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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위작 이야기

2018.03.30 22:1803.30

다음 글의 속편입니다

http://mirrorzine.kr/writing/90364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 빚을 갚느라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이라면 부모님의 결혼반지까지 전부 처분해야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런 그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군요. 저는 그 때 겨우 네 살 짜리 어린아이였으니까요. 게다가 그런 일은 전부 청지기가 도맡아 했을 테니 누구에게 무엇을 팔았는지는 그 사람만 알고 있을 거예요."

지드 가의 아가씨는 의뢰인이 부탁한 일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청지기와 만나게 해 주십사 청하니까 물건값을 빼돌려 달아난 지 오래라 도리어 내게 찾아달라고 의뢰해야 될 판이란다. 당시 상황을 알 만한 다른 하인은 없느냐 물었더니 청지기가 돈을 횡령하는 바람에 급료가 밀리자 대부분이 떠나서 이제는 연락할 길이 없으며 집안 사정에 밝은 나이든 하인 몇은 남았으나 그마저도 지금은 전부 고인이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가씨가 당시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달리 있는지 찾아보겠다며 낡은 편지뭉치를 뒤지는 동안 이웃에 사는 목사 부인이 차를 마시러 왔다. 지체높던 아가씨가 이제는 가정교사 일이나 알아보는 처지가 되었으니 안 된 일이라느니 아가씨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는데 학비가 없어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느니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던 부인은 내가 수도에서 탐정 일을 하고 있노라 밝히자 손뼉을 딱 치고는 이 사람한테 그림을 보여 주자며 호들갑을 떨었다. 수도에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부자들이 많다고 들었으니 나에게 그림을 들려보내 다리를 놓게 하자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시골뜨기의 촌스러운 그림을 수도에 가져가 봤자 비웃음만 살 뿐이라며 사양했으나 눈빛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묻어났기에 나는 별수없이 아가씨가 고르고 고른 드로잉을 몇 점 받았다. 이번 의뢰인의 조카가 미술에 조예가 깊은 분이므로 한 번 보여드리기는 하겠지만 나는 이쪽으로는 전혀 인맥이 없는지라 별 도움은 안 될 터이니 부디 큰 기대는 마십사 당부하고 작별 인사를 하자 아가씨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저런 연유로 지드 가에 [메로스의 비통]이라는 그림이 실제로 존재했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드 가의 청지기가 니콜라스라는 화랑 주인한테 그 그림을 팔았다는 증거도 없었고요. 청지기의 행방이나 하인들의 연락처를 좀더 수소문해 볼까요?"

"아니, 그쪽은 더 뒤져 봐야 헛수고일 것 같군. 차라리 화랑 주인의 뒤를 캐보는 편이 낫겠어."

"이제 그만 하세요 고모님. 그 그림은 틀림없이 파이가 그린 진품이에요. 그림에 딸린 편지를 이름난 학자들한테 보여 검증했어요. 다들 제작된 지 300년 이상 된 종이가 확실하고 문법이랑 철자법도 당시 쓰이던 것과 동일하다면서 만장일치로 인정해 줬다고요. 게다가 왕립 박물관에 보관된 문서 중 사라진 [메로스의 비통]에 대해 묘사한 회고록이 있는데 거기 나온 설명과 그림이 고스란히 들어맞는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문서는 왕실의 보물이라 일개 위조꾼 일당이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요. 저도 몇 달을 공들여서 정말 간신히 원본을 구경했단 말입니다."

"편지와 회고록이 진짜라고 해서 그림까지 진짜라는 법은 없어. 너, 장차 있을 신년 대축일 전야제 때 아마란스 부인의 살롱에서 컬렉션을 자랑할 생각이지?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는데 나중에 가짜였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네 체면이 뭐가 되겠니. 걱정 마라. 그때까지 위작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면 약속대로 네게 가문의 인장을 물려주고 정식 후계자로 인정할 테니까. 그보다는 이제 이 탐정 선생한테 그림을 보여 줘도 되겠지? 본격적으로 조사를 하려면 먼저 그림부터 자세히 살펴야 하지 않겠니."

사업가는 여기에 파이의 사라진 걸작이 있는데 그게 사실은 가짜입네 어쩌네 떠벌리고 다녔다간 두 번 다시 이 나라 땅을 밟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겠노라고 엄포를 놓은 다음 의뢰인에게 컬렉션 룸의 열쇠를 내주었다. 젊은 시절의 의뢰인을 그린 초상화부터 왕가의 역사를 담은 태피스트리까지 이런저런 작품이 걸린 회랑을 지나자 고대의 청동 조각상이며 귀금속 공예품들로 가득한 전시실이 나왔다. 문제의 그림은 고급 벨벳으로 장식된 벽에 걸려 있었다. 실물은 지드 가에 탐문차 들고 갔던 사진과는 천지차이라,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대단히 훌륭했다.

"파이는 드 카이퍼 황제의 명을 받아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와 이 [메로스의 비통] 한 쌍을 그렸다네. 황제는 카시스 황녀가 볼스의 왕에게 시집갈 때 결혼 선물로 그 그림들을 하사했지. 캄파리의 이교도 왕자가 볼스를 침공해 왕궁을 약탈한 뒤로 두 작품 모두 행방이 묘연했는데,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는 이후 그레나딘의 무역상이 어느 이교도 귀족한테서 도로 사들였다고 하더군. 몇 년 전에 경매로 나온 것을 마르그리트 공주가 구입해 지금은 왕립 박물관의 유명 전시품이 되었고."

"아, 그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조카분과 공주 전하께서 마지막까지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가격이 터무니없이 치솟아 여기저기 대서특필되었지요."

"그때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를 간발의 차로 전하께 빼앗긴 것이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야. 이런 수상쩍은 물건을 출처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덥석 구입한 걸 보면 말일세. 탐정 선생, 사람은 원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게 되어 있네. 더군다나 조카 녀석은 지금 이교도의 볼스 침공 이래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파이의 걸작을 손에 넣어 한껏 기고만장해 있지. 어중간한 근거만으로는 절대 이 그림이 위작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걸세. 그러니까 나는 좀 더 극적인 연출을 하고 싶다네. 화랑 주인부터 그 그림을 그린 화가까지 관련자들을 전부 모아놓고 밝혀낸 진상을 하나하나 폭로하다가, 마지막에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밀어 범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거지. 어때, 탐정 선생도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만큼 한번쯤 명탐정 흉내를 내 보고 싶지 않나?"

"아뇨. 전 오래살고 싶거든요."

살인사건 관련자들을 몽땅 모아 놓고 어두운 과거를 파헤치다니, 오밤중에 칼 맞아 죽기 딱 좋은 짓 아닌가. 만약 내가 정말로 소설에 나오는 명탐정이었다면 지금쯤 청지기가 빼돌린 돈을 숨겨둔 장소로 향하고 있지 않을까? 시키는 대로 기차표도 샀고 아무개 씨의 하숙집 다락방을 뒤져 보라고 경찰에 급전도 보냈습니다만, 뜬금없이 여기에는 대체 왜 가자고 하시는 건가요 선생님. 어리둥절해진 조수가 독자를 대변해 물어도 가 보면 다 알게 될 거라고 답답하게 눙치면서. 금화로 가득 찬 자루를 들고 보무당당 지드 가로 돌아오면 경찰이 청지기를 포승줄에 묶어 잡아가는 중이리라. 과연 선생님께서 귀띔해주신 곳에 이 자가 숨어 있더군요.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이거 내가 명탐정이 아니라 지드 가의 아가씨가 가엾게 되었군그래.

"걱정 말게나. 이 일로 조카 녀석이 탐정 선생을 원망하지는 않을 걸세. 전에 말했듯이 이 그림은 반쯤은 내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고, 이 그림이 가짜라는 명백한 증거도 바로 이 손 안에 있으니까. 탐정 선생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채 노릇을 할 자잘한 단서 몇 개만 찾아 주면 되네. 나는 일단 이 그림을 그린 화가를 찾고 싶은데, 무슨 방법 없겠나?"

"화랑 주인에게 파이의 레플리카를 의뢰하는 게 어떨까요. 그 화가가 [메로스의 비통]을 그렸으니 이번에는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로 하는 것이 좋겠군요. 박물관의 진품과 바꿔치기해도 모를 정도로 정교한 복제화를 원한다고 하면 화랑 주인이 필시 그 화가에게 주문을 넣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다음날 우리는 라클레테 거리의 화랑을 찾아갔다. 저 성녀 피콘의 그림이 진품인가, 아닙니다. 여기 있는 그림은 전부 레플리카나 과거 화풍을 따라서 최근에 그린 것이라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어요. 화랑 주인이 의뢰인에게 다과를 대접하며 그림 이야기를 하는 동안 화랑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나는 낯익은 인물을 발견하고 실소했다. 뭐야 이거. 신문연재소설 주인공이잖아. 특대 사이즈 캔버스에 호화롭게 그려넣으니 무슨 고관대작의 그림 같군 그래. 이쪽을 등지고 선 사람은 숙적인 괴도인가? 괴도의 어깨 너머로 주인공을 마주하고 있자니까 둘의 대결을 구경하느라 삼삼오오 모여든 시민들 사이에서 한 젊은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급히 의뢰인을 불러 그림 속의 젊은이를 가리키며 눈짓했다. 메로스 같죠? 호오. 고개를 끄덕인 의뢰인이 화랑 주인에게 물었다. 이 봐요 주인 양반. 이 근사한 그림은 누가 그렸나. 그래? 그 사람의 작품을 더 보고 싶은데. 의뢰인과 나는 숨은그림 찾기라도 하듯 열심히 액자를 들여다보았다. 엑스트라가 여럿 등장하는 그림에는 어김없이 감초처럼 메로스가 끼어 있었다.

"잘 봤어요 주인 양반. 좋아. 이 화가한테 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해야겠어. 우리 집에 제정 시대풍 드레스가 한 벌 있으니까 그걸 입고 궁정화풍으로 그리게 하면 틀림없이 드 카이퍼 황제의 모후처럼 대단해 보이겠지. 제작비가 어떻게 되나?"

 

사흘 뒤 화가가 의뢰인의 집을 방문해 밑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빈 화실 문을 따고 들어가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았다. 의뢰인이 원하는 증거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메로스의 비통]의 작업 스케줄과 마감 날짜가 큼지막하게 적힌 달력을 뜯어 챙긴 다음 습작 더미를 뒤져 보니 처음 그림을 구상할 때 그린 듯한 스케치와 메모들이 나왔다. 서랍 안에도 스케치와 비슷한 드로잉이 몇 장 들어 있었다. 500년은 족히 묵어 보이는 낡은 종이에 파이의 화풍을 모방해 그린 것으로 짐작컨대, [메로스의 비통]이 유명세를 얻거든 비싸게 팔 요량으로 만들어 둔 위작 같았다. 나는 드로잉 한 장을 빼서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방 안에 넣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슬슬 돌아갈까. 혹여 내가 손댄 흔적이 남지 않았나 화실 안을 살피는데 달칵하고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막 작업실로 발을 들이던 메로스가 나를 보고 멈칫해서 물었다. 옷차림이 수수한데다 안경까지 쓰고 있어 인상은 다소 달랐으나 틀림없는 메로스였다.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하다, 화랑 주인의 소개로 화가를 만나러 왔는데 문이 열려 있기에 사람이 있는 줄 알고 들어왔다가 그만 그림 구경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노라 둘러대며 선생님께서 테나르디에 씨 맞으신가 여쭙자 메로스가 자신은 화가의 친구고 화가는 일하러 나가서 저녁때나 올 터이니 용무가 있으면 대신 전해 주겠다고 답했다. 사양하고 대충 아무 날 다시 오겠노라 약조하는 시늉을 하며 나가려다 호기심에 혹시 모델 일을 하시느냐 물었더니 메로스는 부인했다.

"아니오. 저는 시인이에요. 번역이든 대필이든 글밥을 먹을 수 있으면 뭐든 합니다만, 본업은 시 쓰는 일이지요."

 

"무명 시인이라니, 이거 정말로 메로스였군. 오만 그림에 다 그려넣은 것도 사실 애인 얼굴이라서 그랬나? 어쨌든 잘 됐네. 그 사람도 초대해야겠어."

훔쳐 온 증거들을 내주면서 메로스를 만났다고 고하자 의뢰인은 즉시 하녀를 보내 시인을 불러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사업가의 집에 가 보니 사업가와 화랑 주인이 문제의 그림 앞에 티 테이블을 놓고 앉아 있었다. 여기 너의 가짜 파이가 있단다. 의뢰인이 화가를 데려와 화랑 주인 옆에 앉히자 화랑 주인은 태연히 홍차에 설탕을 넣었다.

"안녕하세요. 편지 대필 일로 왔는데요. 어, 르블랑 씨? 장도 있네? 여긴 웬일이야? 너 초상화 그리러 간 거 아니었어?"

"저기 너의 메로스도 왔구나."

그림 속의 메로스와 시인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사업가는 눈살을 찌푸렸고 화랑 주인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홍차를 저었다. 어리둥절한 시인에게 의뢰인이 의자를 권하자 화가가 휘파람을 휘익 불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어디서 저렇게 닮은 사람을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어줍잖은 장난에 속아넘어갈 것 같습니까 고모님?"

"길거리에서 우연히 비슷한 사람을 발견해 불러들인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화가의 친구예요. 이 화가는 선생님께서 [메로스의 비통]을 구입한 화랑의 전속 화가고요. 레플리카 전문이라 파이의 복제화도 여럿 그렸을뿐더러 작업실에 이런 것까지 있더군요."

탁자 위에 챙겨둔 증거품을 늘어놓자 화가가 곧바로 반박했다.

"작업실에 들어온 생쥐가 누군가 했더니 아가씨였군.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난 프란체스카한테 부탁받은 대로 저 [메로스의 비통]이 팔리기 전에 복제화를 그렸을 뿐이야. 댁이 슬쩍한 건 그 때 나온 잡동사니고."

"복제화라면 똑같이 따라그리기만 하면 되는데 뭣하러 습작을 그렇게 많이 남겼지? 그 복제화는 지금 어디 있고?"

"이 녀석한테 팔았는데 글쎄 셋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홀랑 타버렸다잖아. 내 일생일대의 걸작이었는데 아깝게 됐지 뭐야."

그렇담 댁의 뮤즈하고 그림 속의 메로스가 똑같이 생긴 이유는 또 뭐냐. 잠깐만요, 저는 저 녀석의 뮤즈 같은 게 아니- 내 애인이 여기선 좀 이국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파이의 고향에는 저런 백금발에 연두색 눈이 지천으로 널렸다. 저기 있는 메로스도 파이가 즐겨 그린 미청년의 전형 아니냐. 이 망할 자식이 누가 네 애인이야! 솔직히 말해봐요. 저 메로스 모델이 그쪽 맞죠? 안 그래요? 화가와 내가 메로스를 놓고 옥신각신 입씨름을 벌이고 있자니까 사업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더 들어봐야 시간 낭비겠군. 르블랑 씨,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고모님이 좀 괴팍한 구석이 있어서요. 두 분께도 결례를 저질렀군요. 사과하는 의미에서 식사라도 대접해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잠깐 기다려라 폴. 이걸 보면 너도 저녁 생각 같은 건 싹 달아날 게다."

사업가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의뢰인이 펜을 들고 유려한 필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뭐라고 쓴 거야? 외국언가?"

"아냐. 옛날 귀족들이 쓰던 문어체 같은데."

"오, 읽을 줄 아는 모양이군 젊은이. 내 조카한테 무슨 뜻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사랑하는 엘로이즈에게. 지난주에 창고 정리를 했더니 케케묵은 그림이 하나 나왔다. 이교도들이 볼스 성을 약탈했을 때 우리 선조가 혼란을 틈타 성에서 보물을 훔쳤다는 이야기를 너도 들어 봤겠지? 이게 그 때 도둑질해온 물건 아닐까? 팔려고 해 봤는데 너무 터무니없는 헐값을 부르길래 차라리 네게 선물하는 게 낫겠다 싶어 보낸다. 네가 시집간 지드 가에 그림 볼 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라야겠구나. 이런 값어치도 애매한 그림 대신 금이나 보석을 훔쳤으면 오죽 좋니…."

"고모님께서 그걸 어떻게…? 당신, 내 금고도 털었나? 탐정이 아니라 도둑이었군. 경찰에 신고하겠어!"

"엉뚱한 소리 말고 네가 그림이랑 같이 샀다는 그 편지나 꺼내 보려무나. 가지고 왔겠지?"

사업가가 허둥지둥 탁자 위의 케이스를 열자 가장자리가 부스러지고 누렇게 빛이 바랜 편지가 나왔다. 편지의 필적은 의뢰인이 쓴 글씨와 똑같았다.

"그 편지는 300년 전에 쓰인 유물이 아니라 내가 만든 위조품이란다 폴. 네가 유학 가서 돈이 다 떨어졌다고 우는소리를 할 때마다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는데, 내 필체도 못 알아보다니 솔직히 좀 섭섭하구나 얘야. 편지는 버리고 돈만 챙겼던 건 아니겠지 설마?"

 

"나는 다섯 살 때 수도원에 들어가 필경과 채식 일을 배우면서 자랐다네. 젊었을 적에 그걸로 용돈 벌이도 했는데 어느 날 바니타스 교수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이런 의뢰를 하더군. 자기네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고서가 있는데 하인이 실수로 태워 버리고 말았으니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말일세. 삯을 후하게 치르길래 일을 맡기는 했네만 여기가 이상하네 저기가 틀렸네 어찌나 시시콜콜 따져 대던지 아주 학을 떼었지. 수십 번 퇴짜를 놓다가 겨우 완성본을 가져가길래 만세를 불렀더니 이번에는 이 진상이 무슨 봉투를 보내잖겠나. 한 번만 더 손대라고 했다간 확 엎으려고 했는데 열어 보니 수정 요구안이 아니라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네. 적혀 있는 장소로 찾아가니 골동품 경매가 한창이었는데 세 번째로 나온 물건이 바로 내가 만든 고서였지."

고서는 어느 수집가에게 비싼 값에 팔렸다. 남을 졸지에 위조범으로 만들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항의하는 의뢰인에게 교수는 고서 값의 1/3을 주며 재미있는 일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생각지도 못한 큰돈에 혹한 의뢰인이 무슨 일인가 이야기나 들어 보자 싶어 교수를 따라 근처 카페로 들어가니 레오라는 청년이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레오는 교수 밑에서 일하던 위조화가였네. 어떤 화풍이라도 자유자재로 따라 그릴 수 있는 모사의 천재였지. 레오가 유명한 화가의 위작을 그리면 교수가 적당한 손님을 찾아 비싼 값에 그림을 팔았고 말일세. 수집욕에 눈이 멀어 장물이든 뭐든 상관 없다면서 입수 경로도 불분명한 그림을 덥석 구입하는 사람, 그림 보는 눈을 칭찬하며 대가의 무명 시절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만 슬쩍 흘려 주면 금방 우쭐해져 수상한 그림이라도 고가에 사들이는 사람, 그림을 살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값비싼 명화를 찾는 사람, 자존심 때문에 혹은 그림을 다른 곳에 비싸게 팔아넘길 생각에 미심쩍은 점을 발견하고도 정식으로 감정을 받거나 교수가 수상하니 주의하라고 외부에 알리지 않을 만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주로 교수의 타겟이 되었지. 그래 폴. 바로 너 같은 사람 말이다."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라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조카를 보며 의뢰인이 쿡쿡 웃었다.

"교수는 내게 위작의 출처를 날조하기 위한 문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네. 수입 분배는 어떻게 할 예정이고 작업 조건은 어떤지 따위를 자세히 설명해 줬네만 귀에 들어오는 게 없더군.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덥석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지. 레오를 보자마자 그만 한눈에 반해 버렸거든."

이번에는 의뢰인이 조금 쑥스러운 기색으로 찻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교수는 졸부와 수집광을 속여 돈을 우려내는 데서 만족하지 않았다네. 왕립 박물관의 가장 좋은 자리에 레오의 그림을 걸어놓는 것이 교수의 꿈이었으니까. 위작을 팔면서 요령을 쌓은 교수는 박물관에 입성할 첫 작품으로 파이의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를 점찍어두고 있었네. 당시 파이는 지금처럼 몸값이 높지 않았기 때문일세. 대가의 값비싼 걸작을 구입할 때는 박물관에서도 철통같이 내력을 확인하고 감정사를 여럿 불러 진위 여부를 따지지만, 파이의 그림처럼 비교적 저렴한 작품이라면 보통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니까. 나는 교수의 지시대로 그레나딘 무역상의 영수증과 회고록을 만들었지."

영수증은 간단했는데 회고록이 문제였다면서 의뢰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기왕지사 왕가를 속일 작정이라면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을 써보고 싶었네. 내게도 레오나 교수 못지않은 예술가 기질이 있었거니와 젊을 때라 과시욕도 넘쳤으니까. 우리가 피는 안 섞였다만 그런 점은 참 닮았지 폴. 내 바람을 전하자 교수는 나와 레오를 볼스 성으로 데려가 카시스 황녀가 살았을 당시의 모습이며 생활 양식 일체를 생생하게 설명해 주었네. 교수는 정말로 박학다식하더군. 볼스 성의 벽돌 하나하나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일로 사기를 치고 있었으니 미술에 해박한 것은 당연했지만 나만큼이나 어문학에 능한데다 역사 강의까지 청산유수라. 진짜로 어디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나 싶었을 정도였다네. 회고록의 초고를 고어로 바꿔 쓸 때도 마찬가지였지."

까마득한 과거에 통용되던 방식대로 철자와 문법을 고치고 옛 사람들의 미학에 따라 문장을 다듬는 과정에서 수없이 교수와 충돌했노라고 의뢰인은 회상했다. 교수도 교수였지만 의뢰인 역시 20년 가까이 수도원에 틀어박혀 고서와 씨름했던 몸. 여기는 이렇게 쓰는 게 맞다, 아니다 내가 쓴 게 더 자연스럽다 모씨의 책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느냐. 아웅다웅하다 날밤을 새기 일쑤였단다.

"교수와 논쟁하는 일은 즐거웠네. 교수는 언제나 내 말을 귀담아들어 준데다 자기가 틀렸다 싶으면 순순히 인정하고 새파랗게 젊은 나한테 가르침을 청하기까지 했으니까. 교수한테 배운 것도 많았어. 처음에는 진짜 교수일 리가 없다, 사기꾼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같이 일하다 보니 이 사람은 정말로 학자로구나 싶더군."

두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회고록을 완성했을 무렵 교수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낙뢰로 의뢰인이 거주하던 수도원 지붕이 파손되는 바람에 비밀 다락방이 드러났는데, 방 안에 다량의 고문서와 희귀 서적들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다락방에서 나온 문서와 서적을 정리해 도서관에 비치하느라 어수선한 틈을 타 의뢰인은 새로 발견된 고서들 사이에 슬쩍 회고록을 끼워넣었다. 수도원의 장서목록을 수정하기 위해 책 제목을 휘갈겨 쓰던 수도사가 의심 없이 펜을 놀렸다. 회고록. 작자 미상.

"교수는 뛸 듯이 기뻐했지. 유서깊은 수도원의 소장도서를 증거로 댄다면 박물관측에서도 그림이 진품이라고 인정해 줄 테니까. 교수가 박물관 관계자와 접촉할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나는 엘로이즈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썼네. 이제 확실한 증거가 생겼으니 내친김에 [메로스의 비통]까지 마저 제작해 두자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일세. 완성된 편지를 보여 주자 교수는 흡족한 얼굴로 웃으면서 모레 학예사와 만나기로 했으니 성공을 기원하며 마시자고 제안했네. 우리는 레오의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지. 축배를 너무 일찍 든 셈이 되었네. 나는 그 날 이후로 다시는 교수를 보지 못했으니까."

의뢰인과 레오가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몇 주가 지나도록 교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급기야 해를 넘겼다. 왕립 박물관에서는 새로운 전시를 차례로 선보였으나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이쪽에서 찾고 싶어도 아는 거라고는 바니타스라는 가명 하나뿐이었으니 방법이 없었지. 레오가 초상화를 그려 봤지만 사는 곳이나 자주 다니던 장소를 모르는 터라 무용지물이었네. 교수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림이 팔릴 때마다 꼬박꼬박 대금을 나눴기 때문에 우리도 딱히 물을 생각을 안 했고. 레오는 크게 낙심했네.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고 일자리를 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간 받은 보수를 흥청망청 써 버린지라 공부는커녕 당장 월세 낼 돈도 없는 모양이더군. 생계가 막막해진 레오는 다시 위작을 그려 팔기 시작했다네. 교수 없이 레오 혼자 만든 물건은 어설펐지. 레오는 화풍만 모방할 수 있었을 뿐 역사나 미술학적 지식은 없었으니까. 거래한다는 화랑 주인도 질이 안 좋아 보였고. 말리고 싶었네만 오빠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수도원을 나와야 했던 데다 상속이며 조카 문제로 경황이 없어서 말일세."

오빠가 남긴 빚을 정리하고 조카와 살 집을 구하느라 의뢰인이 동분서주하는 동안 레오는 사기죄로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외국으로 달아날 생각이니 뱃삯을 보태 달라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겨 이제는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면서 의뢰인은 고개를 저었다.

"오빠 부부의 유산은 그리 많지 않았네. 나는 수도원의 필경사들을 도와주고 받은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지. 지금 국왕께서 즉위한 해 겨울에 저명한 왕립대학 교수가 수도원을 찾아왔네. 다락방에서 나온 고서에 특히 관심을 보이더군. 방학이 끝나 대학으로 돌아간 교수는 논문을 하나 발표했다네. 읽어보니 내 회고록이 카시스 황녀의 후손이자 현 왕가의 시조인 로엔그린의 저서로 둔갑해 있지 뭔가. 회고록을 쓸 때 그의 수필을 주로 참고한 탓에 그렇게 된 모양일세. 옛날 종이가 거의 다 떨어져서 최대한 짧게 써야 했는데 로엔그린은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웠거든."

로엔그린은 뛰어난 시인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의뢰인이 참고로 한 수필 몇 편도 로엔그린이 쓴 것이라 추정될 뿐이지 저자는 사실 불분명했으므로 논란이 일었다. 다락방에서 나온 다른 고서들과 비교해 봤을 때 습기로 인한 손상 정도가 눈에 띄게 다르다는 점을 꼬집어 회고록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학계를 좌지우지하던 마르그리트 공주가 선조의 회고록을 극찬하면서 왕립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삼겠노라고 선언한 뒤부터는 아무도 감히 교수의 논문을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공주 전하께서 높이 평가한 덕에 내 회고록은 주가가 올랐지. 나는 바니타스 교수가 슬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싶어 기대했네. 어쩌면 교수가 뒤에서 공주 전하를 꼬드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고 말일세. 해서 회고록을 다룬 논문이 나올 때마다 어떻게든 전부 구해 읽어 보았네만, 교수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더군. 한편 파이의 그림값은 회고록이 유명세를 탄 것을 계기로 점점 오르더니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가 경매장에 나타났을 때 정점을 찍었네. 그 그림이 어떤 경위로 왕립 박물관까지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판이 거기까지 커졌는데 그 바니타스 교수가 가만있을 리 없지. 자, 화랑 주인 양반. 슬슬 이실직고해 보게나. 내가 쓴 편지를 어떻게 손에 넣었지?"

"글쎄요. 그 편지는 예전 화랑 주인이었던 니콜라스 아저씨가 [메로스의 비통]과 함께 구입한 물건이라고만 들어서 잘 모르겠군요."

"이보게 화랑 주인 양반. 나는 왕립 박물관 앞을 지날 때마다 입이 근질근질했네. 거기 있는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는 위작이고 왕가의 보물 로엔그린의 회고록은 사실 내가 스물도 되기 전에 쓴 글이라 자랑하고 싶어서 말일세. 오늘 이렇게 털어놓을 기회가 생기니 어찌나 들뜨던지 잠도 잘 안 오더군. 자네가 왜 이 [메로스의 비통]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 때문만은 아니었겠지. 내 조카 다음에는 또 누구를 속일 생각이었나? 공주 전하? 왕립 박물관? 아무리 대단한 연극이라도 봐 줄 관객이 없으면 그건 반쪽짜리야. 자네도 여기서 미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 보게나. 발뺌하기엔 자네는 바니타스 교수와 너무 닮았어. 특히 그 눈이."

"…레오라는 분께서 그렸다는 바니타스 교수의 초상화를 아직 가지고 계신지요?"

의뢰인은 예상했다는 듯 화랑 주인에게 작은 액자를 건넸다. 액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화랑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아버지 얼굴을 다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일단 자기소개를 다시 해야겠군요. 제 이름은 프란체스카 바니타스 르블랑. 바니타스 교수의 딸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낌새를 보이자 사업가는 우리를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학예사를 만나기 전날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의 부업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는 유품을 정리할 때 고서화점으로 넘어갔지요. 고서화점 주인은 그 그림을 파이의 제자가 그린 모작이라 생각해서 싼값에 내놨고요. 경매에 나오기 전에는 어느 호텔 로비에 걸려 있었다고 하더군요."

화랑 주인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나는 리코타 치즈가 듬뿍 올라간 연어 샐러드를 양껏 집어먹었다. 교수는 니콜라스 르블랑이라는 화랑 주인을 내세워 위작의 출처를 세탁하곤 했으며 화랑 주인은 교수의 혼외자로 태어나 니콜라스의 양녀가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니콜라스 아저씨는 원래 정직한 분이라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그쪽 일에 완전히 손을 떼셨습니다. 제게도 아버지의 부업에 대해 거의 알려주지 않으셨고요. 하지만 아버지의 유품에는 일절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해 두셨다가 제가 성인이 되자 물려주시더군요.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언젠가 왕립 박물관을 위작으로 채워 아버지의 유지를 잇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첫 고객이 하필이면 아버지 동업자의 조카일 줄이야…."

"너무 상심 말게나. 내 조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자네는 봉을 제대로 골랐으니까. 바니타스 교수도 지하에서 인정했을 걸세. 이번에는 운이 없었을 뿐이야."

의뢰인과 화랑 주인이 생전의 교수에 대해 담소를 나누는 사이 근사한 안심 스테이크가 식탁에 올라왔다. 함께 나온 와인을 몇 잔이나 연거푸 들이켜던 화가가 자신에게 투자할 생각이 없느냐고 사업가에게 물었다. 자기가 조만간 걸작을 그려 유명해지거든 저 메로스의 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을 테니 그림 공부를 할 학비를 대 달란다. 역시 술 탓에 뺨이 발그레해진 메로스가 허둥지둥 냅킨으로 화가의 입을 막았다. 무릎꿇고 사죄드려도 모자랄 판에 무슨 헛소리냐 멍청아- 아무래도 좀 취한 것 같았다.

"아서라 폴. 모작을 잘 그린다고 해서 창작도 잘 할 거라는 보장은 없어. 레오는 위작 말고 자기 작품은 한 점도 그리지 못했으니까. 교수 없이는 그 위작마저 제대로 못 팔았고."

그런 혹평을 하다니 내가 그린 초상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더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화가의 입을 다시 틀어막은 메로스가 넋두리를 했다. 선생님께서 정말로 로엔그린의 회고록을 쓰셨단 말인가. 기말고사 때 동사 변화 외우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후학을 위해 좀 쉽게 써 주시지. 의뢰인이 그 정도면 양반이다, 처음에는 아무개의 글을 토대로 쓸 생각이었다면서 어느 문호의 이름을 대자 메로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작품을 읽어 본 적은 없지만 문장이 끔찍하게 장황한가 보군 그래.

"그러고 보니 강의 시간에 듣기로 회고록 원본을 본 사람은 거의 없고 연구용으로 쓰이는 사본은 왕실의 검열을 받아 일부 문장이 삭제된 상태라고 하던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디가 어떻게 지워졌는지 알고 계시겠군요."

"그렇다네. 그림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몇 구절을 없앴더군. 수도원에도 단단히 함구령이 떨어졌고 말일세. 우리 같은 사기꾼이 회고록을 보고 위작을 만들지 못하게끔 공주 전하께서 조치를 취한 것 같네."

"제 은사님께서 원본을 보고 싶어도 도통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다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만 그게 가짜였다니 유감이군요. 로엔그린을 좋아하셔서 회고록을 주제로 논문도 냈는데. 선생님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회고록을 다룬 연구는 전부…."

"무가치한 셈이지. 그래도 염려 말게나. 교수도 학자였으니만큼 그 점을 우려해서 구역질이 나올 만큼 철저히 고증에 신경을 썼으니까. 그림에 대한 묘사를 제외하면 창작이나 상상에 기반한 내용은 아무것도 넣지 않았네. 그 회고록 때문에 이전에 나온 학설이 뒤집히거나 학계가 어지러워질 만한 일은 없을 게야."

"하지만 진짜 파이의 그림이 나타나면 어쩌죠? 회고록과 다르다면서 그쪽이 도리어 가짜 취급을 받을 텐데요."

"그때는 내 조카가 어떻게든 해 줄 걸세. 폴, 알겠지? 나중에 진짜 파이의 그림이 발견되거든 꼭 구입해 두도록 하려무나. 오늘 한 이야기는 전부 자서전으로 써서 남길 생각이니까 내가 죽거든 적당한 출판사에 보내 주고. 책이 출판돼서 진실이 밝혀지면 진품 가격이 크게 오를 게다. 물론 공주 전하께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계시는 이상 회고록이랑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가 위작이라는 소리를 함부로 하고 다녔다간 다시는 이 나라 땅을 못 밟게 될지도 모르니 꼭 외국 출판사에 맡겨야 된다. 비싼 돈 들여 유학까지 보내 줬는데 그 정도 일쯤은 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바니타스 교수가 세상을 뜨다니 유감이군. 레오도 실종됐고 이제 증거라곤 내 젊었을 적 사진 정도밖에 없나…."

의뢰인이 자서전을 내겠다는 소리에 구미가 당겼는지 사업가가 거래를 제안했다. 위작을 판 일은 눈감아줄 테니 대신 바니타스 교수의 일기장을 넘기지 않겠느냔다. 후식으로 나온 레몬 셔벗에 우아하게 은수저를 꽂아넣던 화랑 주인이 사기꾼의 후계자답게 응수했다. 위작을 팔다니. 애당초 저 [메로스의 비통]이 파이의 작품이라고 내 입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나. 왕립 박물관에서 일하는 지인이 그림과 편지를 감정해 주겠다고 했으니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확한 값어치를 알고 나서 구입해주십사고 권하자마자 선생님께서 지레 마음이 급해 불문곡직 거액에 가져가 버린 것을 이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하다. 사업가는 일기장을 팔면 앞으로 화랑에 괜찮은 손님을 소개해 주겠다느니 운영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느니 하면서 화랑 주인을 구슬렀다. 아차. 깜박할 뻔했군. 저 시건방진 화가에게 적당한 연줄을 붙여 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지드 가 아가씨의 부탁에 생각이 미친 나는 받아 온 드로잉을 펼쳐놓고 사람들의 견해를 물었다. 달리 모델을 구할 수 없어 정원의 꽃을 주로 그렸다,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그저 똑같이 그리는 데 치중했을 뿐이라 부끄러우나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배우겠다는 아가씨의 말을 전하자 뜻밖에도 메로스가 관심을 보였다. 아는 출판사에서 새로 식물도감을 낸다고 들었는데 삽화로 쓸 세밀화 그릴 사람을 구할지도 모르니 한번 보여주겠단다. 취한 사람이 하는 말이라 좀 불안하기는 했으나 딱히 더 손쓸 방도가 없었으므로 나는 행운을 빌며 시인에게 지드 아가씨의 그림을 맡겼다.

 

자기만 당할 수 없었는지 사업가는 [메로스의 비통]을 왕립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듬해 봄을 맞아 박물관에서 파이 특별전이 열리자 우리 모두에게 사업가가 보낸 입장권이 날아왔다. 사과꽃이 만발한 박물관 앞뜰을 걷노라니까 지드 아가씨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왔다. 탐정님 덕택에 일자리도 얻고 좋은 분들을 만나 큰 도움을 받았노라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아가씨 뒤로 큼직한 바구니를 든 화랑 주인과 검은 정장을 입은 의뢰인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자신들은 이제 아버지를 뵈러 갈 생각이니 잘 관람하다 가라면서 화랑 주인이 바구니를 열고 잘 익은 체리를 한 줌 내주었다. 바구니 안에 도시락과 함께 흰 카네이션이 들어 있었다.

전시실로 들어가자 화가의 말대로 백금발 청년을 그린 그림이 여러 점 보였다. 메로스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목동 앞을 지나는데 화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 무슨 물건을 팔든지 거기 이야기가 붙어 있으면 더 잘 팔리는 법이다, 이 바닥에도 스토리텔링이라는 게 중요한 만큼 나중에는 오히려 진품보다 값이 뛸지도 모르지. 한껏 콧대가 높아진 화가가 안쪽 구획에서 나오다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안녕 생쥐 아가씨. 이 몸의 대작을 보러 왔나.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 하마터면 체리 씨를 내뱉을 뻔했다. 황급히 입을 다물고 우물거리는 내게 메로스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거 빨아서 돌려드려야 하는데 죄송하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도 쓸 거고. 화랑 주인에게 받았는지 메로스도 체리로 주머니가 불룩했다.

특별전을 앞두고 몇 세기 전에 사라진 파이의 걸작이 나타났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한 덕에 안쪽 구획은 위작 두 점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의뢰인의 사진이 실린 자서전이 세상에 나오면 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나올까. 사업가를 고소할까. 아니면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이라 치부하고 무시해 버릴까. 의뢰인의 자서전은 공주 전하의 눈길을 끌 만큼 잘 팔릴까? 어쩌면 자서전이 나오기 전에 공주 전하께서 실각하든가 해서 일찌감치 사실이 들통나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더라도 나름 재미있는 비화가 딸린 그림이라 하여 그럭저럭 비싸게 팔릴지도 모르고. 최소한 저 입만 산 화가가 그린 다른 레플리카들보다는 훨씬 유명해지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차츰 앞사람이 빠지면서 이번 특별전의 메인 전시품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사업가의 회랑에서 본 초상화를 떠올리며 [메로스의 비통]과 나란히 걸린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를 응시했다. 예상대로 페페의 얼굴은 젊은 시절 의뢰인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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