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문 뒤에 지옥이 있다

2018.10.06 00:5610.06

“창문으로라도 나 갈 거야.”

아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로에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정신 나간 놈들이 아무데나 총을 쏴대고, 문 밖에는 뭐가 있는지 모르고, 방 안에는 시체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울상이 돼서 창문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진정하고 정신 좀 차려봐. 여긴 8층이야.”

내가 아내를 끌어안아 뒤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진정하라고? 민아랑 연락이 안 돼잖아! 민아랑! 당신은 지금 진정이 돼?”

아내가 소리쳤다.

총을 든 남자 하나가 창가에 매달려 발악하는 아내를 보았는지 총구를 위로 겨눴다. 섬뜩한 총성과 함께 창문 주위에 구멍이 기고, 놀란 아내가 뒤로 넘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창문을 넘어 날아든 총알 몇 발이 천장에 구멍을 만들었다.

“여보, 민아 찾아줘. 우리 민아….”

아내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시체와 내 눈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민아 찾을 수 있어.”

나는 애써 아내를 다독였다. 당장은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문 앞에 널브러진 시체는 배가 찢어지고 등에 칼이 꽂힌 채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날카로운 스테인레스 스틸위에 새겨진 Made in Germany가 핏물에 가려 번들거렸다. 백인이고, 중년과 노년사이에 위치한 어중간한 나이의 남자였다.

시체가 안으로 내동댕이쳐진 건 세 번째로 문을 열어 봤을 때였다. 이미 한 시간도 전이었다. 코가 냄새에 마비돼 기능을 상실한 덕에 지금은 느껴지질 않지만 시체는 내장에도 상처를 입었는지 구린내가 몹시 심했고, 덕분에 비위가 약한 아내는 더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지금은 시체보다도 아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여보… 민아. 우리 민아아….”

아내의 중얼거림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복되고 또 반복됐다.

나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시체 너머의 문을 노려봤다. 문은 가깝지만 멀고 또 거대해보였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악마의 입 구멍 같았고, 몇 방울 피가 묻은 문고리는 튀어나온 눈알처럼 섬뜩했다.

지금 문 뒤엔 뭐가 있을까? 총을 든 싸이코? 살인마?

어쩌면 운 좋게 안전하고 평범한 장소가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던 조용한 장소나, 이미 모두가 죽어서 안전한 장소가 됐을지도 모르는 그런 공간들 말이다. 차라리 시체는 위험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문 뒤에 붙어있는 게 우리 집 거실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말도 안 돼는 소리 같지만 이미 문을 열어 거실이 아닌 다른 곳이 튀어나오는 걸 세 번이나 확인했다. 그것도 전부다 다른 곳으로. 꿈인가 싶었지만 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우리 집 거실에서 칼 맞은 외국인을 키운 적이 없었다.

문득 문을 부숴 버리면 어떻게 될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야.’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문을 부순다니? 그런 다음엔? 또 뭐가 튀어나오지? 사람? 귀신? 괴물? 이도 저도 아니면 블랙홀처럼 뒤틀어진 괴상한 공간?

질척하고 싸늘한 기운이 등을 감고 내려갔다. 괜스레 누가 생각을 훔쳐보기라도 했을까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고리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끓는 한숨을 토해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보면 저 문은 그나마 남겨진 마지막 안전 장치였다. 적어도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있는 동안은 이 썩은 내 나는 방도 그럭저럭 안전한 편에 속했다.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만….

문제는 언제까지 이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거였다.

젠장 할!

몇 시간 전만해도 나와 아내는 평온한 일요일을 즐기며 TV를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튀어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우린 아직 거실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은 정말 순식간에 벌어졌다. 심장마비라도 걸릴 것 같은 비명과 함께 세 사람이 튀어나왔다. 모두 한국인이 아니었는데, 정말 갑작스럽게 우리 집 거실에 서있었다. 어떻게 집에 들어온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와 아내가 놀란 숭어처럼 펄쩍 뛰자 그들도 쳐들어온 주제에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우리를 경계했다. 손에는 칼 까지 들고 말이다.

나는 놀란 아내를 데리고 슬금슬금 작은방으로 도망쳐 냅다 문을 걸어 잠갔다. 그게 실수였다. 그땐 몰랐지만 큰 실수였다.

문을 닫자 거실은 거짓말처럼 바로 조용해졌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나는 상황을 보려 아주 살짝 문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며 다시 닫았다. 문 너머엔 거실대신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골목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골목이 아니라 벌써 시체와 파리가 한가득 꼬인 골목이었다.

우리는 겁에 질렸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에서 나가야만 했다. 쫓기 듯 도망쳐 들어온 작은 방엔 먹을 것은커녕 마실 물조차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아가 없었다. 우리 딸. 민아가.

망할 놈의 학교. 일요일도 없이 애들을 불러 재끼다니.

사실 학교만 탓할 순 없었다. 내가 병신 같은 아빠였다. 쉬는 날도 없이 딸아이를 학교와 학원으로 내몰다니… 차라리 그 시간에 좋은 추억을 쌓고, 더 많이 사랑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잦은 구토로 탈수 증세를 보이는 아내가 물을 못 마신지는 네 시간. 민아와 연락이 끊긴지는 약 두 시간이 지났다. 아내가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전화를 걸어보고는 있지만 수화기가 꺼져있다는 기계적인 목소리만 지겹도록 들려왔다.

아내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의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있었다.

‘어쩌면 배터리를 아끼려고 일부로 꺼놓은 건지도 몰라. 어쩌면 수신이 안 잡히는 곳에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통신사가 말썽을 부리는 건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마지막 통화 당시 민아는 아직 학교에 있었다. 학교 선생들도 상황파악은 어느 정도 된 것 같았으니 뭔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선생이란 원래 똑똑한 사람들 아니던가. 게다가 학교에는 사람도 많고. 하지만 어쩌면…

창밖에서 총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아니야. 나는 더 이상 생각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관자놀이를 세게 눌러 잡았다.

민아를 찾으러 가야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간다면… 민아를 찾거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건 둘째 치고 살아남는 것조차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세상엔 대체 문이 몇 개나 있을까. 작은 가정집이라 해도 문은 보통 네다섯 개 이상 달려있었다. 우리 집에만 해도 여섯 개였다. 이 아파트가 16층 건물에 10호씩 6동이니, 이 좁아터진 아파트촌에만 최소 4800개 이상의 문이 있는 셈이었다. 세상에 널린 수많은 문중에 다시 우리 집 문과 공간이 연결될 확률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분명했다.

‘하기야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문이 날 보며 소리 없는 비웃음을 지었다.

아내를 데려 갈 수도, 두고 갈 수도, 그냥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여보. 여기서 나가야겠어.” 내가 고민 끝에 아내에게 말했다. “응? 민아 찾으러가자. 아직 학교에 있을 거야. 할 수 있지?”

아내는 퀭해진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문을 바라봤다. 아내의 눈에서 모성애와 공포가 뒤섞여 안타깝게 흔들렸다.

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벨을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내가 괴물 보듯 전화기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어느새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벌벌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전화기를 붙잡았다.

“민아야! 민아야!”

아내는 통화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울먹이며 딸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다친 데는?” 아내가 다그쳐 물었다. “엄만 아빠랑 같이 있어. 그래. 괜찮아…. 모르겠어. 엄마도 모르겠어….”

아내는 그때부터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붙잡고 흐느껴 울었다. 나는 얼른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민아니? 괜찮아?”

내가 급히 물었다.

“아, 아빠….”

민아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아야 진정해.” 내가 짐짓 침착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일단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지? 아빠가 데리러 갈게. 어디야? 아직 학교야? 전화기는 왜 꺼놨었어?”

“그게… 막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선생님도 죽고… 교실 문을 열고 도망쳤는데…, 미국? 영국? 하여튼 이상한 데에 갔다가… 다시 문을 여니까 또 이상한 곳이 나왔는데….”

민아의 말이 두서없이 울먹이며 뭉개졌다.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어디야? 다친 데는 없고?”

“응…. 난 괜찮아. 근데 희정이랑 가은이가 죽었어요…. 이상한 사람들이 계속 쫓아 와서, 쫓아 와서….”

오, 망할.

“쫓아온다고? 지금은?”

“아냐. 지금은 괜찮아. 도망쳤어. 애들이랑 처음에는 다 같이 있었는데….” 민아는 울음이 터져 나오는지 말을 제대로 잊지 못했다. “무서워. 아빠… 어떻게 해야 돼? 응?”

“괜찮아. 괜찮을 거야. 친구들하고 같이 있어?”

“응, 같이 있어. 지혜랑 아람이랑…, 반 친구들 몇몇하고 같이 있어.”

딸아이가 대답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주변에 뭐 아는 건물은 있니? 어딘지는 알 것 같아?”

“모르겠어요. 이상한 계단 같은데 아래에 숨어있는데…” 민아의 친구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여왔다. “응? 뭐? 아아, 전주? 전주래.”

민호는 순간 집에서 전주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그리곤 곧 지금 거리를 계산하는 건 도무지 쓸데없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어디래? 우리 민아 어디에 있대?”

아내가 반쯤 정신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전주래. 무사해. 아내를 다독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민아에게 다시 말했다.

“아빠가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말이 막혔다. 나는 꾹 참아 눈물을 삼켰다. “주변에 문 없는 데로, 아니면 너희가 보기에 안전한 곳으로 가서 숨어있어. 알았지?”

민아의 울먹이는 대답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핸드폰 베터리 여분이나 충전할만한 곳은 있어?”

“아니. 아무것도 없어.”

“시계는 차고나갔지?”

“응.”

“그래. 그럼 아빠가 매시간 정시마다 전화 할 테니까 핸드폰은 그때만 켜놓고 있어. 최대한 배터리 아끼고. 급한 일 생기면 다시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아빠 핸드폰은… .” 안방에 있지. 아마 영영 가지러 갈수 없을 거야. “고장이 좀 난 것 같아. 거기로는 전화하지 말고. 이해했지?”

“응…. 아빠 빨리 와. 나 여기서 기다릴게. 빨리 와.”

“그래. 우리 이쁜 딸. 아빠가 금방 갈 게. 기다릴 수 있지?”

민아는 울먹이는 소리 뿐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두운 지하실 계단에서 수화기를 붙잡고 울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전화기를 드는 것조차 힘에 겨운 겁먹은 딸의 모습이….

“여보 나도 바꿔줘요. 나도….”

아내가 손을 내밀었다. 전화를 건네자 아내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여보 민아 괜찮데.” 내가 아내를 끌어안고 얼른 말했다. “아무데도 안 다쳤고 지금 한국에 있대. 그래도 다행이지? 애 놀라겠어. 응?”

아내는 가까스로 울음을 눌러 삼켰다. 그리곤 거의 끅끅 거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민아야…. 엄마가, 엄마가 금방 갈게. 우리 딸 좀만 기다려. 엄마랑 아빠가… 금방, 금방 갈게.” 그리곤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입을 막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엄마가 우리 딸 사랑하는 거 알지? 우리 딸 사랑해. 금방 갈게. 금방 갈게….”

통화는 내가 전화를 건네받아 중재 한 뒤에야 끝이 났다. 아내도 민아도 너무도 서럽게 울고 있었기에 나까지 울 수는 없었다. 내가 이 집안의 가장이었다. 나까지 약하고 무너진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내가 이들을 지켜야했다.

아내가 조금 진정되자 내가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할 수 있겠어?”

아내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통화로 불붙은 모성애가 두려움을 짓밟고 일어났다.

나는 시체에서 식칼을 뽑아냈다. 끔찍한 감각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런 감각을 배나 가슴에서 느끼고 싶진 않았다. 나는 쉼 호흡을 하고 오른손에 칼을 꽉 움켜잡았다.

왼손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게 다행이라고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적어도 우리 부모님은 병에 시달리셨을 지언 정 이런 험한 꼴을 겪으시진 않으셨으니까. 아내가 등 뒤에서 허리춤을 뜯어낼 듯 꽉 잡아 쥐는 게 느껴졌다. 또 한 번 쉼 호흡을 하고, 나는 아내에게인지 스스로에게인지 짧게 말했다.

“연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나와 아내는 거의 숨이 막힐 듯한 긴장 속에서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대로가 보였다. 동남아의 느낌이 물씬 나는 대로. 어쩌면 중국일 수도 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살아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몇몇 시체들 위로 파리가 날아다녔다. 그래. 정상적인 사람들은 모두 숨어있는 거다. 그리고 미친놈들이나 총이든 칼을 들고 돌아다니며 활개를 치는 거다. 어쨌든 여기는 아니었다.

나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다시 열었다.

이번엔 침대가 딸린 커다란 방이 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아무렴. 사람이 있다면 문을 잠갔겠지. 이곳에선 적어도 아내에게 줄 물 정도는 구할 순 있을 것 같았다. 침대 옆 선반위에 물병이 보였다. 한국은 아닌 것 같았지만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탕!

문 너머로 총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쓰러져서 신음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여자의 소리였고, 비교적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때 방 저편의 열린 문을 통해 누군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 서둘러 문을 닫았다. 아내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젠장! 괜찮아. 그냥 총소리였을 뿐이야. 우리가 맞은 것도 아니잖아?”

내가 애써 말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나았다. 몇 시간 전보다는. 그때는 오죽하면 문을 열자마자 시체가 넘어져 들어왔겠는가. 지금은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된 게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미쳐있었다. 범죄를 저지르긴 너무 쉬워졌고, 또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기도 너무 쉬워진 세상이었다. 경찰은 무의미했고 그 빈자리를 강간범과 살인마가 채워 넣었다.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말 거라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하다못해 재미로 인간을 사냥하는 놈들 까지 있었다. 창밖의 외국인 놈들처럼…. 모두가, 모두가 미쳐있었다.

그런 세상에 민아가 혼자 떨어져 있었다.

안 돼.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아내의 눈을 마주보았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오고 갔지만 그래도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족족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장소들이 튀어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을 잠그고 숨어 있기 때문일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이라 생각되는 장소도 나오지 않았고, 아예 야외의 장소가 나오지 않는 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조차 거의 없다는 거였다. 방이든 음식점이든 웬만한 장소는 거의 문이 한 두 개씩 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열고 있는 문하나, 그리고 꽉 닫혀서 어디로 통하지 모르는 적은 수의 문 한 두개.

우리가 원하는 장소는 꽤 까다로웠다. 한국. 밖으로 나 갈 수 있는 곳. 위험한 사람이 없는 곳.

몇 번째던가. 운 좋게도 문을 여닫은 지 스무 번이 되지 않아 가능성이 찾아왔다. 평범한 한국 아파트의 탁 트인 옥상이었다.

문은 옥상에 덩그러니 지어진 네모난 건물, 물탱크나 그 비슷한 게 들어갈 것 같은 곳의 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방수 처리 된 초록색 바닥이 보이고, 저 앞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 문이 열린 채 고정 돼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혹시 몰라 방문을 열어 둔 채 고정시키고 맨발로 조심조심 옥상을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인데도 스치는 바람마저 우릴 지켜보는 것 같았다.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난간 아래를 보니 군데군데 한국어로 된 간판들이 보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다른 공간이 아니라 아파트의 비상계단이 보였다. 이 문은 세상이 이지경이 되기 전부터 열려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부여잡고 한걸음씩 계단을 걸어 내렸다. 혹시 몰라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정확히는 11층짜리 오피스텔이었는데 내려가기 진땀나는 높이였다. 한 층 한 층을 내려갈 때마다 계단과 이어진 복도가 보였다. 그 복도의 좌우에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많은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6층을 지나는데 위쪽 어딘가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깝지는 않았지만 사방이 너무 조용해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문소리였다.

나와 아내는 걸음을 재촉해 계단을 내려갔다. 문소리를 시작으로 온갖 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왔다. 문소리도 있었고 비명소리도 있었다. 망할 비명소리는 삼초동안 온 아파트를 휩쓸더니 나타날 때처럼 뚝 끊겨 사라졌다. 어디서든 뭐든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귀신이나 알지 못하는 괴물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튀어나올까봐, 꼭 칼과 총을 들고 있지 않아도 사람이 튀어나올까봐 두려웠다. 우리는 한 층을 내려갈 때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서서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 한참을 확인했다.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내는 거의 실신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용케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딸을 구해야한다는 일념이 그녀를 지탱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두려움 덕일 수도 있었다. 아내도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1층에 다다를 때가지 습격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정작문제는 1층에서 나타났다. 아파트 입구에 양쪽으로 열리는 유리로 된 문이 있었다. 그것이 닫혀있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다가가 문을 밀어보았다. 열리기 전의 문 뒤엔 분명 포장된 주차장과 다른 아파트들이 보였는데 문을 여니 어김없이 엉뚱한 공간이 나타났다. 80년대 풍의 재즈바 같은 공간. 저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래. 차라리 지하로 가는 거야. 지하에 주차장이 있다면, 적어도 주차장 출구에는 문이 달려있진 않겠지. 내가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리너머 주차장에 사람이 서있는 걸 발견했다. 한국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동양인이었는데 그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산탄총을 들고 있었다.

샷 건?

놈이 유리문 너머의 나와 아내를 겨누고…

엄청난 소리가 폭발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내를 끌어안으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런 미친 새끼가! 정신 나간 놈들이 너무 많았다. 저런 새끼들은 교도소에서 탈출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정신병원? 아니면 한평생 사이코 기질을 꾹꾹 숨기고 살아왔던 미친놈들?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 하는 건지 더 이상의 총소리는 없었다. 아내는 너무 놀랐는지 울지도 못했다. 나는 그녀를 꽉 안은 채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문은 샷 건에 맞은 것 치고는 상당히 멀쩡했다. 아니, 아예 깨끗했다. 안으로 튀어든 총알도 없었고, 유리파편도 없었다. 하지만 뭔가 끔찍한 상황이었다.

깨지지 않은 유리문 너머로는 아직도 샷건을 들고 있는 미친놈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데 정신이 팔려 그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갑자기 두발의 총소리가 더 들리더니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총은 우리를 향해 발사된 게 아니었다. 유리문 너머의 미친놈이 뭔가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거대한 벌레도 아니었고… 저건 뭔가….

오 제기랄!

“여보 눈뜨지 말고 나 붙잡고 달릴 수 있겠어? 응?”

아내는 충격에 빠져 말없이 눈을 마주볼 뿐이었다. 아내의 몸이 벌벌 떨려왔다. 다행히 내게 가려 문 너머의 정확한 상황까지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여보?”

내가 재촉하자 아내는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아끌고 지하를 향해 계단을 뛰어내렸다. 그러다 그만 못보고 밟아 버린 돌조각이 오른발을 파고들어 거의 쓰러질 뻔 했다. 아내의 도움으로 계단을 구르는 참사는 피했지만 발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나는 돌을 뽑아내고는 가까스로 절뚝거리면서도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지하실의 문이 닫혀있었다.

맥이 빠진 아내가 주저앉아 흐느꼈다. 아내는 내 발을 어루만지며 괜찮냐고 연신 물어봤다.

“잠깐만.”

나는 문득 계단에 뚫린 창문이 생각났다.

그만한 크기면 창문만 다 떼어내면 밖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위로 올라가 높이를 확인했다. 정확히는 1층과 2층 사이의 창문이었는데, 다행이도 방범창이 없었다.

더 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나가야했다. 비교적 안전한 한국에 있을 때,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때. 그리고 유리문 밖의 괴물도 아직 우릴 보지 않고, 건물 반대편에서 이름 모를 동양인을 뜯어먹느라 정신이 없을 때…

내가 급하게 창문을 떼어 내는 동안 아내는 올라가는 계단에 초조하게 서있었다. 창문은 들어서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쉽게 뜯어졌다. 높이도 이만하면 크게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여보 먼저 뛸 수 있겠어?”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조심스레 창문으로 다가와 아래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내가 먼저 내려갈게. 나가서 잡아 줄 테니까….”

말하는 도중 유리문 너머로 괴물의 울음소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나는 아내가 저도 모르게 뒤 돌아보려는 걸 머리를 잡아 가까스로 멈췄다.

“여보. 절대. 절대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약속해. 위험하진 않지만 봐서 좋을 것도 없어, 알았지? 약속해.”

“뭐야. 뭔데 그러는 거야….”

“그냥 보지 마. 부탁이야.”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겁먹은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실제로 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창문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로 아래쪽에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있어 착지가 불안전했다. 이미 피를 흘리던 발은 바닥에 널린 나무 조각에 찔려 상처가 늘었고 손을 헛 집는 바람에 옷도 조금 찢어지고 손바닥에도 상처가 생겼다. 그래도 최악에 비하면 이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아내는 애써 뒤를 외면하며 벌벌 떨면서 창문을 기어올랐다. 뒤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새어나왔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나에게 시선을 맞췄다. 나는 가까스로 창문에 걸터앉은 아내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번쩍 들어 올리듯 안아 아내가 창밖으로 뛰어 내리는걸 도와주었다.

아파트 안에서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였건 우리는 겁에 질려 그대로 길을 달렸다. 아파트의 몇몇 창문을 통해 걱정과 호기심을 섞은 눈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총을 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시선조차 무섭고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시선이 조금이나마 덜 닿는 건물사이의 좁은 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옆으로 새는 길도 없는 일자 통로였다. 이런 틈바구니에 끼어있자니 쓸데없게도 총을 든 괴한을 만나면 피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다.

“이제, 이제 어떻게 하려고?”

아내가 놀란 토끼처럼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사방을 살피며 숨도 제대로 거르지 못하고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확인하고, 움직일 수 있는 차를 구해야지.”

내가 대답했다.

도로엔 나무를 들이 받거나 서로 들이 받고 버려진 차량이 꽤 많이 있었다. 거의 멀쩡해 보이는데 도로 한가운데 떡하니 서있는 것들도 있었다. 안에 시체가 들어있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어쨌든 움직이는 차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몇 시지?”

내가 다시 물었다.

“3시 56분.”

아내가 핸드폰을 확인 한 후 대답했다.

벌서 그렇게 됐다니. 나는 핸드폰을 건네받아 서둘러 딸의 번호를 눌렀다.

뚜. 뚜. 수화음이 흘러갔다. 한참을 그러더니 자동응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민아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화음이 가는걸 보면 전화기가 꺼져있는 건 아닌데.

아내가 불안하게 나를 바라봤다. 전화를 끄고, 다시 걸었다.

수화음이 반복될수록 걱정이 커져갔다.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몇 분을 기다리자 마침내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민아야? 여보세요?”

“민아야? 여보세요?”

누군가 말을 따라했다. 민아가 아니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민아야아? 여보세요오오오?”

남자가 한 번 더 놀리듯 말을 따라했다. 그러자 역겹고 비열한 목소리 뒤로 시시덕거리는 남자들의 낄낄거림이 들렸다.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웃음소리 사이사이에 흐느끼는 여자애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신음 소리가.

신음소리가.

온갖 상상이 머릿속에 끓어올랐다. 딸을 가진 아빠의 격정이자 분노였다. 욕을 퍼부으며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는 아직 상황을 모르는 아내가 있었다. 전화로 욕을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괜히 욕을 했다가 민아에게 더 큰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

“왜? 뭐래? 뭐래 여보!”

아내가 다그쳤다.

“그게… 지하라서 전파가 잘 안 터지나봐. 말이 잘 안 들려….”

내가 거짓말을 했다.

아내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욹그락 붉그락 변하는 얼굴을 쉽게 숨길수가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여기에 잘 숨어있으라고 얘기를 하곤, 도망치듯 쓸 만한 차를 찾으러 거리로 뛰쳐나갔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도로는 너무 위험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빨리 딸아이를 구해내고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너무 상태가 좋지 않은 차들도, 문이 굳게 닫혀있는 차들도 이용할 수 없었다. 나는 나무를 들이받거나 서로 충돌한 몇몇 차들을 지나쳐 인도에 반쯤 걸쳐져있는 흰색 중형차로 다가갔다. 차문은 반쯤 열려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차키가 없었다. 차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키는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나는 끓어오르는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찍어 누르며 열이 받아 몇 번이고 핸들을 내려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러다 거의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문득 저 앞 도로에 황갈색 SUV한대가 보였다. 운적석의 문도 살짝 열려 있었다. 나는 서둘러 사방을 살피곤 차를 향해 뛰어갔다.

차에 가까이 다가간 나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흥건한 피에 깜짝 놀랐다. SUV의 좌측 창문이 동그랗게 깨져있었다. 운전석에는 시체가 한구 앉아있었는데 머리에 총을 맞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징그러운 냄새도 사방에 진동했다. 하지만 이번엔 차키가 똑똑히 꽂혀있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차문을 활짝 열었다. 문이 열리자 새어나오던 피가 주르륵 쏟아지며 바지를 적셨다. 반쯤 굳어가는 질척한 피였다. 나는 손과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손으로 시체를 끌어내렸다.

머릿속엔 오로지 한 생각밖에 없었다.

민아. 우리 딸. 그리고 개새끼들.

놈들은 한국인이었다. 행동을 보아선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았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놈들이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진 않을 것 같았다. 부디 그러길 바랐다. 굳이 여자애들의 입을 막지 않아도 경찰에 잡혀 들어갈 일은 없을 테니까, 분명 우리 딸은 여자애니까 계속 쓸모가 있을 테니까…. 아무리 개새끼래도 시체랑 하고 싶은 놈은 없을 테니까…. 이런 씨부랄! 비명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다 죽여 버릴 거다. 갈기갈기 찢어서, 손톱을 하나씩 뽑아내고 손가락을 한마디씩 잘라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다.

일단 전주로 가야 했다. 그리곤 얼마가 걸리든 민아를 찾아내야 했다.

전주에 있을 거야. 놈들도 멍청이가 아니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을 무턱대고 넘나들진 않을 거야. 제발…. 이미 하는 짓부터 멍청하고 더러운 개새끼들이지만… 들이지만 그렇지만… 민아가 살아만 있었으면. 우리 딸이 살아만 있어줬으면….

나는 시체를 대충 버리고 차에 올라탔다. 의자에 잔뜩 스며든 피가 찝찝하게 엉덩이와 등을 적셨다. 아무렴 좋았다. 시동이 걸렸다.

그때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너무 오랫동안 아내를 혼자 뒀다는 걸 깨달았다. 도로에 나와 있다고 꼭 나만 위험하리란 법은 없었다. 칼은 내가 가지고 있었고 아내는 아무 무장도 하고 있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칼을 가진 남자보단 가만히 울고 있는 여자가 더 쉬운 먹잇감이었을 터였다.

나는 급하게 차를 박차고 나와 아내에게 달려갔다. 웬 사내새끼 두 놈이 양쪽에서 아내를 잡고 있었다. 그녀가 숨어있던 바로 옆 건물로 아내를 끌고 가려하고 있었다.

“여보! 여보! 살려줘! 민아 아빠!”

아내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남자들은 다리를 버둥대며 격렬히 저항하는 아내 때문에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아내가 남자들을 차고 버둥대자 그들의 속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다 한 놈이 아내의 얼굴을 냅다 후려치는 게 보였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상처 난 발바닥도 나를 방해했다. 차를 확인하기 전에 아내를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왔어야 했다.

놈들이 아내를 데리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뒤편엔 어울리지 않게 농촌 가정집 같은 곳이 보였다.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보!”

아내가 소리쳤다. 그리고 거의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안 돼! 안 돼!

나는 거의 몇 초차이로 문을 다시 잡아 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아내는 없었다. 사내놈들도, 어딘지 알 수 없는 가정집도 없었다. 나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문 너머의 공간은 아주 익숙한 장소였다. 우리 동네, 아니 우리 회사 근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주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죽어 나자빠진 시체는 한구도 없었고, 급하게 도망치거나 초조해 보이는 사람도 공황에 빠진 사람도 없었다. 총이나 칼을 든 미친놈도 없었다. 예컨대 평소의 모습이요 문 너머의 공간이 서로 뒤엉키기 전에 보던 평범한 모습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문을 닫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점심에 종종 들리던 식당 앞이었다. 식당의 문을 통해 여기로 온 것 같았다. 분주하게 할 일을 하던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슬금슬금, 또는 매우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게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나 이외엔 모두 멀쩡하고 아무 일 없는 모습인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나는 온통 피투성이에 칼까지 쥐고 있었다. 방을 나서던 그대로 옷은 추리닝 차림에 양말조차 신고 있지 않았다. 이상했다. 나도 이 장소도. 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얼른 칼을 버렸고, 얼굴을 가린 채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렇게 달려간 곳은 회사였다. 내가 절뚝거리며 헐레벌떡 뛰어가자 경비원이 깜짝 놀라 나를 막아서려 달려왔다. 그는 나를 알아보는지 멈칫했다. 우린 몇 년간이나 얼굴을 마주친, 아침마다 반갑게든 건성으로든 인사를 하는 사이었다.

“꼴이 대체 왜 그래요? 차에 치이기라도 하셨어요?”

경비원이 잔뜩 놀라 물었다.

“그냥. 좀 넘어졌습니다.” 내가 대충 대답했다. 그리곤 얼른 자리를 피하려는 찰나, 퍼뜩 떠오른 질문에 그에게 다시 물었다. “저, 그런데 오늘이 며칠이죠?”

“오늘요? 그야 23일이죠?”

경비원이 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의아하게 되물었다.

오 세상에. 세상에나.

나는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뛰어갔다.

우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얼굴을 들이 부었다. 돌아다니기라도 하려면 얼굴과 손에 잔뜩 묻은 피를 씻어내야 했다. 페이퍼 타올을 뽑아내 발바닥도 최대한 지혈했다. 옷에 묻은 피도 닦아내보려 했지만 그건 거의 소용이 없었다.

23일이라니. 내가 기억하는 오늘은 26일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울로 물 묻은 얼굴을 보며 말도 안 되는 일 이라고 생각했다. 내 눈은 너무나 초췌해 보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너무나 정상적이었다. 너무 큰 충격에 내가 진짜 미쳐버렸거나, 세상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였다.

혹시 오늘이 ‘정말’ 23일이라면, 민아 엄마랑 민아는 어떻게 된 거지?

불현듯 소름이 올랐다. 그리고 갑작스레 이 이상한 일이 사실이길 빌었다. 여기가 정말 과거라면 둘이 아직 살아있지 않을까? 안전하게 있지 않을까? 구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공간이 모조리 뒤섞인 세상이었다. 문 뒤에 뭐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런 규칙도 없는 마구잡이 뒤섞임이라면, 혹 그 문 뒤에, 시간도 뒤섞여 과거가 있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꿈인가도 싶었지만, 아무래도 현실인 것 같았다. 온몸에 난 상처가 쓰라렸다. 발바닥의 고통이 시종일관 나를 괴롭혔다.

물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사실 오늘 하루 종일 벌어진 모든 일이 현실감이 없었다. 의문은 끝도 없이 차올랐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이 세상에 난 두 명인 건가? 원래 오늘을 살던 나와, 지금 이 자리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 나.

난 23일 날 뭘 하고 있었지?

그래. 중요한 미팅이 있던 날이었다. 해가 쨍쨍한걸 보니, 아마도 지금은 오후였고, 난 회의실에 들어가 있을 터였다.

또 다른 나를 보면 무엇보다 지금 상황이 믿어질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마 내가 정말 둘이라면… 적지 않은 소동이 벌어질 것은 물론,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상상 할 수 없었다.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동안 홀에 붙은 시계를 보니 아직 3시 17분 이었다. 회의가 시작한진 얼마 지나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6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동료 여직원하나가 나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왔다.

“박과장님! 대체 어떻게 되신 거예요? 바지에 그건 피에요?”

“아,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과장님 때문에 다들 난리가 났어요!” 여직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갑자기 사라지셔선….”

사라져?

“박과장? 박과장이라고?” 소란을 들은 건지 부장이 직접 소리를 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이거 중요한 미팅인거 몰라? 지금이 대체 몇 시야! 나랑 이차장이랑 다 잘리면 박과장이 책임 질 거야?”

“예?”

내가 되물었다.

“아주 환장을 하겠군. 꼴은 그게 뭐야? 옷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해놓고선 그딴 거지꼴로! 미쳤어? 젠장 할.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일단 옷부터 제대로 입고 자료 들고 당장 회의실로 들어가! 끝나고 좀 보지!”

부장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봤다.

내 기억에 오늘 진행되는 회의는 거의 완벽했다 싶을 정도로 만족스럽게 끝났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나는? 나는 어디 있지?

나는 부장을 무시한 채 얼빠진 얼굴로 내 자리로 걸어갔다. 그제야 부장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자리에는 딱 내 옷가지만 남아있었다. 구두부터시작해서, 양말 바지 와이셔츠 넥타이…. 모든 게 의자에 앉아 있다가 사람만 쏙 증발해 버린 것 같은 모습으로 의자에 걸쳐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벗으려 해도 쉽지 않을 모습이었다. 신발 안엔 양말이 들어있고… 아마 바지 안엔 팬티가, 와이셔츠 안엔 러닝셔츠가 있을 터였다.

책상위엔 핸드폰이 보였다. 나는 회의고 뭐고 서둘러 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울렸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오 제발. 제발. 그렇게 기다리는데 수화음이 뚝 끊어졌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나는 아연자실해서 통화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 때 문자가 날아왔다.

 

아빠!! 지금 수업중이야!!!!! 왜?????

 

민아였다.

딸이 무사했다. 나는 무슨 신의 선물이라도 되는 양 핸드폰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직원들은 이상한 눈으로, 부장은 한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런 미친 새끼가 정말! 뭐하는 거야? 말이 말 같지 않아?”

부장이 계속 소리쳤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화장실로 달려갔다. 물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3일이었다. 나는 할 일이 있었다.

급히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나오는데 내가 도망치리란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직원 하나가 화장실을 지키고 서있었다.

“과장님! 어디가세요!” 직원이 나를 급히 붙잡았다. “부장님 지금 난리 났다고요! 과장님!”

“미안해. 내가 지금 급히 어딜 좀 가봐야 해. 부장님께 오늘일은 정말 죄송하다고, 징계든 뭐든 마음대로 하시라고 말 좀 전해줘. 부탁해.”

“과장님!”

나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달려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아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한참 멀었다. 얼이 빠진 직원이 계속 나를 불렀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쩔뚝거리며 계단을 뛰어내렸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집에 있던 아내는 비교적 전화를 빨리 받았다.

“지금 괜찮지? 아무 일 없지? 집이야?”

내가 물었다.

왜 그래 여보? 다쳤어? 헐떡이는 내목소리에 놀란 아내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눈물이 왈칵 흐르는 걸 가까스로 억누르고 일단 별일 아니니 걱정 말라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됐다. 모두 무사했다. 나는 믿지도 않던 신에게 감사한다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이건 말 그대로 신이 주신 두 번째 기회였다.

나는 그대로 회사를 뛰쳐나왔다. 준비가 필요했다. 머리가 필사적으로 굴러갔다. 일단 식량이 필요했고 불, 물, 전기가 필요했다. 헌데 그것만으론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망할! 나는 고작 3일 동안, 우리 집을 빌어먹을 세상에 대항할 완벽한 요새로 만들어야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 싸매고 아직은 멀쩡한 세상을 급하게 서성였다.

 

 

“세상에 이게다 뭐에요! 무슨 일이야?”

아내가 내 뒤를 따라 줄줄이 들어오는 참치나 과일 통조림 따위의 박스들을 보며 소리쳤다.

“내가 다 설명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봐. 정말 큰일이야. 그래서 그래. 우린 이게 꼭 필요할 거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 많은 걸 대체…. 어디서난거야? 응? 여보?”

아내가 거의 기절할 듯이 다그쳤다. 음식 상자는 작은 방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빈 공간 없이 채우고, 큰 방도 절반이상을 채웠으며, 거실에도 잔뜩 들어찼다. 24평짜리 집이 절반이상은 식료품에 점령당해 꼭 필요한 동선만을 가까스로 유지한 모습이었다.

의아한눈으로 상자를 나르던 배달원들이 모두 철수하고 나자 나는 아내를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문 뒤의 공간이 뒤섞이는 이야기. 민아의 이야기. 아내의 이야기. 과거로 돌아오고 겪은 이야기들을.

아내는 전혀 믿지 않았다. 열이라도 있는 건가 내 머리를 만져보며 119에 신고를 해야 하는지 걱정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분명 내 손과 발에는 상처가 여전히 있었고, 그건 건드릴 때 마다 눈물이 나도록 쓰라렸다.

“여보, 당신은… 그냥 꿈을 꾼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아내가 조용히,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타일렀다.

“헛소리가 아니래도. 무슨 꿈을 꾸면 이렇게 다쳐서, 피가 잔뜩 묻은 채로 거리 한복판에서 깨어 날 수 있겠어?”

아내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내가 아내의 입장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해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리곤 하나씩 하나씩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내가 미치지 않고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옛날이야기들을. 우리만 아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겪었던 슬픈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제발 3일만 믿고 기다려 줘. 그때도 내가 틀렸다면 기필코 여기 있는 박스들 전부 반품해 올게. 당신이 정신과에 가보라 해도 군소리 없이 갈 게. 이제 3일도 아니고 이틀 조금 넘게 남았을 뿐이야. 제발 조금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내가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당신과 민아를 잃고 싶지 않다고 애원했다.

아내는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아내는 어색하게나마 내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딸의 반응은 아내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밤 열한시. 야자를 끝나고 집에 도착한 딸아이는 온 집안에 들어찬 식료품을 보며 제 아빠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반응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춘기가 다시 온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민아는 듣지 않았다. 딸은 됐다고 정색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을 뿐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결국 애써 밀어내던 침묵이 사방에 흘러넘쳤다.

아내가 애매하게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날, 집안엔 온통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직 대놓고 말 하진 않지만 가장이 미친거라 믿는 어색한 기류가.

나는 집안의 분위기를 애써 무시한 채 안방 화장실 할 것 없이 현관문을 제외한 집안의 문이란 문을 모조리 떼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급하게 부른 업자가 정수기 두 대와 필터 네 박스를 놓고 갔고, 가스레인지 대신 전기 레인지가 설치 됐으며, 또 다른 업자들이 와서 베란다 쪽에 소형 태양열 발전기와 빗물을 모으는 작은 물탱크를 설치하고 갔다. 이해해준다고 말은 했지만 아내는 거의 미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게 다 얼마야….”

오후 두시쯤 되자 나보다 아내가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대출금. 그녀는 남은 집 대출금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후 세시부터는 거의 내내 차를 몰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돌아오는 차의 뒷좌석엔 수많은 재료들은 물론 페달 식 자가 발전기까지 들어있었다. 그리고 상상도 못할 돈을 주고 구입한 길쭉한 천 뭉치도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이제는 액수를 신경 쓸 수도 없었고, 무엇이든 직접 가져오는 방법 밖에 없었다.

“화장실 문 까지 떼면 어떻게 해! 옷은 또 어떻게 갈아입으라고!”

집에 돌아온 민아는 자신의 방문과 화장실문이 사라졌다는 것에 분노를 폭발 했다. 딸애에게 딱 하루만 이렇게 있어보자고, 아빠가 틀렸으면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설득하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딸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고, 민아는 그대로 자기 방에 들어가 어떻게 한 건지 이불을 커튼처럼 이용해 아예 방문을 막아버렸다.

그렇게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예정된 시간이 찾아왔다.

그날은 미리 사둔 재료로 현관문을 틀어막고 민아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데 이른 아침을 전부 소비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딸이 많이 아픈 것 같습니다. 막상 학교에서 딸을 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내는 복잡하고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이제 내 행동엔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고, 민아는 학교를 빠지는 것만큼은 싫지만은 않은지 애매한 태도로 방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세상이 뒤집히기 시작하는 건 대충 오전 10시 경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차라리 내가 미쳐서 헛것을 본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더라도 가족들이 안전한 게 낫지 않은가.

지금은 9시 40분경이었다. 부디, 부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하지만 일이 터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곧 시작이었다.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곧 총소리도 들려왔다.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꿈이 아니었다. 결국 일이 벌어졌고, 혼란이 도시를 먹어치우는 데는 채 반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시신이 쌓여가고 미친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불행히도 내 말은 사실이었다.

안정부절 못하던 아내는 창밖을 힐끔 보더니 결국 맥없이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말도 안 돼…. 여보…. 이거 진짜야? 나도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아내가 결국 충격에 빠져 중얼 거렸다. 더 이상 현실과 나의 이야기를 부정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괜찮아. 우린 괜찮을 거야.”

내가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여보…. 그렇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나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내의 말을 막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내는 울상이 되어 그대로 내게 몸을 기댔다.

민아는 한참만에야 우리에게 다가와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렸다.

“어어….”

얼굴을 보아하니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워낙 감정표현이 서툰 나이이다 보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많이 놀랐지? 봐. 우리 집은 괜찮을 거야.”

내가 먼저 말을 걸자 민아는 들릴락말락하게 죄송하다고 웅얼거렸다. 가슴 한쪽이 먹먹하고 묵직했다. 나는 이번에도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문제가 해결될 거란 믿음이 있었다.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지는 몰랐지만,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가던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평화를 되찾던지 말이다. 우리에겐 몇 년은 거뜬히 버틸 식량이 있었다. 좀 질리기야 하겠지만 살아남는다는 게 중요했다. 물도 불도 전기도 있었다.

안전 한 것 같았다. 정말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 아내와 딸은 나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다. 가족이 내 품에. 안전하게 돌아와 있었다. 참치와 과일 통조림은 먹을 만 했고,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뒤집힌 바로 그날 밤. 안방에서

 

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잔뜩 긴장한 우리에겐 핵폭탄만큼이나 크고 끔찍한 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쿵 쿵. 나는 놀라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오오오 제기랄!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장롱이었다.

장롱 문 안쪽에서 뭔가가 쿵쿵대고 있었다.

앞에 수많은 박스가 들어찬 덕에 문이 열리진 않았지만, 그 뒤에 뭔가 다른 공간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왜 저 생각을 못했지?

갑작스레 싱크대의 문이나, 작은 서랍 문들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냉장고는 어땠었지?

하지만 당장의 문제는 역시나 장롱이었다. 다른 공간의 누군가가 장롱 틈으로 식량더미를 본 것 같았다. 살짝 벌어진 장롱문틈이 박스들 위로 삐죽 보였는데, 박스위로 기어올라 밀어보았지만 뭔가를 끼워 넣어 고정시킨 건지 닫히지가 않았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장롱 뒤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니 곧 환호성이 방을 휩쓸었다. 남자들의 목소리였다. 몇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소리.

이런 씨발! 이렇게 빨리 모든 게 틀어질 수는 없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아예 한적한 시골이나 어디 외딴 섬이나 동굴을 찾아가야했던 걸까?

아내와 민아가 깜짝 놀라 내게 매달렸다. 나는 둘에게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 보인 후, 둘을 안방과 그나마 가장 먼 딸아이의 방으로 피신시켰다.

이번에도 아내를, 딸을 잃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렵게 구한 길쭉한 천뭉치를 꺼내들었다. 불법 개조된 반자동 5연발 공기총이었다. 애초에 멧돼지사냥용으로 나온 총인데 현재 위력은 두 배는 족히 될 거라나. 어차피 수렵면허가 없어 총기구매 자체가 불법인 마당에 기왕 저지를 거 더 센 놈으로 사겠다고 돈을 퍼부은 녀석이었다.

나는 총신을 부여잡고 장롱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군대에서 배운 게 그것뿐이라 총 쏘는 법은 알고 있었다. 준비된 총알도 생각보다 많았지만 낭비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장롱 뒤의 남자들은 적어도 열 명 이상. 나중을 생각하면 한명 당 총알 한 발, 못해도 두 발 이내에 끝내야했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전에, 내가 정말 사람을 쏠 쑤 있을까?

오오 이런. 식은땀이 비오 듯 흐르고 고민이 차올랐다.

통조림들이 꽤 무거운 덕에 장롱이 쉽게 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은 괜찮았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문이 열리고 말 것이다. 장롱은 계속 쿵쿵 거렸고 무슨 수를 쓰는 건지 그때마다 문이 조금씩 벌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정도지만 도저히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손에 땀이 흥건하게 베어들었다. 나는 총과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저 문 뒤의 사람들을, 그 개새끼들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어떻게 온 기회인데. 나는 아내와 딸을 지켜낼 것이다.

누구보다 미친놈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장롱이 계속 쿵쿵 거렸다.

댓글 4
  • No Profile
    너울 18.10.06 10:24 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너울님께
    글쓴이 지현상 18.10.08 08:38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너울님 작품 재미있게 잘 보고있습니다.^^

  • No Profile
    후안 18.10.06 12:11 댓글

    잘 봤습니다 ㄷㄷㄷ

  • 후안님께
    글쓴이 지현상 18.10.08 08:38 댓글

    감사합니다. 곧 11일! 실제로 뵐 수 있겠네요. 잘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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