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에세이를 미루기 좋은 날이었다. 기상 캐스터는 오늘의 날씨가 맑겠다고 말했었지만, 오후에 들어서 조금씩 구름이 끼더니 이내 잔비가 종일 내렸다. 비가 자글자글 울리며 귓가를 간지럽혔다. 무겁지도 가렵지도 않은 비의 소리였다. 외출을 끝내고 집에 들어와 한참동안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에세이가 당장 급하지 않으니까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자, 그런 마음이 살며시 들었다. 소파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뉴스를 틀어 놓고 인스타그램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입이 궁금해서 냉장고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먹었다. 뉴스가 끝나고 다음 프로그램이 이어질 때 즈음에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이 꺼졌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멍하니 앉아서 중국인들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신촌의 거리들을 눈에 집어넣었다. 현대백화점 사거리. 명물거리. 문학의 거리. 바와 술집이 모여 있는 골목들...... 방송은 여러 풍경을 십 초 가량 차례대로 보여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골목도 잠시 스쳐지나갔다. 중간 즈음에 꺾이는 작은 골목. 처음 온 사람도 어딘가 익숙하게 느끼는 곳. 음반 가게가 곱창집으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가로등의 위치는 그대로인 곳. 그 때 나는 내가 그 골목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 한 조각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사과를 느리게 씹었다. 달고 차가웠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또한, 뺨을 손으로 더듬었다. 내 뺨은 습한 날에 어울리지 않게 말라 있었다. 나는

울지 않고 있었다. 몇 초가 지나자 그 거리는 다른 거리로 변했다. 방송의 내용도 다른 주제로 바뀌었다. 한류로 인한 음원 수입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주제로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아나운서는 KPOP이 어떻게 뻗어나가고 있는지 조명했다. 유명 영화에도 등장했다며 <저스티스 리그>의 화면이 나왔다. 한국 걸그룹의 노래가 연일 나오는 시부야의 거리도 있었다. 이내 화면은 자료 화면으로 넘어갔다. 유명한 그룹들이 공연하는 모습이 교차편집되어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너의 그룹이 그 안에 있었다. 자료화면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동작을 맞추는 남자들 가운데 너의 뒷모습이 있었다. 이번 코너는 아이돌 멤버들이 흘린 구슬땀 만큼 한류가 더욱 뻗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아나운서의 멘트로 끝났다. 다음은 북미정상회담에 관한 뉴스였다. 나는 다시 뺨을 더듬었다. 마른 피부가 내 손가락에 와 닿았다. 사과를 한 조각 더 먹었다. 살짝 얼은 사과가 와삭와삭 하며 깨지는 소리가 의식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너의 음악을 덮어 버렸다. 몇 년도 전에 음반 가게 앞에서 너에게 받았던 비트였다.

알다시피 네가 자주 다니던 음반 가게는 곱창집으로 바뀌어 버렸다. 네가 데뷔하던 즈음의 일이라고 들었다. 너도 나도 멜론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그런 가게가 잘 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 가게 옆에 있던 중국어 학원은 규모가 훨씬 더 커졌다. 작은 사무실 하나로 시작했던 곳이 이제는 빌딩의 세 층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곳을 너와 삼 개월 데이트하기 위해서 칠 개월이나 다녔었다. 관심도 없는 중국어를 듣기 위해 파주에서 신촌까지 가려면 차로 두 시간이나 걸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그저 흔한 너의 반 동창으로 끝나버리기 싫어서 그걸 견뎠다. 학원을 다니며 신촌을 헤맸다. 한 달이나 헤메고 나서야 너를 찾았다. 이어폰을 꽂고 머리를 까닥거리며 그 음반 가게로 들어가던 너는 웃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이 지난 뒤에 그 가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부도 하지 않고 들어가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그 날, 나는 너보다 먼저 들어가, 관심도 없는 외국 힙합 섹션을 보는 척 하면서, 손에는 인터넷에서 추천받은 나스의 illmatic을 하나 든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으면서, 너를 기다렸다.  너는 들어와서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혹시 우리 반 애가 아니니, 하고 물었고, 나는 아, 너도 힙합 좋아해? 하고 물었다. 나는 영어 단어들보다 열심히 외운 한국 힙합의 계보를 읊어대며 이야기를 했다. 듣지도 않았던 앨범들의 평가를 줄지어서 했다. 너는 참 즐거워 했었다. 우리는 앨범을 같이 샀다. 이름이 휘갈겨진 벽에 낙서도 같이 했다. 너도 즐거워했고 나도 참 즐거웠다. 그러나 그 가게는 주인이 바뀌면서 리모델링을 해 버렸다. 가게에 있었던 낙서나 앨범이나 우리들이 낄낄대던 어색한 포스터 같은 것도, 전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굉장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일 년이나 지나, 침대에서 울고 나서, 이대로 슬픔에 빠져 살 수는 없다는 각오를 다지고, 술의 힘을 빌어서 만취한 상태로나마, 그럼에도 가서 보면 분명히 울어버릴 거라는 걸 알 텐데도, 갔더니 문득 바뀌어 있었으니까. 나는 간판을 보고 벙쪄 버렸었다. 벽은 전부 리모델링 되어서 새햐앟게 칠해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도 보이는 깔끔한 인테리어.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우산을 펴고 몸을 돌렸다. 곱창집은 그렇게나 모던하고 새하얬다. 너의 부재처럼.

그 날에도 비가 왔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새카맸다. 나는 빗물과 술과 땀에 절은 몸을 버스에 실었다. 돌아오는 거리에서는 만취했기 때문에 한 번 넘어졌고, 그래서 옷도 몸도 더러워져 있었다. 축축함과 더러움과 버스의 엔진 소리가 불쾌감을 자극했다.

비는 버스가 달리는 동안 더욱 거세졌다. 빗방울은 땅을 적셨고 배수로를 타고 졸졸 흘렀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자유로를 통과할 때 빗방울이 유리창에 제 몸을 문대었다. 유리에 부딪히고 부서져버린 빗방울은 다시 수 백 개의 빗방울이 되었고 또 그 수 백 개의 빗방울에 수 천 개의 빨간색 백라이트가 비쳤다. 비친 백라이트들은 원래 모양이 어땠는지 알 수도 없는 수준으로 뭉개져버린 채 그저 빨갛게 빛났다. 나는 그 백라이트들이 어쩌면 무대 위의 하이라이트와 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빨갛게 빛나는 거대한 하이라이트는 내가 일하던 소극장의 조명 설비가 아닌, 너의 공연에서 쓰이는 거대한 불빛들과, 형광봉과, 스크린들을 닮았다. 너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발하는 빛과 열들. 나는 창문에 내 머리를 기대었고 창문의 차가움이 내 머리에 스며들었다. 버스는 느리게 움직였고 서울 외곽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으로 에미넴의 Love The Way You Lie를 들으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너는 에미넴을 참 좋아했다. Lose Yourself와 Till I Collapse는 너의 노래방 18번이었다. 에미넴이 썼던 비트를 습작에 자주 썼고 또 너의 가사 쓰는 스타일도 그를 닮아 있었더랬다. 너는 매사에 최선과 열심을 다했고 나는 그래서 네가 더 좋았다. 나도 너를 따라가려 참 애썼다. 네가 첫 앨범에 쓸 랩 네임을 지어줄 때에도 몇날 며칠 고민했다. 너도 나도 그 이름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데뷔한 너의 예명이 달랐을 때는 많이 슬펐다. 너는 내가 모르는 이름으로 TV에 나왔고, 네가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랩을 했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유닛을 꾸렸고, 네가 싫어한다는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았다. 나는 그 때에 너의 악평을 하느라 바빴다. 낮에는 시선이 무서워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어두컴컴한 바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악플을 달았다. 랩을 못 한다, 그런 실력으로 어딜 데뷔하려 하느냐, 같은 말을 전파 속으로 쏟아냈다. 자존심이 유달리 강하던 네가 상처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실의에 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력하기 싫어질 정도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다행히 나는 법정에 서지 않았다. 내 모든 활동은 너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던 걸까.

TV 속의 너는 항상 웃고 있었다. 케이크의 크림을 뚝 잘라 놓은 것과 같이 새하얗고 밝았다. 웃는 법도 바뀌어 있었다.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던 너는 스크린에 나와서 티없이 맑게 웃는 척을 하고 있었다. 패션도 헤어스타일도 그대로였지만 너는 전부 바뀐 채였다. 그 때 즈음 댓글을 다는 것을 그만두었다. 밖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자주 울어서 그랬다기에는, 그저,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다. 휴학을 끝내지 않고 알바를 시작했다. 밖에 나와서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길을 가다 울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에 네 그룹은 최고로 성공적인 데뷔 년도를 보냈고 나는 어디서나 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휴대폰이 고장나서 바꿔야 하는데 네 노래가 나올 것 같아서 바꾸지 못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너의 조각들을 피했다. 슬픈 만큼 일에 빠져서 시간을 흘려보내려고 노력했다. 힘든

일이었다. 그 해 겨울에 복학을 했다. 너와 헤어진 지 일 년 반 정도 지난 뒤였다. 나는 네가 스스로 노력했던 만큼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다. 남 부럽지 않은 대학의 남 부럽지 않은 학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미학과로 전과를 했다. 시냅스의 전달 방식 대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사조를 배웠다. 현실에서 유리되는 경험이 좋았다. 순수 미술을 공부하면서 대중들의 취향에 논하고 다녔다. 내 주변에 너보다 훨씬 따뜻한 사람들이 생겼다. 그런 시간들이었다. 너는 그 동안, 공연을 했다. 지방을 돌았다. 비가 오는 날에도, 사무치게 추운 날에도, 어김없이 웃으며 랩을 했다. 아이들의 꿈에 대해서 노래했고, 학생들의 불만에 대해 위로했고, 너와 영원히 함께해 주겠다며 후렴구를 읊었다. 우리는

뭔가 비틀려 있었다. 어긋났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라는 리쌍의 가사가 가끔씩 생각날 때가 있었다. 내가 그토록 너에게 집착했던 건 사실 너의 부재가 사무치게 차가웠기 때문이고, 네가 나를 그런 식으로 정리했던 건 사실 너의 꿈에 내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중얼거림으로 밖에 정리되지 못하는 시간이 그립다는 건 좀, 비틀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주변에 너보다 나은 사람이 많음에도 도저히 남자 친구를 사귈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 때 즈음에는 항상 노을이 그리웠다. 한강변에서 너와 함께, 네가 '아는 형'들의 힘을 빌어 뚫어온 맥주를 마시면서 바라본 노을이, 그리웠다. 너의 작업실이 그리웠다. 오래되고 녹슨 마이크가 그리웠다. 작곡을 할 때에는 내가 뭐라고 해도 고개를 돌리지 않던 너의 집중력이 그리웠고, 방 벽에 붙여놓은 에미넴 포스터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그리웠다. 열정으로 가득 차서 내게 열변을 토하던 너의 말투가 그리웠다. 가난한데 사랑해줄 자신 있냐고 물어보던 싸구려 감성도. 모든 것이 그리움이었고, 더 이상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았지만, 울적해져 있었다. 나는 꿈에서 아직 깨지 못했나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울적함이었다. 네가 연습생으로 들어간다며, 이제 그만 만나자. 라고 했을 때 순간 붕 떠 버린 나는 아직도 내려오지를 못한 모양이었다. 메모장에 편지 같은 걸 적고 너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또 그렇게 만나봐야 내가 무슨 말을 할 건지, 너는 네가 그렇듯이 아마 싹 잊어버리고 있을 거고 꿈을 찾아 달리느라 바쁠 텐데 내가 그렇게 해서 무슨 도움이 되는 건지, 너무 뻔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은 더 했다. 장마가 시작 될 즈음에 모든 휴대폰 대리점에서 나오던 너의 노래는 어느새 다른 그룹의 노래로 바뀌었다. 너는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잭슨 폴록이니 하는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연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해의 여름은 필터를 입힌 것 같았다. 누군가 채도와 밝기를 100으로 올려버린 듯 부옇고 선명했다. 우거진 들풀의 푸름도 길에 핀 들꽃의 맑음도 없이, 장마마저 힘이 꺾인 채 비를 내리지 않아서 농민들의 울음소리가 연일 뉴스에 나오던, 그런 부옇게 뜬 여름이었다. 아스팔트의 아지랑이가 온 세상을 점령하던 그 해의 여름에 너의 정규 2집이 나왔다. 무심코 가입해 있던 팬 카페의 쪽지가 2집의 테마는 <소년기>라고 내게 전해놓았다. 소년기의 앨범에, 소년 시절의 가사에, 네가 써 놓은 너의 파트에는

나의 이야기가

많았다. 또한 적었다. 공유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법한 자그마한 것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모호한 것들. 함께 바라본 노을. 기대줬던 머리의 무게. 일탈의 즐거움과 열정의 잔혹함. 그러면서 너는 미안하다고도 했다. 누구에게 미안한지 말도 하지 않고, 인터뷰에서는 이 세상 모든 어른이들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얼버무리며, 타이틀곡 속에서 끝없이 미안하다고 읊었다. 나는 이 앨범 안에서의 네 가사가 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믿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네가 정말 내게 미안해 했으면 좋겠어. 내 존재가 너의 꿈에 방해물이라고 생각해서 미안해, 라고 말했으면 좋겠어... 아니, 좋겠다, 였다. 그건.

왜냐하면 내게는 잭슨 폴록의 작품세계를 탐구해야하는 에세이가 남아 있었고, 너는 2집 정규 활동을 해야만 했으니까. 우리가 만나는 곳은 더 이상 한강변의 노을을 보는 곳이 아니라 맥주집의 TV와 녹화 장치 너머의 무대니까. 너의 앨범을 보고 내가 했던 행동은 한동안 TV를 멀리해야겠다고 다짐한 일 뿐이었다. 한동안 나는 TV를 멀리했다. 그렇지만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 악플이나 달던 옛날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둘 모두 멀리하는 건, 예전만큼 어렵지 않았다. 단지 인터넷 방송과 게임을 하는 것 만으로 TV는 자연스럽게 볼 일이 없어졌고, 대리점에서 너의 2집 노래를 줄창 틀어도 눈살을 조금 찌푸리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물어도 '그냥 저 노래 싫어해요.' 로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왜냐하면요, 어, 음정이 너무 높아서요. 랩 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요. 적당히 그런 것. 참 웃긴 일이었다. 언젠가는 너의 손이 닿은 것만 봐도 울어버릴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이 년 지났다고 너의 목소리로 랩을 들어도 눈살을 찌푸리는 게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너보다 일 년 늦게 비틀린 채로 내 대학교 2학년의 시간을 보냈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듯 천천히 내려앉았던 계절들. 격렬하게 증오하던 네가 어느새 그리움이 가득한 해질녘의 그림자로 바뀌고, 이내 별 이유 없이 싫어하는 가수로 변해버린 시간들. 어느덧 사람들의 '왜?' 라는 질문에 즉각적으로 짜증을 내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짜증을 내야만 하게 되어버린 나. 그럼에도 그 때에는 내 심장이 내 머리에게, 영원히 너를 잊는 게 불가능할 거라고 속삭이곤 했었다. 아직도 떠오르잖아. 떠오르려고 하면 떠올릴 수 있잖아. 조각조각 부서진 걸 이어서 붙일 수는 있잖아.

기억의 형태는 속삭임에 지지 않고 바뀌어갔다. 처음에는 선명한 영상이었다가 이내 사진으로, 또 희뿌연 사진에서 오래된 그림으로, 그림에서 군데군데 맞춰가야만 하는 퍼즐로, 퍼즐에서 몇 구절의 시로, 시에서 소설로... 그렇게 형태를 바꿔가고 있었다. 그 때에는 그게 잊어가는 증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 날의 노을이 그저 <노을을 보았다.> 라는 문장으로 함축되고 말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어딘가에는 네가 항상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벌써 몇 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TV를 끈다. 핸드폰을 집는다. 볼을 잠시 매만져 본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감상이 들지 않는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고 생각한다. 너는 어엿한 중견 그룹의 고참 멤버가 되었고 나는 쟝 뒤뷔페에 관한 졸업 논문을 쓰고 있다. 삼 년 사이에 우리가 자주 가던 앨범가게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늘 가던 카페는 단가 문제로 더 이상 예가체프를 팔지 않는다. 대통령이 두 번 바뀌었고 내 시급이 올랐다. 네가 좋아하던 래퍼들은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동료들에게 평가받는다. 함께 앉아서 치킨을 뜯던 강변이 리모델링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인터넷 쿠키를 모두 지웠고 즐겨찾기가 전부 사라졌다. 네가 내게 줬던, 차마 버리지도 못한 인형이 이사 오면서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나는

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새로 만난 사람들은 너와 나의 이야기를 모른다. 술이 들어가도 울면서 너를 찾지 않고, 아무도 쓰지 않는 번호로 애타게 전화를 걸지도 않는다. 내가 당연한 듯 해오던 많은 것들이 삼 년 사이에 멈춰 버린다. 톱니바퀴 하나가 뚝 부러져 돌아가지 않는 기계의 느낌이다.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기 보다는 그냥... 단순히 잊어버린 그런... 것. '그런 것'이 되어버린다, 너는. 그리고 나는

또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이렇게 모니터 앞에 앉아 액션 페인팅 기법의 혁신성에 대한 문장을 서술하면서도 내가 왜 이걸 좋아하기로 결심했는지 되새기지 않는다. <대중음악을 폄하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미학은 어느새 <미술에 대해 탐구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 되었고 또 재능이 있으니까 이 쪽으로 길을 잡아도 되겠구나, 하는 교수님의 말에 기쁜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 내 진로가 되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친구가 내일 술을 마시자고 연락해왔다. 나는 좋아, 라고 대답했다. 논문이 막혀서 다시 TV를 켰다. 친구에게 다시 연락했다. 오늘도 아무 일정 없는데 그냥 오늘 마실래? 아니,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미안. 답장을 보낸다. 그럼 내일 신촌에서. 내가 좋은 곱창집을 알거든. 그리고 다시 TV를 봤다. 연예 뉴스로 변한 TV에는 네 얼굴이 나왔다. 모델과의 스캔들이 나왔다는 속보였다. 나는 저녁 예능으로 채널을 돌렸다. 개그맨 한 명이 가면을 쓰고 나와 네 노래를 불렀다. 나는 속으로 와, 잘 부르네 하고 감탄했다. 창문 너머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소파에서 일어나 저녁 준비를 했다. 손을 씻고 테이블을 닦고 재료들을 꺼냈다. 낙지를 해동시켜서 잘랐다. 프라이팬에 낙지를 넣고 마늘과 고춧가루도 얹어 볶았다. 어제 쓰다 남은 양념을 넣었다. 빨갛고 단 냄새가 풍기는 맛있는 낙지 볶음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다시 모니터를 노려보면서 남은 문장을 서술했다. 오늘 정한 분량을 모두 끝내기까지 세 시간이 걸렸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혼자 귀여운 척을 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거실에 누워서 다시 TV를 켰다. 심야 쇼에서는 오래된 영화를 틀어주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서 메일을 확인했다. 별 말은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 날이야. 그렇게 중얼거렸다. 졸업 논문은 이번 달 내내 그랬듯 어지간히도 안 써졌다. 외출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은 저번 달과 마찬가지로 활기차고 건강했다. 취업으로 우는 소리를 하는 애들도 심각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늦은 밤의 자유로는 항상 그랬듯 막혔고 내 집은 여전히 파주였다. 빗소리는 자글자글 내 귀를 가볍게 간지럽혔다.

곧 잘 준비를 해야 했다. 습한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샤워를 했다.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고 수건으로 감쌌다. 뜨개질 거리를 꺼내서 손에 들고 영화를 봤다. 조금은 감동적이어서 엔딩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인스타그램에 오늘 올린 낙지볶음 사진을 확인했다. 인터넷 친구들과 트위터를 조금 했고 좋아하는 만화를 보다가 피곤해져서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 어제를 되새겼다.

어제도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씻었다. 선거 날에 여행을 가야 해서 사전 투표를 했다. 좋아하는 정당에 투표를 했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아침 날씨가 너무 더워서 친구에게 투정을 부렸다. 근처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밀란 쿤데라였다. 정오의 카페는 에어컨에 힘입어 쾌적했고 나는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카페에서 나올 때 후텁지근한 공기가 나를 다시 맞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운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나갔다. 네 시에 있는 전시회에는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았다. 뒷풀이에선 SF 작가가 한국의 SF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고 나는 인터넷으로 보았던 사람들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뒷풀이가 끝나고 따로 디저트를 먹었다. 홍대에 있는 덮밥집이었다. 밥을 다 먹고 일어서자 사람들이 줄을 선 게 보여서 내심 안도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자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평범한 하루였다.

평범한 하루였고 내일도 평범한 날이 될 터였다. 신촌의 술 약속. 에세이 작업. 시간이 비면 게임을 조금 하고, 책을 새로 사서 읽고, 전시회 정보를 알아보기. 내일 일정에 신촌 술 약속을 적어넣고 보니 오늘의 날짜가 텅 빈 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동창회라서 텅 비면 안 됬는데. 까먹었나 보다. 밀린 숙제를 부끄럽게 내는 기분으로 동창회, 하고 적자, 이제는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7월 2일. 7월 2일. 어딘가 익숙한 날짜인데. 언제였지. 7월 2일. 아니, 7월 1일이었나. 7월 1일이 뭐였더라... 머릿속에서 어제가 어떤 날이었는지 나는 곰곰히 생각을 해 보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어제는 우리 기념일이었다.

기념일에도 네 생각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몇 년 전이라면 항상 네 생각을 하느라 고통스러웠을 이 맘 때가 그저 그런 7월이 되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닌 달. 아무것도 아닌 주의 아무것도 아닌 요일. 오늘은 7월 첫째 주 화요일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런 결말이 되었다. 우리는 한 때 사랑했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으며 나는 그 흉터로 인해 크게 고생했고 너도 나를 버려서 참 많이 아파했으면 좋겠다고 매일 매일 떠올렸고 이따금씩 절망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모든 과정의 끝에서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해 버렸다. 술자리의 안주가 되었다. 와, 저 얘랑 친했는데. 그래요? 엄청 친했죠. 미발표곡도 집에 뒤지면 나올 걸요. 대화 할 만한 화제가 없을 때 꺼내기 쉬운 주제. 친해지고 싶은데 딱히 건덕지가 없을 때 비벼보는 말. 왕년에로 시작하는 문장의 주제. 그런,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사이로. 다시 말해 우리는

흔한 동창이 되었다.

함께 보낸 시간은 보편적인 연애의 나날이 되었다. 잡았던 손의 온기는 전기장판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졌다. 네 어깨의 편안함보다 침대 베개의 편안함이 훨씬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나날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반대로 너의 앞에 놓여 있는 날은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날이 선 듯 내 가슴을 저미던 너의 모습이 부옇게 흔들린다. 너는 지금쯤, 아파하고 있겠지. 기뻐하고 있겠지. 무엇하고 있겠지, 같은 상상을 하지 않게 되었다가, 더 이상 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단지 불을 끄고 누워 그 시절의 너를 떠올려 본다. 짧은 머리, 도금한 목걸이, 야구 모자, 나시 티, 청바지, 스니커즈 운동화를 걸친 젊은 소년을 떠올려 본다. 내 기억 속의 소년은 너랑 닮았는데, 사실 닮지 않은 것도 같다. 혹은 그 모두일지도 모르고, 전혀 다를 지도 모른다. 모른다. 나는

여기까지 온 거다. 오고야 만 거다. 앨범 더미 앞에서 illmatic을 손에 들고 있던 두근거림 너머로, 후드를 눌러쓴 너와 눈이 마주쳤던 시간을 건너, 노을이 지는 한강변의 공원을 지나쳐서, 마지막 날들의 짙은 불안함 사이를 걸어, 미움이 가득했던 겨울의 골방 안을 지나, 미학 수업의 내용과 대리점 음악의 볼륨들 사이에서마저 더 이상 너의 잔향이 들리지 않는 곳 까지. 혹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사서, 너의 꿈에게 그걸 빼앗기고, 한없이 그 빚을 갚으며 지내다 내 마음 속 재무제표에서 너와의 시간의 가치가 0원이 된 순간까지. 그래서, 내 마음에는 가시가 박혀 있지만, 그 가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가시입니다, 하고 말하지 못할 때까지. 아니면, 단순히 너를 '잊었다'라고 할 때 까지. 지나버리고 만 거다. 나는

조금은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또 많이, 아주 많이 슬펐지만, 마지막으로 너와 나를 위해 자그맣게 울 수 조차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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