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1xx1231

 

사흘밖에 없다.

 

아니, 사흘이나 남았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동안의 연구를 기록해온 노트를 수십 번도 더 펼쳐 확인했다. 별다른 징조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한 숨이 전염병처럼 연구실을 휘감는다. 초조해졌다.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동안 달려온 이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된다. 혼자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연구는 나 혼자가 아닌 그녀와 나 둘의 것이다.

난 믿어.”

자신에게 중얼거리던 버릇은 이제 일종의 일과가 되어 버렸다. 나는 믿어. 우리의 연구를 믿어. 계속 중얼거리는 이 모습을 본다면, 십중팔구는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 분명하다. 뭐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니 개의치 않는다. 그녀가 봤다면 픽 웃으며 등짝을 후려치고 한 마디 던지겠지.

 

- 이 양반이. 실성했어? -

 

난 믿어. 믿는다. 분명 성과가 있을 거야.” 여전히 중얼거리며 펼쳐진 노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어 실험대 위를 바라보았다. 오전까지만 해도 투명한 반구의 형상을 띈 글라스에서 꼬물거렸던 하얀 미키는 - 우리는 실험용 생쥐를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미키 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 분명 두 시간 전에 사라졌다.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나는 성공을 직감했다. 그녀가 함께 있었다면 껴안고 바로 입을 맞추었을 거다. “난 믿어. ......” 눈물이 뚝, 떨어졌다. 노트 끄트머리가 조금씩 젖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을 원망했다. 이것이 그릇 된 행동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신이시여, 존재한다면,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기도하듯, 그녀가 내게 건네 준 펜던트를 집어 두 손에 품었다. 그녀는 이 펜던트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었다. 우리의 사랑을 확인한 날, 그녀가 내게 건네주었을 때의 그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 , , 이거 줄게. 낡았지? 어머 표정 봐? 이게 얼마나 나에게 소중한 건데.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펜던트 때문이야. 이 펜던트가 아니었으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 거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

그녀는 굉장히 부끄러워했고, 항상 강한 모습만 봐 온 내게는 놀랄 일이었다.

- 그런 표정 짓 지마. 웃기잖아. 아마도......처음 하는 얘기일거야. 정확히 이십년전 얘기야.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림받았어 나. 놀이 공원에 데려가서 나만 놔두고 사라졌어. 그때는 몰랐지. 나는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그만 잠이 들었어.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컴컴해질 무렵에야 깨어났어. 그리고 눈치 챘지. , 엄마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 구나. 이제 어떡하지? 아무 생각도 안 났어. -

- 그런......그 어린 나이에 뭘 할 수 있었겠어? -

- 그렇지? 나도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일어나 걸었어. -

- 그냥 걸었다고? -

- . 그냥 걸었어. 그냥. 내키는 대로. 이제 어떡하지 하면서. 그냥. 계속. -

- 그리고? -

- 할아버지가 나왔어. -

- 할아버지? -

- . 할아버지. 하얀색 코트를 걸친 눈처럼 하얀 머리를 한, 할아버지. -

 

 

열린 창 밖에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잠깐 회상에 잠겼었지만 바람의 때림에 눈을 떴다.

!”

어렴풋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구불거리며 나타나는 글자들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로 끝난 노트의 내용은, 어느새 폭주하듯 휘갈긴 글씨들로 뒤덮여갔다.

침을 꿀꺽 삼켰다. 목에 걸린 펜던트를 여전히 꼭 쥔 채, 정신없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건 내 필체이며, 과거의 내가 기록한 내용이었다.

 

성공이야. 성공이다! 미키는 돌아왔어!

실험은 성공했다! 분명 지금 미키는 그대로 있어. 새로 나타난 이 제2의 미키는 분명 앞의 시간에서 되돌아온 것이다. 두 개의 글라스 안에 현재와, 미래의 미키 둘이 뛰놀고 있다고! 이 기록을 보는 미래의 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분명 미친 듯이 기뻐하겠지. 지금의 나처럼. 둘의 모습을 비교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녀가 그리워. 그녀가 있었다면 팔짝팔짝 뛰며 연구실을 방방 뛰어다녔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성과를 얻었다. 우리의 연구는 성공이야!

그나저나 시간이 촉박하지 않는가? 미키가 언제 어느 시간에서 건너왔는지 모르지만 나와 그녀가 정한, 과거로 보내는 시간 설정이 일주일을 넘지 않는다는 규칙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면, 발표가 코앞일 텐데. 이 연구에 대한 보고가 12일 일 테니까 넉넉히 잡아 봐도 발표가 사흘에서 나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지금 내 기록을 본다면 곧바로 이 성과를 기록하라고. 촬영을 했어야 하나? 하지만 조작이라 매도할 게 뻔한데. 어쨌든 성공이야! 그 일이 있고서도 난 포기하지 않았어. 미래의 이 글을 읽는 나도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 믿어. 하루하루가 힘들었겠지만 포기한다면 그녀를 배신하는 거야. 잘 알고 있지? 우리의 연구는 성공해야 해. 그게 그녀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거, 알지? 알지?

알지?

 

목에 걸린 그녀의 펜던트를 움켜쥐며 흐느꼈다.

 

실험은 성공했다.

 

 

21xx1225

 

 

흥분에 떨림을 감추지 못 하며 만년필을 휘갈겼다. 분명 미키는 미래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확신한다. 갑자기 나타난 그 하얀 생쥐는 분명 아까까지 내가 관찰하던 그 미키와는 다른, 같지만 다른 존재이다. 이런 세상에!

좋아, 우리의 연구를 기록하는 규칙은 그녀가 간단하게 정해줬었다.

그녀는 디지털 기록 매체를 거부했다. 촬영이니 녹음이니 하는 것들은, 성과에 대한 환희를 느낄 수 없다며 펜과 노트를 고수했다.

 

- 상상 해봐. 미키를 과거로 보내는 게 성공하면, 과거의 우리는 그 상황을 기록 하는 거야. 그럼 그 기록이 미래의 노트에 남을 거 아냐. 일기 같은 거야. 예를 들면, 오늘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아무 일 없었다 기록을 해줘야지. 그럼 내일의 우리는 그 노트를 보며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판단하고 다시 실험을 시작하겠지. 아무일 없었다가 그대로이면 실패한 거야. 미키를 과거로 보내는 실험을. 그리고 언젠가 미키가 짠 등장하면, 우리는 그 사실을 상세히 노트에 기록하는 거야. -

그녀가 숨을 들이키며 홍조를 띈 얼굴로 속삭였다.

- 미래의 우리말이야. 반포기하는 심정으로 아무 일 없었다라고 적힌 노트만 빤히 보고 있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기록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놀라움? 아니면 해냈다는 성취감? 상상만 해도 흥분되지? 난 그냥 기뻐서 울 거 같아. 그냥 막 흐느끼고 그런 거. ? 곡소리? 아이 참, 웃지마! 그냥 그럴 거 같애. 난 노트 보고 그냥 막 울 것 같거든. 기뻐서. 기뻐서 막 방방 뛸 거 같아. -

 

계속, 일주일 단위로, 실험했었다. 미키를 과거로 보내기 위한 실험들. 눈앞에서 사라진 미키를 보고 기뻐했지만 노트에는 아무 반응 없던 나날도 있었다. 그냥 시공간 한 복판에서 사라져 갔겠지. 정확히 지금 이 시간과 일맥상통 하는 같은 우주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진배없는 모험이었다. 나는 계속 만년필을 움직였다.

 

어쨌든 성공이야! 그 일이 있고서도 난 포기하지 않았어. 미래의 이 글을 읽는 나도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 믿어. 하루하루가 힘들었겠지만 포기한다면 그녀를 배신하는 거야. 잘 알고 있지? 우리의 연구는 성공해야 해. 그게 그녀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거, 알지? 알지?......

 

뭔가 위화감이 엄습해왔다.

내 눈은 두 마리의 미키를 보고 있었다. 현재 나와 함께 하는 미키와, 방금 미래에서 넘어 온 미키. 둘은 같지만, 다른 행동을 보였다. 그것은 수년을 함께해 온 미키와 우리만 알 수 있는 차이였다. 뭔가가 달랐다. 만년필을 가만히 내려놓고, 작은 주사기를 들어 미키에게 다가갔다. 방금 나타난, 등장한, 미래에서 온 미키에게 조심스레 주사기 바늘을 들이밀었다. 움찔 거리며 구석으로 피한 미키가 찍찍 거리는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았다. 가만히 적기를 노리던 내가, 잠깐 멈칫 한 미키의 하복부에 얼른 바늘을 찔러 넣었다. 찍 하는 소리를 내며 미키가 양 발을 마구 휘둘렀다. 서둘러 주사기를 거두고, 소량의 피를 플라스크 안에 담았다. 테스트기에 넣어 돌리면, 성분 분석과 함께 여러 정보들이 나올 것이다. 나는 이 위화감이 쓸데없는 걱정이었기를 빌었다. 두두두 하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테스트기 안 플라스크가 핏 빛으로 물들었다.

모니터에 데이터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미키는 항상 그 날 그 날 상태를 데이터로 보존해왔었기에, 두 데이터를 비교해보았다.

미세한 차이지만,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 두 데이터는 달랐다.

그래프는 수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현재의 미키가 100, 미래에서 온 미키가 97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프로그램을 초기화 한 후, 리붓을 시도했다. 오차 범위가 5이내이면 오류일 수도 있어. 두 마리 미키가 찍찍 거리는 울음 소리가 고요한 연구실을 울렸다. 찍찍. . . 드드득. 드드드득. 미키의 울음과 디스크 로딩 소리와 묘하게 맛물리며 오묘한 화음을 내고 있었다. 눈이 빠져라 모니터를 주시했다.

어서 보여줘.

10097.

머리가 아파왔다. 이럴 수가.

다시 만년필을 들었다. 빨리 이 사실을 미래의 나에게 알려야 했다.

 

 

21xx1231

 

 

- 갑자기 할아버지가 나타났어? -

- . 처음에는 마법산줄 알았어. 아무도 없는데, 모두 돌아가고 없는데 한 밤중에 나타났으니까.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코트를 입고 있었어. 코트였었나? 의사들이 입던 가운 같기도 했고. 아무튼 놀랐지만, 막상 무섭진 않았어. 우리들도 동물이니까 본능이 있잖아? 나를 해칠 거다 하는 거. 그런 게 안 느껴졌거든. 난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어. 내가 뭘 입고 있었더라? 노란 색 원피스였을 거야. 가난해서 나, 그런 옷 입어본 적이 없었거든. 내게 미안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줬던 것 같아. 기억도 안 나는 부모님이. 날 버리고 간 부모님이. 가만히 서 있는 내게 할아버지가 천천히 걸어왔어. 머리도 하얗고, 옷도 하얗고, 그냥 마법사 같았어. -

- 그래서? -

- 나한테 안녕하고 인사하더라. 우물쭈물 네 안녕하세요라 답했지. 아니 그럼 뭐라 해? 안 무서웠다니까? 정말이야. 아무튼,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거야. 빤히 지켜보더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도 가만히 있었어. 조금 지나니까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어. 착하네. 할아버지 안 무서워? 나는 대답 않고 고개만 끄덕였어. 정말 무섭지 않았어. 진짜라니까?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감이 뛰어나단 말야.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나도 모르게 느낄 수 있다구. 할아버지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어. 아가씨. 내 손 잡아요. 이랬어. 그 말투가 너무 다정해서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어. -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왜 자꾸 그녀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걸까. 그녀가 펜던트를 주며 내게 했던 얘기들. 이렇게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다. 사흘 후에 있을 연구 발표를 위해 빨리 실험 결과와 성과를 정리를 해야 한다. 큰돈을 들여 투자한 투자자들에게 성과를 보여줘야 했다. 지금도 불필요한 연구라며 여기저기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말 놀라워......”

불과 몇 분 전에 벌어진, 순식간에 바뀐 노트의 기록을 보며 다시 한 번 숨을 죽였다. 하늘에서 보고 있지? 우리 연구는 성공이라고.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나는 미키가 사라진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만년필을 들었다. 그녀가 주구장창 주장하던, 직접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위한, 첫 시작부터 필기에 애용했던 만년필이었다.

 

최고의 선물이라는 거, 알지? 알지? 알지?...... 잠가 깐 만 기다 ㄹ ㅕ

 

뒤늦게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기를 하려던 걸 멈추고, 가만히 노트에 나타나는 글자들을 보라보았다.

 

잠깐만 기다려. 이상해. 이상하다. 뭔가 이상해. 방금 수치를 비교했다. , 피를 뽑아 몸의 성분을 비교해봤어. 같아야 하지만 미묘하게 달라. 미래의 나에게 부탁한다. 시간이 얼마 없겠지만 마지막 실험을 부탁해. 너무 짧은 시간이라 오류인지 내 생각이 맞는지는 정확히 확인 할 수 없어. 일주일은 너무 짧아. 시간을 좀 더 뒤로 돌려. 좀 더 뒤로 보내. 그러면 바로 알 수가 있어. 과거로 보내는 것은 성공했으니 이제 이 이상현상에 대한 것만 확인하면 되잖아?

 

무슨 소리야? 글자들은 쉬지 않고 계속 나타났다. 삐뚤삐뚤 한 글체는 다급한 심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생각이 틀렸기를 빌어. 온전히 그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가면 돌아가는 만큼 단축 돼. 온전한 존재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lifespan 수치는 10097로 달랐어. 무슨 말 인지 알지? 너도 나니까 이게 뭘 뜻하는 건지 바로 알겠지?

 

만년필을 툭 떨어뜨렸다. 당연히, 무슨 얘긴지 알 수 있었다.

수명이잖아. 돌아간 시간만큼, 늙는 다는 거잖아.

 

실험을 확실히 확이 인

 

이동하면 수명이 줄어든다고?

아니 그래도, 미키는 이미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고 없다고. 이미 미키는 돌아가고 없어. 고민하던 중 뭔가가 번뜩였다. 나는 곧바로 미키가 뒹굴던 우리로 다가갔다. 조심히 핀셋을 들어, 바닥에 흩날리는 미키의 털 자락들을 집어 모았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 조심히 넓적한 비커에 담고, 작은 메모지에 간단하게 설명을 적었다.

[미키의 털이야. 수명 분석을 해서 노트에 기록해줘.]

비커에 같이 넣고 랩으로 봉인한 후, 오전만 해도 찍찍 거리며 나를 지켜보는 미키가 있었던 실험 반구에 비커를 집어넣었다. 이거면 미키의 수명 수치를 파악할 수 있어. 언제로 돌리면 좋을까. 며칠이 아닌, 최소 몇 개월은 뒤로. 그래야 확실한 결과가 나올 거야.

 

!”

 

머릿속에 떠오른 건, 지금부터 9개월 전인, 329일이었다.

 

- 피곤한데 좀 자도 돼? -

- 어디 아픈 거 아냐? 오늘은 연구실 말고 집에 돌아가서 쉬어. -

- 아니야.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

- 이거 마무리 되면 집으로 갈게. 그동안 잠 좀 자고 있어. 연구실은 불편하잖아. -

- 싫은데...... -

- 내 말 들어. 금방 갈게. -

 

329일이었다.

웃으며 연구실을 나선 그녀는, 집으로 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치도록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친 듯이 울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 동안 슬픔에 잠겨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연구에 몰두했다. 오직 연구의 성공만이 그녀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그녀가 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애당초 이 연구의 끝은, 시작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녀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다급히 노트를 펼쳤다. 그녀가 떠난 뒤의 기록들. 눈물 자국으로 번진 페이지를 펼치며, 그때의 가슴 아픈 기록들을 살폈다.

 

그녀는 나 때문에 죽었다.

내가 그녀를 보내지 않았어도 그녀는 살아남았을 것이 분명하다.

왜 그녀가 남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그녀를 돌려보냈을까. 왜 그랬을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병신. 병신 같은 새끼. 이 병신 같은 놈. 살아서 뭐해 이 등신아. 등신아...

 

눈물이 또 차올랐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집어넣었던 비커를 다시 꺼냈다. 랩을 벗기고, 메모를 집어 들었다. 하나의 문장을 추가했다.

 

[미키의 털이야. 수명 분석을 해서 노트에 기록해줘. 그리고 꼭, 오늘 그녀와 함께 있어.]

 

다시 봉인 한 비커를 집어넣으며, 그녀가 준 펜던트를 부적처럼 쥐고 빌었다.

혹시나, 만약에,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평소처럼 웃으며 반겨준다면.

날짜를 329일로 입력했다. 버튼을 누르기 전, 눈을 감았다.

성공한다면, 수명에 대한 기록이 노트에 나타날 것이고, 그녀가 내 곁에 있을 것이다.

웃으면서, 나를 향해, 웃으면서.

눈을 감은 그대로 버튼을 꾹 눌렀다.

 

 

21xx329

 

 

효정아.”

 

?” 그녀가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 잠을 좀 못자서. 괜찮아.” 그녀가 픽 웃었다.

이 양반아. 자기나 좀 자. 자기는 무슨 멀쩡한 줄 알아?”

아니 나야 뭐 일상이지만, 넌 너무 심해보여서......”

잠깐만.”

그녀가 내 말꼬리를 자르며 글라스를 주시했다. 어느새 입을 다문 나도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릿하던 형체가 점점 또렷해졌다. 작은 비커였다. 랩으로 봉해져 있는 비커였다. 그 안에는 하얀 털들과, 작은 메모지가 하나 있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저기, 이거, , 꿈꾸는 거 아니지?”

대답하는 내 목소리도 그녀의 손만큼 떨렸다.

우리 같이 보고 있잖아.”

이거 분명, 미래에서 온 거지? 그렇지?”

아마도.”

우와아!” 그녀가 기쁨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그럼 우리 성공한 거야? 과거로 가는 연구?”

하하.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닌가봐. 그래도 꽤 진척이 된 거 아닐까?”

, 정말, 기쁘다. 눈물 날 것 같아 진짜.” 그녀가 눈가를 비비며 웃었다.

울다가 웃냐? 큭큭. 아무튼, 일단 메모지를 확인해 보자.”

조심스레 메모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메모는 간단했다.

 

[미키의 털이야. 수명 분석을 해서 노트에 기록해줘. 그리고 꼭, 오늘 그녀와 함께 있어.]

 

미키? 미키가 뭐야? 수명 분석을 해달라고?”

갸웃거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잠깐만. 이거, 우리 실험에 투입 할 생쥐의 털 같은데. 아마 이 생쥐를 미키라 부르나 봐. 미래의 우리는.”

어머! 정말 맞네. 이거 생쥐 털이야. 이름이 미키야? 아유 누구 아이디언지 정말, 유치하다 유치해.”

그러는 너는 왜 실실 웃고 있냐. 사실 미키라는 이름을 지었을 게 누군지, 난 감이 딱 오는데?”

설마 나?”

그럼 나겠냐?”

이 양반이!” 등짝을 탁 올려치며, 그녀가 심통을 부렸다.

얼른 수명 분석이나 해봐. 그런데 그 다음 메모가......”

너랑 함께 있으라는데?”

우리 항상 함께 있잖아?”

오늘, 너와 함께 있으라고 하잖아. 오늘을 딱 강조하면서.” 내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빨리 분석하라고! 뭔가 중요하니까 보냈을 거 아냐. 이거 우리 연구와 실험에 되게 중요한 거일게 틀림 없다구!”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알았어.”

킥킥 웃으며 나는 비커안의 털을 핀셋으로 집어 테스트기안에 넣었다. 그녀가 실험에 쓰일 하얀 생쥐를 손가락으로 놀리며 미소 지었다. “미키야. 너 미키다 이제? 미키라고 부를게.” 그녀가 노트를 찾아 펼쳤다. 만년필을 들어 그녀가 뭔가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뭘 기록하고 있어?”

. 오늘부터 미키 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그런 것도 기록해야 돼?”

모든 걸 기록해야지. 그래야 꼬이지 않아.” 그녀가 답했다.

나는 대답 않고 모니터를 주시했다. 데이터가 출력 되고 있었다. lifespan 수치가 나왔다. 68.

“68인데?”

“68이면 실험에 못 쓸 텐데? 거의 죽어가는 나이잖아?”

일단 수명 분석을 해달라고 요청했으니, 연구 노트에 기록해야지.”

알았어.” 그녀가 노트에 다시 기록을 추가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가슴 한 구석에, 불안한 감정이 흘렀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아주 서늘하고, 온 몸이 굳어지는 불쾌한 느낌이었다. ? 그 메모를 봐서? 장난삼아 웃으며 넘겼지만, 나는 사실 불안에 떨고 있었다. 미래의 나는 분명, 경고를 한 것이다. 분명하다. 나였기에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 미키라는 이름 너무 귀엽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별 다른 반응이 없는 나를 보며 그녀가 흐음 하고 쀼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노트를 덮었다.

배 안고파?”

, 안고파.” 자꾸만 불안함 감정이 올라왔다.

집에 잠깐 들려서 뭐 좀 만들어 올까?”

그녀의 거주지는 연구실과 5분 거리에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며 거부했다.

아니, 가지마.”

? 요 앞이잖아.”

가지 말라니까.”

. 좀 피곤하고 그래서, 샤워라도 한 번 하고 올라 그래. 그리고 메모에......”

메모가 뭐?”

“......오늘 함께 있으라고......나 씻고 올게.”

아니 잠깐만!”

그녀가 씩 웃으며 혀를 비쭉 내밀었다. “우리 말야. 결혼했을까? 아마 저 미래에서는 부부이겠지?” 그녀가 방긋 웃었다. “우리 사랑하잖아?” 아무렇지 않게 연구실을 나서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나는 서둘러 뛰었다.

가지마!”

?”

나와 함께 있어!”

그러니까......씻고 온다고......”

필요 없어!”

내 목소리에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았다.

나와 함께 있어.”

내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눈시울을 붉혔다.

.”

나는 다가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살짝 떨리는 그녀의 몸을 힘주어 붙잡고,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기댔다.

 

 

21xx1231

 

 

-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걸으며 말했어. 모든 건 다 정해진 거라고. 잡은 손이 막 떨렸는데 나는 그냥 아무 말 안했거든. 좀 더 걷다보니 놀이공원을 벗어났더라? 불빛이 보이고, 차들이 막 지나갔어. 갑자기 걸음을 멈추기에, 나도 멈췄지.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서 나한테 줬어.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어. -

- 뭐라고 말했는데? -

- . 별 거 아니야. 그거 잘 보면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있지? 그거, 알아? 그 지팡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야. 아스클레피오스라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 있어. 죽은 사람도 되살리는 위대한 의술의 신이야. 그리고 지팡이에 뱀이 감겨진 건, 허물을 벗는 뱀이 부활을 상징하는 거래. 그냥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지금 너한테 말한 그대로. 죽은 사람도 되살리는 위대한 지팡이라고. 그리고 나를 품에 안고 말했어. 할아버지가 지켜줄게. -

- 지켜준다고? -

- 나를 지켜준다고. 이 펜던트처럼 나를 지켜준다고. 그리고 걸었어. -

- 그때는 좀 무서웠지? -

- 아니. 전혀. 마치 원래 알았던 사람처럼 포근했어.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었어. 피곤에 지친 난 잠이 들었지. 그대로. -

- 그래서? -

 

또 그때 그녀와의 회상이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뜨기 두려웠다. 그녀가 없다면? 그녀가 있다면?

하지만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두 눈을 떴다.

 

그녀는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노트의 기록은 어느새 바뀌어있었다. 329일의 기록을 펼쳐 놓았던 나는, 신중하게 바뀐 내용을 읽었다. 기대했던 그녀는 없었지만, 사실을 알아야 했다.

 

329일의 일지

생쥐가 미래에서 왔다. 우리는 너무 놀라고 기쁘고 환호성을 질렀어. 그는 내심 티는 안냈지만, 너무 기쁜 상태인 걸 알아. 미래에서 온 메모의 내용대로 그가 실험에 들어간 동안 내가 이 기록을 남기는 거야. 난 효정이다. 너무도 그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여자. 이거 보면 깜짝 놀라겠지? 메모에 미키라는 표현이 있었어. 아마도 우리 생쥐를 뜻하는 거라 생각해. 오늘부터 우리도 미키라고 부르기로 했어. 너무 귀여운 이름이야. 누구 생각이지? 설마 나? 아니 그 일거야. 그는 은근 귀엽거든. 자기는 모르지만 귀엽단 말야. 너무 흥분해서 그냥 마구 쓰는 거니 이해해줄거야? 그치? 당신 이해해줄거지? 히히. 아 그가 방금 lifespan 수치가 68이라고 말했어. 이거, 미키가 다 늙어서 죽어가기 전 수치 맞지? 생쥐의 수명은 길어야 6년인데 이 수치라면 죽음에 가깝다는 거잖아. 미키의 명복을 빌며. 아 그런데 메모에 오늘 함께 하라고 적혀 있었어. 우리 결혼했지? 아이도 있나? 나 괜히 그런 생각이 들어. 오늘 우리가 함께 해서, 우리의 아이가 태어나고, 그래서 결혼하고, 서로 사랑하고, 오늘이 너무도 중요한 날이라는 거. 안되는데. 나 며칠을 여기 틀어박혀서 씻지도 못 했어. 이쁜 모습 보여줘야 되는데......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꾹 참고 계속 노트를 훑었다.

 

330일의 일지

 

그녀가 죽었다.

, 나는, 이 불안감이 뭔지 몰랐지만

제발! 제발! 제발!

나는 함께 했어. 그녀와 같이 있었어. 불안했지만 그날 함께 있었어. ! 그녀가 왜! 이걸 막으려던 게 아니야? 그녀가 죽을 거라고 경고한 거 맞잖아! 나는 내가 시키는 대로 그녀와 함께 있었단 말이야! , 아니 미래의 나, 왜지? 왜 내게 그런 경고를 했지? 그녀는 나와 함께한 후 잠들어 있는 틈을 타 아침을 준비한다고 나섰다가 사고를 당했어. ! ! 차라리 그녀가 그 전날 집에 들렀으면, 음식도 마련해오고 아침 일찍 나설 일이 없었다면! 그녀가 죽었을 리 없잖아! ? 도대체 왜? 왜 너, 아니 난 그런 메시지를 보낸 거야?

그녀를 돌려줘. 제발 부탁이야. 제발.

아니 내가 직접 그녀를 구하겠어.

결국 너는 나니까.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모든 건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 바뀌지 않는 운명.

수명 수치가 68이라고? 고작 몇 개월 뒤로 보냈지만, 실제로는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좋아. 이 연구는 실패다.

나는 그녀를 되살릴 수 없으며, 돌아간다 해도 내 수명은 줄어들게 된다.

 

.

문득, 모든 것들이 하나의 그림이 되어 내 머릿속에 박혔다.

 

 

- 할아버지가 날 키웠지. 뭘 그래서야. 부모님한테 버림받은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아마 끔찍한 앞날만 있었겠지. 나의 마법사 할아버지는 마치 운명처럼, 나를 구해줬어. 이 펜던트를 건네주며 나를 이끌었다고. 허물을 벗은 뱀처럼, 나도 새로 부활 한 거야. 할아버지를 만나서. -

- 하얀 코트를 입은? -

- 그날따라 너무도 하얗게 빛나는 모습이었어. 백색의 마법사. -

- 정말 마법사였어? -

- 나에겐 마법사였어. 보살펴주고, 가르쳐주고. 나는 그의 제자였어. -

-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거야? -

- 장난해? 할아버지는 마법사가 아니야. 하지만, 나를 키워줬지. 갑자기 나타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겨준 걸 보면, 분명 마법사야. 한 번도 내게 내색은 안 했지만, 난 알수있었어.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걸. -

- 어떻게 알아? -

- 그냥 알아. 눈만 보면. 눈이 내게 말하고 있었어. 사랑한다고. -

- 정말? -

- 그래서 네게 이 펜던트를 주는 거야 오늘. -

- 영광이네. -

- 나의 마법사한테 받은 선물을 너에게 주는 거야. 그만큼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너도 그렇지? -

- 당연하지. 사랑해. -

- 정말? -

- 네가 준 이 펜던트에 걸고 맹세할게. -

- 고마워. -

- 그런데 할아버지는? -

- 편히 눈을 감으셨지. 울면서 부둥켜안는 마지막으로 속삭이면서. -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 20xx55, 너를 만난 건 내 운명이었다. -

- 뭐라고? -

- 마법사, 아니 할아버지가 내게 마지막으로 말했던 말이야. -

 

모든 건 인과율.

벗어날 수 없는 운명.

나는 깨달았다.

일어서서, 옷걸이에 걸려 있던 하얀 가운을 걸쳤다. 목에 걸린 펜던트를 힘주어 끊어, 주머니에 넣었다. 숨을 쭉 들이켰다. 모든 건 인과율. 한 숨을 훅 내셨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좋아. 알았다고.

우선은, 당장 돌아가도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기는 일이다. 그녀를 보살피고 키우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연구를 위해 기증 받거나 구매 한 고급 광물들과 보석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연구는 성공했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결과는 노트에 기록해 둘 예정이었다. 나는, 아니 나와 그녀는 분명 투자에 대한 연구를 성공했다.

메모를 하긴 여의치 않아 나는 음성 녹음을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내 수명이 다하지 않는 한도에서, 그녀와 조우할 수 있었다. 녹음 버튼을 누르고, 연구에 대한 진행 상황과 그 결과물에 대해 최대한 빠른 소리로 읊으며, 나는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이상입니다. 부가적인 부분은 연구 노트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연구가 만족하길 빕니다. 저는 이제 떠날 준비를 하려 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녹음을 마친 후 노트와 펜을 들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나는 그대로, 미키가 사라졌던 실험대로 다가섰다.

지금 만나러 갈게.”

이대로 과거인 20xx55일에 다다르면 아마도 다 늙은 노인이 되어 있겠지만, 그녀를 잃지 않기 위해 얼른 가야만 했다.

내가 가야,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

너무도 신비하고 놀라운 이 상황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훔친 내가, 마지막 기록을 남기기 위해 노트를 펼쳤다.

누군가 이 노트의 기록을 본다면 그에게 전하고 싶다.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가 없다고.

 

 

20xx55

 

 

눈을 뜨자 보인 건 어둠을 밝히는 달빛, 그리고 우거진 수풀들이었다. 떨리는 다리와 몸을 겨우 일으켜, 얼른 그녀를 찾아 살폈다. 분명 오들오들 떨며 그녀는 밤길을 헤매고 있을 터였다. 제대로 도착했어야 하는데. 그녀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다고 했다. 장소와 시간도 애매해서 불안은 더 가중되어 왔다. 제대로 도착하긴 한 거지? 제발! 급해서,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안중에도 없었다. 평소처럼 움직이려던 내게 커다란 아픔이 덮쳤다. 신음을 내며 욱신거리는 무릎을 매만졌다. 그리고 보이는 손등. 쭈글쭈글 한 노인의 손. 그녀가 내게 말해주었던 그 모습 그대로겠지? 흰 백발의 노인. 그래, 좀 더 당당하게 걷자. 불안에 떠는 나를 보면 그녀는 더 불안해 할 것이 틀림없어. 그녀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마법사로 알았다고 했어. 나는 마법사야. 마법사다.

그저 터벅터벅 걸었다. 그녀를 찾지 못 하면 어쩌나, 만나지 못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점점 가중되어 왔지만 그냥 믿는 수 밖에 없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그 인과율을. 연구실에서 입고 있던 흰 코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인기척은 없었다. 달빛만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문득 손목에 찬 시계가 생각나 바라봤지만, 바늘은 멈춘 상태였다. 지금이 몇시지? 꼭 만나야했다. 그것이 내가 이 곳에 온 이유였다. 저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소리가 난 방향을 주시했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작은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던졌다.

안녕?”

, . 안녕하세요.”

우물쭈물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내 가슴은 한 없이 뛰었지만, 그녀의 회상처럼 안심시켜야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착하네. 할아버지 안 무서워?”

그녀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주 천천히. 그녀가 내 손을 꼬옥 쥐었다.

따뜻했다.

그녀의 작고 앙증맞은 손을 부드럽게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이미, 미래의 그녀의 말로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러나 천천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모든 건 다 정해진 거란다.”

뛰는 가슴만큼 그녀를 잡은 내 손도 떨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놀이공원의 출구가 보였다. 출구를 벗어난 우리를,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과 달빛이 묘하게 어우러져 반기고 있었다. 커다랗게 한 숨을 내쉬었다. 빤히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받으렴.”

주머니에서 그녀가 내개 준 펜던트를 꺼내,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예뻐요.”

잘 보면 지팡이랑 뱀이 그려져 있지?”

. 이거 뱀이에요?”

나쁜 뱀이 아니란다.” 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뱀이 휘감고 있는 지팡이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야.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위대한 의술의 신이지. 뱀이 그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건, 부활을 상징하는 거란다. 뱀은 허물을 벗지 않니? 옛 사람들은 그걸 부활의 징조로 본 거야.”

, 멋져요! 이거 나 주는 거에요?”

네가 가지렴. 그리고......”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며,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올라와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지켜주려무나.”

마법......아니 할아버지가요?”

그럼. 이제부터 내가 지켜줄게. 할아버지가 지켜 줄게.”

그녀는 아무 대답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의 눈만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저 내 눈만 바라 볼 뿐이었다.

 

 

 

21xx13

 

 

이게 어찌된 일이랍니까? 사라졌다고요?”

투자자들한테는 어떻게 말하죠?”

잠깐. 여기 뭔가가 있어요.”

연구 기록입니까?”

교수님, 이거 어쩌죠? 뭐라고 보고해야 합니까?”

 

이교수가 안경을 쓱 올리며 다그치는 이들을 지극히 바라보았다. 읽고 있던 노트를 덮으며 그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글쎄요, 연구는 성공입니다만, 그게 큰 의미는 없어 보이네요.”

뭐라고요?”

과거로 가는 것이 성공했다면 이거 대단한 업적 아닙니까?”

이교수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결국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바꿀 수 없는 겁니다. 그렇죠. 그것이 바로 이 연구의 진실 된 결과입니다. 뭐 저 개인적으로는, 나름 운명에 대한 감정의 고양을 느낀 것에 감사하지만. 예부터 변치 않았죠. 사랑 말이죠. 우리 과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 그들이 행복하길 빕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는 이교수의 모습을 뒤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노트가 펄럭였다. 아직은 차갑지만, 안아주는 포근한 그런 바람이었다.

 

20xx1231일의 일지

 

그녀를 만나러 갑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하고, 다시 그녀를 만나서, 다시 그녀를 만나러 갈 겁니다.

실험은 성공했습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서, 그녀가 내게 준 펜던트를 선물 할 겁니다.

죽은 이도 되살린다는 위대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그리고 그녀는 나를 만나 다시, 그 소중한 펜던트를 선물하겠죠.

부활을 상징하는 뱀이 감긴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기록은 여기서 끝입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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