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암, 그렇고말고

2018.04.05 16:2904.05

기나긴 이야기야. 아니, 이야기 자체야 간단하지. 기나긴 시간이 담긴 이야기일 뿐.

무엇이 시작이었을까? 그도 내 친구들과 동료들도 모두 다 날 멀리했어. 어느 게 먼저였을까? 그가 떠나고 난 반미치광이가 돼 술 마시고 욕하고 허튼 소리하고 회사엔 지각하고 조퇴하고 그렇게 모든 인간관계들을 망가뜨려버렸다? 아님, 회사에서 난 누군가와 매일처럼 다투고 무슨 일인가로 말썽을 일으키고 그러다 왕따를 당하고 그러니 퇴근 후나 휴일까지도 날카로워져 그에게도 자꾸 상처를 줘 결국 그조차 날 못 견디고 떠나고 말았다?

모르겠어.

어느 날 문득 정신 차려보니 세 평 좁은 원룸 방에 나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어.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위에도 아래에도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어. 내 핸드폰의 주소록에조차 단 한사람의 연락처 남아 있는 것 없이 아주 깨끗했지.

왜 이렇게 된 거지?

지금 몇 시지?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제는 출근했나? , 다 모르겠어. 단지... 목이 마를 뿐이야.

난 벌떡 일어나 부엌 쪽으로 걸어가서 컵을 집어 들었어. 내 통장에서 매달 꼬박 꼬박 34900원씩 갉아먹고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한잔 내려 마셨지. 갈증은 여전했어. 한 잔 더 마시고 한 잔 더 마시고 그래도 여전히 목이 말랐어. 참을 수 없어서 싱크대의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하염없이 꿀꺽꿀꺽...

목말라. , 목이 말라.”

아무리 물을 마셔도 내 갈증은 도무지 해소되질 않았어.

그를 만나야 해. 그를 기다려야 해.”

나는 창문의 커튼을 확 열어젖히며 중얼거렸어.

팔꿈치만한 작은 창문 밖으로 어디론가 바삐 서둘러 가는 사람들이 보였어. 넥타이 꽉 조여 매고 발걸음을 재게 놀리는 양복쟁이 한 명, 수다 떨며 걸어가는 교복 입은 여학생 둘, 예쁜 원피스 차려입은 젊은 아줌마인지 아가씨 한 명.

그렇게 꼼짝 않고 창밖만 내다보며 서있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저물기 시작하더군. 태양이 긴 꼬리를 남기고 서쪽으로 사라져갈 무렵 난 벌떡 일어서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어. 그날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거야. 점점 어두워져 안에서는 밖이 잘 보이지 않았거든. 처음엔 고개만 밖으로 빼고 내다보다가 방안이 답답하게 여겨져서 창문에 올라섰어. 아래 창틀을 두 발로 딛고 창문 위로 약간 삐죽이 튀어나온 지붕 아래 벽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어. 내 방이 있는 곳은 다세대 주택 사층이라 창문 위로는 바로 지붕이었어. 난 두 손에 힘을 주고 얼른 한 발을 지붕 위로 끌어올렸어. 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걸까. 평소 같으면 몸이 후덜덜 떨려서 감히 창문에 설 생각조차 못했을 텐데 말이야. 일단 위로 한발을 올리고 나니 그 다음은 쉬웠어. 조심조심 푸른 기와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밟고 제일 높은 굴뚝을 향해 갔지. 건조한 날씨 덕분인지 다행히 미끄럽지 않았어. 파란 기와들 사이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굴뚝은 아담하니 작아서 올라가 걸터앉기 딱 좋았어. 시야가 탁 트인 그곳에 앉아 바라보니, 와아, 붉은 노을의 끝자락이 한 눈에 들어오지 뭐야. 난 거기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어. 해거름이 지고 어둠이 내리고 달이 뜨고 별이 지나가도록 밤새도록, 그리고 밤이 새고 날이 밝도록, 그 날이 다시 어두워지고 다시 별이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뜨고 지도록, 몇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도록 쭉 계속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었지.

아래쪽에선 아침, 저녁으로 다른 소리가 들려왔어. 어느 할머니가 느리게 걸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 젊은 남녀가 다투는 소리. 동네 아이들 공차며 떠드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아. 깜짝 놀라 두근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유감스럽게도 날 찾는 소리는 아니었어.

난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날 찾는 사람이 오기를. 그래서 내 목마름이 해결되기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하늘을 쳐다보고,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어. 낮이면 붉고 뜨거운 태양을, 흐린 날이면 구름을, 눈비 오면 눈을 감고 눈과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보냈고 밤이면 화려한 달과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봤지.

그러나 그도 님도 누구도 아무도 날 찾는 이는 없었어. 지독한 갈증으로 내 몸은 바짝 말라가다 못해 온통 먼지가 돼 바스라지기 직전, 난 문득 나를 보았어.

, 내 몸 말이야. 마치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 발견했다고.

비쩍 마른 내 몸. 내가 거기 있었지. 근데 난 누구지?

미치도록 궁금했어. 내가 누구인지.

고개를 잔뜩 숙여 나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어. 그래도 잘 모르겠더라고. 내 다리와 배만 볼 수 있었거든. 더 자세히 보기위해 목을 길게 빼 안으로 더 구부려봤지만 어휴,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고작 나의 목과 가슴 사이 정도를 볼 수 있을 뿐이었지.

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를 잘 보기 위해 내 몸을 단련하기로 결심했어.

몇 십일 만에 지붕에서 내려와 내 방에서 요가를 시작했어.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세 시간씩 삼백육십오 일을 계속하니 몸이 많이 부드러워지더라고. 그러나 그 정도로 만족할 순 없었어. 그렇게 삼백육십오일 지나길 열 번을 계속했어. 그동안은 단 하루도 몸 단련을 멈추지 않았어. 삼백육십오일 여덟 해에 중간에 229일이 있던 두 해, 삼백육십육일 두 번을 합해 딱 삼천육백오십이 일을 그렇게 한 결 같이 보냈어. 그렇게 해서 수련시간으론 일만하고도 구백오십육 시간을 넘어서기를 그 시간의 천육 백오십의 일만 구백오십육 승만큼 하고 난 날 오후, 드디어 난 성공했어. 바라던 대로 내 몸을 맘껏 구부릴 수 있게 되었거든.

난 뛸 듯이 기뻤지만 서두르진 않았어. 우선 가벼운 준비운동을 하고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마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 윗몸을 천천히 구부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하는 나비자세를 하고 삼분 정도 가만히 있었어. 몸을 확실히 풀기 위해 등을 한껏 펴는 고양이자세와 낙타자세도 번갈아가며 오 분씩 했지. 모든 준비가 완료된 다음 난 긴 천천히 바닥에 누워 날숨과 들숨을 천천히 반복하면서 숨을 차분히 고르며 자세를 잡았어. 누운 자세에서 무릎을 가슴 쪽으로 살살 끌어당기면서 두 팔로 감싸 안았지. 그리고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곤 무릎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고 앞으로 몸을 둥글게 굴렸어. 그 다음 숨을 들이마시고는 이번에는 뒤로 구르고. 그렇게 굴렁쇠 굴리듯 내 몸을 앞으로 뒤로 구르기를 반복했어. 점점 더 빨리, 더 빨리, 더 더 빨리. 내 몸이 공처럼 둥글게 돌돌 말려가고 있는 걸 느낄 때쯤 난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팔에 힘을 꽉 주고 내 머리를 더 안쪽으로 세게 밀어 넣었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잠깐 정신을 잃었나봐. 기억나지 않아. 어쨌거나 중요한 건, 내 정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난 이미 나의 입속으로 들어와 있었다는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천육백오십이 일 동안의 일만 구백오십육 시간의 천육 백오십의 일만 구백오십육 승만큼 수련을 계속해본 자만이 알 수 있지, 그건. 그 오랜 동안 나의 겉뿐만 아니라 안까지 보고 싶다는 염원을 쉬지 않고 키워왔다고. 그래서 난 성공했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안으로 들어왔어. 안으로 들어온 김에 더 자세히 봐야지 하고 입 속에 들어간 내 다리에 더 힘을 주었어. 그러자 내 식도는 점점 더 크게 벌어져서 다리와 몸통은 물론 나중엔 내 큰 머리까지 그럭저럭 통과할 수 있게 됐어. 식도는 수많은 뼈들도 이뤄져 있지. 그래서 내 몸이 지날 때마다 텅, 텅 하며 몇 번이나 부딪치고 끼어서 고생도 좀 했지. 좁은 길을 지나느라 숨 막혀 죽을 뻔 했는데 오래지 않아 뻥 하고 뚫린 너른 세상에 도달했어. 바로 내 위였지. 풍덩 하고 너른 위속에 떨어진 내 머리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위 속에 담긴 물에서 휘휘 헤엄치며 오랜만의 휴식을 취했지. 그러나 그렇게 오래 쉬지는 못했어. 무슨 냄새를 맡았거든. 위기를 예고하는 냄새. 똑똑한 내 두뇌는 그게 위산 냄새라는 걸 재빨리 알아챘어. 자신의 머리인 줄도 모르고 나를 소화시키려 하다니 띨띨한 위 같으니라고. 언제나 제 역할을 제일 잘 해내는 훌륭한 내 뇌는, 나의 위가 위산을 쏟아내 자신의 머리를 다 녹여버리기 전에 얼른 전두엽을 움직여 명령을 내렸어. 이건 나야, 나라고. 그러니 소화시킬 생각 따윈 얼른 멈추라고, 이렇게 말이야.

그렇게 한 번 하고 났더니 소장, 대장, 항문까지 통과하는 데는 별 문제 없었어. 매번 두뇌가 알아서 미리 명령을 내렸으니까. 나라고 나. 정신들 차리셔, 이렇게. 물론 약간의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야. 그렇게 통과하면서 내 머리색이 탈색이 돼버린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건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 몸 밖으로 빠져나온 내 머리는 재빨리 다시 내 입을 찾아 들어가 돌고 돌기를 반복했으니까. 그렇게 몇 백번을, 몇 천 번을 계속했는지 몰라. 머리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지 신경 쓸 여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지. 점점 도는 속도도 빨라져서 나중엔 뇌가 위에게 위산 내는 걸 멈추라고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어졌지. 수상돌기 축색돌기와 시냅스 이런 걸 거쳐서 움직이는 찰나의 신경전달 시간보다도 더 빨리 내 몸은 내 안으로 내 밖으로 정신없이 핑핑핑 돌고 또 돌았거든. 그렇게 한 백년이나 천 년쯤은 지난 걸까. 아니, 만년도 더 넘은 무한에 가까운 유한의 시간을 지나온 지도 몰라. 처음엔 이러다가 내 속에 내가 영원히 갇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 나중에는 뭐가 나인지 뭐가 내가 아닌지조차 다 잊어버릴 정도가 됐으니까 말이야.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찾아왔어.

!

, 뭐지?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거든.

! 하는 소리가 또 들렸어. 이번엔 분명하게 들었어. , 그건, 그 소린 바로 내 어깻죽지에서 날개기 돋아나는 소리였어. 날개는 순식간에 반원 모양으로 크게 부풀어 올랐고 나는 낯설기 그지없는 그 날개를 조심스레 펴서는 공중으로 휙 날아올랐어. 참으로 놀라웠어.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날개가 어찌나 크던지 펄럭이며 하늘을 나는데 내 몸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야. 난 가벼이 날갯짓 두어 번에 하늘 높이 구름 위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어.

저 아래로 내가 벗어던져 두고 온 나의 껍데기가 땅에서 여전히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보였어. 난 씩 웃으며 손 한번 흔들어주고 펄럭, 내 너른 날개를 위아래로 펄럭였지. 나는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며 외쳤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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