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테이블 위로 뺨이 눌리게 엎드린 남자는 떨군 양 팔 아래 추라도 매단 듯 늘어져 있었다. 반쯤 벌린 입안으로 혀는 살짝 말리고, 부릅 뜬 눈에는 초점이 없다. 넘어진 컵에서 흐른 액체가 테이블을 적신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속도로 보아 남자가 이렇게 된 건 불과 조금 전인 듯했다.

‘서쪽 무리 연락책 처리 후, 암호 체계가 담긴 레거시를 지도화해 올 것.’

이것이 임무였다. 서쪽 사막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무리가 이동 경로마다 나타나 방해하길 수차례. 처리하러 왔건만, 보아하니 이들은 제3의 집단에게도 타겟이었던가 보다.

죽은 자 뒷목에 난 가느다란 흉기 자국에 손을 대 보았다. 예상대로 연락책이 가진 레거시는 모두 빼앗기고, 약탈자의 레거시 마크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 어쩐다.”

릴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눈을 움찔했다. 전에 없던 인기척이다. 시야를 가리기 위해 걸어 둔 천 뒤로 낯선 복장의 남자가 보였다. 손가락을 펼쳐 바늘을 생성하려 했다. 조금의 지체도 없었건만, 상대에게 실바늘을 먼저 날린 건 남자 쪽이었다. 엄청나게 빠르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허공에 손을 뻗어 손목을 강하게 꺾었다. 그러자 눈앞까지 날아든 바늘이 우뚝 멈추었다. 미세한 바늘이 물결처럼 출렁여 밀리고 주름지더니 손목 꺾은 방향으로 떨어져 나갔다. 등장부터 바늘이 튕겨나가기까지 모든 게 찰나에 이루어졌다.

안도한 것 역시 남자 쪽이었다. 괜찮은지 묻는 얼굴로 바라보는 사이, 릴리안은 그의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연락책의 레거시 기운을 발견했다. 서로를 빠르게 살피는 동안, 둘은 같은 이유로 이곳을 찾은 것과 목적을 이룬 건 남자 쪽임을 알았다.

남자는 릴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를 지나쳐 가고, 릴리안도 자신을 향한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강렬한 인상의 푸른 눈동자였다.

 

-

 

노을의 여운이 지평선 아래로 사그라지자 케일럽이 ‘지도자의 지팡이’를 들어 능숙하게 투명 장막을 거둬들였다. 지금부터 해가 뜨기 전까진 어둠이 투명 장막을 대신해 이들을 보호할 것이다. 케일럽은 연신 초막 쪽을 살폈다.

“초조해 보인다.”

등 뒤로 데일이 다가왔다.

“릴리안이 아직 안 왔어.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오겠지. 안 오면 어딜 가겠어.”

케일럽이 듣는 둥 마는 둥하자 데일은 검게 탄 자신의 손가락 끝을 내려다 봤다.

“왜 그래.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어? 이제 와서 우리 계획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데일은 노골적으로 케일럽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면 결과에 자신이 없는 건가.”

케일럽은 고개를 돌렸다. 데일이 케일럽 뒤를 바라봤다.

“그만 걱정해라. 저기 온다.”

데일이 턱으로 가리킨 곳에서 릴리안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케일럽은 릴리안을 슬쩍 보고는 알은 척 없이 본인 막사로 향했다.

“하여간 만년 소년이야.”

릴리안이 데일에게 다가왔다. 자주 보이는 피곤한 기색과는 별개로 그녀는 평소와 다른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데일은 사람마다 가진 기운을 수치나 색으로 분간할 줄 알기에 릴리안의 변화를 눈치채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늦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대답이다. 임무에서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이 ‘처리했습니다’였단 말이다.

“그래. 레거시가 다른 사람에 의해 수거되고 없었다고.”

예상보다 소극적인 케일럽의 반응이 릴리안은 의아했다.

어떻게 반응이 이게 전부일 수 있지.

“네. 제가 도착했을 때 연락책은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상태는?”

“뒷목에 급소를 찔린 것 외 외상이나 출혈은 없었습니다. 공격자 레거시가 남긴 했는데, 소속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서…….”

릴리안은 말 끝을 흐렸다. 본인 말에 자신이 없고, 눈동자에선 확신을 찾기 어렵다. 데일은 그녀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직감했다.

“현장에 누군가 있었군. 미행당했나? 그래서 바로 오지 않은 거야?”

데일이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러는 동안 케일럽은 말없이 릴리안을 눈으로 살폈다. 다쳐서 돌아와도 아프다고 말하는 성격이 아닌 그녀인지라 직접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시체뿐이었습니다.”

“그래. 알았어. 고생 많았으니 그만 돌아가서 쉬어.”

무슨 이유에선지 케일럽은 그녀를 돌려보내려고 했다. 릴리안도 의아했지만, 되도록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인사하고는 케일럽의 막사를 빠져 나갔다.

 

-

 

초막에 들어온 릴리안은 정돈 덜 된 침상 위로 아무렇게나 드러 누웠다. 공중으로 멍하니 시선을 띄웠다. 귓 속 무언가가 심장 박동을 따라 귀에 대고 쿵쿵 박자를 들려주고 있다.

‘데일이 눈치챘을 거야. 거짓말한 거 알겠지. 취조하려나.’

그에겐 아우라가 색으로 구분 지어져 보인다고 했다. 색은 사람마다 다르며 감정에 따라 본래의 색이 변한다고도 했다. 자세한 건 말해주지 않았지만, 경험으로 봤을 때 데일은 그런 능력을 이용해 상대방이 거짓말하면 언제나 알아챘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진실을 숨기고 싶을 때면 근처에 데일이 있는 것이 참으로 껄끄러웠다.

‘곤란하게 됐네. 분명 이걸로 날 이용하려고 들 텐데.’

팔을 이마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서늘하고 무심하게 그녀를 스치던 눈동자가 떠오른다. 뭔가를 생각나게 하는 낯설지만 익숙한 눈동자다.

그녀의 레거시는 실처럼 가느다랗고 끝은 날카로운 침 형상을 하고 있어 상대를 마비시키고 하고, 부분적으로 기억을 끊어낼 수도 있다. 실용적인 능력인지라 덕분에 자주 현장에 투입됐다. 그리고 매번 임무에서 유용하게 능력을 사용했다.

오늘은 단 한 번도 레거시를 형상화하지 못했다. 오늘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푸른 눈동자의 남자가 그녀를 해치고 싶어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보랏빛 레거시에 당하고도 남았겠지. 침을 흘리면서 죽어간 사내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될 수도 있었단 말이다.

‘왜 공격을 멈췄을까.’

분해야 할 시점에 이상하게도 릴리안의 관심은 그에게로만 향했다.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난데없는 두통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미간에 주름선 생긴다.”

릴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척 없이 초막 안으로 들어선 데일은 곧장 릴리안의 주변을 살폈다. 아니, 대놓고 아우라를 확인했다. 그는 걸어다니는 거짓말 탐지기 같다. 아니, 걸어 다니는 ‘재수 없는’ 거짓말 탐지기다. 꼭 저런 표정으로 얄밉게 관찰하고선 알아낸 게 있더라도 절대 말하지 않는다. 약아빠진 고양이가 따로 없다.

“케일럽을 대신해서 내일 임무를 주려고 왔어.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수고 좀 해.”

“물론입니다.”

릴리안은 자세를 잡고 서서 짧게 대답했다.

“네가 내일 가야 할 곳은 여기야.”

데일이 ‘인도의 지팡이’를 꺼내 릴리안 앞으로 네모를 그렸다. 그어진 네모를 따라 얇은 선이 생겨나더니 꾸불꾸불 길어나며 지도를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지팡이로 둥글게 말아 모은 다음 릴리안의 왼쪽 눈 아래 댔다. 지도가 빨려 들어가듯 눈으로 스며들어 갔다. 릴리안의 눈동자가 램 수면 상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지도를 읽을 땐 늘 그랬다.

“인식했습니다.”

눈을 깜빡하자 눈동자 속에 어렸던 기운이 말끔히 사라졌다.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찾아가면 타겟이 붉은색으로 보일 거야. 가져와야 하는 건 열쇠, 임무를 방해하는 자는 처리해도 상관없어.”

그의 손아귀에서 인도의 지팡이가 사라지는 것을 릴리안은 말없이 바라봤다. 인도의 지팡이는 데일의 소유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앞으로 임무를 전달하는 건 데일의 몫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임무 전에 그와 이런 순간을 늘 맞이할 것을 의미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임무는 잘 이해했겠지.”

“네, 그렇습니다.”

데일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그냥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

 

모래바람이 이는 사막 한가운데. 부옇게 일어난 황토색 세상에서 입안에 씹히는 모래알이 현실감을 잃지 않게 했다. 지독한 바람이다. 눈에 저장한 지도가 아니었다면, 길을 잃어도 진작에 잃었을 것이다.

펄럭이는 소리에 주변이 사납다. 사방에 세워진 기둥 사이로 길고 큰 휘장이 높다랗게 걸려 사정없이 전신을 펄럭여댔다.

사막의 기괴한 기상 현상,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을 휘장 막들,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버려진 장소, 열기 쉬운 함에 겨우 들어있는 열쇠. 릴리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이런 걸 가져오는 게 임무라니.’

레거시로 감싼 파우치에 열쇠를 담아 집어넣으면서도 껄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열한 시 방향.

인기척이다. 오른 팔꿈치를 직각으로 세우고 허공에 대고 젓자 눈앞에 네모진 반투명 화면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반투명 화면에 아주 잠깐 잡힌 열 기운이 곧장 범위를 벗어났다. 인기척의 주인공은 무척이나 빨랐다. 일곱 시 방향이다.

릴리안은 급히 몸을 뒤로 뺐다. 눈으로 보기도 전에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가 있다. 옳고 그름을 가르기에 앞서 이미 몸을 신념대로 움직이며 이 모든 게 불가항력이라 믿는 것이다. 그 순간 릴리안이 그랬다. 시야를 확보하고 잡음을 잡는 보호 화면을 사용할 겨를 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에 절대 등을 내보일 수 없단 일념 하나로 재빠르게 액션을 취했다. 아무리 가까워도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릴리안의 또 다른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엇갈린 다리가 풀리면서 몸이 한 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어, 어……또 그 이상한 기운. 어질어질한 기운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리고만 싶었다.

땅은 제대로 딛고 서있기라도 한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어떤 것도 밟고 잡고 휘저을 수 없었다. 어느샌가 붕 뜬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려는 순간, 단단한 근육으로 감싼 한 쪽 팔이 릴리안의 허리를 잡아채 감싸 안았다. 곧고 기다란 머리카락이 한곳으로 휘날리다 이내 바닥에 구르는 대로 정신 없이 흩날렸다. 하지만 구를 때마다 바닥에 뼈마디를 부딪히는 통증을 감내한 건 릴리안이 아니라 그녀를 끌어안고 구른 남자 쪽이었다.

겨우 눈을 떴을 때 보고야 말았다. 날카로운 표창이 남자의 등에 날카롭게 꽂힌 것이다. 남자는 움찔하면서도 품에 안은 그녀를 놓지는 않았다. 그들 주변으로 모래가 더욱 무성하게 피어 올라 릴리안은 연거푸 기침을 내뱉어야만 했다. 할 수 없이 숨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자기 아래로 깔린 남자 등 아래로 힘겹게 손을 집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표창이 닿자 찡하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표창에 어린 레거시가 그녀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건 무기가 지닌 단순한 기운뿐이었다.

날카로운 표창 끄트머리를 잡아 빼내려고 하자 남자 팔에 힘이 느껴졌다. 릴리안을 저지하듯 그녀 팔을 잡아 밀었다.

그녀는 몸을 세우고 눈앞에 반투명 화면을 만들었다. 그제야 눈을 편히 뜰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후 고개를 내려 남자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줄곧 그녀만 보고 있었던 것 같은 얼굴. 남자는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어쩐지 머쓱해져 그에게서 손을 뗐다. 그러면서도 등에 박힌 표창을 빼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팔이나 가슴 부위에 꽂혔을 표창이다. 릴리안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반투명 화면엔 어떤 열도 감지되지 않았다. 생명체는 둘 뿐.

그럼 표창은 남자가 던진 건가.

릴리안은 어제 본 이 남자를 생각해냈다. 눈이 마주쳤을 때 바로 알아봤다. 강렬한 인상의 푸른 눈동자, 푸른색이 강렬한 것인지 그의 아우라가 강한 것인지 모르겠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도 따라 일어났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을 보며 릴리안은 그 스스로 표창을 뺄 수 있음을 눈치챘다. 기운이 그녀 본인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레거시 기운마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졌다.

남자의 시선이 릴리안의 주머니로 향했다. 열쇠를 넣어둔 곳. 이번에도 두 사람은 같은 걸 찾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나를 공격할까?

아주 잠깐 의심했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남자의 능력을 봤을 때, 전면으로 붙는다면 쉽지 않은 상대일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에게 그녀를 해칠 생각이 없는 게 얼마나 다향한 일인지 모른다. 남자는 이제야 생각난 것처럼 어색하게 팔을 풀어 릴리안을 놓아 주었다.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펄럭이는 휘장 사이를 빠져 나갔다. 등에 꽂혔던 표창의 흔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가 가고 난 후 릴리안은 반투명 화면을 없애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눈동자 전체가 아릴 정도로 날리는 모래바람 속이었지만, 요란법석의 바람 소리도 머릿 속을 헤집을 정도로 정신 없던 휘장끼리의 펄럭임도 그녀의 귀에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2.

팔을 엇갈려 자신을 스스로 껴안는 것처럼 허리와 날갯죽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타인의 몸인 듯 가장해 손에 닿는 느낌을 알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만졌을 때 어땠을지 궁금한 까닭이었다.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오래 기다리던 사람을 우여곡절 끝에 만난 기분은. 정체 모를 의구심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게 정확히 뭔지…….

“릴리안, 들어간다.”

밖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팔을 풀고 괜히 머리를 만지작댔다. 데일이었다. 인도의 지팡이를 든 것으로 보아 임무가 있을 모양이다.

“서로 피곤할 테니 빨리하지.”

릴리안이 데일을 흘낏 훔쳐 보았다. 창백한 피부에 점점 짙어지는 눈가는 그를 해골처럼 보이게 했다. 으스스한 몰골. 어릴 적엔 어느 정도 귀여웠던 것도 같지만, 지금 모습이야말로 어울리는 외모를 드디어 갖추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요새 연구 중이라 바쁘거든.”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데일이 변명하듯 말했다. 릴리안이 손을 내려다봤다. 마디 끝마다 그을린 흔적. 실험한답시고 못살게 굴다 태워버린 레거시흔이 분명하다.

그래, 데일은 연구 중이다. 요새라고는 하나 그는 원래가 가장 많은 시간을 연구와 실험에 할애했다. 어쩌면 머지않아 전사에서 마법사로 신분을 갱신할 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연구인지 말해 줄 수도 있어.”

릴리안은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래, 오늘 임무는 쉽게 처리했다지.”

“네.”

“보고할 만한 별다른 건 없었고? 함정이라든가 혹 정체 모를 침입자라거나.”

“없었습니다.”

“그랬군.”

데일이 릴리안 얼굴 가까이 본인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정말?”

‘아닌데. 거짓말인 거 다 아는데’라고 말하는 노골적인 얼굴을 릴리안은 밀쳐내고 싶었다. 대신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게 허공을 향한 시선에 힘을 세게 주었다.

“제게 또 임무가 있습니까.”

데일은 조금 감동했다. 릴리안의 거짓말 숨기는 능력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하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상대를 완벽히 숨기는 방법을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상대를 속이려면 말이야, 릴리안. 자신부터 거짓을 진짜라고 믿는 게 순서거든.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 늘 들통 나고 만다니까. 참 애석한 일이지.’

“내일이 마지막이야. 그러면 너와 케일럽 결혼식까진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을 거야.”

릴리안은 ‘결혼식’이란 단어에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데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원한다면 식을 미루게 해 줄 수 있어. 어쩌면 취소도 가능하고. 늦은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리 결혼은 케일럽과 제가 지도자의 아이들로 선택받았을 때부터 정해진 일입니다.”

데일은 콧바람을 내뿜었다.

“좋아. 아무래도 일을 좋아하는 듯하니 원하는 대로 임무를 주지.”

허공에 댄 인도의 지팡이로 네모를 그렸다. 가느다란 선이 스스로 복제해 길이를 늘이며 서서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완성된 그림을 둥글게 말아 지팡이로 모은 후 릴리안의 눈 아래로 가져다 댔다. 기운이 빨려 들어가자 감은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요동쳤다.

데일은 릴리안의 반응에 관심을 기울였다. 역시. 그림을 확인한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이내 믿을 수 없는 걸 본 사람처럼 놀란 눈으로 데일을 바라봤다.

“그림의 남자가 이번 표적이다. 절대 살려두어선 안 되는 인물이니 반드시 처리하도록.”

릴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습관처럼 내뱉던 무성의한 대답조차 없었다.

 

-

 

“이기지 못할 거야.”

케일럽은 꽤 침울했다. 보이는 것만이 아닌 등에 드리워진 아우라가 여실히 그러했다.

“어쩔 수 없지. 릴리안 본심을 알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데일의 손가락 마디 끝은 더욱 검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자랑스럽게 내려다봤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케일럽이 몸을 돌려 데일을 바라봤다. 순간 확고함이 전신을 갑옷처럼 둘러싸는 게 데일 눈에 보였다. 그만이 볼 수 있는 케일럽의 황금빛 아우라. 선택받은 자만이 가지는 것.

“내가 염려하는 건 릴리안뿐이야, 데일.”

케일럽은 목소리를 낮췄다.

“네 의견을 받아들인 건 나야. 그래, 내 욕심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녀 안전만은 그 무엇보다 내게 중요하다고.”

“그 녀석은 릴리안 어떻게 못 해. 알잖아, 그 녀석이 뭔지.”

대장의 기운은 금세 우울함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야. 내 말은.”

“고민하지 마. 내일이면 모두 끝날 거고, 여차하면 기억에서 지우면 될 일이라고.”

케일럽은 데일이 나간 후에도 한동안 같은 자세를 고수했다. 그러다 완벽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조용히 중얼거렸다.

“끝났지. 나란 인간이 릴리안에게 떳떳한 남자가 되기에는.

 

-

 

릴리안은 눈앞으로 화면을 펼쳤다. 제거할 대상이 떠올랐다.

왼쪽 가르마를 타고 내려온 짙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눈썹을 길게 덮어 비밀스럽고 어딘가 방어적이다. 어두운 그늘에 은밀히 자리한 새파란 눈동자는 시선이 거칠고 강렬했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자잘한 신경 섬유 사이로 스며든 생명력이 망막과 시신경을 일깨워 시야에 잡힌 것이라면 본질까지도 꿰뚫어볼 것이란 생각에 사로잡힐 정도였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녀는 생소함과 호기심,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움의 부조화를 경험하며 이 혼란을 어떻게 잠재울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이후 그런 고민은 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본인이 살아남는다면 하게 되는 건 회상이나 후회 정도일까.

태어나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을 것처럼 굳게 닫은 입, 적당하게 각진 턱선에서 옆으로 난 정보로 시선을 옮겼다. 이름, 나이, 소속 모두 공란으로 주 무기는 음파, 능력은 블라인드라고만 기재되어 있었다. 그의 레거시는 그녀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분야다. 게다가 음파와 블라인드라는 레거시는 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도착지점을 딛고 서자 발아래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릴리안은 모래들이 바람을 타고 더미 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자잘한 알갱이 덕분에 마치 입자를 가진 생명체처럼 여겨졌다. 바람은 두 방향으로 나뉘는가 싶게 세 방향, 네 방향으로 점차 갈라졌다. 뭉친 더미는 정체불명의 형상을 이루며 높낮이를 바꿔댔다.

뒤로 불쑥 튀어 오른 바람을 따라 파도처럼 밀려드는 모래더미가 그 키를 한참이나 높였다. 자잘한 모래알갱이들이 주변으로 흩어지자 곁가지를 드러낸 커다랗고 두꺼운 나무 형태가 드러났다. 낮게 움직이던 모래더미는 서로 엉겨 붙어 가지로 흡수되거나 밧줄처럼 뻗어 나가 저들끼리 덩굴을 이루었다.

몸을 돌려 뒤를 보니 그곳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바닥이 물컹하게 내려앉아 대비 없던 무릎이 힘없이 접혔다. 팔을 버둥거려 버티던 중 꺼진 모래 결이 갈라져 층이 나뉘는 걸 발견했다. 계단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사방으로 잔디를 만들고 낮은 덤불과 나무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석상의 형태가 영화처럼 펼쳐졌다.

릴리안은 어느새 사막 아래 생겨난 정원 한가운데 선 상태가 되었다.

잿빛과 그을음에 익숙한 그녀에게 초록은 숨을 크게 들이쉬게 했다. 싱그러운 기운을 기대해선 안 됐던가. 아차 하는 순간, 숨이 가빠지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땅이 또다시 출렁이는 바람에 릴리안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았다.

언제 바닥이 한없이 꺼지기라도 했는지 그녀는 웅크린 채 한참을 아래로 떨어졌다. 누군가의 양팔 사이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언제부터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가. 거센 모래바람은 릴리안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하고 드러난 살갗과 끼어들기 쉬운 틈새로 쉴 새 없이 들러붙었다. 그녀를 대신해 누군가 투명화면을 재생해주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고 환각에 사로잡혀 영원히 떨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눈을 떴다. 릴리안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똑같이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완벽하게 둥근 구 안에 검은 우주를 품은 짙푸른 정글. 가까이에서의 푸른 눈동자는 그렇게 보였다. 멍하니 올려다본 작은 세상이 그녀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제야 릴리안은 얼굴 전체를 바라보며 그를 의식했다. 그. 푸른 눈동자의 그. 오늘 그녀의 표적.

손을 펼쳐 실을 생성했다.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남자의 눈동자가 레거시를 감지하고 움직인 건 그때였다. 그때에도 그는 릴리안을 놓지 않았다. 팔꿈치가 남자 가슴에 닿아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릴리안의 심박 수가 그의 것을 따라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남자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팔을 풀었다. 하지만 곧 후회한 듯 손을 뻗어 릴리안을 잡으려 했다.

릴리안은 재빠르게 손등으로 그의 손을 쳐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손목을 안으로 꺾은 상태로 손가락을 펴자 손안 쪽 공간에서 푸른 기운을 내뿜는 침 형상의 레거시가 다시 생성됐다. 남자도 그 장면을 봤지만, 레거시 따위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 찾는 거 아니었나.”

릴리안이 휘청였다.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빠르게 두근거렸다. 참아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호흡이 불규칙해져 정체 모를 불안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팔다리를 타고 오르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헤집더니 감정의 근원에 잠들어 있던 죽음에 관한 겁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게 저 인간 능력인가. 음파인지 블라인드인지 뭐 그런 거?’

릴리안은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뒤로 더 물러났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슬퍼 보였다. 이상한 사람.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자기 자신이었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 케일럽이 떠올랐다. 그의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릴리!’

남자는 무방비하게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릴리안은 생성한 레거시를 강하게 쥐어 잡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찌를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지러움이 강해져 욕지기가 나오려고 했지만, 그래도 해볼 만했다.

불안감 따위 와 보라지. 내가 보는 것 외엔 어차피 다 환상이야.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녀의 생각을 듣고 나서 대답하는 것처럼.

“이 순간을 오래도록 고대했어. 널 잠에서 깨우려고 긴 시간을 기다렸다고.”

무슨 소리야.

음성이 귀에 닿는 것만으로도 릴리안은 버티고 서 있기가 힘겨웠다.

“멀어지려고 하지 말고 떠올려 봐. 나를 기억해 봐, 릴리안.”

릴리안. 남자 입에서 이름이 나오자 깊고 날카로운 칼날이 폐부 깊숙이 박히는 것만 같았다. 깊은 통증에 가슴에 손을 얹고 몸을 수그리자 남자가 성급히 다가와 양어깨를 잡아 주었다. 그의 손이 팔에 닿자 아까처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추위 속에 놓인 것처럼 몸이 크게 떨렸다. 거의 붙다시피 가까워진 그의 기운에 릴리안은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릴리안.”

누군가에게 일찌감치 느꼈던 절절한 감정.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마음을 낯선 적에게서 떠올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시려 오는 눈을 감자 짓눌린 눈물이 속눈썹을 적신 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릴리안은 그에게 기댄 채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만…해.”

끝낼 때가 왔다. 릴리안은 제어할 수 없는 혼란과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팔을 들어 그를 감싸자 남자는 그녀가 포옹을 원하는 줄 알고 천천히 릴리안을 끌어안았다. 릴리안은 숨 막힐 정도의 열기를 느끼며 간신히 잡고 있던 자신의 레거시를 세워 남자의 뒷목에 집어넣었다.

그녀를 안은 남자의 몸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좀 더 싶게 밀어 넣자 그가 괴로운 듯 몸을 떨었다. 그런 중에도 얼굴이 보고 싶었는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 흰자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기운을 잃어가고 있다. 그가 느끼는 슬픔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면서 릴리안은 함께 눈을 깜박였다. 남자는 가진 힘을 모두 짜내어 이름을 부르려다 다 완성하기도 전에 릴리안 어깨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잠잠해졌던 사막에 바람이 들고 일어나 사방은 다시 황톳빛이 되었다. 세찬 바람과 모래 알갱이 외엔 느껴지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서 릴리안은 숨을 다한 남자를 부둥켜안은 채 정체 모를 감정에 휩싸여 한없이 울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서 그녀는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바람 사이로 먼 곳에서부터 달려오는 케일럽이 흐릿하게 보였다. 케일럽, 릴리안의 소중했던 사람. 진심으로 사랑한 단 한 사람.

릴리안은 투명 화면을 없앴다. 모래바람이 얼굴을 강타하며 숨을 쉬지도 눈을 뜨지도 못하게 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걸친 채 묵직하게 내려앉으려는 남자를 힘주어 일으킨 채 몸이 완전히 들러붙도록 밀착시켰다. 손을 벌려 남자 뒷목에 박힌 레거시 길이를 키웠다. 목을 관통한 후 릴리안까지 깊게 찌를 수 있을 만큼의 길이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침을 단 한 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침 형상의 레거시에 찔리자 릴리안은 남자와 함께 모래 바닥 위로 풀썩하고 힘없이 쓰러졌다.

“릴리안!”

애초부터 잔잔한 모래사막 위로 케일럽의 외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까지 릴리안이 들은 건 여전히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3.

‘우리 종족은 선조 때부터 사막에서 생활했어. 사막 외 다른 곳에서 사는 건 생각할 수 없었지. 때때로 레거시를 노리는 ’하이 리퍼‘의 공격이 있었지만, 우리는 갈수록 강해지고 영리해졌어. 덕분에 지금은 공중에 장막을 띄워 수확자 눈을 가릴 수 있게 된 거야.’

‘알고 있어요. 지도자의 아이로 길러지는 동안 수없이 들은 이야기니까요. 다만 종종 그 사실이 저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미련 없이 포기한 거니? 너 자신을?’

‘케일럽이 멀리서 다가오는 걸 보는 순간, 앞으로 닥칠 현실이 떠올랐어요. 그러고 나니까 저도 모르게…….’

‘아이야, 너는 네 현실이 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맞아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제 기억조차 믿을 수가 없는 걸요. 그 사람이 그랬어요. 자신을 떠올리라고요. 그는 내 이름까지 알고 있었지만, 저는 그 사람을 몰라요.’

‘너는 알고 있어. 다만 감당할 자신이 없을 뿐이야.’

 

-

 

릴리안의 몸 위로 촘촘히 맺힌 물기는 차게 얼어 흩뿌린 눈꽃인 것만 같다. 레거시가 신체와 정신에 침투하는 동안은 이런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몸이 차갑게 굳어 의식을 잃은 사이 특정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감은 눈두덩 아래 눈동자가 비규칙적으로 움직여 피부를 살포시 덮은 자잘한 얼음 송이들이 움찔움찔 댔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어.”

데일이 말했다. 케일럽은 옆에 앉아 릴리안을 들여다 보느라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지의 어머니를 만나는 중인 것 같아.”

이들 종족의 정신적 에너지가 응축되어 생성된 존재. 물론 그녀는 에너지의 집합체이기에 강력한 암시에 휘둘리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대지의 어머니는 지도자 편이니 걱정할 것 없어.”

“릴리는 케일럽을 처리하지 않았어. 기억을 못 떠올리는 중에도 죽일 수는 없었나 봐.”

남자와 릴리안 본인을 찌른 침은 정신을 잃게한 후 기억을 지워내는 레거시였다.

“처음엔 분명 아니었는데, 찌르는 순간 마음이 변했던 것 같아.”

“다가오지 못하게 손으로 치워내는 거 너도 봤잖아. 녀석이 자길 어필하려고 들 때 릴리안이 떠올린 건 너였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케일럽은 이제 너니까.”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운 좀 내.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말만 해.”

“넌 이미 많은 걸 했어. 케일럽을 잠재운 후 레거시를 온전히 거둬들인 것부터 그 레거시를 내게 심어주거나 릴리안 기억을 조작한 것까지. 지도자로 결정된 게 나이고, 릴리안이 좋아하던 케일럽 역시 지금의 나라고 믿게 했어. 이 모든 게 가능하도록 너는 밤낮으로 연구했고, 대신 손에는 타 버린 레거시흔이 벗겨질 날이 없었잖아.”

진실을 말하는 동안 케일럽의 아우라는 짙은 고동색으로 변해갔다.

“이번 일로 나는 네가 영리한 설계자란 생각을 했어, 데일. 케일럽의 레거시를 있지도 않은 음파와 블라인드라는 조작으로 그녀가 느낄 메스꺼움이나 어지러움을 그 녀석이 부리는 조화로 착각하게 했잖아. 그렇지만 나는 릴리안이 어지러워할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어. 릴리에게 심은 두려움 말이야. 케일럽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도록 설계한 거잖아. 그녀는 케일럽과 대면하는 내내 힘들어했어. 이건 다시 말하면 릴리안이 그를 잊지 않았다는 의미야. 케일럽을, 우리의 진짜 리더를.”

“미안한데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할래? 곧 있을 지도자 계승식에서 단에 오를 사람은 너뿐이다. 릴리안이 그 녀석을 생각해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데일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뭐……, 기억해 내기라도 한다면 더 재미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무슨 소리야. 나조차 모르는 설계라도 계획하고 있다는 거야?”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일을 두고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

 

장막을 걷어내고 돌아오는데 막사 앞에 릴리안이 있었다. 케일럽은 걸음을 멈췄다. 어떤 말은 아직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탓이 지금은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케일럽?”

릴리안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목소리가 밝다. 평소엔 이름 부르는 일조차 거의 없건만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 반가운 듯 서두르는 모습이라니. 게다가 얼굴엔 미소가 만연해 정말 자신을 찾아온 게 맞는가 싶었다. 그녀는 스스럼 없이 손을 잡고는 그의 막사까지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릴리안은 레거시를 이용해 침을 만들더니 잘게 쪼개 공중에 둥둥 띄웠다. 좁고 어둑한 공간 안으로 작고 둥근 조명이 퍼져 묘한 분위기가 일렁였다.

“지금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릴리안의 목소리가 꿈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역광으로 비치는 레거시의 푸른 기운은 마치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처럼 느껴졌다.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내 얘기 들어줄래?”

임무 수행 결과를 보고할 때 말고는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언제었던가. 말이라도 붙여보려 하면 마지못해 바라보는 얼굴과 언제든 돌릴 준비가 된 등이 그를 밀어내곤 했다. 갑자기 이런 행동이라니.

얼음꽃의 효과일까. 대지의 어머니는 늘 지도자의 편이라고 하던 것이 진실이란 말인가. 만약 이게 꿈이라면, 지도자가 되지 못해도, 잠에서 깨지 못해도 상관 없다. 릴리안과 이렇게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물론이지.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게.”

릴리안이 그를 더 없이 그윽한 눈으로 바라봤다. 케일럽을 향한 여과 없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물론 그녀는 눈 앞의 남자를 향한 것이라 믿겠지만.

“우리 셋이 지도자의 아이들로 선택받았을 때 말이야. 그러니까 너랑 나랑 줄리안이랑. 네가 내 남편이 될 거라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 줄 알아? 나 알고 있었거든. 네가 지도자가 되고, 줄리안이 그림자가 될 거라는 거. 너 따로 장막 치고 거둬들이는 법도 그때부터 연습했었잖아.”

릴리안의 말에 줄리안은 아주 오랜만에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그랬다. 그녀 말대로 지도자의 아이 중 한 명이었지만, 자신은 그림자로써 필요한 존재였다. 외부 종족 중 가장 큰 위협이던 하이리퍼 무리로부터 진짜 지도자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가짜 지도자. 릴리안은 줄리안 장막 처리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사실을 몰랐던 듯했다.

“케일럽, 나는…….”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억나? 우리 무리에 한 번 이상한 일이 있었잖아. 전부 잠들었다가 깨어났던 일. 그때부터 그랬어. 나도 모르겠어. 네가 눈 앞에 이렇게 있는데 이상하게 네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너에 대한 감정이 사라져 버렸어. 네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 허탈하고 외롭고 그리워지기 시작했어. 난 분명 널 사랑했는데, 어딜 향해 그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모르겠는 거야. 이게 이해가 되니? 너도 그대로고 내 사랑하는 감정도 그대로인데 뭐가 우릴 달라지게 한 건지 말이야.”

줄리안은 시선을 피했다.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게 데일의 생각이었다. 하이 리퍼 종족이란 의심을 받고 모래 굴에 갇혀있던 또래 아이. 심부름으로 음식을 주러 갔을 때,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말을 그에게서 들었다.

‘네 아우라가 황금색인 거 너 모르지? 지도자나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에게서나 볼 수 있는 아우라거든. 혹시 그렇게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어느 면으로든 자신보다 뛰어난 케일럽이기에 지도자 자리는 그에게 마땅했다. 그걸 탐 낸 게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제안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릴리안이었다. 그녀는 당시 차기 지도자의 반려자로 선발된 상태였다.

‘지도자가 되면 릴리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지의 어머니께서 보여주셨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했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 감정이 달라졌더라도 사라진 건 아니거든. 말이 이상하겠지만 정말 그래. 그래서 앞으로는 달라질 거야. 우리 곧 결혼도 하니까 나 노력해 볼게. 그동안의 나를 용서해 줘, 케일럽.”

케일럽을 향한 마음이더라도 괜찮았다. 그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줄리안은 릴리안에게, 그리고 종족 모두에게 케일럽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무엇 하나 되돌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삶이었다.

“용서를 빌 일도, 할 일도 없어. 너만 곁에 있어주면 난 뭐든 괜찮아.”

릴리안이 공중에 뜬 푸른 기운 몇 가닥을 앞으로 당겨 줄리안과 자신 사이로 가져다 뒀다. 마음을 정하고 달라진 그녀를 보라. 자신에게 뭐든 허락할 기세다. 줄리안은 벅차올랐다.

“그런데 케일럽, 혹시 어릴 적에는 눈동자가 푸른색이었어?”

“……뭐?”

“요즘 얼굴 하나가 계속 떠오르거든. 푸른 눈동자가 아주 강렬한 그 얼굴이 내게 그리움을 일으켜. 이상하지. 네 얼굴은 분명 아니거든. 아른아른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넌 푸른 눈이 아니잖아. 혹시 자라면서 눈동자 색 변했어? 아니야? 그렇다면 그 얼굴은 도대체 뭘까.”

생각의 유연성이 좋지 못한 줄리안으로선 어떤 답변도 떠올리지 못했다. 갑자기 궁지에 몰린 심정이 되자 어서 빨리 데일을 부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데일, 릴리안에게 왜 기억이 남은 거지? 난 뭐라고 해야 해?’

 

-

 

릴리안처럼 케일럽의 전신에도 얼음꽃이 만개했다. 육신 없이 레거시 형체로만 존재하기에 얼음꽃은 아우라에 싸여 하얗게 사라질 듯 말 듯 보였다.

데일의 막사 안은 세상의 모든 빛을 모아 가둬두기라도 한 것처럼 지독하게 밝았다. 케일럽이 가진 고유의 아우라는 색이 없이 발광하는 빛과도 같아 세기가 강해지면 데일조차 그 강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케일럽의 아우라를 본 순간, 데일은 갈망이란 감정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빛처럼 환하게 퍼지는 빛을 레거시 형태로 소유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부러울 건 하나도 없을 것만 같았다.

빛으로 점철된 레거시 속으로 손을 넣자 손끝부터 시작한 빛줄기가 팔을 타고 그의 신체로 쭉 뻗어 나갔다. 잠시 후 빼 든 손은 아주 말끔했다. 흡족함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데일은 그때를 떠올렸다. 준비가 필요했지만, 줄리안이 도운 덕에 종족 모두를 동시에 잠에 빠지게 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케일럽에게서 레거시를 모조리 뽑아 아우라와 함께 거둬들였다. 생명 하나를 통째 드러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성공하던 순간 영혼까지 감전된 것처럼 짜릿하던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도자가 될 자의 강력한 레거시를 빌려 그 힘으로 잠든 사람들의 모든 기억을 바꾸어 놓았다. 릴리안을 포함은 모두가 줄리안과 케일럽을 바꿔 기억하게 했다. 그러니 모두 잠들었다 깨어나는 사건 후 유일하게 깨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은 케일럽이 아니라 줄리안이 되는 것이었다.

응집된 레거시에서 아우라가 숨쉬듯 움직이다 간혹 케일럽의 형상을 만들기도 했다. 이걸 혼자만 볼 수 있다는 사실도 그를 짜릿하게 했다.

“내가 레거시를 증폭하거나 뺒는 능력이 있다는 걸 하이 리퍼 종족은 너무 빨리 눈치챘어. 가능성이 있단 이유만으로 아무 짓도 안 한 어린 날 사막 한가운데 버릴 정도로 그들은 야박하고 현명했지. 그랬는데 마침 지나던 너희 종족이 날 살린 거야. 아니다. 릴리안인가. 그래. 릴리안이 날 살렸네. 남자를 결심하게 하는 여자의 힘이란 정말 대단해. 그렇지?”

케일럽 형체가 뭉뚱그려지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서로 잡아당기듯 꼼꼼히 밀착했다. 덩치를 줄이며 틈 없이 꽉 뭉칠 때면 그 안에서는 응축된 새로운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속에서부터 레거시를 빛으로 세탁하듯 보였다. 그 활발한 힘의 활동이 흡족해 신나 죽을 것만 같았다.

“근데 케일럽. 릴리안을 계속 보다 보니까 말이야. 너희 둘이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렸는지 알 것 같더라고. 소심한 줄리안이 차지하기엔 상당히 아깝지. 안 그래? 그래서 말인데. 강력한 힘을 가지고 뭐든 할 수 있는 이 대담 무쌍한 내가 이 종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돼서 그녀를 돌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데일은 킥킥거리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이어갔다.

“줄리안이 얼마나 정성 들여서 장막을 쳤다 거뒀다 하는지 알아? 하이 리퍼 무리한테 정체를 가리려고 매일 매일 진짜 열심히거든. 이미 하이 리퍼 종족 하나가 이렇게 모두를 조종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가끔은 이걸 누구한테라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정도라니까. 나중에 기회 봐서 줄리안한테만 살짝 알려줄까 생각하고 있기는 해. 지금은 말고 다음에.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모든 걸 다 손에 쥔 후에. 이제껏 친한 친구로 지낸 정을 생각해서 최대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줄 계획이야.”

장막 안으로 파다하게 퍼진 기운을 한데 모아 인도의 지팡이 안으로 흡수시켰다. 그러자 눈부시게 밝던 실내가 여느 곳처럼 평범해졌다. 데일은 벅찬 감동에서 헤어나오기 아쉬운 듯 눈을 감고 여운을 느꼈다.

줄리안의 황금빛 아우라. 데일에겐 이제 그것이 필요했다. 지도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아우라가 황금빛이라는 건 거짓이 아니다. 다만 케일럽이 가진 빛 형태의 아우라가 없을 때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까지 줄리안이 알 필요는 없다. 나중에 알게 된다면 그의 얼굴에서 매우 재미있는 표정을 감상할 수 있겠지. 생각만으로도 짜릿해 흥이 절로 나려는데, 멀리서 줄리안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일, 릴리안에게 왜 기억이 남은 거지? 난 뭐라고 해야 해?’

데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그래, 간다 가. 아직까진 가장 좋은 친구니까.”

데일은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섰다.

어둡다. 시야를 가리고 진실을 모른 척하는 배신자의 시간. 환상과 두려움을 몰고 다니는 이 깜깜한 어둠이 그의 속내까지도 은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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