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가볍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광훈은 매끈한 금속성 벽으로 격리된 원통형 공간 가운데 쭈그려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잠시간 그렇게 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곡면을 이룬 벽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장기적으로 가해진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 때문에 눈이 번들거렸고 호흡은 가빴다. 
광훈은 벽면을 손톱으로 긁기도 해보고 주먹으로 두드려도 보았다. 표면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드려본 금속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서 광훈이 가한 힘의 단순한 반작용보다 더욱 큰 힘을 가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날 정도였다.
방 안엔 카메라도, 뭐도,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구토가 나올 정도로, 시편을 깨서 (깰 수가 있다면) AFM으로 찍어 봐도 소름끼칠 정도로 매끄러운 정경이 보일 것이 틀림없을 것 같은 금속원통이 광훈을 둘러싸고 있었고, 알 수 없는 광원으로부터 흘러나온 은은한 백색광이 원통 안을 가득 채웠다. 온도와 습도는 쾌적했다. 그것마저 정상이 아니었다면 아마 광훈은 살아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원통 벽에 머리를 찧어 이미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광훈은 무력한 느낌에 시달렸다.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려 뭐라도 해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런 노력이 좌절되는 시점부터 무력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사방은 견고했고, 광훈 자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첨단 기술로 단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또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스트레스가 광훈의 정신을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방 안의 불이 나름의 일주기성에 따라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한 회기 동안만 시도와 좌절이 수백 번을 오갔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을 가둔 누군가의 의지가 작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끔, 많은 경우 하루에 한 번씩 그들이 온다. 와서 광훈의 눈을 가린다. 물리적인 눈가리개를 쓰는 것은 아니다. 빛을 어둡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때가 되면 시야가 검게 변했다. 광훈이 일시적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면 방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누군가‘들’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들은 복수였다. 수차례 반복되어 온 경험을 통해 그들이 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곁에서 말없이, 혹은 광훈 자신의 감각이 닿을 수 없는 이격된 곳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식의, 무한대로 생각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외하면 그들은 둘이었다. 
그들이 들어오면, 일종의 탄력성 있는 구속구로 광훈을 묶어 어딘가로 데려갔다. 목적지는 항상 같았지만 광훈이 원통형 방을 나서는 문의 위치는 매번 달라졌다. 어쩌면 원통형 방이 조금씩 회전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잠시 걸어 도착하게 되는 곳은 네모난 방이었다. 네모나다는 것 외에는 앞서 있었던 원통형 방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 방에서 광훈은 눈을 뜰 수 있었다. 자신의 신체를 구속하던 무언가도 그와 함께 기능을 멈췄지만 광훈은 그 시점에서 방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게 무엇이었는지 볼 수 없었다.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두 사람도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광훈은 이 방에 오는 것을 끔찍스럽게 싫어했다. 왜냐하면 방 안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기운, 일종의 바람, 일종의 존재, 형언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것이었다. 그것들은 언제나 방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두 개였다. 그것들은 광훈을 이곳에 데려온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나 달랐다. 광훈은 그 중 하나를 검은 것, 나머지 하나를 붉은 것이라 지칭하며 구분했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색을 말하는 단어라기보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에 가까웠다. 
사실 그것들은 이름이 있는 것 같았다. 붉은 것은 ‘#$^&@’였고, 검은 것은 ‘!)(*#^$’였다. 광훈이 그것들과 어떤 식으로든 상호작용을 하면, 역시 어디가 원천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호작용이라고 해봤자 멀찍이서 행하는 시각적인 상호작용이 전부였다. 광훈은 그것들에게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특히 검은 것은 너무..
언제나 같은 방식이었다. 광훈이 붉은 것을 보면, 심지어 곁눈질로 나름대로 몰래몰래 봐도 그것을 어떻게 감지하는지 ‘#$^&@’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검은 것을 보면 ‘!)(*#^$’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광훈은 그 단어들을 귀와 뇌로 식별할 수는 있었다. 두 단어는 다르게 들렸으므로 소리를 통해 변별하는 것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재현할 수는 없었다. 입으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머릿속으로도 말이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낮선 소리의 조합이었다. 다만 그 뉘앙스, 소리의 느낌만이 청각을 통해 각인될 수 있을 뿐이었다. 
붉은 것은 기분이 나빴다. 그것을 보면 피투성이가 된 공간이 떠올랐다. 피와 육편이 사방에 찢겨져 있는 느낌. 오래보고 있으면 토악질이 나왔다. 그러나 보지 않을 수는 없었는데, 둘 중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채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머리를 쪼개는 것 같은 통증을 야기하는 끔찍한 소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붉은 것은 견딜 만은 했다. 하지만 검은 것은 얘기가 달랐다. 공포. 광훈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검은 것은 공포였다. 차갑고, 냉혹하고, 거의 우주만한 크기를 가진 압축된 공포. 인간의 인식범위를 넘어선 극한의 공포로 가득 찬 구덩이 바닥에서 긁어 온 정수와 같은 것이 거기 있었다. 진심으로 괴로웠다. 조금만 오래 보고 있어도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아득한 공포가 느껴졌다. 방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방구석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광훈은 이 끔찍스러운 시간이 어서 끝나도록 숨을 몰아쉬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이 알 수 없는 곳에 이유도 모른 채 갇혀서는 얼마나 오래 있었을까. 감옥의 벽면에 상처를 내서 날짜를 표시하는 방식은 사용할 수 없었다. 손톱으로 피부를 긁어서 기록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런 통증을 견뎌낼 만큼의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회의하는 동안 기회를 늘 놓쳤던 것이다.


그 날은 돌아가는 절차가 묘했다. 다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두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옮겨진 방에서 광훈은 어딘가에 눕혀졌다.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눈이 다시 보이게 되었을 때는 원래 있었던 원통형 방이었다. 그러나 방 안에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눈에 띄었다. 벽면의 한쪽에, 세워 놓은 탄환 모양의 틈새가 나 있었다. 그 바깥으로 길게 뻗은 금속제 통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광훈은 잽싸게 뛰어 그 틈으로 다가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통로는 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오른쪽, 왼쪽, 정면. 나가야 할까? 고민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때 왼쪽 통로 안쪽에서 직각으로 꺾이는 모퉁이 부분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광훈은 정면의 통로로 달려갔다. 오른쪽 통로로 가면 그 누군가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곧바로 눈에 띌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벽면은 금속처럼 보였으나 바닥은 탄성이 있는 완충제 같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덕분에 땀에 젖은 발바닥을 바닥에 붙였다 뗄 때마다 쩍쩍거리는 소리가 나서, 광훈은 발끝으로 학 흉내를 내며 계상보행으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통로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네 방향으로 나뉘었다. 순간 미로를 떠올린 강훈은 어차피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 오른손 방식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오른쪽 통로로 꺾어 오른 벽면을 따라갔다. 벽면은 창문도 없이 매끈했다. 그러나 앞서 자신이 탈출했던 방을 떠올려 보면 열리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사실은 수많은 문들로 가득 차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길은 매우 복잡했다. 표식이 하나도 없어서 모든 곳이 전부 똑같이 보였다. 여기서 사는 사람이라도 내비게이션이 없다면 길 찾는 데 큰 문제가 있을 것만 같은 구조였다. 놈들은 내가 탈출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문이 열려 있고 나는 없었을 테니까. 이미 탈출한 것,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뒤편에서 무언가 갉작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광훈은 벽에 바짝 붙어 바닥을 조심스럽게 기기 시작했다. 갉작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놈들이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소리는 아주 잠깐 낮아지기도 했으나 평균적으로는 가파르게 상승하는 음량을 보였다. 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광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탈출구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부여잡으려 오른쪽 벽만 짚으며 갔다. 간혹 나타났다 금방 끊기는 왼쪽 벽에 비해 오른쪽 벽은 한 번 방향을 잡으면 통상적으로 보다 길게 이어졌다. 광훈은 그 점에 위안과 확신을 얻었다. 
끔찍스러울 정도로 똑같이 보이는 길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변화가 눈에 띄었다. 위로 경사진 길이 나타났다. 광훈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 천착해서 이 거대한 구조물이 지하에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위로 경사진 길이란 출구에 보다 가까워지는 길일 공산이 컸다. 여기서 공급받았던 영양의 질은 좋았지만 딱히 운동할 기회는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근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이미 한참 뛰기까지 하느라 지쳐있었지만 광훈은 이 답답하고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교착상태에 물꼬를 틀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는 기대감에 힘을 내 경사를 올라갔다. 
경사가 끝나는 지점에서는 한 동안 곧게 뻗은 통로가 다시 이어지다가 왼쪽으로 꺾였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창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밖은 검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보다 가까워졌다. 하지만 광훈은 강화유리로 마감되어 있는 창문 앞에 달라붙어서 바깥의 정경을 살피느라 바빴다. 바깥은 어두웠다. 지하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은 지표였다. 사방은 얼어붙은 암석으로 가득했다. 멀찍이 하늘 위에 빛을 내는 둥그런 천체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낮은 고도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달이 떠 있었다. 아무리 과학적 상식이 부족하더라도 누구나 이상한 점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광경이었다. 지구상에서 이런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큰 달이라니. 이처럼 가까이서 보이는 우주의 모습이라니. 
광훈은 기운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당장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내심 의심해오던 추측이 이런 식으로 뒷받침을 받자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냉정히 판단해보자는 작심이 서기도 전에 머리가 너무나 복잡해져 버렸던 것이다.
광훈을 뒤따라오던 것들이 광훈 가까이 다가왔다. 광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것들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암녹색의 번들거리는 두상과 굵은 나무줄기와 같은 하반신의 무수한 촉수들로 구성된 4미터짜리 괴물 두 마리였다. 


하즈문그와 아구토차는 돈 많은 한량이었다. 둘은 소모적인 논쟁으로 자주 다퉜는데, 이 일이 시작된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중심이 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 생기계융합적인 방식으로 제4의 눈을 강제로 뜨게 했을 때, 새로 뜬 제4의 눈을 토대로 두 개의 다른 암흑체 ‘#$^&@’와 ‘!)(*#^$’를 그 즉시 구분할 수 있겠는지 여부였다. 암흑체는 암흑물질로 만들어진 물체였는데, 사실 인간이 통상 말하는 물체라기보다는 그보다 확장된 외연을 가진, 어떤 개념의 구현에 가까운 것이었다. 제4의 눈이 개안하지 않은 인간의 오감만으로는 그것들을 명확히 지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기계적인 방식으로 제4의 눈을 개안시키고 그간 오감으로만 감지했던 ‘#$^&@’와 ‘!)(*#^$’에 노출시킨다면, 그 사람은 제4의 눈만을 가지고 그 두 암흑체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하즈문그는 그럴 것이라고 추정했고, 아구토차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하즈문그가 먼저 긍정을 선택했기 때문에 열성을 다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들 종족은 인간에게 다소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호흡방식이 같아 대기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자력으로 제4의 눈을 개안하지 못한 제1종 원시종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에 대한 접촉이나 비공식적인 실험 행위는 엄중히 금지되어 있었다. 외계종족과의 접촉 자체가 그들 인류 대부분을 짧은 기간 내에 절멸시킬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사육을 위해 대기조성을 변형시킬 필요가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가끔 돈이 많거나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 외계인들은 법망을 피해 교묘히 인간을 납치해와 여러 방식으로 유희거리 삼기도 했다. 
하즈문그와 아구토차는 돈이 많아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연이 닿을 수 있는 사례였다. 그들은 이틀간 지속된 사고실험에 방점을 찍고 더 이상 질리기 전에 새로운 놀잇감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신속하게 인간 하나를 납치해왔다. 그리고 명왕성의 지표 아래 임시로 만들어 놓은 별장에 가두고는 일단 제4의 눈을 뜨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감만으로 ‘#$^&@’와 ‘!)(*#^$’를 주기적으로 접촉하게 해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수술을 통해 인간을 기계와 융합시킴으로써 강제적으로 제4의 눈을 뜨게 한 후 실험을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했어야지.”
기절한 광훈을 실은 자동로봇을 따라가며 하즈문그가 쏘아붙였다.
“실수할 수도 있지. 늘 하던 방식이 아니라서 잠깐 헷갈렸단 말이야.”
“난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실험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건 과학자들이 미리 해서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는 돈이나 대주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얘들로 실험 못하게 만들었잖아, 그 보호주의자라는 녀석들이.” 
“왜 이런 식으로 보호하고 보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와 동등한 지성체니까 존중해야 한다고? 그렇게 동등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으면 아예 우리가 아는 걸 전부 알려주고 나란히 세우던가..”
아구토차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인간들은 아직 우주의 근본원리를 잘 못 받아들인대. 줄이 닿는 데서 조금 주워들었는데....”
“그런데 수술기계 예열 버튼 눌러놨던가?”
하즈문그가 이렇게 얘기하고는 먼저 뛰어가기 시작했다. 

4
정신을 차린 광훈은 이마 부위에 느껴지는 강렬한 이질감 때문에 이마에 손부터 가져다 댔다. 미약하게 욱신거리는 둔통과 더불어 무언가 묵직한 것이 이마 내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손끝에 매끄럽고 단단한 유리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당황한 광훈은 양 손으로 이마를 더듬기 시작했다. 무언가 동그랗고 단단한 이물질이 머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광훈은 그것을 뽑아보려 했으나 머리 전체에 압박감이 있었다. 그 괴이한 물체가 머리 내부를 꽉 채우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광훈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동안 자리에 주저앉아 지칠 때까지 고함치고 울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잠시 뒤 광훈은 자신의 내면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되찾았다. 처음 갇혀 있었던 장소와 똑같은 곳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을 발로 차고 손으로 두드려도 자기 몸만 아플 뿐이었다. 다만 공간이 원통형이 아니라 반원형이라는 점에서 변별성이 있었다. 원통형 방의 가운데에 벽이 하나 가로질러 놓인 형상이었다. 
광훈은 그 벽을 바라보았다. 재질은 이곳에서 여태 봐 온 모든 벽면과 동일했으나 그것이 놓인 위치라는 측면에서는 색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훈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았다. 집에 가고 싶었다.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 싫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다. 광훈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손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양 손을 바닥에 떨구고는, 텅 빈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광훈의 눈앞에서 무언가가 조립되었다. 처음에는 극도로 투명한 작은 물방울들이 공중에 뜬 채로 모여 커다란 물방울을 구성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물방울들이 어느 정도 밀도를 가질 정도로 모이자 주위 대기와 명확한 경계로 구분되는 네모난 사각 판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완전히 만들어진 판은 말랑거리는 느낌이었다. 판의 가운데 글자가 떠올랐다. 믿기지 않게도 한국어였다. 내용은 이와 같았다.
‘이름을 불러준 물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시오. 잘 하면 상을 줍니다.’
광훈은 처음엔 그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의식이 지나치게 산란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 정신이 돌아오면서 문장이 표시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광훈은 그 판을 손으로 건드렸다. 판이 작은 물방울들로 부서지더니 아까보다 조금 위쪽에서 다시 형성되었다. 광훈은 위로 팔을 뻗어 다시 판을 건드렸다. 똑같은 방식으로 부서진 판이 더욱 더 위쪽에서 나타났다. 광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을 불러준 물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시오. 잘 하면 상을 줍니다.’
글자의 배경이 위성궤도에서 찍은 지구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의하시면 방의 가운데 벽 앞에 가서 서 주세요.’
광훈은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
광훈의 눈앞에 있는 벽이 가볍게 물결치더니 순식간에 투명해져 유리와 같이 되었다. 그 유리 건너편 방에 두 개의 물체가 있었다. 
“!)(*#^$”
그것은 검은..
광훈은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바닥에 넘어져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비로소 눈을 통해 ‘볼 수 있게 된’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 있었다. 공포로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아 금붕어처럼 뻐끔댈 뿐이었다. 가슴을 누군가 손으로 쥐는 것 같은 느낌이 격화되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살릴까?”
아구토차가 물었다. 하즈문그는 고개를 저었다. 
“벌써 제4의 눈으로 ‘#$^&@’랑 ‘!)(*#^$’을 봤어. 오염된 샘플이야.”
아구토차는 슬슬 귀찮아지는 상태였기 때문에 더 묻지 않았다. 
“그럼 내가 이겼네.”
로봇에게 실험체 처리를 명령하면서 하즈문그가 말했다. 아구토차가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냐면서 하즈문그를 쏘아보았다. 
“인간은 제4의 눈으로 ‘!)(*#^$’를 식별한 게 분명해. 왜냐면 오감만 있을 때 ‘!)(*#^$’에 대해 공포반응을 보였는데, 제4의 눈을 뜬 후에도 ‘!)(*#^$’를 보고 공포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야.”
아구토차는 그 말을 듣고는 촉수를 휘저어 강한 부정을 표시했다. 
“그건 아니지. 제4의 눈으로 ‘!)(*#^$’를 봤을 때의 감각이 오감만 있을 때의 감각에서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은 비약이야. 그냥 ‘!)(*#^$’ 자체가 인간에게 그런 종류의 공포반응을 일으키는 속성이 있었던 것뿐이겠지. 때문에 그냥 반사적으로 겁에 질려 심장 정지를 일으켰을 뿐 인간이 ‘!)(*#^$’를 ‘알아보고’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는 할 수 없어.”
하즈문그는 반박할 말을 찾아보려 했으나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는 찾지 못했다. 
“또 원점이네. 실험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니.”
하즈문그는 그냥 비긴 것으로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첫 번째 노출에서 보인 반응을 반영해서 실험을 일찌감치 다시 설계해야했어. 인간에게 보다 중립적인 감정반응을 야기할 수 있는 다른 암흑체를 대상으로 해서 실험을 재현해야 해.”
“그런데 이 우주에 그런 것이 있을까? ‘!)(*#^$’도 견디지 못했는데?”
하즈문그가 한 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구토차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뾰족한 답이 없었다. ‘!)(*#^$’는 무의미의 권화였다. 우주의 모든 일은 확률에 의해 일어날 뿐 그 이면에는 어떠한 의도나 의미도 없다는 근본원리의 개념이 물화된 것이 ‘!)(*#^$’였다. 
그런 만큼 ‘!)(*#^$’는 모든 암흑체의 기반이 되는 본질적인 물질이었으며, 한 종족이 제4의 눈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보다 확장된 우주에서 가장 풍부하고 그런 만큼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물질이었다. ‘#$^&@’는 ‘!)(*#^$’에서 파생된 2차 암흑체로서, 무의미한 우주에서 생명들 간에 벌어지는 온갖 광기어린 파국의 권화였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 실험 자체도 ‘#$^&@’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로봇이 광훈의 시체를 소각로로 가져가 던져 넣었다. 
“왜 보호주의자 녀석들이 인간들을 그렇게 애처럼 싸고도는지 알 것도 같아. 인간은 너무 연약해.”
하즈문그가 투덜거렸다. 아구토차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일전에 말하려다 말았던 것 같은데, 줄이 닿는 데서 조금 주워들은 바로는 인간들은 아직 우주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걸 잘 못 받아들인대. 아주 오래 전에 선별된 인간 몇 명을 초대해서 전부 알려준 적이 있기는 한가 봐. 그런데 대부분 우주의 의미를 부여하는 초월자에 대한 원시적인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는 거야.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내심으로는 이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 속에는 어떤 의미, 어떤 의도가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지. 그러니까 갑자기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내동댕이쳐져서 스스로 공허 속에서 근본적으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는 점에 절망해서 전부 자살을 했다는 거야. 무의미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니까 그 이상으로 의미를 생산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거지.”
“우리 종족도 예전에 확장 우주를 인식했을 때 그랬겠지? 우리는 어떻게 극복했더라? 학교에서 배웠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난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배웠지만, 글쎄...”
로봇이 광훈의 소각된 잔해를 우주공간에 배출했다. 아구토차와 하즈문그는 명왕성의 지표를 비추는 창문 앞에 서서 광훈의 잔해가 오르트 구름 너머로 흘러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구토차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난 미쳤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렇지 않으면 이런 데서 어떻게 견디겠어?”
“다음엔 뭐 하지? 또 인간을 가지고 뭐를 해볼까?”
하즈문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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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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