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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와 시추기와 떠나간 사람

 

 

 세리는 시추기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우두두두. 땅에 난 구멍은 계단을 밟으며 아래로, 아래로 넓혀진다. 시추기에게 속한 공기는 부피를 늘린다. 시추기의 영토가 세리의 영토를 뚫고 훑는다. 벗긴다. 세리의 땅은 잡아먹히는 와중에 떨리는 공기를 온몸으로 삼킨다. 줄의 끝이자 추의 반대편에서 수평운동으로 각을 재고, 시추기는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시추기가 발붙인 세리의 땅이 흔들릴 때 시추기의 머리는 중력으로 인해 축 늘어져 있다. 세리와 시추기 사이의 간격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관성을 가지고 도미노 판을 벌인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원형의 도미노이다.

 시간이 앞을 향해 흐르기만 할 경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은 기대감을 수반하고 두려움 속에 환희는 깃들만하다. 기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암흑 물질들에게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미화에 미화를 거듭하며 산다.

 그러나 여기는 시간이 선형을 그리지 못하고 원형으로, 약속 시각을 가늠하기 위해 발명된 시침 시계 그 자체의 모양대로 스스로 휘젓고, 휘젓고, 휘저어서 영속된 삶을 모두가 동등하게 누리게 된다. 바야흐로 수명의 평등 사회다.

 

*

 

 시추기는 세리를 사랑한다. 세리 역시 시추기를 사랑한다. 그런데 시추기가 바라는 삶의 방향에 세리는 공존할 수 없다. 세리와 시추기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그들의 삶에 필요한 걸까? 시추기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청년들은 집을 지어야 한다. 기둥을 짊어지고 나서는 발걸음.”

 세리는 시추기의 옛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회상 속에서도 시추기는 늘 같은 가사를 입에 달고 청년으로서의 자기 의무를 노래했다. 이 노래의 제목은「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로 시추기의 대표곡이자 유일한 노래였다. 가사는 달랑 한 문장에 불과했으나, 언제였는지도 돌이켜 셈할 수 없는 과거부터 고심 끝에 걸러 내어진 정수라고 세리는 떠나간 사람에게서 전해 들었다. 세리 눈앞의 시추기와 세리 머릿속의 시추기 사이의 차이를 찾자면 머릿속에선 그의 곁에 떠나간 사람이 자리한다는 점이었다.

 세리의 어머니는 스무 살이 되던 해 20년간의 삶을 빠짐없이 떠올리기 시작하여 회상이 종료되었을 때는 중년에 접어들고 말았다. 세리는 결코 어머니처럼 회상에 영생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욕조를 떠났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되던 해 빚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세리가 가진 강점은 내적 자질밖에는 없었다. 자질이란 무슨 말인가 하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밝다는 거다. 가능성이란 무슨 말인가 하면, 그녀가 당장의 수입만으로는 도저히 가지지 못할 부의 효과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지속할 방법을 찾아내는 수완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녀는 빚을 내 집을 사고, 집값이 오르는 사이에 거주하는 유목민이었다. 집값이 오르면 그녀는 집을 팔아 차익으로 빚을 조금씩 갚았다. 빚은 20년간 불어나 세리가 자식을 가져서는 안 될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신용 역시 20년간 불어나 그녀는 앞으로 더 큰 빚 위에 풍요를 누릴 자질을 가지게 되었다.

 

 시추기가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몇 바퀴 돌 때면 모퉁이마다 세리 소유의 집이 있었다. 모두 빈 집이었다. 시추기는 자기가 가진 것은 자전거와 몸뚱이뿐이란 생각에 괜스레 목청을 높였다.

  “청년들은 집을 지어야 한다. 기둥을 짊어지고 나서는 발걸음.”

 세리는 매번 다른 집 현관문을 열고 시추기에게로 왔다. 밤사이에 눈이 쌓여 현관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그녀가 사투를 벌이는 사이, 시추기는 입을 다물었다. 세리는 집으로 들어갈 때 남은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걸어 나왔다. 세리는 시추기의 등에 매달렸다. 세리의 품 안에서 시추기는 발을 굴렀다. 시추기의 소맷자락이 펄럭이면 그의 팔에 그득한 자국이 드러났다. 두부 같은 얼굴에 난도질 된 팔목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이들이 놀랄 것을 알면서도 늘 소매가 넓은 옷을 고집했다.

 

  “교회를 지나 언덕을 오르는 길 오른편에 한 집, 내리막길을 달려 교차로 진입부에 한 집, 교차로 두 번째 출구에 노란 건물 한 집, 그 집과 담벼락을 같이하는 정비소 뒤 일층 간판 없는 상가 한 집, 건너편 토목건축 주식회사 뒤편 이면도로에 철제 현관문 한 집.”

 그리고 이면도로의 끝이자 보도블록 구간이 시작되는 곳에 다시 교회가 나온다. 시추기는 늘 순서에 맞춰 세리가 잠을 잘만한 빈 집들을 돌았다. 가끔 지루해지는 날이면 자전거 머리를 뒤로 돌려 거꾸로 돌았다. 별 차이는 없었다. 지나가는 풍경과 스쳐가는 소리를 구성하는 것들은 언제나 같았다. 다만 어쩌다 세리가 새 집을 구해 생각지도 못한 현관문을 열고 머리를 내미는 날이면 시추기의 목록에 한 집 더해질 뿐이었다. 시추기가 세상에 나고 살아온 날들을 셈해보면 이정도 수준의 습관의 변주는 싫증을 낼 줄 모르는 이의 그것이었다. 마을 이웃들 중에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는 부류도 더러 있었다. 목숨이 걸린 행동이라 하기에는 그러한 몸부림들은 순간적인 발작보다는 느릿한 움직임에 가까웠다. 수법에 있어서도 떨어지거나, 쏘거나, 찌르는 방향보다는 조이고, 누르고, 취하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추기는 내리막길을 달리는 와중에 도로에 버티고 선 이를 보았고, 허리 두께만한 나무 둥치의 개미집에 머리를 처박고 치켜든 엉덩이를 보았고, 공사장 구덩이에 천을 덮고 누울 채비를 하는 자도 보았다.

 토목건축 회사 앞에서 해직 근로자가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이 시작된 지는 며칠 지나지 않았다. 근로자는 기력이 없어선지 한마디도 뱉어내지 않고서 조각같이 굳어서는 앉아있었다. 그런데도 새로운 인물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흥미를 끌었다. 언제부턴가 집집마다 근로자의 근황이 저녁 식탁에 올랐다. 근로자는 시추기를 품고 지나쳐가는 세리와 눈을 맞췄다. 안장 위의 세리는 시추기의 어깨너머로 자기에게 고정된 시선을 느꼈다. 근로자는 몰랐다. 세리와 눈을 맞출 수 있는 기회는 그녀가 철제 현관문 집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뿐이라는 것을.

 세리는 머지않아 자기 소유의 집들을 비운 채로 둘 줄을 알게 된다. 집을 재산으로서만 남겨두기로 한다. 하지만 이는 재산 규모가 불어나는 속도를 그녀가 비로소 감당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돼지는 말라죽을 놈이 아니라 얼어 죽을 놈이다. 어디 참고 눌러앉을 살빛이 아니야. 허여멀건 해서는.”

 세리는 현관 너머로 이웃 주민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의 살빛이 마땅한 이유도 없이 욕을 얻어먹을 정도로 그리 허여멀건 했던가? 찬 바닥 위에 미동 없이 놓여 있는 둥그스름하고 하얀 덩어리밖에는 별 다를 게 떠오르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느리게 들어 올려 접히던 쌍꺼풀, 뒤이어 천천히 감겨올 때 동그랗게 펼쳐지던 점, 그 점은 작은 눈동자처럼 또렷했다. 주름 사이사이에 끼어있던 회색 아이섀도우는 펼쳐졌다, 접혔다, 하며 세리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다들 단식농성이라고는 부르지만 그토록 숨죽여 붙박여 있는 자가 무슨 요구라는 걸 할 수 있다는 건지, 세리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제는 네가 어른이 다 됐구나. 철문을 밀어내고 나서는 발걸음.”

  “신곡 나왔어요?”

  “아니.”

 시추기는 아침부터 싱글벙글하였다. 세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장 위에 올라탔다. 시추기는 휘파람을 사이사이 섞어가며 노래했다. 세리의 집이 한자리에 고정된 이후로 변덕이 난 이는 오히려 시추기였다.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각 캐릭터의 보존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애쓴다는 말이 있다.

 

 “청년들은 집을 지어야 한다. 기둥을 짊어지고 나서는 발걸음.”

 

 오늘의 가사 역시 계속해서 한 문장만을 되풀이하는데, 곡조는 계속해서 높낮이를 달리한다. 한 음절과 그의 음정, 뒤이어 낮아지는 음정과 그의 음절, 세리는 시추기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관성을 되찾는다. 계속해서 낮아졌으니까, 이번에는 높아질 거라고 예상한다. 그의 노랫소리에 변화를 주는 건 순전히 그의 변덕뿐이다. 세리의 귀가 자연스러운 음의 전개를 기대하는 것은 음악이란 마땅히 그러한 유희 위에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자리 얻었어. 알지? 고드름 떼는 거. 장비가 개편돼서 감전 위험은 이제 없는 거나 마찬가지래."

 "그럼 이제 자전거 못 타요?"

 "왜 못 타니. 너희 집 못 찾아서 헤맬 일도 더는 없고, 매일 같은 길 타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눈이 더 쌓여 마을 지붕들은 정수리만 간신히 보였다. 바퀴 자국이 파여서 간신히 이끼가 드러나는 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멈출 일도 없었다. 가끔 돌에 채여 자전거가 휘청대도 어깨만 눈 더미에 박힐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 언덕 뒤를 내려다보니 땅에 꽂힌 십자가가 빛났다. 십자가 아래 원뿔형의 지붕이 이어지고 또 그 아래 기도실이 있을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안 보이면 없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지난 길 역시 금세 눈 속에 뒤덮이고 깊이 역시 가늠되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 저거 말려 먹으면 되겠다."

 시추기는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멀리서 점 하나가 위아래로 널뛰며 세리 등 뒤로 다가왔다. 토끼였다. 지평선을 내다보면 토끼들이 튀어나왔다, 푹 빠졌다 하면서 태양 주위로 모여들었다. 길이 막히자 토끼는 우회하여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이 아주 컸다. 이내 언덕 아래로 파묻혔다. 발이 머리보다 확실히 크니까 뛰어나올 때 무리가 없을 만도 한데, 눈 더미가 무거운 탓인지 낭떠러지에서는 꼭 그렇게 처박히곤 했다. 세리는 토끼를 안장 뒤에 묶었다.  

 길 아래로 진동이 느껴지며 보도블록 구간에 진입했다. 시추기는 정비소와 토목건축회사가 성행했던 때의 일들을 하나씩 읊어 내렸지만 세리 귀에는 그것 역시 노랫가락으로 들렸다. 눈앞에는 흰색 덩어리들뿐이라 시추기가 허풍을 곁들이더라도 짚어낼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시추기의 단어와, 단어의 순서와, 순서의 억양변화는 더욱 명료하게 들렸다. 만약 조금이라도 음의 전개가 달라진다면 세리는 꼬집어낼 자신이 있었다. 세리는 근로자의 눈꺼풀이 어떤 순서로 주름 잡히는 지까지도 셈할 지경이었다. 모퉁이 너머에서 목소리가 눈 벽을 넘어 들려왔다.

 "식사하셨습니까?"

 세상에 피둥피둥한 목소리란 것도 있다면 바로 철문 앞에 선 손님이 내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다. 근로자였다. 손에는 토끼포가 들려있었다. 검다시피 말라 이리저리 갈라지는 토끼포에 비하면 그의 손 피부는 거의 배경과 하나가 된 듯이 크고 둥그스름하게 보였다.

 "우리도 토끼가 있는데요, 그래도 여럿이 합치는 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시추기는 어깨너머로 세리를 돌아보았다. 세리는 엉덩이 뒤를 주춤주춤 더듬었지만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토끼를 잃어버렸다. 깨끗하고 차갑게 유지되어 길에 떨어져 있을 토끼를 내일이든 언제든 주우면 될 터였지만 시추기가 앞으로 일할 터널은 토끼를 거쳐 갈 수 없을 터였다.

 그들은 마당에서 끓인 물의 증기를 쐬어 토끼포를 부드럽게 하였다. 두부 만드는 날이면 비지로 밥을 지어 마른 음식을 적시는 게 세리와 시추기 사이에서는 나름의 풍속이었다. 근로자는 그림자가 지는 마당의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부신 살결도 그림자 안에서는 그 나름대로 위장되어 눈에 띄지 않았다. 증기에 부채질하다가 문득 돌아보면 모서리 안에서 눈꺼풀이 깜박이며 세리와 시추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눈 벽 때문에 우리 회사가 내다보이지도 않는군요."

 근로자의 하얀 품 안에서 살덩어리가 떨어져 나오듯이 짐승이 머리를 내밀었다. 날짐승 외에는 발견되는 동물이 드물었기에 세리는 그것이 음식의 냄새를 맡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배를 땅에 붙이고 미끄러지듯 기어와 날름거렸다. 한시도 움직임을 쉴 줄 몰랐다. 뱀이란 짜증 날 만큼 애매모호한 원형이다. 근로자의 살결은 시추기의 난도질 된 팔뚝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자아냈다. 뱀을 보면 마음이 거북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신체 부위 각 부분을 경계 짓지 못할 정도였으며 유심히 바라보아야지만 형태를 가늠할 수 있었다.

 눈발은 갈수록 짙어져 지평선을 흐렸다. 시추기는 세리의 눈길을 좇았다. 근로자의 두 허벅다리가 그림자 바깥으로 튀어나와 밝았다. 무릎 아래로는 다시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근로자는 발끝으로 하얀 짐승의 엉덩이를 밀어냈다. 짐승은 마당 중앙에 쌓인 돌탑 아래로 기어가 웅크렸다. 머리를 웅크려 덩어리처럼 몸을 마니 그 꼴이 마치 단식농성 중인 근로자의 작은 복제품처럼 보였다. 돌탑은 세리가 이 집을 처음 살 때부터 꽤 높이 쌓여있었고 정착한 이후로는 세리와 시추기 둘 중 아무도 손대지 않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시추기는 씹던 토끼포를 숟가락에 뱉어내 돌탑 쪽으로 간간히 던져주었지만, 짐승은 이제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

 "그렇게 노려보지만 말고 소원이라도 하나 빌지 그러세요."

 근로자의 말에 시추기는 세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세리는 엉거주춤하게 걸어가 돌 한 개를 쌓았다. 세리의 소원은 지금의 불편한 상황이 금방 지나가는 것.

 "그렇게 모서리에 박혀있지만 말고 중앙으로 나오시지요." 시추기는 재차 말했다. "손님의 얼굴을 좀 자세히 보고 싶은데요."

 돌탑은 대여섯의 둔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암석들은 정확한 비율로 섞여 제 위치에 박혀있었다. 수가 월등히 많거나 적은 암석은 없었다.

 "난 그래서 여기가 좋은걸요. 남들은 날 못 보는 상태에서 나는 다 보이니까요." 근로자는 다리를 모아 웅크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언덕에 오를 필요도 없습니다."      

 시추기의 표정은 견딜 수 없다는 듯 찌그러졌다. 세리는 중앙 꼭대기의 돌을 집어 올렸다. 돌은 약간 젖어 있었다. 엄지로 표면을 훑자 흙색이 묻어나왔다. 생각해보면 흙을 밟아본 지가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가끔 자전거가 균형을 잃어 처박히면 눈 밑에 이끼가 빽빽이 끼어있기는 하였지만. 이끼는 언 땅에서 자라나기까지 몇 만 년인가, 무튼 꽤나 오래 걸리는데, 이끼가 자라야지만 다른 식생이 자라날 토양환경이 마련된다고 하더라.

 "팔에 새긴 것은 주소지입니까?"

 "아닙니다."          

 세리는 젖은 돌을 가장자리의 탑 위에 얹었다. 남의 소원을 내 몸으로 대신 비는군.

 "세리야." 시추기가 불렀다.

 문득 이 돌에 깃든 소원이 아기를 갖는 소망이라면 세리에게는 저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세리야." 시추기가 일어섰다.

 분명 임신일 거야. 최악은 분명 임신일 거야.

 "사실상 당신이 발붙인 이 마당의 높이 역시도 차익 위에 지어진 것 아닙니까."

 짐승이 튀어나와 웅크린 이후로 시추기의 몸은 근로자가 위치한 방향으로 한 번도 향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말이 들려오는 쪽으로 귀만 마주해놓을 뿐이었다. 얼굴은 이제 찌그러지다 못해 젖어 들고, 떨려오기 시작했다.

 "화로도, 궁둥이를 붙인 의자도, 손에 쥔 식기도, 입속의 축축한 토끼포도,"  근로자는 말을 이었다. "아마 감당하고 싶진 않겠지만 당신은 분명 할머니도 못 알아보고 좆을 놀릴 겁니다."

 시추기는 철문을 뛰쳐나가 자전거에 올라탔다. 세리는 급히 손을 털고 따라 나갔다. 마당에서 의자가 넘어지고, 연달아 돌탑이 무너졌다. 지나온 길이 선의 모양을 하고 구불구불 눈 벽 뒤로 이어지긴 하였지만 근로자의 얼굴이 보기 싫어 도망친다 하기에는 그 길로 연결될 풍경들은 너무 빤했다. 집 앞에는 줄기가 많고 키가 작은 관목이 듬성듬성 자라났고 교차로 위로 오르면 바퀴 아래로 이끼가 밟혔다. 머리 뒤로 세리 소유의 집들이 지나갔다. 사실상 모든 고도의 모든 식물이 동일한 식생 발달 단계를 밟아가는 가운데, 각 지점이 다른 시기를 겪고 있기 때문에 토양환경의 차이가 발현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시추기는 자전거의 머리를 틀어 언덕 아래로 발을 굴렀다. 바퀴란 본래 땅과의 마찰력을 통해 구르는 법이다. 자전거 바퀴는 이동수단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채 미끄러져 눈을 뚫고 곤두박질쳤다. 세리는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떨어질 거라면 맨몸으로 떨어지는 게 차라리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세리의 몸에 앞서 시추기의 등이 위치하고, 시추기의 몸에 앞서 자전거 머리가 위치하니 나름대로 방어의 구실은 하고 있지 싶었다. 한참 떨어지다 어딘가 틈에 끼인 듯이 멈춰 섰다. 영생의 삶 안에서 보다 어렸을 적의 기억이 어떠한 구제의 역할을 해낼 거라는 기대는 한 적 없었다. 다만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기 전에, 그러니까 적어도 도시의 건물들이 하늘과 구획하는 윤곽이 존재했을 적에, 시추기의 말에 따르면 토목회사의 영업사원이라 하면 성공의 궤도에 올랐다 평가받을 적에, 공중에 맥놀이를 벌이던 크레인들. 크레인처럼 세리의 겨드랑이에 물렁한 팔이 끼워져 있었다. 눈 바로 앞에서 흔들리던 시추기의 뒤통수는 멀어져 어두운 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물렁한 팔은 세리 몸무게로 짓눌려 팽팽해지고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세리 귀에 살찐 목소리가 들렸다.

 "짐승들은 잔뜩 서로를 두려워하다가 물어 죽이지."

 휙 하고 팔이 빠져나갔고 세리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땅에 부딪힌 부위보다도 겨드랑이가 더 얼얼했다. 몸을 뒤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좁다란 틈사이로 회색 눈꺼풀이 접혀졌다, 펼쳐졌다하며 굴 속을 내려다보았다.

 세리는 하얀 세상을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려 애써왔다. 마을 이웃 모두가 근로자의 살덩이를 욕하는 가운데 그의 껍데기를 응시하지 않는 게 세리 자신의 당면 과제로 느껴졌다. 순간 굴 속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눈꺼풀의 점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발이 아주 커요. 발이 머리보다 확실히 크니까 나올 때 무리가 없을 만도 한데 말이죠."

 빛 사이로 웅성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세리 몸 아래 깔려 꿈틀대던 시추기가 신음을 흘렸다.

 

*

 “하지만 선생님, 저는 빚이 많은걸요.”

 "재산이 세금으로 빠져나갈 시간은 충분합니다."

 교신이 또 끊겼다.

 그러자 왼편 욕조의 미치광이가 말을 했다. 세리에게 걸어오는 말인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철골로 고정된 고개를 돌리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행형법 제9조 1항에는 의사가 매주 1회 이상 면담을 하고 수용자를 진단하도록 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실무자들이 의사 면담을 차단해버리기도 한다는 당신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이편저편에서 교신이 오가는 소리와 기포가 부글대는 소리가 교차하여 들렸다. 미치광이는 놀라울 만치 거대한 성량을 자랑했다.

 "행형법 제9조 1항은 유전병에 걸린 자의 수용 거절과 관련된 규정이며. 의사의 면담은 수용자가 처우 및 일신상의 사정에 관하여 의사에게 면담을 신청할 수 있다는 행형법 시행령 제9조 1항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지, 매주 1회 이상 면담하여야 한다는 규정은 현행 행형법령 그 어디에도 없다."

 미치광이는 수용자들뿐 아니라 교신 건너편의 의사들에게도 말을 걸고 있는 듯했다. 세리는 수면 아래로 뛰고 있는 맥박을 느꼈다. 공기 중에 소리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피부에 진동하는 맥박까지도 소음으로 뒤섞였다.

 "뿐만 아니라, 수용자는 실무자들이 의사 면담을 차단한다고 하나, 법령에 의해 보장된 수용자의 권리를 정당한 사유 없이 차단할 수도 없을뿐더러 실제로 차단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아시다시피, 뭐 죽을 일은 없으니까요."

 "아기가 필요했던 것 아닙니까? 아기가 생겼으면 된 거 아닙니까?"

 소음 안에는 흐느끼는 소리와 대답 없는 물음, 교신이 이어졌다. 수용자들의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의사의 인원이 모자라서 교신이 자꾸만 끊어지는 것은 아닌 듯했다.

 "만약 그러한 차단 사실이 있었다면 해당 수용자는 고소, 국가인권위 진정, 법무부 장관 청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 배상 청구 등 각종 권리구제 수단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세리는 소음 안에서 어머니의 말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에게 교신을 시도하기보다는 적어도 자신보다 이 공간에서 오래 머물렀을 어머니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미치광이는 다시 행형법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반복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찾아낸다 해도 그녀 역시 미치광이처럼 회상을 반복할 것이 뻔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20년 길이의 이야기 안에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말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어머니처럼 회상을 반복하거나, 미치광이처럼 자기 견해를 우렁차게 읊고 싶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어린 동물의 곁에 시계를 두면 초침 소리에 맥박을 맞추어 진정한다고 했다. 세리는 수면 아래의 맥박을 따라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교신음이 울렸다.

 "수신인 성명을 입력하세요."

 "이름을 몰라요."

 "희망 수신인이 생물학적 아버지입니까?"

 세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리는 시추기의 본명을 몰랐다. 떠나간 사람 이후에 셈할 수 없는 시간을 시추기와 함께 보냈지만, 세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추기가 세리의 영토를 뚫고 휘저을 때의 리듬뿐이었다. 그 리듬이 그를 시추기라 불리게 만들었다. 시추기는 지금 근무 중일까? 시추기가 일자리를 얻었다고 기뻐하던 날에 그는 서류에 자기 이름을 무엇이라 적었을까?

 "희망 수신인이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경우 최신 교차한 유전자 소유자에게로 자동 위임합니다."

 "나는 율법에 따라 떠나간 사람을 대신해 그를 취했을 뿐입니다."

 교신이 또 끊겼다.

 그러자 왼편 욕조의 미치광이가 말을 했다. 세리에게 걸어오는 말인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철골로 고정된 고개를 돌리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행형법 제9조 1항에는 의사가 매주 1회 이상 면담을 하고 수용자를 진단하도록 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실무자들이 의사 면담을 차단해버리기도 한다는 당신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

 

 

 고드름이 부서져 내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헬멧에 얼음 조각이 쏟아져 부딪혔다. 터널 안은 너무나도 푸르러서 앞서가는 노동자의 피부까지 새파랗게 질린 듯 보였다. 빙하 벽은 두꺼워 깨지지도 않았다. 가끔 마주하는 균열에는 기포가 조금씩 포진되어 있었다. 기포가 없을수록 오래된 얼음이라 하는데, 바로 기포가 없다는 그 이유로 높은 밀도의 얼음은 깨지지 않고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균열 사이로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고드름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미끈한 표면이 대부분이라 산란되지 않은 푸른빛이 그대로 온 동굴을 휘감고 있었다. 화물철도가 개편되면서 고드름 떼는 노동은 고용 안정성이 그 어느 직업보다도 높게 되었다. 다만 눈의 무게로 터널이 무너져 내리거나, 고드름으로 터널의 넓이가 좁아질 경우, 떼어낸 얼음의 무게로 셈하는 봉급은 미친 듯이 널뛰었기에 시추기는 새로운 고드름이 더 길어지거나 많아지기 전에 재빨리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시추기가 얼음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릴 때 항상 노동자는 뒤돌아보며 낄낄거렸다. 그는 고의로 그라인더의 날을 휘어 얼음에 절개선만 남기고 터널 안을 돌아다녔다. 그의 행동이 파업이라기엔 근무 조건에 대해 요구하는 바도 딱히 없었고, 장비 없이 맨손으로도 뚝 떼어낼 수 있을 정도로 절개선을 남겨주는 노력이 오히려 가상했다.

 "사보타주라고. 사보타주."

 "출근이라도 좀 일찍 하시던지, 아니면 좀 일관성을 가지고 늦던지, 기다리기도 뭐하고  내버리기도 참."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망각이란다."

 "그거 완전 입맛대로 쓸 수 있는 말 아닌가요?"

 터널의 끝에서 끝으로 가는 내내 그들은 늘 말다툼을 했다. 오갈 때마다 터널의 입구가 좁아지는 듯한 초조한 생각에 시추기는 늘 마음이 들떴지만 노동자는 개의치 않았다. 어떤 날은 시작점 부근에서만 혼자 고드름 몇십 개를 해치우고 있다가도, 늦게 출근하는 게 대부분이었으며, 지각하는 시간마저도 1분에서 몇십 년을 널뛰며 마음대로 행동했다. 시추기가 견디지 못해 마음대로 업무를 시작해버리면 그것대로 업무속도가 더뎌졌다. 어쩌면 다툼이 노동요처럼 작용해서 시추기의 일상적인 리듬을 지배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남을 돕는 일이란 도리이지."

 노동자가 앞장서 절개선을 내면 시추기는 그의 뒤에 바짝 따라붙어 빠르게 해치웠다. 시추기는 사실 노동자가 계속 이런 식으로 봉급을 떠먹여 주는 식으로 일할 것이라면 대체 왜 터널에 머무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넌 돈 모아서 대체 뭐할래?” 노동자가 토끼포를 씹으며 말했다. 이 안에서는 토끼포도 푸르렀다.

 “자전거 사요.”

 시추기는 증기에 부채질했다. 흙인지 눈인지 모를게 터널 위로 쌓인 탓인지 천장은 어두웠다. 벽을 투과한 빛이 불보다도 밝았다. 증기가 솟아올라 어두운 천장을 훑으며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노동자는 머리 뒤에 손깍지를 끼고 드러누웠다. 그는 질겅대며 가슴을 폈다.

 

 “내 부인은 비행기를 타고 뜨거운 계절로 갔어.”

 얼어붙은 천장 너머로 새가 울었다. 자전거 종이 울렸다. 증기 속에서 어떤 실루엣이 가만히 서 있었다. 시추기의 왼편에서 노동자가 고개를 돌렸다.

 “너 부른다. 퇴근해.”

 시추기가 안장 위에 올라타 앞사람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어깨너머로 길이 내려다보였다. 언덕 아래에는 땅에 꽂힌 십자가가 빛났다. 십자가 아래 원뿔형의 지붕이 이어지고 또 그 아래 기도실이 있을 것이었다.

 “마을에 불이 난 줄 알았어요. 안개가 이렇게 많아서야 마을 밖으로 나갈 수는 있을까요?”

 돌멩이에 바퀴가 채여 잠깐 휘청한 뒤 앞사람은 말을 이었다.

 “저는 상상할 수 없어요.”

 하늘이 뿌옇게 구름으로 가득 차 능선을 흐렸다. 눈발이 조금씩 떨어져 내리는 것조차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아야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주변 지형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시추기가 말했다.

 “저 빈 집 많이 알아요.” 하늘 일부분이 찢어진 듯이 붉었다.

 “모퉁이에서 우회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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