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탑의 아침은 이르다. 창문의 절묘한 위치 덕분에 햇빛이 얼굴 위로 떨어져 정해진 시간이 되면 눈을 뜰 수밖에 없다. 누가 만들었는지 성격 참 괴팍하다. 햇빛 사이로 부유하는 먼지가 보였는데 대청소를 하기는 해야겠다.

여름이 다가오고는 있지만, 아침 공기는 쌀쌀했다. 졸린 눈을 다독이며 난간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예전부터 승강기를 하나 만들까 고민하고 있지만 그 정도까지 마법에 의존하다간 나태해질 것 같아 오늘도 두 다리로 계단을 밟았다.

책장으로 가득 찬 층을 지나 1층으로 내려가니 공기가 눅눅했다. 새벽에 비가 온 모양이다. 생각 외로 춥다.

손을 까닥하자 위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우 가죽으로 만든 긴 외투 한 벌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외투를 걸쳐 입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손가락을 세 번 정도 튕기자 작은 불빛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두운 탑 안을 밝혔다. 다음번엔 움직이는 모양을 조금 바꿔볼까.

아무 거나 얻어 걸리라는 식으로 검지와 중지를 까딱했다. 식료품 창고에서 덜컹 소리가 나더니 시장에서 사온 두툼한 베이컨이 튀와 나왔다. 베이컨을 보니 계란도 먹고 싶어지는 게 당연지사.

손바닥 위에 바람을 불어 불씨를 만들었다. 그 불씨를 화덕에 옮긴 다음 철냄비를 올렸다. 열이 적당히 올라왔을 때 베이컨을 올려 기름을 낸다. 박수를 두 번 하자 허공에서 묘기를 부리던 계란 두 개가 톡 하고 깨졌다.

지하실에서 물을 끌어와 거대한 물방울 형태로 만들었다. 그 중에 소량은 잔에 담아 마셨고 나머지는 거울 앞에 마련된 대야에 떨어트렸다. 속도 조절을 실패해서 일부가 바닥에 튀었다.

마법. 어렸을 때는 손가락에서 불빛이 나는 것만 봐도 방방 뛰던 소녀가 이제는 자연스레 마법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혼자서 지켜야 하는 탑 아래에서 나는 마법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생일 축하해, 리엔.”

 

혼자 사는 마당에 생일 케이크 준비하기도 그렇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자니 어딘가 허전하다. 굳이 고르자면 당근을 넣은 컵케이크 위에 달콤한 생크림을 얹어 먹고 싶다. 산 중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이런 게 슬프다.

고민을 하면서도 아침 식사는 잘만 들어간다. 퍽퍽한 빵 위에 바삭한 베이컨과 계란을 얹어 먹으니 정신이 또렷해진다. 허공에서 책장을 팔랑거리며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일정을 찬찬히 점검해 보는데, 이게 생일 선물인 모양이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없다. 그 얘기인 즉 딱히 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

, 그럼 늦잠이나 잘 걸.

불평하기엔 너무 늦었다. 잠기운은 아침에 지저귀는 산새마냥 산 너머로 날아갔고 그렇다고 졸리지도 않은 몸을 침대 안에 처박아 두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다. 새로운 시약이라도 만들어 볼까. 근데 초여름에 나는 약초로 해볼 만 한건 다 해봤잖아. 이건 취소.

결국 왼 종일 책이나 읽는 것 외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평소에는 약초 채집이다 뭐다 해서 산속을 헤매거나 마을마다 들려 약을 배달하면 하루가 다가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사건이라도 터지면 새벽이 다돼서 집에 돌아오는 경우도 다반사다.

왕이나 귀족한테 고용된 마법사는 고귀하신 나부랭이 분들한테 마법 몇 개 보여주면 편이 산다고 하는데. 산에 틀어박혀 사는 마법사의 운명이려니 한다.

그래도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마법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리고 역시 나는 사람과 어울리는 게 싫다. 인근 마을 사람들과 엮이는 것만으로도 지칠 지경인데, 몸에 꽉 들어맞는 옷을 입으며 거짓 미소로 살아가는 건 압박이 너무 심하다. , 어디 왕자님이나 기사님이 꼭 와달라고 하면 한 번 고려할 수도 있지만.

이러니 저리니 있지도 않을 일이나 떠올리며 실실 웃고 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침 댓바람부터 오다니 성실하기도 하셔라. 아님 엄청 급한 일이거나.

읽고 있던 책은 자리로 돌아갔고 각종 가구들은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자리를 찾아갔다. 내가 앉을 의자와 상대가 앉을 의자, 그리고 가운데 놓일 작은 탁자가 툭 소리를 내며 방 중앙에 떨어졌다. , 차랑 다과도.

나는 의자에 몸을 묻어 편히 앉았다. 외투와 잠옷은 다시 옷장으로 돌아갔고 물결무늬가 새겨진 연보라색 로브가 내 몸을 덮었다. 옷깃에는 암청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달았다. 챙이 넓은 모자에서 생기는 그림자 때문에 상대는 내 표정을 자세 읽지 못할 것이다.

오른손에는 여섯 뼘 남짓한 지팡이가 들렸다. 화산이 분출한 곳에서 살아남은 도토리나무의 가지로 만든 것이다. 위로 갈수록 두께가 커지며 맨 끝에는 수많은 면을 가진 유리조각이 빛을 아름답게 반사했다.

지팡이를 앞으로 뻗자 문이 열렸다.

마법사의 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질병을 고칠 약이 필요하신가요? 아니면 악귀를 쫒길 원하시나요? 원하시는 바를 부담 없이 말하시길.”

나는 눈을 감은 채 나직이 말했다. 마법사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이 순간이 마법사로서 가장 짜릿하다. 은은한 불빛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분위기. 대단한 마법을 보인 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이 분위기에 압도되곤 한다. 그럼 우러르는 눈빛과 함께 동전 주머니의 입도 활짝 열리기 마련.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걸 보니, 인근 사람은 아니리라. 최근에 왔던 행상인이 소문을 잘 내준 모양이다. 물론 행상인 그걸 핑계로 가격을 흥정했다. 천박한 수전노 같으니.

나는 싱긋 웃으며 모자의 챙을 살짝 들어 시선을 마주치려 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문 너머에서는 밝은 햇빛만 들어올 뿐 그 어떤 형체도 없었다. 내가 너무 무섭게 있어서 도망갔나? 아직은 붙잡을 수 있다. 헐레벌떡 일어난 나는 지팡이를 자리에 두고는 문 앞으로 갔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손님을 부르짓는 일은 없었다. 문 앞에 뭔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생일날 아침부터 내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은, 혀를 내밀며 헉헉 대고 있는 한 마리의 개였다.

 

 

녀석은 꼬리를 흔들며 탑 안으로 몸을 날렸다. 진창을 밟고 왔는지 녀석이 걸어가는 곳마다 육구가 선명하게 찍혔다.

길게 늘어진 황갈색 털과 한 것 부풀어 있는 꼬리. 눈매는 축 처져 있어 주인 뿐 아니라 웬만한 사람한테는 다 살갑게 굴 것 같다. 양치기를 따라 다니는 개들이 저런 종류라고 들었다. 품종이 뭐더라?

탑을 무단으로 침입한 개 녀석은 카펫 위에서 똬리를 튼 채 아침 햇살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털의 상태를 보아하니 들개 같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주인이 있을 터. 이 근방에 양을 기를만한 목초지는 없으니, 아마 누군가 데리고 온 것이리라.

그런데 그 주인이란 인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도움의 대가로 이 개녀석을 주고 갈 생각이었다면 큰 착각이다. 난 동물은 질색이다. 특히 이렇게 큰 녀석들은 밥도 많이 먹고 변도 많이 볼 테니 더욱 질색이다.

버려진 것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개들은 늑대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으니 산중에서도 알아서 잘 살 것이다. 나는 문 앞에 나둔 막대기를 집었다. 횃불로 쓰기 위해서 끝 부분에는 기름을 먹인 천이 감겨 있다.

숨을 크게 불어 넣자 막대기의 끝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일반적인 횃불과의 차이점이라면 불길이 내가 원하는 만큼 늘어난다는 점. 불꽃은 구렁이처럼 꾸물꾸물 허공을 기더니 세상 물정 모르고 햇살에 취해 있는 개 앞에서 나선형으로 몸을 틀었다.

짐승이고 사람이고 불을 무서워하는 건 섭리. 자자, 빨리 나가서 주인을 찾든가 아니며 새 보금자리를 찾으렴.

근데 저게 꼼짝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불길이 눈앞까지 다가가자 일단 주둥이를 삐죽 내밀기는 했는데, 그 이상 반응이 없다. 그리고 저거, 저거 표정이 왠지 날 비웃는 것 같았다. 마치 이 불꽃 가짜라는 걸 안다는 듯이.

자기 집 안에서 진짜 불꽃을 쏴대는 마법사만큼 멍청한 존재는 없다. 이건 조금 따듯할 뿐인 가짜 불꽃이다.

야생의 직감이라고 하는 게 있어 동물들은 진짜와 가짜를 본능적으로 구분한다는 데 이것도 그런 경우인가 보다.

오늘 왜 일정이 없나 했다.” 생일날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거친 일을 해야 한다. 깊은 한숨을 쉬고는 불이 꺼진 막대기를 원래 자리에 돌려놨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 놔둔 지팡이가 내 손에 잡혔다.

일단 가구부터 치웠다. 녀석은 깔고 있던 카펫이 휙 하고 빠지자 바닥에 코를 박았다. 잠을 방해한 것에 짜증이 난 듯 몸을 숙인 채 뒷다리를 들었다. 순간 송곳니가 보인 것 같았는데, 착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침을 방해한 것은 네가 먼저야 이 개녀석아.

살아 있는 것을 움직이는 마법은 난이도 높다. 그야 그런 마법사가 많다면야 마법사들은 진작 십자가에 묶인 채 잿빛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도 아직 사람을 이리저리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 개를 집어 던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우선 거대한 손을 상상했다. 투명한 손으로 잡아 올린다는 느낌으로 나는 개녀석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으니 녀석은 내 힘에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전신 땀범벅이 되었을 때 즘, 나는 녀석을 문 밖으로 내보내는데 까지 성공했다. 이대로 문을 닫아 버리는 방법도 있으나 그랬다면 문 앞에 짖어댈 것이 뻔하다. 바로 옆에 있는 절벽 아래까지는 내려 놔야 한다. , 땀냄새. 몸도 축축하고 일이 다 끝나면 씻고 잘 거...

젠장. 마법을 쓸 때는 딴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개녀석에 대한 짜증 때문에 그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쓸데없이 감이 좋은 녀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투명한 발판을 밟고 도약하듯 개 녀석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큰 몸짓으로 나를 짓누르자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디 모서리에 머리 박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다. , 괜히 마법으로 상대했나. 천박해 보여도 그냥 빗자루 같은 걸로 쫓아낼걸.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자 개 녀석은 내 몸 위에 매미마냥 달라붙어 있었다. 상당히 무겁다. 하지만 털이 풍성한 만큼 따뜻하기는 하다. 물론 이 녀석으로 인한 짜증이 그 정도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 망할 개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녀석은 곧장 귀와 꼬리를 몸 쪽으로 말았다. 뭐가 미안해하는 구석은 있나? 그리고는 괜히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개의 눈은 생각 외로 맑았다. 마법에 쓰이는 보석 중에 오팔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 마냥 눈동자 안에 이런저런 색이 가득했다.

웃는 사람 얼굴엔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그건 실제로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이렇게 불쌍한 얼굴에다가 화를 내는 건 무리다. 그리고 가만 보니 좀 귀엽기도 하다. 버려진 것일 가능성인 높은데, 그냥 내치기도 좀 뭐하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마음만 여려가지고는.

맡아줄 사람이 나타나긴 전까지야. 불편해도 불평은 하지 마.”

나는 일단 여기서 지내도 돼.’라는 의미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털이 부드러워 기분이 좋았다. 녀석은 한 번 눈웃음을 짓더니, 상황 파악이 끝났듯 내 몸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 후 구석에 쑤셔져 있는 카펫을 꺼내 부족한 아침 햇살을 더 받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뭔가 속은 것 같지만, 지금 와서 무로 돌리기에도 뭐하다.

 

 

원채 넓은 탑에 개 한 마리 더 산다고 뭐가 달라질 법 십지만, 실상 달라진 것은 많았다.

 

그니까 네 집은 여기라고, . .”

나는 소파 위에 몸을 묻은 개를 향해 낡은 방석을 내던졌다. 먼지가 햇빛을 받으며 부풀어 올랐고 나와 개녀석은 서로를 마주본 채 기침을 했다.

개녀석은 머리로 방석을 쳐 바닥에 떨어트렸다. 좌우간 몸이 길어 소파를 완전히 차지한 녀석은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 듯 행복한 표정이었다.

체념한 나는 방석을 다시 창고 구석에 쑤셔 넣었다. 밀어낸다 해도 어차피 다시 여기로 돌아올 것이 뻔하다. 괜한 짓을 하긴 싫으니 타협할 수밖에.

알았으니까, 좀 비켜 봐. 훠이, 훠이.”

소파의 전체를 줄 수는 없다. 여긴 내 독서를 위한 공간이야. 내가 양보를 했듯 너도 양보를 해, 이 개녀석아.

개는 내 손짓을 보자마자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사람 하나 정도는 편히 앉을 공간이 생겼다. 나는 소파에 빨려 들어가듯 몸을 뉘었다. 책을 읽을 마음도 없다. 잠시 눈을 붙인다.

무릎팍이 따뜻해서 눈을 떴는데, 개녀석의 머리가 내 무릎 위에 얹혀 있었다. 으에, 괜히 기분 좋네.

 

, !! 너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내 외침과 함께 탑 안에 있던 가구들이 한 차례 위로 떴다가 떨어졌다. 나는 깨갱하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찾았다, 이 망할 녀석아.

개녀석은 바닥에 착 엎드린 채, 서글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그런 표정에 속아줄 마음은 없어.

마을에 갔다 오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소파는 넝마가 되어 있고 의자들은 지진이라도 난 듯 쓰러져 있었다. 탁자 위에 쌓아 뒀던 책들은 바닥에 떨어진 채 개발바닥에 수차례의 공격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이 물에 젖은 채 기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 망할 개가...”

손가락을 튕기자 빗자루가 허공에 매달린 채 개 녀석의 등짝을 수차례 후렸다. 겁에 질린 개 녀석은 짖지도 못한 채 빗자루를 피해 더욱 더 구석으로 향했다. 이런 식으로 내쫓을까 생각하다가 그건 너무 심한 것 같아 빗자루를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나는 소파에 몸을 날리고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간혹 이런 식으로 엄한데 오줌을 지리는 경우가 있었다. 지난번이 최악이었는데,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자 뭔가 축축하고 기묘한 냄새가... 으으,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개를 길러본 경험 같은 게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빨리 맡아 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좋으련만.

내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자 개녀석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 발치까지 다가온 녀석은 몸으로 내 다리를 감쌌다. 따듯한 배가 발등에 닿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맑은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내 감정을 살피고 있는 건 확실했다.

앞으론 잘 해.”

내가 그리 말하자, 개녀석은 바로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뒷다리를 들었다. 분홍색 배가 적나라케 보였다. 이럴 땐 빠르다니까.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마을에서 사온 것이 떠올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섰다. 그 후 판자를 쪼개듯 문 아래에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첩을 달아 개가 오고 다닐 수 있는 문을 만들었다.

개 녀석도 자신의 전용 문에 관심을 가졌다. 바로 안과 밖을 오가며 혀를 헉헉 거렸다. 이제 똥오줌은 밖에서 보려나?

 

개녀석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차라리 저것이 개가 아닌 다른 짐승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야 마법사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동물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적어도 날개 달린 짐승이었다면 서신을 전달하는 용도로도 썼을 텐데.

개녀석이 해봤자 할 수 있는 건, 집지키기 정돈데 누가 봐도 마법사의 탑인 이곳을 찾아올 도둑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가끔 털을 만지며 기분전환 하는 것 이상의 용도는 없다. 참 쓸모도 없으셔라.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개녀석이 바구니를 입에 물고는 내 발치를 툭툭 건드렸다. 내가 약이나 약초를 담을 때 쓰는 바구니다.

네가 들려고?”

개녀석은 바구니를 문 채 고개를 갸웃한다. 손잡이에는 침이 가득 묻었다. 으엑. 지도 저리 일을 하고 싶다는 데 한 번 맡겨 볼까 싶다. 마침 오늘 약을 배달해야 하는 곳이 있다.

바구니에 어제 만들어둔 약들을 챙겼다. 상처에 바르는 약과 무릎에 좋은 약. 그리고 산짐승들을 쫓아내는 부적. , 피로 회복에 쓰이는 약도 챙겨야지.

이래저래 담다보니 무게가 꽤 나갔다. 다 들 수 있나 염려가 됐지만 큰 무리는 없는 듯하다. 그래 식량을 축내면 뭐라도 해야지.

손가락을 튕기자 문이 활짝 열렸다. 햇살이 강하지는 않다. 바람도 선선히 부는 것이 산을 오르기에는 적당한 날씨다. 목적지는 중턱에 있는 산지기의 집.

오른손은 언제나 그랬듯이 지팡이의 차지다. 개녀석 덕분에 비어있는 왼손은 심심한 나머지 방정 맡게 움직였다. 괜히 나뭇가지를 건들이기도 하고 조약돌을 개울에 던지기도 한다. 간혹 산새가 잠시 자리했다가 가기도 한다. 내가 발걸음을 가볍게 내딛자 개녀석도 바구니를 문채 폴짝폴짝 뛰어온다. , 그거 쏟으면 오늘 밥은 없다.

해의 움직임보단 배에서 나는 소리로 시간을 가늠할 무렵, 나와 개녀석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절벽을 바람막이 삼아 지어진 통나무집으로 산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종종 쉬거나 길을 물어보는 곳이다.

언제나 그랬듯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을 쐬는 산장 할머니가 우리를 맞이했다.

저 왔어요.”

내가 인사를 건넸는데, 산장 할머니는 나보다는 처음 본 손님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개녀석도 그걸 아는지 풀밭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할머니의 무릎팍에 주둥이를 들이 밀었다.

멋진 기사님이구나, 얘야.”

할머니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사님은 무슨요, 밥만 축내는 녀석이지.” 침이 잔뜩 묻은 손잡이는 차마 잡을 수 없어 밑을 바쳐 들었다. 침이 바구니 안쪽까지 흘렀나하고 봤지만 다행이도 기우에 그쳤다.

매번 고마워, 마법사 아가씨.”

뒤편에서 장작을 패고 있던 산지기 아저씨가 나와 인사를 건넸다. 도끼를 들쳐 멘 우람한 팔뚝에 핏줄이 가득 서있다. 곰도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있는 남자다.

개녀석도 집주인이 다가오자 혓바닥을 내밀며 달라붙었다. 눈치 빠른 녀석. 산지기 아저씨야 워낙 동물들을 좋아하니 개침이 옷에 묻는 정도로 표정이 변하진 않는다.

산지기가 산장을 비우면 안 되니까요.”

나는 바구니를 건네며 말했다. 산지기 아저씨는 격한 환영을 표하는 개녀석을 한 손으로 저지하고는 나에게서 바구니를 받았다.

이 녀석이 소문으로만 듣던 마법사 네 개구나. 가끔 사람들이 와서 말하더라, 아가씨가 이 녀석 주인 될 사람 찾는다고.”

그니까요. 누가 맡고 싶어서 맡았나. , 아저씨 혹시 개 한 마리 정도 기르는 건 어때요? 산짐승도 쫓고 가끔 대리고 사냥도 하면 좋잖아요?”

내가 마을 아가씨들 마냥 미소를 진채 말하자 산지기 아저씨는 호탕한 웃음으로 답했다.

산짐승들이야 아가씨가 만들어주는 부적이 워낙 효과가 좋아서 보기도 힘들다고. 사냥은 혼자로도 충분하고. 이쯤 되면 포기하고 그냥 기르지 그래? , 인연이라고 하는 것도 있잖아.” 인연은 개뼈다귀. 으흠, 부적의 효력을 조금 낮춰 볼까?

 

인근 마을에서 축제가 열렸다. 산자락에 살고 있는 유일한 마법사다 보니 형식상 초대장이 오기 마련이다.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기분전환이나 할 겸 마을로 내려갔다.

개녀석을 데려갈 여유는 없다. 가뜩이나 사람으로 붐비는데, 저 것 까지 신경 쓰는 건 내 역량 밖이다. 녀석 전용 문은 열어 놨으니, 심심하면 산책이라도 하겠지.

문제가 하나 있다면 요즘 따라 저것의 편식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먹고 남은 음식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곧잘 먹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릇을 들이밀어도 지가 고개를 돌렸다. 배부른 녀석. 그래도 제 때가 되면 그릇이 비워지고는 하니 개는 역시 개다. 저렇게 편식을 하다 간혹 신물을 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으면 좋으련만.

마을 사람들이 챙겨준 음식을 싸들고 어두운 산길을 올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만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만월은 마법사에게 가장 좋은 달이다. 이번에는 무슨 연구를 해 볼까.

수풀 너머로 달음박질 소리가 들린다. 짐승의 소리다. 이 근방에서 이렇게 천방지게 뛰어다니는 녀석은 딱 하나다.

개녀석이 나를 향해 날아들자 나는 몸을 가볍게 피했다. 씩하고 웃자 녀석도 분한지 다시 덤벼들었다. 수차례 술레잡기를 하니 나도 녀석도 지치고 말았다. 달밤에 뜻하지 않게 몸을 움직였다.

문뜩 바구니에 든 큼지막한 뼈다귀가 떠올랐다. 내가 개를 기른다는 것을 안 마을 사람들이 챙겨준 것이다. 내가 주는 음식도 가리는 녀석이 다 식은 뼈다귀에 무슨 관심을 보일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내가 먹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웬걸 내가 바구니에서 뼈다귀를 꺼내자마자 개녀석은 내 다리를 붙잡고는 몸을 흔들었다. 눈동자도 이미 뼈다귀에 고정되어 있었다. 주지 않았다가는 나를 물 기색이다.

당황한 나머지 뼈다귀를 던져 주지 않자 개녀석은 기다리지 못하고 뛰어올라 목표물을 덥석 물었다. 그 후 구석으로 가더니 사정없이 이빨 자국을 남겼다. 녀석의 식사 장면 중에 가장 흥분하고 있는 모습이다.

뼈다귀만으론 성에 차지 않는지, 앞발을 든 채 바구니를 꿰차기 위해 몸부림쳤다. 기세에 압도된 나는 안에 있는 축제 음식들을 적당히 내주었다. 녀석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다.

, 내 요리가 맛이 없나?

 

개녀석과의 동거는 장마가 시작될 무렵까지 이어졌다. 내가 혼자 살던 공간을 저것과 나눈 것이니 아무리 봐도 내가 손해다. 마을 사람들 중 개를 기를만한 사람들은 이미 개를 기르고 있으니, .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건 외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인데, 차라리 거절당한 거였으면 좋으련만. 저주를 물고 온 것이지는 모르나 저것이 온 이후로 이 탑을 찾아온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 산나물이라도 캐서 팔아야 하나?

 

 

장마가 시작되니, 공기가 습해진다. 습한 건 딱 질색이다.

이곳이 마법사의 탑이라는 것이 이 때만큼은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선반 위에 놓인 작은 상자가 공기에서 물을 짜낸 다음 밖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마법으로 만든 도구다.

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습기를 먹은 책은 상하기 쉽고 그 책을 다시 사려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든다. 특히나 여기 있는 책들은 다시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든 책들이다.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는 날이니 손님이 올 턱이 없다. 흔들의자에 앉은 나는 창문 너머의 빗소리와 윙윙 거리는 마도구 소리를 곁들이며 책장을 넘겼다. 발치에는 개녀석이 늘어져 자고 있다. 재롱이라도 부리라는 뜻으로 발로 꾹 찔렀는데, 개녀석은 여기나 만지라는 식으로 배만 까집었다. 저거 요즘 상당히 거만해졌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내 손을 벗어난 책은 자기 자리를 찾아 날아갔고 나는 찻잔을 들고 창가로 향했다. 대자연만큼은 마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개울이 불어 홍수라도 난다면 내 수준으로는 사람 하나 건지는 것이 다다.

마법사는 자연 재해 앞에서 가장 큰 무력감을 느낀다던데, 올해의 장마는 어딘가 남달랐다. 사념에 심히 잠겨있어서 그런지 개녀석이 내 발치에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비가 오니 녀석이 쓰는 문도 한 동안은 굳게 닫혀 있다.

저것을 어떻게 처분하겠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개녀석이 이 탑 안에서 차지하는 공간도 상당히 넓어져 막상 떠나고 나면 심히 허전할 터. 혼자서 탑에 살면 뜬금없이 외로움을 탈 때가 있다. 이내 사라지긴 하지만 그 때의 먹먹한 감정은 외로움이니 적막함이니 하는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별안간 나와 개녀석이 고개를 쫑긋 든 것은 빗소리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말발굽이 진흙을 튕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나는 소리 없는 쾌자를 불렀다. 이런 굳은 날도 마다하지 않고 온다는 것은 꽤나 중한 일이리라. 당연히 돈도 많이 굴러 들어온다. 개녀석은 오랜만에 손님이 오자 꼬리를 살랑거렸다.

소리는 점점 커져 탑 앞에 당도했다. 말이 푸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처마 아래에 말을 묶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발을 굴러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가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손님맞이용 로브가 나풀나풀 떨어졌다. 습기를 빨아먹는 장치에도 힘을 보태 집 안의 눅눅함을 최대한 날렸다.

내가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 앉자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인사말을 건네기 이전에 지팡이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손님은 끌려오다시피 안으로 들어왔고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은 곧장 닫혔다.

입고 있던 우비는 허공으로 떠 뜨거운 열기에 감싸졌고 정면에는 마른 수건이 떨어졌다. 장마를 해치며 이곳에 당도한 이에게 탑의 주인이 베푸는 배려다.

대부분 일련의 과정에 놀라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보일 때가 많은데, 상대는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마법사거나 마법사와 가까운 귀족이거나. 옷차림을 보아하니 후자이니라.

고급 염료로 물들인 옷에 가죽 갑반을 더했다. 허리춤에는 금사 장식까지. 기능성을 중시하긴 했지만, 품위를 또한 고려하고 있다.

가장 결적적인 것은 상대의 태. 근육이 잘 붙어있는 몸이지만, 목수나 대장장이의 것과는 다르다. 아마도 기사의 것.

젖은 머리카락을 닦으며 남자는 자리에 앉았다. 반반한 얼굴이 여럿 귀부인들을 울렸을 것 같다.

마법사의 탑에 어서...”

, !!”

이 망할 개녀석이. 격식을 차리려고 하니까 꼭 이렇게 지랄을 한다. 그러다가 이 손님이 가버리면 저녁밥은 어떡하려고.

다행이도 손님이 침을 퉤 뱄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개녀석이 다가오자 턱을 긁어 주었다. 사냥을 좋아하는 이들은 개들도 좋아한다는데 이 손님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내개 대뜸 금줄로 묶인 두루마리를 내밀며 말했다.

소집령입니다.”

그 한 마디는 장마 이상으로 내 얼굴을 짓뭉개기에 충분했다. 내 표정이 어떤 식으로 느껴질지 모르나, 대충 사지로 끌려가는 병사를 보는 심정이지 않나 싶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클리슈앙 폰 아인하르트 변경백의 삼남 힐리디안 폰 아인하르트라 합니다.”

힐리디안은 예를 갖추며 인사를 했지만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덜 익은 산마루를 실수로 먹은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풀었다. 아인하르트 변경백, 꽤 멀리 있는 영주다.

소집장에는 국왕의 인장과 변경백의 인장이 정확하게 찍혀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을 한 번 훑었지만, 위조된 것은 아니었다. 휘황찬란한 수식어를 뒤로하니 그곳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엘리엔 울프겐.

전령도 아니고, 아인하르트 변경백의 삼남께서 친히 이 먼 곳까지 소집장을 들고 오신 이유가?”

내가 생각해도 어투가 꽤나 무례했지만, 힐리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울프겐 양의 도움이 필요해서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런 상투적인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데, 힐리디안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리엔이라고 불러요.”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의 입에서 몇 개의 단어가 더 튀어나왔다.

울프겐 양의 스승님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제 내 표정은 쓴 것을 참지 못해 굳어버렸다. 개녀석이 내 발을 깔아뭉갠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 스승님과 관련된 문제라고요?”

나는 힐리디안에게 몸을 내밀며 물었다. 내 반응에도 힐리디안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스승님과 관련된 문제라면 이 자가 내게 온 것도 대충은 이해가 간다. 것보다 과연 어떤 문제란 말인가. 힐리디안은 내 궁금증에 답을 하기 전에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돌을 내밀었다.

자세한 설명은 목적지에 가서 해드리겠습니다. 이걸 사용할 줄 아십니까?”

맙소사, 이 귀한 걸.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귀환석이라는 물건이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지정된 장소로 바로 이동시켜 주는 물건이다. 나도 딱 한 번 사용해 본 적이 있다.

없어서 못 쓸 뿐이죠.”

귀찮은 일에 휘말릴 걸 알면서도 내 얼굴에는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귀환석이라니, 이 귀한 걸 써보는 구나. 내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자 힐리디안은 싫은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일반인이란.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하죠. 소지품은 간단한 것만 챙기시면 됩니다. 필요한 물품은 현지에서 바로 조달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배낭에 적당히 필요한 것만 담은 다음 여행용 로브로 갈아입었다. 혼자 살았을 때야 바로 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탑에 남아야 되는 것이 있다. 음식과 물은 넉넉히 준비해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지기 아저씨에게 편지를 한 통 날렸다.

힐리디안은 차도 마시지 않고 벽에 기댄 채 내가 준비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정신없어 하는 것을 안 개녀석이 눈치 좋게 그에게 다가가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턱을 긁어 주었다.

준비가 끝나자,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마침 비도 그쳤다. 널찍한 바닥에 진을 그리고 정중앙에 귀환석을 놓았다. 나와 힐리디안, 그리고 그의 손에 이끌린 말이 진 안으로 들어가자 개녀석도 집 밖으로 나오려 했다. 내가 뭐라 하기 전에 힐리디안이 손으로 녀석을 제지했다.

개녀석은 문 뒤에서 낑낑 거리며 울었다. 얼마나 서글프게 우는 지, 계속 듣기가 차마 뭐했다.

나는 문 앞에다가 마법을 걸었다. 녀석이 드나드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비가 들이치지는 않는다. 또한 비를 맞았을 때를 대비해 마른 수건이 준비되도록 해났다. 혼자 산장으로 찾아간다는 얘기도 들었으니, 며칠 정도 잘 견딜 것이다.

지팡이를 양 손으로 부여잡고 귀환석에 마력을 불어넣자 공중으로 부유한 귀한석이 형형색색의 빛을 내며 돌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몇 초간 집중했다. 그러자 새로운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귀환석을 중심으로 주변 공기가 빨려 들어간다. 거센 바람이 마법진 주위를 맴돌았고 축축한 흙도 함께 날아올랐다. 이내 마법진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에 나는 개녀석을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 내가 없을 동안 잘…….”

말이 끝나기 전에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탑에 남은 것은 없으리라. 괜히 음식만 썩게 생겼다.

 

 

이 빌어먹을 개녀석!!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함성 소리가 나무사이로 기어들어갔다. 짙은 숲은 주변의 소리마저 먹는 듯하다.

일단은 아인하르트 변경백 령. 하지만 목적지는 아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도 비가 왔는지 흙이 축축하다. 따라서 발자국도 선명하게 남았다. 나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가증스런 육구 자국을 쫓았다. 힐리디안 역시 휘청휘청 거리며 내 뒤를 따랐다. 힐리디안의 손에 고삐를 붙잡힌 말은 우리의 뒤를 간신히 따르고 있었다.

내 목청에 산새가 날아오르자 힐리디안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귀의 힘을 보아하니 얼추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울프, 아닌 리엔 양. 일단 진정하세요. 개한테 화를 낸다고 달라지진 않습니다. 저도 말도 정신이 돌아왔으니 목적지까지 안내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나는 턱을 위로 들어 몸을 풀었다.

좋아, 화는 안 낼게. 일단 나와. 이 개녀석아.”

말은 또 잘 알아들어서 내 말이 끝나자마 덤불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상황을 살피듯 귀와 꼬리가 모두 아래를 향해 있다.

개녀석이 갑자기 뛰어들어 마법에 문제가 생겼다. 다른 장소에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 충격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마법사가 아닌 힐리디안이나 그의 말은 피해가 더 크리라. 그런데 개녀석은 생각 외로 말짱했다.

알아서 따라와.”

나는 힐리디안의 손을 붙잡고 말 위로 올라탔다. 그가 고삐를 튕기자 말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개녀석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가끔 잉잉거리며 지그재그로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힐리디안의 말에 따르면 개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오랜만에 오면 저리한다고 한다.

저주개입니다.”

등 뒤에서 말을 몰고 있던 힐리디안이 그리 말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며 말의 갈기를 꽉 움켜줬다.

저주개가 나타났습니다.”

말발굽 소리나 바람 소리에 자신의 말이 묻혔다고 생각했는지, 힐리디안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뒤편에서 들려오는 그의 말은 확실하게 들렸다

얼마나 크죠?”

처음 발견됐을 때는 곰보다 큰 정도였습니다. 지금은간신히 숲에 가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부분의 저주개는 이름 그대로 개만한 크기이다. 좀 더 커져봤자 늑대나 호랑이 정도인데, 처음 봤을 때부터 곰만 했다니. 힐리디안의 말로 미루어보면 지금도 커지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엄청 강력한 저주이거나 아주 오래된 저주이거나. 아니면 둘 다 일 수 도 있다.

왕도의 마법사가 몇 주 전에 당도해 어떻게든 진행을 늦춰 보고는 있습니다만, 상황이 녹록치 않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마법사의 입에서 내 스승님의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쓴 약을 억지로 목구멍에 쑤셔 넣는 표정으로.

스승님은 해주 분야에서만큼은, 왕국 아니 대륙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괴인이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괴팍한 면이 많았다. 벽지에서 탑을 짓고 살았던 것도 이해는 간다. 내가 보기에도 스승님은 상당히 독특했다.

스승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제자인 나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또 리엔 양의 스승님께서는 오래 전, 그러니까 저희 아버님도 아직 태어나시기 전에 이 지역에 나타난 거대한 저주개를 처리해 주셨다는 기록도 발견했습니다.”

스승님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은 아마 이 뜻. 변경백 입장에선 제자인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힐리디안이 널찍한 손으로 등을 토닥였다. 감사의 의미와 함께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것 같은데, 개뿔은.

, 망할, 망할. 저주개라니, 저주개라니. 거기다 크기도 엄청 큰데. 저걸 어떻게 처리해. 스승님한테 이 정도 크기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배운 것 밖에 없단 말이야. 이 인간들은 내가 스승님만큼 대가인 줄 알고 착각하는 모양인데지금 와서 내뺄 수도 없고.

이런 걱정에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바로 옆에서 개녀석이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밝은 표정이다. 나는 거의 교수대로 끌려가는 표정이고.

근데, 아까부터 구린 내가 나는데.

이 언덕 아래 입니!”

나는 힐리디안의 입을 막은 다음 고삐를 돌렸다. 말도 낌새를 눈치 채고는 쏜살같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개녀석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 방금 무슨!?”

힐리디안이 격양된 얼굴로 물었다.

귀환석에 지정된 장소가 저기였다고요?”

힐리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개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배낭에 있던 육포 조각 하나를 던져줬다. 공중에서 먹이를 낚아 챈 개녀석은 몸을 웅크린 채 육포와의 싸움에 들어갔다.

개녀석 아니었음 다 죽었겠네.”

힐리디안은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말은 담담하게 하시네요.”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야 마법사니까요.”

조금만 집중에 실패하면 내가 만든 불꽃에 내 몸이 탈 수 있고 시약을 조금만 잘 못 섞으면 집 채 날아갈 수도 있다. 마법을 쓰는 것은 외줄을 타고 절벽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니까. 죽음이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들의 몸을 공기방울로 감쌌다. 이정도면 걸어 다니는데 문제는 없으리라.

저주개를 붙잡아 둔 자리에는 누가 있었죠?”

왕도에서 온 마법사가 한 명. 그리고 저희 쪽 마법사가 두 명 있습니다. 그 외 잡역부가 서너 명 정도……. 이미 늦었을까요?”

거기 마법사들이 얼마나 유능한지에 달렸죠.”

대비를 다한 우리는 고삐를 당겼다. 언덕을 올라 아래를 굽어보자 힐리디안이 이를 갈았다. 기사의 입장에서도 상황은 처참했다. 공중에는 검은 안개가 꾸물거렸고 바닥에는 검은 피가 흩뿌려져 있다. 저주개를 붙들어 놓았을 사슬들은 파편만 남은 채 녹아 버렸다.

자그마한 식물들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찐득하게 녹아 버렸고 거대한 나무들도 뿌리와 가지가 함께 썩어 이리저리 나부라져 있었다. 마침 날아가던 산새 하나가 안개에 둘러싸여 바닥으로 추락했다. 삽시간에 괸 상처와 검은 반점이 가득 생겼다.

마법으로 방어하고 있음에도 메케한 냄새가 코를 질렀다. 역병이 돈 마을에서 나는 냄새가 이보다는 나으리라. 수레바퀴만한 발자국이 숲 밖을 향해 나있었고 안개도 그것을 따라 퍼지고 있었다. 저주개는 저리 갔으리라.

안개 안쪽에는 푸른 막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이곳에서 저주개를 감시하던 이들이 있었다. 몸에 검은 반점이 보였지만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다. 나는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왕도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마법사는 아직 정신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뭔 일이 있던 거예요?”

나는 그의 볼을 세게 치며 물었다.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좀 더 멀쩡해진 왕도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저주개가 갑자기 발작을 해서이곳 마법사들이 그만.”

그는 곧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얼빠진 것들.”

나는 이곳에 쓰러져 있는 이들에게도 우리에게 건 것과 같은 마법을 걸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망가진 수레가 하나 있었다. 그것 앞에서 지팡이를 휘두르자 사람 몇 명은 충분히 실을 정도가 됐다. 그 후 힐리디안이 그들을 수레에 옮겼다.

나는 저주개가 지나간 방향을 바라봤다. 숲 위로 날아오르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이 근처에 큰 마을이 있나요?”

숲을 빠져나가면 도시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주먹으로 이마를 쳤다. 일이 점점 더 꼬이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힐리디안이 묻자 나는 눈만 흘겼다. 영주 자식은 물론이고 마법사까지 가장 기초적인 것을 모르다니.

모든 저주에는 악의가 있어요. 악의가 크면 클수록 저주도 세지는 거고요. 저주개한테 악의를 담아 마법을 쓰다면일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는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다. 스승님, 예전에 오셨을 때 이런 기초적인 건 좀 알려 주시지. 아무리 시간차가 있다 해도, .

일단 이 인간들 대리고 그 도시로 가세요. 그 방울은 곧 사라질 거니까, 안개는 알아서 피하시고요.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대피 준비도 해놔요.”

지름길을 아니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을 겁니다.”

지팡이를 휘두르자 신발 아래에 바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날아가려는 찰나 개녀석이 컹 하고 크게 짖었다.

너도 같이 가자고?”

그래, . 혼자 가는 것 보다야 둘이 가는 게 낮지. 나는 개녀석의 발밑에도 바람을 모았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면서 우리 둘의 몸을 하늘로 띄웠다. 휘몰아치는 바람을 한 쪽 팔로 가리며 힐리다안이 외쳤다.

리엔 양, 어떻게 방법이 있습니까?”

일단 부딪혀 보는 거예요.”

곧 힐리디안이 작은 점으로 보일 정도까지 날아올랐다. 도시를 찾아가는 안개의 흐름도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저주개도.

빌어먹게 크네.”

이미 머리는 숲 밖으로 들어나 있다. 근처로 날아가니 쿵쿵거리며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힐리디안 앞에서는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았지만, 사실 자신은 없다. 저주개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긴 하니, 그게 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는 막심할 것이다.

이곳이야 내가 사는 곳에서 거리가 머니, 눈 딱 감고 모른 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은 차마 고려할 수가 없다. 녀석, 마법사 주제에 바보스럽게 착하다니까.

날아가는 도중 개녀석이 내 곁으로 와 코를 들이밀었다. 뭔가 비웃는 것 같아 괜히 짜증난다. 내가 실패하면 너도 죽어, 인마.

우리는 곧 저주개의 근처까지 날아갔다. 가까이서 보니 성 한 채 정도의 크기다.

힐리디안이 피난 준비를 시킬 동안 시간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저주개의 진향 방향 앞에 내렸다. 아직은 평화로운 숲이지만, 곧 검은 안개로 가득 찰 것이다.

땅에 내리자 저주개의 발소리가 더욱 커졌다. 지팡이를 부여잡은 손이 떨렸고 이마에선 한 줄기 땀이 흘렀다. 개녀석도 내 발치에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저주개는 형체가 있는 듯 없는 듯, 흩날리며 다가왔다. 눈도 귀도 입도 없지만 누가 봐도 겨의 형상이다. 흔히 검은 개가 저주를 불러온다는 말은 이것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 이제 어쩔까. 스승님한테 좀 더 많이 배워 둘걸.

나는 지팡이 위에 최대한 밝은 빛을 끌어 모았다. 해주를 위해서는 이래저래 많은 준비물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다. 일단 임시방편으로라도 녀석의 진격을 막는다.

다행이 효과가 있다. 녀석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자연스레 사라진다면 좋으련만. 결국 체력 싸움에 들어갔다.

지팡이를 부여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릴수록 더욱 힘이 들어갔다. 시야도 점점 좁아진다. 앞에 있는 것은 저주개, 맞서고 있는 것은 나. 그리고 응원인지 뭔지 모르나 옆에서 짓고 있는 개녀석.

문제는 너무 과하게 집중 했다는 것. 녀석은 더디게 움직였지만, 안개는 계속 퍼져나가고 있었다. 곧 우리 주위를 안개가 매웠다. 이 빛을 만드느라 우리를 지키고 있던 공기방울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틀렸다. 어떻게 내 수준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힐리디안과 합류해서 사람들의 피난을 돕는 게 빠르리라. 차라리 마법사들을 긁어모아 저주개가 남긴 것을 처리하는 게 합리적이다.

마음을 정한 내가 날아오르려는 찰나, 개녀석이 갑자기 내 지팡이를 뺏고는 뒤로 물러났다. , 저게 미쳤나?

녀석은 지팡이를 문 채 고개를 가로 젓는다. 자세히 보니 몸 군데군데에 괸 상처와 검은 반점이 보인다. 침도 비정상적으로 많이 흘리고 눈도 약에 취한 것만 같았다. 마법사인 나보다 개녀석이 내성이 낮은 것은 당연하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고성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개녀석이!! 뭐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죽으라고…….”

스승님의 말씀이 화살처럼 꽃이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저주개한테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지팡이 없이도 마법을 부릴 수는 있으나 그건 간단한 마법에 한해서 이다. 그런 간단한 마법 따위 마법사들 입장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마법. 스승님한테 배운 적이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마법이 있나 생각했지만.

저주개를 막아주던 빛도 꺼졌고 이미 안개가 주변을 완전히 감쌌다. 몸에서는 서서히 검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신도 점점 멍해진다. 곧 고통에 몸부림치리라. 이렇게 담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판사판이다. 나는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고개를 드니 저주개가 바로 앞에 있었다. 다리가 떨리며 헛웃음만 나온다.

입은 없건만 저주개는 마치 우리 둘을 집어 삼키는 것 같이 달려들었다. 준비를 마친 나는 저주개가 나를 삼키기 전에 먼저 달려들었다. 어떻게 정신을 차렸는지 개녀석도 내 뒤를 따랐다.

주변에 빛 한 점 없이 모든 것이 어둠에 먹혔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힐리디안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식사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아인하르트 변경백의 저택. 손님에게 제공하는 방 중 가장 좋은 방이리라. 더군다나 하녀도 아니고 저택의 도련님이 손수 식사를 가져다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개녀석도 침대 아래에 마련된 바구니에서 코를 푸드득 거리며 자고 있다. 집에서 쓰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방석일 테니 지금을 즐기는 중이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법을 썼죠.”

그런 게 존재는 합니까?”

나는 씩 웃는 걸로 답변을 대신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법. 그런 걸 가르친 스승님은 참으로 괴팍한 사람이다. 가르쳐 주시는 김에 이런 쓰임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려주시지. 내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을까.

저주는 악의를 동반한다. 저주의 집합체인 저주개는 악의의 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악의는 밖으로 들어나기 마련. 따라서 악의를 공략한 것이다.

악의는 계속 누군가를 향해 움직여야만 한다. 움직이지 않는,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악의는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목적을 잃은 악의는, 저주는 사라지는 것이 당연지사.

저기 있는 견공한테도 많은 빚을 졌군요.”

힐리디안이 자고 있는 개녀석의 머리를 긁어주며 말했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다리를 앞뒤로 파닥거린다.

알고 한 건지 모르고 한 건지야 저 개만 알겠지만요.”

코를 쿡 찌르자 개녀석이 깨어났다. 단 잠을 왜 방해했나는 식으로 으릉거리며 이빨을 보인다. 나와 힐리디안은 그 모습을 보고 함께 웃었다.

엘리엔 울프겐 양.”

힐리디안이 진중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귀족의 신분이 어투에서 느껴진다.

혹시 더 큰 무대에서 활동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원하신다면 아인하르트 변경백의 명으로 추천장을 써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이곳으로 오시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임은 물론입니다.”

스승님도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했을 때 이와 비슷한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스승님은 거절했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만 저는 스승님의 탑을 지켜야 하는지라 거절할 수밖에 없네요. 그리고 또...”

나는 말을 끌며 개녀석을 굽어봤다. 어느새 다시 꿈나라에 빠져 있다.

힐리디안 백작부인이 개털에 민감하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하지만 은인이 나와 개녀석을 어찌하지는 못해 백작부인의 방과는 가장 먼 곳을 배정해줬다고 한다. 어찌 그것을 알았나, 궁금해 하는 눈치로 힐리디안은 얼굴을 풀었다.

저도 개를 기르고 싶었지만, 어머님의 반대가 워낙 강고하셨죠.”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됐다.

추천 제의는 거절했지만, 변경백이 제공해주는 다른 호의는 받을 만큼 받아드렸다. 나나 개녀석이나 저주에 당한 것이 있어 며칠 간 성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또한 성에 있는 동안 멍청한 짓을 한 이곳 마법사들을 기초부터 다시 가르쳐 주느라 고생을 하긴 했다. 하여간, 이런 쓸모없는 마법사를 고용해서 쓰고 있다니. 아인하르트 변경백이 이 분야에서만큼은 감식안이 없는 모양이다.

왕도에서 온 마법사는 몸이 얼추 회복되자 바로 돌아갔다고 한다. 저주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내게 물으러 와서 내가 있는 그대로 말해줬는데, 그는 여간 불편한 표정이 아니었다. 실력이 좋은 마법사 일수록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다는데, 그는 어떨지. 아무튼 스승님의 방식이 한동안 왕도에서 화자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아인하르트 변경백의 마차를 이용한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상 이상으로 편했다. 이렇게 넓고 편안한 마차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난생 처음 알았다. 개녀석은 마차에 안에서 늘어지기도 하고 말들과 함께 뛰어다니기도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마법사의 탑으로 돌아오니 일대는 큰 소란이 벌어져 있었다. 사건이 마무리 되고 이쪽으로 연통을 보내기는 했으나, 일대의 유일한 마법사가 사라지니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덕분에 이런저런 것들을 살피느라 돌아와서는 잘 쉬지도 못했다. 일이다 정리되고 나니 문뜩 떠오른 것이 있어 앞치마를 메고 부엌에 섰다. 생각해보니 스승님은 마법을 쓰는 것보다 두 손을 이용해서 요리하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 손맛이라나, 뭐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법을 쓰고 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괜히 집안일 정도는 두 팔과 두 다리로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 주제에, .

음식을 한 아름 들고는 산장 반대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 개녀석도 음식 냄새를 따라왔다. 우리는 거대한 수호목 앞에 섰다. 그 앞에 마련된 제단에 공물을 내려놓고 묵념을 했다.

여전히 저한테 가르침을 주시네요, 스승님. 아니, 할아버지.”

눈을 뜨자 수호목에 걸려 있는 나무패가 보였다.

 

알렌시아 울프겐, 여기서 자연으로 돌아가다.

 

잠시 추억에 잠겨 있으니, 제단이 들썩거린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개녀석이 공물을 입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 저건 우리 할아버지 몫이야, 개녀석아. 사실 산짐승들이 먹을 것이니 할아버지가 감안해 주시리라. 빚은 이걸로 퉁치는 거야.

다시 탑으로 돌아와서 스승님의 방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와서 그런지 먼지가 뿌옇게 떠있었다. 돌아가신 이후로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던 방이다.

문뜩 스승님의 서재에서 잡히는 책이 하나 있었다. 동물에 관한 책이다. 중간에 뭐가 끼어 있어 그 부분이 자연스레 펴졌다. 펼쳐진 곳에 적힌 것은 개와 늑대와 관한 내용이고 안에 낀 것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내 편지였다.

생일 선물로 집에서 늑대를 기르게 해달라고 스승님께 부탁하려는 내용이었다. 될 리가 있나. 내가 이런 편지를 썼다니, .

편지가 도중에 끊긴 것을 보아 쓰다말고 책 사이에 꽂아 넣은 모양이다. 스승님은 이 편지를 봤을까.

따라 들어온 개녀석이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설마...”

아니지, 아니야. 그냥 다 우연이겠지

 

 

청소가 끝나니 내 몸이 더러워졌다. 나무 대야에 뜨겁게 데운 물을 받고 그 안에 들어가니, 몸이 스르륵 녹는 것 같았다. 개녀석의 몸에도 먼지가 상당해 내가 씻고 남은 물을 냅다 부어줬다. 몸에 묻은 물기를 집안 곳곳에 털기 전에 붙잡아 널찍한 수건으로 털을 닦았다.

그 후 침대에 누웠는데, 웬일인지 개녀석이 내 머리맡으로 올라왔다. 개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몸도 뜨근뜨근 한 것이 데리고 자면 기분이 괘나 좋으리라.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정해 주지 않았다. 계속 개녀석, 개녀석 하는 것도 좀 그렇다. 적당한 이름이…… 그래!

나는 손가락에 불빛을 만들고 그것으로 허공에 글자를 적었다.

 

시리우스.

 

앞으로 이게 네 이름이야, 개야.”

시리우스는 자신에게 이름이 생긴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만 갸웃했다. 몸을 더 기대고 싶다. 체중을 실었지만 시리우스도 짓거나 하진 않는다.

,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개 주제에 뭘 알겠어. 이 이름은 말이야…….”

어느 새 우리 둘은 얼굴을 맞댔다. 시리우스는 평소의 표정 그대로.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와 키득키득 웃었다. 대화 아닌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이불 안은 점점 따뜻해져 저절로 눈이 감긴다.

죽은 사람에게 공물을 바치면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올 때가 있다고 한다. 진짠지 환청인지는 지금도 연구의 대상이다. 내 귀에 들린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이리라.

 

귀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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