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김이 가장 먼저 상실한 것은 귓바퀴였다. 그는 한 평 남짓한 감방 안에서 눈을 떴다. 직사각형의 감방에는 침대와 좌식책상, 세면대, 변기가 각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양쪽 귀 부분에 뭉근한 아픔을 느꼈다. 미열도 나는 것 같았다. 귀에 손을 가져갔다. 귓바퀴가 만져지지 않았다. 그제야 김은 자신에게 주어진 첫 번째 형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마취기운이 남아있는 그는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세면대 위에 감방과 어울리지 않는 거울이 붙어있었다. 곰팡이가 낀 변기나 세면대와 달리 거울은 거울 공장에서 갓 나온 것처럼 지문하나 없이 매끈했다. 여기에 거울이 있었나. 김은 기억해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질적인 거울이 있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이 형집행실에서 김의 귓바퀴를 제거하는 동안 간수가 빈 감방에 들어와 붙여놓았는지도 모른다. 귀가 사라져버린 얼굴을 더욱 잘 보라는 의미로.

 

김은 거울을 보았다. 귓바퀴가 없는 남자가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삭발한 머리와 사라진 귓바퀴 때문에 길쭉한 타원형의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보였다. 어렸을 때 보던 드라마 시리즈의 외계인과 비슷한 것도 같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틀어봤다. 동굴처럼 시커먼 귓구멍만 있었다. 귓바퀴가 사라진 자리의 피부는 항아리의 손잡이가 말끔히 떨어져나간 것처럼 붉고 반질반질했다.

 

김의 입에서 흐, 같기도 허, 같기도 한 소리가 나왔다. 의도치 않게 소리를 낸 김의 뒤통수가 싸늘하게 식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똑똑히 허, 라고 발음해봤다.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성대와 가슴에 미미한 진동이 전해질 뿐이었다. 김은 자신이 청력도 상실했음을, 사라진 것은 귓바퀴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김은 소리에 민감했다. 그렇다고 귀가 밝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듣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변에선 그에게 귀가 어둡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가 민감하게 느끼는 소리는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소리였다. 잠자리에 든 아내의 발이 이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 생수를 병째로 마시는 아내의 입술과 생수병 사이에서 나는 새소리, 깊게 잠든 아내의 고른 숨소리. 그는 더 이상 그런 소리들을 들을 수 없었다. 단지 청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4개월 전 김은 아내를 죽였다. 그리고 4단계의 상실형을 선고받았다. 상실형은 죄인의 신체 일부를 상실하도록 하는 형벌로, 살인이나 강간 등 중죄를 저지른 피고에게 언도되었다. 상실형은 죄질에 따라 1에서 10단계로 구형되었다. 살인을 저지른 김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도에서 네 가지를 잃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에는 소리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소리가 사라지자, 시간마저 멈춘 것 같았다. 창문도 벽시계도 없는 감방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해주는 건 정시마다 복도를 순찰하는 간수의 구둣발소리뿐이었다. 불안한 고요 속에서 김은 벽에 새겨진 얼룩과 미세한 실금을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이 우주 한가운데 떠다니는 우주미아라는 상상을 했다.

 

 

 

9시, 소등이 되었다. 고요가 어둠을 극대화시키자, 김은 시력마저 잃은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공포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둠에 적응된 동공이 그의 손가락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구별하고 나서야 그는 평정을 되찾고 침대에 누웠다.

 

마흔셋의 나이, 김은 상실에 대해 적응해간다고 믿었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갖고 있던 것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검은 머리와 탄력 있는 피부를 상실했고, 건강한 치아를 상실했다. 무엇을 먹어도 예전처럼 맛있지 않았고, 어떤 영화를 봐도 웃거나 울지 않았다. 그는 나날이 쇠락해가는 육체와 정신을 의연히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자각도 잃어본 적이 없는 자의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귀와 귀의 기능마저 잃어버린 지금, 흰머리나 주름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정말로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공포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그는 일부러 몸을 뒤척이며 삐걱거리는 침대의 소음을 진동으로 느꼈다. 그렇게라도 남아있는 감각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좁은 침대 위에서 죽어가는 뱀장어처럼 꿈틀거리고 있을 때 끄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뻣뻣이 펴고 귀를 기울였다. 끄르륵, 손톱 끝으로 신경 줄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소리였지만 그는 불쾌한 소음마저 반가웠다.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니, 그들이 실수를 저지른 게 틀림없었다.

 

김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시 세상이 고요해졌다. 하, 목소리를 내봤다. 하, 하, 하. 어떤 실수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자각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리는 외부가 아니라 그의 내부,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뇌세포 중 어딘가에서 재생된 것이었다. 그는 침대 밑으로 떨어지듯 내려왔다. 몇 초간의 희망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는 절규했다.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배고픈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감방에 불이 켜졌다. 김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간수가 들어왔다. 간수는 태블릿 화면을 김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액정 위에 마구 갈겨쓴 두 글자가 보였다. 초등학생이 칠판 한 쪽에 써놓은 낙서 같았다.

 

정숙.

 

간수의 오른손은 허리춤에 찬 경봉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김은 입을 다물었다. 그를 한동안 내려다보던 간수는 감방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불이 꺼졌고, 어둠이 찾아왔고, 김은 침대로 돌아갔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자 또다시 머릿속에서 끄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은 그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아내가 낸 마지막 소리였다. 그가 아내의 배를 칼로 찌르던 순간, 아내의 입에서는 비명이 아닌 끄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아내라면, 그것보다는 우아한 소리를 냈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배에 꽂힌 칼을 뽑아 한 번 더 찔렀다. 그러자 꿀럭, 하고 피를 토했다. 막힌 변기를 뚫을 때 나는 소리처럼 탁했다. 바닥에 쓰러진 아내는 그의 팔을 움켜쥐려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그의 팔에는 기다란 손톱자국이 났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뒤틀 때마다 칼에 찔린 상처는 점점 벌어져 급기야 분홍색 내장이 비어져 나왔다.

 

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귓바퀴가 없다는 것을 다시 실감해야 했다.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아내를 죽이지 않았을 텐데.

 

비웃음 소리, 신음, 속삭임. 그는 끊임없이 재생되는 기억의 소리들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백색 소음이 없는 세상에서 오직 그를 괴롭히는 기억의 소리들과 더불어 살아야 했다.

 

 

 

아내를 죽이기 전까지는 김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만원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을 했고, 비나 눈이 오는 날이면 차를 끌고 나가 거리의 교통체증을 가중시켰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는 자신이 밀랍인형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밀랍인형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

 

점심 12시가 되면 구내식당에 내려가 회사에서 지급받은 식권으로 영양사가 정해준 두 가지 식단 중에 하나를 골라먹었다. 어느 쪽을 골라도 맛이 없었기 때문에, 김은 항상 A메뉴를 택했다. 그리고 식판에 식어빠진 미트볼을 담을 때면 영양사의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 미트볼을 쑤셔 넣고 싶다는 상상을 하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저녁 6시가 되면 일이 없는 날은 퇴근할 타이밍을 잡기 위해 눈치를 봤고, 일이 있는 날은 도리어 편안한 마음으로 야근을 했다. 하루는 퇴근시간에 맞춰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를 예매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팀장이 퇴근할 듯 말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마음을 졸이며 눈알을 굴리던 그는 눈치를 보는 비굴한 눈을 뽑아 책상 위에 놓고 퇴근해버리고 싶었다. 눈두덩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리던 그는 그러나, 눈을 뽑으면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는 평범하다는 범주 안에 무리 없이 속했지만, 머릿속을 뜯어보면 유별난 면이 적지 않다는 점이 그를 더욱 평범하게 했다.

 

 

 

오전 6시, 감방 문이 열리고 간수가 들어왔다.

 

다음 형을 집행하겠습니다.

 

간수가 태블릿 화면을 김에게 보여주었다. 길쭉하고 시원스런 글씨체였다. 확연히 다른 글씨체를 보고 나서야 어젯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어깨가 넓은 남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김은 그들이 첫 번째 형을 집행할 때 왔었던 남자들인지 궁금했다. 제복을 입은 그들은 전부 비슷하게 보였다. 간수가 앞장서 나가자, 남자들이 그의 양쪽에서 단단히 팔짱을 끼었다. 그들보다 체구가 작은 김은 바닥에서 들리다시피 한 상태로 걸어야 했다. 그들은 감방이 마주보고 있는 기다란 복도를 지나 지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김의 겨드랑이를 움켜쥔 그들의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 여긴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주던가 하지.

 

김의 왼쪽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 안전상의 이유랄까.

 

김의 오른쪽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 엘리베이터 안에 멈춰 있는 동안 발광하는 것들이 많거든.

 

오른쪽의 남자가 덧붙였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수 없는 김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거라고 짐작했다. 앞서 계단을 내려가던 간수가 멈춰 서서 미간을 찡그린 얼굴로 그들을 돌아봤다. 김의 왼쪽에 있던 남자가 움찔했다.

 

열네 개의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참을 지나 다시 열 네 개의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났다.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로 독한 냄새였지만 구석구석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울 수는 없었다. 지하에는 여섯 개의 형집행실이 있었는데, 하나의 방을 제외하고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큰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불이 켜진 두 번째 방에는 젊은 여자가 묶여있었다. 그들은 여자의 무릎 아랫부분에 주황색 손잡이가 달린 전기톱을 가져다댔다. 얼굴을 덮은 투명 마스크와 녹색 수술복에 피가 뿌려졌고, 순식간에 여자의 가느다란 정강이가 절단되었다. 김은 그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안내에 따라 수술대에 누웠다. 등에 닿는 철제 침대의 차가운 감촉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손목과 발목이 금속 벨트로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기다란 주사바늘이 김의 혈관을 찔렀고, 혈관을 따라 서늘한 주사액이 흘러들어갔다.

 

 

 

마취에서 깨어난 김은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안구가 적출되고 눈꺼풀이 꿰매져 눈이 떠지지 않는다면? 설령 떠진다고 해도 눈꺼풀 밑에 탁구공만한 빈공간이 있을 뿐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눈꺼풀 밑에 서늘한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호흡이 가빠졌고 역한 항생제 냄새가 뱃속에서 올라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갈며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회색 천장이 들어왔다. 시력은 보존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것은 코일까? 거울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동시에 손을 코로 가져갔다. 코는 제자리에 있었다. 사라진 것은 손가락이었다. 김은 코를 잡으려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엄지손가락은 밑동까지 잘려나갔고, 나머지 손가락들은 한마디만 남아있었다. 어렸을 적 김이 찰흙으로 만든 원숭이의 손 같았다. 그는 손가락을 안으로 굽혀 주먹을 쥐려했다. 한마디밖에 없는 손은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대신 네 개의 절단된 손마디가 김을 가리키고 있었다. 귀가 사라진 자리처럼 반들반들한 절단면을 들여다보던 그에게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아내를 교살했다. 그때는 온전했던 손으로 아내의 목을 졸랐다. 이제는 없는 손가락 끝에 아내의 부드러운 목의 감촉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 2분 57초면 된대.

 

아내가 말했다.

 

- 숨이 끊어지는 시간 말이야.

 

김은 침묵했다.

 

- 해줄 수 있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그날 아내는 유난히 집요했다.

 

- 2분 57초면 우리가 좋아하던 노래보다 짧은 시간이야. 그 노래, 기억나?

 

그의 앞머리를 넘겨주는 아내의 손목에는 언제나처럼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는 그 아래 그녀의 우울함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붕대 끝에서 풀려나온 실오라기가 그의 이마를 간질였다.

 

- 기억나.

 

그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으므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노인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음수를 세며 거실 한 구석에 있는 턴테이블로 향했다. 그들 부부에게는 아날로그 제품을 사용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소파에서 턴테이블까지는 정확히 여덟 걸음 반이었다. 장식장에서 레코드판을 꺼내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세 번째 곡에 바늘을 올리자 기분 좋은 잡음이 섞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다시 걸음을 세며 돌아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걸음째 내딛는데 아내가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었다. 알몸이 된 아내는 소파에 반듯이 누워 김을 바라봤다. 그는 나머지 걸음을 옮기고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골반 위에 올라탔다. 반사적으로 성기가 단단해졌다. 부적절한 신체 반응이 당혹스럽고 부끄러웠다. 아내도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평온한 얼굴로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시작해도 돼.

 

아내가 말했다. 평소 김과 섹스를 할 때와 똑같은 어조였다. 그는 그녀의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도 눈을 감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괴로워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면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갈 것 같아서였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나서도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팔뚝에 꽂힌 채 떨고 있었다. 2분 57초라는 그녀의 말은 틀렸다. 그는 아내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힘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티셔츠를 벗어 그녀의 얼굴 위에 덮어 씌웠다. 죽은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스피커에서 다섯 번째 곡이 흘러나왔다. 아내는 다섯 번째 곡을 싫어해 언제나 건너뛰곤 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턴테이블로 가서 레코드판 위의 바늘을 떼어놓다가 비로소 피가 흐르는 팔을 보았다. 그녀의 손톱이 박혀있던 곳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팔뚝. 칼에 찔린 아내가 내 팔을 잡으려다 할퀸 상처가 아니었나.

 

그의 기억이 중첩되었다. 피와 내장을 쏟아내며 죽어간 아내. 그의 티셔츠를 뒤집어 쓴 아내.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분노 때문인지, 그녀를 위해서였는지 아내를 죽인 이유조차 불분명했다.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김은 아내의 목숨이 두 개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2시, 배식구가 열리고 식판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섯 개의 식판 구멍에는 각각 밥과 미역국, 김치, 소시지부침, 콩나물무침이 있었다. 분홍색 소시지를 보자 교도소에 납품하는 소시지 공장에 상실형으로 절단된 신체를 보낸다는 도시괴담이 떠올랐다. 그의 잘라진 손가락들은 아직 집행실의 쓰레기통에 있을까.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손가락은 다시 돋아나지 않을 테고, 그는 배가 고팠다. 식판 옆의 숟가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끝에 포크가 달린 숟가락이었다. 숟가락을 쥐려했지만, 한마디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는 무리였다. 왼손까지 동원해서 손바닥 안쪽에 깊숙이 밀어 넣고 손바닥을 접었다. 그렇지만 손가락 없이 고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숟가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오랑우탄처럼 팔을 움직여 국을 펐다. 숟가락이 입에 닿기도 전에 미역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미간이 좁혀지고 뒷목에 땀이 났지만 참을성 있게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밥을 펐다. 숟가락을 입에 넣기 위해 팔의 각도가 뒤틀어졌고 목은 왼쪽으로 잔뜩 기울여야 했다. 겨우 입을 가져가는데 숟가락이 떨어지며 밥알이 바닥에 흩어졌다. 손이 없는 그는, 더 이상 도구의 인간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왼손으로 식판을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국과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짧은 손가락이 숟가락 끝에 달린 짧은 포크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입안의 음식물을 다 씹기도 전에 소시지와 콩나물무침을 욱여넣었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물이 질금질금 흘러나왔다.

 

김은 빈 식판을 세면대로 가져갔다. 고춧가루와 밥알이 붙어있는 식판을 씻으며 감방에서 나가면 손가락 의수부터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자신의 생각을 비웃었다. 아내의 목숨을 빼앗은 주제에 어떻게든 허기를 채워보겠다고 버둥거린 자신을 비웃었다.

 

 

 

교도소에서의 시간은 비선형적으로 흘렀다. 사고의 흐름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뒤틀리거나 엉겨 붙었다. 김은 자신이 실험용 생쥐와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고 다니는 생쥐처럼 그의 사고는 죄와 벌 사이를 소득 없이 헤집고 다녔다. 아직도 두 단계의 형벌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형의 말대로 능력 있는 변호인을 썼어야 했다. 형은 김이 구치소에 있을 때 몇 번이나 찾아왔었다. 비록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증거나 목격자가 없기 때문에 변론만 잘 한다면 2단계의 형량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국선변호인으로 만족했다. 이미 소중한 아내를 잃었으니, 무엇을 잃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감상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신체의 일부를 잃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해당 기관의 기능을 잃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한 인간의 내면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김은 간과하고 있었다. 차라리 죽음이 축복의 형벌이 될 수 있음을, 사형 제도를 용인했던 백 년 전의 사람들이야말로 자비로웠음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김은 아랫배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헤집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세 번째 마취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반신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거라 생각했다. 불타는 것 같은 아랫배와 달리 하반신에서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다리가 말끔히 잘려나간 모습을 상상하면서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집행실에서 돌아와 마취에서 깨어나는, 눈을 떠야 하는 순간의 공포가 점점 더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조심스레 허벅지로 손을 가져가봤다. 그는 죄수복 아래로 단단한 허벅지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하반신의 마취가 풀리지 않았는지 남의 살을 만지는 기분이었지만 분명히 그의 허벅지였다. 허벅지까지 남아있음을 확인한 그는 종아리가 잘려나가던 여자를 떠올리며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예측은 또 빗나갔다. 헐렁한 죄수복 바짓단 아래로 건재한 발목과 발이 보였다. 아랫배의 통증, 멀쩡한 하반신...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죄수복 바지를 아래로 내렸다.

 

김이 세 번째로 상실한 것은, 그의 음경이었다. 축 처진 고환 위에 붙어있는 음경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볼품없는 살덩어리가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요도에는 빨대처럼 생긴 금속관이 꽂혀 있었다. 그는 바지도 추켜올리지 않은 채 휘청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거세라니. 감방에 갇힌 후 사라질 수 있는 모든 부위를 한 번쯤은 생각해봤지만 거세를 당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성기도 그저 신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거세라고 표현하는 것도 적절치 않았다. 그들은 고환을 남겨두었다. 고환을 남겨두고 음경을 자른 것은 청력을 상실시키고 귓바퀴까지 제거한 것, 손가락을 한 마디씩만 남겨놓은 것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 형벌에서는 인간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래서 형벌이기보다는 어설프게 짜인 부조리극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아랫배에 격통이 점차 옅어지고, 하반신의 감각이 돌아올 즈음 김은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요의를 느낀 것이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봤지만 결국 지는 쪽은 정해져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바지가 흘러내려 발목에 걸렸다. 그는 바지를 도로 입지도 그렇다고 벗지도 않은 채 변기 앞으로 갔다. 불완전한 성기를 불완전한 손가락으로 떠받쳤다. 터질 것 같은 방광의 느낌을 무시하듯 오줌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아랫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끔거리더니 거의 포기하려는데 쥐어짜듯 관 끝으로 오줌 몇 방울이 찔끔거리며 나오기 시작했다. 피가 섞인 오줌이었다. 가는 오줌줄기는 변기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려 바지를 적셨다. 간수를 불러 바지를 새로 달라고 요청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추어올렸다. 불완전한 육체에 온전한 굴욕감이 파고들었다. 침대로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변기 옆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런 식으로 내면이 몰락한 인간은 절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는 확신했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자극했다. 오줌이 마르는 냄새였다. 그런데 그 불쾌한 지린내가 기억을 자극했다. 고양이 화장실 냄새와 비슷해서였다. 일주일에 한번 고양이 화장실의 모래를 갈아주는 것은 김의 몫이었다. 고양이 이름은... 까미였다. 검은 고양이라서 아내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래놓고 막상 고양이를 부를 때는 까뮈라고 발음했다. 그녀가 고양이를 부를 때마다 김은 뫼르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가 떠올린 장면 속의 고양이는 검정색이 아니라 주홍색이었다. 아니, 황금색이었다. 고양이는 불타고 있었다. 온몸에 불이 붙은 고양이는 목청이 찢어져라 울어대며 집안을 뛰어다녔다. 방석에 불이 붙고 그 불은 곧 거실 바닥의 러그에, 아내가 아끼던 원목 테이블에 옮겨 붙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은 그가 막 퇴근해서 현관을 열었을 때였다. 그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구두를 신은 채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반벌거숭이 상태의 남자가 엎드려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아내는 신음을 흘리며 버둥대고 있었다. 김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남자가 아내와 정사를 벌이고 있다고 착각해서였다. 그가 그런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지 않았다면 아내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아내의 목을 조르는 중이었다. 위아래로 흔들리던 팔이 침대 밑으로 힘없이 떨어지고 나서야 김은 남자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김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죽은 아내 위에서 남자와 김이 엉키고 겹쳐졌다. 김이 남자의 얼굴을 쥐어뜯었다. 김의 손을 떼어내려 허우적거리던 남자가 협탁 위의 주석잔을 들어 김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김은 정신을 잃었다.

 

김은 자신의 뒤통수에 손을 가져갔다. 과연 그 자리에는 세로로 찢어진 흉터가 만져졌다. 머리카락이 올라오는 다른 부위와 달리 볼록하고 반질거리는 흉터를 쓰다듬자 찢어진 두피에 엉겨 붙었던 축축하고 끈끈한 머리카락의 느낌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사이렌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는 유령처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김이 죄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와 손가락, 성기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 교도관! 교도관!

 

그는 간수를 불렀다. 살고 싶다는 욕망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누구에게든 인정받고 싶었다.

 

- 교도관! 교도관!

 

목구멍과 입안에 침이 다 말라 목소리가 갈라질 때까지 불렀지만 간수는 오지 않았다. 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책상을 힘껏 밟았다. 플라스틱 책상은 비스킷처럼 쉽게 부서졌다. 여전히 간수는 오지 않았다. 그는 감시카메라를 노려보고 세면대 앞으로 갔다. 거울을 깰 생각이었다. 주먹으로 힘껏 쳐주고 싶었지만, 주먹을 쥘 수가 없었기에 손바닥 아래쪽으로 힘껏 쳤다. 거울은 거미줄처럼 금이 가더니, 한 번 더 치자 구슬처럼 잘게 부서져 내렸다.

 

김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떨어진 거울 조각을 뭉툭한 손끝으로 헤집어 가장 뾰족한 조각을 찾아냈다. 자해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한다면 간수도 두고 볼 수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잘린 손가락으로는 거울 조각을 집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바닥에 떨어진 거울 조각을 혀로 핥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작은 삼각형을 입안에서 굴려 혀를 찌르게 했다. 뜨끔, 하는 통증과 함께 입안에 잠깐 동안 피맛이 번졌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스스로 혀를 잘라낼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강인함은 김에게 해당되는 형용사가 아니었다. 그는 강인하지 못함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고통 받아야 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수술이 두려워 뱃속에 묵직한 통증을 참아가며 양성종양을 키우는 환자처럼,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홀로 의심을 키웠다. 곪아 터진 진실이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김은 죄수복을 벗고 거울 조각 위에 누웠다. 바닥에 등을 누르는 기분으로 힘을 주자 유리가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지근한 피가 굼실거리며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간수는 오지 않았다.

 

 

 

불이 꺼져있으니 아직은 밤이었다. 김은 바닥에 누워 불이 켜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서 아침이 와서 자신의 오염되지 않은 기억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감방의 불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침이었다. 간수가 김의 방에 찾아왔다. 밤사이 교대를 했는지, 이번에는 글씨를 휘갈겨 쓰는 쪽이었다. 간수는 크로키를 그리듯 태블릿 위에 여덟 개의 글자를 적었다.

 

- 당신을 석방합니다.

 

석방이라니, 김은 고개를 저었다. 행정적인 착오가 있는 것 같았다.

 

- 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저한테는 아직 한 단계의 형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제 아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김은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간수는 입 꼬리를 단정하게 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태블릿 화면 위에서 다시 펜을 움직였다.

 

- 복장을 착용하십시오. 잠시 후 다시 오겠습니다.

 

김의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가 무언가를 덧붙이기도 전에 간수가 밖으로 나가고 감방 문이 닫혔다. 어쨌든 다시 온다고 했으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간수는 두 명의 남자를 데리고 왔다. 간수에게 말할 틈도 없이 남자들이 방에서 김을 끌고 나갔다. 한쪽은 키가 크고 한쪽은 키가 작아 그는 절름발이처럼 걸어야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형집행실이 있는 지하였다. 설마, 네 번째 형벌을 집행하려는 것인가? 조금 전 김의 말로 인해 자신들의 실수만을 알아차리고, 정작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들어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 저는 죄가 없어요. 저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구요!

 

김은 계단을 내려가지 않으려 버텨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를 지하로 데려가 유리창이 없는 맨 안쪽의 방에 집어넣었다. 방에는 수술대와 수술 도구 대신 펜과 노란색 노트가 놓인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있었고, 천장 네 귀퉁이에는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마치 취조실 같은 모양이었다. 형집행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김은 안도했다. 여기서라면 그의 얘기를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키 큰 남자가 김을 의자에 앉히고 양손에 각각 수갑을 걸어 의자 손잡이에 채웠다.

 

그들이 나가자 흰 가운을 입은 초로의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손으로 가운을 쓸어내리며 그의 앞에 앉았다. 여자에게는 입술이 없었다. 그래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자는 펜을 들고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글을 쓰는 도중에도 왼손에 쥔 손수건으로 간간히 흐르는 침을 닦아냈다. 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필기를 마친 여자가 노트의 방향을 틀어 그에게 내밀었다.

 

- 당신이 첫 번째로 상실한 것은, 당신의 해마입니다. 해마의 상실은 기억의 저장 및 생성 능력 저하, 기억상실, 기억의 혼란 등을 초래합니다.

 

- 그럴 리가 없어요. 전 그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전 아내를 죽이지 않았어요.

 

김의 말에 여자가 웃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뜬 채 여태껏 인중으로 감추고 있던 벌건 잇몸을 다 드러내고 웃었다. 치아가 쉰여섯 개는 될법한 웃음이었다. 여자는 이내 표정을 굳히고 노트에 새로운 문장을 써내려갔다.

 

- 맞습니다. 당신은 아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 그렇다면, 저는 왜 형벌을 받은 겁니까.

 

김의 발음은 여전히 부정확했지만,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 당신은 아내의 내연남 집에 찾아가 그를 칼로 찌르고, 그의 부인을 교살하고, 그들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방에서 자던 두 살배기 아이도 불에 타 숨졌지요.

 

- 그럼 아내, 제 아내는 살아있습니까?

 

- 당신의 아내는 자살했습니다.

 

- 그럴 리 없습니다. 아내는 그놈이 죽였어요. 거짓말, 전부 거짓말이야!

 

김은 여자를 물어뜯을 것처럼 상체를 테이블로 기울이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는 수갑에 묶인 짐승일 뿐이었다. 여자는 무표정인지 비웃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손수건으로 아랫입술을 훑고 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나감과 동시에 남자 두 명이 다시 들어왔다. 남자들이 김을 끌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김은 젖은 걸레처럼 그들에게 끌려갔다. 1층으로 올라와 일곱 개의 문을 지나자 입출소실이 나왔다. 입출소실의 책상 위에는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가 있었고, 그 안에는 김이 구속될 당시 입고 있던 옷과 휴대폰이 담겨 있었다. 구석의 탈의실에서 죄수복을 갈아입은 김은 쫓겨나듯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 빛이라고는 형광등 밖에 없는 곳에 갇혀있다 갑자기 태양 아래 노출되니 현기증이 났다. 비틀거리며 몇 걸음 걷다가 이마에 난 땀을 닦으려 멈춰 섰다. 휴지쪼가리라도 있을까 해서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휴지는 없고 구겨진 쪽지가 들어 있었다. 쪽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쪼그리고 앉아 보니 그의 필체로 써진 누군가의 주소였다. 자신의 집 주소를 적었을 리는 없으니 입술 없는 여자의 말대로 내연남의 집 주소일 가능성이 높았다.

 

여자의 말이 사실인가? 나는 아내의 내연남 뿐만 아니라 죄 없는 그의 부인과 아이를 죽인 살인귀인가? 정말 그런가?

 

김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나지도 않는 범행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는 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한순간에 가해자에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내의 죽음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김으로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하기로 했다. 간신히 주머니에서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그의 휴대폰에는 주소록이 말끔히 삭제되어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형의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과연 그에게 형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뜨거운 햇살이 그의 정수리를 달궜다. 그는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집에 가서 더운물로 샤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이 어딘지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어지러웠다. 세상이 그를 중심에 놓고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기분이었다. 구역질이 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고요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디든 가야했다. 발에 달라붙을 듯 짧아진 그림자가 비척거리는 그의 뒤를 침착하게 따라갔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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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너울 18.08.20 01:41 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해마를 잘라냈다면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선행성 기억상실증이 걸릴 테고, 오히려 과거 기억은 남아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죄인을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태로 몰아넣어 아무 것도 할수 없는 잉여인력을 만드는 형벌이 생길까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만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특히 하나씩 사라지는 기관들에 대한 자각의 묘사가 재미있었습니다.

  • 심너울님께
    No Profile
    글쓴이 모르타 18.09.15 17:11 댓글

    부족한 점이 많은 글,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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