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018년 2월 15일 오후 2:11에 조금 문장을 다듬어 보았습니다!)

지저분한 우주 정거장은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조도가 낮은 조명이 머리 위에 내려앉아 우울한 회색빛 표정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나같이 고통이 가득한 곳으로부터 고통이 가득한 곳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저기서 간간히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정거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희석되어 사라졌다. 정거장 내로 유입되는 공기에 산소 분압 조절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인지 민혁은 숨 쉬기가 가빴다. 황 계열의 퀴퀴한 불순물의 냄새도 희미하지만 명확하게 코끝에서 느껴졌다. 민혁과 미희는 그러한 모습의 정거장에서조차 인적이 드문, 맨 끝 승차장에서 단 둘이 작은 목소리로 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돈 줄게. 해 주는 의사도 알고 있어. 안전한 데야. 내가 같이 가 줄게.”
민혁은 미희에게 간청했다. 민혁의 절박한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고, 미희에게 닿을 듯 말 듯 내민 양손은 캔틸레버처럼 떨렸다.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아기 낳을 거야. 그 사람 도망간 거 아니야. 내가 아기 낳고 기다리고 있으면 틀림없이 돌아올 거야.”
미희는 언제나 그 주제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완강했다. 민혁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같은 의미를 가진 말들을 단호하게 반복할 뿐이었다. 
“너 자꾸만..”
“그런데 넌 자꾸 왜 그러는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지루하게 맴도는 불편한 대화에 진저리가 나 버린 미희는 급기야 기분이 상했다는 얼굴로 이렇게 쏘아 붙이고는 몸을 돌려 가운데 있는 승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희가 떠난 자리에 남아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로 벙어리처럼 할 말을 잇지 못하던 민혁은 결국 불안하게 오가던 마음을 굳히고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미희의 등에 대고 외쳤다.
“좋아한다, 미희야. 사랑해!”
미희는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민혁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있는 심적 임계점을 넘어 스스로의 태도를 추스를 수 없게 된 민혁은 가슴 속에서 끌어올린 말을 이성으로 정제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내뱉었다.
“난 네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야! 너랑 계속해서 함께 있을 거야! 아기를 낳고 싶으면 낳자. 내가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돌봐줄게. 하지만 그 사람은 잊어. 그 사람 도망간 거야, 정말로. 그 사람한테 피해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내가, 내가 너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난 절대 떠나지 않을게.”
문면은 진심이었지만 누군가의 굳어버린 마음을 움직이기에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미희는 민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고 멀찍이 걸어가 버렸다. 
“왜! 어째서!”
민혁은 자리에 주저앉아 악을 질렀다. 멀찍이 서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피곤한 표정으로 민혁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여기서 새로 벌어지는 말썽에 휘말릴 기력이 없었기에 민혁이 있는 곳과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보다 먼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 사람은 도망간 것이 아냐.’ 
승차장에 서 있는 미희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인 채 이 말을 마음속에서 주문처럼 되뇌었다. 
제대로 단열이 되지 않는 정거장은 추웠다. 전도되어 내부로 들어온 우주공간의 냉기가 정거장 안을 거칠게 순환하는 생성공기와 섞여 모두의 가슴에서 조금씩 희망을 앗아갔다. 추운 바람을 맞자 미희는 문득 그 때 생각이 났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그 기억이 마음속에 살아나면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이 보다 거세게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미희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망령을 쫓는 것처럼 머릿속의 정경을 의식 깊숙한 곳으로 억눌렀다. 미희의 부모가 미희를 연락선 정거장에 버렸을 때의 기억. 그때의 미희도 지금처럼 춥고 배고팠다. 한 순간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자각한 아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공포 외에는 없었다. 공포! 미희가 평판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면서도 자기 아버지를 닮은 남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던 이유, 내심 그 남자가 자신을 임신시키고 결국 버린 것 같다는 의혹이 들면서도 필사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촉발한 것은 바로 마음속의 깊은 곳에 딱지처럼 내려앉은, 소중한 사람에게 버려지는 것에 대한 그 근원적인 공포였다. 
물론 민혁은 자명하거니와 미희 자신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런 괴이하고 강력한 신념의 원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언어를 통해 가려진 기억을 의식으로 끄집어내어 그것이 자신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명징이 평가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몇 겹의 심리적 기만에 의해 층층이 덮여져 자각할 수 없는 무의식의 저변에 고요히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민혁은 참담한 기분으로 딱딱한 연락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객실 내는 자리를 찾거나 떠나는 사람들에 의해 소란스러웠지만 민혁의 귀에는 어딘가 먼 곳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곁에 다른 승객이 와서 앉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미희에게 차였다는 문제, 미희에 대한 걱정과 연민 외에 연락선에만 타면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혁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다. 민혁의 어머니는 어린 민혁을 데리고 새로운 직장, 그래봤자 위험하고 거칠고 힘들 것이 틀림없을 직장을 찾아 연락선을 타고 행성 간 이동을 하던 중 기도가 막혀 죽었다. 앞선 직장이었던 바이오기기 생산라인에서 계속해서 마셨던 실리카나노입자 분진이 문제였다. 경련으로 기도가 막힌 사람에게서 기도를 확보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의사는 그런 싸구려 연락선을 타지 않는다. 심폐소생술 따위의 간단한 응급조치를 할 수 있는 승무원조차도 그들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사치에 불과했다. 물밖에 내놓은 붕어처럼 허무하게 뻐금거리는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서서히 숨이 끊어져가는 어머니를 바로 곁에서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은 환장할 만한 경험이었다. 민혁은 아직도 연락선만 타면 그때의 기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기에 여건이 뒷받침되는 한 되도록 한 행성에서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나도록 오래 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지금은 직전 직장, 미희를 처음 만났던 직장에서 돌발적이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었고, 근처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실패했기 때문에 인접 행성으로 향하는 연락선을 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혁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악몽에 한동안 시달리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눈을 뜨고는 그보다 마음을 덜 괴롭히는 걱정거리를 찾기 위해 눈을 굴려 미희를 찾아보았다. 지금 앉은 위치에서는 미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객석 사이를 오가는 사람과 그 사람들이 들고 있는 짐 더미 사이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민혁은 처음에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민혁은 눈을 끔벅거리고, 자기가 본 것을 안광으로 머리카락이라도 태울 기세로 집중해 쏘아보다가 눈을 마주칠 것 같으면 고개를 숙이는 일을 수차례, 수십 분 동안이나 반복하면서 확신을 점점이 쌓아 올리고서야 궁극적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민혁은 아버지가 있었다. 유성생식을 하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명제였지만 민혁은 평생에 걸쳐 이 말을 낯설게 느끼며 살아야 했다. 민혁의 아버지는 민혁의 어머니를 임신시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종적을 감췄다. 차라리 뱃속의 아기가 충분히 자라기 전, 임신 초기에 낙태라도 시켜주고 도망쳤다면 그나마 참작의 여지는 있었겠지만 그 정도의 양심도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까지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잠시 여행을 떠난 것뿐이라는 망상을 죽을 때까지 치료되지 않는 종양처럼 달고 살게 되었다. 냉혹한 우주는 미혼모에게 가혹했다. 민혁과 어머니는 민혁이 태어난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미네랄을 제대로 섭취할 수 없는 식생활은 중등도의 배설장애를 야기했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큰 후부터는 민혁에게 선택이라는 개념이 점차 어색하게 변화해갔다. 그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던 사실상 유일한 것은 여기서 당장 죽느냐 마느냐 뿐이었다. 
‘엄마 미쳤어요!? 그게 어떻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엄마 만날 때도 창녀랑 바람피우고 있었다며! 그게 무슨 사람이기나 해? 색에 미친 색마지!?’
민혁은 하루는 하도 기가 막혀서 먹던 식탁을 뒤엎고 어머니에게 악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묵묵히 바닥에 쏟아진 식량을 주워 먹으며 같은 문구만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네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한다. 그냥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 뿐이야.’
그리고 지금, 민혁의 눈앞에 똑똑히 보이는 것은 바로 민혁의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신주단지처럼 들고 다니던 사진이 단서가 되어 주었다. 사진은 어머니의 한 줌도 안 되는 유품을 정리할 때 뒷면에 온갖 저주의 말을 갈겨쓴 다음 우주에 버렸지만 민혁의 기억에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불쾌할 정도로 작아서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간 양쪽에 비열하게 새겨진 눈, 지나치게 길어 시종 우울해 보이는 인중, 왼쪽 목덜미의 모반까지, 나이는 당연히 사진 속의 모습보다 들어 보였지만 여타의 특징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물이 민혁의 대각선 방향에 앉아 더러운 숨으로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더러운 숨이라는 표현은 민혁의 발상이었다. 민혁은 그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확신한 순간부터 뚜렷한 방향성을 가진 강렬한 증오에 사로잡혔다. 그 증오는 주위의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태우고 민혁 자신까지 집어삼킬 정도로 크나큰 것이었다.
민혁이 그 외에 무슨 감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민혁은 자기 아버지에게는 쾌락의 부산물에 불과했고, 어머니에게는 그저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제시할 수 있는 보험증서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민혁은 그보다 나은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기에는 여건도 능력도 미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해 평생을 가혹한 조건에서 굴러다니며 살게 되었고, 당장 지금도 다른 행성에 개도 안 물어갈 희토류 채굴 인부 자리를 구걸하러 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죽여 버리고 자살할까?’
그것도 민혁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 같았다. 보다 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광산 내에서 이름 없는 인부 중 한 명으로 매몰되거나 폐가 망가져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남 보기에 독특하고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일생일대의 고백도 거절당한 직후라서 극도로 우울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혁은 이내 실제로 그런 일을 감행하기 직전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각오를 굳힌 민혁이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옆에 않은 사람이 말을 걸었다.
“아버지인가 보네요.”
민혁은 그 말을 듣자 자신의 내밀한 생각이 불특정다수가 눈에 대고 있는 돋보기 아래 까발려진 것 마냥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
민혁은 이렇게 반문하며 옆 좌석의 사람을 돌아보았다. 낡은 구식 양복을 입은 땅딸막한 중년남자였다. 얼굴은 곡식을 담은 포대자루처럼 납작하고 퉁퉁했으며, 금빛 모발은 가운데부터 벗겨지고 있는 추하게 생긴 용모를 하고 있었다.
“닮았네요, 그런데 서로 사이가 안 좋은가 봐요?”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에 옅은 웃음을 띠고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혁의 주위에서는 접하기 드문 말투였는데, 통상 십장 이상의 직급을 가진 사람이나 사기꾼들이 쓰는 말투가 저랬다고 민혁은 기억했다. 
“그런데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요?”
민혁은 사납게 쏘아붙였다. 어차피 이 사회는 간지럽게 예의나 차리는 곳도 아니었다. 제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줘도 바위로 뒤통수를 내려치거나 폐에 칼을 꽂고 지갑을 털어가는 녀석들은 플랑크톤만큼이나 많았다. 
땅딸막한 남자는 민혁의 반응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민혁은 그 묘한 태도를 보고는 행정직과 사기꾼의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사기꾼 쪽으로 판단을 크게 기울였다. 남자가 민혁의 눈을 친절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요. 어린 시절에 어머님을 여의고 아버님이랑만 살게 되었는데, 사이가 나빴어요. 아주 나빴죠.”
“어떻게 나빴는데요?”
민혁이 반문하자 남자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나 민혁은 그 찰나 남자의 얼굴에서 농밀하게 압축된 고통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민혁에게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어쩐지 낯익었다. 잔뜩 날이 서 있던 방어적인 마음이 어쩐지 다소 풀리는 것도 같았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셨거든요. 제가 어릴 때부터 술만 마시면서 제대로 정서적인 교류를 해주지 않았어요. 그러다 제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죠. 그래서 알아요.”
남자는 민혁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민혁에게 말했다. 
“이런 냉혹한 우주에서는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피난처에요. 제가 길게 산 것은 아니지만 살아오는 내내 뼈저리게 느꼈죠. 사랑은 식량과 같아서 기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잡아 소모해야 해요. 안 그러면 숨 쉬고 두 발로 버티는 것 자체가 힘겨워요. 특히나 가족은 천성적으로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 아닙니까.”
남자의 말투와 표정에는 왠지 말을 끊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단호함이 묻어 있었기에 민혁은 그가 하는 말을 어쩌다 보니 다 듣고 있어야 했다. 남자의 말을 듣다 보니 또 얇은 귀가 도져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결핍된 것을 찾기 마련이기에, 가족 간의 사랑은 우주 규모로 이산되는 수준의 핵가족화가 진행된 현재에도 유효한 주제였다. 가족의 중요성이라는 개념이 사회 저변에 낮게 깔려 있었던 탓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혁도 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민혁처럼 교육 수준이 낮고 미래가 불투명한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미신과 권위를 강하게 믿게 되는 경향성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가족과 사랑이 소중하다 운운하는 이야기를 여기서 처음 들은 것은 아니었기에 민혁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그 무기란 정신적인 면역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좋다는 얘기도 자꾸 듣다 보면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민혁은 계속해서 사랑 운운하는 이 남자가 어쩐지 변태 같다고 느껴졌다. 도망칠 필요가 있었다. 도망친 곳에서 조금 기다리면 긴 여행을 대비해 알아서 잠에 들던지 할 것이다. 
“가족이란 자고로,”
“아, 잠시 화장실에 좀 가야겠어요.”
민혁은 남자의 말을 끊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좁아터진 복도를 힘겹게 가르며 전진했다. 화장실은 복도 끝, 연락선의 후미에 있었다. 낡고 녹슨 회색 쇠문을 열자 구린내가 확 풍겨왔다. 아무리 여러 번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경험이었다. 민혁은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차가운 변기에 앉았다. 남자가 하던 말은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아버지와의 일전을 어떻게 치러야 할까 다시금 집중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인과 자살도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상태로 한참을 생각했을 때였다. 느닷없이 벽면을 통해 울리는 커다란 굉음이 들리더니 선체가 갑작스럽게 45도 정도 기울어졌다. 민혁은 변기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벽면에 세차게 부딪쳤다. 변기에서 튀어나온 오염된 물이 민혁의 상체를 축축하게 적셨다. 불시에 당한 일이라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금전의 고성 때문에 귀가 먹먹하고 이명이 들렸다. 
그때 연락선 측면에서는 직원용 에어록이 강제로 개방되었다. 해킹이었다. 스텔스장을 펼친 채 연락선 곁으로 몰래 다가와 도킹 모듈에 강제로 접속한 정체불명의 우주선에서 일곱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열린 에어록을 통해 연락선 내부로 들어왔다. 보안요원들은 겨우 두 명이라는 소수여서 침입자들이 가지고 있는 유사화기에 속수무책으로 제압되었다. 유사화기는 화약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전통적인 화기와 형태적 유사성이 강하고, 그러면서도 냉병기와는 형태상 차이가 큰 무기를 분류하기 위해 도입된 범주였다. 선두에 선 근육질 남자는 국소가열총을 들고 있었다. 엄청나게 비싸고 구하기 힘든 무기였다. 생체에 쏘면 체액을 국소적으로 가열해 폭발하게 함으로서 몸에 주먹만 한 공동을 만들어내는 기능이 있었다. 거기에 체액은 순환하기 때문에 피격된 부위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1~2도 정도의 심부화상을 열전도에 의해 유발할 수도 있었다. 안전요원 하나는 복부에, 다른 하나는 머리에 국소가열총을 맞았다. 인간의 살이 타오를 때 나는 달고 역겨운 냄새가 주변에 자욱해졌다. 
조종 모듈과 서비스 모듈의 연결부인 연락선의 목 부분에서 침입자들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둘은 기장실의 잠긴 문을 열고 기장을 제압하기 위해 남았고, 나머지 다섯은 사실상 사용되지 않는 직원용 공간을 통해 승객실로 침입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자 유사화기가 아닌 일반 총으로 무장한 남자 하나가 문 너머에서 빠끔히 팔만 내밀고 객실 내로 총을 난사했다. 객실 벽면에 맞아 도탄이 된 총알이 두 명을 죽였다. 곧 객실은 흐느끼고 기도하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승객들이 겁을 먹고 얌전해지자 침입자들의 우두머리가 호위를 받으며 좁은 통로를 쑤시고 서성거리면서 승객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는 포르노업자였다. 그 중에서도 나름 신산업에 종사한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기술과 정신의 변모에 따라 완전히 새로워진 포르노를 찍어 파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그가 다루는 전례 없는 종류의 포르노는 배우를 수급하기가 힘들었다. 한 편을 찍으면 더 이상 배우를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를 구하는 유통망을 적절히 구축하는 것이 사업의 핵심 중 하나가 되었다. 돈이 궁한 사람에게 돈을 쥐어주고 구하는 방식은 개런티가 너무 비싸 만족할만한 이윤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배우에게 개런티를 주는 대신 그 돈으로 훈련받은 인력들을 고용해 지금과 같이 연락선을 강탈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하층민들이 탄 연락선은 높은 확률로 보안이 엉망이었다. 낡은 우주선을 쓰기 때문에 침입하기도 쉬웠고, 선적이 등록된 자치구가 애초에 별다른 힘이 없는 곳일 가능성이 커 승객이 통째로 실종되더라도 배만 멀쩡히 남아 있다면 사람은 그다지 열심히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우주는 컸지만 지표는 좁았고, 인간은 많았다. 
객실을 둘러보던 업자의 눈에 미희가 띄었다. 겁먹은 탓에 눈물이 고인 눈과 불안한 표정으로 업자를 곁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양손으로는 살짝 부른 배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임신하고 있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업자의 눈이 반짝였다. 업자는 슬그머니 미희의 얼굴로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너 뱃속에 몇 개월이냐?”
그 말을 들은 미희가 발작을 일으켰다. 배를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업자에게서 몸을 돌리더니 처절하게 외쳤다. 
“안 돼! 내 아기! 이 아기가 있어야 그이랑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공포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린 미희는 그때부터 종작없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아기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었다. 업자는 일단 몸을 뒤로 빼고는 맹금 앞의 쥐처럼 굳어버린 이 여자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5개월? 7개월은 안 된 것 같고...’
일전에 낡은 방식의 포르노를 찍을 시절에 임산부와 작업한 적이 몇 번 있었으나 업종을 바꾼 후로는 처음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가 자해를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스스로 제왕절개를 하는 임산부는 이미 경쟁사에서 다룬 적이 있는 소재였다. 보다 나은 영상을 찍으려면 무언가 더 개선할 점이 필요했는데 아이디어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굴을 다시 봐야겠어.’
“저 여자 얼굴 좀 보자.”
업자가 고용인들에게 지시했다. 고용인 한 명이 명령에 반응했다.
“이 썅년아! 면상 좀 돌려봐! 안 그러면 총알로 배때기를 수술해준다!?”
고용인은 총구를 미희의 등에 들이대며 머리채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미희가 지르는 비명은 점차 높아져 돼지의 그것과 유사해졌다.
“아따 독하네.”
다른 고용인 한 명이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만둬요!”
갑자기 승객들 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 음량이 워낙 크고 씩씩했던 탓에 업자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얘 기절했는데요?”
미희의 얼굴을 돌리려던 고용인이 업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업자는 소리를 지른 승객을 쳐다보느라 바빴다. 그만두라고 말한 것은 갈색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였다. 그는 객석에서 일어나 형형한 눈빛으로 업자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뭐라고?”
업자가 그 남자에게 물었다. 
“임산부에게 너무 심한 거 아니요?”
업자는 여태까지 쌓아온 직업적 경험을 토대로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다음 행동을 어떻게 취해야할지 계산했다. 일단 무용한 영웅심리 때문에 다른 인간들을 동요시킬 가능성이 있는 ‘저런 건’ 시끄러우니까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정확한 관계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여자를 구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이 임산부와 저 남자 간에는 포르노를 찍는 데 도움이 되는 감정적 바탕도 적절히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장비 상태도 점검하고 광원을 적절히 배치해 좋은 화면을 구성하기 위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워밍업으로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일단 쟤랑 이 여자로 첫 작품 찍자.”
업자가 지시했다.
“어디로 데려갈까요?”
“하던 대로 저 뒤쪽에 직원용 대기실에서 하자.”

화장실에 있던 민혁은 이 모든 상황을 소리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기절할 것 같았다. 공포 때문이었다. 떨리는 턱 때문에 치아가 서로 부딪쳐 딱딱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한 순간 그 점을 자각하고 민혁은 입을 아예 꽉 다물어버렸다. 저들에 대해서는 일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과거에 아는 사람에게서 포르노 업자와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제안 받은 자리는 영상편집이었지만 사실상 편집을 병행하는 잡일에 가까웠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들에게 걸리면 끝장이라는 점이었다.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민혁은 이 화장실에서 어떻게 비비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미희의 비명을 들으니 또 마음이 복잡해졌다. 
무서웠다. 저 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무서웠다. 그것은 단순히 타인으로부터 성적으로 무참하게 고문당하는 것과는 달랐다. 보다 더 모욕적이고, 보다 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미희는 계속해서 아기를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민혁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미희에 대해 생각했다. 
‘난 무섭지 않아. 난 미희를 사랑해.’
민혁은 이 짧은 문구를 주문처럼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미희와 함께 했던 짧지만 다양한 추억의 편린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희와 처음 만났을 때 미희가 웃으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던 기억, 미희가 상냥한 태도로 열이 올라 몸져 누웠던 자신의 병간호를 해주었을 때의 기억, 미희가 의외의 유머감각으로 돈을 떼여 낙담해 있던 자신을 위로해 주었을 때의 기억, 미희의 얼굴. 미희의 미소, 미희의 친절한 목소리..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아. 미희야 사랑해. 미희야.. 미희야 사랑해. 미희야 사랑해. 미희야 사랑해. 미희야 사랑해. 미희야 사랑해. 미희야 사랑해. 미희야 사랑해. 미희야 사랑해.…’
막상 생각해 보자면 동정이나 동경에 가까웠지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도 같았다.
‘아니야!’
민혁은 필사적인 태도로 미희에 대한 사랑만을 떠올리려 했다. 공포를 억누르고 미희의 모습과 미희에 대한 사랑만을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그렸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신비롭게도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용기도 생기는 것 같았다. 공포가, 그리고 그 공포를 유발하는 지식과 기억들이 미희의 이미지에 밀려 점진적으로 억눌러졌다. 그러자 민혁은 이렇게 겨우 잡은 마음이 다시 공포에 꺾여버리기 전에 미희를 구하기 위해 긴급하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혔다.
민혁은 과거 우주선에서 방역작업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방역이래야 시간이 지나면 일시에 기화하는 독한 소독제를 우주선의 곳곳에 놓아두고 시간 안에 빠져 나오는 일이었다. 그때 감염의 주요한 온상지인 화장실과 연결된 여러 구조물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민혁은 화장실 벽면을 살펴보았다. 오른쪽 머리 위에 크게 뚫린 구멍이 하나 있었다. 분변 부산물을 통한 선내감염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역장치의 하나로, 화장실 내의 공기를 빨아들여 바이오용 헤파필터로 보내 처리하는 배기관이었다. 이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장치에 의해 내부 공기는 언제나 객실에서 화장실 방향으로만 흘렀고, 화장실로 흘러들어온 공기는 잠시도 고이지 않은 채 상시적으로 배기될 수 있었다. 민혁이 살펴보니 배기관의 입구에는 보호용 철망이 막아서 있었지만 가장자리의 나사가 녹슬어 있었다.
민혁은 일단 변기물로 젖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다음 양 발을 배기관이 위치한 벽면에 두고 양손은 등 뒤로 뻗어 반대쪽 벽면에 댄 채로 다리를 쭉 펴 자기 몸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신발 밑창이 닳아 미끄러웠다. 민혁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와 얼른 신발을 벗고 신발끈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잡은 뒤 그 상태로 손바닥과 발을 조금씩 위로 올리며 상승하기 시작했다. 평생에 걸친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몸이었기 때문에 힘은 겨웠지만 가능했다. 아홉 번 그렇게 하자 발이 배기관 입구에 닿았다. 왼발은 배기관 옆의 벽면에 두고, 오른발로 철창을 찼다. 철창이 찌그러졌다. 그 바람에 허공에 늘어져 있던 신체의 균형이 깨져 몸이 좌우로 흔들거리게 되었다. 체중을 지탱하던 팔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여기서 떨어지면 끝장이었기에 민혁은 이를 앙 물고 버텼다. 
“무슨 소리야?”
업자가 화장실에서 나는 소음을 들었다.
민혁은 다시 한 번 철창을 발로 찼다. 철창이 완전히 찌그러지며 배기관 너머로 빠져버렸다. 아래쪽으로 곧게 뻗어 있는 배기관을 따라 추락하는 철창이 배기관 벽면에 충돌하며 소음이 크게 났다.
“야, 가 봐.”
업자가 고용인에게 지시했다. 국소가열총을 든 고용인이 겁에 질린 채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를 지나쳐 화장실로 향했다. 그 사이 업자는 객실을 감시할 인원 하나를 남겨놓은 채 미희와 수염 난 남자를 데리고 직원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화장실을 살펴보라는 지시를 받은 고용인은 화장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에 귀를 대고 내부의 소리를 탐색했다. 안은 고요했다. 유의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리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용인은 뒤로 물러서서 화장실 문을 발로 차 열고는 개방된 문 너머로 총구를 들이대며 좁은 화장실 전체를 한 차례 훑었다.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낡은 작업화 한 개가 떨어져 있었다. 

민혁은 이중으로 배치되어 있는 헤파필터를 잡아 뜯고는 작은 방으로 내려섰다. 필터를 얼마나 오래 갈지 않았는지 필터를 뜯자마자 시꺼먼 미세먼지가 자욱하게 생성되었다. 민혁의 얼굴과 손, 상의는 온통 검은 먼지로 뒤덮였다. 몸에서 떨어져도 정전기 때문에 다시 달라붙어버리는 먼지를 손으로 털어보려다 포기한 민혁은 자신이 내려선 방에 난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온 곳은 연락선 아래쪽의 기술자용 통로였다. 
우주선의 기술자용 통로는 유사 시 엔지니어가 배의 이면에 존재하는 각종 주요 부품에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었다. 배의 구조는 복잡했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세밀한 유지보수를 위해서는 이런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이 통로를 통해 각 구획으로 뻗어 있는 조명, 통신, 순환, 냉난방 등을 포함한 모든 계통의 중심, 그리고 말단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원래는 우주선의 전, 중, 후에 마련된, 카드키로 잠긴 비상구를 열면 나오는 해치를 통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민혁은 우주선의 구조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민혁이 이곳으로 내려온 것은 일단 이러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고, 숨기에 괜찮았고, 그런 상태로 배의 모든 구획에 접근할 수 있어 비밀리에 포르노업자들의 동향을 관찰하며 반격할 좋은 기회를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자용 통로는 오로지 전문가들을 위해서만 마련된 것이었다. 민혁은 처음 내려선 방을 나선 지 몇 분 만에 길을 잃어버렸다. 이 통로는 숙달된 엔지니어나 여러 번 오가 길의 배치가 눈에 익은 것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어디를 가든지 다 똑같아 보여 거의 미로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유사 시 전체 문을 개방하면 통로 전체가 단순한 격자구조로 변했지만 그 문을 여는 스위치는 기장실에 있었다. 미로 속에 각 구획의 역할과 좌표를 표시하는 기호들이 구획 별로 새겨져 있기는 했으나 다들 약어, 그것도 전문용어가 섞인 약어들이라 민혁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직원 대기실 내에 조명과 촬영장비가 세팅되었다. 이 사업의 장점 중 하나는 특별한 세트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현장감이 중요시되는 장르였기에 통제된 장소에서 촬영된 종류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작품이 소비자들로부터 보다 더 선호되었다. 
임신한 여자는 탈진해 기절한 상태였다. 이 시기의 임산부들은 뭐만 하려 하면 유산을 해버리기에 귀찮았다. 업자는 수염이 난 남자와 탈진한 여자를 각각 대기실의 반대편에 두고 마주보게 했다. 촬영기사는 카메라 두 대 중 화질이 보다 좋은 것은 남자를, 좀 더 싸구려인 카메라는 여자를 잡도록 배치했다. 지금 세팅에서는 여자가 크게 비중이 없었다. 여자의 영상은 메인 영상에 조그맣게 삽입하고 필요시에만 큰 창으로 띄워 볼 수 있도록 처리할 것이었다. 
“야, 너 저 여자한테 관심 있지?”
업자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안 그러면 제가 죽겠다고 감싸고 나설 수가 없어. 그렇지? 저 여자랑 하고 싶은 거지?”
“미친 새끼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남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업자는 환하게 미소 짓고는 손에 들고 있던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눈과 입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는 종류의 마스크였다. 업자는 마스크를 쓰고 남자의 곁에 놓인 낮은 의자에 않았다. 그리고 좌석에서 강탈해 온 남자의 가방에서 꺼낸 소지품 중 선별된 것들을 앞의 좌판에 늘어놓고 촬영기사에게 지시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업자는 손뼉을 치고 밝은 목소리로 화면에 대고 말했다.
“자, SIQ-3787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크나큰 사랑을 보여주실 분은..”
업자는 좌판에서 신분증을 들고 화면에 비추었다.
“최민석씨입니다! 생일은 22XX년 10월 25일이고, 화성에서 태어나셨네요! 태양계 출신이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 멀리도 오셨네요~” 
업자는 신분증을 내려놓고 구강청정제를 들어올렸다. 
“거친 우주에서도 상큼함을 잊지 않는 남자! 매일 아침 정성스럽게 수염을 다듬는 남자! 최민석씨는 깔끔하고 선량한 분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 양치는 얼마나 하시나요?”
업자가 최민석에게 물었다.
“시발새끼들아!”
“네,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 절차는 포르노의 고객들에게 영상의 주인공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감각을 전달하고 최소한의 친밀감을 형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업자는 계속해서 최민석의 소지품들을 소개해가면서 그의 성격, 과거, 취향을 포함한 총체적 인간상을 대부분 추론에 의해 메워갔다. 그러나 추론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비약은 삼갔기에 업자가 구성해가는 가상의 인간상은 점차 실제 최민석의 그것과 비슷하게 변화해갔다. 사실 그 정보가 실제 최민석과 얼마나 비슷한지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최민석의 껍데기를 쓴 인간상이 어느 정도 가공된 정보라는 사실을 자각하더라도 상당히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너무 많은 정보는 사실 필요치 않았다.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정보들을 제시하면 나머지는 시청자들의 상상력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업자는 가끔 대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최민석에게 질문을 건네기도 했는데, 시청자들에게 희생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미희는 남자들이 자신을 끌고 가려 하자 악을 쓰며 울다가 기절한 상태였는데, 업자의 소개말 사이사이에서 최민석이 생판 모르는 임산부인 그녀를 오로지 도의적인 마음으로 도와주려 했었다는 식으로 가볍게 언급될 뿐이었다. 
그렇게 진행되어 더 이상 최민석이라는 인간에 대해 알아낼 것도, 부연하여 이야기할 것도 없어지자, 영상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단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사랑의 묘약’이라는 약품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품의 독점을 위해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합성을 위해 몇 종류의 GMO에서 추출한 생화학물질이 필요했고, 거기에 무기약품을 섞어 여러 단계의 복잡한 유기합성 반응을 진행시켜야했다. 수율과 순도를 높이기 위해 각 단계마다 정밀하게 배합된 이동상을 이용하여 칼럼으로 불순물을 제거하였으며, 그 외에도 증류, 동결건조, 추출 같은 복잡한 분리공정이 개입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듣기로는 분석 장비를 동원한 역공학을 방지하기 위해 십여 가지의 마스킹 물질이 포함된다고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매우 맑고 청명하게 보이는 무색, 무취, 무미한 투명한 물질로, 1 유닛 용량을 내경동맥에 주사하는 것이 표준적인 사용법이었다.
내경동맥에 주사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인간이 주사하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업자는 두 개가 한 세트로 되어 있는 검고 두꺼운 파스같이 된 기기를 최민석의 윗목 좌우측에 각각 붙였다. 그러면 각 모듈이 초음파를 통해 경동맥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영상화하고, 그 영상을 받아 분석한 인공지능이 좌우측 목 중 내경동맥에 보다 접근이 쉬운 쪽을 선정해 바늘을 들여보내게 되어 있었다. 바늘은 생분해성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고, 원하는 물질을 주입한 후 생친화성 분해제를 한 차례 흘려보내면 가교결합이 풀려 빠른 시간 내에 생분해되는 성질을 가진 것이었다. 
일분도 채 지나지 않아 최민석의 몸에 묘약이 주입되었다. 최민석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흥분의 초기 상태는 방향성이 없는, 순수한 형태의 흥분이었다. 
업자는 권총을 들고 미희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고용인 중 한 명이 최민석의 머리를 고정해 미희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업자가 최민석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것 봐라! 네가 지키려던 여자가 죽는다. 뱃속의 아기랑 같이, 머리가 부서져서 죽는 거야!”
“안 돼.. 안 돼..”
최민석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느닷없이 미희에게 크나큰, 숭고하다고 표현해야할 정도로 거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사랑의 묘약이 가진 강력한 힘의 요체였다. 공포와 사랑 간의 뒤섞임을 이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약물을 주입한 이후 눈앞에 이미 애정을 가지고 있거나 새로 가질 가능성이 큰 대상을 데려다 높고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면 공포와 뒤범벅된 사랑은 약물의 도움을 받아 상승작용을 일으켜 저 높이 지고한 영역으로까지 날아올랐다. 
“이 여자를 살리고 싶어!? 이 여자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제발.. 부탁이야. 무슨 일이든 할게. 그 사람을 죽이지 마.”
“무슨 일이든? 무슨 일이든?”
앞서 조사한 최민석의 신상정보에 따르면 그는 화성 제13대학에서 철학과를 나온 지성인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졸업만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최민석의 소지품 중에는 그가 계속해서 수정 중인 논문의 초고 한 편이 있었는데, 우주의 냉혹함 속에 숨어 있는 인생의 의미를 핵심주제로 다루는 종류였다. 철학자가 천착하는 주제란 결국 철학자 자신이 인생 속에서 절박하게 추구하는 것이거나, 생애 전체에 걸쳐 결코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철학자 스스로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일 터였다. 그런 사실에 근거하여 논문과 관련된 저간의 사정을 한 꺼풀 분석해 벗겨보자면, 결국 최민석은 자기 자신이 만성적으로 느끼고 있는 인생의 무의미함이란 문제를 뼈끝까지 통감한 끝에 그것을 지성을 통해 극복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최상의 희생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측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업자는 최민석에게 지시했다.
“그러면 네 스스로 두개골을 열어서 뇌를 뭉개버려.”
최민석은 더욱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 여자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다!?”
최민석은 지금 자신이 미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 사랑은 너무나 맹목적이고 강력하고, 거스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사랑하는 대상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극한의 고통조차 이겨내며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만들 정도로. 
최민석이 자기희생을 시작했다. 카메라가 그 모습을 집요하게 잡는 사이 업자는 잠시 쉬기 위해 땅딸막한 남자 곁에 가서 앉았다. 이 남자는 업자가 지금 사업을 막 시작하려던 때부터 연이 닿은 돈 많은 VIP로, 특히 업자가 약물을 구하는 데 있어 많은 금전적 도움을 주었었다. 그리고 남자가 그 대가로 요구한 것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촬영 현장을 직관할 수 있도록 업자가 도와주는 것이었다. 
최민석이 스스로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 뽑은 뒤 두피를 절개하고 건네받은 정으로 시상봉합을 이개시키며 비명을 지르는 동안 땅딸막한 남자는 계속해서 움찔거리며 감동으로 훌쩍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최민석이 전등 아래 드러난 뇌를 자기 손으로 뭉개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대목에서는 오열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아, 이것이 사랑.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
온갖 쾌락을 풍성하게 소비하느라 감각이 무뎌진 소비자들은 대용품으로 이 새로운 종류의 포르노에 탐닉하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영상을 통해 오래 전에 잃어버린 애정이라는 느낌과 쾌락을 동시에 소비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런 영상은 ‘감동을 주기도 했고’, ‘보다 친밀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자르고 째서 흥분을 주는 것은 스너프와 동일하지만 그 근간에 농밀한 사랑이 있다는 확정적인 인식 때문에 감정이입이 더 쉽다는 것이었다. 
쓰러진 최민석은 뇌를 쥐고 있는 양손을 발작적으로 움찔거리다 결국 과다출혈로 숨이 멎었다. 촬영기사가 최민석의 시체를 천천히 클로즈업했다. 미희는 자기 앞에서 벌어진 이 천인공노할 범죄에 대해서는 새까맣게 모르는 채로 무의식 속을 헤매고 있었다. 

통로 위편, 각 구획별로 나 있는 해치를 열면 각 구획을 자동으로 통제하고 있는 제어말단들이 놓은 작은 방이 나왔다. 그 방에는 해당 구획의 일반영역을 향해 나 있는, 가로대로 가려진 작은 창이 있었다. 각 계통의 기능 이상이 발생했을 때 구획 내부의 반응을 보며 제어말단을 조정하기 위해 뚫어 놓은 것이었다. 물론 구획으로 직접 통하는 작은 문도 함께 나 있었으나 그것 또한 기장실에서만, 혹은 기장이 서명한 카드키를 통해서만 개폐가 가능했다. 민혁은 자신의 공간감에만 의지해 결국 객실의 제어말단으로 연결되는 해치를 찾아냈다. 민혁은 개중에서도 객실 왼편, 미희가 앉아있던 객석을 향해 창이 나 있는 방으로 통하는 해치를 열어젖히고 내부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안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창을 통해 객실 내부를 살폈다. 객실과 조종실 사이, 승무원들의 공간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침입자 하나가 총을 든 채로 승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승객들은 하나같이 완전히 얼어붙어서는 마네킹처럼 객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개중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문제는 미희였다. 객실 내에서 미희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앉아있던 자리는 물론이고, 시야가 닿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실상 객실 안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민혁은 승무원용 대기실을 떠올렸다. 그나마 가장 크고 활동에 제약이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놈들이 ‘그걸’ 찍고 있고 그래서 미희를 데려간 것이라면 현실적으로 이 배 안에서는 그 장소만한 데가 없었다. 그렇다면, 미희는?
“안 돼...”
민혁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민혁은 서둘러 객실의 제어말단실을 빠져 나와 승무원 대기실의 해치를 향해 움직였다. 객실과 대기실은 일직선상에 인접해 있어 오래 헤맬 필요는 없었다. 벽 하나를 돌아 목적한 위치에 도달해서 양 손으로 해치의 레버를 잡아 막 개방하려는 참이었다. 
“야! 꼼짝 마!”
누군가 등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민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대로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 누구야?!”
민혁은 슬그머니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누가 서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눈이 익자 검은 먼지를 온통 뒤집어 쓴 채로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배경에서 구별해낼 수 있었다.
그때 위층에서는 업자의 고용인들에 의해 기장실 문이 개방되었다. 문이 열린 것을 알아챈 기장은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최후의 대응책을 감행했다. 기장은 조종석의 버튼들을 잠그고 역추진 엔진을 작동시켜 연락선을 급작스럽게 감속시켰다. 기장실안으로 침입하려던 고용인 두 명이 관성에 의해 무서운 기세로 기장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연락선 전방에 충돌하고는 계기판과 제어장치 위로 굴렀다. 기장은 잽싸게 역추진 엔진을 끄고 주엔진의 출력을 최대로 잡아 가속했다. 제로백은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기장은 자신이 기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속도를 조절했다. 그러나 기장의 기절 임계점은 낮았다. 술에 절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가속도만으로도 기장실 안으로 들어와 있던 고용인들이 바람에 쓸리는 낙엽처럼 튕겨져 문 바깥으로 던져졌다. 
민혁은 양 손으로 해치의 레버를 붙잡고 양 발은 해치 가장자리의 턱에 걸친 채로 이를 앙 물고 버텼다. 그러나 국소가열총을 들고 있던 쪽은 미처 대응할 시간도 없이 길게 뻗은 통로 끝에서 끝으로 굴러다녔다. 그가 들고 있던 국소가열총은 중고품이었다. 내부에 심대한 구조적 결함이 있었지만 뜯어보는 것은 전문 엔지니어가 아니면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리 중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 차례 더 급작스런 가감속이 덮쳐온 탓에 고용인이 멜빵으로 몸에 고정된 국소가열총을 앞으로 해 후미 방향의 벽에 충돌했을 때, 총 내부에서 에너지 장력을 생성시키는 부품이 폭발해버렸다. 순간적으로 배출된 에너지가 고용인의 사지를 조각내고 앞에 있던 문을 찌그러트려 문 측면에 커다란 틈을 만들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승객들의 배변을 모아 두는 커다란 주머니였다. 지나치게 쌓이기 전에 미리 유기오염물질을 처리해주는 회사에 의뢰해 처분해야했으나 빽빽한 배차 간격 때문에 그간 상당한 양이 모여 버린 상태였다. 
다시 감속이 있었다. 찌그러진 문틈으로 주머니가 배어져 나왔다. 운동량은 질량에 비례하였기 때문에 그 기세는 무서운 수준이었다. 다시 가속이 있을 때 주머니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문틈의 날카로운 부분에 걸려있던 섬유가 찢어졌다. 그리고 다음 감속 때 주머니는 속에 있던 막대한 양의 오물들을 베헤모스가 토하는 것처럼 뱉어내었다. 
배의 선미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누운 것과 같은 자세라 민혁은 온몸에 걸리는 G 때문에 머리끝에 피가 몰려 정신이 아찔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통로를 꽉 채우며 쏟아져 나오는 믿기지 않는 양의 오물 더미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갈색도 아닌 검은색으로 변한 액체와 무시무시한 악취, 거기에 둥둥 떠다니는 덩어리들이 조명을 받아 악의의 결정체처럼 번들거렸다. 오물들이 무서운 기세로 민혁을 덮쳤다. 민혁은 고함을 질렀다.
“미희야 사랑한다!!!!!!!!”
그러나 기세만으로 버티기에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해치 가장가리에 고정하고 있던 발이 완전히 미끄러져 다리가 오물에 빠져버리자 이미 절반 정도 열려 헐거워진 해치의 레버가 오물의 운동에너지에 의해 몸과 함께 회전했다. 그 바람에 해치에서 미끄러진 민혁은 오물 안으로 떨어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민혁은 머릿속으로 미희의 이미지를 붙잡으려 노력하면서 가까스로 오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소리쳤다.
“미희야! 사랑해! 내가 구해줄게!! 아아악!”

“아, 어떻게 됐어?!”
가감속이 멈추자 업자는 기장실에서 돌아온 고용인에게 물었다. 
“기장은 사살했고, 원래 기장실을 맡았던 인원 중 하나는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지금 회복 중입니다. 그리고 도탄 때문에 항법장치가 망가졌습니다.”
“항법장치가?”
“정확히는 인터페이스가 망가졌는데, 입출력이 불가능해져서 직접 내려가 입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중에 그거 다룰 수 있는 사람 없지...”
업자는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겼다. 객실 쪽에서 고통에 가득 찬 비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앞서 가감속 과정에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없었던 승객들이 내는 비명이었다.
“기장 미친놈이 자기만 살겠다고...”
객실을 감시하다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짐과 사람을 피해 직원 대기실로 대피해온 인원이 객실 내의 소란을 잠재우러 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괜찮으십니까?”
고용인 중 하나가 땅딸막한 남자의 머리에서 철철 흐르는 피를 닦아주며 물었다. 몸에 큰 충격을 받은 땅딸막한 남자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끙끙대며 고통에 겨운 신음만을 흘렸다. 업자는 그 꼴을 보며 빠르게 계산했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탈출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땅딸막한 남자는 당장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저 자가 여기서 횡사한다면 자금출자에 심대한 문제가 발생할 터였다. 
업자는 미희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의 난리로 의식이 돌아온 미희는 배를 손으로 감싸 안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유기된 아기처럼 불안한 눈을 굴릴 뿐이었다. 
‘이 년까지는 찍어야 해.’
업자는 결심했다.
“야, 빨리 촬영장비 세팅해. 한 번만 더 찍고 빠진다. 그리고 너는 VIP분을 일단 우리 우주선으로 모셔.”
“아니요, 아니요.”
땅딸막한 남자는 업자의 말을 듣고는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봐야 해요. 여기서 부족한 사랑을 충분히 보충하지 못한다면 나는 살아남더라도 마음 속의 공허함에 사로잡혀 결국 서서히 죽어갈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 작품도 보고 싶어요. 그런 다음 나를 병원에 데려다 주시오.”
업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피 흐르는 건 좀 괜찮으신가요?”
갑자기 대기실 안에 지독한 똥냄새가 퍼졌다. 
“아오, 이게 무슨 냄새야? 어디서 나는 거야?”
냄새가 워낙 지독했기 때문에 금방 제어말단실에 난 창 가까이 있던 고용인이 그 안에 들어가 냄새를 풍기고 있는 잔뜩 지쳐 탈진 직전인 남자를 발견했다.
“야, 너 누구야!?”
고용인이 기겁하며 민혁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모였다. 총구 끝에 달린 전등이 켜지고 민혁의 똥칠한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아, 당신은?”
땅딸막한 남자가 민혁을 알아보고는 반색했다. 똥을 뒤집어쓰기는 했으나 그 개성적인 이목구비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 그게 좋겠어!”
민혁을 보고 좋은 생각이 떠오른 땅딸막한 남자는 업자에게 다급하게 주문했다. 그는 지금 이 우연히 마련된 상황을 통해 자신에게 결핍된 종류의 사랑을 좀 더 화끈하게 보충할 수 있는, 보다 좋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민혁에게 감정이입을 하여 가족 간에 일어나는 사랑을 보다 친밀하고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졌던 것이다.
“저 남자로 찍어 줘요! 저 남자로 영상을 찍어서 개인소장하고 싶소! 값은 섭섭지 않게 치러주겠어요!”
“네?”
업자는 당황했다. 임산부라는 좋은 재료를 앞에 두고 남자나 찍고 있으라고?
“정말이십니까? 그래도 그보다는 여기 임신한 여자가 스스로 제왕절개를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업자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땅딸막한 남자는 완강했다.
“난 저 남자가 희생하는 것을 보고 싶어요. 객실에 가면 저 남자와 똑같이 생긴 늙은 남자가 있을 겁니다. 그 남자를 미끼로 사용해서 저 남자가 배를 갈라 자기 창자를 통째로 끄집어내는 걸 해주시오.”
“하지만 그런 건 이미...”
업자가 변명하려는 꼴을 본 땅딸막한 남자는 얼굴빛이 일순간에 변하더니 냉기서린 목소리로 업자에게 쏘아붙였다.
“이 사업이 누구 덕분에 굴러가는 건지 잊은 거야?! 당장 내가 기부해주지 않으면 묘약 대금 치르느라 여기 고용인들 임금도 못 줄 텐데? 그러면 자네가 여태 챙겨오던 돈만큼 계속 챙기는 건 꿈도 꿀 수 없게 되어버릴 텐데? 지금 이 업계에서 자네 입지를 누가 쌓아주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업자의 태세전환은 빨랐다.
“알겠습니다. 주문하신대로 신속하게 촬영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머리에 피 흐르는 건 괜찮으십니까? 침도 흘리시고 계시는데,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민혁의 아버지가 촬영장비가 다시금 세팅된 상태인 대기실로 끌려오자 고용인 중 하나가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좆나 닮았네, 출아법인줄.”
민혁은 그 말을 들으니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같이 일어난다고 했던가. 한 가지 좋은 일이 있다면 미희가 녀석들의 마수에서 풀려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업자는 결국 쓸모없어진 미희가 자꾸 눈에 들어와 아쉬운 마음을 콕콕 쑤시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에 미희를 아예 객실로 치워버렸다. 
곧 늘 하던 절차대로 마스크를 쓴 업자가 민혁의 곁에 앉아 민혁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들어 보이며 민혁의 가공된 인간상을 점진적으로 구축해갔다. 땅딸막한 남자는 침을 흘리면서 가끔씩 종이 위에 글을 쓴 프롬프터를 업자에게 보여주며 원하는 발언을 유도했다. 지금 남자의 기분은 최고였다. 서로 싸워 반복하던 부자가 극적으로 화해하고 희생이라는 가장 큰 사랑을 통해 다시 한 가족으로 봉합된다! 너무 감동적이고 좋아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특히 희생하는 쪽과 짧지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우연히 잡았던 것이 호재였다. 그리고 심지어 그가 자신과 유사하게 아버지와의 중대한 문제를 가진 처지였다는 정황을 알게 된 것은 너무 완벽해 우연이 아닌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서로 유사한 정서적 배경을 바탕에 둔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서로를 이해하는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끌리는 대목이었다. 감정이입이라는 섬세하고 미묘한 분야에서는, 확실히 정이 든 고기가 보다 더 좋은 맛을 내는 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객실에 함께 있던 목격자의 증언에 다르면 이민혁씨는 자기 아버지와 모종의 불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화해하고 아버지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만큼 감동적인 일이 과연 이 우주에 얼마나 있을까요?”
“아들아, 사랑한다!”
그때 민혁의 아버지가 돌발적으로 외쳤다. 업자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반면 민혁은 그 얘기를 듣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분노를 억눌러야했다. 평생 길바닥에 버린 쓰레기처럼 대하면서 한 번도 찾아오지도, 심지어 양육비를 보태주지도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사랑한다고? 어머니가 가끔씩 전해주던, 미화된 것이 틀림없을 일화 속에서조차도 민혁은 자기 아버지가 섹스와 쾌락에 미친 정신병자라는 암시를 읽어낼 수 있었다. 틀림없이 지금 촬영하고 있는 이런 종류의 포르노도 감상한 경험이 있는 게 틀림없을 것이라 민혁은 추정했다. 그러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만으로도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민혁에게 필사적으로 사랑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하는 것일 터였다. 

업자가 민혁의 좌우 윗목에 묘약의 주입기를 붙였다. 잠시 위 민혁은 자기 왼쪽 목에 주사바늘이 늘어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자각하자, 민혁은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민혁은 자기 아버지에게는 바닥에 떨어진 정액과 다를 바 없는 쾌락의 부산물로서,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와 재회했을 때 자신의 정조와 변함없는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로서 태어나 그런 의미만을 지닌 채로 살아왔다. 그 외에는 여태껏 먹고 살아가기에만 바빴기에,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한 마리의 보잘 것 없는 유기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새롭게 얻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남아 여기까지 와서는 이렇게 쓰레기 같은 인간의 삶과 쾌락을 위해 끝까지 이용되기만 할 뿐인, 그 정도의 의미만을 부여받은 채로 죽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민혁에게 무의미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약효가 돌았다. 민혁은 고용인에게 머리를 붙잡힌 채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봐야 했다. 업자는 아버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민혁을 협박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효도해야지?”
“아들아, 사랑한다. 도와다오!”
민혁은 절망으로 오열했다. 속상한 마음에 창자가 끊어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필사적으로 거부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지만 결국 민혁은 묘약이 유발한 뇌의 흥분을 아차 하는 사이에 정말 사랑으로 해석해버렸던 것이다. 일단 초석이 놓이자 농밀한 사랑은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불가항력적인 힘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은, 민혁이 평생 살아오면서 서서히 젖어왔던, 가족과 사랑에 대한 사회 근간의 고정관념을 양분으로 성장하는 변질적인, 그러나 맹목적이고 우주만큼 거대한 사랑이었다. 
“가족 간의 사랑이란 가장 숭고한 것이란다. 사랑하는 네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네 배를 가르고 창자를 전부 끄집어 내.”
고통, 공포, 분노, 사랑. 이 모든 감정들이 전기신호로 반짝이는 뇌 속에서 맹렬히 뒤섞여 폭발적인 감정의 분출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에 고삐를 걸어 끌고 가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민혁은 서서히 양손으로 상의를 들어 올리고 손톱을 세워 뱃가죽을 긁기 시작했다. 갑자기 미희가 보고 싶었다. 미희와 아버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섞여 역겨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 형상이 다시 떨어져 나왔을 때, 거기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와 미희의 고통에 겨운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면 미희와 어머니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민혁이 미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부터, 아니, 사실 그보다 이전에 어머니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바로 곁에서 목격했을 때부터 늘 마음속에 따라다니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왜, 왜, 그들은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그 인간을 사랑했던 것일까.’ 
사랑은 인간의 이성을 멀게 만드는 작용이 있었다. 사랑에 사로잡힌 그들의 감정은 조금도 합리적이지 않았다. 사랑은 그들을 인형처럼 조종했다. 민혁은 왜 지금 아버지를 사랑해야만 하는가? 묘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묘약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 인간에게 사랑을 야기한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렇다면 약의 작용도 없는 상태에서, 미희는 왜... 미희는 왜... 어머니는 왜...’ 

업자는 민혁이 끙끙거리기만 하고 반응이 없자 곁으로 다가가 툭툭 건드려 보았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민혁은 순식간에 스프링처럼 무시무시한 추력으로 자리에서 튀어 오르더니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눈을 찌르고 이빨로 얼굴을 파먹기 시작했다. 업자와 고용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돌발적인 상황에 당황한 채로 얼어붙었다. 촬영기사는 잠깐 불안한 눈을 들어 업자의 눈치를 살폈지만 업자가 자신처럼 혼란스러워 하는 꼴을 보고는 일단 민혁을 비추던 카메라의 방향을 돌려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을 찍기 시작했다. 
땅딸막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멈춰!”
그러나 그 외침은 민혁의 아버지가 지르는 끔찍한 비명과 그 광경 자체의 충격적인 인상에 묻혀 사라졌다. 
민혁은 방금 전, 인생 전체를 복기하는 고민 끝에 자기가 사로잡혀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근본에 숨어있던 이면의 진실에 가 닿을 수 있었다. 민혁이 자기 아버지를 단순히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적적으로 그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민혁에게는 자기 아버지를 사랑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전혀, 일절 없었다. 평생 제대로 만난 적도 없고 오로지 순수하게 미워하기만 했던 존재를 사랑한다는 상황이 민혁에게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던 감정에 대한 강력한 의혹을 야기했던 것이다. 
‘이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나는 평생 저 인간을 증오했는데 이제 와서 느닷없이 사랑한다고?’ 
민혁은 약의 효과가 없었던 때에 그러한 감정적 오인이 일시적으로 유발되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 자신의 의문과 연결시켰다.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어 인생 전체에 걸쳐 가랑비처럼 자신을 적셔 왔던 보편적인 정서, ‘이런 험한 우주에서는 가족밖에 없다는’ 관념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자기의 감정에 오인이 일어났던 몇 차례의 인상적인 경험을 말이다.  
그 점을 직시하자 뇌리를 치는 깨달음이 왔다. 곧 묘약을 투여 받은 이후 줄곧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서서히 희석되고 방향을 잃은 흥분으로만 이루어진 광막한 무의미함이 찾아왔다. 그 난폭한 흥분은 새롭게 뻗어나갈 곳을 찾고 있었다. 민혁은 당연히 그 흥분이 가야 할 합리적이고 타당한 길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 증오여야 마땅했다. 결국 이러한 감정은 해석의 문제였다. 공포, 사랑, 분노는 한 식구였다. 흔들다리 위에서 공포가 사랑으로 오인되는 것처럼, 증오하던 선생이 추억 속에 더욱 좋은 모습으로 남는 것처럼, 사랑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고 고고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특별한 취급을 받는 감정이 한 인간을 완전히 지배해 벼랑 끝으로 몰고 가더라도, 그것에게서 벗어날 길은 반드시 있었던 것이다.
민혁은 용기를 얻고자 미희의 모습을 떠올리며 공포를 사랑으로 전이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사랑이라 받아들이고 있는 감정을 최대한 분노로 전환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결사적으로 집중했다. 그리고 이제 민혁에 의해 열려진 새로운 문을 찾은 흥분은 감정으로 변모되어 민혁의 몸을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민혁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불가능했을 경이적인 힘으로 주먹을 여러 차례 내려쳐 안와 주위의 뼈를 부순 다음 눈구멍을 통해 손을 넣어 아버지의 뇌를 헤집어 놓았다. 이 사악한 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말살이라는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민혁은 아버지의 뇌를 주먹으로 저어 곤죽으로 만들고는 손을 뺐다. 그러다 손목에 접형골이 걸려 심하게 긁혔지만 이미 분노에 미쳐버린 민혁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민혁은 그 다음으로 아버지를 붙잡고 있던 고용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업자와 그 무리들은 본격적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민혁의 힘은 강대한 분노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증대되어 있었다. 고용인이 아무리 떼어놓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민혁의 이빨이 고용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고용인은 공포와 고통에 질려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총을 다루는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돈으로 좋은 무기를 사서 무장했을 뿐, 이렇게 직접적으로 공격받는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훈련된 인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난사된 총알들 중 벽에 단번에 꽂히지 않은 것들은 대기실 내에서 도탄을 일으켰다. 개중 하나가 땅딸막한 남자의 뇌를 뚫었고, 나머지 몇 개가 업자와 고용인들에게 각종 치명상을 입혔다. 민혁의 불알 하나도 그 와중에 깨졌지만 그 감각 정보는 뇌에서 차단되어 통증으로 해석되지 못했다. 조명장치가 총탄을 맞아 부서졌다. 내부의 가스를 이온화시켜 발광하는 원리였기 때문에 부서진 조명장치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대기실은 신음과 비명과 증오와 분노와 공포로 가득 찬 태고의 암흑으로 변화했다. 
대퇴동맥이 끊어진 업자는 관통총창에서 피를 홍수처럼 흘리며 벽에 바짝 기대어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몸을 숨기기 위해 조심하려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내 자기 눈앞의 어둠 속에서 잔뜩 열이 오른 민혁의 숨결이 느껴졌다. 업자가 무언가 반응을 취하기도 전에 민혁이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업자를 덮쳤다. 업자는 벽에 머리를 찧고는 바닥으로 엎어졌다. 민혁이 바닥에 대자로 누운 업자 위에 올라타 자신의 얼굴을 업자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서로 마주대한 얼굴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던지, 업자는 똥냄새를 뚫고 올라오는 민혁의 구취까지도 농밀하게 맡을 수 있었다. 코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생생하게 목도하는 데에서 연원하는 극한의 공포 속에 턱까지 잠긴 채로, 업자는 자신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민혁의 얼굴을 어둠 속에서도 인식할 수 있었다. 
‘이제 끝이다. 물어 뜯겨 죽는다!’
업자는 그 사실을 불가피하고 명백하게 자각한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크나큰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 때, 업자는 민혁이 업자 자신에게 들이대고 있던 얼굴을 살짝 뒤로 빼는 것 같다는 감각을 받았다. 혹시 자신을 살려주는 것일까?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반짝였다. 그러나 부질없이 안도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민혁은 그대로 업자의 눈을 입으로 덮쳤고, 그 몸뚱어리 위에 온갖 분노를 쏟아 놓았다. 
그 찰나, 혹여나 하며 삶으로의 귀환에 대한 기대를 품었던 그 짧은 순간, 업자는 자신을 살려줄지도 모를 것 같다고 생각하며 민혁에게 약간의 사랑을 느꼈던 것도 같았다. 

운항사에서 보낸 패트롤이 도착해 우주공간을 배회하던 연락선을 점거했다. 기장은 총에 맞아 사망한 상태였고, 그 대신 기장실을 엉뚱하게도 웬 비무장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승객들이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일반 승객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경찰들이 인적조회를 해보니 노조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전 직장에서 잘린 전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기실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빠르고 옳은 판단을 했다. 객실을 감시하던 고용인이 대기실에서 일어난 난리에 당황해 몸을 돌려 대기실로 통하는 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그들이 일시에 고용인을 덮쳐 총을 강탈하고 기절시켰던 것이다. 그 후 대기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잠잠해지자 그들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밝힘으로서 거기 펼쳐져 있던 생명 없는 고깃덩어리와 피의 향연을 목도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디가 찢겨져 있지 않은 채 몸뚱이가 온전히 유지된 사람도 단 한명이 없었다.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이 모두 죽어버려 남에게 분노를 내뱉을 수 없게 된 민혁은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아 그 대가를 물었던 것이다.
미희는 객석에 길게 누워 숨이 넘어갈 듯이 울어대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기!! 내 아기가!! 제발 도와주세요!”
의자와 바닥은 붉은 액체로 흥건했다. 그 양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이미 양막이 찢겨지고 자궁경부가 열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연락을 받아 정거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팀은 연락선이 도킹하자마자 미희를 인계받고 수혈처치를 하면서 병원으로 응급 이송했다. 의사는 연락선의 가감속에 의해 배에 지속적인 충격과 압박이 가해진 것이 일차적 유인이 되어 불가피유산이 유도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입원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미희는 소파술을 받은 후 곧바로 퇴원했다. 그러나 미희는 이제 더 이상 공포에 질리거나 울지 않았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도시는 갈색이었다. 아기를 뱃속에 담고 있을 때는 그토록 절박했으나 일단 사산을 하자 어쩐지 그때부터 죽은 아이에게 눈길이 가지 않았다. 도심은 소란스러웠다. 어쩌면 여기서 쓸 만한 일을 하나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희는 느닷없이 민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거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들은 바가 없었다. 그때 정거장에서 매몰차게 거절하기는 했으나 자기 좋다는 남자가 가끔씩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희는 고개를 하늘로 들어 돔 바깥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마 저 우주 어딘가에 있을 민혁이 자기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가기를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그 표정이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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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주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나름 이렇게 저렇게 해 보았는데,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ㅠㅠ

다들 구정 잘 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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