐 보인 입꼬리만은 올라가 있었다. 분명 올라가 있었다고!

뚱뚱한 놈이 휘청거리는 내 오른 손목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얇은 놈이 내 다른 팔을 잡는 순간, 난 상상했다. 분명 내 손모가지는 퉁퉁 부어오를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내 손목은 강한 회전을 하며 뚱뚱한 놈의 손을 뿌리치고는 어느샌가 놈의 팔꿈치를 꼬옥 움켜쥐었고 동시에 왼손은 나머지 놈의 손을 뿌리친 채 가녀린 플라스틱 수동식 청소대를 잽싸게 잡아챘다. 그다음은 나도 모르지, 지금 한 행동도 모르겠는걸.

뚱뚱한 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 이 고객님께서 반항을 하시네?"

하지만 내 손목에 힘이 들어갈수록 놈의 얼굴은 진지해져만 갔다.

"아, 아, 아, 아.... 아파... 아프다고! 그, 그만... 으, 으아악!!"

조금 후,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조금 더 후,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뚝.... 으직, 으지지직...

"으아악!"

"뭐, 뭐야? 이 놈 뭐야?"

나머지 얇은 놈이 놀라 소리치며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선 내 목을 향해 휘두르려는 찰나, 내 왼쪽 발목은 너무나 익숙하게 얇은 플라스틱 청소대 끝을 뚝하고 부러뜨리더니 나이프를 쥔 놈의 손목을 향해 가볍게 퉁하며 튕겼다. 가볍게 였다, 강하게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이프를 쥐었던 놈의 팔 전체가 360도를 등 쪽으로 휘어 돌아가며 또 한 번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지직.

"으아악! 내 팔!"

사람의 팔꿈치는 인간의 몸 가운데 이빨을 제외한 다음으로 강력한 강도를 가지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금이 가면 갔지 결코 쉽게 부러지거나 하는 부분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나머지 한 놈은 살짝, 그것도 가냘픈 플라스틱 봉으로 손목을 슬쩍 쳤을 뿐인데 두 놈 모두 지금 반신 불수의 상황에 맞닥드린 것이다.

"썅, 뭐가 이리 층계가 많아? 끝났어? 너무 시끄럽잖어, 잘 묶어야 쉽..."

그때 수의사 복장이라기보다는 정육점에서 볼만한 비주얼의 점퍼를 입은 자 하나가 투덜거리며 부서진 문을 밀며 들어섰다.

"어라? 뭐, 뭐야? 니들 왜 자빠져 있어?... 니들이 지르는 비명이었어?"

뚱뚱한 놈과, 나머지 놈 모두 입술에 게거품을 물며 고통에서 해방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타깃이었던 나와 처음 보는 여리여리한 여자애 하나는 멀쩡했으니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순간, 상황을 좀 더 빨리 파악할 수 있었던지 등 뒤에서 뭔가를 꺼내려했다. 분명, 총이었을 거다. 그러나 내 왼손이 더 빨랐다. 플라스틱 막대를 아무렇게나 그놈을 향해 던져버렸고, 놈의 목 옆면을 후려쳤다. 목이 몇 센티 정도 한쪽으로 빠지는 것처럼 보이더니 엄청난 속도로 문짝에서 사라지며 복도 한쪽 끝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살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보다는, 죽이지는 않고 전투력은 완전히 상실시켜 놓았으니 일단 됐고... 란 생각이... 뭐, 뭐야!!! 그게 아니잖아! 당황스러운 마음에 내 두 손, 낯선 내 두 손과 문쪽을 번갈아 봤지만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을 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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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륵, 드르르륵.

어디서 났는지 끌개를 가져와서는 공간 전이기를 올려놓고 묶고는 짐가방을 열더니 내 옷들을 주섬주섬 챙기는 그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 역시 그녀를 도와 짐을 챙겼다.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복도에 널브러진 수의산지 개새끼들 중 하나인지를 낑낑대며 옮겨서는 내 집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뚱보와 나머지 놈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부서진 문을 대충 닫았다.

15분 전 일이다. 우리 둘은 두 손을 꼭... 잡았으면 좋겠지만 약간 떨어져 내가 뒤쪽에서 쫒아가고 있다. 공간 전이기는 이 사회에서도 보기 드문 사물화 기기이므로 주변의 이목을 끌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앞서 그걸 끌며 묵묵히 걷고 있다. 마치 자기것마냥, 여행 가는 날처럼.

저 여자 대체 정체가 뭘까? 아니, 그것보다는 난 작가를 포기하고 얼른 저 여자의 팬클럽을 결성하고 팬클럽 회장이 되는 게 생계 측면에서 보거나 인생 측면에서 보거나 성공으로 돌진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 여자, 레아는 분명 공간 전이기 없이 단순한 구식 헤드폰인지 뭔지를 가지고 소설을 전이시켰다. 소름 돋을만한 일이다. 이건 유래가 없는 발명이다. 어딘가에서 임무를 받고 파견된 비밀요원일까? 아니면 익명의 심학자나 혹은 그들의 수제자일까? 심학자들은 꽤나 괴짜들, 천재들이 많지 않은가?

그녀가 어느샌가 내 곁에 따라 걷고 있다. 아이 씨, 놀랬잖아.

"기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리테씨."

"네?"

뭔 뜬금없는 이야기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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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리테."

이젠 존칭조차 생략하는 군. 뭔가 내 쪽에서 할 말이 쏟아져 나와야만 할 것 같은데 머리 속은 복잡할 뿐 아무런 응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앗, 기억났다!

"그, 그보다 아까 헤드폰은 대체... 뭐예요? 주, 죽는 줄만 알았다고요. 아직도 가슴 한복판이."

"그 사람,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에요. 슬픈 역사 속 비운의 인물이죠. 책에 쓰여 있기로는 반역죄라는 누명을 썼다고 하지만, 실은... 저보다 더 잘 아시겠네요, 그죠? 헤."

신호등 앞이다. 무인 자동차뿐 아니라 인공지능 택배견들까지 진짜 개처럼 뛰어간다.

쉭쉭, 타닥, 타닥.

흠, 평소에도 궁금했지만 저것들은 어떻게 자신의 몸집보다 세 배이상 되는 짐을 얹고도 저렇게나 잘 뛰는 거야? 달리는 말이라면 왠지 아주 잘 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활도 매고, 사냥감도 얹어서는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뭐, 뭐야! 이게 또 뭐야!

"키킥, 기억... 동기화라는 거예요."

그녀가 붉게 점등한 신호 등불 아래서 내 얼굴을 보곤 웃고 있었다. 무지갯빛 빵모자에 촌스럽게 달려 동동거리는 솜뭉치들이 얼굴 주위에 떠 다니는 요정들 같았다.

"기, 기억 동기화! 그거 나도 알아요. 배웠어요, 작가들이라면 다들 알고..."

아참, 난 아직 작가가 아니지.

"맞아요. 기억 동기화가 말하는 건, 전이된 소설을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 완전히 흡수해버린 경우 앞으로 쭉, 죽을 때까지 그걸 마음속에 떠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의미하죠. 좋든 나쁘든... 뭐, 그런 게 인간의 경험이 아니겠어요?"

이 여자, 왜 이렇게 말을 잘하냐.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밝은 황토색 외투에 발목까지 다 가린 장화, 아직 겨울의 등짝에 올라탄 날씨는 아니지만 비교적 옷을 두껍게 입고 있었군. 하지만 외투치곤 옷의 팔 길이가 비교적 짧다. 아... 가녀린 손목, 하얀 손가락.

"활 쏘고 싶죠, 말 타고 싶죠, 사냥하고 싶죠? 풉."

"... 하,... 하. 후우..."

"미안해요, 작년에 만든 건데 꽤 효과가 좋거든요. 게다가 당신은 근력이나 골격이 꽤 잘 받쳐주는 타입이라 동기화된 즉시 온몸의 적응성이나 반응성이 꽤 빠른 것 같아요."

"... 자, 잠깐! 뭐라고... 요?"

녹색불이 켜지고 메인 도로의 대가리 없는 자동차와 생각 없는 개새끼들이 달리는 걸 멈추자 여자, 아니 레아는 천연덕스럽게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저, 저 여자 혹시... 이, 일부러?'

당장 길 한가운데 세워놓고는 다짜고짜 죽빵이라도 날... 릴리가 없잖냐, 저 가녀린 여성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반대편에 도달했을 때, 보도로 공간 전이기를 올려놓았을 때. 갑자기 내 품에 안겨서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를... 나를... 구원해 주세요.'

얼굴이 빨개진 나는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한 채 양팔만 어설피 하늘을 향한 모습으로, 혼자서만 천국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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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 쾅쾅쾅!

"풀어줘, 풀어달라고! 이 새끼들아!"

"으흑, 으흑. 나, 난... 한 달 전에 사면받았다고, 무기수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으흑."

"대체 당신들 뭐하는 놈들이야! 어떻게 나를 찾은 거지?"

어두운 지하, 저마다 무시무시한 얼굴과 흉터를 지닌 자들이 외쳐대고 있다.

억울한 자, 죽어 마땅한 자, 고통을 즐기는 자들이 여기저기 저만의 공간에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결코 한 방에 한 명 이상 들어있지 않았고 구조물은 철저히 빛을 가리고 있었다. 대신 그들 각각에게 지급된 것은 인조적으로 빛을 밝힐 수 있는 양초 몇 개뿐이었다.

일정한 간격, 일정한 크기의 구조물이 아닌 자연을 본뜬 혹은 자연이 본떠 준 듯한 동굴형 지하 감옥으로부터 끊임없는 절규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끼이이익.

인공적인 빛이 아닌 자연이 선사하는 빛줄기가 마치 대각선으로 내리는 빗물처럼 서서히 어둠을 지워갔다.

"누, 누구요! 당신들 대체 뭐하는 작자들이야!"

검은 두건과 사제복 비슷한 도포를 두른 그들은 세명이었고, 둘의 실루엣은 꽤 컸다.

한 감방의 문이 열렸다.

"물! 물 좀 주쇼, 물!"

죄수는 그들의 도포를 잡으려 했으나 한 명의 발길질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물은 허락되지 않는다. 기억을 흐리게 만들거든."

아랫배를 부여잡고 꽥꽥 거리는 죄수를 양 옆에 서있던 덩치 둘이 팔을 잡아끌고선 질질 끌기 시작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이었다.

지하 감방은 짧은 침묵 후, 아수라장이 되었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네 놈들 냄새를 잊지 않을 거야. 내장을 끄집어내 목을 졸라 주마!"

"무, 물, 물이라도 좀 주쇼, 제발!"

잠시 후 철컹거리는 쇠사슬이 땅에 끌려가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문은 닫혔다. 문 안쪽은 아비규환이, 문 바깥쪽은 쪼개질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두 세계는 서로 다른 것만 같았다.

검은 두건의 세 명은 갑작스러운 빛의 폭풍에 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는 죄수의 양 팔을 어디선가 놓아주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넓고 천정이 뻥 뚫려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를 지닌 홀이었다. 마치 자연적으로 생겨난 사화산 분화구 내부와도 같았다.

풀썩.

"커, 커헉... 무, 물..."

주위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으, 아악. 내, 내 눈!"

감아도 감은 게 아닐 정도의 광량이었다. 미치도록이란 뜻과 빛을 의미하는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그때 그 시절, 그 글자를 만든 이를 만족시키려는 듯 빛의 강도는 더욱 세져만 갔다.

"보고하도록."

누군가 굵직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고 응답이 들려왔다.

"친족 1급 살인 및 방화, 약탈 전과 5회. 불특정 다수를 향한 발포 및 살인 미수 3회. 사형 대상이었지만 무기수로 한 달 전 전환된 자입니다."

"지능은?"

"IQ 91, EQ 50, MQ 150입니다."

"히스토리는?"

"원한 관계도 있지만 다수가 이유가 없습니다. 양심 따윈 악마에게 팔아버렸다고 해도..."

"스킬은?"

"한 때 특수부대 출신이어서 그런지, 화려합니다. 총검술, 사격술, 은폐술, 암살술 등 다양합니다. 지능은 떨어지는 걸로 측정되지만 군사적 정보 습득력은 매우 큽니다."

"준비해."

가운데 서 있던 검은 두건이 벗겨지며 검은 정장의 사내의 실루엣이 드러났고 곧이어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죄수의 신분으로 잡혀온 자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채 소리에 집중하는 듯했다.

"과연... 생존력도 뛰어나. 본능이 꽤 발달했군, 충분하겠어."

순간, 위에서 구멍이 뚫린 커다란 유리관이 죄수의 주위로 소리 없이, 서서히 내려왔다.

"뭐, 뭐야! 왜 이래, 당신들 누구야! 무슨 짓을..."

잠시 후 죄수가 지껄이는 말들은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았다. 완전한 방음을 구축한 것이다.

"시작한다. 해리 프로세스 작동시키고 히스토리 전송해."

지잉, 지잉, 지잉.

주머니에서 입고 있는 검은 정장의 흙빛보다 더 검은 선글라스를 꺼내 두 눈에 착용한 그는, 양 팔을 죄수 쪽으로 펼치더니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계소리가 점점 더 강렬해져 갔고 빛 역시 강렬해져 갔다.

유리관 안의 죄수는 펄펄 끓는 욕조에 갇힌 것 마냥 유리벽을 죽어라 때려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안 되어 온 몸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두 머리를 쥐어짜듯, 실제로 머리칼이 뽑혀나갈 만큼 한 움큼씩 쥐어 뽑기 시작했다. 극한의 고통이 그를 엄습한 듯했다.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긁어대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연이어 그의 피부 위로 자잘한 살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력에 의해 모든 지구 상의 물질은 땅을 향해 떨어져야 하지만 그의 피와 살점들은 분무기에서 뿌려지는 물방울처럼 작고 잘게 해리되어 공중으로 조금씩 떠오른다. 고통을 못 이겨 유리벽에 머리를 짓찌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해리된 피와 살점들은 나선형 방향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반시계 방향으로 꽈리를 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피부색이 붉게 변해가며 근육이 드러났고 입고 있던 옷들마저 섬유질화 되었다. 마침내 근육 부분들 사이로 내장과 흰 뼈들이 군데군데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생명이 붙어 있었다.

두 눈가로 눈물이 피와 섞여 공중으로 떠오르며 해리되었다. 이빨을 갈아대는 듯했으나 그마저 하얀색의 가루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뭔가를 중얼거려댔지만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저주의 말일 것이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자는 이러한 모습을 짙은 색 선글라스 너머로 보며 두 팔을 조금씩 움직였다. 그의 두 손이 움찔거릴 때마다 죄수의 몸은 공중으로 떠오르며 마침내 뼈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죽고 싶은 만큼의 고통이란 뭔지 알 수 있을 만큼의 광경 앞에 검은색 양복의 얼굴 역시 일그러졌다.

5분이 지나지 않아 죄수는 붉은색과 검은색, 그리고 하얀색의 물안개로 해리되어 갔다. 그의 숨이 언제 끊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검붉은 색의 입자들은 서서히 어떤 형태를 뗘 가기 시작했다.

시대를 아우르는 문자, 문자의 형태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초에는 얇고 기다란 헝겊과 같은 끈의 형태로 보이기 시작했지만 점차 문자열들이 자신의 의미를 갖추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DNA의 형태와도 같이 수십, 수백만 개의 문자들이 붉은색 끈 모양을 띄며 죄수가 있던 자리에 기둥의, 살아있는 것 같은 기둥의 형태로 모여들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면 사각형일, 위에서 보면 원 모양일 원통형의 것은, 이 시대가 나은 끔찍한 과학과 심학의 결정체, 즉 '책'이었다. 곧이어 과학의 힘이 투입되었다. 소리를 끊어낸 유리관 안으로 초강력 살균액이 분사되었고 사람 몸뚱이만 한 하얀 기둥은 검붉은 알 수 없는 문양을 지닌 문자들로 흡착되기 시작했다.

"휴... 우..."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공간 내부는 다시 안개에 휩싸였다. 마치 제본을 위한 작업을 하는 것만 같았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요, 위원장님."

어느새 강한 빛은 은은한 달빛으로 바뀌었고 유리관 내에 있던 죄수는, 본체를 잊은 흰 소금 기둥처럼 변해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번 케이스는 다른 이에게 전이할 거니 보관해 놓도록."

검은 양복의 '위원장'이라 불린 그는 어둑한 벽 어딘가로 걸어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유리관이 걷히고 나자 무균 지역을 향해 커다란 기계 팔이 뻗어 나오더니 '한 때' 사람이었던 그것을 잡아 이동시키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마침내 소금 기둥이 자리한 곳은 널따란 홀의 한쪽 벽면들 중 하나였고 기계 팔은 그것을 들어 높이 10M 이상 되는 곳으로 이동하더니 덩그러니 비어있던 한 구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홀에는 다시금 어둠과 침묵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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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 왜 이 모양이냐?"

한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는 구동식 주택의 한 룸을 살펴보고 있었다. 입술가에 묻은 흰 거품들이 말라붙어 곰팡이만 같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

딱!

지팡이가 대답한 비서 한 명의 정수리를 휘갈겼다.

"으악. 아이고, 아이고."

"이 새끼야, 그걸 대답이라고 하는 게냐. 쿠, 쿨럭."

기침을 몇 번 하더니 회장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자신의 개인 비서를 향해 말을 뱉어냈다.

"니 딴 놈 의견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더냐! 당장 여기 관리자 목을 조르든 따든 해서 뭔가라도 가져오는 게 맞지 않겠느냐?"

"네, 넵!"

그는 연신 쯧쯧거리며 무척이나 재수 없을 것만 같은 뭔가를 지팡이로 눌러 보았다. 뚱뚱하고 마른 두 놈의 부러진 부분들을 툭툭 쳐댔다.

"으... 응, 억, 어억!"

"쯧쯧쯧, 정신이 드냐, 이 등신들아. 야! 이것들 시끄럽지 않게 약이나 한 발씩 놔줘라. 깽깽 대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 그리고 저기 처박힌 수의사 놈도 어서 깨워! 에라이, 그 새끼 모가지는 또 왜 그 모양이야?"

회장님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수금을 받으러 나갔던 수하들이 이딴 식으로 개차반이 된 걸 본적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력이 비슷한 동종업에 종사하는 조직들 간의 대놓은 전쟁이 아닌 이상 이 정도의 부상을 입히는 경우는 없었다.

'어떤 쌍노무 쉐끼들이 감히 내게 도전을 해? 잡히기만 하면 산 채로 뇌수까지 탈탈 털어주마. 내 자산들 중 하나로 완전히 박제해 주지.'

"뭣들 해, 어서 실어 날러! 본부에 돌아가 이 놈팽이들 얘기 좀 들어봐야겠구나. 쿠, 쿨럭."


@
"여기에요, 우리 집."

"아, 네.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난 정신적 병신이 맞나 보다. 강제로 전이된 기억으로 악당을 해치우고 나니 영웅이 된 듯하고 게다가 호감 가는 여자가 한번 안아주고 나니 호걸이 된 것만 같지 않은가? 모순된 일들일랑 싹 다 지우개로 지우고는 넉살 좋게 남의 빈 집에 기어들어가다니.

아, 정말 냄새 좋다. 이럴 땐 향기라고 해야 할까?

"발 냄새나요, 어서 씻어요."

"네? 아하하, 미안해요, 미안."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후다닥 달려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아... 이게 여자 사람의 욕실이구나. 나도 모르는 새에 비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도 두 눈을 감을 채로.

덜컥.

문이 열리며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수건이 들려있었건만, 두 눈은 변태 그 자체를 처음 본 여학생의 그것과 똑같았다.

"뭐... 뭐... 하세... 요?"

우당탕탕.

너무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욕실에서. 개씨발! 쪽팔려 죽고만 싶다.

몇 분 후, 내 머리에는 붕대가 감기고 있었고, 레아는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게다가 한숨까지 쉬며. 그러고 보니 숨소리도 꽤 예쁘네, 어떤 치약을 쓰는 거지?... 이게 아니잖아, 정말 나란 놈은.

찢어진 이마의 상처 위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여자 친구... 없죠? 있던 적도 없죠? 있었을 리가..."

"..."

"유일하게 있다면... 손도 못 잡아본 첫사랑 정도일까? 그죠, 그렇죠?"

난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그냥 부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어디 부처님 기억을 담은 책이라도 없을까? 이불 킥을 또 날리긴 싫다. 아참, 내 이불... 내 방, 내 집.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긴 한 걸까?

그녀가 부엌에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왔다. 그녀 건 없었고 차는 무척 달았다. 뭔가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설탕의 양을 조절하는데 실패한 것만 같았다.

말없이 차와 받침대를 따로 주더니 내 앞에 방석을 놓고는 조신히 앉았다. 뭔가 얘기가 길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저... 화장실 좀..."

"내 얘기부터요, 그게 먼저예요."

그녀의 입이, 그녀의 삶을 말하기 시작했다.


@
"저, 국립 심학 연구소 연구원이었어요. 공부 잘했었거든요."

그녀가 쑥스러웠는지, 자기 자랑이었는지 소리 없이 웃었다.

"자연재해...라고 들어보셨어요? 빗댄 말이긴 한데요."

"뭘 빗대요?"

"천재를 넘은 초천재, 인간이 만든 과학을 순식간에 이해해 버리는 사람들. 그런 부류의 사람들 있잖아요. 예를 들면, 지금부터 30년 뒤 오늘이 무슨 요일이게 물으면 응, 목요일이라고 바로 답하는 사람들, 엑사 플롭급 서버들이 수개월에 걸쳐 수행하는 통계 연산을 순간적으로 맞춰내는 사람들."

"아... 레오나르도 다빈치, 뭐 아인슈타인, 자폐증에서 태어난 천재들 같은 거요?"

"네,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은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한 인간의 지식 따위, 그저 책 몇 장에 불과한 지식 정도로 여기곤 해요."

"흠... 마치 작가 같군요, 작가."

"... 제가 그거예요."

"...?"

"풉."

"... 아하하하, 농담도 별... 암튼 웃겼어요."

"아뇨, 저 그거 맞아요."

지어낸 얘기치곤 왜 이리 진지한 표정인지.

"레아,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에이, 재미없다. 리테 반응이 시큰둥하니 더 말할 기분이 아니에요."

"... 아, 미안 미안. 와우! 놀랬어요. 정말 대단하군요, 대단해!"

"풉."

"그래서요? 자연재해인 당신이 국립 심학 연구소의 연구원은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요?"

아... 비위 맞추기 힘든 여자였군. 하는 수 없지,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려면.

"왜 자연재해라고 하는지 알아요?"

"글쎄요... 아마 자연재해는 예측하지 못하니까?"

"땡."

"맨날 오는 건 아니니까?"

"땡."

"이봐요, 좀 진지해 집시다. 엊그제 우리가 나눴던 얘기들 잊었어요?"

"... 자연재해라고 불리는 이유는, 말 그대로 인류의 수준에 비해 가져서는 안 될 지식과 영역을 있는 그대로 열어버리기 때문이에요. 자체로는 그저 일어나는 일일 뿐이지만, 인간은 절대로 그걸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 않죠."

"핵폭탄... 방사능."

"유전자... 조작."

"심학... 이단."

"공간전이... 살인."

"?"

"아세요? 인간의 생명으로 책을 만들게 되면 그건 영원히 살아가는 걸까요... 아니면 영원의 지옥에 갇히는 걸까요. 책을 누군가 읽는 순간부터 모든 감정, 사고, 소재는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거든요."

"살인이라뇨. 공간 전이라는 건 그저 책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일 뿐이지, 사람의 생명과는 무관..."

"이단은 종교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내 말을 잘랐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사실은 나와 무관한 일일뿐 사실 여부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그 이단 조직이 실제로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게 그녀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리테도 알고 있듯이, 인간이 작가들에 의해 해리의 대상이 되는 건 그저 '일종의 색다른 자살법' 이상 이하도 아닌 거죠. 하지만 자살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다면요?"

지금까지 그녀가 말하는 것들은 대부분 실현 불가능하거나 농담 삼아하는 말로 들었다. 인간의 생명을 책으로 만들었단 얘기는, 적어도 내 주변에선 본 적이 없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한 부부의 이야기는 뉴스에서 사실이라고 하니 사실로 받아들일 뿐, 내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래서 그러려니 할 뿐 목숨을 걸고 진위여부를 파악하려는 인간은 없다. 그저 극소수만이 음모론이니 뭐니 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색다른 자살이 아닌, 뭔가 다른 의미로써의 삶을 선택하려는 기로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궁금해졌다.

"그게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그녀는 그제야 내게 동질감의 눈빛을 던져줬다. 난 냉큼 받아 마실 준비를 했고.

"기억을 기억이 아닌, 내 삶의 일부로 만들 수 있다면요? 그저 책을 읽고 좋은 경험 했다 정도가 아니라, 그 삶을 현실에 가둬버릴 정도의 기술이 있다면요? 과거가 아닌, 현실로써요!"

"그게 무슨 차이점이..."

아, 그렇다! 엄청나게 다르다. 공간 전이라는 기술은 오로지 책을 '과거'로써만 인식하게 만든다. 전이되어 읽는 순간 이후론 모든 게 과거라는 이름의 기억일 뿐이다. 따라서 미래로 보내 이런저런 상상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책이란 기억이라는 과거와 상상이라는 미래에만 존재하지, 현재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고?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스토리를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현재로써 끌어들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나의 현재 시점과 책의 시간이 같은 시간대에서 진행형이 된다면 과거는, 즉 읽어온 내용과 기억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알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없다. 그저 과거는 과거일 뿐인 것이다. 현재는 예측할 수 없다. 주인공이 된 '나'는, 당장 내일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그래서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우가 딱 한 가지가 있어요."

"...!"

그녀는 웃고 나는 놀라며 동시에 외쳤다.

"살아있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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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요! 절대 안 돼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발, 제발요. 아직 제 얘기를 이해하지 못한 건가요, 리테?"

"아니, 말이 돼요 이게? 당신이 책으로 해리되고 나면, 대체 그 안에서 뭘 해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게다가, "

"돼요, 될 거라고요. 사람들이 저를 읽어주는 순간 그건 그들이 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당신의 억울함을 이해하고는 법적이든, 응징이든 풀어준다 칩시다. 그걸 어떻게 레아, 당신이 알 수 있단 말이에요? 당신은 이미 죽은... 에이, 썅!"

"전 그걸로 만족해요."

"..."

"죽지 않는 삶,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삶, 하지만 어떻게 끝날 지 전혀 알 수 없는 삶. 족해요, 저는 족하다고요."

젠장,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저딴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라고, 그냥 콱 죽어! 죽으라고! 바보, 팔푼이, 칠뜨기 같으니. 왜, 죽긴 왜 죽어? 똥밭이라도 땅 위에서 굴러야지, 한낱 책 따위에 갇혀 살려고 하다니.

이런 병신 같은... 담배가 어딨더라, 담배가...

빈 담뱃갑을 느끼는 순간, 손아귀에 힘껏 힘을 줬다. 담뱃갑은 쉽게 구겨져 버렸고 있는 힘을 다해 어딘가 멀리 던져버렸다. 썅, 담배나 사러 가야겠다. 내 수중에 남은 마지막 돈이다. 새로 산 담배를 다 피울 때쯤, 그녀는 내 곁에 남아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담배를 끊고 싶어 졌다.

층계를 찾으려 고개를 돌렸을 때, 누군가의 손이 내게 담배 한 가치를 건네준다. 불은 없다는 손가락 모양과 함께. 아, 난 정말 불필요한 놈인가 보다. 구형 싸구려 라이터를 뒤적거렸다. 이미 손가락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담배를 줬다는 사실에 놀랄 만큼 등신도 아니고, 또 여유도 없다.

그녀가 내 얼굴은 한 개도 쳐다보지 않은 채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며 불도 안 붙인 담배를 입술에 물고는 내 옆에 섰다.

"거짓말한 게 하나 있어요."

진짜, 이... 년... 어휴, 어후, 어후...!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뭔데요, 아직도 숨기는 게 있어요?"

그녀와 난, 문 밖 난간에 기댄 채였다. 도시의 분주한 모습들이 개미떼와 개미굴처럼 보였다. 오줌이라도 한 움큼 뿌려주고 싶었다. 괴롭히는데 이유가 있나?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나? 전부 내 꼴리는 대로 아닌든가!

"우리 엄마, 아파서 죽은 건 아니에요."

맙소사! 역시 속았던 거로군.

"아팠지만, 아팠지만... 더 억울하게 죽었어요. 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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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쭈쭈쭈, 우리 올갱이, 우리 오올개앵이이. 잘 있쩠쩌? 우쭈쭈쭈."

"와앙, 엄마 보고 싶었어."

"아가씨 쉬잇! 여긴 병실이야. 아픈 분들, 소리에 민감한 분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조용히 해주면 좋겠어요."

나이 든 수간호사가 그녀에게 찡긋거리며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살짝 붙여주었다.

'네, 알겠어요. 죄송해요, 아줌마.'

그녀가 속삭여 대답했다. 하지만 좋은 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는 한 달여 만에 만난 엄마의 품에 푹 파묻힌 채 까르르 웃기만 해댔다.

"환자분, 부럽네요. 우리 아들 내미는 맨날 엄마가 집에 없었으면 좋겠데요, 아주 입에 버릇처럼 달고 살아요. 그놈의 자식 주둥아리만 살아선. 호호, 죄송해요. 따님은 이쁜 데다 이렇게 엄마를 따르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호호, 그러게요. 어서 집에 가고만 싶어요. 우리 딸, 가르쳐줄게 너무너무 많거든요."

"아, 부럽다. 부러워. 조금 있으면 시집가도 되겠어요. 우리 아들놈이 조금만 나이가 더 있었어도 결혼시키고 싶을 정도네요. 붙임성도 참 좋고... 아까 저희들을 위해 빵도 사 왔더라니까요? 환자분, 혹시 저랑 인연 맺으실 생각 없으세요?"

"저... 수간호사님, 다른 병동에도 일손이 필요하다고요.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옆에 있던 젊은 간호사가 수간호사에게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아, 그렇지 참. 미안 미안... 그럼 환자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참, 그리고 너 이름이 뭐랬지, 귀여운 아가씨?"

"레아, 레아요."

"너 있다가 집에 가기 전에 앞에 인포데스크로 오렴. 아줌마가 연락처 줄 테니, 우리 아들한테 연락 좀 해볼래? 오호호호, 성격은 좀 그래도 꽤 잘 생겼단다. 전화 한 통화만 해 줘도... 아야야!"

'시간 없어요, 회의에 벌써 늦었다고요!'

옆에 있던 젊은 간호사의 얼굴이 벌게진 채 재빨리 수간호사의 허리춤에서 손을 빼는 게 보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환자분, 그럼 두 시간 후에 다시 올게요. 그동안 안정 취하시고 불편하시면 벨 눌러 주세요. 그리고 레아, 레아랬지? 넌 가기 전에 꼭 내게 오렴, 알겠지?"

레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간호사가 서로 째려보며 나가자 레아가 픽 웃으며 엄마의 담요에 손을 짚어 넣으며 말했다.

"아, 따뜻하다. 언제쯤 빵 먹으면서 엄마랑 놀 수 있는 거야, 언제 퇴원하냐고."

"풋, 이런 빵순이 같으니라고. 올갱아, 너 벌써 스무 살이야, 스무 살! 얼른 남자 친구든 뭐든 좀 데려오렴. 아무나 좀 데려와, 나도 어머님 소리 좀 들어보자."

"오, 정말, 정말이야?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머리 긴 남자? 키 큰 남자? 아님... 자상한 남자, 쿨한 남자, 돈 잘 버는 남자, 고지식한 남...?"

그녀의 어머니는 싱겁다며 웃기만 했다.

"네가 사귀는 거지, 엄마가 사귀니? 음... 그래도 이왕 선택할 수 있다면..."

"외할아버지 스타일은 빼줘, 난 할아버지 무서워."

"아유, 얘가 별말을 다하네.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아냐, 외할아버진... 꼭... 꼭..."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 같아. 맨날 근엄한 표정에, 꽉 막힌 말이나 하고. 그놈의 과학, 과학, 과학... 혹시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름이 물리나 수학이었어?"

"호호호."

고개를 쳐들고 오랜만에 웃어젖히던 그녀는 갑자기 표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 아버지!"

어느 결에 레아의 뒤엔 하얀 수염으로 얼굴을 뒤덮은 검은 정장의 한 늙은 사내가 서 있었다.

"꺅!"

"으, 으흠. 그래, 니 외할머니 이름이 화학이었지, 아마. 됐느냐?"

"놀랬잖아요! 진짜 할아버지 미워, 오셨으면 인기척이라도 내셔야죠!"

"미안하구나. 오늘은 네게 볼 일이 있어 온 게 아니다. 니 어미에게..."

레아가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사이에서 빠져나와 뒤로 내빼며 두 눈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빼애~ 이러니까 내가 무서워하는 거라고요, 어무니!' 라며 손을 흔들곤 병실 밖으로 총총 걸어 나갔다.

"... 아버지, 웬일이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간 별 일 없으셨어요?"

"..."

"...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한 가지 의논할 일이 있어 왔구나. 건강은 좀 어떠냐."

"뭐, 별 수 있나요. 현대 의학도 포기한 원 오브 빌리언이라는데..."

"... 의사는 만나봤다."

"그런데요? 대체 무슨 일이신데요?"

"... 흠, 실은 네게 제안을 하나 하려 하는데,... 들어주겠느냐?"

두 사람의 대화는 지나가는 환자와 간호사들 사이로 묻혀 갔고 마침내 별 의미도 없는 공기 중 소음으로 변해가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해 보일 뿐이었고 이내 얼굴을 양 손에 묻더니 흐느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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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가요? 왜요, 왜요? 퇴원이 아니라 요양원으로 가신다고요?"

"그렇게 됐단다. 그러니 어미 짐들은 네가 미리 잘 챙겨두렴."

"이상하네... 곧 퇴원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할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엄만..."

"그나저나, 심학 연구소 생활은 할 만 하드냐?"

"아, 네. 뭐 그저 그래요. 흥미로운 건 사람들이 하나같이 독특하다는 거예요."

"그렇겠지. 내가 연구소 위원장을 맡고 있다고 해서 네게 준 특권이나 이득은 전혀 없으니 생활 잘해야 할 게야. 누구도 네가 내 손녀딸인 지는 모르니까 말이다."

"응, 그건 저도 알아요. 조심하고 있다고요."

"네 이력에 지능에 관한 모든 건 적당히 처리해 두었단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너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골치가 아플지도 몰라 그런 거니 이해하렴. 그렇다고 네 실적이나 연구활동은 항상 내게 보고되고 있으니 적당히 했다간 큰일 날 줄 알거라."

"휴,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위원장님."

"그럼 이만 자거라. 난 잠시 밤 약속이 있어 다녀올 데가 있으니."

"또 이 넓고 넓은 저택에 집사님이랑 경호원들, 그리고 저만 남는군요. 집사님네 언니랑 수다나 떨어야겠네요."

"풀리지 않은 명제 하나 내주랴? <2,209년 자이-디토 중력 차원 리프 가설>은 어떠냐."

"아이고, 영감님. 그만 괴롭히시고 어서 출타하세요. 전 자러 갈래요."

"녀석, 말버릇이!"

"다, 다녀오세요. 깨갱깽."

그녀는 거실을 나가 층계를 향해 후다닥 뛰어 올라가며 속삭였다.

'자이가 맞고 디토가 틀렸어요. 하지만 그건 지금 세상엔 너무나 위험한 이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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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조용한 공간,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두운 공간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은 검은 정장 차림으로 두건을 쓴 채였고, 또 한 명은 평범한 청바지에 청티 차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어둑한 어둠 속에 얼굴들을 가리고 있었으며 둘 사이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말을 건네 왔다.

"자네는 지금부터 세 명의 인격을 전이받을 걸세. 그게 뭘 뜻하는지 알고 있나?"

"..."

"충분히 위험한 일이지. 실패해도 성공해도 마찬가지야. 실패라면 그나마 다행이겠군. 하지만 성공하더라도 자네의 인격이 어떻게 뒤틀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 그때를 대비해 신체에 자그마한 보험을 하나 들어두었네."

"어떤... 인생들이었죠?"

"알고... 싶나?"

"당신이라도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군."

검은 두건의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변할 수 없는 건 없다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항상 있어왔지. 두 개 사이의 균형이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달까..."

"많이 괴롭겠군요."

"자네의 삶이 될 테니까. 이건 분리가 되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야. 후회가 자네의 몫만은 아니니 그거 하나만큼은 걱정 말게."

"하긴, 나 같은 놈들은 많았을 테니..."

"고통, 쾌락..., 그리고 모순."

"쉽진 않겠군요."

"영향은 평생이니까, 아마도."

"대가는...?"

"자네 가족의 인생."

"쉽군요, 쉬워. 할 일은?"

"한 여자 아이를 데려와 주게."

"..."

"주변을 말끔히 청소해야만 하네. 불특정, 임의 살인을 허가하네. 단, 그 아이만큼은 털끝만큼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조건 하에."

"기한은?"

"한 달."

"제정신으로 있을 때는 지금이 마지막이겠군...약속하쇼, 절대 나를 내 가족 근처에 두지 않겠다고."

검은 정장의 남자가 뒤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가 떠나간 자리, 홀로 남은 청바지의 젊은 사내 주위로 검붉은 문양의 하얀 소금 기둥 세 개가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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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프로젝트를요?"

"그래, 그렇게 결정되었지. 기한은 삼 개월, 목표는 초식동물의 안전한 심학적 해리 및 전이."

"전이... 요?"

"그렇지, 해리와 전이."

"제가 아는 해리, 그리고 공간 전이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전 작가가 아니라고요! 게다가 동물요? 그것도 살아있는...?"

소장은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자 자신의 연구실 방문을 닫고는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그리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봐, 자네 같은 신참에게 이런 일을 맡기려는 위쪽 양반들을 이해 못하겠는 건 오히려 내쪽이라고. 대체 누굴 구워삶은 거야? 아님, 아님... 뭐 딴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그거 말이야, 그거... 있잖아.'

순간,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소장 앞에 놓여 있던 기다랗고 두꺼운 삼각뿔 모양의 명함판을 들어 그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분노도, 미안함조차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저 낙엽 하나를 밟는 것만 같았다.

"으악, 으아악! 뭐, 뭐야, 이, 이게 미쳤나?"

다시 한번 그녀의 가녀린 팔이 움직였을 때 소장의 정수리에서는 가냘픈 핏줄기가 솟아올랐고 뚱뚱한 배가 뒤집어진 빙산처럼 위를 향하며 그대로 뒤로 고꾸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쓰러진 소장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입을 벌린 채 쓰러져있는 소장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그녀는, 몰려온 사람들에게 대꾸했다.

"치우세요, 저거."

목소리에는 울먹임도 차가움도, 떨림도 없었다. 건조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이 속한 연구실로 돌아가버렸다. 며칠 동안 작은 소동이 일었고 소장은 어디론가 부서 발령을 받아 근무지가 바뀐 채 지구 상 어딘가로 떠나갔다.

며칠 후, 그녀는 국립 심학 연구소의 최고 직급인 위원장의 호출을 받았다. 새로 부임한 연구소장은 그녀를 간신히 설득해 늦지 않게 일대일 면담에 참가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드디어 공식석상에서 만나게 되었다.

"위원장님, 대체 저 같은 신입에게 <공간전이>를 맡기시는 이유가 뭡니까?"

"1차 실험 대상의 최종 목표는, 초식 동물들 중 하나인 '양'이라네."

"전 작가도 아닙니다. 국립 심학 연구소에 속한 한 명의 연구원일 뿐입니다."

"게다가 그 '양'은 희귀한 암에 걸린 양이라 곧 죽을 운명이라네. 하지만 운이 좋아. 연구대상이 된 덕분에 몇 년 동안은 귀하게 살 수 있었으니."

"<공간전이>란 심학계의 발전에 따른 문학적 활동의 일부일 뿐, 연구대상으로써는..."

쾅!

"넌 대체! 네 능력을 어디다 쓰려는 게냐!"

위원장의 두 주먹이 책상 위에 떨어졌다. 그의 두 눈은 알 수 없을 만큼의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순간, 그녀의 두 눈에도 당황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자신을 내버려두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전..., 전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그것뿐이에요.'

위원장은 숨을 가다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 말을 내뱉었다.

"넌,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을 바쳐야만 하는 운명인 게지."

"..."

그녀의 입술이 꽉 깨물어졌다. 지겹도록 들은 얘기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특수교원으로, 특수교원에서 군사시설로, 군사시설에서 방위사업체로 어린 시절 끊임없이 끌려다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네 의지는 상관없다. 넌 해야만 하고, 반드시 결과를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요?"

잠시 한숨을 내쉰 위원장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피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잔혹한 표정과 비웃음이었다.

"네 사랑하는 인생은 오래가지 않을지도."

"... 네?... 대체 무슨 말씀이죠?"

"연구원 레아 야크, 잘 듣게나. 시민이란 자신을 보호해주는 국가의 부름을 받았을 때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사명이 있지. 그렇지 않다면 국가는 더 이상 울타리를 만들어줄 수 없다. 적어도 그 시민을 위해선 말이지."

위원장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시가 하나를 잡아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꽤 많은 걸 포기해야만 하는 게지. 배울 권리, 안전히 잠들 권리, 그리고 치료받을 권리. 넌 네게 주어진 것들이 공짜로 쏟아진다고 생각하겠지. 세상에 그런 건 없다. 게다가 네 재능이라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고 재구성할 수 있음에도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면 너 역시, 그리고 네 가족 역시 혜택을 바랄 순 없겠지."

"으음... 하, 할아버..."

"누가 네 가족이라더냐! 넌 부품이고, 난 조립하는 인간이다. 가족보다 그게 더 먼저인 게 바로 이 사회인 게지, 쯧쯧쯧."

그의 눈가에는 굵디 굵은 실핏줄들이 터져나갈 곳을 찾아 자신의 줄기를 한껏 뻗쳐대고 있었다. 마치 두 눈알을 뿌리와 양분으로 삼은 미친 괴목과도 같았고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지경이었다.

"..."

"고민할 시간을 주마. 삼일 내로 네 결정을 들고 오너라! 불행한 쪽을 선택했다면 너만으로 끝나지는 않을게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를 않았다. 지금 두 눈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외할아버지가 아닌 것만 같다. 아무리 어렵고 불편한 관계일지라도 손녀딸인 자신, 그리고 그의 딸이자 그녀 어머니의 생명을 볼모로 협박할 순 없다. 하지만 그는 지금 두 눈 앞에서 그것을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 알겠습니다."

"나가 봐."

문을 나온 그녀는 울고만 싶었고 또 두려웠다. 방금 전 면담에서 본 사람은 그녀의 가족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평생을 속아온 것이며 그녀의 어머니 또한 그런 것이다. 저 사람은 가족도 피붙이 따위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 길로 그곳을 그만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제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희귀한 암에 걸려 언제나을지도 모를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어머니는 당장 금전적인 면을 모두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상태가 나빠져도 희망 없이 중환자실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비용은 실상 외할아버지의 절대적인 힘에 기대고 있었기에 레아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삼 일 후, 레아는 그녀의 외할아버지, 국립 심학 연구소의 위원장에게 찾아갔다.

"하죠, 하겠습니다. 단, 엄마를 끝까지 보살펴 주겠다고 약속하세요!"

위원장은 곧이어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짓더니 나가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그리고 레아는 그때 깨달았다. 이 남자, 더 이상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아니라고. 그리고 자신은 지금 '지옥'에 발을 내디딘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녀의 능력은 연구소에서 마침내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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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천재래, 천재. 내가 봤는데 장난 아니야."

"진짜?"

"언어 사전을 하나가 아니라, 최소 몇십 권은 꿰차고 있더라니까. 그것도 죽은 언어들 포함해, 전 세계 언어 사전들을!"

"그뿐만이 아니야, 그 여자, 컴퓨터가 필요 없어. 출력을 위한 경우를 빼곤 머릿속 연산이 더 빨라. 뭐 그런 게 다 있지?"

"이야... 어떤 남잔지 엄청 기죽어 살겠는데? 크크."

"소문 들었어? 그 여자, 작가 능력도 있다던데? 뭐래, 뭐래. 진짜 별종이다 별종."

평생 동안 그녀가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들이었다. 평범한 학생이 될 수 없었던 그녀는, 천재들만 모여든 학교에서조차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선 전혀 상황이 달라졌다.

모든 사람은, 그녀를 '이야깃거리'로 대했지 '사람'으로 대할 줄은 몰랐다.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해 딱 두 가지 행동만을 내비친다. 하나는 숭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거이다. 즉, 받들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는 사회 속에서 일종의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조롱거리나 화젯거리로써 받들여졌다. 그래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스탠바이 하세요. 곧 전이가 시작될 겁니다. 거기 연구원들은 제자리를 지키세요."

두 연구원이 수군거렸다.

'이번 전이의 대상은 뭐였지?'

'그거, 식물이었는데. 맞아 맞아, 백 년 정도 된 고목이었지 아마?'

'저번처럼 바퀴벌레마냥 기어 다니는 건 아니겠지?'

'아, 몰라. 그땐 정말 쪽팔려 죽는 줄만 알았다고.'

'얌마, 그래도 우린 기어 다녔으니 그나마 나았지. 어떤 새끼는 지 거길 빤답시고 허리를 180도로 접어선... 그때 실험실 CCTV까지 지운다고 난리까지 쳤잖아?'

"거기 두 사람, 나가실래요?"

"헉. 죄, 죄송합니다! 수석 연구원님!"

그녀가 머리에 붙인 부착형 헤드셋을 톡톡 치며 말했다.

"<해리> 장치 가동, <공간전이>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순간, 십여 명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던 거대하고 투명한 유리관 내부가 서서히 드러나며 내부에 있던 무엇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리관 한 가운에 뿌리째 우뚝 솟아 있던 고목이 서서히 해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뜨겁게 쪄대는 듯 열과 엄청난 증기가 발생했고 연구원들의 눈은 휘둥그래 졌다. 세 번째 보는 <공간전이> 프로세스였지만 매번 심학의 힘과 현상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희뿌연 증기가 고목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기를 일 분여, 점차 표면의 거친 입자들이 공중으로 분해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뿌리까지 해리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오 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서서히 입체적 나선형을 그리며 하얀색의 기둥처럼 생긴 원통형의 뭔가가 중앙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갈색과 녹색의 몇 개 안 되는 처음 보는 문자열들이 서서히 흡착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헉헉, 곧장 <전이>를 시작합니다."

그녀의 숨소리와 땀에 젖은 헤드셋 위로 작은 불꽃들이 탁탁 튀어대더니 하얀 수증기처럼 가냘픈 실 같은 것들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 연구원들 각각의 헤드셋으로 흘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연구원들은 두 눈을 까뒤집으며 입을 벌린 채 좌석에 널브러졌다.

말 그대로, 나무가 된 것이다. 백 년짜리 살아있는 고목이.

"어... 허... 흐흑."

"아, 아하하하."

여기저기서 웃거나, 울거나, 간지러워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외의 표현은 다행히 없었다. 지난 두 번째 <공간전이>에서와 같이 바퀴벌레처럼 벽을 타는 일도 없었고 자신의 그곳을 핥으려는 무리한 시도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그녀의 <공간전이>에 참여했던 연구원들 전원은 백 년 이상 살아온 경험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심리치료사에게 신세들을 져야만 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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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공간전이>의 타겟은 양, 병들어 죽을 운명의 온순한 양이었다. 보다 덜 양심에 상처를 주기 위한 배려라고 연구소 측은 설명했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최초로 시도하는 살아있는 동물에 대한 케이스니 만큼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앞선 세 번의 <공간전이>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의 성공적인 데이터를 쏟아냈고 독자가 된 지원 연구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식물과 곤충, 그리고 나무 정도일 뿐이었다.

이번 케이스는 말 그대로 '동물'이다. 따뜻한 피와 뼈, 그리고 근육, 피부를 지닌 심장이 뛰는 생명체, 동물이다. 따라서 그녀의 마음은 편할 수 없었다. 연구소에서는 특별한 방안을 내놓았다.

"수석 연구원님, 윗선에서 지침이 내려왔는데요. 이번만큼은 실험 대상체를 직접 눈 앞에서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배려 차원이라네요."

"휴... 어렵군요, 어려워."

"실험체 유리관을 검은색으로 코팅해 준다네요. 윗분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다고 수석 연구원님 마음이 편할리..."

"괜찮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뭔 짓인들 못하겠어요. 그것까지만 해주고 나면 더 이상 군말 없겠죠."

그녀의 동료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어느샌가 그녀에게 연정을 느끼기조차 했던 그는 알 수 없을 슬픔에 휩싸였다. 매 실험마다 그녀가 힘겨워하는 모습에 가슴이 떨려왔던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그렇다 쳐도 심적으로 굉장히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은 충분히 그럴만한 것이었다.

"나머진 내일 하죠. 그만 정리하세요."

그때 위원장이 실험실로 들어오며 말을 건넸다.

"괜찮은가, 레아 야크 수석."

그녀가 위원장을 바라보았을 때 위원장은 예전 여느 때와 같이 그녀의 '외할아버지'였다. 손녀딸의 미래를 위해 자신과의 관계는 숨겨주되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 피붙이, 가족이었다. 하지만 레아는 도저히 지금의 그를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얼마 전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협박 아닌 협박을 대놓고 하던 전혀 다른 남자와의 이미지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네."

"다음번 실험은..."

그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유리관 건도 들었습니다."

위원장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몸은 좀 어떤가, 주위에서 걱정하는 이들이 몇몇 있던데."

"신경 쓸 일 아닙니다."

"흠, 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군. 예정대로라면 다음 주 초에 진행하려 했는데 좀 더 뒤로 미루는 건 어떤가."

"상관없습니다. 그나저나, 그 건만 끝나고 나면 제게 선택권이 주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응? 어떤..."

"지금까지 실험해 온 <해리>와 <전이> 과정에 대한 데이터는 꽤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공식화되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작가들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데이터와 프로세스이고 또, 방대한 산출물조차 차곡차곡 쌓아드렸으니 제가 더 이상 필요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이만 저를 놓아주십..."

"거기까지."

그녀의 말을 끊은 위원장은 옆에 서성거리던 연구원들에게 이곳을 어서 비우라는 손짓을 해댔고 곧 실험실에는 그녀와 그,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몇 걸음 걷더니 고민에 빠진 듯했다.

"만약, 만약."

"..."

"다음번 실험에서 만족할만한 데이터가 추출된다면, 고려해보도록 하지."

"..."

"수긍한 걸로 알겠네. 자네 말처럼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연구소는 응용해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지. 하지만 다음번 실험은 자네도 알다시피 해리 레벨이나 전이의 준위가 꽤 다르다네.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겠나?"

"... 네."

"좋아, 그럼 기대해보도록 하지. 내가 만족한다면, 자네의 의견 충분히 수렴토록 고민해보지. 그럼 수고하게."

"... 아시나요, 위원장님."

등을 돌려 나가려던 위원장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인간의 턱없는 욕심은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죠. 신의 무모한 욕심 역시 지금의 인간을 만들어냈죠, 이 시대의 괴물들을."

"그래서?"

"결국 신은, 세상을 멸망시킬 소지를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심어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이란 결코 쉽게 변하지 않거든요. 한번 내디딘 욕망은 멈출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두렵지 않나요?"

순간, 위원장의 얼굴은 다시금 차갑디 찬 얼음 바닥처럼 변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얼굴이 튀어나온 것이다.

"흥, 같잖은 변명 같군. 네 말대로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나 자신이 신이 되어 욕심을 통제하면 그만이지. 멸망시킬 소지 따위, 신의 통제 아래 두게 된다면 그저 보잘것없는 먼지 같은 게다."

"... 그게 가능할까요?"

"신의 특징 중 하나는, 수 없이 많은 얼굴들을 지니고 있다는 거지. 필요에 따라 하나둘씩 꺼내 쓰면 될 뿐인 게야. 모순도 갈등도, 두려움조차도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삶. 네가 하고 있는 실험, 그게 바로 씨앗이 될 게다."

위원장은 다시 고개를 돌려 실험실 문을 향해 발길을 내디뎠다.

"마, 말도 안 돼..."

"흥, 이미 우린... '신'이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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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찾아왔다. 몇 개월만에 찾아온 동생 놈은 여전히 바쁜가 보다.

그건 그렇고... 어라? 이 동네 좀 낯이 익은데?... 아, 우씨 뭐야! 이 여자가 정말? 또 소설 속이야?

동생이 나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리며 말한다.

"뭔 소리야?"

글 속의 동생일 뿐인 눈 앞의 청년, 한숨이 나온다. 누구를 위한 한숨일까? 책이라는 가상공간 안의 저 청년? 아니면 지금의 나?

"휴... 그대는 또 어떻게 나랑 인연을 맺은 자인가..."

"뭔 소리야? 밤 산책이나 나가자, 어서! 내일 또 일찍 돌아가야 된다고, 형."

이 여자 설정 한 번 리얼하다. 정말이지, 내 눈 앞의 저 친구가 내 동생이 아닐 리 없거든. 생김새도 비슷하고, 말투도 비슷하며... 아참, 우린 쌍둥이였지?... 나랑 어린 시절 찢어질듯한 가난을 극복하고 개고생 고생 끝에 여기까지 온 친구 같은 녀석, 기특한 녀석, 멋진 녀석!

이제야 슬슬 기억들이 스며드는군.

'야옹, 야옹.'

야생 들고양이 떼들이 나타나 골목 한가운데를 어슬렁거린다. 아이고, 이 동네. 자정이 가까워서 그런가, 산동네에다 동네 깡패들처럼 고양이들 수 마리 들이라니. 밤이라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가, 쪽수가 많다 이건가? 귀찮군, 조용히 살살 피해 갈 테니 제발 니들은 가던 길 좀 가라.

"사는 동네 한번 참, 뭔 길냥이들이 저렇게 많아. 궁상맞게 왜 이리 시골 구석에 처박혀 사는데? 나 사는데 오라니까, 형. 돈이랑 집은 걱정 말고, 이래 봬도 나 꽤 여유롭게 산다고."

동생 녀석과 투덜대며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끝없이 올라가 있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옆 공터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슨 행사를 하고 있다. 야외 공연장이라기보다는 부채꼴형 원형 소극장 같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종교 행사 같은 걸 진행하고 있는 듯했다. 종교행사일 거다, 아마도. 사람 수에 비해 시끄럽다기보다는 다소 경건한 분위기니까.

어? 근데... 좀 이상하다 이번엔. 분명 소설 속인데... 나 자신이 그 사실을 잊지 않은 채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상황, 이곳에서의 '나'라는 캐릭터에 대한 정체감 속으로 빠져들지를 않는다.

경험상, 원래의 내 기억들은 사라지거나, 혹은 처음부터 기억을 하지 못했다거나 아니었든가? 시간은 흘러갔지만 예전처럼 소설 속 사건들과 시간 안으로 쉽사리 녹아들 지를 못하고 있다. 대체 뭐지?

"밤이라 그런지 꽤 춥네. 동네 한번 오진데 있구먼. 요샌 어때, 잘 지내? 글은 좀 써지고?"

"어... 그, 그래."

분명 동생에 대한 기억은 연속적이다. 친동생이고, 멀리 지방에 떨어져 의류업계에 종사하는 녀석이다. 잠깐 시간을 내서 집에 찾아온 거다. 모든 게 정상적이고 일상적이며, 원래부터 '그래 왔던' 일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전이해준 소설 공간 속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세계에서의 기억들을 계속해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동생과 함께 로컬 푸드 마켓 테이블에 앉아 어디선가 먹고 마셔본 듯한 빵과 차를 마시고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문득 마켓의 쇼윈도우에 비친 나와 동생 녀석의 모습에 눈길이 서린다. 우리 둘은, 닮은 듯 다른 듯 서로의 인생에서 쌓아온 향기들로 조금씩 생김새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만 같다.

하지만 조금씩 눈에 띄어가는 이마의 주름이나 턱께의 이리저리 뻗친 거친 수염발들만은 서로 닮... 아니, 앞으로도 닮아갈 것이다. 언젠간 흰 머리칼도, 힘을 잃은 피부도, 쭈글쭈글한 손과 발도 닮아가겠지.

딱 한 가지 의문이 들뿐이다. 윈도우에 비친 나와 내 동생은 닮았지만, 저 둘의 얼굴은 내가 원래 알던 얼굴과는 다르다. 많이, 아니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저들의 얼굴은 어디선가, 현실에서 보았던 그 누군가의 얼굴일까? 낯설지 않지만 낯선 얼굴. 저 얼굴의 원래 주인은 누굴까?

어... 왜 눈물이 흐르는 거지?

그리고는...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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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때요? 이번엔."

"어, 어... 나, 난... 동생이..."

기억났다. 이번 <공간전이>는 그녀의 순수한 소설이었고-몇 시간 전 온몸으로 겪었던, 황당했던 대하 역사 소설이 아닌- 내가 해보자고 해서 시작한 <전이>였다.

"네, 당신은 동생이 없죠. 맞아요, 없어요. 쌍둥이도 아니고."

"왜,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죠...?"

"그곳은 당신이 만든 세계예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당신의 지식, 경험,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 구현된 세계죠. 그렇다고 좋아하진 말아요. 그곳에서의 당신이 절대자란 뜻은 아니니까. 그저 당신에게 있어선 연속적인 시간과 공간일 뿐이죠. 즉, 심리적 기억으로써는 연속될 수 있다는 의미예요."

"나... 동생이, 동생이 정말... 없나요?"

내 두 눈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녀가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 사실이 뭘 뜻하는지 알고 있나요, 리테?"

"이... 이곳, 이곳이 정말 현실인 가요?"

"또 진입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똑같은 상황, 똑같은 시간대로. 그곳에서의 모든 원인과 결과는 당신으로부터 만들어지고 구성돼요. 하지만 마찬가지로 당신이 그것들을 선택할 순 없어요. 신은 아니니까."

"... 그렇다면, 그 말은..."

"그렇죠. '새로운 삶'으로의 첫걸음, 말 그대로 새로운 삶이죠. 비록 중간에 끼어들어가긴 했지만."

"모, 모르겠어요. 여기가 진짜인지 그곳이 진짜인지..."

난, 정말로 혼란스러웠다. 흘러내리는 눈물, 원래 있어야 할 '동생'이 존재하지 않는 소설 속 허구였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리 없다, 내 동생은 있어, 반드시!라는 말을, 눈물방울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 그곳으로 완벽히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있어요."

평소 같았다면 호기심에, 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듣기나 해 봅시다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쪽'이 원래 내가 있어야만 할 곳만 같았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그곳에 돌아갈 수 있죠라고 묻는 말에 그녀가 입술을 옹알거렸다.

"당신이 그곳을 전이받아 경험하고 있는 중, 그 전이과정 도중... '이쪽'에서 죽으면 돼요, 물리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

"그 순간, 이쪽 세상의 기억은 잊고 그쪽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는 거죠. 미래를 알 수 없는 진짜 삶을."

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은 두 개의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으니까. 죽느냐 사느냐, 어느 쪽에서 죽느냐 어느 쪽에서 사느냐, 어느 쪽의 내가 진짜 나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들이 샘솟듯 떠오르고 있었다.

"단, 이쪽에서 죽으면 그쪽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말은 제 생각일 뿐이에요. 알죠? 저 자연재해란 거. 계산, 이론, 증명, 증거... 그런 거 웃기는 과정 들일뿐, 그냥 아는 거라고요, 그냥!"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미, 미친년... 썅!'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풋'하고 웃으며 돌아서서는 또 서랍 어딘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난 그녀의 옆모습, 옆 입술 모양을 통해 그녀가 속삭이는 걸 듣고 말았다. 그녀는 이렇게 옹알댔다, 정말 어린아이처럼.

'나, 그렇게 다시 살아갈 거예요. 우리 엄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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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웩. 우어억."

한 남자가 사무실 바닥에 쓰러져 욕지기를 하고 있다. 혼자 사용하는 듯한 인테리어와 사무집기는 남자가 꽤 높은 직급임을 암시하고 있다.

"헉, 헉. 으윽. 크, 크윽."

남자는 가슴과 머리를 쥐어잡고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소리만 질러도 곧장 밖에서 누군가 달려들어와 부축여 도움을 줄 수 있으련만, 남자는 모든 고통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온전히 부여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들키지 않아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법도 한 모습이었다.

"끄윽, 끄윽... 제, 젠장."

남자는 간신히 책상 말미를 잡고는 한 손으로 뭔가를 더듬어 찾기 시작했고 이내 작은 알약병을 쥐었다. 시대적 기술로 볼 때 물리적으로 삼키는 약은 꽤 중독성이 강함을 의미한다.

한 때 마약 혹은 모르핀이라 불렀던 양만큼의 진통효과를 낼 경우에만 알약 제조 허가가 내려졌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종류의 약이 아니었다. 커다란 권력자 혹은 은밀한 연구자의 손에만 들릴 수 있는, 일종의 권위적 그리고 암묵적인 무엇이었다.

'이, 이게... 점점 심해지는군. 어, 어서 지워야...'

우득, 우두득.

그의 흰 이빨 사이로 알약들이 부서져라 가루가 되며 흘러나온 침들과 뒤섞여댔다. 약 뚜껑에 아무렇게나 휘갈겨쓴 글자가 보였다. 누군가 괴로워하는 그만을 위해 제조한 약품인 것이다.

<메모리 리무버>............... [주: 기억 억제제]

"크흑, 휴... 우..."

그는 간신히 바닥에 앉아선 책상에 등을 기댔다.

심학의 이단자들이 발견한 몇 안 되는 법칙, 그리고 경고들이 존재한다. 밝은 양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라면 마치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처럼 느껴질 만한 법칙과 경고들.

'세 개체 이상의 살아있는 인간으로부터 전이된 체험과 기억들은 기존의 인격에 급격한 변화를 유발하며, 최악의 경우 <인격 붕괴>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인격 붕괴>란, 살아있는 사람의 기억들이 산 채로 전이되었을 때 특정 조건 아래 그것을 받은 인간에게는 인격장애가 발생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한 번에 하나의 기억만을 허락하는 게 인생이니까. 위원장, 즉 그녀의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세 명 이상의 살아있는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진 '책'들을 전이받았던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 특히 인간을 책으로써 전이받은 자들은 심학적으로 크나큰 모순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의 것인 만큼 전이된 기억은 동시에 하나의 인격 패턴으로 흡수되는데, 기존의 인격이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그 벽을 허물게 되며 과정이 반복되고 쌓이면 쌓일수록 전이받은 인격들을 자신의 본래 것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인격 분리를 넘어 다중인격이 수시 때때로 발현하기를 반복한다. 기억은 덮어쓴다고 지워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방대한 심리 속 어딘가 작은 조각조각들은 관계를 지니고 의미를 품은 채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는 숨어 있기 마련이다.

'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위원장은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과학자이자 심학도였으며 천재의 영역에 들어선 자였기에 동종의 기억을 전이받게 되면 인격 붕괴가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동종의 기억이란, 유사한 기억을 지닌 사람들의 그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어릴 적부터 함께 한 친구, 혹은 가까운 친지, 그리고 가족들의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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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루루.

그녀가 뒤적거리며 헤드셋에 끼울만한 크기의 칩들을 우르르 방바닥에 쏟아냈다.

"이, 이게 다 뭐야?"

"제 밥줄이요. 흐흐, 호호."

불안하다, 불안하다. 진짜 불안하다. 저, 저거... 전부 전이 소설들 아닌가? 이 여자... 진심으로 무섭다, 무서워.

"여기서 시청 반대쪽으로 다섯 블록만 가면 구석진 곳에 가게가 하나 있어요. 가게 이름은요, "

"아, 씨! 안 물어봤다고요!"

어느새 방금 전의 일들은 다 잊은 채 두려워하는 나. 그런 내게 새로운 세상을 마구마구 쏟아내는 그녀, 그리고 오지게 향기 좋은 이 방. 아... 배고파.

"<살아있는 작은 책방>이에요. 아는 언니가 주인인데요."

정말, 알고 싶지 않다. 또 무슨 괴물 같은 일들이 일어날지 두려워 죽겠거든.

"작은 책방이에요. 근데 좀 특이한 가게죠. 왜냐하면 제가 쓴 책들을 팔거든요. 호호홍."

설마, 살아있는...?

따닥!

그녀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기다란 연필이 내 정수리를 때렸다.

"아얏! 왜, 왜 때려요?"

"지금 머릿속으로 '살아있는'이라고 생각했죠? 절대, 절대, 절대로 아니거든요!"

흥분한 그녀가 다시금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란, 그냥 잠시 어떤 상황에 빠지는 것뿐이에요. 그게 소설이죠, 또 인생이고... 안 그래요?"

이 여자 정말 말 잘하네. 이렇게도 상황을 빠져나가는구나.

"인생은 사람이 선택한다고 선택되는 게 아니에요. 그저 상황에 따라 끌려 다니며 사는 거, 그게 인생이에요. 자식 때문에 못 살겠다는 부모... 상사만 아니었어도 안 때려치웠을 거란 회사원... 부인만 아니었다면 자유롭게 살았을 거란 남자... 신념만 아니었다면 괴롭지 않았을 거란 사람들까지."

"..."

"다 소설 같은 거죠. 자식도, 돈도, 신념도 전부 소설 같은 상황일 뿐, 실은 핑계죠. 문제는 자신, 오로지 자기 자신이었는데, 그런 건 절대 인정하기 싫으니까. 그렇다고 자신을 바꾸면 세상이 변해? 아뇨,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자신이 변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 따윈 없어요.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만 변한 거죠."

왜 이리 흥분하지? 별 얘기도 아니었는데...

"리테도 세상이 미워요?"

"그, 글쎄요."

"흠, 세상이 밉구나, 세상이 미웠어... 그럼 세상을 바꿔요."

뭔 소리야, 이 여자? 왜 남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며!

"세상은... 바꿀 수 있어요. 내 마음대로..."

또 자기만의 생각으로 빠져들었는지 연필을 까딱까딱거리며 방바닥을 보고는 가만히 서있다. 휴, 살았다.

그건 그렇고, '우루루루 칩'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바퀴벌레의 삶부터 승려의 삶까지,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전부 그녀가 전이시킨 소설들이라고 한다. 암시장에 내다 팔면 먹고사는데 지장은 전혀 없다고, 오히려 준재벌이 된다고 하네? 아는 언니가 작가 지망을 포기하고 작은 가게를 열었는데 거기서 많이 사준다고 한다. 옛말로 따지면 해적판, 비인가 소설들인거지...그게 <살아있는 작은 책방>의 숨겨진 정체라나?

아참, 야한 건 없나? 그녀가 정신을 차렸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뭐, 흥미로워 보이는 거 있으세요? 야한 거 빼곤 다 있어요, 골라보세요."

밉다, 미워.

근데... 이 여자 정말 삶에 대한 희망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자, 우리 함께 거기로 가요, 리테!"

"네?"

그녀가 씩 웃더니 표정을 싹 바꿔선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코를 들이대며 말했다.

"흐음... 자, 저와 함께 그곳으로 가시죠, 오라버니님. 아이잉."

덜컹덜컹, 무슨 소리냐고? 몰라서 물어! 나의 내장들이 지금 미쳐 날뛰는 소리지! 심장 놈아, 위장 새끼야 제발 너희들 제 자리로 돌아가, 제발.

"... 하... 휴... 네에."

이런 미, 미친! 주둥아리는 왜 제멋대로 지껄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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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놈팽이들, 거짓말이면 니들 아가리부터 털어줄 게야. 쿠, 쿨럭."

"아, 아닙니다. 두목! 아, 아니 회장님!"

퍽.

옆에 서있던 비서가 뚱뚱한 놈과 얇은 놈의 허벅지를 뒤에서 발로 찼고 둘은 땅바닥에 엎어졌다.

"어, 어억! 사, 살려만 주십쇼. 보스, 흑."

의자에 앉아 바닥을 기는 두 녀석을 바라보던 햄머파 회장은 비서에게 손가락을 특이한 모습으로 꼬아 보였다.

"그 녀석들 불러, 안 되겠다. 이 놈들 말을 들어보니 만만히 볼 놈이 아닌 것 같구나."

"네, 회장님."

"이번엔 저번의 두 배, 아니 네 배를 준다고 해. 나보다 더 거머리 같은 놈들이지만 이번엔 구미가 당기니 꼭 산 채로 잡아야겠다. 어서 연락하거라."

비서는 곧 안경테를 만졌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계층구조의 주소록과 암호화된 가상 블록들이 안경 안쪽 면에 펼쳐지며 데이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안경 어디선가로부터 울려 퍼지더니 비서는 안경을 벗어 예의 바른 손짓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곧이어 사람의 크기와 동일한 선명한 홀로그램이 물리엔진을 적용한 채 바닥 아래로부터 위로 펼쳐졌다.

두 사람 모두 특이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는 남자, 하나는 여자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남자 가면이 말을 꺼냈다.

"세 배."

"허허, 이 놈들 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가격부터 흥정하겠단 게냐?"

'네 배 불러, 네 배.'

옆의 여자 가면이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아니, 이 년이? 네 놈들 요즘 좀 잘 나간다고 해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쯧쯧쯧."

"무슨 일이십니까, 영감."

"쿠, 쿨럭. 이 놈들... 순서가 돼먹지 못했어, 돼먹지가 못했어."

남자 가면 속에서 왠지 모를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즘 저희에게 신종 무기, 그러니까... 특별한 능력이 좀 생겼습니다. 흐흐흐."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배때기 속에 총이라도 달고 다닌다는 게냐, 혈액이라도 산성화 시켰단 말이냐?"

회장이 의아하다는 듯 두 홀로그램을 번갈아 보며 짜증을 냈다.

"흐, 그게 아니라 가상 육체 훈련 중 희한한 놈을 하나 만났는데요."

"만났는데?"

"놈이 특이한 걸 하나 팔고 있더군요. 암시장에서 꽤나 잘 나가는 거라면서요. 물론, 우리 같은 더러운 일들을 하는 자들 사이에서만 말이죠."

"아, 시끄럽고. 본론이 뭔 게야? 본론!"

"전이 소설입니다."

"얼씨구, 이놈들이 취미생활에 돈독이 올랐나, 책이나 읽고 자빠졌어? 쿠, 쿨럭."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회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비서 둘이 부축이기 위해 다가왔으나, 회장은 손을 들어 제지했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얻은 게야?"

"전이 소설, 그것도..."

회장의 두 눈이 번득였고 뭔가 머릿속에 스치는 것을 잡은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오호, 알겠구나 알겠어... 니 놈 년들이 말하려는 게 뭔지 알 것 같구나."

"크, 역시 영감님께서는 모르는 게 없으시다니까."

"야 이 년아, 너보다 최소한 다섯 배는 더 처먹은 게 나다. 쿨럭."

"..."

"그래서, 그래서 뭘 전이받은 게야?"

"저... 영감님, 뒤에 저놈들부터 좀 내보내 주시면 성의껏 답변드리도록 하죠."

"이런, 제기랄 놈들 같으니라고. 귀찮게... 이것들아, 못 들었어? 얼른 다 나가!"

두 비서는 뚱뚱한 놈과 마른 놈을 끌고는 문 밖으로 나갔고,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두 홀로그램체는 회장을 보고 작게 속삭였다.

'SARTRA 현역 전투부대원들 중 하나, 그리고... 사형 예정이었던 여성 복역수.'

순간, 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뭐라? 살아있는 놈들을?"

"그래요, 기술이 원체 최근 거고 또 음지쪽인지라 한번 전이받고 나니 전부 부서져 버리긴 했지만."

"..."

회장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마저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단의 <전이> 기술을 받은 자들이 두 눈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 쿨럭. 그래서, 그래서 어떻더냐. 뭔가 달라진 게냐?"

"지금 이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영감?"

여자 가면이 끼어들었다.

"호호, 여기 지금 <비무장 사냥터>에요. 달랑 나이프 두 개만 가지고 벌써 다섯 마리나 해치웠다고요. 그것도 두 시간만에."

"살아있는 것들 뒤로 돌아가 목을 그어버리는 게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은 몰랐다니까, 크..."

회장은 곧 평온을 되찾은 듯하더니 짜증을 내며 말을 뱉어댔다.

"미친 년놈들 같으니라고. 이제 대충 알겠으니 목표물에 대한 정보를 주도록 하마."

하나의 인간과 두 개의 홀로그래밍은 뭔가를 쑥덕이더니 양쪽 모두의 입가에는 만족의 반원이 그려졌고 이내 홀로그램은 사라졌다. 그리고 회장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이거, 내가 많이 늙긴 했구먼... 늙었어. 이번에 잡아오는 것들만 요리하고 나면 이 바닥을 떠야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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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요, 오라버..."

"그만! 그냥 리테로 불러요! 이거 원 닭살 돋아서. 오빠로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쳇!"

"킥킥,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작가 양반."

끼익, 딸랑딸랑.

그녀가 앞섰고 난 따라 들어갔다. 근데 여기 책방 맞아? 무슨 분위기가 이렇게 음산해? 어휴, 저 사람... 뭐야, 머리랑 옷이 왜 저래? 조명도 음침했고 사람들도 음침해 보였다.

'언니, 언니야 어딨니?...언니야아...'

그녀가 누군가를 찾는 중이다. 그 와중을 틈타 이곳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눈을 피해 고대 도서관처럼 제본된 종이책들이 꾸역꾸역 쌓여있는 책꽂이들 사이사이를 종종 걸어 다녔다. 물론 극성맞은 외모의 매니아들을 피해가면서.

망해가는 가게는 아니었는지 사람들 몇몇은 구석구석 코너 코너에 짱 박힌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정상적인 분위기였다. 조명만 음침했지, 몇몇 사람들만 외모가 좀 그래 보였지, 나머지는 모두 정상적인 책방이었다.

차이점이라면 몇 백 년 전까지 유통되던 껍데기를 가진 종이책들이 여기저기 꽉 차 있다는 점? 요즘 세상에 대체 누가 공들여 종이 문자와 종이 책을 읽어? 아마 전당포쯤 되는 곳인가 보구만.

'아, 저기 등 돌린 채 독서 중인 미니스커트 아가씨가 뭘 읽고 있는지 궁금하군. 가서 말이나 걸어볼까?'

내 마음은 긴장이라는 옷깃을 완전히 풀어헤치기 직전이었다.

"저, 아가씨. 지금 읽고 계신 책이..."

뒤를 돌아다본 그녀의 얼굴, 얼굴에는... 수염이 나 있었다. 턱은 멋진 각을 자랑하고 있었고 머릿결로부터는 그윽한 향내를 뿜어대는 유명 메이커 샴푸 향이 번져왔으며 연한 푸른색의 정장 상의는 쩍 벌어진 어깨가 간신히 튀어나오는 걸 목숨을 걸고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당황을 넘어 섬찟했다. 그제야 자세히 내려다본 미니 스커트 아래로는 굵직한, 곰 새끼도 잡을만한 우락부락하고 멋진 근육들이 튀어나와 서로를 질투하며 자랑질 중이었다.

그리고 목소리, 막걸리를 열 사발쯤 들이켠 굵은 남성의 횃불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엄멈머 자기야, 무슨 일이야? 어흐흥."

아이, 씨발... 그럼 그렇지. 레아, 이 여자가 찾아온 곳이 이상하지 않을 리가. 내 얼굴이 구겨지며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냈다.

그리고 그때, 내 뒤쪽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책방 독서'라는 행위들을 깨지 않으려는 듯, 우비 속에 가려진 듯 들려왔다.

'어머! 언니, 나야 나! 레아!'

아이 썅, 씨발.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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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머머, 그래서. 저 남자가 그 남자야? 엄머 엄머, 오또케 오또케. 근데 너 취향 한번 독특하다."

"왜요, 언니?"

"딱 나랑 똑같아, 똑같아. 계집애 오또케, 나 주면 안 돼? 쟤, 내 스따일이야."

아까부터 떠오를 욕조차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저분들, 대체 내가 곁에 앉아 있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귀머거리라도 되는 줄 아나? 다 들린다고, 다 들려! 아... 저들의 대화를 듣지 않은 귓방망이 삽니다. 내가 무슨 아이돌 인형이냐고!

"안돼, 못 줘!"

뭐라? 레아가 뭐라고 한 거야?

"엄멈머, 너 독하다 얘... 그렇게 안 봤는데."

못주다니, 뭘? 설마... 나? 나를 얘기한 거야?

"그래 기집애, 너 가져라 다 가져. 치사하고 아니꼬워서. 아까워라, 아유, 귀여운 엉덩이하며..."

"큭큭큭."

"기집애, 얼른 볼 일이나 얘기해. 얄미운 것 같으니라고."

레아의 얼굴이 벌게진 채, 더 이상 웃음을 참는 건 자연재해 따위도 못해요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놀구들 있네, 정말. 그냥 확!

"언니, 그나저나 그거 이제 찾아갈게요."

잠시 천정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던 그녀가 뭔가 알아챈 듯했다.

"응...? 아, 아... 그거? 정말이니?"

"네, 이제 때가 다 된 거 같아요. 그게 필요해요."

"기지배, 정말 미쳤어 미쳤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렴. 과연 네 엄마가 마음이 어떠실지..."

"... 다시 만나면... 된 거잖아요."

멋쩍은 웃음에 젖은 그녀의 두 눈이 바닥을 향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뭔가 짐작이 가는 게 있을 것도 같지만 레아의 표정을 봐서는 꽤나 심각한 일만 같았다.

그녀로 인해 그녀의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었지 아마? 그리고 뭔가를 저 여성... 인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맡겨놓았나 보다. 그럼 당연히 유품이나 편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여기 있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지, 내가."

언니라는 사람은 목에 걸고 있던 헝겊 끈으로 된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를 열더니 뭔가를 확인시켜 주고는 다시 닫아 목걸이째 건네주었다.

아마도 추억이 담긴 영상 같은 것 같았다. 작은 칩이었거든. 그런데, 그런데... 그걸 손에 받아 든 레아의 눈에서는 표정 변화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사연이 담긴 물건이길래.

언니라는 사람은 이어 레아를 꼭 안아주었고 토닥여 주며 속삭였다.

'올갱아, 올갱아... 울지 마, 여기 언니가 있잖니. 제발 그저 마음만 돌려주길 바래.'

올갱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 그렇지! 올갱이면 레아와의 첫 만남에서 들었던 단어였다. 왜 저 여자가 레아를 올갱이라고 부르지? 아마 레아의 별명이나 애칭이 아닐까? 그나저나 저 언니의 손이 무척 부러워졌을 참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들리지 않게 뭔가를 속삭이더니 작별만 같은 포옹을 하고는 일어섰다. 꼭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것처럼 보인 건 나만의 착각일까?

다소 심각한 분위기였지만, 레아가 나를 보며 던진 말에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시다, 작가 양반!"

"리, 리테라고요. 리테!"

순간, 누군가의 손이 내 엉덩이 가까이를 배회하는 것을 느꼈고 또 한 번의 섬찟함이 등골을 훑어 내렸다.

우리 둘은 그곳을 그렇게 기억하며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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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호출하게."

"괜찮을까요, 위원장님?"

"하루빨리 레아 야크가 훔쳐 달아난 칩을 찾아야만 하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보다... 그 피실험체, 안정화된 건지, 무슨 변화가 있는 건지 정기적인 리포팅을 하지 않습니다. 다중 생명체를 전이받은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상관없네, 그에겐 이미 할 일을 전달했으니 임무가 시작되었다는 호출만 하도록."

"알겠습니다."

"실패하게 되면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도록 할 테니 처리반이나 잘 준비시켜 두게."

"네."

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자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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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겟 확보, 위치 확인.'

한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큰 건을 잘 해결한 듯 밝은 웃음을 지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는 얼른 집에 돌아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냥, 지갑 속 누군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같은 시각, 같은 블록의 한 작은 건물. 1층 출입구의 구식 유리문 끝에 달린 딸랑이가 흔들리며 남녀 둘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딸랑딸랑.

"어땠어요, 리테?"

"어떠긴요, 황당했지. 근데, 누구..."

"제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언니예요."

"... 형 아니었어요?"

"엥? 무슨 말씀이에요. 언니라니깐, 킥킥킥."

맞은편에서 장바구니를 한 가득 채운 채 낑낑대며 젊은 허니문일 듯한 아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차들은 분주히 도로 위를 점유하고 있었고 그만큼 도심의 공기는 좋진 않았다.

늙은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연신 옥신각신 다투며 벤치에 앉아 있었고, 꼬맹이들은 이리저리 바람개비를 날리며 학교가 끝난 것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일 또 가야 하겠지만,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아닌가라는 듯한 표정으로.

'지근거리 확보. 목표는 시각에 타겟팅된 남녀 2명, 생포.'

두 개의 목소리들은 동시에 속삭였다.

'파텐티부스 페르소나!'............... [주: 가면을 개방하라.]

허니문 아가씨의 손이 가득 찬 장바구니 안으로 들어가더니 두 개의 뱀처럼 똬리를 튼 채찍을, 동시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정장 차림의 남자는 허리춤에서 팔뚝 길이의 날카로운 군용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순간, 리테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며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고 한 손으로는 그녀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당황한 레아는 그의 표정을 살폈고 그는 이미 '리테'가 아닌 '그'였다.

이내 길가에 서있던 나무 합금으로 만든 고전식 전자동 주차정산봉을 한 손으로 뽑기 시작했다.

우득, 우두득, 우드드득.

결코 뽑히지 않으리라 여겨질 만했던 그것은 그렇게 뽑혀내 졌고 뿌리에 붙어 있던 시멘트 덩어리 조각들은 발길질 몇 번에 쉽게 분리되었다. 족히 100kg는 될법하니 보이는 나무 합금 봉은 금세 그의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고요한 강물 위로 떨어진 물방울의 파장이 번지듯,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주위로 달려 나갔고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현재의 상황을 찍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은 선생님의 손을 쥐고 어디론가 뛰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뭔가가 레아의 등짝을 향해 날아왔다.

촤르르륵, 철컹.

어느새 레아의 뒤로 돌아간 그는, 날아든 채찍 다발을 나무 합금 봉으로 막아내 걸치더니 시계방향으로 강력한 속도로 돌려댔고 연이어 채찍의 주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봉에 말려가는 채찍을 손에 꾹 쥔 채 질질 끌려갔다. 반대쪽에서 정장의 남자가 한 손에 군용 나이프를 비껴 들고는 레아를 향해 달려들자 그는 봉을 더욱 빠른 속도로 돌려대며 레아의 옷 춤을 잡아 다른 방향을 향해 내던졌다.

"꺄악!"

간발의 차로 레아의 머리카락 몇 올이 나이프에 잘리며 십여 미터를 날아가더니 건물 골목 사이 어딘가 쌓아둔 폐지 더미 위로 처박혔다. 그녀의 안전을 확인한 그는, 이어 맨손으로 허공을 가르는 나이프 날을 낚아 챘다.

정장남은 야릇한 미소를 띠며 그의 손에 잡힌 칼날을 빼내지 않고는 돌리려 했다. 마치 드디어 그물에 걸린 사자의 숨통을 끊으려는 사냥꾼의 미소와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승리를 확신한 듯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머지 손으로 움켜 쥔 합금봉에 휘감긴 채찍을 주인이 도달할 때까지 힘차게 돌려댔다. 마침내 채찍의 손잡이가 나무 합금 봉과 만나게 된 순간, 허니문 여성은 앞치마를 벗어던지며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뒤쪽으로 몸을 돌려 텀블링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샌가 그녀의 목덜미에는 리테의 억센 손이 들어와 숨통을 쥐고 있었다.

눈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그녀를 향해 발돋움을 한 것이다. 짧은 순간 손에서 풀어놓아 공중에 떠버린 합금봉을 한쪽 발을 이용해 등 뒤로 툭 차더니 목과 어깨로 이동시켜서는 목의 근육과 반동을 이용해 목 주위로 돌려댔다. 흡사 서커스에서 볼 법한 묘기마냥.

말이 서커스지, 저 정도의 속도와 무게로 회전하는 나무 합금 봉의 위력이라면 스치기만 하더라도 금속 자동차 정도는 쉽게 찌그러뜨릴 정도였다.

한편, 그의 발돋움을 따라 칼을 쥔 채 앞으로 딸려 온 정장의 남자는 본능적으로 칼을 쥔 손을 놓고는 바닥에 엎드린 채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나무 합금 봉만이 아닌, 그것에 묶여 말려있는 채찍 역시 주위를 위협하며 함께 회전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리테, 그의 왼손에 잡혀있던 군용 나이프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쩡, 투툭. 쩡.

맑고 투명한, 금속이 더 센 강도의 금속을 만나 깨지는 소리, 상식적으론 일어날 확률이 얼마 되지 않는 초합금이 깨지는 소리였다.

"뭐, 뭐야? 네 놈! 대체 뭐야?"

정장남은 여태껏 보아온 암살자나 전문 킬러,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면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즉 동질감이나 경쟁심이 아닌 '공포', 그 자체를 느끼고 있었다.

'포획은커녕, 사살이나 살해 명령이 떨어졌다 해도, 그래서 더 강력하고 은밀한 무기를 준비했다고 한들, 저 놈을 이길 수는 있을까? 아니, 내 목숨이 살아있는 채로 돌아갈 수... 이런 제길, 미친 영감탱이 같으니!'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상황을 판단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엠마! 퇴각한다!"

그리고 절박한 정장남의 외침에 대한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바로 자신들의 협공을 우습게 비상식적으로 막아내 버린 그곳에서 들려왔다.

"네... 여자인가?"

"그륵, 그륵..."

엠마라고 불린 허니문 여성은 두 눈을 까뒤집으면서 그의 손아귀에서 목줄을 잡힌 채 연신 침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고릴라 손에 재수 없게 잡힌 종달새처럼 보였다. 채찍도 날카로운 암기도, 그 어떤 것도 그의 앞에서는 그저 장난감처럼 여겨졌다.

"자, 잠깐! 잠깐만!"

급히 정장의 남자가 리테를 향해 소리를 쳤다.

"왜지?"

"사, 살려줘, 그녀를! 제발!"

"... 너희들은 방금 내 곁의 여자를 다치거나 죽게 할 뻔했다. 너희를 살려둬야 할 이유가 있나? 한 마디로 답하라."

잠시 주춤한 정장 남자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설픈 대답 후엔 그녀의 파트너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의 분위기는 결코 변명도, 거짓도 그 어떤 것도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무지막지한 눈 앞의 남자는 자신이 내뱉은 대답에 따라 곧장 파트너를 끝장내버릴, 그러고도 충분할 정도로 진지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말해주겠다!"

투두둑, 털썩.

생각보다 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엠마라고 불린 암살자가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동시에 그의 반대쪽 손아귀에선 네댓 조각으로 부러진 초합금 경량 군용 나이프가 원래 속이 그렇게 생겼다는 듯 거친 표면을 드러내며 후드득 땅 위로 나뒹굴었다.

정장의 남자는 도망칠 생각도, 다시 공격할 생각도, 전투 의지 자체가 무너진 것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고, 그때 레아가 폐지 더미에서 몸을 추스르며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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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의 남자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자신의 파트너를 무릎 위에 안아 들고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도로 저 편으로부터 공안청의 무인 드론과 차량들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내부가 보이지 않는 무인인지 유인인지 모를 기동차량 한 대 역시 그들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기동차량은 막무가내로 정장의 남자 앞을 막고는 멈추더니 문이 열리며 복면의 사내가 외쳤다.

"어서 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장의 남자는 품에 안고 있던 파트너를 급히 차량에 던져 넣고는 열린 차량 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두 암살자가 탑승한 것을 확신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전속력으로 도로를 돌진하기 시작했다.

묵묵히 이를 지켜보던 리테는, 문득 뭔가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제야 레아가 날아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레아, 레아! 괜찮아요?"

리테가 달려가 폐지 더미에 처박힌 그녀에게 뛰어가 이리저리 살피며 주변을 살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안청의 드론 수 기가 코 앞까지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폐지 위에 있던 몇 개의 음료수 캔들을 집어 들고는 손으로 찢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각조각 휴지처럼 찢어진 금속캔 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에 걸더니 날아오는 드론들을 향해 튕겨 날렸다.

주위의 사람들은 결코 알아채지 못할 속도로 금속조각은 공중을 날아 정확히 드론들의 정중앙을 뚫고는 깊숙이 박혀 들었고 곧이어 아무런 이유 없이 도로 위로 추락해 떨어졌다.

네댓 대의 드론들이 땅에 처박히는 걸 확인한 리테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레아를 부축해 안아 들었다.

"으... 으, 아, 아파라. 아야."

그의 품 안에서 정신을 차린 레아는 상황을 절반 정도만 이해했는지 비명을 질러댔다.

"어, 어머! 뭐, 뭐 하는 거예요, 리테!"

"잠시만 두 눈을 감고 있어요. 어서 도망가야 하거든요."

딱 그 두 마디에 레아는 곧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귀 역시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라며 공안청의 등장에 긴장하고 있었다.

순간, 리테는 두 다리와 두 발에 힘껏 힘을 주었고 둘은 도저히 믿기지 못할 만큼의 속도로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가끔 발돋움을 할 때마다 십여 미터 이상을 이동하며 심지어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골목골목 벽을 타가며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몇 분을 달리지 않아 그들은 곧 열 블록 이상을 지나쳤고 도로상의 감시 카메라들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경로를 지나 그녀의 집 근처 주변에 도착하게 되었다.

퍼퍽.

리테의 발이 땅에 박히는 소리였다.

"휴, 간신히 도망쳤네. 뭐 하는 놈들이지, 대체?"

레아는 달려오는 내내 그의 품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능력에 대해선 별 의심을 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고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 그리고 근시일 내에 일어날 법한 일들을 계산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그만 내려 주세요."

"아, 앗! 미안, 미안해요. 아깐 정신이 없어 나도 모르게 안아 든 거라고요."

뭔가 호들갑을 떨 줄 알았던 레아는 조용히 땅에 발을 딛더니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이대론 안 되겠어요. 어서 우리, 어디론가 이동을 해야만 하겠어요."

"네? 이동요?"

"도심은 안전하지 않아요. 아까 그들은 아마도 우리를 산 채로 잡아갈 계획이었을 거예요."

"무, 무슨... 왜요?"

"이유나 누가 그랬는진 중요하지 않아요. 급한 건 일단 이 도시를 떠나야만 한다는 거죠."

"뜬금없이 무슨 얘기예요? 우리 집은 어떻게 하고요, 일은요?"

"리테, 저를 믿나요? 저를 믿어줄 수 있나요?"

"?"

"제발 지금 당장은 저를 믿어줘요. 우리 어서 여기를 떠야만 된다고요."

"대, 대체... 무슨?"

"당신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아니, 돌아가면 안돼요."

"왜요, 왜죠?"

"... 저들이 누구든, 붙잡힌다면 끔찍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고요."

리테는 한숨을 쉬어대기 바빴고 그런 그의 손목을 잡아채서는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리테는 생각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하지만 어차피 그 집도, 일도 더 이상 내겐 의미 없을지 모르겠어. 이 여자를 따라가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역시 묵묵히 그녀를 따라 짐 꾸리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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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푹 눌러쓴 모자를 쓴 채 한 열차역에서 기차 시간표를 보며 대기실의 구석께 앉아 있었다. 아직도 그녀를 안았던 촉감과 느낌이 두 손 한가득 차 있다. 설렌다, 설렌다. 말할 입도 필요 없고 기억할 머리도 필요 없었다. 두 손이 그때를 기억해주고 있었으니까.

한 동안의 침묵 속에 있던 중 말을 꺼낸 건 바로 그녀였다.

"... 근데 이상해요, 이상해. 정말 이상해."

또 뭐냐, 여자! 제발 정상적인 추리를 하길 바래.

"소설은 <전이> 받을 때 그 주인공과 동기화가 되는데 현실상에서는 육체적 능력이나 기억 정도로만 반영된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리테 당신은... 정말 역사 속 '그'와 동일했어요, 아깐 말투마저 똑같았다고요!"

"그, 그러게요. 뭘 잘못 먹었나... 엥? 당신, 정신을 잃었던 게 아니었던..."

짝!

"아야, 내 등짝!"

"이건 중요한 일이라고요, 무척!"

그녀의 손이 내 몸에 닿았다. 으흐흐, 아프지만 왜 이렇게 좋냐. 왜 성인업계에 새디스트와 마조히스트가 있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한 번만 더, 한 대만 더 때려 줘. 등짝, 일해라! 기억하라고!

퍽. 퍽.

그녀가 내 음흉스러운 생각을 알아챘는지 얼굴을 구긴 채 멀쩡한 내 정강이 옆을 발로 연신 때려댔다.

정말이지... 하나도 안 아프다. 점점 더 그녀가 예쁘게 보일 뿐. 그녀의 의문보다 내 마음속이 훨씬 더 복잡했기 때문일까?

아, 행복해... 나란 놈은 정말. 옆자리 꼬마 녀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뭔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건방진 자식... 쪼끄만 게 벌써.

"좀 진지해져 봐요, 리테."

참 내, 지금 누가 진지해야 할 판인데.

"그나저나, 아까 싸움에서 다친 곳은 없어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얼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어디... 아픈 데가... 없다, 전혀 없다. 하지만 내 주둥아리는 그렇지 않았다.

"아, 아파요. 여기저기 다 쑤신다고요. 아고고고..."

"다행이군요, 근육만 쑤신다니. 지금부턴 어디 부러지거나 찢어진 데가 있다면 안되니까."

무, 뭐라!

한 술 더 떠 옆 자리 꼬마 놈이 음흉한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 눈이 녀석을 째려보며 외쳤다.

'꺼져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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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간을 달려 대륙을 가로질렀다. 가는 내내 열차의 시속 350km의 느려빠진 속도에 내내 짜증이 났다. 아무리 후져 빠진 자기부상식이라곤 해도 이 시대에 이런 방식의 이동수단은 그만 폐기 처분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아까 대기실 옆자리 꼬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뭔가를 중얼거린다. 간혹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입모양만 내내 뭐라고 뭐라고 지껄였다.

세 번째 눈이 마주쳤을 때, 그제야 녀석이 말하는 게 뭔지 알아챘다.

'젊은이, 허리를 조심하게. 미녀와 마녀는 한 끝 차이지. 자네의 허리가 강할 땐 미녀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녀가 될 뿐이야.'

기가 차고 코가 막힌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오냐, 너 작가 해라, 작가 해!

그때 내 옆자리, 창가에 앉은 그녀가 단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곤 나와 꼬마 사이에서 벌어진 침묵의 신경전을 보더니 힘없이 웃으며 속삭였다.

'그만해요, 리테. 저 녀석, 지금 멀리 어딘가 친척집에 맡겨지러 가는 걸 거예요.'

'네?'

'저 손에 든 장난감, 나이에 한참 어울리지 않아요. 함께 동행한 사람도 엄마라고 보기엔 나이가 어리고. 아마 엄마의 여동생이나 아니면 심부름을 맡은 사람일 거예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꼬맹이, 녀석의 옷을 보니 꾀죄죄했고 왠지 철도 없어 보였다. 옆자리에 동행하는 여자도 자세히 보니 얼굴도 분위기도, 하나도 닮지 않은 것만 같았다.

아마도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은 맞는 말이리라. 복잡한 사정으로 먼 친척집이나 인정 많은 누군가에게 맡겨지러 가는 거겠지. 문득 내 어렸을 적이 생각났다.

레아가 내 표정을 보더니 쓸쓸히 끄덕거렸다. 왠지 녀석에게 미안해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다. 이 여자... 역시 천재군, 간단한 특징들을 바탕으로 이 정도의 추리라니.

흥미를 잃었다는 듯 우리에게서 고개를 돌린 꼬맹이는 마침내 옆자리의 동행한 여자를 바라보더니 긴 침묵 끝에 한 마디 던졌다.

"엄마, 아빠한테 언제 도착해? 지루해져 조금씩."

내 얼굴은 굳어진 채 레아를 향해 휙 돌아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창문 쪽을 바라본 채... 얕은 소리로 코를 골았다, 아니! 코를 고는 척했다.

자연재해 좋아하네. 아쭈, 땀까지 삐질거려, 이 여자? 나를 가지고 놀다니.

곧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고, 우리는 그곳을 그렇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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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이었다. 한가롭고 여유롭고 심심했다. 하지만 답답하진 않았다. 넓게 탁 트인 계곡과 그 안에 야릇하게 펼쳐진 작은 평야와 시골집들은 나름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둘은 아직껏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자세한 대화를 나누진 못했으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살 곳이 필요했다. 잠자고 먹고 씻을 곳, 그리고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방해받지 않을 장소가. 여기까지 오면서 그녀를 해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잠시 까먹고 있었던 나 자신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가 내게 숨긴 사실들을 낱낱이 알아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 숨기고 있는 사실들을 찾아내면서 그 와중에 그녀를 설득할 꺼리를 찾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 간신히 구한 집이에요. 겨우 사흘 만에 구한 집치곤 멋지지 않나요, 리테?"

"... 멋지군요."

"자, 그럼 우리 청소부터 시작할까요? 사람이 살지 않은지 일 년 이상은 됐다고 하니 먼지가 꽤 많이 쌓여있을 거예요."

그녀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는 빗자루를 들었다.

"잠깐만요."

"?"

"그전에, 그 전에요."

"뭘요?"

"내게 솔직히 털어놔 줘요."

"..."

"알고 있다고요, 이미. 당신 지금 누군가에게, 아니면 어떤 이들로부터 쫓기고 있는 거죠, 그렇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내 앞을 서성이더니 낡은 집 뒷 편의 쓰러지기 직전의 그네로 걸어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갔고. 잠깐 동안 그녀의 솔직함을 위해 전주곡이 흐르는 듯했다. 마침내 전주가 끝났다.

"... 맞아요, 전 지금 쫓겨 다니는 신세예요."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 펜을 하나 입에 물더니 그네에 걸터앉았다. 마치 담배라도 피우는 양.

"어떤 자들이죠?"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심학 연구소."

"네?"

"제가 일했던 그곳... 실은 무서운 곳, 아니 무서운 사람이 있어요."

"..."

"그 사람,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에요. 초천재, 심학과 과학의 다리를 놓은 자, 군사연구소 최고책임자,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권과 상관없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인물,... 그 밖에 여러 개의 이름들을 소유한 인간이죠."

"그런데요?"

"그 사람, 무서운 조직을 가지고 있어요. 공식적인 지위가 국립 심학 연구소 위원장일 뿐, 그에게 적대관계를 가진 사람은 이 나라에 없어요. 아니, 전 세계의 지도자들조차 그를 두려워하죠."

"뭐, 조직 폭력배들... 아니 군대라도 동원하는 양반인가 봐요?"

"흥, 그보다 더, 더 무서운 사람이에요."

"..."

"사람의 생명은 한낱 바퀴벌레나 들판에 핀 잡초 따위로도 여기지 않죠. 필요하면 사용하고, 필요 없으면 버려요.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그 사람, 법의 영역조차도 아니, 법 따윈 무시해버린 지 오래되었을 수도..."

"그런 사람에게 대체 왜 쫓기는 거예요? 레아, 당신 말로는 자연재해라는 명칭까지 듣고 지금껏 살아왔다면서요. 그런 인재를 연구소에 들였다면 오히려 더 긴밀한 관계를..."

"사실 제가, 뭘 하나 훔쳐 나왔거든요."

"네? 뭐라고요?"

"훔쳤다고요, 아주 소중한 뭔가를."

도둑질이라... 게다가 소중한 거라면, 국가기밀을 말하는 건가?

"그게 없으면, 그리고 내가 없으면 연구소는 더 이상 하던 연구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의 것, 그걸 제가 훔쳐 달아났죠."

"그래서?"

"하지만 잡힐까 봐 두려운 건 아니에요. 도망쳐 이곳까지 숨게 된 이유가 단지 훔쳤다는 이유만은 아니에요."

"공안청이나 공권력에 이야기해보는 건."

"그럼 전 더 심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고요."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심한 꼴? 고문이라도 당한다는 건가?

"그는 제게 결코 시켜선 안 되는 일을, 짐승만도 못한 일을 그것도 저도 모른 채 시켰어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을!"

그녀는 잠시 한 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묻지 말아 줄래요, 리테. 그 생각만 하면 해리고 전이고 뭐고, 그전에 완전히 미쳐버리고 말 것만 같아요."

"..."

"당신이 필요해요, 리테. 절 해리해 전이시켜줄 준비를 해줄 사람이... 당신이어야만 해요."

그녀의 애절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이유 따윈 상관없어졌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후회할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고 말았다.

"... 알겠어요. 우리, 이제 시작이에요."

그녀가 쓸쓸한 웃음을 지었고, 난 생각했다. 무슨 사연인지, 뭘 훔쳐 나왔는지, 그리고 어떤 놈팽이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 여자를 어떻게든 구원해 주리라고.

잠시 후, 웃는 내 얼굴에 빗자루가 날아왔다.

그래, 이왕 시작한 거 빗자루질부터 구원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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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란, 작가들의 머릿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가상의 소재와 사건들이 물리적인 <단위공간>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뜻하며, <전이>는 문자들의 조합, 즉 '글'이라는 정보를 원천으로 독자들에게 전송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하지만 보통 그렇듯, 어떤 특정한 경우에 단어의 정의를 제한하여 쓴다는 건 언어의 자율성을 배반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해리>라는 표현을 포함한 일련의 과정들 전부를 포함해, 일반적으로 <전이>라고 퉁쳐 부르곤 한다. 그렇게 쓰인 소설을 전이 소설, 혹은 이 시대의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통의 작가들은 자신이 쓴 소설을 원천으로 전 세계를 향해 감성을 <전이>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어 놓는다. 매개체의 외형은 뭐가 되든 상관없다. 카드의 모습이든, 인형의 모습이든, 심지어 작은 칩이든 뭐든.

작가는 자신의 글만을 <해리>할 수 있다. 그리고 매개체에 영구적으로 그것을 담는다, 뭘 이용해서? 그렇지, 공간 전이기를 사용해서. 그들에게 <해리>란, 자신이 그려낸 소설의 모든 것들을 충분히도 아닌,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이해 끝에서 공간 전이기는 동작한다. 과학적인 표현으로는 <특정 주파수의 지속성>이라나?

또한 모든 작가는, 자신을 해리하거나 전이할 수 없다. 두 개의 물리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 간에서만이 전이기의 공식이 구동하니까. 이러한 모든 것들, 그녀로부터 글을 띄우는 방법에 대한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과 더불어 우리에겐 적지 않은 비용과 공간이 필요했었다. 무엇보다도 이웃의 눈길들로부터, 관심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 그래서 이 집을 마련한 것이다.

공간 전이기가 차지하는 공간은 비교적 적었지만, 단순한 픽션이나 소설 따위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충분한 공간 확보는 필수적이었으며 실험체들, 즉 살아있는 동물들을 잠시 보관할만한 정도의 환경도 필요했었기 때문에 이 낡고 오래된 농장류의 집은 딱 알맞았다.

교외의 버려진 낡은 이 농가에 대한 모든 비용은 이미 그녀가 지불했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의미 없는 것들이라며 거주하던 집과 재산 일체를 처분하여 비용을 마련한 것이다.

그밖에 신형 공간 전이기와 음성 전환기, 산업용 발전기, 그리고 해리 테스트를 위한 재료와 동물들을 주문했다.

비용적으로 무능해 멋쩍은 나의 태도에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오히려 실험대상으로 사용될 동물들에게만큼은 진심으로 미안했는지 먹이를 주고 우리를 청소해주는 등의 돌봄 역할을 도맡아 했다.

청소를 끝내거나 먹이를 준 후 잠깐 동안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는 그녀의 모습은 평생의 기억이 될 것이다.

겉으론 내색할 수 없었지만 하루하루가 후회의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라는 후회스러운 생각들이 매일, 매 순간 들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녀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고 희망을 들어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라는 녀석은 이기적인 놈이었지만 그 어떠한 어리석은 고민과 후회조차도 그녀와 함께 지내는 즐거움과 기쁨에 비하면 가치가 없었고, 그래서 그녀의 곁에 있기로 작정했다. 반드시 설득할 기회를 찾으리라 다짐하면서.

병들어 죽어가는 시한부 환자와 기적을 맛본 인간 사이를 어정쩡하게 달려대고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달리고 있다는, 그래서 살아 있다는 희열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랑이란, 이렇게나 모순적이면서도 합리적인가 보다.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 복수를 포기한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함께 하자고 속삭이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모르겠다.

'그따위 복수란,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변하더라도 당신의 아픔을 가중시킬 뿐 결코 치유받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에요.'라는 말이 수없이 목구멍 위로 치솟았으나 억지로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만큼 나도 아팠기를 바랐다, 나만큼 그녀도 아팠기를 바랐고. 그녀는 자신의 과거 속 어딘가에서, 그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미래에서, 서로가 평행선처럼 달리고 또 달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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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문장을 서술하는 방식은 남들과, 기존의 내가 알고 읽어왔던 보통의 작가들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글자가 살아나서는 대화를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문자화 된 글이 나를 통해 술술 표현이 되고 어느샌가 따옴표 속의 그는, 이미 내가 되어 있곤 했다.

그런 능력이 부럽고 또 부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따질 여유가 없다. 그녀가 털어놓은 사실들에 의하면, 그녀를 쫓는 자들은 여전히 세상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으며 최근 들어 또 다른 위협의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들의 악행을 덮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도시와는 먼 이곳에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한 가지 수단이었다는 게 그녀의 말이었다. 얼마 전 길거리에서 겪은 습격도 그런 류의 것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조차도 결코 안전하지는 않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나에 대한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니 자신의 해리만 완료되고 나면, 어서 이곳을 떠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위해 남겨놓은 얼마의 돈과, 무명의 비밀계좌를 통해 해리된 그녀의 삶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도 마련해 놓았으니, 그것으로써 자신과의 인연을 용서해달라는 말에 무어라 대꾸할 수도, 화를 낼 수도, 기뻐할 수도, 심지어는 슬퍼할 수도 없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지금 이렇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으며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오로지 그 사실 하나뿐이었으니까.

그것만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아니, 압도해야만 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글을 띄운다는 것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던 부분들이 조금씩 그녀를 통해 이해되기 시작했다.

관련된 기기들의 사용법조차도 접하는 사람 나름인가 보다. 그녀는 마치 기기들의 창조주라도 되는 마냥, 뛰어난 작가라 할 지라도 절대 알 수 없을 법한 전이기의 기능들과 조작법들을 내게 설명해 주곤 했다.

어렵기만 했던 공간 전이기의 작동법에 대해 점차 익숙해져 갔고 능숙해졌다. 마침내 몇 주 후, 장비들에 대한 이해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의 불안감 역시 그만큼 커져만 갔다.

따뜻한 아침이었다. 그녀가 잠에서 먼저 깼는지 거실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게 등을 보인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글을 띄운다는 건요, 작가라는 수많은 현상들 중 하나일 뿐이에요."

"..."

"영감이든 시상이든 뭐든 간에, 덜컥 떠오르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렇게 덜컥거리는 횟수가 잦아들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문장이든 글이든 뭔가가 이미 나와있게 되더라고요."

나는 그녀의 뒤 어딘가 서서 아침 햇빛을 받아내며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초점 없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

"뭔가 틀을 잡고, 계획을 세우거나 목표를 향해 글을 쓰게 되면, 그렇게 나오는 건 '글'까지 만 인걸요, 글을 넘어서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

"풋, 제가 무슨 유서 깊은 가문의 작가같군요."

'글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더 많은 잠을 불러오나 보다.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연하게 지워져 가는 머리 향기를 잡아 내 얼굴에 뿌려주었다. 그저 노력이 최선이라 여기는 내게 있어선, 그런 일 따윈 없을 것만 같다.



또다시 한 달이 흘렀고 곧이어 다음 달이라는 시간표가 찾아왔다. 내 눈 앞의 글들은 여전히 페이퍼와 액정 화면 위에 딱 달라붙어 있다.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자신의 글은, 작가 자신만이 띄울 수 있다. 왜냐하면 글을 쓴 당사자만이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솜씨가 좋은 작가라 할 지라도 다른 이의 글을 해리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온전히,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만이 띄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글조차도. 나는, 지금껏 써온 글들에 대해 하나하나, 전체를, 분위기를, 의미를, 그 모든 것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생각이란 무척 빠른 강물 혹은 태풍 속의 바람과도 같아요."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우리가 찾는 것, 궁극적으로 알아내고자 하는 것들은요, 그 물결과 바람 속에서 서로 뒤엉킨 채 여기저기 휘날리고 있을 거예요. 그 가운데 무엇이,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지, 숨겨져 있는지, 혹은 드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요." 

호오, 호오. 

커피는 뜨거웠다. 

"보통, 생각이란 그렇게 시작해서 갑자기 어디론가 휙 날아가버리는 것이니깐,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들을 품은 채 말이죠." 

내 입술이 메모를 시작했다. 

"거센 강물, 태풍..."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바람이 이끌고 왔던 그 윤곽과 어렴풋한 느낌, 생김새만을 '느낌'이라는 형태만으로 선별해 기록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 이상은 불가능하죠. 안 그런가요, 리테?"

그녀가 말할 때의 모습은 두 가지다,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그런데 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조금 다른 것만 같아요. 아니, 달라요. 생각이라는 태풍 속에 뭐가 있는지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랄까... 수많은 가면들을 벗겨낼 수 있는 능력." 

내 혀와 목구멍이 오랜만에 진지해졌다. 

"태풍 속을 들여다본다라..." 

"정확히는, 그들은 태풍 속에 존재하는 가면들을 벗겨내요, 끊임없이.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알아챌 수 없는 가면들을." 

왠지 그녀의 표현이 섭섭하기만 했다. 이번엔 머리가 대답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당신네들 쪽 이야기일 뿐이니까. 당신은 천재고 난 보통 사람이잖아.' 

그녀는 내 말을 들었을까? 부끄럽다. 

"그렇다면 생각의 태풍 속에서 무엇이 떠 다니는지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죠? 음... 그러니까 레아의 말에 따르면, 자신만의 문체와 스타일, 그리고 많은 경험... 뭐 그런 것들인가요? 그게 풍부해야만 한다는 의미인가요?" 

그녀가 설탕을 하나 더 넣었다. 

"생각은 인간에게서 나오기는 하지만 그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가기란 인간으로선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죠." 

"그럼 어떻게 그 안을 들여다봐야만 하는 거죠? 그렇다고 태풍을 멈춰 버릴 순 없잖아요. 생각 없이 어떻게 살아요?"

"그래요. 태풍을, 생각을 멈출 수는 없겠죠. 지금껏 사람들이 해온 일들이란, 기껏해야 먹구름과 태풍을 해체하고 달달 볶아선 접시 위에 올려놓은 정도예요. 그리곤 다른 이들에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어주고는 곧 혀 위에 느껴질 맛들을 미리 설명해 줄 뿐, 소위 '길'을 만들어 온 거죠."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그 외 다른 방법도 없고.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 

퐁당. 레아가 커피잔 속 퍼져나가는 과녁을 응시하며 말했다. 

"해체하고 볶아선 포크를 쥐어주는 바로 그것, 그 행위 자체가 가면이라면?" 

"... 태풍을 보고 있는 것조차도 가면이다?" 

"그걸 이해해내는 이들을 작가, 이 시대의 소설가라고 하는 거 아닐까요. 그걸 찾아내는 것 자체가 온전히 자기만의 글을 쓰고 이해하는 일과도 같은 것일 테니까. 그들은 알고 있을 거예요. 태풍이 중요한 게 아니라, 태풍을 보고 있는 자신도 결국 그 안에서 맴도는 바람이란 걸." 

모를 말이다. 정말 어렵다. 

"보다 현실적으로 말해봐요, 레아. 대체 뭘, 어떻게 줄인단 말이에요?"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던져왔을 것이다. 어떤 이는 비참하게 굶어 죽었고, 또 어떤 이는 독배를 마셨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 모르겠다. 

"리테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엄청난 속도의 바람 덩어리라는 사실을, 진짜로 이해하고 있나요?" 

"네, 거기까지는 알겠다고요. 하지만 뭐가 날아다니는지를 알아볼 수는..." 

설탕이 또 하나 들어갔다. 

"그래요.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있을 법한' 것들을 그 알 수 없는 거센 바람 속에 미리 그려 놓아요. 매번 그렇게 하곤 하죠. 그래서 결국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착각하게 되고 마는 거니까." 

... 그건 사실이다. 난,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몰랐던 것 같다. 적어도 몇 주 전까진.

"글을 쓰고 띄워 생계를 유지하려는 평범한 작가들은, 자신의 한계와 생계를 실감할 때 세상을 원망하게 되곤 하죠. 그들은 스스로 말하길, 자신이 욕심부린 것은 없다, 남을 해친 것도 아니다, 그저 밥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등졌다며 한탄하니까..." 

갑자기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 모습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태풍의 속도를 조금만 늦춰보면 그곳에는 유명해진 가면들만이 있을 뿐이죠. 수많은 독자들과 여타 작가들로부터 존경받는 성공한 작가로서의 가면, 평론가들과 출판사로부터 극찬을 받고 러브콜이 쏟아지는 한가운데 서있는 가면들만이 버젓이 서있죠." 

그곳엔 이미 글을 쓰는 즐거움이란 없을 게 틀림없다. 

"있을 법한 가면들만을 놓아두고는 스스로 속아가며 살아가는 거죠. 그런 상태에서 쓰인 글은, 결코 떠오르지 않아요." 

"..."

"자신을 비난하거나 부추기지 말고, 실제로 뭐가 숨겨져 있는지 잘 찾아보세요, '리테'라는 가면 안에." 

순간, 난 뭔가 알 것만 같았고 문득 스스로도 왜 튀어나왔는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레아, 당신은 대체 뭘 숨겨선 도망쳐 나온 거죠?"


@
지잉, 지잉.

거대한 프로토타입 해리기와 공간 전이기가 구동하기 시작했다. 이백만 볼트의 전기적 자장이 마치 지구의 태초 모습을 구현하듯 지지직거리며 여기저기에서 이글거리며 공간을 불꽃으로 찌고 태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세 번에 걸친 해리 및 전이 프로세스 실험과는 달리 네 번째 실험은 그 어떤 연구원들의 참여도 허가되지 않았다. 아마도 살아있는 동물의 전이는 아직 인류에게는 적합지 않다는 게 위원회의 결정인 듯싶었다.

하지만 실험에 대한 단순 견학 혹은 관찰이라는 측면조차도 모조리 허가 거부가 떨어진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보안에 대한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었다. 실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인원은 극소수의 고급 엔지니어들과 심학자 몇몇, 그리고 위원장이었다.

위이잉, 위이잉.

심학적으로는 <해리>, 과학적으로는 분자 분해기가 예열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고 이내 녹색의 불이 장치 어딘가에 곳곳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간 전이기> 역시 부분적으로 녹색 점등들이 깜빡이기 시작했고 실험대상체를 품고 있는 유리관 내부 아래 쪽으로부터 무언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네 번째 실험 체인, 죽을 운명의 '양'일 것이다.

'유리관이 완벽한 방음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레아 야크 수석 연구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그녀의 앞쪽 패널에 '양'에 대한 정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그것을 상세히 읽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동물 준위의 존재에 대한 <해리>를 위해서는 해당 대상체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했다. 앞선 곤충, 식물 등의 경우라면 서식지 및 환경, 나이와 특성 등만 어느 정도 알게 되면 프로세스의 진행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생명체의 경우라면 꽤 많은 정보, 아니 식물이나 곤충과는 비교될 수 없는 정도의 엄청난 정보량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떠한 종류의 동물적인 감정을 지닌 채 주변의 환경에 생존 및 적응해왔으며, 번식 및 개체 번식 대상 즉 '새끼'에 대한 양육 경험을 포함한 식생활, 체험된 질병류, 동종 혹은 이종 간의 생존을 위한 경쟁 방식 등과 같은 수많은 정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 마리 '양'에 대한 정보는 굉장했고, 또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암컷이며 보통 평균 수명의 반 정도를 살아온 상태였다. '그녀'는 평생 단 한 번의 출산 경험이 있으며 출산 직후 걸린 일종의 암으로 인해 지금까지 약물치료로 연명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새끼는 우성 유전자를 강제적으로 이식받아 지능면으로는 동종들 중 매우 뛰어났지만 인공 교배로 태어난 관계로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그녀'는 새끼 곁을 떠나는 데 매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아... 꼭 내 이야기만 같아, 불쌍한 것 같으니라고. 그래, 이제 곧 내가 편히 쉬게 해 줄게. 새끼도 잊고 힘들고 아팠던 이 세상에서의 삶도 잊으렴...'

"네 번째 실험을 개시한다."

위원장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기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적어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이겨내야 하는 몇 번의 시련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리관은 해리와 전이의 수행자를 배려해 검은색으로 코팅되었으며 내부의 소리는 외부로 전달될 수 없었다. 실험 수행자와 피실험체의 완벽한 분리, 무수한 정보만이 전달되는 순간과 공간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조금 더 다른 방법으로, 관계로 만났다면, 그랬다면... 네가 죽을 때까지, 어느 깨끗하고 고요한 날 아침, 평화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돌봐줄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 친구야...'

짧은 침묵이 흐른 후, 그녀의 목소리가 실험실에 고요히, 그리고 성스럽게 울려 퍼졌다.

"<해리> 및 <전이>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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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그녀가 잠시 시간을 내달라며 말을 걸어왔다. 그녀와 어디를 간들 마다하겠냐는 표정으로 나는 방긋 웃어주었지만 그녀는 쓸쓸한 표정으로 고맙다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며칠 전 뜬금없던 나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씁쓸하고 깊디깊은 알 수 없을 웃음만 지었던 기억이 날 뿐이다.

도심 외곽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길가를 따라 핀 꽃들이 무척이나 많아 그런지 외롭지는 않았다. 딱히 오토무빙 기능을 켜놓을 이유는 없어 오랜만에 운전하는 기회가 생겨 내심 기분이 좋았다. 여기라면 도로마다 설치된 센서들이 없을 것만 같다.

내가 이 땅 위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기분은 왠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해 주었는지 부르지 않아 잊어버렸던 음조가 목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웃는다... 마치 '노래 정말 못 부르시네요'라는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음조는 더 이어지기를 바랐나 보다.

알 수 없을 만큼 긴 비포장 아카시아 나무길을 한 시간쯤 달렸을까? 저 멀리 거대하고 고요한 느낌의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로는 낮은 산이 하나 보였지만 건물보다는 당연히 컸고 어찌 보면 어머니가 아이를 품은 모습처럼 푸근하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뭔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려 한 건축자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기에 마음 한 켠으로부터 차분함이 풍겨 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마음 전체를 물들일 듯한 그런 차분함이. 어떤 목적과 용도인지 아직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나를 안아줄 것만 같이.

점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곳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곳, 죽은 자들이 사용했던 것을 순백색의 재로 만들어 기리며 '그것'과 한 때를 살아온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곳.

간간이 지나치는 모든 차량의 색깔이 검은 색인 이유가 이제야 이해되었다. 몇 세기가 지나도 죽음이란 여전히 인간에게는 낯선 것인가 보다. 최대한 멀리, 소리 없는 곳에 떨어진 채 웅장하고 장엄하게, 그리고 슬프도록 다리를 놓을 수밖에 없나 보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입구로 들어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보고 따라오라든가, 기다리라든가 등의 한 마디 대꾸도 없이 가버렸다. 잠시 생뚱맞은 기분에 오토 쉬핑 버튼을 누르고는 차에서 내렸다.

쉬핑 장소로 이동하는 차에서 눈을 돌리자 도시에서라면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흡연을 위한 장소가 눈 앞에 있었다. 경건한 대리석으로 만든 내 몸뚱이 만한 직사각형의 상자 안에 하얀 모래가 각지게 쌓여있다. 오래된 전통인가 보다.

담배를 한 대 물고는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검은 정장의 한 늙은 남자가 다가와 정중히 불을 부탁했지만 내게 불은 없었다. 담배만 있었다. 그는 괜찮다며 마치 오랜 친구처럼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늙은 남자 역시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이곳에 묻었나 보다.

그를 뒤로한 채 먹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나도 언젠간 이 곳에 오겠지...'

윙윙, 위이잉.

'2F-3052 묘비 앞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로부터 처음 받은 메시지다. 불도 붙지 않은 담배 한 가치를 곧 내버리고는 1층 인포데스크의 맵을 공중에 띄워 위치를 확인하니 층계로 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인포 봇에 탑승해 안내를 받아 5분 정도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자, 그녀가 곧 보였다. 꽤나 슬퍼 보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가 나를 보자 손짓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만 같다. 저기 손바닥 크기만 한 압축 테이프에 기록된 과거의 사람은 누구일까? 그녀와 닮았고... 젊어 보였다. 50대 초반 정도. 그리고 사진 속에 쓰인 글자들.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올갱이와 함께.'

의례적으로 향을 하나 태웠다. 그녀의 눈가가 붉은 것을 보니 왜 혼자 말도 없이 먼저 올라와 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눈이 떠졌다.

"우리 엄마예요."

그렇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테입의 패널에 있는 사진만 바라봤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다니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왠지 안타까워졌다. 그녀는 내게 사연을 털어놓으려는 걸까?

"... 내가 죽였어요."

"...?"

"내가 우리 엄마를 죽였다고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떨리고 있었다.

"우리 엄마인 줄 몰랐지만 내가 죽였다는 사실은 변함없어요. 하지만 엄마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갑자기 그녀의 눈이 충혈되었다.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주변 가까이에 온 것만 같다.

"그들이 분명히 말했었다고요. 순한 양 한 마리였다고, 그저 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할... 그런 운명의 온순한 양이라고, 고작 짐승이라고, 그래서 굳이 볼 필요까지는 없을 거라고..."

"..."

"그래요, 우리 엄마는 희귀한 병을 선고받아 얼마 살지 못할 운명이었고... 그들은 그저 비유를 던졌을 뿐인데."

고개를 숙인 채 빨간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싸늘한 어느 한 겨울날 내리는 처마 끝 비 같았다.

"이 멍청한 년은 제 엄마인 줄도 모르고 들떠 있었던 거죠. 살아있는 생명체의 해리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서!"

비가 그치고 소리 없이 싸늘한 바람만 불어왔다.

"우리 엄마, 우리 엄마... 고작 칩 하나에 담겨 있어요. 한 권의 책으로... 내 손으로 해리시켜버린 우리 엄마, 우리 엄마가..."

먹구름은 무릎을 꿇은 양, 더 낮게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비를 피해야 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남자는 그냥 비를 맞기로 결심했다. 잠시 후, 젖은 구름이 물러가자 이글거리는 태양이 떠 올랐다.

태양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것처럼 타올랐다. 단 한 방울의 빗방울도 다 말라버렸다. 곧이어 그것은 사그라들었고 이내 힘을 잃고 말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그런데, 그런데... 난 이제 복수할 의지도, 더 이상 어떤 방법도 생각할 수 없는 빈 껍데기가 돼 버렸어요. 그저 속죄만 기다리는 사악한 생명체일 뿐이에요."

"그, 그런..."

메말라 사라져 가는 구름이 내 위로 오더니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비가 사라지면 하늘은 비를 용서해 줄까요?'라고.

"아직 난, 엄마를 읽어 볼 용기가 없어요. 그들에게 복수하기 전까진!"

웅장함과 침울함을 뒤로한 채 온 길을 향해 되돌아 가는 차 안,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삶이라는 게 이렇게 온 길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그리고 중간, 마음에 드는 어딘가에서 내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누군가와 함께.

그리고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연구소에서 훔쳐 나온 거... 우리 엄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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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자들이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음과 모음이 너 나할 것 없이 살아있는 냥, 나선형으로 하나의 축을 따라 위로 상승하고 아래로 하강하기를 반복한다. 뫼비우스의 띄처럼도 보이고, 펜로지의 계단처럼도 보인다. 전이기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양은 상당했지만 나름 안정적이었다.

이 상태에서 전송 버튼을 누른다면, 이 시대의 작가가 중앙 퍼블리싱 관리센터에 한 명 더 등록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뭐가 그리 서러웠고 기뻤는지, 아니면 슬펐을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염없이 울었다. 참 아름다웠다. 나의 마음은 희열과 절망이라는 세상을 오가고 있었건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정말 나쁜 그녀, 그리고 못 돼먹은 나 자신. 이 모든 게 이 순간만큼은 아름다웠다.

누군가 그랬지, 사랑을 하게 되면 단 한 사람만 사랑할 수는 없다고. 그리고 인간은 사랑이라는 말을 타락시켜버렸다고.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런 게 타락이라면 타락할 수 있는 만큼 타락하고 싶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아있는 생명체의 해리가 첫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첫 번째 실험체는 생쥐였다. 실험실에서 사용되는 일회용 생명이었건만 그녀는 해리 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무릎을 꿇은 채 기도드렸다. 자신을 용서해달라며, 다음 생이 있다면 어떻게든 이 빚을 갚겠다며 말이다.

그리고 내게도 감사해했다. 최대한 적은 횟수의 생명체 실험 성공 후 자신이 해리되기를 소원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그녀를 위해 해리에 실패해야 하는 걸까, 성공해야 하는 걸까. 다음번의 성공은 그녀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그것도 내 손으로 그녀를, 그녀를 보내주어야 하니까.

두 번째 해리 대상은 새였다. 하늘을 나는 새, 그것도 철새였다.

"해리되기 전에 마음껏 하늘을 날아보고 싶어요. 그것도 멀리, 아주 멀리요. 멀리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겠죠. 그거 아세요, 사람들이 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지."

"음, 글쎄요. 습관 아닐까요? 전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아니에요, 신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래요."

"아하하, 그렇군요. 신은 하늘에 있군요."

오랜만에 웃음이 찾아왔다.

"신이 왜 하늘에 있는지 알아요?"

"글쎄요, 신이 있다면... 땅 속에 있는 것보다는 나아서?"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인간이란 게 더 아름답게만 보이기 때문이래요."

그렇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사실이다. 가까이 있을수록 실망만 하게 되고 마침내 피를 보고야 마는 게 인간이니까. 난 어떤 인간으로 살아온 걸까? 가까이 있을수록 불편한 사람일까?

"또... 너무 가까이 있게 되면 끼어들게 되기 때문이래요. 마치 우리 인간이 작은 벌레들 간의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반드시 한쪽 편을 들게 되는 것처럼."

그럴듯하다. 종교마다 특색은 다르지만, 신학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신을 해석하는 마지막 단계는 <방관자>라고들 하지 않는가. <방관자>,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시간과 무관하게 그저 지켜보는 자. 아무리 피조물들의 원망을 사고 산들, 결코 정의라고 불리는 것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종교에서 말하는 정의, 승리란 전부다 전쟁에서 이기거나 세력 확장에 성공한 이들의 합리화일 뿐이니까.

"하늘을 날며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고 싶어요.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으면 좋겠어요."

화가 났다.

"아니! 진짜 신이라면 땅에 있을 거라고.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하늘에 있는 신은 고작 자신의 만족을 위해 도망친 순간 더 이상 신이 아니기 때문이야! 진짜 신이라면, 다툼과 전쟁을 통해 뿌려진 모든 이들의 피와 눈물을 전부 다 받아주었을 테니까. 자신의 몸 전부를 바쳐서라도 그걸 다 받아주려면, 반드시 땅에 있어야만 했을 거라고요! 안 그래요?"

아차, 내 말투와 목소리는 선을 넘어 흥분하고 있었다. 그녀가 움츠러들었다.

"..."

"아, 미안해요. 너무 진지했나봐요."

이런 등신, 등신, 또 등신! 그녀는 그저 땅 위를 바라본 채 표정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삐삑, 삐삑.

"무, 무슨 소리죠?"

레아는 그녀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농장 주위에 펼쳐놓은 매핑 공간지를 허공에 펼쳤다. 농장 주위에 펼쳐 놓은 소형 모빌 드론들이 외부로부터의 접근에 반응한 것이다. 뭔가 수상쩍은 듯 보이는 검은색으로 창문을 짙게 코팅한 차량 두 대가 꽤 거리를 두고는 전속력으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요격용 드론들로 보이는 물체들 역시 공중에 뜬 채 먼 곳으로부터 접근 중이었다. 근처에 군사 작전 등에 대한 사전 정보는 없었다.

그녀의 손이 익숙한 동작으로 허공을 휘젓자 농장 울타리 곳곳에서 숨겨져 있던 무기들이 땅 위로 솟구쳐 올랐다. 맙소사, 무슨 상황인 거지? 저것들은 대체 언제부터 설치해 둔거야?

"서둘러요, 그들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 삼십 분 후면 들이닥칠 거예요. 탈출시간은 최대한 무인포들이 확보해 주겠지만 막상 교전이 시작되고 나면 저들의 화력을 막을 재간이 없어요. 당신이 탈출할 경로를 설명해 줄게요. 어서요!"

"저들이 누구냐고요!"

"... 제 외할아버지예요. 엄마와 저랑, 악연인 남자죠."

당황스럽다. 여태껏 복수를 마음먹었던 대상이 외할아버지? 그럼 자신의 딸을 손녀의 손으로 해리시켜버린 장본인이... 외할아버지라고?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저 남자가 저를 속이고 엄마를 죽였어요. 과학자로서는 위대한 인물일지 몰라도 제겐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녀가 탈출 방법과 경로를 설명하는 동안 내 귀는 닫혀버렸다. 다시 먹구름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천둥 번개를 동반했으며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밀려온 것이다.

천둥 번개 소리는 귀를 멀게 했고 따뜻했던 시절의 기억에 쓸데없는 붓자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던 동화 같은 그림들 위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한 회색 계열의 붓들이 휘저어졌고 흰 종이 위에는 엉망진창스런 번짐이 퍼져나갔다. 물을 너무 많이 썼을까?

종이는 물에 젖어 찢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붓가를 붙잡고 있던 금속으로 된 붙잡이가 종이 여기저기에 흠집을 내기 시작했다.

이번 그림은 망쳤다고 생각한 순간, 그림 위로 춤을 추는 붓들이 보였다. 나무로 된 그림 받이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함께 그림을 그리던 사람은 조금이라도 싸게 팔 생각인지 춤추는 붓들을 잡아 부러뜨리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떻게든 내게 손해를 덜 보게 하고 싶은 마음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던 시절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일까?

"알겠죠? 탈출 캡슐은 초속 50m로 최대 10km밖까지 당신을 던져줄 거예요. 내부에 차있는 액체형 실드가 당신을 보호해줄 테니 잠시동안 울렁증만 참으면 돼요. 당신의 계좌에는 이미 손을 써놓았으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그녀가 해리 장치와 전이기의 전원 버튼을 누르며 기계를 다시 구동시켰다.

"마지막으로, 내게 당장 엄마를 전이시켜줘요."

먹구름이 싹 쓸려나갔다.

"그리고, 그리고... 이 총으로 내 가슴을 쏴 줘요. 내 인생을 여기서 끝내줘요, 마지막 부탁이에요!"

폭풍우가, 세상에 없었던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쳐 왔다.

한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뭐라고 대답한 것 같다. 아니, 모르겠다.

그때 바깥 쪽 여기저기서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집의 한쪽이 부서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강한 비바람 속에 나 자신이 한 말도, 행동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 그림자가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해왔다.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과 얼굴, 아니 가면이었다. 언젠가 어딘가의 길거리에서 조우했던 정장 남자의 냄새가 풍겨 났지만 그로부터 새로운 체취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것이 더 이상 아닌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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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챙! 콰콰쾅!

리테가 곁에 있던 금속제 의자를 들어 가면을 쓴 남자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냈지만 뒤로 튕겨나가 버렸던 것이다. 벽에 쑤셔 박힌 리테는 뭔가 알 수 없는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 이건, 인간이 아니다!'

"쿨럭, 쿨럭... 으윽. 레, 레아! 어서 피해!"

하지만 레아 역시 방금 전의 급습으로 인해 어딘가로 튕겨나가 버린 상황이었다. 리테는 죽을힘을 다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당한다며 그마저 살아있을지도 모를 레아 역시 위험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재빠른 동작으로 주위를 돌아보다 개조한 층간 탈출용 금속봉이 눈에 들어왔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가면의 속도는 그를 능가했고 그의 복부를 걷어차 천정 벽으로 올려쳤다가는 떨어지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으로 무자비하게 내리꽂았다.

우지직.

"크헉!"

층 바닥을 향해 목을 잡힌 채 내리꽂힌 리테의 눈이 감기고 말았다. 미처 그는, 전이된 전투사로서의 본능이 깨어날 기회를 잃고만 것이다.

"헤, 이거... 진짜... 굉... 장한... 걸."

가면 아래로 흐르는 침을 연신 닦아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네 놈, 엠마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넌 죽었어, 이 새끼야."

여전히 리테의 의식은 돌아올 줄 몰랐고 가면 속의 남자는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흐,... 꿀꺽, 맛있겠군. 영감탱이, 잘 봐 두라고. 실시간으로 전송 중이니 내 실력을 잘 봐 두라고! 당신이 구해준 칩이 어떤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기분만큼은 최고라고, 최고! 흐흐흐..."

그는 시대의 과학이 낳은 괴물,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각 종의 포악함과 굶주림이라는 본능만을 추려낸,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괴생명체를 산 채로 전이받은 상태였다.

두 눈은 뻘겋게 달아오른 채였고 가면 속의 남자는 오로지 복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 누구를 위한지는 이미 잊어버린 듯했다.

그가 리테의 숨통을 끊기 위해 공간을 도약했을 때, 리테의 뒷골 바로 위로 무릎을 이용한 강력한 킥을 찍어 내렸을 때, 아슬아슬한 시간차로 뭔가로부터의 강력한 충격이 뒤쪽으로부터 가해져 왔다.

콰콰쾅!

가면의 남자는 시멘트로 된 벽을 뚫고는 반대쪽으로 날아가버렸다. 그가 사라진 벽의 구멍 주변에는 그의 팔과 신체 일부로 생각되는 어떤 것들이 너덜거리는 넝마처럼 걸려있을 뿐이었다.

단 한번, 단 한 번의 일격이 그의 생명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때 리테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우욱, 커헉! 으..."

깨어난 리테의 두 눈은 아까의 상황과는 달랐다. 전장을 누비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장군의 그것이었다.

상황을 재빨리 판단하며 일어서서는 뒤를 향해 잰걸음을 쟀다. 폭발로 인한 먼지 속에서 조금 전 확인한 탈출 봉의 위치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연이어 강력한 뭔가가 가면의 남자가 있었던 방향으로부터 다시금 돌진해왔다. 리테는 숨을 순간 멈추곤 양 손을 붙여 가슴에 뭔가를 모으는 시늉을 했고 강력한 충격을 가슴 한가운데 정면으로 받아냈다.

쾅!

충격을 준 그것은 이내 나무가 부러지듯 우드득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으윽! 후... 이런이런."

"쿠, 쿨럭... 너, 넌 대체 누..."

"젠장, 이거 참 대단하구만. 소문은 들었지만 저기 처박혀있는 년, 보통이 아니군. 대체 뭘 전이시켜놓은 거야, 이 병신한테?"

"?"

"그냥 편히 쉬어, 내 팔과 주먹도 다 부서져버렸거든. 빨리 끝내주지."

"위, 위원장, 위원장이 보낸 놈이냐?"

뭔가 공격을 준비하던 그는 잠시 공격을 멈추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리테를 바라보았다.

"호... 기억을 못 하는 군?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이대로 죽여버려도 그립진 않겠군. 흐흐흐."

"무, 무슨 소리냐!"

'그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어, 왜 눈물이 흐르지?'

하지만 다음번 공격은 더 무자비할 뿐이었다. 그의 무지막지한 군홧발이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리테는 다시 한번 가슴에 힘을 주려다 순간 군홧발 밑에 장착된 짧은 칼날들을 보곤 옆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굴렸다.

퍼퍽, 으직.

멀쩡한 시멘트 벽에 구멍을 낸 그의 다리와 발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썅!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 구만."

리테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에 혼란스러웠지만 더 이상 피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놈이 발을 빼내는 틈을 타 재빨리 금속 봉의 연결고리를 손날로 쳐내 분리시키고는 손에 주워 들었다.

붕붕, 붕붕.

엄청난 바람과 함께 금속봉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뭐야? 그건 뭐하는 거지, 크크. 무협 영화라도 흉내 내는 건가? 이딴 놈따위에게 동생을 팔아먹다니, 크읏..."

"네 놈과 나!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

리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군홧발이 날카로운 칼날들을 머금은 채 다시 리테를 향했다. 하지만 리테는 봉을 돌리며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는 몇 발자국 뒤로 빠지며 순간 봉을 땅에 꽂고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멈췄다.

"크흐흐, 웃기는 구만. 이제 죽어랏!"

"네 죄를 뉘우치거라!"

리테의 말이 끝나기도 전, 놈의 온몸이 몇 바퀴 회전하며 군화의 칼날들을 정면으로 날렸다. 순간, 리테의 몸이 한 발 앞으로 내디뎌지며 어느새 땅에 꽂혀있던 금속봉이 그의 손을 떠나 놈의 몸 한가운데로 날았다.

푸우욱.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일촉즉발로 날아간 금속봉은 군화 바닥과 꼽힌 칼날들을 부수고 꿰뚫으며 거기서 멈추지 않은 채 앞으로 더 나아가다 결국 남자의 가슴을 관통해 버렸다. 그리고는 수 미터를 더 날아 벽에 꽂아 버렸다.

으지직, 콰콰쾅!

"으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커헉, 쿠, 쿨럭."

리테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고 때마침 레아가 깨어났다. 동시에 봉에 꽂혀 숨이 끊어진 정체불명의 남자가 처음 나타났던 무너진 벽의 방향으로부터 검은색의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레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기고 기어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정신을 잃어버린 리테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야 찾았군, 레아 야크."

레아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간신히 리테의 곁에 붙어 목소리의 방향을 돌아봤을 때, 그곳엔 위원장,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리테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녀를 위해 그에게 복수를 집행할 수 있는 자는 리테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앞에 선 위원장은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의 가슴은 두려움과 분노로 꽉 차 있었지만 리테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역전시켜볼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때, 위원장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에리이즈 페르소나!'............... [주: 가면을 해제하라.]

"으아악, 으아아악!"

정신을 잃었던 리테가 갑자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채 꽥꽥 거리며 괴로워하기 시작했고, 이내 고개를 땅에 처박고는 깡통이 우겨지듯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리, 리테!"

그녀가 황급히 그를 붙잡고는 얼굴을 숙여 상태를 살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얼굴은 '리테'였지만 그는 더 이상 리테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커헉, 쿠, 쿨럭. 우욱... 휴, 죽겠군..."

위원장이 손에 검은 장갑을 끼며 말을 내뱉었다.

"기억나나?"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침묵을 깼다.

"... 데려 왔수다, 당신이 원했던 여자... 손녀딸이었군."

그 이상 어떤 대답도 하기 싫다는 어투였다. 그리고는 레아,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내 몸에서 손 떼."

"리, 리테..., 리테..., 왜, 왜 그래요?"

창백한 표정으로 욕지기를 간신히 참고 있는 듯한 남자가 두 손을 무릎에 짚은 채 땅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그 자는 그저, '책'일뿐이야. 살아있을 땐 멍청하기 그지없는 작가 지망생이었겠지만 지금은 색다른 존재인 거지. 미련 따윈 어서 버려, 아가씨. 크헉, 쿨럭."

그녀는 도저히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얼굴만은 여태껏 그녀가 알고 있던 '리테'였기 때문이다.

곧 모순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녀의 가슴속에선 뜨겁고 답답한 무엇이 목구멍을 찢을 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흐, 흐윽. 흑, 우... 으아아악!"

오열하며 한참을 괴로워하던 그녀는 뭔가를 결심했는지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에 꽉 쥐었다. 위원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아직도 남은 게 있었나, 레아 야크?"

레아의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위원장은 뭔가를 이해했다는 듯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거, 바로 그거였군. 네 어미... 아직도 전이받지 않았던 게냐?"

"주, 죽여버리겠어."

"크 헛헛헛, 과연... 자연재해답군."

그때 리테의 얼굴을 한 사내가 옆에서 위원장을 향해 힘겹게 중얼거렸다.

"자, 이제 내 일은 끝났으니..."

"흥, 자넨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네. 다행히도 칩을 찾은 거 같거든."

그러더니 다시금 뭔가를 중얼거렸다.

"익스코리오, 코리움!"............... [주: 가죽을 벗겨라.]

그러자 한 때 리테였던 남자는 가슴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더니 몸을 몇 번 부르르 떨어댔다. 마치 하나의 땅덩이, 혹은 신앙을 두고선 이종 민족간에 치열한 전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끅, 끄윽."

그는 곧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했다. 숨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그녀가 그의 앞에 엎어져서는 목이 메인 채 울기 시작했다.

"리, 리테. 리테! 눈을 떠, 눈을 뜨라고요... 안돼, 안돼, 이렇겐 안 된다고! 어서 깨어 나라고요... 어서... 어서!"

위원장은 그녀와 두 눈을 부릅뜬 채 비참하게 쓰러진 리테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굵고 비장한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자, 그만하고 레아 야크, 이제 목걸이를 이리 내라."

리테를 안고 오열하던 그녀는 눈물로 범벅된 채 위원장, 그녀의 외할아버지를 쏘아보며 외쳤다.

"왜, 왜, 대체 왜! 왜 엄마를 해친 거지? 대체 왜! 그것도 내 손으로 그런 끔찍한 짓을 시킨 거냐고!"

"..."

"다, 당신은 악마야, 악마... 절대, 절대로 용서 못해."

그녀의 얼굴이 다시 품에 안은 리테를 향했다.

"흑... 리테, 리테... 정말 미안해요. 정말로... 끄윽..."

"레아, 레아... 레아야..."

그때 어디선가 친근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 아니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그녀의 눈이 돌아갔을 때 그녀가 본 것을 그녀 자신조차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찾는 목소리의 근원지는 위원장의 입과 얼굴이었지만, 그건 방금 전까지의 위원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양 볼 위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두 손을 들어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으... 으... 사, 살려줘... 레, 레아... 도, 도망 치거...'

그러더니 다시금 그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가는 잠시 후 뜨여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원래의 위원장, 비정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양 볼 위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휴... 힘들군, 힘들어. 보았나, 레아 야크?"

레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바로 내 정체다. 네 외할아비가 저지른 죄악의 결정체, 그게 바로 나인 게지."

"..."

"여섯, 아니...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무시했다네, 모든 이단들의 경고조차도. 그 결과 인격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아냐! 그럴 리 없어!"

"크큿, 어리석은 계집애 같으니라고."

"당신은, 당신은! 그저 악마일 뿐이야!"

"전이받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인격들 중 하나로부터 시작해 인격들 간의 장벽이 붕괴되기 시작했던 게지. 살아있는 자들의 의식 덩어리가 한 개의 몸뚱아리 안에서 서로 미쳐선 날뛰기 시작한 거라고."

"마, 말도 안 돼...흑."

"최초에는 원래의 인격과 기억체만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쉬울 순 없는 거 아니겠나."

그가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기 위해 허리춤으로 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인격 붕괴>라... 흥, 웃기는 이론일 뿐이지. 생각해 보게나, 어느 날 서로 다른 언어, 다른 얼굴색, 이질적 문화, 그리고 자신들의 유일신만을 굳게 믿는 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나의 좁은 섬에 갇혀버린 게야.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나?"

그가 꺼내 든 것은 총이었다. 잠깐 동안 총구가 하늘로 향했다.

철컥.

"그래, 그렇지. 너도 아주 잘 알 게야. 서로를 양보해줄 리 없지, 이해할 리는 더더욱 없는 거라고. 남은 건 학살뿐이야, 학살! 나와 같은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나와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 깡그리 말살해버리고 마는 게지. 단 하나만 남을 때까지!"

"서, 설마...?"

"그렇다. 지금 이 몸뚱이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겠나? 마지막으로 남은 네 외할아비가 죽어가고 있다. 물론, 정신적인 측면이겠지만.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무슨 이유에서인지 끝까지 남아선 버둥버둥거리더군. 아까 보았겠지만 말이야."

그가 총이 장전된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사실 그가 방법을 찾아냈긴 했었지, 무슨 방법이냐고? 크흐흣, 물론 지금 네가 눈 앞에 보고 있는 이 '나'를, 살아있는 채 전이받은 이 '나'라는 기억체를, 은밀히 제거할 방법 말이야. 하지만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네. 왜냐고, 아가씨?"

그녀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맞았어, 동종의 기억을 가진 자를 산 채로 전이받는 거. 다시 말해, 가족 중 하나를 산 채로 불태워버리는 거 말이야, 크하하하. 이거 참 비극 중 비극 아닌가!"

"아악! 이, 이 악마 같은...!"

"내가 저질러줬어, 대신 말이지. 그를 대신해 꿈을 이뤄준 거라고, 넌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였고."

그가 총을 들어 그녀를 겨누었다.

"단, 그걸 내가 전이받을 일은 없을 게다, 앞으로도 결코!"

"죽어, 죽어! 죽어버렷!"

"흐흐, 네 외할아비가 이 몸뚱이 안에서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실수의 씨앗을 없애는 게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다. 자연재해인 널, 반드시 내 두 눈 앞에서 제거해야만 했지. 네 앞에 있는 놈이 꽤 잘 해준 덕에 괜찮은 결말이 된 것 같지 않은가?"

그녀의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칩은 곧 부서질 운명이다, 마찬가지로 너도! 그러고 나면 난 새로운 삶을, 꽤 멋진 자리에서 누리게 되는 게지."

탕!

"꺄악!"

"크, 크악!"

그녀의 가슴팍으로 날아온 총알은 그녀의 몸에 닿지 못했다. 누군가의 어깻죽지를 부수며 박혀 들고 말았다.

위잉, 위잉, 위잉.

해리기와 전이기의 완전한 가동이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이기의 공간이 조금씩 부풀어올랐다 줄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응? 호오... 지독한 놈이군. 하긴, 제정신이었을 때도 반쯤 미친놈이긴 했지."

리테가 깨어난 것이다. 그가 등을 돌려 그녀의 몸을 감싸 앉았고 총알은 그의 왼쪽 어깨를 부수며 빨간 물감을 흩뿌려 놓았다.

"어차피, 방해자도 없고 모든 공격기와 드론들은 내 손 안에서 동작하니, 너희들의 마지막 순간을 조금이나마 즐겨볼까?"

탕, 탕, 탕.

"크아악."

"꺄아악! 그만, 그만! 리테!"

총알이 레아를 감싼 남자의 한쪽 어깨를 완전히 박살 내며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크하하핫, 이거이거 꽤 재미있군. 이런 게 사는 맛이지, 너희들의 고통은 잘 간수해 두도록 하마."

리테였던 남자가 레아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레, 레아...'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리테였다, 더 이상 아까의 차가운 남자가 아니었다. 짧은 시간, 두 사람은 말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죽거라, 둘 다!"

위원장의 총이 그들의 가슴께를 향한 순간, 리테의 오른 팔이 레아의 허리를 힘껏 들어 전이기 속으로 내던졌다. 이내 그의 손과 레아의 손이 스치는 듯했고 총성이 울려퍼졌다.

타탕!

"컥!"

등 한가운데 총을 맞은 리테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고 위원장은 당황했다.

"뭘 하려는 게야!"

위원장이 팔을 돌려 전이기의 공간에 던져진 레아를 향해 다시 총을 발사하려는 순간, 쓰러졌던 리테의 몸이 튀어올라 위원장을 밀쳐냈다.

우당탕.

"으윽."

그리고는 손에 쥔 칩을 재빨리 공간 전이기의 슬롯에 박아 넣었고 동시에 위원장은 쓰러진 채 총구를 들어 공중에 떠있는 레아를 향해 당겨댔다.

탕탕!

마지막 힘을 다해 튕겨오른 리테의 몸이 그 앞을 가로막았고 총알은 그의 가슴을 관통해서는 기어이 레아의 심장을 꿰뚫고 말았다. 그 역시 전이 공간으로 쓰러진 채 레아의 몸과 함께 공중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억을 전이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레아와 리테는 죽어가며 서로에 대한 해리 프로세스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해리와 전이가 두 살아있는 생명체 간에 상호 교환적으로 이루어지며 외부로부터의 전이조차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철컥, 철컥.

총알이 다 소진된 것을 알게 된 위원장은 신경질 적으로 농장 밖에 대기하던 공격형 모빌 드론들을 호출했지만, 두 사람의 해리 프로세스가 더 빨랐고 그들의 몸은 서서히 허공으로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가장 마지막으로 해리되고 났을 때 비로소 공간 전이기는 멈추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를 끝까지 지켜본 위원장은 레아의 어머니가 담긴 칩과 그들이 담긴 칩 모두를 슬롯에서 빼내어 땅바닥에 내던진 후, 구둣발로 짓눌러 부수어 버렸다. 그의 수하들이 도착한 것은 그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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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님, 한동안 피해 계셔야만 될 것 같습니다."

수하들 중 하나가 건넨 말을 무시한 채, 검은 정장의 늙은 남자는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낮고 굵은 목소리로 비참하게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녀석, 제 어미를 단 한 번만이라도 읽어만 봤다면... 그랬다면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곁에 서있던 안경을 쓴 남자가 다시금 재촉해왔다.

"그나저나, 두 개의 생명체가 동시에 해리된 경우는 처음이군요. 이번 건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숨어계셔야만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공안청이나 중앙 퍼블리싱 기관이 진상조사에 착수라도 하게 되면 문제가 커질지도 모릅니다."

위원장은 하늘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더니 중얼거렸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 점에 대해서는 유감이구나, 레아. 부디 함께 전이한 그 남자와, 책 속에서만이라도 행복하려무나. 네 엄마가 내게 자신의 해리를 부탁했을 때의 마음 또한 이랬겠지. 그것도 세계에 몇 명 되지 않는 생명체 해리가 가능한 자신의 딸에게 라면, 당연히 행복해할 거라며 말이야. 네 어미는 네가, 자신의 책을 꼭 읽어보길 그렇게나 원했었는데... 미안하구나, 미안해."

그들은 전이되어 사라져 버린 두 사람의 흔적을 뒤로한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에필로그>

두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어적 선율에 맞춰 도심의 위로 풍경이 흘러가듯 지나간다. 멋진 석양, 아름다운 노을, 저녁을 마무리하는 새들의 힘겨운 날갯짓, 그리고 소녀의 목소리.

"죽음이란 게 뭔지 알아요? 연속성, 기억의 연속성이 끊기는 거예요. 기억을 쥐고 있는 주인공과 그가 지녀온 내용물들 모두가, 그 모든 것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거죠. 그게 죽음이라는 것의 정체예요. 실은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아요. 아픈 건 육체 쪽 사정일 뿐이죠."

한 마리 새의 시선은 빌딩 위를 지나 알록달록 모여있는 지붕 위를 날아, 어디론가 향해 날아가고 있다. 시선이 멈출 무렵, 어딘가 단조롭지만 규칙적인 구조물들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낙하한다. 그곳엔 사람들이 모여있다, 웅성 거린다, 혼란스럽다.

"연속되는 것들은 반드시 괴롭죠, 잊고 싶지가 않거든요. 반드시 손에 꽉 쥐어야만 살맛이 나니까요. 착 달라붙어선 생명력을 쪽쪽 빨아 처먹는 거머리처럼... 그럼 어떻게 될까요?... 당연하죠, 생기가 빠지고 고약하게 변하고 마는 거라고요, 마치 동화 속 구두쇠처럼."


한 젊은 청년이 음식이 담긴 작은 비닐봉지를 손에 쥔 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있다. 그의 머리 뒤로 흥건한 핏물이 보인다.


"다 포기하든, 포기하지 않든, 그런 건 상관없어요. 포기라는 단어를 쓴 순간, 그건 이미 집착하고 매달리고 있는 거라니까요. 행복하게 살겠다는 사람 치고 행복한 사람 봤어요? 도덕적으로 살자는 인간 치고, 도덕적인 인간 봤나요? 전부다, 하나부터 열까지 깡그리 거짓말인 거라고요."


몇몇 사람들이 경찰에 연락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딘가로 분주히 연락을 한다. 어떤 이는 소리를 지르며 주변에 도움을 청한다.


"사랑이라, 사랑이라... 사랑은 인간 따위한텐 속해 있지 않아요. 그건 오롯이 바깥쪽에서만 오는 거예요. 사랑이란 게 만약 사람 마음속 어딘가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요, 그걸 놓치고 싶은 인간이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세상은 사랑의 가짜 파편 조각들로만 가득 차 있는 걸 모르겠어요?"


쓰러진 청년은 어떤 꿈에 잠겨 있는 듯 괴롭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라도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문득, 청년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온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뭐... 가요?

"나, 알 것만 같아요. 이제 막 끝났거든요."

"뭐가 끝났는데요? 전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다고요. 아주, 아주 많이요."

"... 긴 소설, 아주 긴 소설이, 방금 막 끝났어요."

"훗, 싱겁긴..."


어디선가 검은 트럭이 달려와 사고 현장을 둘러싸고는 그것의 뱃속으로부터 흰 복장의 사내들이 달려 나왔고 사람들은 뒤로 물러선다.


"나, 이제 나답게, 그러니까... 나처럼 산다는 게 뭔지 알 것만 같아요. 솔직해진 거 같달까요. 나, 이제야 가면을 벗어버린 것 같아요."

소녀의 미소가 들린다.


검은 복장의 사내들이 자기네들만의 언어와 전파로 소통한다.

"실험체, 넘버 9.1-3rd 확보. 지금 본부로 이송합니다."

"그가 남긴 증명은 확보했나?"

"... 찾았습니다. 컨펌 완료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검은 복장의 무리들은 깨끗이, 언제 그랬냐는 듯 현장을 정리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의식 없는 청년의 몸을 회수해 트럭을 타곤 사라져 간다.


가냘픈 청년의 목소리는 담담히, 그리고 은은히 제 목소리를 낸다.

"당신을 만나 알게 되었어요. 세상엔 더 많은 사랑이, 아니 온전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소녀의 목소리가 대답한다.

"... 저도요."

"우리 함께, 함께 더 있을 수는 없을까요, 이곳에서."

"아니, 우린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항상, 어디서나, 함께일 거예요."

"정말... 요?"

"풋... 그렇게 말하는 당신 얼굴, 정말이지... 애기 같다니깐."


...


삐.................................. 찰칵.


...

 

 

 


"지금까지 당신은 남자 주인공의 삶을 전이받았습니다. 선택적으로 여자 주인공의 삶을 구독할 수 있습니다. 전이받으시겠습니까?"
"Re-read it as Another Life?" (Y/N)_Y"

"기억을 전이중입니다. 동기화합니다... 기다리십시오."
"Teletyping And Synchronizing... Wait, Please."


...


내 눈 앞에 그가 서있다. 그는... , 그는 나의 소원을 들어줄 사람이다. 나는 이미 그를.

"이 보세요, 저기요..."

그가 나를 돌아본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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