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심너울


 10년 전에 내가 첫사랑에 빠졌을 때는 작은 화면에 한점한점 수놓인 문자 메세지로 그녀와 연락했다. 휴대폰의 빈약한 저장공간에는 문자 메세지를 딱 200개까지만 저장할 수 있었고 문자 한 통마다 비용이 있었다. 문자 메세지의 빡빡한 글자 수 제한에 맞춰서 나는 그녀에게 보낼 메세지를 정제하고 제련했다. 그녀가 나와 같은 노력을 한 문자 메세지를 보내면, 나는 그걸 차마 지우지 못하고 틈날 때마다 열어 보면서 가슴 속에 연료를 충전했다.


 25년 전에 삐삐를 썼을 때는 어땠을까? 나는 지금 내가 그리던 사람이 삐삐로 신호를 보냈을 때의 내 모습을 상상한다. 90년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입고, 어떻게 먹고 다녔는 지는 희미하다. 내 머릿속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느낌의 장면이 가득 찬다. 눈이 펄펄 내리고 어두운 서울의 후미진 골목, 그 속에서 삐삐를 품에 소중히 안고 있는 내가 있다. 집에 있는 전화기를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집으로 빨리 뛰어가다 한 번 넘어지기도 한다. 밟혀서 더러워진 눈이 내가 상상하는 90년대의 옷에 묻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우습고 기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카카오톡의 친구 목록을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이리저리 확인해본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 관심을 모두 부여잡는 사람은 그녀 하나 뿐이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본명으로 저장해놓은 그녀의 이름을 본다. 언젠가 이 이름 뒤에 하트 모양 이모티콘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려면 행동해야 한다.


 그녀의 세심하게 지어진 이름 옆에 빨간 2가 동동 떠 있다. 그녀가 내게 카카오톡으로 메세지를 보냈다. 그녀와의 대화를 확인한다. 하지만 가슴이 뛴다. 10분 전에 그녀가 인터넷 어딘가에서 동동 떠다니던 작은 사진 하나를 올렸다. 우습다고 적어놓았다. 사실 사흘 전에 이미 다른 친구가 보내 준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우습지가 않았는데, 갑자기 아이 같은 웃음이 내 얼굴에 흐른다.


 사실 그녀가 메세지를 보냈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진동이 울리자 마자 스마트폰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당장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10분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긴 시간이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그녀가 보낸 한 줄의 사진과 웃는 메세지는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는 이제 1을 생각한다. 문자 메세지, 삐삐, 1. 문자 메세지에는 수신 확인 기능이 없었다. 뭐 같은 통신사끼리는 그런 걸 설정으로 지원하기도 했었나? 하지만 나는 그런 기능 쓰지 않았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문자 메세지를 받으면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바로 확인했다. 답장은 좀 느지막히 보내긴 했지만.


 삐삐는 어땠을까? 체험하지 않은 시간을 내 머리 속에서 다시 구성한다. 삐삐 신호를 일부러 늦게 받았을까? 아니다. 그랬을 것 같지 않다.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서 전화하라는 신호가 왔고, 전화기가 저 먼 어딘가에 있으면, 느지막하게 답할 여유가 없다. 그 어떤 사람보다 우선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으면 전화기 쪽으로 걸었으리라. 보폭을 아주 크게. 아니면 달렸으리라.


 그런 때는 갔다. 카카오톡은 수신 확인 기능을 기본으로 제공한다. 예외는 없다. 대화에서 내 메세지 옆에 1이 있으면 아직 확인 안 한 거고, 없으면 확인 한 거지. 그녀가 내게 메세지를 보낸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1을 잠시라도 남겨놓기 위해 기다린다. 느릿느릿 답장을 보낸다. 나는 25년 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많은 메세지를 그녀에게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가슴 속의 불이 넘치는 일이 없도록, 25년 전의 지연을 나는 재현한다.


 2분동안 그녀와의 대화 기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생각한다. 만약 지금 그녀가 다시 메세지를 보내면 어떡하지? 곧바로 수신 확인이 되겠지? 내가 대화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겠지? 어떤 생각이 들까? 내가 너무 절박한 것 같나? 아니, 절박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가 천천히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들키는 것도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 앱을 종료한다. 그녀에게 무슨 답장을 할지 우선 고민한다. 미지근하고 재미없는 내용만 떠오른다. 아니 난 스스로를 꽤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시덥지 않은 농담에 더이상 웃지 않아도, 그녀만 웃어준다면 괜찮다. 나는 그 미소가 계속 보고 싶다. 그 소중한 미소를 내 옆에 두고 싶다.


 나는 다시 대화창을 켠다. 미리 생각해 놓은 답장을 타이프한다. 그녀가 이 답장을 받고 웃길 기대한다. 나는 기다리지만, 이왕이면 내 메세지의 1이 좀더 빨리 사라지면 좋겠다. 그녀가 내 답장을 고대하길 바란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하나하나, 따박따박. 가상의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휴대폰이 가볍게 울린다. 긴장된 손으로 나는 보내기 버튼을 누른다.


 아.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란다. 가슴 속의 열정이 거침없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내 마음 속에 그녀의 얼굴이, 그녀의 우아한 몸짓이, 그녀의 수많은 이미지들이 가득 찬다.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있었던 그 귀한 순간들이 나를 스친다. 나는 잠시 가슴 쪽을 살짝 쓰다듬는다. 이제는 너무 뜸들이지 않겠다 하고 생각한다.


 내가 방금 보낸 메세지 옆에는 1이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016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9714 0
2465 단편 폴라로이드 사진 모르타 2018.09.15 7 0
2464 단편 지옥도 후안 2018.08.31 35 0
단편 1 심너울 2018.08.30 23 0
2462 단편 시체가 놓여있는 상점 유래유거 2018.08.19 45 0
2461 단편 분리수거 김성호 2018.08.16 50 0
2460 단편 Y의 딸 김성호 2018.08.16 44 0
2459 단편 흑백논리 후안 2018.08.16 38 0
2458 단편 한 터럭만이라도 심너울 2018.08.15 80 0
2457 단편 비소가 섞인 달걀술 호넷시티 2018.08.12 40 0
2456 단편 유전 눈설기쁠희 2018.08.12 39 0
2455 단편 양념을 곁들인 마지막 식사 호넷시티 2018.08.10 48 0
2454 단편 프로키온이 빛나는 겨울 밤 호넷시티 2018.08.10 42 0
2453 단편 공터에 하차 맥인산 2018.08.04 59 0
2452 단편 가역거부귀(可逆拒否鬼) 맥인산 2018.08.04 62 0
2451 단편 상실형2 모르타 2018.08.02 85 0
2450 단편 사이버펑크 목이긴기린그림 2018.07.31 43 0
2449 단편 타나토스 강서진 2018.07.31 37 0
2448 단편 개를 기르는 마녀 강서진 2018.07.31 24 0
2447 단편 원조맛집 심너울 2018.07.30 88 2
2446 단편 공생 김성호 2018.07.19 25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4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