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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화개문(丹花開門)

2018.11.19 16:1211.19

 

 

 

1. 일섬(一閃)

 

왜 죽으려 하는 가?”

어두컴컴한 동굴 안, 커다란 반석 위에 걸터앉은 여인의 차림은 어둠에도 눈에 띄는 순백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깨에 기댄 칼집을 어루만지며,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후회할 짓을.”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복면의 사내들, 각기 주 무기들을 들고 서 있는 여섯 명의 복면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칼집에 손을 얹었다. 순간 긴장하며 복면인들이 거리를 좁혔다. 붕붕 돌아가는 추를 바라보며, 여인이 피식 웃었다.

가려 봤자 결국은 정파인 이지. 꾸미려는 게 유치하기만 하구나. 사파는 서로 죽고 죽이는 게 당연한가?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오산이야. 무엇을 바라는 거지? 나를 죽인다고 해서, 너희들이 얻는 이득이 있나?”

여인이 엄지손가락을 튕겼다. 옥으로 장식 된 칼집이 붕 하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빙글 돌며 떨어지는 칼집에 맞춰, 매서운 기세로 사슬에 달린 추가 여인에게로 향했다. !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검 날이 빛을 내며 울었다.

아 그렇군. 천공의 사주인가?”

알 필요 없다!”

복면인 중 하나가 악에 받쳐 고함을 내질렀다. 고개를 끄덕인 여인이 주춤 하고 몸을 일으켰다. 왼 손에 쥔 검을 들고 여인이 몇 번, 허공에 휘둘렀다. 팔랑 거리며 휘는 날을 보건데 날이 잘 휘는 연검이 틀림없었다. 적막이 흘렀다. 상체를 낮게 숙이고 자세를 잡은 여인이, 오른 손으로 검 날을 집고 살짝 한 숨을 내쉬었다.

 

“[홍렬십삼초]의 이름을 아는 자가 여기 아무도 없나.”

 

여인이 검을 놓았다.

바닥에 떨어져야 할 검은, 그대로 공중에 떠 있었다.

어검이다!” 복면인 중 하나의 외침에 여인이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누가? 그 어느 누가 어검의 경지에 다다랐는가? 내 눈으로 보지 못 한 이상 믿을 수 없지. 검을 공중에서 조종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이 홍렬십삼초는 다르지. 이건 검의 고정 된 움직임을 해방하기 위해, 단지 한 곳에 내공을 집중해서 더 자유롭게 풀어주는 거야. 이러면 검 그자체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날뛰거든.”

여인의 왼 손이 움직였다. 분명 여인은 검을 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바짝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검은 여인의 손바닥 바로 밑에서, 파르르 날을 떨며 복면인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여인이 손바닥을 비스듬히 틀었다. 검 날 또한, 비스듬히 꺾여 사선을 찔렀다.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여인도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날이 선 검의 끝으로 향했다. 시선이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사슬에 달린 추가 여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여인의 왼 손이 어깨 쪽으로 내려왔다. ! 검에 부딪힌 추가 튕겨 나갔다. 동시에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여인을 향해 뛰어 올랐다. 넷이 동서남북을 모두 압박하고 다른 하나가 위에서 마무리 짓는 밀착 공격, 협공이었다. 달아날 공간이란 애초에 없다. 기세가 등등한 그들이 매서운 기세로 검을 찔러 넣었다. 그대로 있다 간 꼬치가 될 판이다. 공중에서 찍어 내리는 검과, 네 방향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본 여인이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사파는 여기서 죽어라!”

우아하게, 춤을 추듯, 여인이 왼 팔을 올리고 양 다리를 찢으며 몸을 아래로 내렸다. 쭉 뻗어 올린 왼 손바닥위에 걸친 검이 살짝 흔들리더니, 그대로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며 전 방위 회전을 시작했다. 달려들던 복면인들의 손목들이 검이 쥐어진 채로 썰려나갔다. “끄아악!” 피가 튀고, 살점이 튄다. 넷은 피를 뿌리며 널브러진다. 여인이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손바닥에서 매섭게 돌던 검이 주르르 굴러 굽힌 손끝으로 이동했다. 검지와 중지를 붙여 여인이 살짝 굽혔다 튕겼다. 검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어억.”

그대로 위에서 내려오던 복면인의 목을 꿰뚫어 버리고, 핏방울을 흩날리며 위로 솟구쳤다.

여인이 도약하며 검을 잡았다. 시선은 아까부터 계속 추만 던지며 경계하던, 유일하게 협공에 끼지 않은 남은 하나의 복면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뿐히 착지하는 여인을 보며 구경만 하던 복면인이 껄껄 웃었다.

대단하군. 검을 쥔 상태의 공격은 전방에 한정되나, 검을 놓아주면 그 범위는 모든 게 된다.”

공격하지 않은 걸 보면 고수군.” 여인의 백의 구석 피가 튄 부분들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여인이 살짝 몸을 날려 복면인 쪽으로 뛰어 올랐다. 부드럽게 착지 하는 여인의 경공에 감탄하며, 복면인이 사슬 추를 버렸다.

겉으로만 판단하는 종자들은 제 명에 못 죽지들.”

아는 거랑 모르는 거랑은 천지차이지. 홍렬십삼초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당신은 이 검법을 아는 가? 잘 생각했어. 상식을 깨는 건 그대로 값어치가 오르지.”

천공의 사주 맞소.”어깨를 으쓱하며 복면인이 답했다.

당신이 그와 무슨 사이인지 모르지만, 사파의 은둔 고수와 정파 최고수가 뭐 무슨 인연이겠어? 강호에서 엮이는 건 그저 은원 아니오?”

천공. 추하게 늙는 구나. 점점 추해져 이젠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자홍을 쳐 비급을 가져달라. 이게 내게 한 의뢰였소.”

여인, 아니 자홍이라 불린 이가 검을 손에서 놓았다.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손바닥에 붙어 있는 걸 보며 복면인이 다시 한 번 감탄사를 뱉었다. 여인이 왼 손을 들어 복면인을 겨냥했다. 오른 손으로 검 등을 만지고, 손가락으로 쓰다듬듯 천천히 내리며 속삭였다.

 

홍렬십삼초의 비급을 달라고?”

 

그가 복면을 벗었다.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얼굴은 친근했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나는 일섬이오. 이름은 들어봤지?”

 


 

천공인줄은 몰랐다. 일섬은 평소처럼 허허 웃고만 있었으나 내심 단전에 내공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냥 돈 푼 꽤 있지만 서민 놀이에 빠져 거적때기나 걸치고 한량으로 지내는 한낱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 다 봤는데,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정파 최고의 고수이자, 무림맹주. [극렬도법]의 창시자이자, 당대 최고의 문파인 천지회의 장문. 천공이 입에 물고 있던 강아지풀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알아 봤는가?”

당대 최고의 고수가 왜 나를 부른 거요?”

일섬하면, 누구나 가리지 않고 죽여주는, 마찬가지로 당대 최고의 살수아닌가.”

당신이 움직이면 그만인 것을.”

사정이 있네. 사정이. 이 강아지풀처럼.”

퉤 하고 뱉어내자, 강아지풀이 나풀거리며 공중에 날렸다. 순간 움찔한 일섬을 보며, 천공이 히죽 웃었다. “나도 사람이니, 마음 한 구석은 여리하지.” 떨어지는 강아지풀을 보던 일섬이 풀을 향해 순식간에 암기를 날렸다. ! 마찬가지로, 번개같이 칼을 빼든 천공이 그의 암기를 튕겨냈다.

떨어지게 놔두라고.”

당신 정도의 고수면 이런 풀도 흉기가 될 수 있지요.”

아직은 아니야. 널 치는 건.”

천공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섬은 그 순간 머릿속으로, 천공의 도법을 파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모두가 다 답이 없었다. 단 일합만으로 그 공격들은 다 막힌다. 조금만 더 시간을 준다면. 일섬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 지 천공은 천천히 뒤춤에 칼을 집어넣었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들어 벌컥 들이킨 그가, 물기에 젖은 수염을 한 번 쓱 훝내린 뒤 입을 열었다.

북쪽으로 가면 수풀이 우거진 동굴이 하나 있어. 근처에 사당이 있으니 찾기 쉬울 거야. 십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악녀가 그 동굴에 거주하지. 놔두면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될 여자야. 그 여자의 무공은, 대단하다. 대단할 수밖에 없지. 바로 그 [홍렬십삼초검법] 이거든.”

홍렬십삼초라면, 당신이 소유하고 있던 무공 비급 아니오?”

그렇지. 잘 아는 군. 내 의형제인 장군방의 비전 무공이었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에게 살해당하고, 그 자식 놈은 미쳐 무림을 떠나고, 참 비참하게 갔지 동생도. 몸소 내가 맡아 지켜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라졌다.”

그 사건이라면, 당신의 딸이......”

더 말하지 마시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으니.”

천공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인다. 화기를 다스리는 심공이다. 일섬은 그가 분노해 수를 던질 것에 대비했다. 이번엔 여섯 가지다. 근거리에는 원거리, 원거리에는 더 원거리.

내 딸을 죽이고 홍렬십삼초를 훔쳐 달아난 이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대의다. 무림 정파가 올바르게 강호를 이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뭐 잘 알겠지만, 그 사건으로 내 딸은 죽고, 내 딸의 남편이자 내 사위였던 장군방의 자식 놈은 미쳐서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둘의 자식이자 내게는 손녀인 혈육만 하나 남았지. 내게는 둘도 없는 귀한 여식이다. 나는 복수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위치에서는 섣불리 움직이기 뭐 하지. 올바른 대의를 위한 정파의 대표가, 사적인 복수를 행하면, 그것 참 여기저기 말이 많이 나오는 일이니까. 잘 알겠나? 내가 부른 이유를?”

, 결국 살수라는 건 대리죠. 대부분.”

잘 아는 군.”

이 정도까지 얘기 주셨으면 저도 얼추 상황 파악 됩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그 비급이, 이제야 나타난 거군요. 그것도 정파가 아닌 사파의 은둔 고수 손에.”

그 여자의 이름은 자홍 일세.”

천공이 수염을 쓱 쓰다듬어 내렸다.

자홍을 치고, 그 비급을 가져다주게.”

보수는?”

 

은자와 별도로, 삼 년간 너를 치지 않겠다. 네 마음대로 해.”

천공이 눈을 치켜뜨며 일섬을 바라보았다.

 

너에 대한 보고와, 너를 처리하자는 모든 의견을 묵살하겠다. 알다시피, 내가 지금 손을 쓰면, 너는 이 자리에서 바로 죽는다.”

일섬의 입술이 실룩거리며 뒤틀렸다.

삼 년이라?”

, 너무 짧나?”

아니오. 충분하지. 당신의 도법을 파하기에는. 내 검과 창과 독과 암기는 이미 통달했으나, 아직 부족한 게 있다면 도법을 파하는 거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섬의 명성 그 어디 가지 않는구먼. 오로지 상대를 깨기 위해 익힌 무공이라. 한 번 붙어보고 싶은 맘 간절하지만, 그 자신감 밟아버리긴 싫네. 아직은 아니야.”

, 보여줄 수는 있소. 지금 당장. 맛보기로.”

 

건방진 애송이가.”

천공의 수염 끝이 파르르 떨리며 위로 치솟았다.

단 칼이면 넌 죽는다.”

진정하고. 농담이오. 농담이야. 으하하하하.”

일섬이 큰 소리로 웃자, 천공의 수염 끝이 다시 내려갔다. 일섬을 쳐다보던 천공이, 마찬가지로 큰 소리로 웃으며 답했다.

왜 자네는 수염을 기르지 않지?”

껄끄러워서.”

특이하구먼.”

아무튼, 의뢰를 받았고, 그 자홍을 치고 비급을 가져오면 되는 겁니까?”

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네.”

 

좋소. 보수 잊지 마시오. 비급과 함께 돌아오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섬은 내달렸다. 머릿속은 벌써 열여섯 가지의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중 천공에게 먹힐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2. 단화(丹花)

 

기억하오. 그대를 처음 만난 그 때를.

당신은 붉은 나비였소. 한낱 잡초에 지나지 않는 내게 당신은 살며시 날아왔소.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화려한 꽃들은 많고도 많았지만, 당신은 오직 나를 위해 날갯짓을 접었소. 내가 무어라고. 무어라고. 당신은 꾸미지 않아도 기품이 묻어나는, 그런 존재였소. 나는 그런 당신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존재였소. 당신은 내게 맞추기 위해 애써 그 기품을 감춰왔으나, 나는 바로 알 수 있었소.

단화여. 붉은 꽃, 붉은 나비여.

비가 많이도 왔었지. 비를 피해 들어 온 당신을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터질 것 만 같았소. 왜 그날따라 내게로 왔는지, 후에 당신이 일부러 그랬다는 말에 허허 웃음으로 넘겼지만, 왜 하필 그 순간 내 마음을 앗아갔는지, 나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소. 사실은 그 날 이후 성도를 떠나려 했다오. 밥벌이도 안 되는 이 일, 더는 못 견디겠어서 한적한 시골 밭이나 가꾸려 했다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떠나기로 한 하루 전, 당신이 내게 들어 와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소. 기억나오? 부드럽지만 밝은 목소리로 내가 일을 하는 것을 구경하며 던진 그 말. 기억나오?

 

이 단단한 쇠도 녹아 물처럼 흐르니,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외다.

 

경외하는 눈빛을 보며, 나는 그대로 반해버렸소. 모두가 무시하는 직업, 한낱 대장장이였던 내게 당신은 거짓 없는 진중함으로 대했소. 내가 무어라고. 무어라고. 그 날, 그때부터, 나는 당신만 생각했소. 종종 나를 찾을 때 마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숨은 가빠졌소. 나는 눈치가 없는 이오. 당신이 왜 보잘 것 없는 내게 그렇게 관심을 주는지 전혀 몰랐소. 그저 좋았을 뿐이오. 당신이 내게 와 일을 구경하며 앉아있는 그 자체가 마냥 좋았소.

사랑했던 단화여.

그러나 나는 깨달았소. 우리는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인 것을. 어울릴 수 없는 인연인 것을. 당신이 유명한 무림세가의 자제인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 이미 서로 사랑에 빠져 모든 걸 버리고 둘이 떠나기로 했던 그 때, 나는 사실 두려웠소. 현실은 바람과 다르오. 그 때, 우리는 헤어졌어야 하오. 가슴에 아련히 남기고, 멀어졌어야 한다오. 하지만 우리의 아이가 이미 생겼고, 당신이 단단한 쇠처럼 굳건한 의지로 가문을 떠나겠다 공표하고 내게 돌아온 걸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소. 어떻게든 우리 둘이서. 살아가자. 그러면 된다. 하지만.

 

미안하오.

 

당신을 힘들 게 할 수는 없었소.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소. 분명 당신은 후회할 것이 분명하오. 나를 만나고 부귀영화를 떠난 것이 후회될 거라 자명하오. 일 년이 됐든, 십 년이 됐든, 분명 당신은 나를 원망할 게 분명하오. 그런 것이오. 당신이 내게 날아왔던 건, 단지 철없던 감정의 산물, 결국은 후회로 점쳐질 순간의 잘못된 선택.

 

날 찾지 마시오. 날 잊어 주시오.

 

행복했소. 이 추억 평생을 안고 가리다. 당신의 새 출발을 위해, 아이는 내가 데리고 가겠소. 훌륭하게 키우리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나를 잊어 주시오. 존재를 지우시오. 당신을 스쳐간 바람으로 생각해 주시오. 따뜻했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그런 봄바람으로.

안녕히.

단화여. 붉은 꽃이여. 붉은 나비여.

 

 

.”

편지를 들고 있는 단화의 손이 떨렸다. “어억.” 뭐라 말하고 싶지만 말문이 열리지 않는 지, 단화는 그저 기괴한 신음만 내뱉고 있었다. 눈물이 툭 떨어져 편지를 적셨다. 한참을 편지만 노려보던 단화가 갈기갈기 찢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눈물은 점점 불어나,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투둑. 투두둑. 투두둑.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단화를 보며, 허름한 문짝 옆 낡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개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단화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개문과 마주친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야. 이걸 그가 썼을 리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나를 사랑하니까. 이건 말도 안 돼. 나를 떠날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다 거짓이야. 내 아이는, 내 아들은......”

현실을 자각해.”

으아아아아아아!”

단화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야!” 단호하게 고함을 지른 그녀가 찢어진 편지지를 들어 마구 구겨 입으로 가져갔다. “믿을 수 없어!” 집어 삼키려는 그녀의 손을 내리치며, 개문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안 된다. 몸 상해.”

오라버니. 개문 오라버니. 나 어떻게 해?”

추스려라. 일단은.”

오라버니. 이 모든 게 믿기지가 않아요. ?”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으니. 어쩌면 그도 부담, 아니 두려웠을지 모른다.”

그러면 왜 나와 함께 떠났어? ? 애초 이렇게 떠날 것을? ?”

 

개문은 답하지 않았다. 단화의 눈물은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개문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훌쩍이던 단화의 울음소리가 점차 조용해졌다. 들썩이던 어깨도 멈췄다. 개문은 그저 안아주고만 있었다. 개문의 품안에서, 단화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말했다.

이유가 있어. 분명 이유가 있다. 나를 이렇게 버리고 떠난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오라버니, 그 이유가 뭘까?”

이유는 무슨. 그저 두려웠을 뿐이다.”

뭐가 두려운 거지?”

네가 천공의 손녀인 것. 정파 최고의 문파인 천지회의 직계, 명성이 자자한 무림세가의 일원인 것.”

왜 그게 두려워?”

나조차도 두려우니까. 너를 보는 거, 그리고 천공 대인을 보는 거 그 자체가.”

그는 어찌 살까?”

단화가 개문을 밀치고, 일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반 쯤 풀려 몽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라 답하려다, 개문은 말문을 닫았다. 그가 수소문 끝에 단화를 찾아 방문했을 땐, 이미 그녀의 마음은 처절하게 뭉개져 버린 상태였다. 섣불리 다가갔다간, 완전히 망가질 게 틀림없었다. 단화가 고개를 슥 돌려, 둘만의 침소, 아이가 잠자던 보금자리를 바라보았다. 고개가 약간 비스듬히 꺾인 채로, 그녀는 하염없이 그저 부실하고 너저분한 초가의 구석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잘 살겠지. 다른 여자 만나서.”

단화야.”

남자란 결국, 여자 없이는 못 살잖아?”

단화야!”

편지라고? 편지만 남기고 떠나? 나를 버려? 나를 버렸어? 단지 내가 고귀해서? 당신이 나와 어울리지 않아서? 그것이 떠나는 이유가 될 수 있나? 난 믿을 수 없어. 그는 나를 버렸어.”

진정해라. 일단 천공께 돌아가자. 할아버지를 뵈면 마음의 아픔이 나아질 수 있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 천공 할아버님. 나를 끔찍이 아꼈지. 하나뿐인 혈육이라고. 그런 할아버지에게 당신을 떠나겠다 가슴에 못 박았어. 분명 슬펐을 거야. 상심이 컸을 거라고. 하지만 보내줬지. 행복하라고. 그런데, 나를 버려? 이 모든 은혜를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고 나를 떠났어? 우리 아이를 데리고?”

단화야, 일단 진정해. 화기를 다스려야 한다.”

 

자기 멋대로! 나를 버렸어! 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용서할 수 없어!”

 

순간 놀란 개문이 몸을 뒤로 날렸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군. 무공을 배우지 않은 그녀지만, 분노에 가득 찬 그녀의 화기가 끓어올라 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동공이 작아지고, 흰자위가 붉어진다. 흐르던 눈물은 그쳤고, 눈물 자국은 붉은 길을 만들고 있다. 피 눈물이 흘렀다. 피 눈물이 흐른다. 방안의 집기들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잠시 살펴보던 개문이, 왼 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번 흔들었다. 하나 둘, , . 계속 흔들기 시작한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단화를 바라보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잠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의는 아니야.” 그의 혼잣말에 단화가 그를 쳐다보았다.

! 단화의 아랫배를 개문이 정확히 가격했다.

풀썩 쓰러지려는 그녀를 부축하며, 개문이 한 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잃은 그녀를 들쳐 업고, 개문이 문을 나섰다. 천공에게 데려가야 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허름한 초가를 바라 본 그가, 쯧 하며 혀를 찼다. 천하의 고귀 한 신분의 그녀를 이런 곳에 삼 년이나 지내게 한 놈의 짓거리에 화가 난 것이다. 두 눈을 치켜뜨며 개문이 두 팔에 힘을 주었다. 핏줄이 불거지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후읍 하고 숨을 들이 킨 그가,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평소 사람이 걷는 거리의 수십 배를 그는 한걸음에 뛰어가고 있었다. 절륜한 경공이다.

단화야.” 개문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내가 지켜주마.”

당연히 들을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들어 답하듯, 단화의 고개가 살짝, 흔들렸다. 긍정의 의미인지, 부정의 의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개문은 개의치 않았다.

 

 

3. 자홍(紫紅).

 

 

비급이 내게 있다는 건 어찌 알고?”

비급을 누군가에게 맡길 리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한 사실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비급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이 나를 치겠다는 건가?”

영광이오. 홍렬십삼초와 한 번 붙어봤던 걸, 내 대대로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하지.”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동굴 안의 공기는, 마주 선 둘의 주위로 다가가다 순식간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일섬의 손을 본 자홍이, 겨냥한 검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여전히 오른 손가락은 검 등에 걸친 그대로다. “당신, 일섬이라 했지?” 자홍의 질문에 일섬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알아봐주시니 영광이오.”

살수로 유명하지. 정파와 사파 가리지 않고 의뢰하면 누구든 죽여주는. 천공의 사주를 받았나?”

, 잘 아시네. 천공 나으리가 내게 의뢰를 줄줄은 몰랐지 나도.”

당신의 무공은 상대의 무공을 파한다지. 그건, 전설상의 [독고구검]의 검결인가?”

같은 의견일세. 그쪽도 어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잖우? 나도 그 독고구검의 검결따윈 믿지 않아. 단지, 왜국과, 서역을 드나들며 나름 여러 가지 익힌 것뿐이야.”

일섬이 오른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아까의 사슬추가, 왜국 기술이네.”

그건 그저,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까, 단지 보고 싶었다니까, 홍렬십삼초 검법을 말이야. 보려고 던지는 거야. 무공을 파악하기 위해서. 내 본 기술은 따로 있지.”

일섬이 검을 빼들었다. 붉은 지네다. 붉은 지네가 그려진 검 집을 돌려 쥔 채, 그가 왼 손을 들어 살며시 검 손 부위를 잡았다.

내가 왜국에서 배운 기술 중 가장 쓸 만한 게, 바로 이 발도술이다.”

발도술?”

, 일단 보면 알아.”

사양 않고 봐 주지.”

자홍이 한 발 내딛었다. 그녀가 몸을 굽히며, 들고 있던 왼 손을 죽 뻗었다. 그녀의 왼 손 바닥에 붙어있던 검 날이 팔랑 거리며 일섬의 목을 노렸다. 핑 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슬쩍 피한 일섬은 여전히 손을 검 집에 둔 채였다. “뽑아라!” 자홍의 외침과 동시에, 빙글빙글 돌며 그녀의 검이 회전을 시작했다. 휙 하고 뒤로 피한 일섬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전 방위 모든 방향을 회전하며 공격하는 검이란 듣지 못했네.”

지금 보고, 들어라. 이것이 홍렬십삼초다.”

 

폭풍검기!

 

내공이 상당해서, 검 끝으로 날이 선 검기가 맺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일초. 뱅글 돌던 검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뱀처럼 휘었다. 자홍의 왼 손은 바닥이 보이게 정면으로 뻗은 상태였고, 검은 손바닥 한가운데 고정되어 좌우로 살짝 흔들거렸다. 일섬이 검집을 쥔 채 그대로 양편으로 내리치는 검 날을 막았다. 챙챙! 이초. 자홍의 왼 손이 바닥을 바라보며 꺾였다. 검도 따라 내려가나 싶더니, 뱅글뱅글 돌며 제자리 회전을 시작했다. 자홍이 왼 팔을 뒤로 당겼다. 바닥을 끌며 따라가던 검은 여전히 매서운 기세로 돌고 있었다.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긴장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일섬의 귀에, 자홍의 앙칼진 기합 소리가 들렸다.

홍렬십삼초의 초공은 열이다.”

그녀가 왼 손을 다시 앞으로 뻗었다.

마치 봉술과도 같아 보인다. 봉을 쥐듯 살짝 굽힌 손 안에서 검이 매섭게 돌아가며 날을 흔들었다. 쥐진 않았으나, 손안에서 돌고 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살짝 보였던 검기는 붉게 빛을 내고 있다. 그래, 이래서 홍렬십삼초구나. 자홍이 몸을 날렸다. 이제 붉은 빛줄기로만 보이는 그녀의 검은, 매서운 회전과, 뜨거운 열기를 동반하며, 일섬의 심장을 후벼 파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삼초. 검날이 뒤틀리며 일섬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갔다. 검집을 두 손으로 잡고, 일섬이 가슴을 방어했다. 이것이 단지 삼초라고? 하나하나가, 필살의 술이야. 검집이 버틸지 알 수는 없지만, 피할 겨를이 없었다. 어이 친구. 그래도 십여 년 동고동락 했는데, 이번에도 도와줄 거지? 일섬의 물음에 붉은 지네는 답하지 않는다. 넌 항상 무뚝뚝한 놈이었지.

 

()!

 

! 일섬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자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회전을 동반한 찌르기, 더군다나 내공을 실었기에 열을 동반한 강공임에도 일섬의 몸을 꿰뚫지 못 했다. 금이 간 일섬의 검집 위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휘유. 숨을 가다듬은 일섬이 자신의 검집을 내려다보았다. 말은 필요 없다고? 이런 새침한 자식. 검신을 쥔 왼 손에 힘을 주자, 핏줄이 불거졌다. “대단한 공격일세!” 일섬이 큰 소리로 말했다.

화려한 공격일 줄 알았더니, 무식하게도 강공이구만!”

삼초를 버틴 것에 경의를 표하지.” 자홍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이번에는 죽을 것이다.”

자홍이 덥썩, 검을 잡았다. 놀란 일섬을 보며, 자홍이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사초. 아아. 이 검법은 흔하디흔한 그런 검법이 아니야. 오히려 강인한 도법에 적합하다. 천근추의 기세로 바닥을 향해 내려찍는 검날을 보며 일섬은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데? 이 검법은 강골의 무인이 써야 하는 검이다. 검을 파하는 술은 이미 통달했으나, 이렇게 강인한 검법은 처음이라 그도 적잖이 당황했다. 생각을 바꿔 봐. 상대의 무공을 파하는 법은, 항상 기본은 같았지. 깨부수어라.

그는 그대로 검을 뽑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일섬!(一閃 -빛이 번쩍임)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을 뿌리며, 자홍의 검날이 쪼개져 날아갔다.

그대로 돌진해 어깨로 자홍을 밀치고, 일섬이 검을 돌려 그녀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검이 박히는 걸 본 그녀가 괴성을 내질렀다. “안 돼!” 그대로 검을 밀며 돌진하니 계속 뒤로 밀린 자홍의 등이 돌 벽에 부딪혔다. “아악!” 울컥 하며 그녀가 피를 토했다. 일섬이 손을 놓았다. 그대로 뒤춤에서 작은 칼을 꺼낸 그가, 박혀있는 검신의 끄트머리를 다시 한 번 후려쳤다.

으아아악!”

핏방울이 흩날린다. 일섬이 재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칼을 다시 뒤춤에 꽂아 넣고, 그가 깊은 한 숨을 들이켰다.

마지막 할 말은?”

체념한 듯, 자홍이 중얼거렸다.

“......원통하다.”

아 다들 그래. 죽기 싫으니까. 그래도 이런 대단한 무공을 보여준 것에 경의를 표하며, 내 원하는 소원 하나만 들어주지. 있다면 말이지.”

“......나를......데려가라......”

무슨 소리지? 묻어 달라는 얘긴가?”

비급은 알아서 해라......필요없으니까......이제.......가져가고 나를 데려가라....그곳으로..........지아비 곁으로.....그 사람 곁으로......”

이봐. 좀 더 구체적으로......”

그곳에......비급과......내 사랑하는 사람과......”

어이!”

동굴 안으로.....들어가면.....”

자홍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 한 일섬이, 조심스레 그녀의 몸을 들쳐 메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라? 저승길로 가는 장송곡이 필요하지. 휘이익. 휘이익. 일섬이 휘파람을 불었다. 동굴 안에 메아리쳐 울리는 그의 휘파람 소리는 구슬프기 그지없었다. 그대로 동굴 안으로 계속 들어가던 일섬의 시선에, 작은 돌무더기가 보였다. 돌무덤이다. 앞에 세워진 낡은 나무 팻말이 무덤의 당사자를 알려주고 있었다. 장군정. 장군정이라.

곁에 자홍을 눕힌 일섬이 쭈그리고 앉아 돌무덤을 바라보았다.

장군정이라면, 장군방의 자제군. 천공의 의형제였던, 비참한 가문의 몰살을 겪고 사라진 그 장군방의 자제.

휘이익. 휘파람을 멈추지 않으며, 일섬이 반듯이 누운 자홍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장군정을 지아비라 부른 이는 당연히, 천공의 자제였던, 아하.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너는 천공의 딸이로구나.

 

비급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자홍은 비급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비급을 훔쳐 달아나고, 익혔던 모든 것은 지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때로는 인의를 배반하기도 한다. 그것이 정이든 사이든 원천이 어디이든 간에, 부인할 수 없는 본능이자 욕망일 뿐. 대부분을 눈치 챘으나, 확인이 필요했다. 일섬은 비금을 품에 넣은 뒤 몸을 돌렸다. 천공을 만나 건네주면 확인할 수 있겠지. 휘이익. 휘파람을 불며 일섬은 조용히 걸었다. 저승에서라도 해후하시고, 같이 보시길. 잘 가시오.

 

휘파람이 멈추자, 동굴은 다시 고요해졌다.

 

 

4. 천공(天空)

 

 

무림 최고의 고수가 되려면, 모든 무공이 내 발밑에 있어야 하느니.

천공의 생각, 아니 신념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극렬도법]은 최강의 도법이라 자부하고, 평판도 그렇지만, 도는 도일 뿐, 검과 창과는 다르다. 속도와 변칙적인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는 극렬도법에 천공의 강기와 힘이 곁들어져 당대 최고의 무공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실상 천공은 개운치 않았다.

검의 최고봉은 홍렬십삼초이며, 창의 최고봉은 삼중진창이라.

그 두 무공을 소유하지 않고는 최고라 할 수 없다. 천공의 생각은 단순했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선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천공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악인들만 찾아 칼을 들었다. 명성이 자자해질 때쯤, 정파의 대표라 자부하던 홍렬십삼초의 장군방이 그를 보기 위해 천지회를 방문했다.

장 대인의 모토는 무엇이오?”

천공은 일부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장군방을 자극했다.

그 훌륭한 검법을 가지고도, 조용히 지내는 이유가 무엇이오?”

장군방의 위치로 보아 천공의 날 선 질문은 시건방진 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대인배의 자태를 풍기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당돌하고 직선적인 천공의 어투와 행동을 마음에 들어 했다.

모토라. 불필요한 쟁은 피한다는 게 모토랄까.”

내 모토는 단호하오. 악즉참이오. 악은 모조리 베어 없애는 게 내 모토요. 이 천공이 직접 그들의 모가지를 딸 것이오. 장 대인은 이런 나를 어찌 보오?”

훌륭한 접견이고, 훌륭한 마음가짐이오.”

도와주시겠소?”

천 대인의 천지회와, 우리 장강파가 합치면 천하에 두려울 것 없으리. 물론이오. 내 그동안 마음에 맞는 상대를 찾지 못 해 많이 고민하였는 바, 비로서 천 대인을 만나 이 회한을 푸니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 할 정도요. 물론이오. 악을 멸하고, 정파의 정의로운 기상을 마음껏 펼치리.”

고맙소!”

의기투합한 둘은 밤 새 술잔을 기울이며, 의형제의 언약까지 맺었다. 다만 천공의 머릿속은 오로지 하나, 홍렬십삼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훌쩍 큰 서로의 자제들이 있는 걸 확인하고, 혼인을 약속하는 시점에도 천공은 오직 하나, 홍렬십삼초를 소유하고픈 생각뿐이었다. 악을 몰아내면 평판은 올라가고, 그로 인한 주변의 시선은 왜곡된다.

난 단지 그 검법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너 같은 숨기만 하는 겁쟁이에게 그런 훌륭한 검법이 있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모조리 도륙했다.

사파의 행위로 보이게 하기 위해, 천공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장강파를 습격했다. 그 자신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도가 아닌 검을 썼다. 온갖 암기와 흉기도 더불어. 약을 치고, 암기를 뿌리고, 검으로 일순 토막을 냈다. 의형제까지 맺고 사돈 관계였던 천공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습을 당해 죽어가는 장군방의 두 눈을 응시했을 때, 뒤늦게 눈치 챈 장군방의 힘없는 칼질을 여유롭게 피하며, 잠깐 얼굴을 드러냈을 뿐이다.

 

써먹지도 못 하는 걸 가지고 가문의 명성이라 들이밀던 꼴이라니.”

, 네가 어찌 감히.......천하의 몹쓸......”

가식은 그대로 저승으로 가져가라. 네 검법은 내가 잘 가져가겠다.”

 

그러나 자만에 잠시 빠져 얼굴을 보인 게 실수였다. 장군방은 죽기 직전 자신의 몸에 천공의 이름을 새겼다. 장례를 치르는 와중 그 사실을 알게 된 장군방의 자제이자 천공의 사위인 장군정은, 극도로 혼란을 느끼며 그대로 가정을 버리고 떠났다. 후한을 막기 위해 쫓아 살해한 뒤에야, 천공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이 이 모든 걸 들어 알았다는 걸 눈치 챘다. 실수였다.

그토록 원했던 홍렬십삼초의 비급은, 전혀 의심치 않았던 그의 딸이 훔쳐 달아나 버렸다.

사파의 침입과, 딸의 죽음을 위장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비급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다. 언젠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아니 분명히 드러내겠지. 나를 향해 검을 겨누고서.

 

그래야 내 딸이지. 그리하면, 죽여 얻으면 된다.

 

천공이 껄껄 웃었다. 가족이 무언가. 혈육이 무언가. 핏줄 따위 만들면 되는 것이고, 오직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내가 이 무림 최고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 모든 무공이 내 밑에 무릎을 꿇으면 된다. 결국 천공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틀리지 않는다.” 천공이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이 천공이야말로 천하제일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비급은 필요 없지 않겠소?”

맞장구에 맞추어, 천공이 술잔을 던졌다. 검은 그림자가 돌며 날아든 술잔을 잡았다. 술잔에 담긴 술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인 채다. “훌륭하오.” 술잔을 받아든 사내가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하고 탄식을 내지른 그가, 천공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당신을 이길 자는 없다 보오. 현재로서는.”

홍렬십삼초 비급은 가져왔는가?”

당신의 딸이 꽤 고수라 힘들었지만, 나 일섬 절대 의뢰는 실패하지 않소이다.”

내 딸이었다는 걸 알았는가?”

왜 당신이 움직이지 않는지도 알게 된 거지. 정파 최고수 나리.”

비급을 내놓아라.”

천공의 단호한 어투에 일섬이 눈살을 찌푸렸다.

꼭 필요하오? 이미 절정 고수 아니오?”

내놓아라.”

이제 유일하게 남은, 최고의 창법인 삼중진창만 깨부수면 되는 것 아니오?”

그건 이미 이뤘다.”

?” 일섬이 당황해 되묻자 천공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중진창으로 유명한 [명강방]과는 이미 사돈의 관계를 약속했다. 명강방의 자제인 개문과, 내 손녀인 단화를 혼인시키는 것. 이로써 정파 최고의 문파는 우리 천지회가 된다.”

 

더러운 늙은이군. 또다시 가문을 멸하고 무공을 훔치려 하는 건가?”

 

일섬이 비웃으며 비급을 던졌다. 천공의 시선이 날리는 비급을 쫒아 움직였다. 손을 들어 비급을 쥐어 든 천공의 수염 끝이 위로 솟구쳤다. “약속하마.” 천공이 비급을 품안에 넣었다.

오늘부터 삼 년간 너를 죽이지 않겠다.”

위선자 양반. 아주 고맙소.”

일섬은 붉은 지네가 그려진 검신을 쥐었다. 몸을 살짝 뒤로 돌리고 보폭을 줄여 이동하던 일섬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노려보는 천공을 향해 일섬이 비쭉거리는 표정으로 조롱했다.

한 합만, 겨뤄보지.”

약속하마. 죽이지는 않겠다.”

좀 뭐랄까, 내가 자유롭게 사는 종자긴 하지만, 당신의 그 구역질나는 행동은 보기가 싫어서. 무공을 위해서는 가족이고 뭐고 없는 건가? 적어도 나와 겨뤘던 자홍은 일말의 신념이 있었네. 복수. 지아비에 대한.”

그게 무슨 소용이야. 결국은 죽어 나자빠진 것들이.”

아 그러네. 결국은 사람 죽이고 다니는 나도 보잘 것 없는 존재긴 하지. 그런데, 있잖아? 아무래도 그, 매력이 없어. 매력이.”

감정은 중요치 않다.”

내가 의뢰를 거부하지 않는 건, 바로 그 감정에 대한 과거의 후회 때문이다.”

 

일섬!(一閃 -빛이 번쩍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일섬이 고속으로 검을 뽑았다.

하지만, 천공의 도법이 더 빨랐다.

으어억!”

일섬의 얼굴에 기다란 칼자국을 남기며, 빙글 빙글 돌던 천공의 칼이 뚝 움직임을 멈췄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부여잡고 있는 그를 보며, 천공이 칼 끝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 빙글빙글 돌렸다. “짧은 도신에, 한 뼘도 안 되는 면적이나, 그 빠르기는 화살에 못지않네. 잘 보았는가? 내 극렬도법을.”

일섬이 다시 검을 꽂아 넣으려 했지만, 날은 부러져 반 토막이 난 상태였다.

하아. 일섬이 한 숨을 내쉬었다.

검을 부러뜨리고 내 얼굴에 직격을 내다니. 왜국에서 처음 보고 경탄한 것이 바로 이 속도였는데. 이를 뛰어넘은 도법은 처음 보오. 대단하오. 정말, 최고의 고수답군.”

왜놈의 술은 쓸데없다.” 천공이 검을 돌리다가 바닥에 내리꽂았다.

너는 충분히 실력이 되는데도, 왜 그런 타국의 술을 쓰느냐?”

내 사정이오.”

일섬. 너는 내가 알기로 모든 무공을 파하는 자라 들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

알 바 없소.”

의뢰는 거부하지 않는다라. 그건 너의 모토인가?”

그렇소.”

다음 의뢰를 주지.” 천공이 의자에 풀썩 앉았다.

이번에는 꽤 힘들 수 있다. 개인이 아닌 단체의 몰살이니까.”

피에 젖은 손을 털어내며, 일섬이 가만히 천공을 바라보았다.

 

삼중진창법의 대가이자 서쪽 최고의 방파인 [명강방]을 몰살해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섬을 향해, 천공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읊조렸다.

내 손녀와 혼인하는 개문은, 이미 삼중진창에 통달했다. 그는 내 사람이다. 단화를 주었기 때문에. 고로 삼중진창 또한, 내 발밑에 두었다. 홍렬십삼초의 명맥은 끊겼다. 이 검법은 이제 천지회의 소유가 될 것이다. 손녀인 단화에게 이 검을 전수할 것이다. 당대 최고의 검법과, 당대 최고의 창술은, 이제 내 수족이 된다. 모든 건 내 발밑에 있다.”

의뢰를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오?”

너의 신념을 알기에. 모든 의뢰는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정파이든 사파이든 간에. 넌 그 신념으로 살아오는 것 아닌가? 나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너의 무공과 신념은 마음에 들어.”

 

보수는?”

 

피가 그쳤는지 일섬이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기다란 칼자국이 사선을 가로질러 새겨져 있었다. 반 토막인 검을 내려다보던 그가 바닥에 버렸다. 바닥에 뒹구는 검과 검집을 보며 천공이 의아한 표정으로 일섬을 쳐다보았다. “버리는 건가?” 일섬은 답하지 않았다. 쯧 하고 혀를 찬 천공이 아까의 질문에 답했다.

아까의 삼 년에 추가로 이 년. 너를 치지 않겠다.”

바꾸지. 내가 준비가 돼서 당신에게 도전하면 그 도전을 받아들이는 걸로.”

아니. 바꾸지 않는다. 넌 오년동안 죽지 않아. 그 동안 수련을 하든 놀고먹든 마음대로 해라. 그 사이사이 덤비는 건 좋은 유희로 받아들이마.”

 

삼중진창은 내게도 조금 버겁소. 도움이 필요하오.”

 

일섬의 말에 천공이 크게 웃었다.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일섬에게 던졌다. 천에 그려진 지도였다. 수염을 쓸어내리며 천공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강방의 잠입 경로네. 경계 인원과 교대 시간 모두 나와 있어. 알아서 하시게.”

몇 가지 더 되묻고 싶었지만, 일섬은 그대로 말없이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 지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내부에 충실한 자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개문이겠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문을 배신할 정도로 천공에게 빌붙는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그는, 이 모든 상황에 엮이는 것 그 자체가 즐거워지고 있었다.

천공은 대단하지만, 나도 대단하다. 삼 년만 주어지면, 그를 죽일 수 있다.

일섬은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렀다. 자홍의 죽음에 맞춘 장송곡이 그 첫 번째였다면, 지금은 곧 몰살 될 명강방의 수많은 이들과, 그들의 가족, 자제들이었다. “지네를 그려야겠어.” 오랜 친구였던 검을 버린 건, 이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일섬은 얼굴에 그어진 기다란 칼자국을 매만졌다. 붉은 지네를 그릴거야. 절대 잊지 않겠다.

 

 

5. 단화개문(丹花開門) - 붉은 꽃이 문을 열다.

 

 

어릴 적에.

개문은 어릴 적에 말을 하지 못 했다. 실어증이라고 했다. 모두는 온갖 약을 먹이며 치료하려 들었지만, 그는 말 하지 못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네 마음은 닫혔다.

용하다는 무당을 불렀지만, 그녀는 원인만 알려줄 뿐, 해결책은 제시 하지 못 했다. 마음이 닫혔으니 말이 안 나온다는 건, 누구도 할 수 있는 애기였다. 개문은 어린 나이에도 비통에 젖어 자책했다. 그의 아비도. 어미도,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사실, 개문의 친 어미 아비는 모두 죽고 없다. 개문은 명문 정파이자 자애롭기로 소문 난 명강방의 장문인과 그의 부인에게 입양되었고, 키워졌다. 실어증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명강방에 들어간 뒤 말을 잃은 그를 보는 모두의 시선도 점점 차가워져 갔다. 불량품이다. 비정상이다. 물론 그를 입양한 그들의 양 부모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개문과, 그 주변은, 차츰 그런 생각을 품었다. 필요 없는 존재다.

개문은 이를 악물고 수련에 매진했다. 여섯 살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에 벌써 방파 비전 무공인 삼중진창의 기본을 습득했다. 강골을 타고난지라, 창을 휘두르는데 있어 나이는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실어증은 그대로였다. 말없이 수련에 매진하는 그를 보며, 누구는 경의를 표했고, 누구는 멸시했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단지 무공에 미친 이일뿐이야. 감정 표현을 할 수 없는 그의 입장에서, 그런 의심은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강해지면 된다. 그러면 따르리. 삼중진창법을 모두 습득한 그의 나이는 이십이 채 되지 않을 때였다. 그의 양 부모는 축하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천지회에 가 인사드리자.

 

정파 최고 문파인 천지회의 당주인 천공 대인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개문의 부모는 그를 직접 이끌고 강을 건넜다. 당대 최고의 창술을 지닌 명문 정파인 명강방을 무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환호하고, 맞이했다. 그것이 그의 양 부모의 평판이라 생각한 개문은, 그저 창술 수련에만 매진할 뿐이었다. 그것은 출렁이는 강물 위 배 갑판에서도, 도착해 묵고 있던 천지회 소유 인 산중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찌르고. 당기고. 다시 찌르고, 당기고.

 

인사하거라.

 

천공이라 불린 노인은, 개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개문이 인사를 올리자, 그는 껄껄 웃으며 개문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그의 양부모가 따라 나섰지만, 천공의 수하들이 그런 그들을 정중히 말렸다. 꽃이 만개한 들판이었다. 한가운데 낡은 고목이 하나 서 있고. 주위로 나비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도원의 한 곳 마냥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곳에서, 천공은 개문의 손을 놓았다. 어리둥절한 개문을 보며, 천공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이 닫혔느냐?

 

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자신이 무슨 병에 걸린 지, 그 원인이 뭔지는 세월이 흘러 잘 알고 있었다. 천공이 손짓하자, 낡은 고목 뒤로 작고 귀여운 아이가 폴짝 거리며 그들에게 향해 뛰어왔다. 개문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여쁜 이는 처음 보았으니.

 

내 손녀인 단화이니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개문을 바라보던 그녀가, 방긋 웃으며 개문을 끌어안았다.

당황해 얼굴이 새빨개 진 그를 보며 천공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눈망울로 요리저리 살피던 그녀가, 두 손을 들어 개문의 손을 잡더니 꾸벅 하고, 고개를 숙여 수줍은 인사를 건넸다.

 

오라버니. 저는 단화랍니다.”

 

개문은 답하려 했지만, 이토록 말문이 막힌 일이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오라버니. 할아버지가 오라버니 좋은 사람이라 했어요. 오라버니.”

 

개문은 고개만 끄덕였다. 껄껄 웃는 천공과, 여전히 손을 쥐고 있는 단화를 보며, 개문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제게도 오라버니가 생겨서 너무 좋아요.”

 

. , 나도.”

 

개문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지켜보던 천공도 탄식을 내질렀다. 영문을 모르던 단화만 싱글벙글 웃으며 개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을 뿐이다.

오라버니도 좋은가요?”

. , 나도. 좋아. 정말.”

저도 좋아요. 오라버니. 친구가 없었는데, 오라버니를 만나니 너무 행복한 걸요.”

마찬, 가지로. 나도. 너를. 만나서. 너무. 좋구나.”

 

단화가 다시 한 번 그를 꼭 품에 안았다. 개문은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정신을 잃고 늘어진 단화를 들쳐 메고, 개문은 여전히 천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단화를 유혹하고 망친 몹쓸 종자는, 아까의 협박으로 떠나보냈다.

떠나지 않으면 너와, 네 아이와, 네 여자는 죽을 것이다.”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이오! 우리는 무림을, 아니 강호를 떠나 그저 의지하며 살아가려 했을 뿐이오!”

 

닥쳐라. 빌어먹을 것. 네가 단화를 가진 것에 나는, 절망과도 같은 분노를 느꼈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나는, 그녀의 동반자가 될 몸이다. 아니, 그녀가 나의 구원자지.”

무슨 소리야! 빌어먹을! 나와 단화는 행복했어! 우리 둘이 강호를 떠나는 것도 그녀의 가문이 허락해 주었거늘......”

그걸 믿었나?”

개문이 손을 뻗어 창끝을 그들의 아이에게로 겨누었다. 사내가 급히 머리를 조아리자, 개문이 창을 거두었다.

제발! 우리 아이는 놔두시오!”

나는 모두 없애라는 명을 받았네.”

개문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네. 어찌됐든 간에, 단화의 자식이니.”

망극하오! 망극 하외다!”

버러지 같은 표정으로 울부짖지 말고 유식한 척 하지 말고 네놈의 현실을 자각하라!”

개문이 버럭 외쳤다.

왜 나의 단화를 꼬셔 이런 비루한 곳에 몇 년 동안 지내게 만들었느냐!”

그것은......”

답하지 말라! 죽여 버리겠다! 단화는 내 여자이니라!”

사내의 숙인 머리 위를 잘근 밟으며, 개문이 냉정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편지를 쓰고 돌아가라. 떠나지 않으면, 너와 네 자식과 네 여자를 모두 죽이겠다.”

그럴 순......”

창끝에 꿰어 짐승 먹이가 되고 싶지 않느냐? 네가 아니라 네 자식 말이다.”

으앙 하고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일순 흔들린 개문이었지만, 그 흔들림이 숙인 사내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제발!”

꺼져라.”

제발!”

꺼지라고!”

제발!”

제발 좀 꺼지라고! 너희 모두!”

괴성을 지르는 개문을 보며, 사내가 입을 닫았다. 조금씩 움직인 그가,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개문은 품에 들고 있던 붓과 먹과 지문을 바닥에 팽개쳤다. “써라.” 사내가 주섬주섬 모두를 쓸어안았다. “창이 우느니라.” 마지막 협박에, 눈물을 흘리며 사내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보던 개문이 눈을 감았다.

그는 그때의 그 일, 말문이 열리던 그 때만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좋아요. 오라버니. 친구가 없었는데, 오라버니를 만나니 너무 행복한 걸요.”

 

나도 좋구나. 나를 열게 해 준 네가 좋구나.

천공은 그 후 무조건 단화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개문을 설득했다.

개문은 거부할 수 없었다. 사실 그를 대부분 거부 한 명강방의 대부분은 죽어도 싸기 그지없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자애로운 양부모 뿐.

 

네가 내 곁에 있다면, 그들은 안전하다.”

 

천공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개문을 위로했다.

 

삼중진창이 내 손에 들어온다면, 네 사람들은 편할 것이야.”

 

개문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마음의 문을 열어 준 그녀를 안고, 꿈꿔왔던 행복을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것이 모두를 해하고, 가문의 멸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않고, 개문은 그저 뛰어갈 뿐이었다. 내가 이제 지켜줄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연 사람은 단화였지만, 왜 그녀인지는 개문도 몰랐다. 단지 중요한 건,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제 내가 지켜줄게.”

 

단화는 답하지 않았다.

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개문은 그저, 정차 없이 뛰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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