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애플에서 내놓은 최신 무선 이어폰을 하나 장만하기로 했다. 한 달 연금의 절반에 다다르는 무시무시한 가격이었다. 친구 정 씨가 그걸 끼고 다니기 시작하더니 매일매일 틈만 나면 이 새 에어팟 좋다, 참 좋다 하고 중얼거리고 다니길래 나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사 귤나무길에 있는 애플 스토어에 오랜만에 찾아가니 그 규모를 확장한 채였다. 거대한 투명 유리벽 안으로 보이는 위풍당당한 사과 마크가 새하얀 풍채를 뽐냈다.

새 에어팟은 애플이 21세기 초반에 처음으로 내놓은 무선 이어폰과 디자인이 완전히 똑같아서 향수를 자아냈다. 옛날에는 잃어버리기가 꽤 쉬워서 판교를 며칠만 날 잡고 돌아다니면 길거리에서 한 세트를 반드시 구할 수 있다는 식의 농담을 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아담한 상자를 붙잡은 채로, 겁이 나서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이거 길 가다 귀에서 빠지면 바로 잃어버리는 거 아니요?”

“아유, 아닙니다. 어르신, 이 제품은 기본적으로 절대 잃어버릴 수가 없게 설계되셔 있구요. 인체공학적 디자인이라 꼭지 부분을 붙잡고 힘을 가하지 않는 이상 절대 귀에서 뽑히시지 않구요. 또 EAR ID 피처로 주인의 귀가 아니면 작동하시지 않고요. 저희 아이튠즈 계정에 에어팟 실버를 등록하시면 분실 시 위치 추적 기능 사용기 가능하시고요. 그래도 찾을 수 없게 된 경우에는…”

점원은 그 놈의 에어팟 실버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가며 얼마나 이걸 잃어버리기 어려운지 설명했다. 별별 신기한 기술 이야기가 다 나와서, 이걸 잃어버리면 확실히 전적으로 애플이 아니라 내 문제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어르신 분들한테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제품에 청각 보조 기능이 장착되셔 있구요. 인공지능을 이용하신 거라, 음악 감상 중에도 보청기, 아니, 죄송합니다. 현재 지켜보고 계신 사람의 목소리만 정확히 들으실 수 있구요. 또 음악 듣지 않으실 때도 해당 기능은 얼마든지 사용 가능하시구요…”

점원이 내가 관심 있는 기능을 이야기해서 나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 관심을 돌렸다. 점원은 아직 오래 일하지 않은 탓인지 애플에서는 일부러 피하려 하는 보청기란 말을 썼다. 이 작은 이어폰에는 잘 들리지 않는 귀를 기가 막히게 보조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가격이 어마어마했지만, 옛날에 쓰던 보청기에 이어폰 기능까지 더했다 하면 거의 거저나 마찬가지였다.

한 5년 전에, 애플이 노인만을 위한 제품군을 처음으로 발표했던 게 문득 기억났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이것도 혁신이라고 애플을 찬양했고, 어떤 사람들은 이제 진짜 내놓을 게 없어서 한국 휴대폰 회사들 따라 효도폰이나 내놓냐고 회사를 퇴물이라 비웃었다. 나는 말하자면 후자에 속하는 쪽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쇠하고 손가락이 주름졌지만 휴대폰 터치는 똑같이 되는데 무슨 노인용 제품이 필요하겠나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40년 지기인 정 씨가 귀 두 쪽에 하얀 콩나물 대가리를 꽂고 나타난 게 아닌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에어팟 실버였다.

“웬 에어팟이여, 그런 젊은이들 물건이 노친네한테 어울리겠어?”

정씨는 내 핀잔을 들으면서도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왜 안 빼,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데?”

그러자 그가 히히 웃음소리를 내면서,

“지금 다 들리는데?”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어폰에서 은근히 빵빵 터지는 음악 소리가 새는 것이 들렸다. 내가 더욱 괘씸해서 화를 내니까 그는 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는 요새 애플 이벤트 중계도 안 봐, HearU 못 들었어? 이게 참 진짜 신기하긴 신기하네.”

“뭐여, 그게?”

정 씨는 이어폰을 계속 낀 채로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애플이 이제 노인용 효도폰만 내놓는 게 아니라, 노인들을 위한 에어팟도 하나 내놓았다고 한다. 애플에서 처음 내놓은 에어팟과 의도적으로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한때 그 이어폰을 끼고 다니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늙었으니까, 향수를 되새기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 디자인이 워낙 콩나물 대가리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건 HearU인가 하는 좀 당황스러운 작명 감각을 가진 기능이었다. 원래 이어폰에 노이즈 캔슬링 용으로 사용되는, 외부의 음파를 받는 마이크가 장착되어 있었는데, 이 장치로 원하는 소리만 받아서 더 크게 키워 들려준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애플의 휴대폰에만 설치할 수 있는 인공지능 앱이 알아서 중요한 소리를 선택해 준다고 했다. 발표회에서는 이를 통해 음악을 들으면서도 외부의 중요한 말에 집중할 수 있다, 뭐 이런 얘기를 했다. 생활에 배경음악을 깔라 비슷한 캐치프레이즈를 썼던 것 같다.

한국인들이 보기엔 그냥 뛰어난 보청기 기능이었다. 귀를 뭐로 막고 다른 사람 말을 듣는 건 보청기를 단 노인이 아니고서야 용납될 일이 아니었다. 청인들도 귀에 장치를 장착한 채로 대화를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또 그런 건 전혀 신경 안 쓰니까.

정 씨는 원래 쓰던 보청기보다 그 에어팟 실버란 놈이 훨씬 좋다고 그랬다. 보청기는 들리는 소리를 죄다 확장해서 피곤하고 듣기 싫은 소리들도 많이 들리는데, 이 물건은 귀신같이 자기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소리를 잡아서 들려준다는 것이었다. 음악을 아무리 빵빵하게 틀어도 필요한 건 정확히 들린다고 참 좋아했다.

“내가 제일 놀란 게, 얼마 전에 버스 타고 가는데 말이야. 젊은이들이 요즘 유행하는 새로 나온SNS 한다고 시끄럽더라고. 가상 현실 게임 이야기 하는데… 버스서 떠드는 게 말세다 싶어 혀를 끌끌 차고 에어팟 실버를 꼈거든. 좀 있으니까 훨씬 작은 버스 안내 방송 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아주 또렷하게 들려오더라. 이렇게 신통방통한 게 다 있나 싶었지.”

“젊은이들이 하는 SNS?”

“어. 이름이 초음파통신이었나. 옛날에 인스타그램에서 갈라진 데서 만든 건데, 자기 지금 셀카 찍어서 올리면 AI가 알아서 상황이랑 감정 분석해주고 거기에 얼굴까지 예쁘게 필터링 해서 올리는 거 있잖아. 거기 글 올린다고 막 버스에서 떠드는 거야... 하여튼,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소음도 완전 차단되면서 필요한 소리만 들려주더라니까. 보청기보다 좋아 이게.”

그 말을 듣고 나도 호기심이 동해서 한 번 들려달라고 했다. 그는 흔쾌히 이어폰 두 짝을 귀에서 빼서는 내 귀에 꽂아주었다. 에어팟에서는 30년 전에 죽은, 한창 때는 막말과 탁월한 재능으로 유명했던 브릿팝 가수의 노래가 잔잔히 들려왔다. 같이 카페 안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는데, 카페의 소음은 어디로 가고 음악 소리 말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흔한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아닌가 싶었을 때,

“자, 한 번 들어봐! 어이, 양가!”

하는 정 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정 씨가 계속 헛소리를 하자 정말 그의 목소리와 브릿팝 노래만 들려왔다. 나는 이어폰을 빼고 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나를 보고 낄낄 웃었다.

그 놀라운 일을 겪고 나는 생전 쳐다보지 않던 애플 제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직 신체는 정정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감각은 속절없이 무너져서. 얼마 전에, 수십 년 전 라섹을 받은 눈에다 새로 나온 기묘한 이름의 눈 수술을 다시 받으니 이제는 귀가 말썽이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노화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에어팟 실버의 HearU인가 하는 기능을 쓰려면 일단 휴대폰부터 애플 것으로 바꿔야 했다. 나는 중고로 3세대 뒤떨어진 아이폰 실버 버전을 하나 구했다. 내가 한창 청춘 시절일 적 나온 아이폰 X에서 32세대 뒤의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아이폰 XXXXII 실버 이렇게 짓지 않고, 어쩌고 2 저쩌고 이런 식으로 또 이름을 한번 갈아 엎은 기종이었다.

아이폰으로 휴대폰을 갈아치우고 바로 에어팟 실버를 사기에는 중고 아이폰도 너무 비쌌다. 나는 다음 연금이 들어오는 날까지 새 휴대폰을 가지고 놀면서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 정 씨는 아직도 HearU 달린 에어팟 실버 안 쓰는 사람도 있냐면서 나를 놀리는 데 재미가 들었다.

“이런 최신기술은 빨리 탑승해야 하는 거 몰라? 가즈아 기억 안 나 가즈아?”

그는 정말 수십 년은 된 인터넷 유행어로 장난을 쳤다. 20세기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 전부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헛소리였다. 40년 동안 친하게 지냈을 정도로 정 씨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런 면은 싫었다. 자기가 아직 젊은 줄 알고, 젊은 말투를 쓰고, 수십 년 전에 한물 간 유행어를 쓰고. 그래서 한 소리 했다.

“좀 나이를 곱게 먹지, 70대가 돼서도 그런 말을 하고 그러나. 우리 젊을 때도 별로 보기 좋은 유행은 아니었는데 그게.”

내가 그렇게 반응하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세상에 곱게 늙는 게 어디 쉽냐? 중장년까지야 멋있게 나이 들 수도 있는 거지만, 노인 돼서 안 추해지기가 더 힘든걸. 젊은 시절에 다 써버린 품위의 밑바닥까지 긁고 있으면 그게 노추지.”

라고 그랬다.

“아니 왜 그래, 요즘 기대 수명이 120세인데... 아직 한창이야.”

“야, 내가 너 같은 노친네 볼 때마다 기형도 시를 인용한다.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고... 정년 퇴직이 70살인데 그 두 배 살아서 뭐하누?”

그는 항상 늙는 이야기만 나오면 늙는 건 좋을 게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그랬다. 듣기 싫었다. 나는 약속 장소를 빨리 떴다. 그래도 그의 귀에 계속 꽂혀 있던 에어팟 실버는 참 탐났다.

휴대폰이야 중고로 사서 깨끗이 소독하면 된다 싶어도, 귀에 꽂는 이어폰은 도통 중고로 사고 싶지가 않았다. 인터넷 중고 매장을 요리조리 둘러봐도 매물이 없었다. 뉴스를 보니 에어팟 실버가 그렇게 잘 팔린다고 난리였다. 노인용 라인업을 내놓은 것이 새로운 애플의 혁신이었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나는 그 꼴을 보고 효도폰 내놓은 건 다른 회사들이 훨씬 먼저인데, 뭐만 하면 혁신이네 하는 좀 비뚜름한 생각도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다시 내 앞에 놓인 에어팟 실버로 눈을 돌렸다. 이어폰에 꼬박꼬박 존대를 하던 젊은 점원한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기로 했다.

“그런데 이것도 그 음성 명령 밖에 안 돼요?”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겠어요, 고객님?”

나는 머리를 약간 갸우뚱했다.

“아니, 그, 재생, 다음 곡 들려줘, 이런 식으로 입으로 말해야 하는가 싶어서. 나는 그냥 이어폰을 손으로 터치하거나 버튼이 있는 게 훨씬 더 낫더라고.”

“아하, 아뇨, 대화형 인터페이스도 되고 제스처도 됩니다. 고객님.”

대화형 인터페이스, 젠장. 21세기 중후반을 살아가는 나 같은 노인네한테는 그것이 제일 적응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아무리 현대 문물에 잘 적응하고 교양 있게 늙어가려고 해도 도저히 기계에 대고 말하는 건 자연스럽게 할 수 없었다.

막 그럴싸한 AI 스피커가 출현하고, 개인 AI 비서가 휴대폰에 장착되기 시작했을 때였을 것이다. 나는 도저히 왜 인공지능에다 대고 말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말을 걔들이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결과도 개판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는 아이폰을 쓰지 않았고, 이건 친구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그가 “시리야, 30분만 있다가 깨워줘”라고 말했는데, 휴대폰이 30분 뒤에 알람을 틀어주긴 했다고 한다. 근데 그 알람 이름이 ‘10000’으로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말도 못할 위화감을 느꼈다. 거기다가 기계에 대고 말하는 것 자체가 혼잣말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자고로 기계로 하는 작업이란 버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칠 수 없는 구시대적 사고였다. 어린 시절 폴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갈 때 화면에 물리적 버튼이 없고 가상 버튼만 있어 좀 기분이 이상했지만, 이건 그래도 빠르게 적응했다. 가상 버튼을 눌러도 휴대폰이 살짝 진동하긴 했으니까. 그것들을 누르는 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편리했다.

배달 앱에서 내가 직접 원하는 피잣집 이름을 대고 페퍼로니 피자 세트에 치즈 오븐 스파게티, 디핑 소스 추가 버튼을 하나씩 누르는 것이 AI 스피커에다 대고 “페퍼로니 피자 세트에 치즈 오븐 스파게티, 디핑 소스 추가해 줘.”라고 소리지르는 것보다 시간도 덜 들고 민망할 일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 같은 늙은이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모두가 대화형 인터페이스를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러다 설날에 8살짜리 조카가 휴대폰을 쓰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든 아이들이 마인크래프트에 미쳐 있고 그 게임이 시장서 1위인 것도 정말로 놀라웠다. 또 조카가 휴대폰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작은 아이 궁금하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휴대폰의 인공지능 비서에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다. 대화로 요리조리 정보를 찾아나가는 모습은 우리 세대가 마우스와 키보드로 웹서핑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인공지능 스피커로 영어공부를 하는 모습이 말도 안되는 광고에서나 나오는, 연출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카는 그걸로 30분씩 영어 공부도 하는 것 같았다. AI 스피커에게 교육받은 조카는 까다로운 r이나 th 발음도 곧잘 해내곤 했다.

조카는 오랜만에 본 나를 좋아해서 그 설 연휴 동안 내 옆을 졸졸 따라다녔다. 우리 집은 제사 때마다 쓰이는 지방을 컴퓨터 프린터로 A4 용지에 인쇄하고 그걸 잘라다 썼는데, 그 일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조카는 내가 컴퓨터로 지방에다 어려운 한자를 쓰고 인쇄하는 모습을 보더니 호기심이 생겼는지, 나 보고 이것저것 물었다. 아이는 내가 키보드와 마우스를 그렇게 빠르게 다루는 걸 신기하게 여겼다. 그 모습이 워낙 귀여워서 옛날 프로게이머처럼 일부러 헛손질까지 해가며 마우스를 더 빨리 굴렸다.

야속한 세월은 흘러 언제까지나 작은 채로 남아있을 것 같던 내 조카는 유능한 엔지니어가 되었다. 최고 인기 게임은 마인크래프트가 아니라 듣도보도 못한 가상현실 게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실버라는 이름이 붙은 전자제품을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그, 말로 조종하는 게 워낙 불편하다 보니까요. 또 공공장소에서 말로 조종하는 건 아무래도 좀 시끄럽지 않은가 허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객님. 2018년에 쓰시던 에어팟이랑 똑같이 사용 가능하세요. 저희가 옛날에 쓰시던 분들 감성을 생각해서 제스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거든요, 고객님. 그리고 요즘은 음성 명령 쓰셔도 아무도 뭐라 안 하시거든요. 고객님이 너무 친절하신 거라고 생각하셔도 될 거에요!”

그렇다면 오른쪽 귀를 한 번 쳐서 곡을 일시정지하고, 두 번 쳐서 다음 곡으로 넘어갈 수 있으며, 모드 전환도 가능하다는 말이지. 나는 지갑을 꺼냈다. 젊은 점원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계산하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내가 아이폰에다 에어팟 실버 앱을 설치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나는 손으로 버튼을 눌러가며 설치하려고 했는데, 그가 그냥 아이폰에다 “시리, 에어팟 실버 설치해 줘.”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끝냈다.

비싼 값을 내고 나는 에어팟을 찬찬히 톺아보았다. 큰 돈을 내고 산 물건이라 그런지 옛날에는 알비노 콩나물 같던 것이 이제 보니 꽤 깔끔하고 세련됐다. 분명히 수십년 전 2017년에 처음 본 그 물건이랑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포장을 뜯어 귀에 껴 보니 과연 무게중심이 귀 안으로 묵직하게 눌리는 것이 잘 빠지지 않겠다 싶었다. 나는 포장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매장 밖으로 걸어나왔다. 신사 귤나무길에 올 때 들리던 그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 내 시선에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목소리만 명확히 들렸다. 필요한 소리만 정확히 들려주고 나머지 소리는 완전히 차단한다는 게 참 신기했다. 나도 그때 처음으로 에어팟 실버를 끼고 나온 정 씨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걸었다.

오늘은 신촌에서 정 씨를 보기로 했다. 나는 지하철에 올라탄 다음 신형보다 3세대 쳐진 아이폰을 꺼냈다. 거울에 문득 내 모습이 비쳤다. 귀에는 하얀 콩나물 꼬다리를 꽂고, 손에는 알루미늄으로 깔끔하게 마감된 휴대폰을 들고, 명품 코트를 걸친 채였다. 만족스러웠다.

그래, 내가 70대여도 이 정도면 품위있고 트렌드를 따라가는 모습이지. 완전히 젊은이처럼 살 수는 없어도 젊게 사는 구석이 있어야 사람들도 나를 존중하는 거 아니겠나 싶었다. 곱게 늙기가 힘들고 청춘은 빠르게 시든다지만 아직 수십 년 치 생기는 남은 몸이다. 나는 살아있다. 아직 활기차게 살아있다.

소비 하나로 자존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노약자석이 텅 비어 있었지만 거기 앉지 않았다. 일반 좌석은 꽉 차 있지만, 거기 앞에 서 있어도 젊은이들이 왜 노약자석에 앉지 않느냐는 눈치를 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꼿꼿이 문 근처에서 봉을 잡고 섰다. 골치를 썩이던 무릎도 오늘따라 괜찮았다. 역시 사람은 소비를 해야 날개를 단다.

약속한 신촌역 1번 출구로 올라왔다. 천천히 계단을 걸어올라가자 얼굴에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다. 신촌도 참 오랜만이었다. 건물은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도로 모양은 여전했다. 매뉴얼에서 본 대로 귀에 낀 에어팟을 톡톡 두드렸다. 일반 모드, 대화 모드, 일반 모드를 지나 이어폰의 작동이 중지됐다. 소음이 쫙 깔렸다.

먼 곳에서 정 씨가 나를 알아보고 크게 소리질렀다.

“어이, 양가!”

얼굴이 화끈했다. 저 사람은 어찌 부끄러운 줄 모르고 거리에서 사람 이름을 저리 부르나. 나는 빠르게 그가 있는 쪽으로 종종 걸어갔다. 그도 귀에 흰 에어팟 실버를 끼고 있었다.

“아이, 너는 뭔 사람도 많은 데서 그래. 늙은이가 보기 안 좋게.”

“이제 납골당 예약해 놓은 몸인데, 뭐 어때? 그리고 자네도 드디어 에어팟 샀구만 그래?”

“민폐란 말이야. 민폐. 좀 점잖을 수 없어?”

“어차피 노친네들은 어딜 가도 민폐여.”

하면서 정 씨는 나를 근처 치킨 집으로 데려갔다. 홍대 쪽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문득 예전에 그 길 중간의 버스정류장서 서 있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보니 내가 청년 때 말인데...”

나는 수십 년 전의 기억을 혼잣말처럼 정 씨에게 늘어놓았다.

2018년 여름, 아직 한반도 전체가 지금처럼 열대 지역이 되지는 않았지만 정말 미친듯이 더운 때였다. 길 한가운데 있는 버스 정류장서 서 있으니, 도로에 반사되는 햇볕이 품은 열이 참 뜨거웠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계란 몇 판을 깨 넣으면 장관일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더워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고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무슨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었다. 웬 노인 한 명이 도시버스 기사랑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파란 도시버스는 몇 분째 거기에 정차 중인 듯 했다. 그 뒤로 버스들이 줄줄이 서서 빵빵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내가 타야 할 버스도 있었다. 난 버스를 탈려다가 그 실랑이에 흥미가 생겨서 그 곳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뒤에 웬 카트를 동반한 채였다. 카트에는 종이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거기서 물이 질질 흘러나와 블럭을 적셨다. 불쾌한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보니 그 카트 뒤에는 굉장히 난감해 보이는 대학생 쯤 되는 사람도 한 명 서 있었다.

“아니, 버스에서는 생선 갖고 못 타신다니까요?! 이거 다 썩는 냄새 나는데, 승객들은 어떻게 해요?”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버스 기사가 소리질렀다. 아하, 이제 상황이 이해가 갔다. 노인은 행상인 것이다. 이 푹푹 찌는 여름날에 푹푹 썩어가는 생선을 누가 사겠나. 아마 오늘 장사도 허탕 쳤겠지. 대낮부터 포기하고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셈일 테다. 카트 뒤에 서 있는 대학생은 카트를 들어서 버스 위로 올려주려고 한 착한 대학생이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버스에서 쏟을 수 있거나 냄새나는 음식을 들고 타면 버스 기사가 탑승을 거부할 수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났다. 버스에 딱지도 붙어 있던 것을 기억했다. 아마 얼마 전부터 시행하기 시작한 조례였던가 했다.

하지만 버스 앞에 선 노인은 완강했다. 그는 어떤 수를 서서든 버스 안으로 들어가려고 기사를 밀어냈다. 기사도 단호히 그를 저지했다. 노인의 카트에 실린 생선 상자에서는 정체불명의 침출수가 뚝뚝 떨어졌다. 그 뒤에 서 있는 학생은 정말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입맛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아니, 내가 내 돈 내고 버스 탄다는데, 왜 못 타게 혀, 왜!”

버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노인과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 뒤로 밀린 버스는 줄줄이 열 대쯤 되어 보였다. 기사는 화가 나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크게 웅얼거렸다.

그때 노인이 최후의 수를 택했다. 버스 앞에 쭈그려 앉은 것이다.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절절 끓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차마 드러눕는 것은 노인도 포기했다. 버스 기사는 하늘 위로 한숨을 푹 쉬고는 노인을 말렸다.

“아이 씨, 이게 법 때문이라니까요, 법, 하이고, 돌겠네, 그런 법이 새로 생겼다니깐!”

“난 그런 법 처음 듣는다! 아이고, 나라가 어른을 버스에도 못 타게 허냐!”

그런 법을 처음 듣는다니, 뉴스에도 나오고 버스에서도 벽면 틈마다 붙어 있었는데 대체 무슨 소린가 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이제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앞에서 문제의 버스가 꽉 막고 있으니 도통 다른 버스를 타도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기다리던 버스 앞에 선 채로 다들 그 꼴을 구경만 했다.

그때 기사가 끈을 놓았다. 그는 카트를 밀치고 노인을 달랑 들어서 보도블럭으로 집어던지다시피 했다. 박스에서 생선들 몇 마리가 쏟아졌다. 노인은 뜨거운 바닥에 앉아 곡을 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광경이었다. 그때 옆에서 나랑 비슷한 나이의 대학생 한 명이 지나가더니 한 마디 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맞아, 진짜로.”

그의 옆에 있던 친구도 맞장구를 치면서 버스를 탔다. 나도 황망히 버스에 올랐다. 창문 밖을 지나가는 동안 나는 그 뜨거운 여름의 보도블럭 위에, 쓰러져 있는 노인과 썩은 생선들을 지켜보았다. 나는 이유모를 지독한 죄책감을 느꼈지만, 왠지 약간의 안도감도 들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끝냈을 때, 우리는 치킨 집에 자리를 잡고 주문도 한 채였다. 아직 주문한 닭은 나오지 않았지만 2000cc 맥주 피처 하나가 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뭔데?”

정 씨가 물었다.

“글쎄, 내가 그 노인네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세상이 바뀌는 거 잘 따라가고, 지금 사는 데 안주하지 않고.”

“그래서 에어팟 산 거여?”

그는 자기 귀에 낀 것이랑 똑같은 내 것으로 눈을 돌리면서 얘기했다.

“어. 아무리 늙은 티 안 내려고 해도, 손에 생기는 주름이랑 청력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 보청기를 사야 하는가 했는데. 이게 참 좋구만.”

“저길 보라고.”

내 앞에 앉은 노인은 턱으로 근처 테이블을 가리켰다. 쳐다보니 젊은이들 다섯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뭘 보라는 거야?”

“저기서 두 명은 술도 안 먹고 폰이나 하고 있잖어.”

정 씨는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학생들 중 두 사람은 술판에 제대로 끼지 않고, 한 쪽 귀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아하, 음성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부모님 세대는 문자보다는 아무래도 전화가 필요하다 그랬었는데, 내 때는 글로 된 인터넷 메신저를 쓰는게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됐다. 그래서 술자리 때 고개를 푹 박은 채로 휴대폰을 보고는 했지. 그런데 AI 스피커에 길들여진 다음 세대는 속삭이더라도 말하는 것이 훨씬 편하단다. 사고 위험도 적다 그러고.

“참,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시끄럽지도 않나.”

나는 고개를 돌리고 푹 익은 닭가슴살 한 쪽을 내 접시에 담으면서 말했다.

“모든 꼰대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지.”

“아니, 그래도 다들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폰에다 말하고 있는게 예의야?”

“보게, 어차피 친구들 있는 자린데, 우리도 그런 자리면 폰으로 잠시 메세지 확인하고 그랬잖어?”

뜨끔했다. 나는 공연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휴대폰을 매만졌다. 세로로 거의 한 뼘은 되는 거대한 크기였다. 아이폰 실버. 요즘 휴대폰 시장에서는 노인들 빼고는 사지 않는 물건이다. 눈이 흐리거나 음성으로 조작하는 것이 익숙치 않고서야 넓은 화면에 큰 메리트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대놓고 앞에서 말하는 건 다른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네가 젊게 살려고 해도 안 되는 거야. 겉은 최대한 옛날 노인들처럼 안 보이려고 해도 마음은 못 따라가지. 저 친구들이야 입으로 말하는 게 우리보다 훨씬 익숙한 거고, 고개 쳐박고 폰이나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기분이 꿍했다. 이 친구는 항상 이렇다. 나이야 싫든 좋든 먹는 것이고, 나는 그저 추해지지 않고 싶지 않을 뿐인데 그 뜻을 몰라준다. 거기에 반박할 기분도 들지 않아서 나는 묵묵히 맥주를 마셨다.

정 씨는 내가 답을 않는 걸 보고는 주제를 바꿔서 떠들기 시작했다. 배우자 이야기, 자식 이야기, 다 나랑은 상관이 없는 말들이었다. 어쩌다 40년 동안 이런 사람이랑 친했나 싶은 환멸과 혐오까지 마음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식욕은 놀라웠다. 늙으면 다 똑같다 하는 인간이 닭은 혼자 다 먹어치웠다. 나는 계속 술만 홀짝여서, 큰 맥주 피처 하나를 나 혼자 거의 다 비웠다. 헛소리를 하며 떠들던 그가 취하기는 더 취했다. 나는 그를 도로로 끌고 나가서 적당히 손을 들었다. 지나가던 자율주행 택시 하나가 멈춰서 문을 열었다. 택시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택시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자 귀신같이 강동구의 자기 집 주소를 말했다. 나는 감정을 좀 실어서 그를 차 안으로 집어던졌다. 운전수 없는 차의 자동문은 잠시 반짝이며 나를 기다렸다. 내가 고개를 살짝 흔드니 문이 닫혔다. 자동차는 곧 도시의 점점이 빛나는 불빛들 사이로 미끄러져 갔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신촌에서 홍대 거리로 향하는 거리의 중간쯤, 청년들이야 다 각 극점에서 한창 떠들고 놀고 있을 것이다. 이 곳은 주저앉아 노는 사람들보다는 어느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열시 반이었다.

술이 좀 들어가서 몸이 달따올랐다. 아이폰으로 오래된 락을 하나 틀었다. 베이스 라인과 드럼 비트에 맞게 움직이며 걸었다. 오랜만에 홍대 쪽으로 좀 가볼까 싶었다. 오랜만이라 함은 마지막으로 그 곳에 들른지 십 년 단위의 시간이 지났다는 말이다. 40이 넘은 이후로 그 젊음의 거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 해도 신성한 곳을 모독한 기분이 들고 절로 움츠러들었으니까.

하지만 나 정도면 예의 바르고 괜찮은 노인네지. 나이 들었다고 사람들을 어이 없이 윽박지르지도 않고, 더러운 말도 안하고. 나는 존중 받을 만큼 괜찮게 산다. 맥주 몇 잔 들이키고, 잠시 그 곳의 벤치에 앉아 신성한 젊음이 노는 모습을 잠시 둘러보는 정도야 그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 년 만에 터벅터벅 걸어 들른 홍대는 별천지였다. 과연 한때 마포구에서 임대료가 가장 빨리 오르던 거리다웠다. 온갖 희귀한 음식을 요리하는 식당과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놀이를 제공하는 가게들이 가득했다. 나 때는 여기서 스프카레를 참 맛있게 먹었는데.

젊은이들은 나를 신경쓰지 않고 자기 노는 데 바빴다. 그런 따스한 무관심이 좋았다. 나는 에어팟을 껐다. 좀 헐거운 귀마개를 한 것처럼 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시끌벅적한 소음이 마음에 들었다.

그때 가상현실 어쩌고 하는 게임방이 눈에 띄었다. 초고해상도의 가상 오감을 지원한다는 문구가 간판에 어지러이 쓰여 있었다. 옛날 VR 게임방 같은 느낌일까. 말만 많이 들어보고 시도는 한 번도 안 해봤네. 취기를 빌어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나는 게임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잠시 둘러보니 여러 캡슐이 있었다. 그 캡슐 안에 들어가서 가상현실에 접속하는 건가보다.

“어, 어서오세요.”

카운터에서 의자에 늘어지게 누워 있던 점원이 자세를 약간 세우고 나를 맞았다. 위의 메뉴판에는 한 게임 얼마 얼마, 이렇게 쓰여 있었고, 그 뒤에 우주에서 총 한 자루 들고 외계인과 싸우는 전사가 그려져 있었다.

“예, 그, 내가 여기가 처음이거든요.”

“아, 괜찮으세요. 초음파통신으로 접속하시면 되구요.”

“초음파통신?”

아, 맞다. 그 정씨가 말했던 요즘 애들이 한다는 SNS 비슷한 거?

“네, 계정 없으세요?”

“글쎄, 나는 인스타그램 ID밖에 없는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르신, 요즘 누가 인스타를 해요.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거를.”

“아, 그런가…”

점원은 초음파통신에 가입해야 캡슐 안에서 접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서 앱스토어에 초음파통신이란 이름을 검색해봤는데 도통 나오는 것이 없었다. 초음파로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초음파통신이라는 거는 그 SNS 서비스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컨텐츠 이름이고, 앱 이름 자체는 또 돌고래토크니 뭐니 해서 달랐다. 점원은 웃으면서 시리에게 명령을 내려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해 주었다. 그러자 휴대폰이 나보고,

[원하는 닉네임을 설정하세요.]

라고 말하길래, “어… 남극앵무로 해줘요.”라고 했는데 [닉네임이 남극앵무로로 설정되었습니다]라고 떠서 “아니, 남극앵무로가 아니라 남극앵무라니까.”라고 말하고 하는 번잡한 과정을 또 거쳤다.

그 다음에 또 무슨 팔로워니 친구니 하는 목록이 화면에 잔뜩 나왔다. 이놈의 SNS, 그러니까 소셜 미디어는 페이스북 이후로 전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뭐가 다르다고 사람들이 이리 몰려가고 저리 몰려가는지 원. 나는 10년 전 연락이 끊긴 친구까지 추천 친구 목록에 뜨는 게 섬뜩해서 앱을 얼른 종료했다.

점원이 내 휴대폰을 들어다 캡슐에다 갖다대자 캡슐이 푸슝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캡슐 안에는 사람 한 명이 누워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한 게임에 20분이에요.”

“아, 예.”

캡슐 안에 들어가서 누우니 캡슐이 닫혔다. 느슨했던 공간은 내 몸에 맞춰서 변형됐다. 굉장히 편했다. 기계 안에서 내 닉네임을 부르고 환영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는 것 같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히어로 영화의 쿠키 영상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어둠 속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편하긴 한데 내가 하려고 한 건 가상현실 게임이지 완전 편한 침대 체험이 아닌데. 나는 몸을 좀 움직였다.

“여기 고장난 거 아니요?!”

그때 눈 앞에 게임사의 로고가 나타났다. 스타더스트 스튜디오라는 이름과 우주선 하나가 우주의 심연을 가르는 모습이 내 주위를 휘감고 돌았다.

[안녕하세요, 남극앵무님! 돌핀토크의 버츄얼 리얼리티 스페이스 컨쿼러 4K에 오신 것을…]

하고도 기계는 한참 떠들었다. 나는 그걸 다 멍청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캡슐이 푸슝 하고 열렸다. 방금 전에 점원은 퇴근한 모양인지 다른 점원이 다가왔다.

“시간 끝나셨어요 고객님~”

“나는 아무것도 못 했는데 끝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점원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여기서 뭐라뭐라 소리지르면 진상 취급 받는 거 아닌가 불안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했는데 돈 내면 너무 억울하잖아. 요즘 물가도 비싼데… 내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점원이 당황해서는 품에서 태블릿을 꺼내 이리저리 두드려 보았다. 그는 그러다 당황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고객님. 안에서 아무 말씀도 안하셔서…”

“말을 해야 하다니?”

내가 퍽 노기를 띄었지만 점원은 친절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안에서 가상현실 게임이랑 대화를 해야 게임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 보는 것처럼 멍청히 누워 있었으니 아무것도 안 되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이 없었잖수.”

내가 볼멘소리로 따지자 점원이 “그래도, 저희가 보편적인 어플리케이션이랑 비슷하게 돌아가셔서요~”하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보편적인 프로그램도 못 다루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누워서 마구 따졌다. 나 같은 GUI에 익숙한 사람은, 버튼을 누르는 데 단련된 사람은 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하고.

점원은 무슨무슨 말을 하다가, 잠시 고개를 돌린 다음 다시 화색을 띈 얼굴을 보여주면서,

“10분 서비스 드릴 테니까 재미있게 즐기세요, 고객님.”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캡슐이 푸슝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시 닫혔다. 편안했다. 그래, 나는 소비자의 권리를 되찾은 것 뿐이야.

가상현실 캡슐이랑 대화를 나누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시작한다고 소리를 지르니까 무슨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어야 한댄다. 캐릭터 만드는 건가 싶어서 쭉 따라갔다. 내 얼굴을 그대로 딴 아바타의 피부 곳곳에 주름이 깊게 파여 있는 걸 보고 난 소리를 질렀다.

“아냐, 더 젊게, 젊게!”

[알겠습니다, 남극앵무님.]

몇 분의 실랑이 끝에 아바타는 2026년에 30대의 내가 PT를 하루 하고 때려치지 않았더라면 됐음직한 모습이 되었다. 좋다고 말하니 갑자기,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시점이 확 바뀌었다. 나를 아바타에 접속시키느니 무어니 하는 것이었다. 내 손을 바라보니 주름 하나 없고 핏줄이 건강히 드러난 젊은 손이었다. 하늘은 연한 분홍빛이었고 땅은 노란색이었으며 온갖 기기묘묘한 금속 구조물이 땅에 서 있었다. 아, 이게 가상현실이구나 하고 주변을 좀 둘러보았다.

분명히 감각은 굉장히 현실과 가까웠지만 완전히 현실적이지 않았다. 나는 심한 멀미를 느꼈다. 구역질을 하면서 나는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때 세상이 암전하더니 캡슐이 퓽 하고 열렸다. 현실의 세상으로 이리 갑작스레 돌아오자 나는 너무 어지러웠다.

점원 셋이 멀리서 뛰어왔다.

“어르신, 빨리 나오세요, 빨리!”

하고 그들은 나를 캡슐에서 잡초 뽑듯 끌어내렸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나는 땅바닥에다 온갖 것들을 게워냈다. 점원 하나가 질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러고보니 술 냄새가 나네. 늙으신 분이 가상현실 게임을 하는데 술을 마시고 오면 어떡해요?!”

“미안해요, 내가 이런 걸 처음 해봐서…”

익숙한 일인지 한 명은 청소 도구를 가지러 어디 다용도실이 있을법한 곳으로 사라졌다. 남은 점원 둘이 나를 부축하는 척 하면서 가게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나는 대문 밖 보도로 튕겨나가 휘청거리며 섰다. 점원 둘은 인사도 없이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들 둘이 가게 내부로 들어가면서 지껄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유, 어쩜 이리 늙은이들은 죄다 진상들이냐.”

“그러니까, 컴퓨터랑 이야기 안하고 작동 안한다는 건 예사에, 술 마시고 가상현실 기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딨어?”

“그 귀에 낀 것도 진짜 구식이야. 어쩜 그런 못생긴 걸 끼고 다닐 생각을 할까?”

“내 말이!”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맞아, 맞아, 나도.”

그 목소리를 듣고 다리가 풀려 길 위에서 넘어질 뻔 했다. 내 자아를 받치던 마음 속의 한 기둥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꺾인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귀에 낀 에어팟 실버를 두드려서 음소거 모드로 설정을 바꿨다. 도시에 내린 짙은 소음이 갑자기 훅 하고 사라졌다.

기다시피 횡단보도를 건넜다. 보도 블럭 위로 올라가 주저앉았다. 차려 입었던 코트에 먼지가 잔뜩 묻었다. 나는 갑자기 푹푹 썩는 생선 냄새를 맡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 쓰레기도 없으니 이건 환각인가. 하늘을 쳐다보니 오른쪽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열대야로 자글자글 타오르고 있는 보도 위에 주저앉아 내가 바라지도 않았던 노추를 억울한 심정으로 곱씹었다.

댓글 7
  • No Profile
    희야아범 18.11.19 15:11 댓글

    하하하! '톺아보다'에서 빵 터졌습니다. 재밌게 잘 봤습니다.  

  • 희야아범님께
    No Profile
    글쓴이 너울 18.11.19 15:39 댓글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 톺아보다 농담이 통했다니 다행입니다. 

  • No Profile
    글쓴이 너울 18.11.19 15:39 댓글

    그런데 이 글 조회수가 왜이렇죠?

  • No Profile
    희야아범 18.11.19 23:12 댓글

    아, 제가 가는 커뮤니티에 링크로 소개해서 그쪽 분들이 좀 오신 거 같아요.

  • 희야아범님께
    No Profile
    글쓴이 너울 18.11.19 23:55 댓글

    세상에, 감사합니다.

  • 너울님께
    No Profile
    유이립 18.12.02 19:42 댓글

    HA. HA ^^ 금방 크게 되실 것 같네요!

  • 유이립님께
    No Profile
    글쓴이 너울 18.12.02 23:05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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