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요 녀석, 여기 있었네.

 

얘야, 여길 봐.

모서리를 반짝이며 둥그렇게 떠오르는 게 꼭 우주선 같지 않니?

그 너머로 엄청난 크기의 눈꺼풀이 훌렁훌렁하며,

한쪽으로 일제히 제쳐진 화초 더미 뒤에 둥실 떠 있잖아.

도통 눈치를 못 채는 것이 아직 넌 이 돋보기의 위력을 모르는 게 분명해.

 

아침부터 궁둥이를 실룩 샐룩거리는 게 여간 즐거운 게 아닌 모양이로구나.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상관없이 말이야.

즐거움에 이다지도 집중하며 만끽할 수 있다니, 대단한걸.

그래. 내가 정성으로 가꾸는 화분에서 살아가는 개미라면,

이 정도 행복은 누려야겠지.

그러라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너와 화초를 위해 촉촉한 흙을 만들어주고 있잖니.

 

빌리, 새로 깐 흙이 마음에 드는 거지?

 

어제는 어디로든 정신을 집중해야 했어.

그래서 늦은 시각이었지만, 차를 몰고 달린 거야.

영양분 가득한 새로운 토양을 너희에게 선사하려고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 굳게 닫힌 가게 문을 두드려야 했고,

날 밝으면 다시 오라는

파자마 차림의 주인아저씨와 승강이까지 벌여야 했어.

 

그리고 승리했지.

 

돌아오자마자 화분을 전부 들어내고 비율을 맞추어가며 흙을 섞고,

하는 김에 화분 갈이도 했어.

 

쉰 듯 꿉꿉한 땀 냄새가 공기 중에 풍겨온다면 말이야, 빌리.

풍요로운 흙에서의 생활을 위한 내 헌신을 떠올려주었으면 해.

 

그래 줄 거지, 래리?

 

잠깐만. 창 아래 서 있으려니까 등이 뜨거워지고 있어.

 

이 계절의 아침이란, 이른 시간부터 지나치게 열을 내는 경향이 있어.

기온이 오르면 사람들도 함께 뜨거워지거든.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아침이 온 것을 알게 되자마자 어제 못 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정신없이 분주해져.

인사를 건네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것에 대한 기쁨을 누릴 겨를 없이 말이야.

시선 마주하기 무섭게 서술어 한두 개로 결론만 말하고 상황을 종결하지.

기대되는 것을 기대하도록, 감당하게 될 것을 마음으로 준비하도록

내가 그 여유를 만들지 않으면 그럴 틈은 어디에도 없는 거야.

 

두고 봐, 래리.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누구도 나를 재촉하도록 두지 않을 거거든.

 

아, 너무 더워.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겠어.

뜨거운 아침은 생각보다도 나의 즐거움을 방해해.

 

저런, 너도 그늘로 숨는구나. 이럴 땐 정말 빠르다니까.

자, 내가 그늘을 더 만들어 줄게. 이렇게 받침을 세워두면, 바로 그늘이야.

햇빛은 좋은 거지만, 뭐든 적당해야 가장 좋겠지.

 

봐, 로비.

내가 너희를 위해 해 주는 이런 배려가 딱 그 정도를 의미하잖아.

난 정말 다정해. 그렇지 않니? 난 다정한 게 좋아.

그리고 그만큼 내게도 다정하게 해주길 바라고 있어.

 

부디 오늘만큼은 내게 그렇게 해 줘.

 

미안, 로비. 방금은 너한테 한 말이 아니었어.

잠을 못 잤더니 몽롱해서 헛소리가 나오네.

 

방금 생각한 건데, 약속 한 가지 할게.

내가 오늘을 무사히 보내면 내일 개미굴을 선물할게.

알아봤더니 여러 갈래일수록 옆에서 보는 모습이 그럴듯하더라고.

방은 몇 개가 좋을까.

이름이 로비인 만큼, 로비 윌리엄스가 가질 만한 수준의 집이면 좋겠어.

 

방 이름도 정하자.

적어도 방 다섯 개는 정해졌네.

로비, 게리, 마크, 하워드, 제이슨.

가장 좋았던 시절을 연상하게 해 주는 이름들이라 내게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이름이 함께 있을 때, 그리고 그 나열이

자연의 이치만큼 자연스럽다 느껴질 때의 안정감을 너는 아니, 로비?

 

나도 그랬어. 내 이름도 그 이름 곁에서 그랬다고.

아름다운 조화라고 생각했어. 마치 하나의 것을 말하는 것처럼 완벽했어.

 

이 생각을 나는 벌써 여러 번 전달했어.

있지, 로비. 내게 좋은 일이 생긴다면, 그 멋진 개미굴을 진짜로 선물할게.

 

진심이야. 간절할 정도로 그래. 그러니까 제발.

 

미안. 약간 감정적이었지.

수면 부족은 여러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해.

 

생각해보니 밤을 연속으로 새운 건 처음이 아니야.

가끔은 너무 안 자서 혹시 죽은 상태가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어.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왜냐하면, 작고 귀여운 네가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잖아.

 

너를 보면 내 모습을 알 수 있거든.

촉촉한 물기가 발끝에 닿은 기분은 어떠니.

그늘은 시원하고 화분을 메운 허브 향은 근사하지 않아?

네가 이 모든 걸 누리는 동안은 나도 괜찮은 거야.

정말이야, 제이.

 

생각해보니까 네게 제일 어울리는 이름은 ‘제이’ 같아.

내가 그의 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것처럼. 딱이야.

 

그런 것들은 고정한 채 움직여서는 안 돼.

흐트러지는 건 완벽한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나는 더욱 제이, 너에게 개미굴을 사 줄 거야.

새로운 흙에서 절대 벗어날 생각 못 하게.

 

쉿! 조용히 해.

전화벨이 울리고 있어. 이런, 이제 겨우 아홉 시라고.

 

그런데 전화를 걸다니.

내가 말했지.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결론을 내려고 든단 말이야.

그게 나쁜 결론이더라도 똑같아.

 

태양은 나빠.

사람을 덥게 하고 성급하게 만들어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니까.

 

오, 올리. 좋은 생각이 났어. 음악 들을까.

신 나는 노래에 기분 좋아지고, 전화벨 소리는 잘 들리지 않게 될 거야.

 

잠깐, 잠깐.

노래 선곡을 좀 할게.

 

이거야, 이거.

바로 이거지.

 

제목은 ‘바빠.’

 

꼭 지금의 나잖아.

정말 좋은 노래야.

이 노랠 들으면 꼭 신선놀음하는 기분에 빠지거든.

 

우리도 이런 관계가 되기를 바랐어. 여기 노래 가사처럼.

 

아, 방금 것은 너한테 한 말이 아니야, 해리.

그러니까 네가 아니라고, 개미야.

 

하지만 이제 그가 애타게 전화를 걸어와도 나는 받을 수 없어.

전화를 받기에는 내가 지나치게 바쁘거든.

그는 오해를 접고 전화하는 걸 포기해야만 해.

난 이별 이야기 같은 건 듣지 않을 거야.

 

말했잖아. 그런 말을 듣기에는 내가 너무 바쁘다니까.

 

나는 바빠.

아침부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게

인제 그만 만나자는 말 같은 걸 들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아니면 제리, 네가 나 대신 전화 좀 받아 줄래?

 

그리고 전해 줘. 눈치채고 있었다고.

그가 헤어짐을 결심했을 때 나는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고.

 

이것도 전해 줘.

눈을 감으면

꿈에 나타나서 헤어지자고 말할까 봐 두려워 잠도 이룰 수가 없다고.

 

이렇게도 말해 줘.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듣기 전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바쁠 거라고.

너무 바쁜 나머지 이별 이야기는 할 시간이 없을 거라고.

그러니 마음을 돌려 내게 돌아오라고.

 

나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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