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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 me Ishmael

이억수

 

 

0.

 

담뱃갑에 아직 금연그림이 없고 술집에선 담배를 피우는 게 당연했던 시대의 이야기.

 

 

01.

 

데구르르 쿵! 하고, 소녀는 이제쯤 오겠다 싶으면 찾아왔다.

어떤 낮엔 침상 밑에서, 어떤 저녁엔 바람결에 부푼 커튼 아래서 굴러 나왔다. 도대체 여기선 어떻게 굴러나온거야 싶은 곳에서 굴러 나올 때도 많았다.

다만 끝 동작은 늘 한결같게 체조선수처럼 양팔을 쫙 펼치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대체 뭔 의미가 있는 동작인지는 몰랐지만 하여튼 그랬다.

 

 

02.

 

그리고 사라질 때는 으레 눈을 꼭 감으라고 하거나

윤의 뒤로 돌아가서는 뿅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왜 올 때는 쿵이고 돌아갈 때는 뿅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03.

 

윤은,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부대 안에 여자라니. 그것도 어린 여자애라니. 그냥 여자도 아니고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나왔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그냥 여자였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여중생이라는 단어는 한없이 범죄에 가까운 냄새를 풍겼다.

 

윤은 억울했다.

 

정신병에 걸릴거면 좀 더 이쁘고 나이찬 여자나 나올 것이지.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나 중학생은.

자신의 내재된 성욕이 원망스러웠다.

 

 

04.

 

소녀가 처음 관물대에서 데구르르 쿵! 하고 굴러 나왔을 때.

윤은 그만 깜짝 놀라. 씨발! 이라고 외쳐버렸다.

누구라도 관물대에서 금발의 여중생이 굴러 떨어진다면 깜짝 놀랐을 테지만.

안쓰럽게도 선임들이 다 있는 앞이었다.

 

다행히도 윤은 예전부터 이미 폐급이었다.

 

 

05.

 

소녀가 여섯 번짼가 굴러 나왔을 때.

 

윤은 소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환상과 대화하는 것은 정신병을 키우는 짓이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 같았지만

윤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그도 적잖이 심심했던 것이다.

 

"저기." 하고

 

윤이 말을 걸자 소녀는 까무러치듯이 놀랐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윤은 당황했다.

아니, 그건 내가 지을 표정이지.

 

 

06.

 

소녀는 윤을 잡아끌고 도서실로 향했다.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 이상하게 걷는 윤을 보며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 쟤 원래 이상한 놈이었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갔다.

 

도서실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포즈로 도서실에 끌려들어온 윤과 금발의 교복소녀. 만약 윤의 취향이 조금만 더 소아성애 쪽에 기울어 있었다면 소녀는 큰일을 당했을 것이다.

 

소녀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숨을 한번 크게 몰아 쉰 뒤.

이젠 말을 해도 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윤은 잠시 고민하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네 정체는 무엇이냐! 라는 식의 질문은 아무래도 너무 무례한 것 같아 대강 돌려 물어본 것이었다.

 

윤은 정신병에게도 예의를 차리는 놈이었다.

하지만 되려 이것이 소녀에겐 더 곤혹스러웠는지

소녀는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리다 책장을 보곤

막 정한 것이 분명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슈마엘."

 

"이슈마엘이라고 해요."

 

이때는 그냥 모비 딕을 너무 감명 깊게 읽었나 보다 싶었다.

 

 

07.

 

별로 본명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기에 윤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영상을 떠올리며 소녀를 롤링걸이라 부르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소녀가 질색을 했기에 그냥 이슈마엘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러다 윤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자연스레 책장에서 성경을 찾았다. 그리곤 어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성경구절을 읊으며 물러나라! 하고 근엄하게 말해봤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소녀가 크아악 하고 절규하며 타버리지 않아서

윤은 살짝 실망했다.

 

자신이 악마 취급을 받았다는 걸 깨달은 이슈마엘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윤의 가슴을 퍽퍽 쳤다.

 

첨언하자면 꽤 아팠다.

 

 

08.

 

이후로, 윤은 조금 무서워져서. 몇 번 이슈마엘을 무시하려 해봤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무시하면 무시해요?” “지금 나 무시하는 거에요?” “무시하냐구요.” 하며 계속 주먹으로 퍽퍽 쳐왔기에 굉장히 성가셨다. 그렇다고 키가 자기 어깨까지도 안 오는 여자애를 때린다는 건 뭔가 인간으로서의 무언갈 버리는 느낌이라 꺼려졌다.

 

성가신 정신병이네. 하며

 

결국 사람이 없을 땐 말을 받아준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09.

 

안 그런 부대가 있겠냐 만은 윤의 부대는 깡촌에 있었다.

깡촌도 그런 깡촌이 없었다.

윤은 아직까지도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의 감상을 기억하고 있다.

이야, 이거 참, 좆됐다 싶었다.

 

여기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싶은 산 몇 개를 굽이굽이 건너 여기서 과연 생물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올라올 때쯤에 부대가 나왔다.

 

기암절벽과 기괴하게 뒤틀린 소나무들이 돌아가라……. 돌아가라... 하고 경고하는 듯 했다. 면회실엔 면회객도 뭣도 없었다. 언제부터 여기서 살았을까 싶은 고양이들만 있을 뿐.

간혹, 아들 새끼 얼굴이나 보자. 하고 찾아왔던 부모님들도 우리 그냥 휴가 때만 보자. 하고 학을 떼며 돌아갔다. 거기에 본부가 있는 거고 윤이 사는 막사까지 가려면 또 비슷한 산길을 몇 개 건너야 했다. 그러는 데만 40분이 걸렸다.

 

중대의 위치가 고대의 도시국가를 연상케 했다.

사람 하나 죽어도 아무도 모를 곳이었다.

간부가 이곳에 오면 좌천이요 병사가 이곳에 떨어진다면 희망을 버려야 한다…….

 

여기가 대충 어디쯤이냐는 지리학적 질문에 윤은 담배를 태우며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했다.

윤은 그런 놈이었다.

결국 가만히 설명을 들어주던 이슈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축했다.

 

"중증의 피해망상이네요."

 

 

10.

 

"흐으음"하고 머리를 톡톡 두드리던 이슈마엘이 빙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살던 곳에서 꽤 많이 떨어진 곳이었네요. 여기."

호기심이 동한 윤이 물었다.

"어디 사는데?"

"인천이요."

윤은 깜짝 놀랐다.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릴 정도의 놀람이었다.

먼지를 툭툭 털고 담배를 다시 물며 새삼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런 설정이었어?"

설정이 아니에요하고 이슈마엘은 화가 난 듯

윤의 가슴을 퍽퍽 쳤다.

 

 

11.

 

"그럼 어디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어이가 없다는 듯.

여전히 퍽퍽 소리가 나게 치며 이슈마엘이 물었다. 자신의 몸에서 이토록 호쾌한 소리가 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실토했다.

 

"꿈의 나라나, 상상의 나라 같은 곳."

 

때리는 속도가 리드미컬하게 빨라졌다. 좀 전이 큰북이었다면 지금은 팀파니를 치는 듯 했다. 이젠 좀 많이 아프다.

이슈마엘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그럼 제 머리카락이 왜 금발이라고 생각해요?"

 

"그야, 나도 모르던 내 삐뚤어진 취향을 흠뻑 함유해서 그런 줄 알았..."

 

"어쩐지 물어보질 않더라!"

 

보통은 물어본다구요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외국인이냐고.

이슈마엘이 길고 샛노란 속눈썹을 부루퉁하게 깜빡였다.

 

 

12.

 

재잘재잘 이라는 부사를 사람으로 바꾸면 이슈마엘이 될 것 같았다. 윤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슈마엘이라는 이름은 추방자 라는 뜻인데. 만약 이슈마엘이 어딘가에서 추방당해 이곳에 온 것이라면 그 이유는 분명 시끄러워서일 것이다. 묻지도 않은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곤란했다.

윤은 이슈마엘의 엄마가 핀란드 사람이었다는 것.

이슈마엘이 열 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열세 살 때 아빠가 새 장가를 들었는데. 새엄마(아줌마라 부른다.)와는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것. 둘이 맞벌이라 주로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는 것. 교복 밖에 입지 않는 건 아줌마가 사준 옷은 입기 싫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네가 가서 사오면 되잖아. 라는 말에 이슈마엘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그그, 그런 건 당연히 알고 있죠. 라고 말해서. 애가 머리가 썩 좋진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3.

 

뭔가 이슈마엘만 말하는 것은 불공평한 것 같아. 윤도 이것저것 얘기했다. 예를 들면,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한 것. 멧돼지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관한 것.

 

위병소 앞에 사는 고양이에 관한 것.

옆에 사람이 있을 때면 노트에 끼적였고 사람이 없으면 조용히 말했다.

윤도, 미친놈처럼 보이는 건 싫었던 것이다.

 

 

14.

 

아빠랑 싸우고 나서였나.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하도 많이 싸워서 짚이는 게 한둘이 아니거든요. 하여튼 침대에서 머릴 박고 "이 놈에 집구석! 완전 짜증나!" 하면서 발버둥 치다가 굴러 떨어졌더니 여기였어요. 진짜 깜짝 놀랐어요. 막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군복입고 이상한 말이나 하고 있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하고 만져지지도 않고……. 꼭 귀신이라도 된 것 같아서 처음엔 어떻게 돌아가나 싶었는데 또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하면 돌아가지더라구요.

 

눈으로 먼지를 쫒던 윤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널 보기 시작했다?"

 

이슈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5일만이었어요.

 

윤은 자신의 정신병이 당위를 만들고 있다고 감탄하며.

자신이 무서운 아저씨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15.

 

이슈마엘은 보통 학교가 끝나는 4시쯤에 자주 왔다.

! 하는 소리가 들리면 또 시작이구나. ‘ 했다.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 꽤 디테일하네. 싶었다.

 

책을 읽고 px에 건전지가 들어오면 같이 노래도 듣고 가끔은 대화도 나눴다.

 

서로에 대한 신상정보를 알고 나서부턴 주로 문학과 음악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윤이 생각하기에 이슈마엘은 나이치고 꽤 괜찮은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은 대화가 너무 즐거워져서

너무 빠져 들까봐 윤은,

 

이슈마엘이 자신이 모르는 문학이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부러, 내 정신병이 디테일해진다며 감탄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이슈마엘은 윤을 퍽퍽 때렸다.

손도 더 매워지는 것 같네.

윤은 더 감탄했다.

 

그리고 이슈마엘도 윤이라는 인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군대라는 곳은, 애초에 혼자 있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다.

그런데 윤은 밥을 먹을 때도 혼자였고 작업을 할 때도 혼자였고 심지어 담배를 태울 때도 혼자였다. 모두가 윤을 피하는 듯 했다.

 

이슈마엘은 윤이 외톨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16.

 

윤은 흡연장에서 담배를 태우며 천천히 자신이 혼자가 된 경위를 변명했다. 윤도 처음부터 폐급은 아니었다. 정확하겐 폐급취급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등병 땐 폐렴 때문에 창 전술 훈련이라는 큰 훈련을 빼게 되고 일병 때는 간염 때문에 혹한기 훈련을 빼게 됐다는 희대의 꿀을 빨아버린 덕택에 막사에 복귀하고 보니 윤은 폐급이 되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염증이 개새끼였지만 사람들은 윤을 개새끼 취급하는 걸 더 좋아했다.

 

안 그래도 말이 없는 성격이었기에 오해는 점점 더 깊어져갔다.

선임들은 윤과 말도 하기 싫다는 듯. 근무를 나갈 때면 하품을 하며 자기는 막사에서 가까운 초소에 고정을 박고 윤에게 근무를 다녀오게 시켰다. 일명 부메랑이라 불리는 부조리였다.

 

이따금 야간 근무를 나갈 때면 윤은 산짐승의 울음소리에 벌벌 떨며 오랫동안 밤길을 헤매었다.

 

 

17.

 

거기에 윤은 동기도 없었다.

사실 동기들만 있었더라도 지금 같은 취급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같이 들어왔던 동기 세 명 중 두 명이 일병 2호봉 때 서로 죽어라 싸우고 다른 중대로 옮겨졌고 한 명은 일3 때 와이프가 출산을 하면서 상근으로 빠져버렸다. 그래서 윤의 군번에는 윤밖에 안 남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윤 본인도 혼자인 게 편했다.

 

그렇게 된 거야. 하고 윤이 담배를 비벼 끄자.

 

잠시, 이슈마엘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밝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저도 같아요."

 

 

18.

 

윤은 잠시 이슈마엘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묻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곤란해진 윤은 그러냐. 하고

이슈마엘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이슈마엘도 그래요. 라고 하곤 아무 말 없이 윤을 때렸다.

 

뭔가 윤은 이슈마엘과 조금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19.

 

윤은 외출을 나갔다가

이슈마엘이 쓸 컵을 하나 사왔다.

 

애초에 그걸 목적으로 나간 건 아니었지만 잠깐 마트에 들렀을 때 생각이 나서 사왔다. 무려 담배 한 갑 치였다. 이건 윤에게는 꽤 큰 지출에 해당한다.

 

하얀 도자기에 웃는 그림이 그려진 귀여운 머그컵이었다.

최근에 이슈마엘이 자주 방문하게 되며 물을 마시거나 차를 마실 때 컵을 종종 쓰게 되었는데.

책이나 CD플레이어 같은 건 같이 써도 상관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컵을 같이 쓰는 건 비위생적인 것 같았다.

 

"설거지는 직접 하도록." 하고 건네주자

 

이슈마엘은 뛸 듯이 기뻐했다.

 

 

20.

 

도서관을 좋아했다.

외톨이들은 모두, 도서관을 사랑하는 병에라도 걸리는 걸까.

윤과 이슈마엘은 둘 다 도서관을 좋아했다.

그곳은 원래 텅 빈 휴게실이었지만

옛날부터 시간을 죽일게 담배와 책 밖에 없었는지

선임들이 두고 간 책들이 도서관을 이뤘다.

 

 

21.

 

윤은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지만 책장에 놓인

책들의 장정을 찬찬히 살피며 뒤적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책에 쓰여 있는 이름과 책들을 대조해보며 이젠 없는 사람의 취향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이건, 정말 답이 없다 싶은 책들만 따로 빼 정리하기도 했다.

 

윤은 정동혁이라는 사람의 취향은 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박태환이라는 사람과 임철진이라는 사람의 취향은 영 꽝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임철진이라는 사람이 끔찍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22.

 

대체로 윤과 이슈마엘은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었지만

읽고 싶은 책이 겹치면 같이 읽기도 했다.

취향이 비슷했기에 꽤 자주 그랬다.

윤이 오른쪽에 앉고 이슈마엘이 왼쪽에 앉아 서로의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이따금 이슈마엘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와있어 윤이 화들짝 놀랄 때도 많았다.

 

주로 헤밍웨이나 카프카 같은 옛날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가끔은 카버의 단편도 즐겨 읽었다.

헤밍웨이를 특히 좋아해서 인디언 캠프를 세 번, ‘무기여 잘 있거라를 두 번 킬리만자로의 눈을 세 번 같이 읽었다.

 

 

23.

 

"인디언 캠프는, 어린 닉이 죽음이 뭔지는 몰라도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부분이 백미잖아요?"

 

윤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전 처음에 인디언캠프를 읽었을 때. 왜 그 부분이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이슈마엘이 한숨을 폭 쉬었다.

 

"왜냐면 그런 걸 이해하기엔 제가 너무 어렸거든요."

 

"지금보다 어릴 때면 얼마나 어렸다고."

 

윤이 의아해하자 이슈마엘은 손가락을 꼽아보며 대답했다.

 

"아홉 살 때 얘기에요."

 

윤은 조금 생각하다가 으음, 하고 대답했다.

 

"조숙했네."

 

그렇죠?”

 

 

24.

 

한참을 도서관에 있다가. 해질녘이 돼서야 둘은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밖이란. 당연히 흡연장을 말한다. 끙차! 하고 기지개를 펴며 이슈마엘이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뭐가?”

 

인디언 캠프.”

 

뭔가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 것 같네. 라고 생각하며 윤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마 아까전의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하고 윤은 이슈마엘의 다음 말을 기다려 줬다. 잠시 넘어가는 해를 응시하던 이슈마엘이 한숨같이 말했다. 살짝 목이 졸린 듯. 혼잣말인 듯. 주위가 조용하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왜 사는 게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요?”

 

계속 살아 있어봐야.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결국에 죽어서 사라질 거라면. 좀 더 보기 좋은 꼴일 때 죽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멋쩍었는지 이슈마엘은 뒤에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죽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요.’ 하고 얼굴을 붉혔다.

 

윤은 속으로 목련을 생각하며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이슈마엘의 표정은 공감보다는 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담배연기를 오랫동안 머금던 윤이 연기를 폐 밖으로 내보냈다. 오랜 고민 끝에 윤은 이슈마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중에 네가 진심으로 죽고 싶어지는 때가 오면, 그땐 같이 죽어줄게.”

 

뭐에요 그게.” 머리를 덮은 윤의 손을 치우며 이슈마엘이 불평했다. 됐어요. 하고 이슈마엘이 피식 웃었다.

 

석양빛에 담배가 타들어갔다. 윤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벤치에 앉아 있는 이슈마엘이 놀라우리만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25.

 

언제가 됐건. 흡연장은 대화를 나누기 괜찮은 장소다.

이후로 둘만 있을 때면 윤과 이슈마엘은 거기서 대화를 나눴다.

윤은 주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웠고

이슈마엘은 핫초코를 마셨다.

윤이 '중학생이면 주말에 할 일 많지 않나...'

하는 눈으로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면

이슈마엘이 '주말에도 딱히 갈 곳이 없어요.'

 

하는 눈으로 깔끔하게 무시하는

치열한 대치가 이뤄지는 장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슈마엘이 좋아했기에 핫 초코만은 꼬박꼬박 타줬다.

 

 

26.

 

"핫 초코 맛있어요."

 

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타줘서, 비법 비율을 알거든."

 

"어머님이랑 친하셨나요?"

 

", 꽤 친했어."

 

이슈마엘이 지긋이 윤을 쳐다보자 멋쩍어진 윤은 눈을 슬쩍 피했다.

 

"의외지?"

 

"의외에요,"

 

즉답이었다.

 

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7.

 

"부모님이랑 전화는 자주 해요?"

 

"전혀 안 해."

 

"사이가 안 좋아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글쎄, 뭐랄까.

 

"죽은 사람이랑 전화하는 건, 아무래도 미친놈처럼 보일 테니까."

 

이슈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주위 눈치를 많이 보는군요."

 

윤도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의 숙명이지."

 

 

28.

 

담배 탓인지 살짝 쉰 목소리로 윤이 말했다.

 

"입버릇처럼, 한 날 한 시에 죽고 싶다더니, 정말로 한 날 한 시에 죽어버렸어."

 

이슈마엘은 조용히 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정도의 상식은 있었던 모양이다.

 

"교통사고였지."

 

무슨 일본 괴담처럼 너무 많은 보험금이 들어왔어.

그런 소원은 빈 적이 없지만.

 

윤은 잠시 흐으음하고 숨을 쉬다. 세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싶었다.

 

 

29.

 

이슈마엘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짧게 숨을 쉬었다가 멈췄다.

 

그 모습을 보고 윤은 속으로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포기한 듯. 이슈마엘은 잠시 빈 잔을 내려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 . 나중에 나도 그 비법비율 좀 알려줘요."

 

윤은 안도하며 그러겠다고 했다.

 

 

30.

 

최근 중대에서 윤이 혼잣말을 하는걸 목격한 사람이 많아졌다.

윤은 몰랐겠지만 흡연장에선 그런 소문이 돌았다. 조곤조곤하게 소란스러운 흡연장에서 불현듯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데 그 새끼 원래 미친놈이었잖아."

 

맞는 말이었다.

귀신이라도 보나보지 하고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흩어졌다.

 

 

31.

 

윤이 이슈마엘에 대해 가장 신기해한 것은.

이슈마엘이 가끔 숙제를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마치 진짜 중학생인 것처럼.

그것도 윤이 분명 본적이 없는 교재를 또박또박 가져온다는 점이 디테일했다.

 

윤이 교과서를 들춰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거, 진짜 교과서네."

 

"그럼 세상에 가짜 교과서도 있어요?"

 

정론이라 할 말이 없었다.

윤은 입맛을 다시며 결국 이슈마엘의 방학 숙제를 거들었다. 여기서 여기까지만 해주면 되요. 라고 너무 당당히 요구해서 윤은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지. 라는 표정을 지으며 함수 문제를 풀었다.

 

그 표정을 본 이슈마엘이 펜을 바쁘게 놀리며 물었다.

 

"딱히, 할 일 있어요?"

 

없었다.

 

 

32.

 

다음날 이슈마엘은 교무실로 불려가

'숙제가 하기 싫으면 그냥 말로 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갱지엔 빨간 비가 주륵주륵 내려 있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사실, 말은 안했지만 윤은 문과였다.

 

'돌아가면 백대 때릴 거야.'

 

이슈마엘이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33.

 

이슈마엘이 찾아와도 윤을 못 만날 때가 있었다.

평소엔 휴게실이나 흡연장이나 도서관에만 가면 윤을 찾을 수 있었는데. 어딜 가도 윤이 없었다. 그게 꽤 쇼크였나 보다.

근무를 다녀왔는데 내무반에서 웬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윤은 깜짝 놀랐다.

 

 

34.

 

깜빡 전역해버린 줄 알았다면서 이슈마엘은 얼버무렸다. 윤은 일병 약장을 보여주며 안타깝게도 아직 한참 남았다는 것을 알려줬다.

 

"다음번에 근무 갈 땐 나도 같이 나갈래요."

 

힘들걸. 하고 경고했지만 이슈마엘은 생각보다 잘 따라왔다.

저 멀리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이슈마엘을 보며 윤은,

나도 저 나이 땐 저렇게 체력이 좋았던가. 하고 생각하다

곧 숨을 몰아쉬며 먼저 쉬자고 말을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정도로 체력이 좋진 않았었다.

그 이후로 근무를 나갈 땐 이슈마엘도 따라 갔다.

 

 

35.

 

이슈마엘이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웬만하면, 윤이 어딜 가든 이슈마엘과 함께였다.

주말엔 아침부터 올 때도 있었다.

가끔 근무를 나갈 때면 귀신이 나온다는 버려진 초소의 기만 인형을 올리고 고라니의 수를 세고 멧돼지를 만나면 같이 도망쳤다.

이즈음해서 이슈마엘은 위병소의 고양이와 좀 친해졌다.

 

책도 노래도 지겨워질 때면 가끔 버려진 고가에 올라 한가로이 마을을 보거나 구름을 봤다. 굉장히 의미 없고 쓸모없고 자잘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군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이정도 무료함과 무의미함은 느끼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윤은 이슈마엘과 노닥거렸다.

 

솔직히 조금은 즐겁다고 생각했다.

 

 

36.

 

그렇게 내려쬐는 햇빛에

봄이 증발하는 소리가 들릴 즈음에.

 

 

37.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하고

이슈마엘은 책을 읽다가 정말로 뜬금없이 고백했다.

윤은 이슈마엘을 보며 나도 저 나이 땐 저렇게

솔직했던가. 하고 생각하다. 생각에도 없던 말을 내뱉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좋아하는 것 같다는 뭐야."

 

", 그런 부분은 좀 싫어해요."

 

 

38.

 

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

 

"저도 대충 짐작은 했으리라 짐작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이슈마엘의 표정에.

잠시 빈 머그컵을 내려다 보다 입술을 깨문 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나 상처받을 말 밖에 안 나올 것 같았다.

 

윤은 망상에게도 상처를 줄까 걱정하는 놈이다.

 

 

39.

 

긴 침묵 끝에

 

"미안하지만 매주 면회를 오는 기특한 여자 친구가 있어서 안될 것 같아." 하고 윤이 말했다.

 

"너무 빤하게 보이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들켰냐?"

 

"요컨대 거절인가요?"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그런 거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런 셈인 건 뭐에요?"

 

애들은 정말로 빨리 배우는구나.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윤은 앞으론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시겠다고 생각했다.

 

 

40.

 

이슈마엘이 단발이 되어 나타났다.

보통 남자들은 여자의 변화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확실한 변화는 제 아무리 윤이라도 알아차려버리는 법이다.

작가가 게을러서 묘사를 안했지만 이슈마엘은 원래 등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였는데 지금은 어깨까지도 안 오는 단발이다.

 

반항하는 거냐! 와 실연이라도 한 거야? 에서 고민하다 윤은

 

"머리에 껌이라도 붙은거야?" 하고 물었다.

 

꽤 재치 있었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괘씸했다.

 

이젠 당연하다는 패턴으로 맞았다.

 

 

41.

 

할머니한테 잘라 달라고 했어요.”

 

밥 먹으면서 남자한테 차였다고 했더니. 알았다. 라고 하고는 바로 잘라줬어요. ‘시원스런 할머니네.‘ 하고 윤이 생각했다.

 

그런데 예쁘게 잘 자르신 것 같은데.”

 

옛날에 미장원에서 일하셨다나 봐요.“

 

어쩐지. 하고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42.

 

이젠 단발인 이슈마엘이 책상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렸다

윤은 그걸 보며 시원시원한 다리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어 커튼이 펄럭였다.

 

"그래도 저 노력은 해볼 생각이에요." 하고

 

이슈마엘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사실 당장 사귄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히면 다시 고백해볼래요."

 

대체 뭔 노력을 할 것인지 짐작도 안 갔지만 윤은 뜻대로 하세요. 하고 아이스티를 타왔다.

 

 

43.

 

윤의 생일이 다가와서.

이슈마엘은 윤에게 뭐 가지고 싶은 게 없냐고 물어봤다.

 

윤은 생각하는 듯. 눈깔을 위로 했다가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담배나 사다줘."

 

군대 담배는 영 맛대가리가 없어서.

 

"저 미성년자인데요."

 

윤이 쿨럭 거리며 웃었다.

 

알아.”

 

내가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니.

이마를 짚으며 이슈마엘은 자기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44.

 

별달리 다른 갖고 싶은 건 없냐고 묻자.

 

윤은 "없어" 라고 말하곤 다시 연기를 뿜었다.

 

다만 생일이라는 단어에선 무언가 느낀 게 있었는지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며 말문을 열었다.

 

"일곱 살... 아니 초등학교를 다닐 때니 아홉 살인가. 생일 일주일 전에. 사탕을 사먹었었는데 곽이 하모니카모양이었어. '' 소리만은 안 났지만 그럭저럭 노래 비스무리하게 흉내를 낼 수 있더라고."

 

"한동안 집에서 뿜빠뿜빠하고 부르고 다녔는데. 엄마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생일 선물로 하모니카를 사줬어. 내가 좀 제대로 된 하모니카를 불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나봐."

 

윤은 잠시 생각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장난감 전단지라도 들고 다닐걸.

하고 투덜거렸다.

 

 

45.

 

옆에서 가만히 아이스티를 마시던 이슈마엘이 졸랐다.

 

"듣고 싶어요."

 

주어는 생략되었지만 대강 의미는 알 수 있었다.

윤은 고개를 저었다.

 

"하모니카가 없잖아. 휘파람이라면 불 수 있지만."

 

그거라도 듣고 싶어요. 라고 해서 윤은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46.

 

 

그래서

선물이에요. 하고 이슈마엘이 상자를 내밀었을 때.

윤은 아마 하모니카겠지. 하고 생각했다.

상자는 담배 갑이 들어있기엔 너무 좁고 길었다.

딱 하모니카 하나가 들어갈 크기였다.

윤은 실망을 숨기지 않은 채 "고마워" 하고 선물을 받았다.

전혀 고마워하는 얼굴이 아니에요 하며

이슈마엘은 윤의 가슴을 퍽퍽쳤다.

역시 하모니카였다.

 

 

47.

 

"그런데 이걸 어디서 불어?"

 

불 수는 있지만……. 하고 윤은 이슈마엘에게 물었다.

하모니카는 생각보다 소리가 크게 나는 악기다. 내무반에서 부르기엔 선임들의 눈치가 보이는데... 군대에선 딱히 악기를 연주할만한 공간이라는 게 없었다. 방음이 안되니까.

 

"폐고가에서 불러주면 되잖아요."

 

이슈마엘이 당연하다는 듯 요구했다.

확실히 거기까지 가면 소리가 들릴 일은 없다. 윤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널 위해서?"

 

", 날 위해서."

 

이슈마엘이 없는 가슴을 펴며 더 당당히 요구했다.

얜 정말 답이 없구나 싶으면서도 결국 윤은 고가에서 하모니카를 불어주었다.

 

 

49.

 

윤도 슬슬 사수로 뛰는 횟수가 많아지는 짬이 되었다.

 

윤은 별로 인정하기 싫겠지만 결국 시간은 흐르는 것이다.

부사수로 나갈 때면 사수들이 무조건적으로 부메랑을 시켰기에 이슈마엘과 둘이 근무를 다녀올 수 있었지만 사수로 나갈때면 부사수를 데리고 나가야했기에 둘이 대화를 하며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부사수에게 부메랑을 시키긴 싫었다. 그 결과 이슈마엘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이슈마엘은 같이 근무를 나가고 싶다고 했다.

윤이 말은 못 걸텐데. 하고 시무룩하게 충고했다.

그래도 같이 나가주겠다며 이슈마엘은 윤을 위로했다.

 

 

50.

 

다행히도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윤은 곧 이슈마엘에게 말을 거는 법을 터득했다.

부사수에게 말을 거는 척하면서 말을 걸면 된다!

어차피 주어만 빼면 그게 그거였다.

 

'어두우니까 발밑 조심해라.' '랜턴은 수풀쪽을 비추면 안 된다. 멧돼지님께서 노하신다.'

'라면 먹고 갈 거야?' '비빔? 국물?' '내가 고3땐가 한번은 서른 살 먹은 여자랑 사귄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후임에게 말해도 무방할 말들이었다.

그럴 때 마다 뒤의 부사수는 성실히 대답을 해줬지만 윤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불쌍한 일이다.

 

하지만 걔 중엔 눈치가 빠른 놈도 있는 법이다.

 

 

51.

 

김이라는 놈이 그랬다.

아주 옅게나마 남아있던 위화감을 귀신 같이 알아차려 버린 것이다. 여느 날과 같이 윤은 김에게 말을 거는 척을 하며 이슈마엘에게 말을 걸었는데 김이 "저기 윤 일병님? 사실 저한테 말을 거시는 게 아니시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버렸다.

감은 좋아도 참을성은 없는 놈인가 보다.

윤은 소름이 돋았다. 처음엔 부정했지만 두 번 세 번 물어보자 결국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여기에 이슈마엘이라는 여자애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슈마엘이 빙글 웃으며 김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대로 미친놈 같겠지만. , 그래."

 

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담배를 껐다.

 

그러자 흐음. 하고 김은 손을 흔드는 이슈마엘을 보더니.

 

", 윤 일병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곤 정말로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습니다. 이슈마엘." 하고 이슈마엘이 있는 곳을 향해 정확히 손을 흔들어줬다.

 

진짜로 이슈마엘이 보이는 줄 알고 윤도 이슈마엘도 깜짝 놀랐다. 이후로 김은 가끔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뭔가 미친놈 장단에 맞춰준 다기 보단 정말로 이슈마엘을 존중한다는 느낌이었다. 가끔 윤과 김은 같이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터무니없이 좋은 놈이라고 윤은 생각했다.

 

 

52.

 

관물대를 정리하다 타로카드가 나와 오랜만에 타로를 봤다. 이등병 떄 재미 삼아 샀다가 선임들 타로만 엄청나게 봐줬던지라 한동안 봉인했던 물건이었다. 내무반에 앉아 조용히 타로를 보고 있는데 관물대에서 이슈마엘이 굴러나왔다.

 

", 타로도 볼줄 알아요?!"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꼴에 사교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내 것도 좀 봐줘요!" 하고 이슈마엘이 아양을 떨었다. 정신병의 타로를 봐주는 건 처음인데. 하며 윤이 카드를 셔플했다. 그리고 침상에 능숙하게 카드를 쫘라락 펼쳤다.

 

"자 여기서 원하는 카드를 세장 골라."

 

으음... 하며 머리를 잡고 고민하던 이슈마엘이

이거, 이거, 이거요. 하고 세장 골랐다.

 

...심판과 태양과 악마가 나왔다.

 

결과 값은. 운명의 수레바퀴와 교황이다.

 

실로 정신병에게나 나올 법한 점괘라고 생각하며 윤은 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카드들이 나타내는 징조가 지나치게 난해하고 또 불가해했기에 풀이 또한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말이 길어지자 답답했는지 이슈마엘이 말을 끊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요?"

 

윤은 흐으음. 하며 천장을 봤다.

심하게 담배가 당겼다.

'결론이라.'

윤이 무릎을 탁 쳤다.

 

"성불하겠네."

 

진지하게 하라고 퍽퍽 맞았다.

 

 

53.

 

마르세유 타로 카드. No.5 교황.

 

이성관계와 인간관계의 대립 혹은 이별을 의미.

 

54.

 

"고백을 받았어요."

 

이슈마엘이 편지를 흔들며 자랑했다.

새하얀 편지지에 붉은 하트 스티커로 봉인을 한게

딱 순정 만화에 나올 법한 전형적인 고백 편지였다.

 

"." 윤이 담배를 떨어트리며 감탄했다.

 

"열어봤어?"

 

"아뇨, 아직요. 윤이랑 같이 열어보려고 기다렸어요!"

 

윤이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뻗었다.

 

"굳이?"

 

"보기 싫어요?" 이슈마엘이 정색하며 편지를 뒤로 확 뺐다.

 

"아니, 역시 보고 싶어."

 

윤이 시무룩하게 꼬리를 내렸다.

 

"그쵸?"

 

55.

 

학창시절에 이런 경험 한번 못 겪어봤을 윤을 위해 특..히 가져와 준거라구요. 하고 이슈마엘이 뻐겼다. 솔직히 윤은 좀 재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편지가 정말로 궁금했기에 꾹 참았다.

10분을 그렇게 뻐기고 이슈마엘이 입으로 러브하우스에 나오던 노래를 따라라라라. 따라라 라라라라. 흥얼거리며 봉투를 천천히 열었다.

 

윤은 그걸 보며 타짜에서 아귀가 고니의 패를 까던 부분을 상상할 수 있었다.

편지는 수려한 필기체로 이렇게 시작했다.

이 편지는 101년전 영국으로부터 시작해...

 

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56.

 

분통을 터트리는 이슈마엘을 달래며

윤은, 그럼 앞으로도 쭉 오겠구나 하고

살짝 안도했다. 그리고 어이없어했다.

이 미친놈이 또 뭔 미친 생각을 한거야...

 

이슈마엘은 윤이 왜 갑자기 자기 뺨을 때리는지 의아해했다.

 

 

57.

 

윤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이슈마엘이 찾아왔었다. 데구르르 쿵! 하고

 

", 자요?"

 

하지만 어젯밤 근무가 너무 힘들기도 했고

또 귀찮기도 했기에 그냥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진짜 자요?"

 

이슈마엘은 확인하려는 듯.

윤의 얼굴에 손바닥을 휘휘 저어보기도 하고

숨소리를 확인하기도 했다.

 

"진짜 자는 거죠?"

 

그리고 기분 나쁜 정적이 흘렀다. 뒷골이 싸했다.

대체 뭔 짓을 당할지 몰라서 윤은 어색하게 막 일어난 척을 했다.

이슈마엘이 눈을 흘기며 '겁쟁이' 하고 매도했다.

 

 

58.

 

"저기 말이야, 이슈마엘." 하고

윤이 문어에도 안 쓰고 구어에도 안 쓰는 괴상한 문법으로 말을 걸었다.

 

"뭘 하려고 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다음번엔 내가 자는 척을 하는 것같다 싶으면."

 

"차라리 때려줬으면 좋겠어."

 

이슈마엘이 혐오했다.

 

"저기, 윤 그런 특수한 성벽을 제게 강요하는 건 그만둬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윤이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난처해서 그래."

 

"어떤 부분이 난처한데요?"

"그걸 그렇게 물어보면 또 그 점이 난처한데..."

윤은 자기 생각조차 말로 풀어내지 못하는 한심한 놈이다.

결국 보다 못한 이슈마엘이 그럼 이렇게 하죠.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제가 윤에게 하는 짓은, 윤도 저한테 해도 돼요."

이슈마엘이 이제 다 해결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공평하죠?"

'강화도조약 급으로 불평등한 조약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윤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59.

 

평소와 똑같은 나날이었다.

다만 평소처럼 이슈마엘을 정신병 취급하던 윤의 목소리가 그날따라 유독 역겨웠던 것인지.

이슈마엘의 신경이 가느다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꽤 심하게 싸웠다.

 

그래서 같이 근무를 나가서 이슈마엘은

"이제 윤 같은 건 진짜 몰라요!" 하고 수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둘 다 한 시간도 못 되서 후회할 애들 같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윤도 꽤 격앙돼 있었고 평소에 쌓였던 것들이 터져 짜증나기도 했기에 '내가 먼저 사과하나 봐라!' 하고 이슈마엘을 등진 채 막사로 복귀해버렸다. 어차피 저러고 나서도 또 다음 날이 되면 헤헤거리며 달라붙을 것이다.

 

알아서 사라지겠지. 하고 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60.

 

폐부 깊숙이 니코틴을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윤이 생각했다. 김에게 이슈마엘에 대한 불평을 한바탕 쏟아낸 직후였다.

 

김은 늘 그렇듯 그렇습니까.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이슈마엘 말고 윤일병님 말입니다. 그렇다고 바로 욕을 박아버리시면 제가 또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와 너무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꺼져 있겠습니다. 라고 하고 먼저 가버렸다. 씨발스러운 놈이라고 생각하며 침을 퇘 뱉었다.

 

'그러고 보니 이슈마엘은 돌아갈 때 어떻게 돌아갔더라?'

 

생각해보니 이슈마엘이 사라질 때는 늘. 윤의 주변에서만 사라졌었다. 설마 내 주변에서만 돌아갈 수 있나? 에이, 아니겠지 하면서 윤은 줄담배를 피웠다.

윤의 흡연량을 잘 알고 있던 김도 슬쩍 돌아보곤 "혹시 굴뚝이십니까?" 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윤은 "꺼져, 씨발놈아." 라고 답하며 자신의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피력했다.

 

바람결에 조금씩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불안도 깊어졌다.

 

이억수

담배를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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