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한국 어딘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는 어느 한 도시 안에, 여러 사무실과 카페와 빌딩의 숲을 지나, 여러 고층 아파트들이 당당히 자라난 풍경 그 앞에, 작은 보습 학원과 마트 간판을 단 청과점이 있는 한 4층짜리 상가 건물 1층의 편의점 옆에,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답니다.

‘에버마인드’라는 그 가게의 이름만 보면 누가 아이스크림 가게인 줄 알겠어요? 그래도 간판에 그려진 먹음직스러운 색색이 눈꽃송이들과 사람들이 행복 가득한 얼굴로 물고 있는 아이스크림들을 본 사람들이 가게의 문을 엽니다. 현관에 달린 종에서 가벼운 환영의 소리가 퍼집니다.

이 작은 가게는 8개월 전에 들어선 이후로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구한 적이 없습니다. 주말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오후 2시에서 자정 사이에 들어서면 항상 한 사람이 당신을 반깁니다. 가게의 모든 일을 맡아 보는 조해언 씨가요.

해언씨 뒷편을 바라보면 메뉴판이 있는데요,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어요.

‘아이스크림 – 시가, 상담 후 판매’

어떤 사람들은 메뉴판을 보고 눈을 잠시 굴리다가 가게 밖으로 튀어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해언 씨한테 머뭇머뭇 말을 걸고. 그러면 해언 씨는 또 쾌활하게 웃으면서,

“네, 아무 이야기나 하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사람들은 또 어떤 아무 말이든 우물우물 거리는데, 그 꼴을 보는 게 참 재밌습니다. 몇 분 정도 듣다가 딱 적당하다 싶으면 해언 씨가 아이스크림을 퍼다 줍니다.

어느 날은 한 파인트가 될 정도로, 어떤 날은 한 컵 만큼 담아 주고, “오늘은 가족이랑 먹어요.”라거나 “오늘은 혼자 맛있게 먹어요.” 하는 거죠.

그 특별함에 반해, 해언 씨랑 얘기하러 오는 단골들이 꽤 있는데요.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 단골 세 명과 에버마인드의 이야기입니다.

 

1. 대학원생 정예진 씨

예진 씨가 처음 에버마인드에 들렀을 때 시계는 거의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연구실에서 퇴근한 그녀는 요즘 부쩍 가슴이 무거웠습니다. 단 게 먹고 싶었지요. 바나나가 오늘따라 땡겼고요.

그녀는 집으로 걸어오다가 먼저 편의점에 들러 바나나 하나를 집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지금 땡기는 단 맛이 바나나의 자연스러운 단 맛이 아닌 겁니다. 열 두 시간이 넘게 다른 나라 말로 쓰인 논문을 읽고 온 그녀는 정말 진하고 느끼한 달콤한 게 먹고 싶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이 딱 맞죠, 딱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이던 겁니다.

예진 씨는 적당히 어디 프랜차이즈에 들러서 큰 아이스크림 버킷을 사려고 했습니다. 오늘은 집에서 혼자 다 먹을 수 있겠다 했죠. 그런데 또 걷다 보니 깨달은 것이,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가 커피가 주력인 카페 프랜차이즈처럼 흔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터덜터덜 걸어올 동안 아무 가게도 찾지 못했습니다.

‘집 앞 편의점에서 그냥 멜론 맛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을까’ 하고 예진 씨가 생각했을 때, 에버마인드 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처음에는 지나칠 뻔했죠. 그런데 간판에 아이스크림 콘 모양이 그려져 있는 거에요. 가게에도 불이 들어와 있었고요.

“무슨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이 이래.”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문 위에 달려 있는 종이 부딪히며 작고 예쁜 소리를 냈습니다. 가게에는 청소를 하고 있는 해언 씨만 있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 처음 오시는 손님이시죠?”

예진 씨는 당황했습니다. 사실 해언 씨가 손님을 받아들일 때에는 과하게 친근한 면이 있거든요. 예진 씨도 약간 쭈뼛쭈뼛 했지만,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그러자 해언 씨가 뭔가 한창 정리하던 걸 놓은 다음에 카운터에 약간 몸을 기댄 채로,

“우리 가게 이야기 들으신 적 있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예? 어... 아니요, 없는데요.”

“아~ 그러시구나!”

예진 씨는 가게 주인장이 자기 가게 들어봤냐고 대뜸 물어보니 이번에는 또 황당했죠. 그런데 해언 씨의 들뜬 태도는 우습긴 해도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5분 안에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예진 씨는 고개를 들어서 카운터의 윗쪽, 천장 아래의 벽면을 바라보았습니다. 보통 그 쪽에 메뉴판이 붙어 있잖아요. 커다란 녹색 칠판이 붙어 있긴 했습니다. 칠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 – 시가, 상담 후 판매.’

잠시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시가? 그러니까, 그 피우는 거 말고, 아니 당연히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배웠던 거 아니죠. 그러니까, 횟집 메뉴판 가면 귀한 물고기 이름 옆에 적혀 있는 그 시가요?

얼떨떨한 예진 씨에게 해언 씨가 카운터에 팔짱을 끼고 기대서 말했습니다.

“자, 말해 봐요. 이 야밤에 어쩌다 나온 거야.”

예진 씨는 이 이상한 분위기에 휘말려,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음, 그게, 오늘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11시에 퇴근했거든요. 진짜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아서... 당 충전해야겠다 싶어서 왔어요.”

이번에는 해언 씨가 놀랐습니다.

“아니, 뭘 그리 오래, 월 1억씩 주나 봐?”

“월 1억요? 거기서 0.5%만 매달 제때 받아도 좋겠네요.”

해언 씨는 잠깐 머뭇했습니다. 1억의 0.5%가 얼만지 계산하는 건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하고 한 달에 50만원 받는 건 상식이랑 배치되니까, 생각에 버퍼링이 걸리는 겁니다. 그러다 딱 정확한 답을 떠올렸죠. 뻔하죠.

“대학원 다니시는구나.”

예진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무슨 공부하세요?”

“임상심리학이요. 정신 질환 있는 사람들 평가하고, 치료하고...”

“재밌겠네. 내 전공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그래요? 무슨 전공이신데요?”

“아, 아니에요. 계속 말해요.”

해언 씨는 옅은 미소를 띄고 얼굴을 기울이며 끝없이 흘러나오는 예진 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가게의 가장 큰 조명을 껐어요. 어둑한 노란 빛이 두 사람을 밝혔습니다.

정예진 씨는 이제 대학원 2년차였습니다. 어떻게든 석박통합과정을 밟게 하려는 모교의 꾐을 뿌리치고 석사 과정만 진행하고 있죠. 처음 1년은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학위 논문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때를 위해 몇 년 동안 생전 상상도 못하던 통계학이랑 싸운 거였죠. 어떤 심리적 특성 두 개가 반드시 서로 연관이 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좀더 유식한 말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상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카페라떼 기프티콘 수십 개를 부리면서 한 달 동안 신나게 설문을 돌리고 보니까, 통계 분석 결과가 엉망인 겁니다. 어떤 ‘통계적 사기’를 쳐도 별로 쓸만한 값이 나오지 않았어요. 대체 논문에 쓸 수는 전혀 없는 결과였어요.

이건 사실 예진 씨도 모르는 일이지만, 예진 씨가 했던 연구와 완전히 똑같은 연구를 한 사람들이 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냥 좀, ‘아 이거 두 개 별로 상관 없어요.’ 하는 식으로 어디다 논문을 썼으면 예진 씨도 괴로울 일 없었을 텐데요. 하여튼 사람들은 좀 성공한 연구가 담긴 논문만 좋아하니까요.

예진 씨 마음 속을 가득 메웠던 들뜬 기분이 싹 무너졌습니다. 기프티콘 사느라 쏟아부은 돈도 돈이고, 날린 시간도 시간이고. 사실 뭐 지금부터라도 다른 쪽으로 다시 준비하면 되긴 하는 것이지만, 연구자로서 이렇게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것도 처음이었으니까요.

어,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까 말입니다. 벌써 학부 동기들은 어느 기업에서 몇 년을 일해서 얼마를 모았네 하는 얘기가 들려오고, 호봉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공무원 친구도 있고, 어떤 친구는 결혼을 한다고 하고 그러는 겁니다. 논문이 잘 풀리는 대학원 동기도 당연히 있고요.

그래서 요즘 종일 예진 씨는 나만 뒤처져 있다는 무거운 중압감에 짓눌려 있습니다. 오래 연구실에 박혀 있긴 했는데 사실 뭘 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답이 안 나오는 결과를 이리저리 매만졌는데, 역시 답은 안 나오고. 그러다 열한 시에 연구실 불 끄고 나온 거죠.

“뭐 알레르기 있어요? 아님 진짜 싫어하는 거라든지.”

예진 씨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거기까지 이야기하니까, 해언 씨가 물었습니다.

“네? 어, 키위?”

“아, 그럼 괜찮아요.”

해언 씨는 활짝 웃으면서 꽤 커다란 종이 버킷에다가 맛을 묻지도 않고 이것저것 아이스크림을 담았습니다. 예진 씨는 그걸 보면서 무슨 말도 못 하고, ‘바나나, 바나나...’ 하고 생각만 했어요. 다행히 해언 씨는 바나나 아이스크림도 꽤 푸짐하게 담았습니다. 바닐라, 바나나, 아몬드. 전부 달달하고 우유 맛이 진하고 시지 않은 아이스크림들이었습니다.

“만 천 원이에요. 너무 걱정 말아요. 어차피 근처 사람들, 그날 기분 좋은 사람만 SNS에 자랑하고 그러니까 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다들 불안해할 거야. 손님 보고 불안해할 사람도 많을 걸요?”

예진 씨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스크림을 받고, 카드로 결제하고, 꾸벅 인사한 다음에 가게를 나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약간 넘었습니다. 뒤돌아보니 해언 씨는 조명을 끄고 마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한 번 활짝 웃어 주네요.

예진 씨는 집에 돌아와 일단 찬 물로 세수를 한 다음에 거울을 한 번 보고, 자기 방 안으로 종이 버킷을 들고 와서 한 시까지 아이스크림을 먹었습니다. 차갑고 달콤한 맛이 혀를 휘감으니 기분이 사르르 풀리네요. 그러고 나서 양치를 하니, 그날따라 아주 졸렸습니다.

사실 최근에는 불안하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거든요. 그녀는 자기가 사람들의 우울과 불안을 공부하면서, 정작 자기 불안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큰 거 같아서 약간 웃겼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침대에 마음 편히 누웠습니다. 그리고는 꿈도 꾸지 않고 잘 잤습니다.

 

2. 세무서 공무원 김지수 씨

지수 씨가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다가, 가게 간판을 보고는, “무슨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이 이래. 꼭 무슨 스타트업 이름 같네.” 하면서 에버마인드에 처음 들어온 지는 한 달쯤 되었습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몸에 담배 한 갑 치 냄새가 배어 있었어요.

“처음 오시는 손님이시네. 담배 피우나 봐?”

해언 씨는 지수 씨를 보자마자 그 말부터 했습니다. 지수 씨는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왜 은근히 반말 하나’ 싶어서 잠시 기분이 확 상했는데, 아이스크림 시가 어쩌고 하는 메뉴판을 보니까 갑자기 호기심이 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습니다.

“상담은 무슨 상담을 해요?”

“그냥, 사는 이야기하시면 돼요. 아무 거나.”

“그럼 뭘 해주는데요?”

“이야기에 맞는 아이스크림을 줘요.”

“맛을 골라 준다구요?”

“양도 골라 주고.”

지수 씨는 해언 씨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요즘 참 별별 자영업 많다. 이래서 장사가 되나? 왠지 이름이 스타트업 같더만, 몇 달 뒤에 문 닫겠지. 그건 그렇고, 그래도 뭔가 재미는 있어 보인다.’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자 지수 씨는 무심코 입을 열었습니다.

“담배, 담배 많이 피우죠. 네. 끊어야 하는데. 오늘도 한 갑이나 피웠네.”

“언제 시작했어요?”

“한 1년 됐네요.”

“누가 가르쳐 준거에요?”

“누가 가르쳐 준 건 아니고, 일 시작하고 나니까 속이 터져서요. 다들 왜 그렇게 피우나 했는데요.”

“무슨 일 하시는데요?”

“저 세무서에서 서류 떼는 일 하죠 뭐. 영업신고하셨을 때 저 보셨을 수도 있을 걸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같은 공무원들 때문에 속 터지는 일이 하도 많고 그러니까, 우리가 속 터진다 하면 그것도 또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에이, 자기 속 터지면 터지는 거지, 왜 굳이 그런 말을 해요?”

지수 씨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예고 출신이거든요. 그림 그렸는데요. 제가 미술 한다고 해도 별로 그렇게 되게 잘 하는 건 아니긴 하지만, 잘 안 돼가지구요. 그래서 졸업하고 바로 공무원 준비했어요. 생각보다 적성에 맞아서 시험은 빨리 붙었는데. 일이 진짜 너무 재미가 없더라고요.”

해언 씨는 다음에 이 손님이 오면, 왜 굳이 그렇게 자기를 깎아내리는지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일을 덜 하고 쉬어 보려고. 사실, 사람들이 담배 피우는 시간은 또 꼬박꼬박 주잖아요. 그러면 잠시라도 일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계속 피우다 보니까... 그래서, 엄청 많이 피우게 됐어요. 솔직히 같이 예고 나온 애들한테 말하기 되게 민망하죠, 걔들 지금 학비 때문에 쩔쩔매거나 아니면 그냥 백수인 애들도 많은데. 되게 배부른 말인 거지.”

“에이, 뭐가 배불러요, 또, 뭐가 그리?”

“모르겠어요. 그래도 솔직히 그렇잖아요. 이제 안정적이고, 다시 그림 그릴 일 없다 싶은데, 그런데 걔들 그림 가끔씩 보는데, 또 되게 대단하고 잘 그리고, 나도 만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막 그런 생각 하다 보면 또 담배 한 대 물게 되는 거죠. 사실 이것도 그냥 핑계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원래 뭐에 중독되면 항상 해야 할 이유를 만든다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어쩌고 보면....”

해언 씨는 지수 씨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습니다.

“커피 맛 아이스크림 괜찮아요?”

지수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해언 씨는 고깔 모양 과자에다가 커피맛 아이스크림을 꽉꽉 채워서 건넸습니다.

“오천 원이에요. 그런데 손님.”

“네?”

“’담배 줄여야겠다.’라고 한 마디만 해 봐, 그럼 이천 원 깎아 줄게요.”

지수 씨는 이게 무슨 오지랖인가 싶었지만, 돈 내고 걱정하는 거면 나쁘지 않다 싶어서 건성건성 “담배 줄여야겠다.”라고 한 마디 하고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해언 씨는 얼굴에 완전 커다란 웃음을 짓고는, “맛있게 드세요, 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참 이상한 곳이네.’ 하고 지수 씨는 생각하면서 가게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었습니다. 진하고 고소한 커피 맛이 입안에 감돌았습니다.

문득 그녀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 대 더 피울까 하고 생각했는데, 방금 들은 이상한 오지랖 때문에 “담배 줄여야겠다”라고 말한 게 또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오늘 벌써 한 갑을 다 피워서, 한 개비를 더 피우려면 담배 한 갑을 새로 뜯어야 하는 것도 좀 찝찝했고요.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찹찹 먹으면서 아파트로 향했습니다.

다음 날도 지수 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앞 편의점에서 매일 피우는 담배 한 갑을 사 가방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날의 일도 똑같았습니다. 막 심한 육체노동도 아니고, 엄청 어려운 수학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힘은 쭉쭉 빠지는 일들 있잖아요.

민원인들 응대도 하고, 그러다 잠시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분명히 자동화할 수 있는 일 같은데 손으로 일일히 표를 채우고, 채우다 잠시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점심시간에는 줄담배를 피우고, 동료랑 밥 먹으면서 어제 이상한 가게 들렀다 이런 이야기 좀 하다, 하늘을 보니까 높고 파랗고 구름도 약간 끼어 있는데, 그러다 잠시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한 오후 네 시쯤 되니까 벌써 한 12시간 지난 거 같은데 아직 네 시 밖에 안됐나, 정신적으로 12시간 근무 했으니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 하다 잠시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고통스럽게 견디다 보니 마침내 다섯 시 반이고, 잔업을 내일로 미룰까 아니면 지금 마칠까 고민하는 일들 말이죠.

그래도 지수 씨는 5시 59분 되자마자 귀신같이 튀어나가는 사회복무요원들 보고 자신도 용기를 내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하고 세무서에서 탈출했습니다. 정류장 앞에 서자마자 마을버스가 딱 도착해서 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죠. 버스 앞쪽에 냉큼 앉아 창 밖을 봤어요. 가방 속의 담배갑을 매만졌죠.

“어.”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담배가 다섯 개비나 남아 있는 겁니다. 보통은 퇴근할 때쯤 되면 진짜 빡빡하게 피워서 보통 한 두 개비 남아 있거든요.

어제 커피맛 아이스크림이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죠. 지수 씨는 아파트 근처에 내린 다음에 에버마인드로 향했습니다. 지수 씨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카운터로 다가갔어요.

“또 오셨네.”

“네, 그렇게 됐네요. 어제 커피맛 아이스크림 또 주세요.”

“어우, 손님, 상담 해야지.”

“아니, 매번 하는 거에요?”

해언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수 씨는 ‘도대체 이 가게 월세는 어떻게 내요?’라고 물으려다가, 그냥 말을 바꿔서,

“저 원래 이 시간 쯤이면 한 갑 다 피우거든요. 근데 오늘 보니까 다섯 개비 밖에 안 남아서 좀 신기하더라고요.”

라고 말했습니다. 에버마인드 주인장은 활짝 웃고는, 컵에다가 커피맛 아이스크림을 세 스쿱 담아서 건넸습니다.

“어, 오늘은 빨리 끝나네요.”

“잘 통하니까요.”

“네? 뭐가 잘 통해요?”

“글쎄요, 암시가?”

해언 씨는 살짝 웃더니 덧붙였습니다.

“그냥 싸게 아이스크림 먹는다 치고, 담배 줄여야겠다고 또 말해봐요.”

지수 씨는 아이스크림 콘을 쥐고 멍하니 있다가, “담배 줄여야겠네요.”라고 말하고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에버마인드 주인장은 또 어제 같이 좋아라 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세무서 공무원은 목을 까닥 끄덕이고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한 대 더 피울까 했는데, 왠지 그 아이스크림을 쥔 채로 담배를 피우면 뭔가 죄 짓는 기분이 들것 같아서, 곱게 집에 들어갔습니다.

 

3. 약사 강태영 씨

“너 약 아무것도 안 먹는다며?”

자기 이름을 단 병원서 외과의사 노릇을 하고 있는 문성혁 씨가 입원실 침대에 누워있는 친구 강태영 씨를 다그쳤습니다. 강태영 씨는 마취에서 막 깨서 좀 멍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약간 초점이 제대로 안 맞는 시야 때문에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말했습니다.

“내가 수면 내시경 할 동안 무슨 헛소리했어...?”

“야, 너 몇 시간 동안 잤는지 아냐?”

“그걸 내가 어찌 아냐...”

태영 씨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깜깜했습니다. 아침 10시에 수면 내시경 받으러 왔는데, 요즘은 정오부터 창 밖이 이렇게 어두운가요?

“너 하루종일 잤어. 병원 문 닫게 하려고 작정했냐?”

“뭔 소리야...”

“야, 프로포폴 딱 정량 주사했는데 하도 마취가 안 깨길래 진짜 얼마나 욕했는지 아냐? 너 무슨 병 없다매. 하도 이상해서 너 피 뽑아서 돌려보니까 프로작이랑 자낙스 대사물 나오더라.”

태영 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뭐? 아니, 안 먹는데?”

프로작이랑 자낙스,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되게 유명한 항우울제랑 항불안제거든요. 태영 씨도 약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 잘 알고 있었죠.

성혁 씨가 태영 씨 어깨에 손을 올렸습니다.

“친구야. 아무리 그래도 약사란 놈이 수면 마취를 하는데 먹는 약을 숨기냐. 요즘 정신과 다니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너 진짜 죽을 뻔 했어.”

그런 약들은 마취제랑 상호작용하거든요. 더 깊게 잠자게 만들죠. 의사를 괴롭힐 생각이 있든 없든 무조건 알려줘야 하는 거란 말입니다. 안 그러면 약 먹는 사람이 영영 못 깨어날 수도 있거든요.

“아니... 나 진짜 정신과 안 다니는데?”

그 말을 듣자, 성혁 씨가 한 숨을 푹 쉬면서 태영 씨 앞에 종이 한 장을 흔들었습니다.

“이것 봐, 검사하니까 다 나왔다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창문 밖으로 번지는 도시의 빛을 문득 바라보면서, 기억을 되짚었습니다.

*

“무슨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이 이래. 꼭 무슨 스타트업 이름 같네. 약간 심리학 스타트업 같은 거.”

하는 쓸데없는 불평을 하면서, 태영 씨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프랜차이즈에서 무시무시하게 긴 이름을 가진 것들보다, 그냥 작은 동네 가게에서 세 글자로 이름이 끝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거든요.

태영 씨 생각에는 그 긴 이름들이 경제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초콜릿 맛, 바닐라 맛. 무슨 맛인지 세 글자로 딱 알려주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우주인이라는 건 6글자나 되지만 무슨 맛인지 짐작도 안 가고.

그런데 메뉴판에 적혀 있는 건 초콜릿도, 바닐라도, 녹차도 아니었어요. 시가에 상담 후 판매라는 겁니다

“이게... 이게 상담이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 아무 거나 하시면 돼요. 그럼 제가 아이스크림 골라 드릴게요.”

그 말을 들으면 어이없어 하면서 그냥 뒤돌아 나가는 사람, 흥미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태영 씨는 후자 쪽이었죠.

“저... 연애 상담도 됩니까?”

“네, 물론이죠 손님. 아무 이야기나 하면 된다니깐.”

태영 씨는 바에 주저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재미있는 말은 아닌데, 누가 들어 줬으면 했습니다. 제가 그냥 알고만 지내던 분이 굉장히 좋아졌는데, 그런데 그 분이 철벽을 치는 게 너무 빤해요. 그 철벽이 너무 단단하고 두껍고 무거워서... 뭐랄까, 철벽 자체가 엄청난 중력을 가지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덥니다.”

해언 씨는 깔깔 웃었습니다.

“비유가 뭐 그래요? 철벽을 대체 어떻게 쳤길래.”

“그냥 뭐, 가끔 만나도, 밀어내는 걸 느낄 수 있지 않나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멍청한 짓인데, 계속 말을 걸고 하는 거 말입니다.”

“그래서요?”

“어떻게 하든 사이가 끝날 건데 말이라도 해보고 망하는 게 좋지 않나 싶었습니다.”

해언 씨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이죠, 어쩌다가 SNS에서 개그맨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그는 그 개그맨의 이름을 말하고는,

“고백을 하기 전까지는 내가 고민하는 건데, 고백을 하면 그 사람 고민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고백을 하면 내 고민이 아니라 남 고민이 되는 거니 꼭 고백을 하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게 뭐야. 엄청 이기적인 거 같은데.”

“그러니까요, 그걸 듣고 딱 깨달음이 온 겁니다. 아! 그렇게 철벽을 치는데 고백하는 건 진짜 내 걱정을, 음, 아웃소싱 하는 거구나. 하여튼 그런 생각이 막 드는 겁니다.”

“잘 생각했네요.”

태영 씨는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근데 그렇게 생각해도 좀 계속 우울하긴 합니다.”

“얼마나 오래 그랬는데요?”

“한 8개월 동안 계속 기분이 가라앉아 있어요.”

“어, 꽤 됐네요? 말투는 딱딱한데 순정남이시네.”

그는 멋쩍게 웃었습니다.

“아 그냥, 직장에서 교수님들한테 쓰는 말투가 버릇이 돼서 그럽니다.”

“대학원생이세요? 여기 대학원생들 자주 오는...”

“아뇨, 아뇨, 병원에서 약사 일 합니다.”

해언 씨는 그쯤 듣고는 종이컵에다 아이스크립을 몇 스쿱 담고는,

“술 해요?”

하고 물었습니다.

“좋아하진 않는데요. 가끔 마시기는 합니다.”

“술 마시지 마요, 알겠죠? 프로즌 요거트 맛이에요. 육천 원.”

“술은 왜요?”

“우울할 때 술 마시면 못 헤어나오니까.”

태영 씨는 이름이 세 글자는 훌쩍 넘는 아이스크림이 담긴 콘을 받았습니다. 한 입 깨무니까 새콤한 것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뭐 이름이 좀 길긴 해도, 무슨 아이스크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네요.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한 다음에 그가 발을 돌리자,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구한테 이야기하니까 좋죠, 내일도 올래요?”

“생각해 볼게요.”

그는 한 마디를 남기고, 에버마인드를 총총 걸어 나갔습니다. 그 후 매일매일 태영 씨는 에버마인드에 들러 프로즌 요거트 맛 아이스크림을 꼭 하나씩은 먹었습니다. 주말도 거르지 않고요.

 

4.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 조해언 씨

태영 씨는 지금 자기가 좀 망상에 빠진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스크림에 항우울제가 들어있었다는 생각이 정상적이진 않은 거 같아서 말입니다.

최근 일주일 동안 약을 먹은 적도 없고, 식사는 죄다 병원 식당에서 때웠거든요. 그런데 핏줄에 쌩쌩 돌고 있는 약물 대사체의 농도가 어제 밤에 먹은 것처럼 빵빵한 겁니다. 일주일 내내 에버마인드에 꼬박꼬박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은 기억이 계속 태영 씨의 마음에 밟혔습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뭔 상담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맨날 프로즌 요거트 맛만 줬거든요. 태영 씨가 뭐라고 징징대든 말입니다.

태영 씨는 에버마인드 앞에 섰습니다. 커다란 창문을 바라보니 바에 두 명의 여자가 앉아있었습니다. 그는 ‘좀 나중에 따질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가, 저 사람들도 혹시 약 자기도 모르게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문을 벌컥 열었습니다.

“태영씨 왔어요?”

해언 씨는 그를 반갑게 맞았다가, 그 어두운 표정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여자 두 명이 힐끗 문 쪽을 쳐다보았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태영 씨는 어떻게 이야기를 할 지 미리 생각을 해 뒀어야 했는데, 하고 잠시 후회했습니다.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면서 ‘너 나한테 약 먹였지!’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나름대로 진상 부리지 않고 예의있는 사람이라는 자존감도 있으니까요. 아니야, 또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약을 아이스크림에 왜 타요. 태영 씨는 카운터에 다가가서, 아주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 정신과 갔어요. 지속성 우울장애라던데. 그래서 약 받아왔습니다.”

“잘 생각했네요. 요즘 정신과 많이 가잖아요, 사람들.”

“예, 아이스크림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오늘도 프로즌 요거트죠?”

해언 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종이컵에 아이스크림을 담았습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바닐란디.”

“어?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든 프로즌 요거트 맛으로 주셨잖습니까?”

태영 씨가 묻자 해언 씨가 약간 입을 내밀었다가,

“글쎄요? 이제 바닐라가 좋을 거 같아서. 사천 원.”

라고 말했습니다. 태영 씨는 아이스크림을 받고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니까 맛이 정말 괜찮긴 했는데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죠.

“저는 프로즌 요거트 먹고 싶은데요.”

“안돼요, 오늘은 바닐라야.”

“왜요?”

“엥, 자기도 알잖아요. 원래 여기는 그런 곳인데.”

태영 씨는 ‘지금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카운터 쪽으로 얼굴을 살짝 내밀고 조용조용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친구한테 위 수면내시경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10시간을 잤습니다. 보통 프로포폴 맞으면 한 두 시간 정도 자는데, 안 깨서 걔가 꽤 고생을 했답니다. 그런데 프로포폴이 피에 있는 다른 약물들이랑 상호작용을 하는데, 걔가 하도 이상해서 피 검사를 돌려보니까 어떤 약물 대사체가 나왔다는 겁니다.”

“대사체요?”

“네, 약물 분자가 간에서 바뀌거든요 다른 분자로. 술 마시면 에탄올이 아세트알데하이드로 대사되는 거고... 제 피에서 항우울제랑 항불안제 대사체가 나왔습니다. 참 이상하죠.”

“정신과에서 약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정신과 가기 전에요. 저도 먹는 거라곤 병원 구내식당 밥 밖에 없는데 갑자기 항우울제를 꾸준히 먹고 있었다는 검사결과가 나오니까 되게 당황스러운 겁니다.”

태영 씨는 해언 씨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추리 소설의 자신만만한 탐정이 된 느낌이기도 했는데, 사람을 몰아 세우고 있다는 죄책감도 느껴졌습니다.

“음식에 약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거, 좀 망상 같습니까?”

“신고할 건가요?”

해언 씨는 체념과 담담함이 동시에 풍기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태영 씨는 잠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그러신 거 맞구나. 이 약들은 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보건복지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는데, 왜 이런 일을...”

“나가서 이야기하죠?”

태영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지금 손님 두 분이 계신데 저 분들도 알아야하지 않겠어요?”

다른 손님들이란, 한 명은 커피맛 아이스크림콘을 과자까지 거의 다 먹어치운 지수 씨였고, 또 하나는 바나나맛 아이스크림을 앞에 둔 채로 휴대폰을 지켜보고 있는 예진 씨였어요.

해언 씨는 지수 씨 쪽을 잠시 쳐다보았습니다. 커피맛 아이스크림에는 금연 시에 흔히 쓰는 항우울제가 들어있었어요. 담배 맛을 직접적으로 바꾼다든가 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담배에 대한 갈망을 줄여주는 약이었죠.

그런데 아이스크림에 그런 약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적이 없으니, 딱히 지금까지 큰 효과는 없었어요. 지수 씨는 커피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장 극적이고 빠르게 금연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덕을 꽤 크게 봤는데, 지수 씨는 내 편을 서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그녀는 약간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어요.

“아이스크림에 다 약이 들어간 건 아니고요.”

“어쨌든 약을 타신 건 사실이잖습니까? 왜 그러신 거에요?”

태영 씨도 따라서 소리를 높였읍니다.

“약이라고요?”

예진 씨가 카운터 쪽으로 다가오면서 말했습니다. 지수 씨도 몸을 다 돌린 채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걱정 마세요. 바나나, 바닐라, 또... 그래, 아몬드 아이스크림에는 약 안 들어 있어요. 지금 지수 씨 먹는 거에 금연보조제가 있지.”

지수 씨도 왜 한 달 만에 담배를 끊을 수 있었나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예진 씨는 화를 내야할 거 같긴 한데 자기 아이스크림에는 약이 또 안 들었다니 당황스러웠고요. 태영 씨는 해언 씨가 너무 당당해서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했던 거구나. 상담을 하고 약을 주는 거고. 병원처럼.”

예진 씨는 갑자기 깨달았어요. 상담, 시가로 아이스크림 파는 것도 좀 많이 이상했죠. 상담한 다음에, 적당한 약이 든 아이스크림을 주는 거야?

“전공자다우시네.”

“약을 어떻게 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되게 위험한 일입니다. 알약이 그런 모양으로 나오는 데도 다 그런 이유가 있는데...”

이젠 태영 씨가 자기 전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해언 씨가 말을 끊었습니다.

“사실 저도 정신과 의사 하다가 가게 연 거라, 알아요.”

“...아니 그런데 의사시면서 이런 일을 해요? 안되는 거 뻔히 잘 아시잖습니까?”

“사람들이 병원에 안 오니까요.”

해언 씨는 잠시 태영 씨의 시선을 피하고는, 지수 씨 쪽을 바라보고 다시 예진 씨를 한 번 바라보면서 연설하는 것처럼 한 마디 했습니다.

“사람들이 정신과에 안 오니까 그런 거에요.”

해언 씨는 “잠시만 기다려 봐요. 다 이야기할 테니까.” 하고는 가게 조명을 적당히 끄고,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은은한 노란 빛이 어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벽장을 열고, 거기서 종이 두 장을 꺼냈습니다. 하나는 의사면허증이었습니다.

취득에 적어도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리는 그 권위의 상징에는 ‘의료법 시행령 제8조에 따라 위와 같이 면허합니다.’라는 글이 달랑 한 줄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에는 정신의학회 전문의 자격증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원래 해언 씨는 10년 동안 다른 도에 있는 동네에서 정신과 개인병원을 개업해서 먹고 살았답니다. 사람들이 오면 이야기를 하고, 처방을 하고, 약도 지어 줬죠. 지수 씨는 정신과가 의약분업에서 예외라 병원 내에서 약을 바로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 해언 씨가 일하면서 느끼기에는, 10만명 당 25명이 자살을 하는 이 우울한 나라에, 정신과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적은 겁니다.

장사가 안돼서 불만이었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녀가 느끼기에, 가볍더라도 분명히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못 받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는 겁니다.

“지수 씨 이제 담배 안 피우죠. 한 달 전에만 해도 하루 한 갑씩 피웠는데.”

해언 씨는 지수 씨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 네, 그렇긴 한데...”

“그렇잖아요. 엄청 큰 병이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요. 그냥 작은 불편이 있는 사람들도, 조금만 치료받으면 좋은데요.”

그러다 하도 고민이 돼서 그녀는 병원 개업 5년차에 추석 연휴를 틈타 유럽 여행을 떠났댑디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먹은 젤라또가 그리도 맛있었다나요. 그때부터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리고 싶다는 생각을 시작한 겁니다.

사실 지금 에버마인드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 그때 먹은 젤라또의 발끝에서 노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가 아이스크림 만드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적당히 먹을만한 거 만들 줄 아는 정도다. 행복을 주고 싶은데...

그녀는 다른 사람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 정신과 의사 한 건데, 정작 불행하고 가라앉은 사람들은 하나도 오지 않으니까요. 달달한 아이스크림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주잖아요.

그때 자기 특기인 정신과 의사일을 아이스크림에 더하면 어떨까 생각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 거죠.

그녀는 추진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다른 도에서 적당한 터를 찾았습니다. 1년 정도 해볼까 하고.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도 5년 내내 계속 배우고 익혔죠.

그 다음에 그녀는 약을 빼돌려서 계속 쌓아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75mg 만큼 약 처방이 필요한 사람한테 150mg를 처방하고, 초과분은 쪼개서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잘 보관해 뒀습니다. 거기서 생기는 손해는 그 동안 번 돈으로 때웠고요.

그녀는 5년 동안 약을 그렇게 모으면서 일종의 사명감에 사로잡혔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하고, 정말 행복을 파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만드는 거요. 정신과에서 치료받아도 되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이 무서워서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요.

“행복을 판다기보다는... 식당에서 음식에다가 아편 타는 거랑 뭐가 다르죠?”

예진 씨가 쌀쌀맞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바나나맛 아이스크림 드시러 오시잖아요. 그거 약 안 든 거라니깐. 약 안 든 아이스크림도 꽤 많아요.”

“근데 바나나맛 아이스크림 좋아하는 건 그때 어떻게 알았어요?”

“어, 그건 과학적인 증거가 있죠.”

“네? 진짜요? 어떻게?”

“아뇨, 사실 그냥 기분대로 준 거에요.”

잠시 적막이 흘렀습니다.

“전문의시니까 정신과에 대해선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겠죠. 그런데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시잖습니까? 저 진짜 죽을 뻔 했거든요. 약을 저도 모르게 먹으니, 병원 갈 때 이야기도 못 했잖습니까. 약을 아이스크림에 타면, 정량으로 처방한다는 확신도 없고요. 진짜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던 게 다행인 겁니다. 큰일날 일 하시고 있는 거, 아시잖습니까?”

태영 씨가 좀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했습니다. 해언 씨도 거기에 맞서서 치열한 목소리로 자기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아프거나 한 사람한테는 그냥 아이스크림 주고 그랬어요. 그리고 아이스크림이니까, 건강 신경 써야 하는 사람들은 안 먹을 거 같았어요. 정말 위험한 사람들한테는 정신과 병원 가보는 게 좋다고 꼭 말해줬거든요.”

“저기요, 그런데 정신과 의사는 따로 상담 안 받나요?”

예진 씨가 끼어들었습니다.

“네?”

“임상 상담 심리학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 상담 꼭 따로 받거든요. 자기 스스로한테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개인병원 차린 정신과 의사들은 그런거 안 받나 봐요?”

해언 씨는 “다는 안 받죠”하고 말했습니다. 예진 씨는 인상을 찡그렸습니다.

“지금 하시는 거 완전 불법이잖아요. 보통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불법이면 아예 마음을 접든가, 아니면 좀 비슷한 일을 찾든가 하죠. 그런데, 사람 죽을 수도 있는 일을 그렇게 즉흥적으로 해요? 누가 약을 먹어야 해요?”

해언 씨는 예진 씨가 이렇게 화난 걸 처음 봤습니다. 예진 씨가 대놓고 약을 먹으라고 한 게 굉장히 모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원래 생각하던 거랑 모순되지 않나 하기도 한 거에요.

그때 묵묵히 있던 지수 씨가 입을 열고,

“근데 저는 신고 안 했으면 좋겠는데.”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저도 뭐라할 그런 처지인지 모르겠는데... 덕분에 담배 끊어서 좋거든요. 또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계속 들어줘서, 아, 사실 그게 제가 예고 출신인데... 하여튼 때려친 그림도 조금씩 그려보고 그렇고 해서, 사실, 되게 행복하거든요. 전 되게 여기 좋은데.”

“신고하든 않든, 이렇게 하는 건 절대 지속 못합니다. 언제 사고 날 줄 알고?”

태영 씨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때 해언 씨가 머리를 흔들면서,

“어차피 2개월 안에 약 다 동날 걸요. 계약 끝나면 다시 병원이나 하려고 했죠.”

라고 말했어요.

“근데 제가 죽을 뻔했다고 계속 말씀드리고 있잖습니까. 마취 못 깨서.”

“... 미안해요.”

해언 씨는 토해내듯이 말했습니다.

지수 씨는 그 꼴을 보면서 굉장히 담배가 피우고 싶었습니다. 가방을 뒤져봐도 텅 빈, 쇠로 된 담배 케이스만 손에 잡혔어요. 예진 씨는 자기 앞에 남아 있는 아이스크림을 쳐다보았습니다. 정말 약이 안 든 거 맞겠지.

“그래요. 내가 반사회적인 일을 한 거지. 뭐 어쩌겠어요. 집 앞 가정의학과처럼 집 앞에 정신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데. 거기서 아이스크림도 팔면 더 좋고.”

해언 씨는 고개를 팔 속에 파묻었습니다.

“근데 꼭 안될 거는 없는 거 같은데.”

지수 씨가 그 얘기를 듣고 말했습니다. 예진 씨도,

“해보지도 않고 그러는거 되게 무기력증 아닌가요. 그것도 우울 증상인데.”

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어떡해요?”

해언 씨는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돌아봤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5. 에버마인드

예진 씨는 계산대 앞에 서서 앞에 담긴 아이스크림 통들을 바라보았습니다. 12색, 부드럽고 차가운 색들. 다 해언 씨가 아침마다 잠도 안 자고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언니, 커피맛 달라니깐요.”

하고 지수 씨가 재촉하는 겁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한 번 싱긋 웃고는 아이스크림을 과자에 담습니다.

“삼천 오백 원.”

“와, 나 이럴 줄 알았어.”

지수 씨는 그 말을 듣고 푸념합니다.

“왜?”

“아니, 이거 아이스크림, 우리 의느님이 담배 줄이겠다고 하면 이천 원 깎아준다고 해서 삼천 원에 샀다구요. 그런데 봐요, 사실 삼천 오백 원이고 딱 오백 원 깎아 준 거잖아요. 이천 원 깎아 줬다고 생색은 다 내더니...”

예진 씨는 그 말을 듣고 좀 입을 가리고 웃더니, 고개를 내밀어 소곤소곤 말합니다.

“들어간 약 값도 치면 싼 거지.”

“그렇긴 하네.”

지수 씨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고, 병원 쪽을 바라봅니다. 에버마인드는 이제 병원과 아이스크림 가게 두 구획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급히 벽을 세우고, 상담실도 따로 나누고, 사람들 대기할 공간도 만들고, 약을 조제할 곳도 정하고 보니 아이스크림 가게는 많이 좁아졌어요. 그래도 대기하다 지루하면 잠시 나와서 아이스크림 하나쯤 사 먹으며 얘기를 할 공간은 충분하죠.

병원과 거의 공간을 공유하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각각 개업 신고하려고 해언 씨는 이런저런 독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그때 지수 씨가 세무서 직원이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해언 씨가 보건소와 구청과 세무서를 오가는 수많은 절차를 밟을 때 지수 씨가 옆에서 도와줬으니까요. 그때 그녀도 공무원 노릇도 꽤 재밌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제 금연보조제 없이도 담배를 안 하는, 그런데 아이스크림에 중독돼버린 지수 씨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언니는 언제까지 여기서 일해요?”

“일단 방학 동안은 계속 하려고. 개강하면...”

예진 씨는 쇼윈도 밖으로 조금씩 내리는 눈발을 보면서 이야기했습니다.

“모르겠어. 연구 결과 계속 잘 안 나오더라. 어쩌면 끝나도 계속 할 지도 모르지.”

그녀는 홀가분하게 말했습니다.

해언 씨가 그녀한테 아르바이트를 제안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응, 할래. 근데 궁금한 게 있거든, 언니, 나한테 약 안 준 이유가 뭐야?” 하고 물었거든요.

“대학원생 치고 안 불안한 애가 어딨니? 지극히 정상인 거지. 그냥 단 거 먹고 속 차리면, 아직 인생 안 끝났다는 생각 할 거 같아서.”

해언 씨는 그렇게 깔끔하게 말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 예진 씨는 왠지 덜 불안하네요. 해언 씨랑 같이 일하다 보니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거에 대한 열정이 옮아서, 임상심리학 실습을 쭉 해서 임상심리사 일을 할까 생각도 하고.

뭐라도 되겠죠. 지금 아무것도 안 한다고 불안해하면 또 무기력해지고, 그러다 또 아무것도 안하게 되던데.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때 태영 씨가 병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가게에 나타났습니다.

“어서 오세요.”

예진 씨가 반기자 그는 고개를 까딱 했습니다. 몇 개 없는 의자에 앉아서 창 밖을 우수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네요. 지수 씨가 그 꼴을 보면서 ‘또 저러네.’ 하고 속으로 생각했죠.

그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약도 제대로 된 꼴로 먹고 있고요. 요즘 우울하지는 않은데 갑자기 막, 시적인 기분이 든다는 거에요.

요즘 일어난 이야기들이 하도 황당하고, 또 아이스크림 가게 찾아와서 어이없는 짝사랑 이야기 한 자신이 웃기기도 하다면서.

예진 씨는 그거 보면서, 그가 이제 우울하지 않으니까, 철벽치는 사람한테 고백 안 한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여 그러는 거 아닌가 하는데, 어찌 알겠나요. 태영 씨가 자기 입으로 1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라고 말해서, 아닌 거 같기도 하죠.

해언 씨한테 넌지시 물어보면, 의사로서 환자 이야기는 절대 안 한다고 그래요. 해언 씨는 환자와의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어쩌고 하면서 가게에도 잘 나타나지도 않아요.

의료윤리를 결정적으로 어긴 사람이 그런 말 한다는 게 또 웃기기도 하죠. 그런 생각 하면서 예진 씨가 밖을 보니까 또 자주 오는 손님 하나가 병원 쪽으로 걸어오고 있네요.

예진 씨 보기에는, 여기 모여 있는 세 명이나, 상담실에서 지금 차트를 바라보고 있는 해언 씨나. 어찌어찌 다 풀려 가는 것 같아요.

해언 씨는 정신과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동시에 아이스크림으로 행복을 팔고 있고요. 지수 씨는 세무서 일에 재미가 좀 붙었다고 하고, 그림도 다시 그린다잖아요. 예진 씨는 불안을 저버릴 용기를 얻었고, 태영 씨는 글쎄, 시적 자존감이라도 얻었으니까요.

하여튼 그래서, 한국 어딘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는 어느 한 도시 안에, 여러 사무실과 카페와 빌딩의 숲을 지나, 여러 고층 아파트들이 당당히 자라난 풍경 그 앞에, 작은 보습 학원과 마트 간판을 단 청과점이 있는 한 4층짜리 상가 건물 1층의 편의점 옆에,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 그리고 정신과 병원이 있습니다. 모두에게 문을 연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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