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역거부귀(可逆拒否鬼)

 


사건의 요건 축에 드는 일로는 뭐가 있을까. 사상 초유의 대지진일 수도 있고 면식 없는 누군가의 자살 테러일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악마의 배신이었다. 악마는 애초에 나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으나, 약 4시간 전 실종이 확인된 후로 그 빈자리가 점점 몸집을 불려 이윽고 중요사항 목록에 합류할 수도 있을 만큼 뚱뚱해진 걸 보니 그 전이야 어쨌든 충분히 중요해지고 말았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곁에 있을 때는 악마의 중요성을 미처 몰랐다든가 하는 식으로 얼버무려볼까도 했지만 역시 그런 경우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옆에서는 잠자리를 정리한 갓파가 미간을 핥으며 팁을 기다리고 있다. 혼자인 나에겐 어림없다. 키가 겨우 무릎께까지 올까 말까 한 갓파를 붙잡아 껴안고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알람은 4시간 후에 맞춰져 있다. 갓파가 아쉬운 대로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무서운 속도로 갉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회전이 느린 머리로 자고 일어나면 배고픈 갓파가 몸을 다 먹어치워 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 갓파는......몇 시간 전에 코코넛을 줬던 갓파와 닮았다. 갓파들은 당최 일이란 걸 안 했다. 방금처럼 잔심부름을 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가만히 안겨 있을 뿐이다. 갓파가 언제부터 갓파들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개성 비슷한 것을 두르더니 서로 분간이 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어느새 귀밑까지 짧아져 있다. 시선을 느낀 갓파가 바쁘게 움직이던 부리를 다물고 이쪽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나는 갓파의 허리를 잡고 다시 가슴께로 끌어내려서 꽉 껴안았다. 갓파 머리 위의 접시가 가운데의 녹색 점을 기준으로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다. 공중에 조금 붕 뜬 잎사귀 모양의 작은 알약이 마찬가지로 옅은 녹색을 띈 그림자 너머로 팔을 내밀어 접시를 열심히 돌리는 중이었다. 나는 입술이 다가온 것을 감지하고 서너 종류의 정해진 손짓으로 감사를 표하는 알약을 혀로 찍어 개구리처럼 냅다 삼켰다. 갓파는 식도를 넘는 약을 추적이라도 하듯  호기심 어린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내 입에서부터 목까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차가운 부리가 목에 닿는가 싶더니 뒤이어 마찬가지로 싸늘한 콧김이 느껴졌다. 어쩐지 감각이 둔하다. 온도와 감촉이 몸 뒤에서 엇박으로 뒤섞이고 있다.
“잘 자!”       
한참 턱 아래를 수색하던 갓파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외쳤다. 이제부터 4시간. 자고 일어나도 악마는 없다.  

파일철 무더기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얇은 막 안에 싸여 정렬된 색인들이 등 터진 번데기처럼 세로로 팽창하더니 몸을 뒤틀며 피부 바깥으로 파일 하나를 밀어냈다. 나는 파일을 받아 들고 습관적으로 파일집의 찢어진 부분이 아물기를 기다렸으나 자국은 파일을 뱉어낸 후로 더 이상 벌어지지도 다물어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검은 구멍을 세우고 있었다. 저절로 되는 것들의 수가 손에 잡히게 줄어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기본적인 서비스까지 중지되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구멍을 내버려 두고 파일의 절취선을 뜯어 재생 마크가 완전히 드러날 때 까지 포장을 벗긴 다음,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재생 마크를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20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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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어봐!”
“흐아악-! 허어어-! 흐아악.......! 허어어........”
여기저기서 깔깔 자지러지는 소리가 튀어나오자 산소 부족으로 창백해졌던 악마의 얼굴에도 차츰 원래 빛깔이 돌아왔다. 나는 샌드위치를 사서 기다리고 있다가 등 뒤에서 건넸다.
“다음부턴 뭐라도 받아야지 안 되겠어. 일상생활이 방해받잖아.”
“이런 일이 빈번한 게 일상이지 뭐야. 저 시민들이 나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나, 그냥 가다가 발견한 거지. 아무한테나 안기는 게 갓파적 일상이고, 길 가다 붙들리는 게 나다운 일상인 거지, 그냥 시프트 업무나 하면서 어정쩡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 보다는 이렇게 공원 부속품 같은 역할이라도 겸업하는 게 나아. 나는 쓸모가 두 갠 거고 반인 반 갓파야.”
“갓파들은 먹다 남은 거라도 받잖아. 그리고 너 그 정도로 쓸모 있지 않아.”
“갓파라니까. 갓파들이라고 하면 진짜 갓파들이 돼 버려 가지고 안 돼.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게 나랑 갓파의 다른 점이니까 문제될 거 없어. 나는 무보수로 시민들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에 비로소 시민인 거야.”
“질린다.”
악마가 두툼한 샌드위치를 종잇조각이라도 되는 듯이 건조하게 집어삼켰다.
“소스를 너무 넣었어.”
“소스 없는데?”
“내 소리 말이야. 봐봐.”
악마가 일부러 입맛을 쩝쩝 다셔서 지저분한 소리를 내 보였다. 
“그렇네. 너무 넣었다.”
“이런 작은 소리까지 편집되잖아. 숨소리야 목소리가 다소 섞여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악마는 중학과정 중간에 목소리를 바꿨다.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송출되는 소리들처럼 악마의 목소리 위에서 말은 금방 낡았고 출발하자마자 곧장 현재를 떠나 과거 저편으로 깊숙이 틀어박혔다. 
“방귀는 어때? 뀌어 봤어?”
“방귀 안 뀐 지 오래 됐지.”
뒤이어 악마는 트림을 한차례 끄윽 했는데 이 또한 나오는 순간 편집되었으나 앞선 연설에 비해 장황함이 부족했던 탓인지 전보다는 가까운 과거에서 보내져 온 것처럼 들렸다.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메모를 둥글게 말아 건물 전체를 가로지르는 기송관 주둥이에 갖다 대 올려 보내는 구식 양장 차림의 전달원들이 떠오르곤 했다. 악마는 예전에 실수로 나에게만 자기 목소리를 조음할 때 사용한 소스의 조합을 알려 줬었다. 의외의 간단함에 깜짝 놀랐지만 각 소스의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다른 누군가가 알아낸대도 우리 또래 안에서 그 정도 거액을 고작 목소리 조음에 투자할 만큼 사치스러운 젊은이는 달리 없으리라고 생각됐다. 
“믹착착착.”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사담을 이용하고 있었다. 사담 레버를 내려 신청하면 즉각 새로운 사담 개설자를 위한 새 굴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공식적 이름은 사담이었지만 보편적으로는 낫포라든가 짓포 등으로 불렸다. 따로 굴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악마나 나와 같이 하우스에서 생활했다. 굴 안에서는 음소거가 가능하지만 굴이 하우스 바깥을 둘러싸고 확장되는 구조 때문에 하우스 안에서는 천장이며 바닥, 어쩔 때에는 음식에서까지 굴속에서 나누는 사담들이 들려왔다. 고양이가 물고 온 쥐 시체에 귀기울여보니 쥐 안이 사담으로 요란법석이더라는 얘기도 들은 적 있었다. 굴을 파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돌아가신 할머니 뱃속도 금세 사담하는 목소리로 북적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목소리들은 개체 간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톤이 높았으며, 안에서 들으면 불분명하고 강렬한 외침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도 이따금 끼요끼요, 무니문니, 만야녀라, 마갸악 과 같이 결코 외마디는 아니지만 그 무의미한 성격 탓에 외마디 비명에 가깝게 들리는 쾌활한 괴성을 내지르며 대화에 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어릴 때부터 꾸준히 머릿속에 키워 오던, 그 방향은 불분명하나 엄격한 교육의 산물임에는 분명한 자존심이 언제나 단단한 일렁임처럼 앞을 막아서고 보내주지 않았다. 
사담이 이런 식으로(아카카 추 파파파) 들리는 것은 6년 전 사담 기능을 보완한 엔지니어가 소설광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21세기 후기 문학에서는 입스스-데케나케나 같은 조-의태어가 활발히 사용됐었다.


“청설모 끼워서 포킹하러 갈래.”
“물어보는 거야 뭐야.”
“청설모 끼워서 포킹하러 가자.”

청설모를 끼운다는 식으로 말은 했지만 사실 우리 둘 다 청설모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포킹은 꽤 까다로운 기술이어서 청설모같이 감이 따라주는 시민들을 동반하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성공하기 힘들었다. 악마가 포킹을 그렇게 즐기지도 않으면서 계속 포킹에 나서는 데는 포킹이 청설모네 들락거리기에 좋은 구실이 돼 주기 때문이어서라는 게 컸다. 어쩌면 나하고 계속 어울리는 것도 내가 청설모와 친해서인지도 몰랐다. 청설모와 나는 부모가 같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냈는데, 개조를 거듭해서 지금은 원형이 남아있지 않은 청설모의 외모 탓에 그마저도 서먹해졌다. 악마는 생각하는 게 구식이라고 비웃었지만, 사실상 이 시기에 굳이 하우스에 남아 있는 시민들은 다 나와 비슷한 사고관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청설모는 별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청설모가 포킹에 능한 이유도 청설모가 청설모라는 거죽 안에 고정되어 있다 뿐이지 행동거지의 출력 방식 자체는 사담 이용자들과 별다를 것이 없어서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청설모는 때때로 사담 이용자들처럼 불분명한 언어로 허공에 대고 혼자 무어라 지껄이곤 했는데, 그 모습이 보기에 따라 로맨틱해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멀리서 청설모를 좋아하는 시민들은 악마 외에도 꽤 있었다. 악마는 청설모가 그 애매한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 점을 높이 사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도망이야. 도망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따지고 보면 우리는 여기서 시간 죽이는 거고 사담 파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사는 건데.”
“밖에는 갓파가 없으니까 진짜인 척 하는 게 더 수월해서 그러지. 딱 그거 차이야. 나약해서 하우스에 못 있는 거야.”
“그래도 열심히 하잖아.”
“저기 있다. 가서 말 걸어 봐.”

청설모는 뚱뚱해서 곧 터질 것 같은 갓파를 껴안고 양 무릎으로 목을 조르면서 억지로 뭔가를 먹이고 있었다. 나는 거의 처음으로 갓파에게 모종의 측은함을 느꼈지만 악마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갓파를 용도에 맞는 무자비함으로 다루는 청설모의 모습에 깊이 감명 받기까지 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보기에 청설모의 행동은 갓파를 이용한 세계실험-악마의 표현에 의하면-이라기보다는 단순한 괴롭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를 발견한 갓파는 무표정한 얼굴로 탄식하듯 고개를 조아리더니 흙바닥에 머리를 거세게 몇 번 부비고는 뒤뚱뒤뚱 길 저편으로 뛰어 사라지려 했다. 나는 뜀박질에 시동이 걸리기 전에 얼른 갓파를 붙잡아 옆구리에 끼고 조그만 복부를 눌러 게우는 걸 거들었다. 갓파는 감사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다소 편해진 듯 줄어든 뱃가죽을 탁 때려 보이고 저 너머로 바쁘게 달려갔다. 악마는 벌써 청설모와 얘기를 끝낸 것 같았다. 
“만능갓파 어디 갔지?”
“내가 놔 줬어. 갓파한테 그러지 좀 마.”
청설모가 거대한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이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갈색 털이 미간부터 눈 밑까지를 가볍게 덮고 있었고 빛나는 조리개가 수시로 열렸다 닫혔다 하며 주위를 욕심껏 탐색하고 있었다. 궤적을 따라 날씬하게 반들거리는 콧잔등을 지나면 입술 없이 가지런히 늘어선 한 줄의 당당한 이빨이 소박한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반할 만 하다. 청설모가 남은 과자를 권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하나 받아서 어정쩡하게 받쳐들었다. 
“과자 좀 먹고 가자.”
악마도 조합 과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군말 없이 받았다. 청설모는 천천히 봉투에서 가장 작은 조각 하나를 꺼내더니 나머지는 바닥에 휙 던져 버렸다. 봉투가 땅에 닿기도 전에 갓파들이 게 다리에서 딸려 나오는 게살처럼 골목 여기저기서 후다닥 튀어나와 과자를 하나씩 챙겨 달아났다. 막 토한 직후인 아까의 갓파도 끼어 있었다. 갓파는 배에 남은 내 손자국이 부끄러운 듯 초록색 배를 겸연쩍게 문지르며 뛰어와 한 조각을 덥석 쪼아 꿰고 아까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부리나케 달려 사라졌다. 
“만능갓파한테 잘 해줘 봤자야. 은혜를 몰라.”
“적어도 네가 못 해 준다는 건 아는구나.”
청설모는 수수께끼라도 들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청설모가 큰 소리로 과자를 씹을 때마다 커다랗고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 옆으로 검은 테두리의 화려한 효과음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아무래도 효과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일부러 과자를 큰 소리로 씹는 것 같았다. 공중에 남은 미소처럼 느긋하고 매끄럽게 밑에서부터 두어 조각씩 사라지는 글자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맛도 없지만 먹다 보면 무상하게 한 접시 전부 먹어치우게 되는 눅눅한 조합 과자를 갉작였다. 악마는 벌써 다 먹고 끈끈해진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포킹 갈까.”
청설모가 남은 과자를 드라마틱하게 땅바닥에 버리면서 일어났다. 청설모의 행동거지란 보통 한심하기 그지없었지만 포킹을 할 때만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듯 동작마다 무언가 예리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나는 눈송이 모양으로 좁아진 청설모의 아름답고 씩씩한 조리개 변화에 금세 고무되어 벌떡 일어났다. 악마가 뒤따라 일어서며 흥분한 듯 중얼거렸다. 
“역시 청설모가 꾼이야.”

청설모는 10분 정도 근처를 서성이다가 폐타일 하나를 찾아냈다. 타일은 꽤 커서 악마의 손바닥만했다. 나는 악마가 청설모와 과연 뭘 하고 싶은 건지 생각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한동안 괜히 주위를 들쑤시고 있었다. 청설모한테 과연 성기 비슷한 부분이라도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다. 팬티를 벗기면 시민용 열람 파일이 대신 뜨는 거 아닐까 싶었다. 청설모는 혀도 없었다. 효과음을 사려고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악마가 그걸 알고나 있는지 궁금했다. 청설모 입속의 텅 빈 구멍은 값싼 파일 조각들로 대충 때워져 있었고 목소리는 입이 아닌 뺨을 거쳐서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뜨거운 국물을 안 마시는 것도 사실 파일이 눌어붙어서 기도를 막을까 봐 겁나서 그러는 거였다. 악마의 성격상 플라토닉한 연애를 시도해 본대도 금방 밖으로 돌면서 이런저런 변태적인 대안을 찾는 것에만 매진하게 될 것이고, 이런 태도는 청설모를 질리게 만들어 결국 피차 서서히 나가떨어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악마는 반인 반 갓파로 지내기를 포기하고 목소리 소스를 팔아서 청설모의 입 안을 부드러운 고급재로 바꿔 주는 것 까지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까지 한대도 청설모가 악마를 만나 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쩌고 저쩌고. 아 잡힌다. 와 봐. 여기 찾았어.”
악마와 청설모가 타일 위에 내 자리를 남기고 머리를 바싹 맞댄 채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그만 와락 뭉클해져 서둘러 타일 쪽으로 다가가 빈자리에 내 머리를 갖다 대고 귀를 기울였다. 
“마갸! 기갸니니.”
“여기다.”
청설모가 포크로 타일 위를 찌르자 한 부분이 쑥 들어갔다. 악마가 재빨리 포크테일을 눌러 마취젤을 짜 넣었다. 젤은 구덩이 안쪽으로 흡수되는가 싶더니 파문을 그리며 제자리를 한참 돌았다. 한번 회전할 때마다 젤이 구덩이 위쪽으로 점점 높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더 두면 굳어.”
청설모가 김이 오르는 젤리를 포크로 찍어 솜씨 좋게 틀에서 떼어냈다. 타일은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변색되더니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내가 얼른 양손바닥을 오목하게 모아 붙여 내밀자 청설모가 지름 한 뼘 쯤 되는 넓적하고 두툼한 젤리를 내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허세도 물론 잊지 않았다. 
“접시 가져왔으면 더 크게 구워도 됐는데. 아무튼 오늘은 가볍게 나온 거니까.”
그다음 악마가 젤리를 삼등분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내 몫이 다른 둘 것보다 약간 작아 보였다. 다들 한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젤리가 얹혀 있었던 손바닥은 마지막 조각이 내 입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거짓말처럼 건조해졌다. 목구멍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이 감각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악마는 청설모가 포킹에 능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포킹을 하느니 영화를 보는 게 낫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긴 시간 낭비라고 해봐야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만. 시간 낭비 안 하려면 짓포 파야지.”
“가만 보면 나랑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맨날 지 혼자 떠들어. 남들 다 아는 걸 가지고.”
“내가 이런 말 하는 역할을 맡아주니까 네가 시비 거는 쪽이 될 수 있는.......너는 다른 줄 아냐..........”
머리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나무누! 마차차. 니니니니! 무지........가 안 일어나셔.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가.”

어제 경매에서 산 그림이 천장에 붙어 있었다. 모래무지는 순간 화가 났지만 곧 몸에 힘이 전혀 안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한마디 하는 것을 그만뒀다. 감정이 목 위로 모이다가도 맥없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감각도 마찬가지였다. 미간을 찌푸려 봤지만 잠시 무딘 가려움이 일어날 뿐 제대로 구겨지는 것 같지 않았다. 모래무지는 간지러움을 더 느껴 보려고 몸의 다른 부위에도 비슷하게 힘을 줘 보았지만 오로지 발가락 끝에서 희미하게 비슷한 반응이 감지될 뿐 몸의 다른 곳은 딱딱하게 굳어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뿌연 시야 바깥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당장 다리나 팔을 분질러 줬으면 싶었다. 발끝에 강아지의 데퉁맞은 앞발이 보였다. 다친 친척 여자애를 위로하기 위해 누군가가 데려온 것 같았다.......모래무지는 가족들이 그림을 천장에 붙여 놓은 이유를 깨달았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얼굴 근육을 움직이고 고작 반경 몇 미리 내에서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발가락을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사격은? 경매는? 번호판을 어디까지 치켜 들 수 있을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엄청난 공포가 엄습했다. 모래무지는 침상 위에서 죽어갈 운명이었다.  
“아야!”
“일어났구나. 보통 병문안에 이런 품종을 사 오나........삼촌 선물이야.”
등을 받쳐 일으키는 손이 느껴졌다. 뼈마디 사이로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귀가 희한하게 접힌 얼룩강아지가 미성숙한 이빨로 모래무지의 발가락을 물어뜯고 있었다. 

청설모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시시한 부분이 배당된 모양이었다.
“총 쏘는 부분이 없네. 사고 나는 부분도 없고. 총 쏘는 부분 가진 사람?”

“일어나세요. 나가서 바람도 좀 쐬시고요. 뭐 만들어 드릴 테니까 그 동안 잠깐 걷고 들어오시면 되겠네. 어제 부엌에만 한 번 나오셨죠?” 
간병인이 쟁반을 챙기더니 뚱뚱한 엉덩이를 흔들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모래무지는 여자의 조그마한 머리 둘레를 감싼 싸늘한 빛 테두리가 점점 넓어지다가 마침내 머리를 삼켜 버릴 때까지 그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간밤에 내린 비로 안뜰은 축축했고 낮은 울타리 너머로 창백한 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개가 나이든 잇몸 위로 혀를 축 늘어뜨리고 밭은 숨을 쉬며 다가왔다. 소파는 좀 축축하긴 했지만 앉을 만 했다. 어느새 개가 따라 올라왔는지 따뜻하고 묵직한 몸이 겨드랑이 밑에서 푸들푸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래무지는 손을 뻗어 개의 턱 밑을 부드럽게 긁어 주었다. 개는 끄응 하고 뒤척이더니 곧 모래무지의 무릎에 커다란 머리를 기대고 얌전히 누워 졸린 듯 풀어졌다. 더 이상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었고 지평선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어제의 구름은 흔적도 없다.......차가운 공기가 들판을 무겁게 뒤덮고 있었다. 무수한 이슬방울이 대기 중에 얼어붙어 있는 듯 했다. 개의 얼룩덜룩하고 다정한 혀가 술잔 바닥처럼 청바지를 적시고 있다. 이름을 부르자 어깨 위로 털투성이 앞발이 턱 올라와 얹혔다.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다. 모래무지는 개를 정중하게 살짝 껴안고 정면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풍경 앞에서 아주 천천히 눈을 감을 생각이었다. 

악마 것도 불발이었다. 내 걸로 말하자면 작은 조각이어서인지 이것밖에 들리지 않았다.


“러브 유.”
“러브 유 쏘 머치!”      

청설모는 포킹이 시원찮았던 것을 접시가 없었던 탓으로 돌리고 주머니에서 셀로판 봉투를 두 개 꺼내 나와 악마에게 하나씩 건넸다. 안에는 작은 젤리 조각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전에 나갔을 때 거 일부분인데 꽤 좋아. 극장에서 누가 죽거든.”
“근데 방금도 누구 죽은 거 아니야? 죽는 순간인 줄 알았어.”
“아냐, 죽는 느낌 안 들었어.”
“젤리 고마워.”
“그냥 극장이 아니고 대학 부속 3d관인데. 학생들이 처음에 극장만 점거했다가 본관하고 붙어 있던 데라서 점거선이 점점 넓어져가지고 본관을 다 먹거든. 나중에 경찰들이 헬기타고 출동해서 극장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다들 초비상이 됐는데 하필 누가 몰래 나갔다 들어와서........왜 나갔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나갔다 들어와서 경찰로 오인 받고 죽어. 그거는 죽는 부분이야.”

 

10시간 전

마침 갓파 같은 걸 껴안고 싶었기 때문에 적당히 축축한 갓파를 하나 불러내서 턱에 괴듯이 끌어안고 과일바구니 같은 걸 하나 시켜서 먹었다. 갓파는 내가 일부러 머리 위로 부슬부슬 흘려주는 잘게 썬 코코넛 같은 것들이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구니바닥이 드러나자 품속을 팔짝 뛰쳐나가 그대로 자기 머리뚜껑을 핥으며 종종걸음 쳐 가 버렸다. 갓파가 큰길 바깥쪽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지켜본 후 고개를 돌려 보니 간밤에 내린 비로 까맣게 번들거리는 도로 위를 악마가 어설픈 그림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같이 하우스 가장자리까지 걸어가 보자는 약속이었다. 
“너 진짜 갓파 좋아하네. 갓파 때문에 여기 남아 있는 거야?”
우리는 이번에 주키도무-온-키-닌-카의 로그를 따라 걷기로 했다. 이제까지 깨 봤던 로그들은 보통 차나 자전거를 이용해 짜여 있었고 개중에는 비행기를 한 번 타는 것도 있었는데 이번 건 그냥 걷는 게 주였다. 
“나는 사실 죽는 부분 같은 건 관심 없었는데 죽는 걸 줘서 아직 안 먹었거든. 나중에 다시 청설모 주려고.”
“내 거랑 이어질 거 같은데.”
달라는 소리였다. 나는 악마가 남이 죽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에 문득 화가 치밀어 거절했다. 악마가 멋쩍은 듯 빈 발부리께를 걷어찼다. 
“이 온키닌카 어쩌고는 아직 하우스에 사나? 왜 이런 걷는 코스를 만들었지.”
“너는 말을 좀 정리해서 해야 돼. 로그를 코스라고 하질 않나 갓파를 갓파들이라고 하지를 않나.”
“알아들어놓고 시비를.......코스 따라 가면 엄청 걸릴 거 같은데. 30시간쯤 되는 것 같고 온키닌카는 중간에 잠도 한 번 잤네.”
“몬키닌카. 몬키닌카라고 읽어야지. 번역이 이상하게 돼서 그렇지 원본은 몬키닌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나 전에 잠자다가 토하면서 일어났어.”
죽는 부분을 본다는 것은 곧 죽는 사람이 돼 보는 거였다. 나는 아직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고 앞으로도 해 볼 생각이 없었지만, 악마는 꽤 좋아했다. 하우스에서 이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종다리 로그하고 엄마 로그가 비슷했었나? 이거 보니까 엄마 로그 같기도 한데.”
“좀 달라 보이는데. 몬키닌카는 걸어가니까 아무래도 겹치기가 힘들지. 종다리는 마지막에 자전거 이렇게 늘어서있는 끝에 전화기 있었고. 엄마는 꽃밭 같은 게 먼저 간소하게 하나 있었고 공중전화박스 좍 늘어서있고 끝에 부스 없는 전화기 있었지. 아니야? 노인이 쫙 늘어서 있었나?”
“그건 아니었는데 가는 길에 노인들이 많았어.”
“좀 있다 로그북 새 거 나온다는데. 이거 끝나면 나도 로그북 써 보려고. 그때 청설모랑 같이 가기로 했어.”
“그래.”
“청설모 건드리지 말라거나 뭐 그런 소리 안 하네.”
“청설모 혀도 없고 뭐 딴 것도 거의 없는데 네가 해 봤자 뭘 하겠어. 설마 부수지야 않겠지.”
“혀가 없어?”
“다 없어. 너는 맨날 나보고 구식 구식 하면서 혀 없는 거에 그렇게 놀라냐. 목소리 말고 다 냅둔 거 보면 너도 뭔가 딱딱한 거야.”
“안 놀랐어. 혀가 왜 필요하냐?”
“청설모는 부서뜨려도 백업 있을걸.”
“근데 그러면 사담 파지 않을까.”
“아냐 걔는 안 파. 남들 다 떠나도 안 따라갈걸. 아무리 몸을 임시거처용 천막으로 여기는 것처럼 굴고 있어도”
“걔가? 아닌데. 너야말로 걔를 과대평가하는 것 아냐.”
“나야말로라니?”
“그거 안 따라가시는 게 좋아요.”
약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악마 목소리를 듣고 있던 시민이 슬슬 다가와 내가 들고 있던 로그북을 훔쳐보는가 싶더니 옆에서 끼어들었다. 알고 보니 주키도무-온-키-닌-카는 로그 전개도를 교묘하게 잘 그리는 걸로 유명한 사기꾼으로 그의 로그는 언뜻 보기에는 신선해 보이지만 막상 따라 걷다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코스라는 것을 깨닫게끔 작성돼 있다고 한다. 시민은 몬키닌카가 얼마나 악질인지를 잠시 설명하다가 부자연스럽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멀리서 악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름 머리를 쥐어짜 접근방법을 궁리해 낸 듯 했다. 어쩌면 로그 취미에 대해서는 유명한 이름만 몇 개 들어 본 문외한일지도 몰랐다. 악마는 성가시다는 듯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곧 정했다는 듯이 시민의 어깨를 탁 치고 먼저 길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시민은 뒤에서 허둥지둥 쫓아갔다. 남한테는 쉽게 구식 운운하면서 정작 자기는 저런 해묵은 제스처를 태연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갓파를 불러서 껴안고 가짜 로그라도 얼마간 따라 가 보자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몬키닌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시민에게 흥미가 솟았다. 이런 로그를 짜는 타입은 중간에 자기 집을 경유하게 만드는 장난을 쳐 놓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안고 가려고 불러낸 갓파가 주머니에 자꾸 손을 뻗었다.
“야.”
반사적으로 부여잡은 주머니가 홀쭉했다. 아까까지 잘 있던 젤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악마가 가져갔거나 아까의 시민이 소매치기였던 것 같았다. 제멋대로 약속을 깨 버린 악마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아까 사라진 둘을 쫓아가서 젤리를 뺏어 올지 그냥 로그를 따라 가 볼지 고민하다 아예 악마의 집으로 가서 뺏긴 젤리를 대신할 만한 뭔가를 가져와 주자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40시간 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파일을 무더기로 태우는 것 같은 맵싸한 냄새와 쌀국수 비슷한 자극적인 향기가 코끝에 훅 끼쳐왔다. 길 건너에선 학생들이 무리지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까진 맞네.”
“근데 냄새 난단 소린 없었잖아. 이게 뭐야. 오줌인가?”
“라면 같은데.”
“오줌에 면 삶으면 딱 이럴 것 같네.”
악마와 나는 엄마 로그를 따라온 참이었다.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 집적돼 있었다. 눈송이처럼 하늘에서, 사담 구멍에서 떨어져 하우스의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빛 한 점 반사하지 않는 검은 양산이 구태의연한 풍경 가운데 칙칙하게 돋보이고 있다. 로그의 끝에는 언제나 이런 검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검정으로 물든 전화기. 수없이 주차된 봉쇄차량들 사이에 섞여 있던 검정 승용차. 촘촘한 양산살 너머는 동시에 턱 아래 솟은 여드름을 긁적이는 사담자 3901명으로 북적이고, 줄 끊어진 연 같은 정신만이 용광로 같은 활기 위아래를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 너머는 길이라기보다 사다리에 가까울 것이고 햇빛은 그 꼭대기에서 눌어붙은 촛농처럼 굳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언제나 쉴 틈 없는 한켠에서는 어지러이 겹치고 분화하는 사담 굴의 기보가 바쁘게 작성되는 것이다. 악마는 내가 언제나 수식어를 헷갈린다고 구박하겠지.   
“이번에는 끝이 보인 것 같기도 하다.”
악마가 특유의 감상적인 어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가장자리일 뿐이다. 하우스는 사실상 끝없이 이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장자리에 다다라 위를 올려다볼 때마다 늘 이 끝없음에 유감을 표해야 할지 다행을 느껴야 할지 헷갈리곤 했다. 검정색이 검정색으로 보이는 것은 검정 자체가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우스의 가장자리에는 빛이 없었기 때문에 검정색으로 칠해진 물건은 그대로 검정색 구멍으로 보였다. 승용차 모양의 구멍, 양산 모양의 구멍이었다. 구멍이란 끝을 의미했다. 사담을 파고, 밖에 들어가 안에서 들으면 병아리나 쥐의 그것과 비슷하게 들리는 가늘고 순진한 목소리로 대화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병아리라는 시민도 어디 있을 텐데 그런 말은 좀.”
소금기 섞인 바람이 분다. 악마는 어느새 열 발자국 정도 멀어져 있다.  

나는 내 기억 속 어디에서 축적이 어긋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악마의 실종을 확인한 후, 나는 로그를 따라가 몬키닌카를 만났다. 예상대로 로그는 몬키닌카의 집을 경유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처소라고 해야 맞겠지만. 몬키닌카의 거처는 도저히 집이라고 부를 만한 상태가 못 됐다. 몬키닌카는 쭈글쭈글하고 언뜻 인심 좋아 뵈는 얼굴의 작달막한 사기꾼으로, 긴 머리를 깔끔하게 상투를 틀어 올려 묶고 있었다. 굼뜨게 움직이는 눈꺼풀은 바싹 말라비틀어져 물기를 짜고 내버려 둔 무화과 같았고 푸르스름한 홍채는 청포도를 잘라 박아놓은 것 같이 흐리멍덩했다. 몬키닌카가 미소를 짓자 얼굴 위를 온통 뒤덮은 백여 개의 씨앗이 함께 흐뭇하게 꿈틀거렸다. 왜 가짜 로그를 작성하는지를 묻자 몬키닌카는 한참의 침묵 끝에 끝이란 상대적이기 마련이라는, 틀에 박힌 옛날 소리를 했다. 나는 몬키닌카가 묵고 있던 묘하게 깔끔한 한 칸짜리 간단 움막을 나오면서 하우스 안에서 사기꾼이 발생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고 울먹였고, 몬키닌카는 의미심장한 조언을 했다. 창문 같은 문 사이로 겨우 몸을 빼내면서, 나는 실망해서 물어보지 않았으나 실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원내의 일점과 원외의 일점을 연결한 직선. 의 원문이 뭔지 아시나요?”
몬키닌카가 빙그레 웃었다. 자기가 왜 웃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머쓱한, 그야말로 노인네의 웃음이었다.
“이상한 가역반응. 옛날 시예요.”

임의의 반경의 원 (과거분사에 의한 통념)

원내의 일점과 원외의 일점을 연결한 직선

우리는 이것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현미경
그 밑에 있어서는 인공도 자연과 다름없이 현상되었다

“뒤에 더 있나요?”
“그건 모르겠네.” 몬키닌카는 금세 시큰둥해져 있었다.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것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 로그는 끝까지 가면 여기로 돌아오게 돼 있는데. 머리가 좋은가 봐.”
나는 청설모를 떠올리며 침울하게 부정했다. 
“외로워서 그러세요? 누가 안 와서?”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몬키닌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악마였다면 비웃었겠지만 몬키닌카의 웃음이 너무 솔직했기 때문에 나는 말문이 막혀 공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몬키닌카의 집은 하우스 안에서도 특별히 외진 곳에 있었다. 집 오른쪽으로는 산의 얕은 등성이가 초목의 분방함이 무색할 만큼 확실한 한 덩어리로 뭉그러지며 자리하고 있었고, 건설회사의 가벽이 맞은편을 황폐하게 닦아 놓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길고 긴 초라한 원경이 이어지다 소실되면서 공백 가운데를 흐린 한 점으로 메우고 있다.
“저는 가요.”  
검정색 물건은 없었다. 

“아!”
반쯤 갔을까, 몬키닌카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야, 기억이 났어요.”
앞의 두 마디에 기력을 다 소진한 모양인지 몬키닌카는 무릎을 짚고 구부정하게 서서 이쪽을 향해 무어라 악을 썼다. 나는 몬키닌카의 집 쪽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정오의 태양빛 아래 이상할 정도로 시커멓게 그늘진 몬키닌카의 모습은 발아래 붙은 이상한 모양의 그림자와 합쳐져 공중에 불현듯 떠오른 까만 비석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검은 동굴인 몬키닌카의 입은 몸 위에 드리운 어둠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분명치 않은 발음이 볼륨만을 높이며 뚜렷해지고 있었다. 나는 허공에 남은 시민 모양의 흉터 같은 몬키닌카를 뒤로하고 조용히 진저리를 치면서 구역을 빠져나왔다. 
멀리서 갓파 한 마리가 흙바닥을 구르며 사탕 단지와 씨름하고 있었다. 단지 바닥에 무언가 알록달록한 구슬이 제법 남아 갓파가 몸을 트는 방향대로 절그럭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변비에 시달려 누렇게 뜬 하늘이 그 위를 초라하게 장식하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하우스 안쪽은 아름답게 시름시름 여위어 가는 것과는 달랐다.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풍경의 앙상함이 먼지 쌓인 하우스 구석구석을 보완해 주진 못했다. 악마는 균이 부족한 하우스에 넌더리가 난 것일까. 길가의 토사물도 담벼락의 오줌 자국도 시원치 않은 이곳에서 포킹을 계속하면서, 로그를 추적하면서 굴 안쪽의 천장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떨어져 내릴 석면 가루, 화산재, 어쩌면 흙모래를 그리워하게 된 것일까. 밤에도 성마르게 출렁이는 마천루의 무수한 창문들, 경적과 기적 소리, 분과 반짝이가 기름에 뒤섞여 주유소 앞 물웅덩이처럼 빛나는 화장한 얼굴들에서 악마는 무엇을 찾아낸 걸까.   

무딘 면도날로 구름의 힘줄을 끊으며 바람이 한 차례 세차게 불었다. 갓파의 가볍고 촉촉한 몸뚱이가 사탕 단지와 함께 순간 붕 떠올랐다가 가까스로 반쯤 부서진 담벼락 위에 착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실려올라간 갓파는 일순 동요하는가 싶더니 곧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담벼락 위에 그대로 죽치고 앉아 다시 사탕 단지 뒤지기에 몰두했다. 딱딱한 칼라가 바람에 나부껴 가방끈 지른 어깨를 강하게 두드리고 있다. 나는 그 부르는 감촉에 무심코 그러나 기대 없이 뒤돈다.
  
9시간 전

시민들이 일제히 한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라도 죽었나 싶어 가까이 가 보니 아까 악마와 동행했던 시민이 팔을 횃불처럼 치켜들고 뭔가를 조잘조잘 떠들고 있다. 과거에서 전해져 오는 것 같은 조잡한 목소리가 튀었다.
“크흠, 다시 하겠습니다. 청설모 그리고 여우에게. 청설모 혹은 여우 계십니까? 아 마침 저기 계시네요. 전에 뵈었죠. 여우 왔니? 젤리 찾아가.”
시민은 성가시다는 듯 대답할 틈도 주지 않더니 의무적이면서도 불필요하게 확신에 찬 태도로 무언가 읊기 시작했다. 
“그 학생이 죽는 순간에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냐면, 정확히는 죽기 직전인데. 아무튼 학생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정말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어. 지금 위에서 진 치고 있는 인간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은 얼마나 복잡하고 이상한 사람인가 하고. 저 사이에 있어도 뭔가 부족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훌쩍 극장 밖으로 나와 버렸는데 나오고 나니까 또 들어가고 싶어졌다. 나 말고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물론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숨어들어갔다가 딱 걸려서 변명도 제대로 할 틈 없이 죽게 되지만, 죽기 불과 몇 초 전까지도 학생은 골똘히 그 생각에 빠져 있었고, 심지어는 일말의 만족감마저 느끼고 있었어. 그리고 그런 만족감은 하우스 안에는 없는 거더라고. 진짜 이상한 추구가 있었어........” 
나는 굳이 마저 듣지 않았다. 악마의 집 식탁 위에는 훔쳐간 젤리가 포장도 안 뜯긴 채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시민에게 목소리 조음 소스를 내 준 흔적이 남아 있다. 바깥에서 시민이 마지막 말을 위해 목청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은 모르겠어. 누구 시 같은데. 학생은 죽기 전에 이걸 곱씹으면서 왠진 몰라도 충만감을 느끼고 있었어.”

“원내의 일점과 원외의 일점을 연결한 직선.”

이번에는 소스를 적당히 넣은 모양이었다. 시민의 목소리는 악마의 그것에 비하면 과거의 소리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수십마리의 벌이 날개를 비비는 듯한, 불편할 정도로 정력적인 목소리였다.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파김치가 된 키 큰 그림자 하나가 벽 너머로 사라졌다.

4시간 전

곤드레만드레 취한 갓파가 검게 죽은 은행 더미를 헤집고 있다가 사람 발소리를 듣고 빈 접시를 핥으며 뛰어왔다. 거리낌 없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뺨을 더듬는 갓파의 손바닥에 밴 은행 냄새가 코 안으로 확 풍겨 들어왔다. 
“코앞에서!”
나는 당황한 나머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한 마디를 무심코 그대로 내뱉었다.
“콧속에서.......”

냄새에서.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커다란 구름 밑을 걸어오는, 흔들리는 납작한 빵 봉지 속, 그리고 길가에 떨어져 뭉개진 모든 은행 열매 안에서,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들은 중 가장 먼 과거에서 보내진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뿌끼무!”      

4시간 후

갓파의 목과 몸이 분리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몸은 여전히 꽉 붙들려 있었지만 머리는 이미 내 머리카락을 전부 뜯어먹고 귀걸이 네 쌍과 티셔츠, 팬티까지 먹어치운 다음 예각이라곤 없는 애처로운 이빨로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나는 얼른 맑아지지 않는 머리로 반지를 빼서 갓파 입에 넣고 후회인지 단순한 현기증인지 모를 심심한 감각과 함께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감정이 가슴 가운데로 모이다가도 맥없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갓파가 먹다 흘린 실오라기며 천조각을 배 위에서 털어내고 목욕 가운을 찾아 무지근한 몸 위에 걸쳤다. 그렇다, 인생을 노래하는 것 같다가도 결국 사랑 타령으로 끝나고 마는 유행가들처럼.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몬키닌카의 가짜 로그에 표시된 호텔을 나섰다. 청설모를 찾아가 포킹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죽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병상에서 구토하는 장면을 보게 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상관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하지만 사담 안에 들어간 악마의 순간은 앞으로 모두 한 번 뿐, 죽음이라고 해도 어차피 한 번 뿐일 텐데. 그 정도라면 어울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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