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냄새가 엄청 역했지만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걸신들린 마냥 게걸스레 쩝쩝 거리는 소리로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양념 닭다리의 매콤한 향과, 그의 역한 악취가 오묘하게 섞여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냄새를 만들었다.

 

- 정말이지, 항상 느끼지만 내가 여태껏 먹어본 것 중 최고야. 생각 없이 놀러왔는데 이런 굉장한 요리가 있을 줄은 몰랐어. 너한테 감사해야겠는 걸. 이거 뭐라고? 뭐라고 부른다고? -

- 양념 통닭 -

- . 양념 통닭. 기가 막히는 군! -

 

그는 내가 부를 때마다 항상 양념 통닭을 주문했다. 양념 통닭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역정을 내며 귀에서 김을 뿜고 입에서 불을 뿜었다. 차라리 이걸로 계약을 퉁 치면 좋을 텐데 말이지. 침울한 표정의 나를 보면서 그가 입술에 묻은 양념을 길쭉한 혀로 쓱 훑었다. 혀끝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한쪽 끝은 입술을, 다른 쪽 끝은 입 꼬리 부분을 쓸어내렸다. 가느다란 그의 노란 눈동자가 자신의 왼 손에 쥐여 머리와 꼬리를 바동거리는 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다른 손으로 닭날개 부분을 집어 뱀의 머리 위로 떨어뜨리자, 뱀은 자신의 머리 두 배는 족히 될 크기로 커다랗게 입을 벌려 떨어지는 닭날개를 순식간에 삼켰다.

 

- 매운 맛이 좋은데 오늘은 짭짤한 게 좀 아쉽군. 그런데 왜 나를 불렀지? 오늘은 만나기로 한 날이 아닌데 말이야. -

- 말할게 있어요 -

- 그 이유가 내 입맛에 맞아야 할 거야. 닭다리나 뜯는다고 무시하지마라. 내가 있는 곳에서는 감히 내 눈을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못 해. 그 중앙의 최고 권력자도 내게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다고. -

 

그는 자신을 *아스타로트 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지옥의 대 공작 이며, 수하에 악마 40개 군단을 거느린 지옥 서쪽의 영주라고 했다. 그런데 대악마님이 왜 이 작은 동방의 나라에 계시죠? 벌벌 떨며 물었을 때 그는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휴가 안가니?

 

- 확인할 게 있어서요 -

- 뭔데? -

- 아스타로트님이 불쌍한 저를 구제해 주신 건 알지만 확실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아서 그래요 -

- 아 그래요? 짚고 넘어가시게요? 이 건방진 애송이가! 네 놈, 아직 살아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어차피 네가 살아있을 때는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내 아무 짓 안한다만, 네가 죽어 내 밑으로 기어 들어올 때는 눈에서 피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해줄 테니까! -

 

그가 역정을 내며 또 귀에서 김을 뿜었다. 입은 아직 닭다리를 물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불은 나오지 않았다. 왼 손에 쥔 뱀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분노로 울컥하여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 미안해 가브리엘. 그가 헤헤 웃으며 뱀의 대가리 윗부분을 긴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그는 자신의 애완 뱀의 이름이 가브리엘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배를 움켜잡으며 미칠 듯이 웃어 젖혔었다. 너무 웃겨. , 이름 가브리엘이야. 진짜 센스 있지 않아?

 

- 우리의 계약에 대한 겁니다 -

- 계약? 네가 살아있는 동안 소원을 들어주고, 대신 죽으면 네 영혼을 내가 부린다는 그 계약 말인가? 갑자기 계약 얘기는 왜 꺼내는 거지? 수천 년 전부터 악마의 힘을 이용하면 영혼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걸로 여겨졌었다. 대가를 얻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치는 것이 등가교환 아니더냐! 네 놈이 무슨 배짱으로 이 계약을 짚고 넘어가고 자시고 하는 거냐! -

- 들은 게 있어서 그럽니다 -

- 뭐라? -

 

 


 

 

며칠 전에, 하늘에서 내려 온 그 분을 만났다. 순간이었다. 엄청난 빛과 함께,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말을 타고, 금관을 썼으며, 온 몸이 붉고 검은 턱수염을 자랑하는 위압적인 자태. 하지만 압도적인 모습과는 달리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인자한 미소.

 

- , 관우님? -

- ? *관우가 누구더냐? -

- 아닙니까? , 죄송합니다. , 누구십니까? -

-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엎드려 그를 모셨다. 광채와 함께 그가 말에서 내려 내 머리맡으로 걸어왔다. 중요한 것은 너이니라. 그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 귓가에, 다시 따뜻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인간이여. 이름이 무언가. 내 예를 갖추어 네 이름을 알고, 네 이름을 부르마. -

- 저는 사, 상식이라고 합니다. -

- 상식이여. 반갑다. 내가 몸소 내려 온 이유는 하나이다. 네 옆에 붙어있는 그 놈 때문이다. -

- 아스타로트 님 말입니까? -

 

내가 고개를 들자, 그가 씩 웃었다.

 

- 상식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무서운 이가 아니다. -

- 저기, 왜 평생 볼까말까 한 무시무시한 분들이 이 작은 동방의 하찮은 제 앞에 나타나 주시는 건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 나는 관대하다. -

 

그가 뜬금없이 답했다. 상식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가 키우는 뱀이 있다. 상식도 알 것이다. 그 뱀의 이름은 가브리엘이다. -

- ,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

- 가브리엘 이라니! 뱀 따위의 이름이 가브리엘 이라니! 이건 모욕이다! -

 

턱수염이 파르르 떨리며 그의 고함소리가 쩡쩡 울려 나는 귀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붉은 갈기를 휘날리던 그의 말이 히히힝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앞발을 들며 포효했다. 번쩍이는 금관과 그가 입은 황금 빛 갑옷이 빛나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빛이 잠시 희미해지나 싶더니, 다시 아까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지만 나는 관대하다. -

- 죄송합니다. -

- 나는 그의 적이다. 이것은 불변의 섭리이다. 그리고 상식은 그에게 엮여있다. 나는 그에게서 너를 풀어주려 한다. 그는 계약이 파기되면 힘을 잃는다. 내가 몸소 이 작은 동방의 하찮은 인간인 네게……. 미안하군. 예의를 갖추어 이름을 부르마. 상식 네게 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는 힘을 잃게 되고 나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

- , 악마와의 제 계약을 알고 몸소 방문주신 거군요 -

- 그 계약은 성립될 수 없다! -

 

그가 두 손을 들어 무언가 중얼거렸다. 잠시 후, 환한 빛과 함께 황금빛을 내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나타났다. 오오. 나는 그저 입만 벌린 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손을 내려놓았지만 책은 여전히 공중에 뜬 채로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사락 하고 손짓을 하자, 책이 파라락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 계약은 계약서에 서명을 함으로 성립된다! -

- 오오오! -

- 상식은 그와 계약서를 작성했는가! -

- 오오오! 아닙니다! 단지 말로만, 말만 했습니다! -

- 그렇다! 모든 계약의 종점은 계약서이니라! 고로 그 계약은 무효하다! -

- 오오오오! -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래, 계약은 계약서를 써야지. 왜 생각 못 했을까. 그가 손을 들어 일어서라는 손짓을 했다. 인자한 그 손길에 나도 모르게 일어섰다. 둥실둥실 떠 있는 책 옆으로 황금색 만년필이 나타났다. 번쩍이는 금관과 갑옷을 입은 그가 만년필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택은 자유니라 상식이여.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만년필을 잡았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이 온 몸을 휘돌며 기분을 평온하게 했다. 그것은 회개와 후회를 반성한다는 계약이니라. 그의 중후한 목소리가 이제는 머릿속으로 울렸다. 그 놈과의 계약은 파기하고 앞으로 반성과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약속하는 계약의 서명을 하여라. 그러면 내 몸소 상식 너를 지옥에서 구재해주겠노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황금색 만년필로 황금빛 책 한가운데 서명을 했다.

- 이로서 계약은 성립되었노라! 나와 상식 둘의 계약은 이 계약서가 증빙할 터이니! -

 

그가 손을 들어 다시 사락 손짓을 했다. 책이 팽그르 돌며, 사라졌다. 환한 미소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울지 마라 인간이여. 그가 말에 올라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장 그 놈과 계약을 파기할지라. 그 놈에게 계약서를 말 한다면 꼼짝없이 그 계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느니. 그 놈과 계약이 파기 되면 내가 다시 상식에게 나타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는 대악마이나, 약속을 중시하는 이. 또 보자꾸나.

 

 


 

 

그랬다. 아스타로트가 제일 좋아하는 매운 맛이 아닌, 간장 맛을 시킨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로 오늘을 기점으로, 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악마와는 상종하지도 않을 생각이니까. 그 동안 많이 참아왔다. 이 더러운, 역겨운 악마 같으니라고. 더군다나 매운 맛이 제일 비쌌다.

 

- 당신과의 계약을 파기합니다! -

- ? 내가 잘못 들었나? 뭘 파기해? -

- 계약 말입니다. -

- 이런 건방진 애송이가! -

 

그가 들고 있던 닭다리를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노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노랗던 눈이 금세 붉어졌다. 붉은 핏빛을 한 눈으로 그가 입가를 실룩이자, 송곳니가 기다랗게 솟고, 두 갈래로 갈라진 혀가 춤을 추듯 넘실댔다.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더니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힘이 빠진 나는 어느새 다리가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주저앉은 내 앞으로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 어떻게 그 계약을 파기한다는 거냐. 말이면 다인 줄 아느냐. 내가 무섭지 않느냐.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무서워 나는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 , 계약서요! -

-계약서? -

 

온 힘을 짜내 내뱉은 말을 들은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압박하던 사슬이 풀리듯, 내 입에서 속사포 같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 계약은 계약서가 증빙하는 겁니다! 서면계약이야말로 효력이 있는 겁니다! 당신과 나의 계약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기에 무효입니다! 파기다! 파기야! 이 계약은 무효고 너는 그냥 너네 집에 돌아가 잡이나 쳐 자면 돼! 휴가도 다 끝났을 거 아니야! -

- 그렇군.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네 놈은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느냐? -

- 나를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입이 사라지며 목소리를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웁웁. 놀란 내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말했다.

 

-네 놈의 목소리가 듣기 싫구나. 그냥 조용히 내 질문에만 답하라. 혹시, 금관 쓰고, 붉은 말을 타고, 황금 갑옷을 입은 굉장히 멋지게 생긴 놈 아니냐?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로트가 눈을 감았다. 불길도 사그라지고, 그의 송곳니도 줄어든다.

 

-참 답답하구나. 애송이여. 너는 흑백논리에 빠져 있구나. 왜 다각도로는 생각하지 못 하느냐? 내게 양념 통닭이라는 맛을 알게 해 준 그 공로를 인정하여, 죽어서 내 밑으로 들어왔을 때 한 자리 쥐어주려 했거늘. 오늘 먹어 본 이 짭짤한 맛은 처음에는 아쉬운듯해도 내내 생각이 나는 맛이니, 앞으로도 이 훌륭한 맛을 계속 즐길 수 있게 되어 내심 감사했다. 한 가지 맛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맛을 알게 해준 부분에 감사하마. 나는 대 공작이다. 귀족이며 영주이자 지도자이다. 고로 약속을 매우 중시하느니라. -

 

눈만 동그랗게 뜨고 듣고 있는 내게 그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나는 너의 적이다. 그리고 그는 나의 적이다. 고로 그는 너의 적이 아니다? -

 

그가 손가락을 들어 뭔가를 세었다. 따라잡히겠는 걸.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 계약은 계약서가 있어야 한다. 이 계약은 계약서가 없다. 고로 이 계약은 무효다? -

 

내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는 걸 보며 그가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그는 *베리드다. 서열 28위이고 지옥의 악마26군단을 거느리는 공작이다. 나는 서열 29위지만, 40개 군단을 거느리고 서쪽 지역 대부분을 관장하는 대공작이다. 원래는 타 세계의 신으로 군림했었던 이유로 그 분이 몸소 스카우트했지. 그래서 서열은 낮지만 내 세력이 베리드보다 더 큰 것이야. 그래서 베리드는 나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낀다. 그가 직위나 세력으로는 내게 어쩌지를 못하니 최소한 이기고 있는 서열이라도 지키려고 고군분투 하는 것이다. 서열을 평가하는 것은 영혼을 부리는 수에 있다. 그가 내게서 뺏어온다면, 1이 아닌 2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이기에, 그는 호시탐탐 내 곁을 맴돌며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

 

그가 비에 쫄딱 젖어 쭈그린 강아지를 보는 마냥 처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네 놈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네 말대로 서면 계약의 효력은 강대하다. 하지만 네 놈이 간과한 사실도 있는 것이, 구두계약도 효력이 있다는 것. 왜 꼭 계약은 계약서가 있어야만 효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느냐? 구두계약에 대한 충분한 증거와 증빙이 가능하다면, 이 또한 충분한 효력이 된다. 뭐 구구절절하고, 나는 이제 떠나갈 테니 그 놈과 잘 지내어라. 양념 통닭에 대한 부분은 깊이 감사한다. 잊지 않을 것이니 지옥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마. -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잠시 후, 붉은 말과 황금 금관의 검은 턱수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타로트가 베리드라고 부른 그는, 처음과는 달리 흉흉한 기운을 둘러싼 채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 내 관우에 대해 검색해 봤다. 나랑 비슷하긴 하더구나. 아무튼, 일단 그 입부터 되살려야겠지? -

 

 

입이 나타났고, 터진 소리는 처절하고 끔찍한 비명이었다.

 

 

 

 

주석: 

*아스타로트 - 왼 손에 뱀을 쥔 추한 모습의 악마. 몸에서 심한 악취를 풍기며, 소환자에게 여러 가지 지혜를 알려준다고 한다. 기원은 수메르 신화의 여신 아슈타르라는 설이 있다.

*관우 -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검은수염과 붉은 얼굴, 붉은 색의 애마 적토마로 유명. 만인지적의 장수라고 불리었다. 중국 지방에서는 신으로 섬기기도 한다.

*베리드 - 지옥에선 26개 군단을 지휘하고 공작 직위를 가지고 있다. 붉은 말에 타고 금관을 쓴 온몸이 붉은 색을 띤 병사의 모습으로 소환되며, 검은색 턱수염을 지닌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거짓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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