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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해변의 휴양지

2016.11.30 19:5911.30

해변의 휴양지

– 곽재식 –

양식은 작업계획서를 읽고 있었다. 서류에는 의뢰인의 스승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밤새 파도 소리가 들렸는데 아침 파도 소리에는 잠을 깬다”라고 말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런데 그 다음 설명에서 이것이 가상현실 속에서 의뢰인의 스승과 대화를 하는 것이라는 대목을 읽다가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거, 주식회사 염라대왕에 들어 가서 하는 일이에요?”

 “그랬던가?”

 미영이 대답했다. 양식은 다시 물었다.

 “무슨 또 모르는 척 하기입니까? 이거 주식회사 염라대왕 일인 거 처음부터 다 알고 하신 거 잖아요.”

 “그냥 전해 달라는 말만 전해 주면 되는 거 잖아. 뭐 어디에 가서 하는 일인지가 그렇게 중요해? 어제만 해도 간 만에 쉬워 보이는 일 얻었다고 이거 하자고 찬성했었잖아. 이제 와서 왜 그래요?”

 “그때는 이게 주식회사 염라대왕 서버로 들어 가는 일인 줄 모르고 그런 거죠.”

 “그런 거 따질 생각도 안 하고 바로 하자고 했을 정도면 그만큼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 아냐.”

 미영의 말에 양식은 머뭇거렸다. 미영은 양식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고 우주선의 속도를 높였다.

 양식이 미영에게 다시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사장님이 일부러 슬쩍 숨기신 거 잖아요. 주식회사 염라대왕 일이면 처음부터 그 말부터 시작하시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걔네들은 영업도 이상하고 보안도 까다로워서 잘못 걸리면 우리 소송 당하고 골치 아파진다니까요.”

 “벌써 하기로 한 일이야.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와서 어떻게 안 한다고 하나.”

 “사장님, 진짜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시면 안되나요?”

 “정 그러면 김양식 이사는 그냥 우주선 조종만 하고, 이번 일 할 때는 놀아. 쉬어. 자. 자고 있으면 내가 일 다 할게요.”

 “아니, 누가 일을 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이거는 우리가 사업 시작할 때 세운 목표랑 거리가 너무 먼 일 아닙니까?”

 “뭐 따지고 보면 별로 멀 것도 없지.”

 “어떻게 멀 것도 없는데요?”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따냈는지 한 번 들어봐.”

 미영은 그리고 나서 비서를 불렀다. 우주선 자료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비서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 일을 어떻게 하다가 따냈는지 김양식 이사한테 설명 좀 해주세요.”

 비서는 밝은 얼굴로 양식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양식의 얼굴은 전혀 밝지 않았으나, 비서는 개의치 않고 계속 밝은 얼굴이었다. 비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여기 회사에서 일 하기 전에 잠깐 주식회사 염라대왕에서 일할 뻔 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비서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런데 비서가 사연을 설명하는 중에 미영이 잠깐씩 끼어들어 비서에게 질문을 했다.

 “잠깐만 거기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줘요.”

 그리고 비서가 뭐라고 대답을 하면, 더 상세히 캐물었다. 예를 들면,

 “그래서 그 분 만난 카페의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뭐였는데요?”

 “그때 마신 음료가 그래서 딸기 우유예요, 초코 우유예요?”

 “초코 우유 함량이 몇 퍼센트였는지 기억나요?”

 등등을 계속해서 물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비서의 이야기는 점점 더 길어졌다. 마침내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다 들을 때 즈음이 되자, 아주 긴 시간이 흐르게 되었다. 그새 우주선은 이미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서버가 있는 시공장성에 도착해 있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양식이 외쳤다.

 “뭐 끝까지 들어도 별로 우리가 사업을 시작한 목표랑은 상관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 벌써 여기까지 다 도착했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 주식회사 염라대왕 서버에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다 좋은 경험이야. 그냥 이 일 하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이야기도 안 들을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미 들은 걸 어떻게 해. 뭐 그런거지. 일은 벌써 받아 왔고. 계약도 이미 해 버렸고. 계약금도 먼저 받았고. 돈은 우주선 수리하는데 진작에 다 써버렸고. 어느새 여기까지 왔는데. 뭘 어쩌겠어.”

 그렇게 해서, 미영과 양식은 이번 일을 하기 위해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사무실로 들어 가게 되었다.

 사무실은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건조물이라는 시공장성에 입주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꽤 공간을 넓게 쓰는 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있는 입구는 분주해 보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 넓은 공간의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이 회사의 장사 내용과 잘 닮아있는 분위기였다. 그 조용한 곳에서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쑥하게 단장한 안내 로봇들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미영과 양식은 광고를 보여 주고 있는 한 안내 로봇 앞에 멈추어 섰다. 말을 걸기 전까지는 계속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는 말, 이제는 그저 위로의 말 이상입니다.”

 로봇은 영상도 보여 주고 있었다. 영상 속에는 쇠약해 죽어 가지만 미소를 띄우고 있는 사람과 비슷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그 주변의 친지들이 나오고 있었다.

 “저희 주식회사 염라대왕에서는 신체의 쇠약으로 더 이상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실 수 없는 고객님들의 뇌를 분리해서 저희 회사의 영구 보존 탱크에 옮겨 드립니다. 주식 회사 염라대왕만의 탁월한 기술로, 영구 보존 탱크로 옮겨진 고객님의 뇌는 평소 고객님께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시는 행복한 시간을 가상현실로 영원히 즐기게 해 드립니다.”

 미영과 양식은 어느 순간에 로봇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로봇이 “저희 주식회사 염라대왕에서는 업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으로 83가지 종교에서 밝히고 있는 저승의 모습을 그대로 가상현실로 제공해 드리며, 그곳에서 언제까지나 지내실 수 있고...” 대목을 말하고 있을 때, 미영이 말을 끊었다.

 “저희가 지금 여기 뇌를 보관 중이신 분께 무슨 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요. 저희처럼 멀쩡하게 건강한 사람이 가상 현실 속에 들어갈 수도 있나요? 저희는 그렇게 해서 여기서 뇌만 남아서 가상현실 즐기고 계신 분이랑 잠깐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로봇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로봇의 웃음이었지만 양식은 최근 3년 간 본 어떤 사람이나 외계인의 웃음보다 진실해 보이는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이 업계 최고라는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기술력인가 싶었다.

 “아, 그러시면 저희 박생 서비스 상품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박생이요? 박생이 뭔가요?”

 “옛날 조선시대에 김시습이 지은 소설, ‘남염부주지’에 보면 박생이라는 사람이 산 채로 저승을 여행하고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따온 서비스 상품명으로, 건강하게 살아 계신 분이 일시적으로 저희 서비스에 접속해서 이미 저희 서비스를 이용하고 계신 육체적으로 사망하신 분과 만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두 사람은 로봇의 안내로 건강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접속실에 들어 갔다. 접속실에는 몸에 연결할 수 있는 여러 전선과 입체 안경, 근육 신호 감지 장치들이 결합되어 있는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 의자에는 이미 열 몇 명쯤 되는 사람들이 앉아서 가상현실에 접속해 있었다.

 “사람들이 많네요?”

 “예, 박생 서비스 상품 이용하시는 분 말고도, 곧 세상 뜨실 분들이 저희 서비스 이용하면 어떨까 싶어서 미리 한 번 체험 해 보시려고, 잠깐 미리보기 접속해 보시는 분도 계시거든요.”

 미영과 양식은 복잡한 안전 규정과 책임 규정, 그리고 보증금에 대한 규정을 들었다. 그리고 내라는 돈을 다 내고 서명하라는 서류에 다 서명했다.

 “여기 이 ‘시간 지연 승수’라는 건 뭔가요?”

 “가상현실 속 시간이 바깥 시간에 비해 얼마나 더 빨리 흐르느냐 늦게 흐르느냐 하는 것을 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1/10이면 무슨 뜻인가요?”

 “가상현실 속 시간이 10시간 흘러도 바깥 세상에서는 1시간 밖에 안 흐른다는 거죠.”

 “그런 게 되나요?”

 “어차피 가상현실이라는 게 뇌 속에 신경 간 신호를 어떻게 주는 지를 조종하는 건데, 뇌가 버틸 수 있는 한은 얼마든지 빨리 흘러가게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뇌가 쇠약해져서 뇌가 못 버티시는 분은 아주 천천히 시간을 흘러가게 해야 겨우 감당하실 수 있는 경우도 있고요.”

 로봇은 접속실 한쪽 벽면에 있는 유리 판 너머 높다란 기둥 같은 것을 가리켰다.

 “저기가 저희 보관 탱크인데, 보이시나요. 저기 저희 고객님 뇌들이 주욱 쌓여 있는 것?”

 “예.”

 미영이 대답했다. 양식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사람들의 뇌가 무슨 사과 궤짝처럼 가득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것들이 다들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니 쳐다보기가 싫었다.

 “저기 저 네 번째 줄에 있는 뇌가 우주선 사고로 부상 당하신 고객님 뇌인데요. 너무 사고가 커서 뇌가 거의 다 불타서 없어지시고 아주 조금만 남으셨어요.”

 아닌 게 아니라, 한 눈에 보이기에도 로봇이 가리키는 뇌는 복잡한 전자 장치에 한 줌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뇌 조직만 감싸져 있는 모양이었다. 로봇이 계속 설명했다.

 “저 고객님 같은 경우에는 뇌가 보통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의 백 분의 일, 이백 분의 일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저 고객님께서 버티실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가상현실을 보여 드리려고 하다 보니까, 저 고객님께서 경험하시고 계신 가상현실은 아주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물론 본인은 그렇다는 것을 전혀 못 느끼시지요. 저 분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행복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계셔서 지금 김수희의 ‘남행열차’를 부르고 계신데요. 노래를 처음 시작한 것이 여기 바깥 세상 시간으로 13개월 전인데, 13개월 동안 아직 ‘비 내리는 호남-’까지 밖에 못 부르셨다고 해요. 그래도 저 고객님 입장에서는 신나고 즐겁고 그러시겠죠.”

 양식이 로봇에게 물었다.

 “저희는 어떤 시간으로 접속하시면 되나요?”

 “일단 가상현실 속에서 다른 분 만나실 때는 그 분 시간이랑 동기화를 하셔야 할 테니까 그 때는 거기에 맞춰 시간이 흐를 거고요. 안 그러실 때는, 아무래도 넉넉하게 시간 쓰실 수 있는 게 좋으실 테니까 좀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해 드릴게요. 가상현실 속에서 1년이 흐른다고 해도 바깥 세상에서는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흐르는 비율이면 괜찮겠지요?”

 미영과 양식은 그리고 나서도 계속해서 가상현실 속 상황과 접속 후의 유의할 점에 대해서 들었다.

 “그런데 두 분 중에 어느 분께서 접속하시려고 하시나요?”

 로봇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둘은 동시에 자기라고 대답했다.

 “김 이사, 왜 그래요? 이번 일 하기 싫다면서? 그냥 우주선에서 쉬고 있으라니까. 내가 접속해서 일 하고 올게.”

 “아니오. 이거 재밌을 거 같아요. 진정으로 행복한 시간을 경험하게 해 준다고 하잖아요.”

 “이거 재미로 하는 게 아니야. 이번 손님이 보증금을 얼마나 많이 내줬는 줄 알아? 이번 건 잘못되면 우리 끝나. 이거 꼭 성공해야 한다고.”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라면서요? 제가 해도 쉽게 할 수 있을 거에요.”

 “아니, 어려운 일 아니라도 실수하면 안된다니까.”

 “일이 잘 되는 쪽으로 봐도 제가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아까 테스트 결과에서 제 뇌가 가상현실에 더 적합하다고 진단 결과가 나왔잖아요.”

 “김 이사, 좀 얍삽한데. 그렇게 ‘우리가 사업을 시작한 목적에 안 맞잖아요’하면서 반대해 놓고, 막상 가상현실이 재미날 거 같으니까 자기가 하겠다고 우기는 거야?”

 “방금 제 흉내 내신 거에요?”

 미영과 양식은 한 동안 서로 논쟁했다. 두 사람 다 주식회사 염라대왕이라는 회사를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업계 최고 회사가 제공한다는 “행복”이란 어느 정도인지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같이 갖고 있었다.

 결국 가상현실의 활동에 양식이 더 적합하다는 로봇의 진단에 따라 접속하는 사람은 양식으로 결정되었다.

 양식은 접속 기계에 누웠다. 양식이 헬멧을 쓰고 전선을 연결하기 전에 미영이 당부했다.

 “진짜 간단한 일이야. 우리 손님의 스승이라는 사람을 찾아서 ‘밤새 파도 소리가 들렸는데 아침 파도 소리에는 잠을 깬다’라고만 말해 주면 돼. 그리고 접속 종료하면 되는 거야.”

 “예, 알아요. 작업계획서에도 나와 있던 거잖아요.”

 “접속 종료할 때는 어떻게 하는 줄 기억하고 있지?”

 “알지요. 알지요. 하늘 올려다 보면서 패스워드 말하고 접속 종료하고 소리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패스워드 안 까먹을 자신 있어?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내가 접속하는 걸로 바꿀까?”

 “아닙니다. 제가 잘 하겠습니다.”

 미영은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했지만, 양식은 한 마디라도 더 듣지 않기 위해 재빨리 가상현실 접속 기계를 가동시켰다.

 양식이 가상현실 속에서 눈을 떠보니, 양식은 소파 위에 앉아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모습이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상현실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곳에서 자고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양식의 숙소는 약간 널찍해 보이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처음에는 “이 정도가 행복이란 말인가?” 싶었지만 볼수록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잡동사니들은 눈에 뜨이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창 바깥에 펼쳐지는 경치는 속이 후련해 전망이 좋았다.햇빛도 알맞게 집 안을 비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앞뒤를 돌아보고 일어섰다가 앉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손으로 물건의 감촉을 느껴 보았다. 모든 것이 정교했다. 실제 세계에서 느끼는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와 가상현실이 어떤 차이가 날까 싶어 괜히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보니 그것 때문에 착각이 약간 일어날 정도였다. 실제와 다른 느낌은 몸에 걸리는 몸의 무게 느낌이 약하다는 것 정도 아닌가 싶었다.

 몸을 움직이며 집 안을 돌아 다니기 시작하자 양식은 뭐가 더 좋은지 하나 더 깨달을 수 있었다. 몸이 상쾌했다. 잠이 부족한 느낌, 졸린 느낌이 전혀 없었다. 몸이 찌뿌둥한 기색이나 피로감 없이 그저 상쾌했다. 머리가 띵하거나 멍한 느낌이 없이 정신이 말끔한 기분이었다. 양식은 이런 기분을 최근에 느껴본 것이 언제인지 돌이켜 보았다. 지난 번 휴가? 아니지 그 때는 어깨가 걸려서 온몸 관절이 뻐근한 느낌이었고. 대학 시절? 술 취해서 머리 아팠던 기억이 먼저 앞서고. 초등학교 때나, 유치원 때에는 이렇게 상쾌한 적이 있었나? 양식은 사람이 태어나서 살면서 이렇게 온몸이 가뿐하고 상쾌한 것이 과연 가능하긴 했던가 싶을 정도였다.

 눈에 뜨인 일정 관리 컴퓨터를 켜서 오늘 할 일을 살펴보았다. 직장과 해야 할 일이 나와 있었다. 재산이 넉넉해서 딱히 직업이 없어도 먹고 살 걱정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았지만 직장이 있었고 출근은 해야 했다. 그렇지만 호기심과 긴장감이 있어서 적어도 지금은 출근하기 귀찮다는 생각은 없었다.

 양식은 일터로 나섰다. 가상현실 속에서 양식이 살고 있는 행성은 원래 양식의 고향 도시였다. 정확히 똑같지는 않았다. 더 깨끗하고 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미남 미녀 밖에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양식에게 어떤 식으로든 불쾌함을 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것은 실제 고향 행성과 선명하게 다른 점이었다. 기온은 조금 쌀쌀했지만 그 덕택에 껴입은 양식의 옷이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일터에 도착한 양식은 컴퓨터의 안내를 받아 자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있는 컴퓨터가 켜졌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나왔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로 해야 하는 일이고, 어떤 결과를 달성해야 하는 일인지 살펴보며 양식은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내용을 볼수록은 양식은 점차 감탄했다. 그리고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우리가 사업을 시작했던 목표랑 완전히 딱 들어맞잖아.”

 양식은 이제 이 행복한 가상현실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하루 일 하는 동안 별다른 큰 사건은 없었다. 엄청난 기술을 개발해 낸다거나 대단한 계약을 따낸다거나 한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생 어느 때보다 보람차게 일을 했다는 느낌은 가슴 속에 충만했다.

 직장 일을 마칠 때 즈음이 되어 양식은 연락 메시지를 받았다. 컴퓨터는 양식의 애인에게 온 메시지라고 표시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가상현실 바깥 실제 세상에서도 알았던 목소리였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생각해내기는 어려웠다.

 “저녁에 맨날 만나던 거기서 또 보자.”

 양식은 누구였는지 생각날 듯 말 듯한 느낌 때문에 계속 추측하고 궁리했다. 약속 장소로 나가면서, 양식은 몇 가지 후보를 머릿속에 떠올렸고, 정말 맞는지 아닌지 알쏭달쏭해 하면서 그만큼 더 설레고 즐거워했다.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15초 늦었네.”

 양식이 자신의 가상현실 속 애인이 누구인 줄 알게 된 것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린 때였다. 그 얼굴을 보고 양식은 깜짝 놀랐다. 가상현실 바깥에서는 양식이 한 번도 연애라든가 사랑과 견주어 떠올려 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황당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것만은 가상현실 컴퓨터가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실수를 하고 있네, 하고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날 저녁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안 양식은 그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가상현실 바깥 속의 실제와 달리 가상현실 속에서 양식의 애인은 신경 기술자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성격이나 신경 특성 때문에 생긴 감정, 판단의 변화 같은 소재로 늘어놓는 화제 중에 재미난 것은 대단히 많았다. 꼭 그 대화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양식은 그 대화에 빠져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지어낸 가상현실인 줄 뻔히 알고 있고, 눈 앞에 보이는 양식의 애인은 실제 사람이 아닌 쭉정이 같은 환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양식은 뭔가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어떤 것이 마음 속에서 불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중요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양식은 생각해 보았다. 영화 속 등장인물에 반하게 되고, 감동적인 소설 속 등장 인물을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이 사람의 감성이라면, 이런 교묘한 환상에 사랑과 같이 사로 잡히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것 아닌가 싶었다.

 가상현실 속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양식은 이튿날부터, 의뢰인의 스승이라는 사람을 찾는데 조금씩 시간을 썼다. 애초에 이 가상현실 속에 들어온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그렇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가상현실 속에서 보내는 하루는 바깥 세상, 현실의 영점 몇 초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넉넉히 이 즐겁고 보람찬 세월을 즐기면서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양식은 가상현실 속의 사람들과 일, 도시와 자연에 점점 더 익숙해졌고, 그러면서 더 그 모든 것들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한편으로 의뢰인의 스승을 찾는 일도 같이 잘 진행되었다. 양식이 “가상현실 바깥에 나가서도 아침 운동 하는 습관은 계속 유지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무렵, 의뢰인 스승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구해낼 수 있었다.

 양식은 하루 휴가를 내고, 의뢰인의 스승을 찾아가기로 했다. 의뢰인의 스승은 해변에 세워진 도시에 있다고 했다. 스승이라는 사람이 있는 위치는 숫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양식은 숫자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비교해 가며 찾아다니고 걸어야 했다. 그 길은 해변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햇빛 아래 바다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양식은 그 길을 몇 분 간 걸었다.

 양식이 도착한 곳은 바닷가에 자리잡은 호텔이었다. 널찍한 수영장과 잘 꾸며진 식당이 딸린 큰 호텔이지만 높이는 높지 않아서 어떻게 보면 아담하고 아늑하게 보이기도 하는 건물이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양식의 의뢰인이 있는 곳이 호텔의 식당이라고 표시되었다. 양식은 로비를 지나 식당으로 걸었다. 휴양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서로 소근거리며 대화하는 목소리가 주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양식은 식당에 가서 청새치 요리를 하나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한낮 시간에 맞게 경쾌하게 차려입은 다른 손님들 너머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고, 커다란 파도가 아주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 유리창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일 뿐이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 없이 눈앞에 가득 펼쳐진 수평선과 파도가 계속 천천히 천천히 몰아치는 것만 보였다.

 “주방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양식은 전채를 갖고 나온 종업원에게 말했다. 의뢰인의 스승은 이 식당의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양식의 추측이었다. 종업원은 약간 당황했고, 알아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양식은 바쁠 것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테니 얼마든지 알아보고 와 달라고 말했다.

 양식은 다시 창 바깥 바다를 바라보았다. 추운 계절이었지만, 바다만 보고 있으니 한여름 휴가철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곧 다시 종업원이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어렵고, 입구에서 서서 보실 수는 있으시다고 하네요. 혹시 뵙고 싶은 분이 계신가요? 그러면 저희가 입구에서 불러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의 의견에 양식은 찬성했다. 양식은 종업원을 따라 주방으로 걸어갔고, 의뢰인의 스승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주방 입구 쪽에서 일하고 있던 견습 조리사 보조 한 사람이 양식에게 대답하더니 주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갖 음식 냄새가 섞인 냄새와 갖가지 조리 방식에서 나오는 소리가 섞인 소리가 뒤섞여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런대로 다 향긋하고 다 신났다.

 견습 조리사 보조가 다시 양식에게 왔다. 의뢰인의 스승과 같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어떡하죠? 말씀하신 직원분이 마침 오늘 휴가였다고 하시네요. 내일 다시 오시면 분명히 계실 것 같은데요.”

 양식은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움은 곧 사라졌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 바닷가에서 하루 구경하고 쉬다가 돌아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이건 언제건 다시 오면 될 터였다. 그래 봤자, 바깥의 진짜 세상에서는 1초 더 시간이 걸릴까 말까 아닌가.

 그날 양식은 기뻐하며 하루를 쉬며 보냈다. 하지만, 의뢰인의 스승이라는 요리사를 만나는 것은 자꾸 미뤄졌다.

 양식은 그 후로도 그 식당의 주방을 여러 번 반복해서 찾아갔지만, 의뢰인의 스승을 만나는 것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처음처럼 의뢰인의 스승이 휴가를 냈다고 하는 날이 있었는가 하면, 잠깐 엇갈려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식당 자체가 통째로 보수 공사를 한다고 출입할 수 없던 날도 있었고, 무슨 보안 점검을 한다고 주방의 출입을 막을 때도 있었다. 모든 것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날에는 갑자기 엄청나게 매혹적인 공연이 벌어져 그걸 구경하느라 양식이 시간을 허비해 버리기도 했다.

 의뢰인의 스승을 만나는 것이 실패한 갖가지 우스꽝스러운 이유를 기록해 놓은 수첩 속 목록이 그 자체만으로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길어져 갔다. 그 즈음 되자 양식은 이것이 누군가 일부러 의뢰인의 스승을 만나지 못하도록 가상현실을 조작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양식은 호텔의 “컨시어지”라고 적혀 있는 곳에 가서 그곳의 안내 직원을 찾았다. 양식의 기분과 달리 그 직원의 얼굴은 그저 모든 것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야 마땅할 모습이었다. 양식은 직원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 요리사 선생님을 못 만나는 겁니까? 진짜 이유가 뭔지 알고 싶은데요.”

 안내 직원은 양식의 이름과 신원을 묻고 몇 가지를 컴퓨터에서 조회해 보았다. 직원은 큰 눈웃음을 지었는데, 그 눈웃음은 친근한 웃음이었지만 난처하다는 말과 죄송하다는 말도 같이 들어 있었다. 곧 직원이 대답했다.

 “이 분은 완전 몰입을 택하셔서요, 외부 접속 사용자나 불완전 몰입 사용자와 접촉하는 게 차단 되어 있네요.”

 “완전 몰입이라는 게 뭔데요?”

 “고객님께서는 지금 이게 가상현실이라는 걸 알고 즐기고 계시잖아요? 저도 제가 실제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걸 아는 채로 고객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거고요. 그런데, 완전 몰입 옵션을 선택하시면 이게 가상현실이라는 기억 자체를 지워 드려요. 그러면, 이게 가상현실이 아니라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정말로 보람차고 행복한 삶이라는 느낌을 느끼면서 살게 되시는 거죠.”

 “그게 가능해요?”

 “뇌에 접속된 전극으로 강충격을 가해서 기억을 지우는 방식을 사용하는데요. 기억이 아주 100% 완전히 삭제되는 것은 아니고 약간 남아 있기는 한데, 그래도 선명하게 떠올릴 정도는 안되니까 가상현실이라는 느낌, 자각은 거의 사라지죠. 그러면 이걸 진짜 인생이라고 생각하시면 정말 즐겁게 사실 수 있어요.”

 “그렇게 하시는 분이 많으신 가요?”

 “아주 많지는 않은데 꽤 있죠. 어차피 육체는 사망해서 잃어버리신 고객님들 중에는 저희 주식회사 염라대왕 보관 탱크에 뇌만 보존된 채로 영영 여기서 머무셔야 하는데, 그럴 거면 그렇게 몸을 잃어버렸고 모든 게 꾸며낸 가상현실일 뿐이라는 사실이 우울할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몸이 없고 탱크에 뇌만 갇혀 있고 이것은 전부 다 가상현실이라는 거 자체도 다 잊고 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아마 그 의뢰인의 스승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양식은 이 가상현실의 저승에 접속한 후로 처음으로 겁을 먹고 걱정하고 당황하고 좌절했다.

 이번 일을 해내지 못하면 미영과 함께 시작한 사업이 위험해진다. 애초에 미영이 하기로 한 일이었는데 괜히 자기가 고집을 부려서 접속했으니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았다. 접속하는데 비용과 절차가 필요하니, 지금 접속을 끊고 깨어나면 다음번 접속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 의뢰인의 스승이라는 요리사를 만나야 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완전 몰입을 선택하신 분은 절대 제가 만날 수가 없나요?”

 “저희도 정말 죄송한데요. 못 만납니다.”

 다시 직원은 그 눈웃음을 웃었다.

 “절대 아무 방법도 없나요?”

 “혹시 고객님께서도 같이 완전 몰입을 선택하시면 가능은 하죠. 그러면 고객님께서도 이게 가상현실이라는 기억 자체를 잊고 이게 다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실 거고요. 그러면 아마 영원히 깨어나실 생각 자체를 못하실 거니까. 그건 좀 아니겠죠.”

 양식은 마지막 설명을 듣고 다시 더 좌절했다. 그런데 직원의 눈웃음을 보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점차 생각이 엉뚱하게 흘러 가기 시작했다.

 “만약에 저도 완전 몰입 옵션을 선택해서, 이게 가상현실이라는 것 자체도 다 잊기로 결심하면,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기는 있나요?”

 “고객님께서도 보증금을 다 내셨으니까 하실려면 하실 수는 있죠. 그렇지만 그렇게는 저희가 권해 드리지는 않습니다. 일단 그렇게 하시면 바깥 세상과 완전히 연락을 끊고 가상 현실 속에서만 살기로 결정하시는 거니까요. 그 전에 고객님 가족분이나 친지분하고 의논도 하시고, 좀 천천히 고민도 해 보신 다음에 그러고 나서 정확하게 결심을 하시면 그때 정식으로 저희 주식회사 염라대왕을 다시 찾아 주시는 게 좋죠.”

 직원의 말대로 양식은 고민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가족이나 친지와 의논을 할 수도 없었다. 가상현실 속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잠을 자고, 꿈을 꾸면서 양식은 혼자서 고민을 계속해 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양식이 결정한 것은 결국 완전 몰입 옵션을 선택해서 의뢰인의 스승을 만난다는 결정이었다. 가상현실이라는 기억과 자각을 지운다고는 했지만 완벽하게 100% 지우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거를 기억할만한 단서와 메모 같은 것을 남겨둔다면 그것을 근거로 기억을 다시 되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그때 이게 가상현실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내고 깨어나기로 결심해 접속을 종료하면 된다, 그게 양식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만약 지금 내가 경험하는 세상이 다 가상현실일 뿐이라는 메모를 직접 남겨 두는 것이나, 그런 내용을 녹음해 두는 것은 주식회사 염라대왕 서버의 보안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걸러낼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가상현실일 뿐이라는 단서를 남겨 두기는 남겨 두되, 서버의 보안 프로그램이 삭제하지는 않을 만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1주일이 더 지나고, 양식은 그 방법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호텔에 다시 찾아가, 자신도 완전 몰입 옵션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한편 그 동안 바깥 세상, 현실 세계의 미영은 시간이 흐를수록 양식이 뭘 하는지 궁금해졌다. 의뢰인의 스승을 찾아내는데 시간이 걸리기는 할 테지만 가상현실 속 시간으로 1주일에서 한 달 정도면 넉넉할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바깥의 현실 세계 시간으로는 몇 분 정도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양식은 가상현실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무슨 문제가 생겼나. 너무 힘들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지.”

 미영은 그러면 회사 사정이 너무 어려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양식의 사정을 알 수 없으니 회사 자금 사정 걱정보다도 더 답답한 기분이었다.

 양식이 가상현실에 접속한 지 1시간이 지났을 때, 미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위의 관리 로봇에게 물었다.

 “아무 이상 없는 거예요? 왜 아직까지도 가상현실 속에 있으면서 아무 소식이 없을까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고객님. 확인해 보겠습니다.”

 로봇은 서버에 연결해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곧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방금 김양식 고객님께서 저희 완전 몰입 옵션을 선택하시고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영구 고객이 되기를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로봇은 완전 몰입 옵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택하면 자신이 가상현실에 접속한 상태라는 사실 자체를 잊게 되기 때문에 깨어나는 것이 불가능하고 영영 가상현실 속에서 그걸 진짜라고 믿고 살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왜요? 왜 그런 건데요?”

 “정확한 것은 저희 고객 개인 정보 보호 규정 때문에 알려드릴 수가 없고요. 보통 체험 서비스 경험하시면서, 너무 만족스러워서 그냥 이대로 안에 머물고 나가기가 싫다고 생각하시면 이렇게 바로 눌러 앉으시는 경우가 가끔 있으시거든요.”

 “그게 돼요? 무슨 돈으로요?”

 “보증금 내신 게 있으니까, 거기서 처리될 겁니다.”

 “보증금 낸 거 떼먹고, 저 혼자 가상현실 파라다이스에 틀어 박혀서 영영 잠자는 거라고요? 이거 먹튀 아니야? 먹튀!”

 미영은 흥분했다.

 “당장 다 때려치우고 이 사람 깨워요.”

 “고객님, 그건 안되겠는데요. 저희 약관 상 한번 합법적으로 완전 몰입 옵션을 선택하신 분을 그분 의사에 반해서 깨울 수는 없습니다.”

 “의사에 반하기는. 내가 김양식이한테 욕을 한바탕 해주면,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잘못했다고 스스로 깨어날 텐데. 그러면 제가 얘한테 말하게 해주세요.”

 “그것도 약관 상 어렵습니다. 완전 몰입 옵션이기 때문에 이게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하면 안되거든요. 그래서 가상현실 외부 분이 접속해서 말을 거신다든가 메시지를 보내신다든가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러면 어떡해요.”

 미영의 생각은 혼란스러워졌다. 정말로 양식이 미영을 배신한 것인가? 그러면 날린 보증금과 계약금은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 회사가 망했는데 그러면 빚은 어떻게 될 것인가? 김양식은 저기서 영원히 달콤한 꿈이나 꾸도록 남겨두면 되는가?

 미영은 양식에게 연락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렇지만 양식에 대한 걱정과 의문, 배신감과 원망, 혼란스러운 머릿속 때문에 더 이상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렇게 1초, 2초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도 가상현실 속의 양식은 하루, 이틀, 사흘씩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만 들어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미영은 통신기로 우주선에 머물고 있는 비서와 경리부장을 불렀다.

 “얘네들, 주식회사 염라대왕 이 사람들한테 항의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해야 되나? 게시판에 글 올려서 욕하는 거 퍼뜨려 달라고 할까.”

 경리 부장은 그러다가 오히려 역으로 고소나 먹을 거라고 말하며 미영을 달랬다. 비서는 도대체왜 그러는지 물었다. 미영은 최대한 빠르게 양식이 가상현실 속으로 빠져 버렸다는 상황을 설명했다. 경리 부장은 “큰일났네”라고 혼잣말처럼 한 마디를 했다.

 미영이 물었다.

 “어떻게 하지? 그냥 여기 드러누울까. 드러누워서 막 버둥버둥하면서 소리 지를까?”

 “거기 근무하는 게 다 로봇이잖아요. 별로 안 놀라고 그냥 붙들고 끌어낼 것 같은데요.”

 “그러면 어떡하냐고. 김 이사가 저승으로 도망간 거나 다름없잖아. 돈은 돈대로 다 날리고.”

 “일단 어떻게 하든지 김양식 이사님이랑 연락을 하는 게 중요한 거 같은데요.”

 “보안 규정 상 막혀 있어서 그게 안된대잖아.”

 미영은 침울해졌다. 회사가 망하는 장면에 대한 상상이 온몸을 휘감는 듯 했다. 경리 부장은 다른 회사에 보낸 이력서에 회신이 왔는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비서가 말했다.

 “어떻게 보안을 우회하거나 뚫을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사장님 그런 거 잘하시잖아요. 해킹, 같은 거.”

 “내가 하는 건 해킹이 아니라 편법이라니까요. 편법. 불법이 아니라.”

 미영은 습관대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듣고보니 시도해 볼만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한번 해보자고. 주식회사 염라대왕에서 쓰고 있는 소프트웨어 목록을 주욱 보낼테니까, 그 소프트웨어 중에 보안 취약점 알려진 것 있는지 검색해서 먹힐만한 걸로 모아서 좀 보내줘 봐요.”

 미영은 접속장치에 누워 있는 양식 곁에서 컴퓨터를 조작했다. 비서와 경리부장이 자료를 보내주면 그걸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힌트로 혹시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보안 프로그램을 넘어설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는 동안, 가상현실 속의 양식은 만사 아무것도 모른 채 태평하게 즐거운 삶을 살고 있었다. 양식은 보람찬 직장을 다녔고, 땀 흘려 일했으며, 휴일이 되면 즐겁게 놀았다. 이곳이 가상현실인지, 왜 가상현실에 접속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았다.

 그러면서 양식은 가끔 그 바닷가의 호텔을 찾았고, 더 가끔씩은 만나고자 했던 의뢰인의 스승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상현실 접속에 대한 기억을 삭제당한 양식은 정작 의뢰인의 스승을 만났지만 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용건이 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 사람을 알아보지조차 못했다. 그저 어렴풋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인데’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양식은 가상현실 속에서 더 성장했고 더 성숙했다. 양식의 직장은 더 발전했고, 양식의 경력도 더 두터워졌다. 그러다 그곳에서 사랑한다고 생각한 연인과 결국 결혼했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식의 자식은 자라났고, 걸음을 걷고 말을 하며 숫자를 배우고 말썽을 부리고 놀게 되었다. 몇 가지 어려운 일도 있고, 몇 가지 화나는 일, 슬픈 일도 있었다.

 하지만 죽을 만한 사고도 없었고 미쳐 버릴 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그래서 양식은 그 모든 것에 그럭저럭 적응했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런데 이 모든 시간을 살아 가는 동안 양식은 남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한 것 한가지를 마음에 품고 살게 되었다. 그것은 양식의 마음에 이상하게 남아있는 소설 한 편이었다. 양식이 우연히 읽은 소설은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자기가 가상현실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패스워드를 말하면 그때 가상현실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별 것 아닌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양식이 읽은 내용이었는데, 그 내용은 어쩐지 잊을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어쩐지 익숙한 내용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이야말로, 바로 양식이 힌트로 남겨 놓은 소설이었다. 양식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깨달을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암시해 놓은 양식이 직접 써둔 이야기였다. 지어낸 가상의 소설 형태로 그런 정도의 내용을 만들어 둔다면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프로그램이 삭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써둔 것이었다.

 완전 몰입 옵션의 규정에 걸리지 않기 위해 소설의 등장인물이 그대로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양식이 그 소설을 보고 과거를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테니까. 그래서 다른 등장인물의 이름도 달랐고 구체적인 정황도 달랐고 패스워드마저도 달랐다. 하지만 소설의 소재는 양식이 가상현실에 빠져 있고, 이제 깨어나야 한다는 내용 그대로였다. 그런 식으로 양식은 몇 가지 중요한 소재를 빠뜨리지 않고 집어넣어서, 비록 완전 몰입 옵션으로 기억을 삭제당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을 읽게 되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신비롭고 오묘하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도록 써두었다.

 가끔 양식의 아내가 그런 글에 너무 빠져들지 말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 이상하고 신기해 보이는 글에 너무 빠지는 것도 안 좋아. 왜, ‘한중록’에 보면 혜경궁 홍씨가 그러잖아. 사도세자가 무슨 신비, 도술 이런 거 나오는 책 읽더니 사람 점점 이상해져서 확 돌아 버린 것 같다고. 그 책이 원수라고. 사도세자가 정신 나가서 행패 부리다가 결국 임금님 눈 밖에 완전히 난 거 아냐. 너도 너무 그런데 몰입하면 정신 건강에 좋을리는 없을 거라고.”

 “괜찮아. 괜찮아. 내가 무슨 왕자님인가. 아니잖아.”

 양식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가상현실 속의 시간을 사는 중에 가끔씩 이상한 멍한 느낌, 알 수 없는 쓸쓸한 느낌이 밀려오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 왜 그런 이상한 어두운 기분이 드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다. 그런 감상은 그 식당의 전망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가장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에 오히려 더 커졌다.

 진실을 알고 있었던 과거의 자신이 자신에게 남긴 소설의 의미를 양식이 정확하게 깨달았다면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식은 대신에, 텔레비전과 잡다한 다른 책에서 본 어느 학자의 엉뚱한 말을 대신 대답으로 주워들었다. 그 멍하고 이상한 느낌은 바로 현대인이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공허감이고, 현대 후기 산업 사회의 인간 소외 현상의 결과라는 것이다. 양식은 공허감과 인간 소외가 맞으려니 하고, 계속해서 가상현실 속의 삶을 살아나갔다.

 그런 중에도 양식은 언뜻언뜻 다시 소설을 떠올렸다. 양식은 자신이 과거에 남겨 두었던 그 힌트가 되는 소설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거기에는 결말까지 나와 있었다. 결말은 가상현실 속에서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을 깨닫고 이제 그곳을 빠져 나간다는 것이었다. 양식은 가끔씩은 남들이 떠드는 현대 후기 산업 사회니 뭐니는 다 쓸데없는 소리고, 정말로 거기에 무슨 대답이 숨겨져 있고 조금만 어떻게 하면 그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슬아슬하고 답답한 느낌이 치밀었다.

 그러다가 양식은 가족과 함께 바닷가의 호텔로 휴가를 왔다. 아내는 바다로 수영을 하러 나갔고, 자식들은 모래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내는 일광욕을 하며 읽을 소설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양식은 그러겠다고 하고 혼자 호텔 방으로 올라 갔다. 아내는 양식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그 소설을 읽겠다고 했다.

 양식은 호텔 방에서 휴대용 컴퓨터를 찾아 그 화면에 그 소설이 나오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양식은 그것을 다시 한 번 훑어 보았다. 벌써 문장을 다 외울 정도로 많이 읽어본 내용이었다. 양식은 화면을 덮고 방을 나서면서, 화면을 보지 않고도 그 다음의 소설 내용을 머릿속에서 그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양식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다시 해변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양식은 그 안에 혼자 서 있었다. 양식은 점차 줄어드는 층수가 표시되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때 미영은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보안 헛점을 찾아 냈다.

 “긴급 비상 경보가 울리면 모든 통신망이 긴급 고속 통신으로 전환되는데, 그렇게 하면 프로그램에 작은 오류가 생겨서 한 두 문장 정도는 가상현실에 전달할 수 있을 거 같어.”

 “긴급 비상 경보를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울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돈도 없고 힘도 없고 뭐 아무것도 없는데.”

 경리부장이 말했다. 미영이 대답했다.

 “우리는 못할 거 같고. 저기 있는 사람들 중에 누구 하나는 좀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미영은 보관 탱크에 쌓여 있는 많은 뇌들을 가리켰다.

 비서와 경리부장과 미영은 다같이 재빨리 홍보용으로 공개된 뇌들을 검색했다.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서비스를 이용해서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는 가상현실을 즐기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고, 뛰어난 록 가수가 되어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밖에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할 수 없거나 할 수 있다고 해도 금지될 만한 갖가지 괴상한 체험을 육체를 잃어버린 후에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서버 속에서 가상현실로 영원히 즐기고 있다는 여러 사례들이 공개되어 있었다.

 “이 사람 괜찮네. 이 사람으로 어떻게 해보면 되겠네.”

 그 여러 사례 중에 미영이 고른 것은 한 초공간 도약학자의 뇌였다. 이 초공간 도약학자는 가상현실 속에서 새로운 이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 학자는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서버 속에서 다른 잡념은 다 끊고 자신의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 지연 승수를 1/1,000,000로 설정해서, 바깥 세상의 1일 동안 가상현실 속에서 1백만 일의 시간을 보내며 긴 긴 시간 연구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니, 연구도 훨씬 더 깊고 높은 수준으로 자꾸 자꾸 발전하고 있다며 그 학자는 기뻐하며 지냈다.

 “이제, 이 사람 쪽에서부터 난리가 나는 것으로 긴급 비상 경보를 한번 날려 보자고.”

 미영은 긴급 신고를 띄웠다. 그 내용은 이 학자가 연구한 내용이 너무나 심오해진 나머지, “초끈 붕괴 이론”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초끈 붕괴 이론이 뭔데요?”

 “그게 뭔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하여간 만약 누가 그걸 알아내면, 그 이론을 이용한 간단한 장치를 만들어서 딱 한 번 살짝 딸깍하고 작동시키는 것만으로 우주 전체를 다 펑 하고 없애버릴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내용이 공개되면 엄청 위험하지.”

 “정말로 저 사람이 그걸 알아 낸 거예요?”

 비서의 질문에 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긴급 신고를 최대한 빨리 멀리 퍼져나가게 하는데 집중했다.

 “비상 상황 입니다. 연구 불가 영역의 연구에서 성취를 이룬 사용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비상 조치를 취하십시오. 외부로 연구 결과가 공개될 수 있는 모든 연결, 통신을 차단하십시오.”

 “통신망을 모두 예외 통신망으로 역설정 하십시오.”

 로봇과 컴퓨터가 내는 소리와 경보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만약에 초끈 붕괴 이론이 세상에 알려지면, 누군가 재미로, 아니면 그냥 세상이 싫어서 틱 하고 온 우주를 통째로 없애버릴 수 있게 되거든. 그러니까 그걸 막으려고 다들 저 난리인거지.”

 경리부장은 그 요란한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편 미영은 가장 빠르게 컴퓨터를 조작하기 위해 힘을 다하고 있었다.

 “예외 통신망으로 긴급 설정이 되면서, 가상현실 속에서 바깥으로 연락하는 게 다 막히는 대신에, 바깥에서 가상현실 안으로 연락하는 방향에는 헛점이 생기거든. 그걸 잡으면 돼.”

 “그러면 김이사님이랑 통화도 할 수 있어요?”

 “통화는 어려울 거 같고. 어떻게 제일 허술한 쪽 이용해서 한 두 줄 정도 몇 글자 보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미영은 양식에게 연락하기 위해 보안 프로그램의 허점을 이용하는 명령을 입력했다.

 한편, 양식은 호텔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혼자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움직이고 있었다. 괜히 몸이 약간 불편한 듯 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시간은 잠깐일 뿐이었고 불안한 느낌과 지루한 느낌이 의미도 없이 오가기만 했다. 눈 앞에 표시되는 엘리베이터의 붉은 숫자가 층수를 나타내고 있었다.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5, 4, 3.

 그런데 그러다 갑자기 층수가 나오던 곳에 붉은 빛으로 숫자가 아닌 다른 글씨가 나왔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한 목표”

 그 말은 잠깐 나오고 다시 원래 표시되던 층수 숫자로 되돌아갔다. 그렇지만 양식에게는 그 기계 고장으로 나타난 것 같은 몇 마디 말이 몇 분 동안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이, 그 글자의 모양이 머릿속에서 마구 울렸다.

 그것은 바로 가상현실 바깥 실제 세계에서 미영이 보낸 통신문이었다.

 양식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 바깥으로 다시 해변과 바다가 보였고, 그리고 다시 문이 닫힐 때까지도 양식은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내릴 줄도 몰랐다. 그 한 마디 말이 양식의 기억을 일깨워 줄 자극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틀어막혀 있던 기억의 관이 뚫려서 그 동안 잊고 있던 모든 지식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양식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다시 나왔다. 양식은 식당으로 내려가 주방으로 달려갔다. 양식은 처음부터 만나야 했던 의뢰인의 스승을 만났다. 그 사람은 요리사 복장으로 오믈렛을 만들고 있었다. 양식이 말했다.

 “밤새 파도 소리가 들렸는데 아침 파도 소리에는 잠을 깬다”

 요리사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는 저도 잘 모르는데요.”

 “잠깐만요. 그게 제가 옛날에 쓰던 제가 만든 암호 규칙이랑 비슷한 형식인데, 그러니까 ‘파도’가 2 ‘소리’는 7 ‘들렸는데’는 5 ‘아침’은 6 ‘파도’는 2 ‘소리’는 7이니까 27527이고, ‘잠을 깬다’는 감마함수라는 뜻이니까, 2는 1, 7은 720, 5는 24니까, 이건 1720251720이고, 그러면 이건 화성 학술 문서 번호 형식인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요리사는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는지, 양식에게 컴퓨터를 빌려가서 1720251720 문서를 검색했다. 그걸 보더니, 요리사가 외쳤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이제야 생각 났습니다. 저는 원래 이곳에 오신 회계과장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에게 이곳이 가상현실이고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완전 몰입 옵션으로 이곳에 들어온 뒤에 요리사로 지내는 삶에 너무나 잘 적응해서 모든 것을 잊고 그냥 지내고 있었던 겁니다.”

 요리사는 갑자기 입고 있던 모자와 옷을 벗어던지고 뛰어나가려고 했다.

 “가시지요!”

 “어디로요?”

 양식은 요리사를 따라 뛰어나갔다. 뭔가 상황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양식에게 완전 몰입 옵션을 소개해 주었던 호텔 직원이었다. 그 직원은 엉뚱하게도 갑옷을 입은 차림으로 양 손에 칼을 든 채 오고 있었다.

 “고객님, 어디를 찾으십니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요리사가 칼을 휘두르며 말했다.

 “저 사람이 저에게 완전 몰입 옵션을 소개해 준 뒤로 이제껏 모든 것을 잊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저도요.”

 양식은 요리사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요리사는 갑자기 익숙한 자세를 취하더니 맨손으로 호텔 직원의 휘두르는 칼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손님은 빠져 나가십시오. 저는 제가 할 일을 마저 다 하고 가겠습니다.”

 요리사가 말했다. 그리고 날쌘 손발놀림으로 호텔 직원과 격투했다. 양식은 두 사람이 싸우는 험한 기세에 더 놀라 호텔 바깥으로 나갔다.

 호텔 밖으로 나오자, 해변의 파도는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는 들개보다 더 커다란 흉칙한 게가 집게발에 강철 가시를 달고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두 팔에 기관총을 든 인어들이 펄떡거리며 양식을 향해 오고 있었고, 선글라스를 쓴 물개들이 그 안경에서 광선포를 발사하며 양식을 위협하고 있기도 했다. 그 와중에 바다 위로 돌고래들이 뛰어오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양식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곧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가 양식에게 말했다.

 “지금 너 뭐 이상한 거 보이고 환청도 들리고 그렇지? 지금 세상이 세상이 아닌 거 같고 막 이상하지? 지금 참아야 돼. 지금 정신줄 놓으면 안돼. 그러면 영영 세상을 세상 그대로 못 보고 환상 속에 빠져서 살게 될 거라니까. 지금 정신줄 놓으면 나도 애들도 다 다시는 못 보는 거야. 이상한 글 자꾸 읽다 보면 원래 그런 신경 이상이 있는 사람한테는 더 문제가 생길 수가 있어. 이게 다 가짜고 여기서 빠져나간다는 그런 생각에 빠지면 안돼. 그러면 안돼.”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미치면 안된다니까.”

 양식은 그 동안 자신이 세상이고 삶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모두 돌이켜 보았다. 그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미영이 살펴 보니 이때 양식의 접속 장치에는 “주마등 이펙트 3번”이 실행되고 있었다.

 양식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새파랗고 끝이 없는 공간이 보였다. 양식이 패스워드를 말했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한 목표는 이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해서, 양식은 가상현실에서 깨어났고 미영과 양식의 회사는 무사히 수고비를 마저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제가 나오려고 할 때 그렇게 다들 저를 공격하려고 하고 그랬을까요?”

 돌아 가는 우주선 안에서 양식이 미영에게 물었다.

 “그 의뢰인의 스승이라는 사람이 깨우려고 했던 회계과장이라는 사람 있잖아? 그 사람이 주식회사 염라대왕이 투자 받고 허가 따낼 때 불법, 부정 저지른 증거를 갖고 있었다나봐. 회계과장의 몸은 죽고 다 잊은 채로 그냥 가상현실에서 살고 있어서 주식회사 염라대왕에서는 별 걱정 안하고 있었는데, 의뢰인이랑 의뢰인의 스승이라는 사람이 찾아낸 거지.”

 “어쩐지 사업 돌아가는 게 좀 수상하더라고요.”

 “이제 주식회사 염라대왕쪽으로 다 수사 들어오고, 여기 저기서 감사에 소송 들어오고 한바탕 한다나봐. 주식회사 염라대왕 사람들중에 부정부패 저질렀다는 사람들은 체포되고 있는 거 같고. 어떤 사람들은 돈 챙겨서 안드로메다 은하 쪽으로 도망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도 하고.”

 화면에 비서가 다시 나타났다.

 “그 초끈 붕괴 이론은요? 그건 문제 없어요? 우주 다 펑 하고 터지면 어떡해요?”

 “아무 걱정 마세요. 가상현실 속에서 백만 배 빠른 속도로 연구할 수 있다고 해서 진짜 연구가 되고 진짜 지식이 막 늘어나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연구가 되는 것 같은 느낌, 뭔가 새로운 지식을 얻은 느낌만 생기는 거 거든요. 초끈 붕괴 이론을 만들었다는 것도, 정말 초끈 붕괴 이론을 만든 게 아니라, 그런 이론을 깨달은 것 같고 만든 것 같다는 착각만 생긴 거였으니까.”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양식의 눈은 다시 좀 멍해졌다. 미영이 물었다.

 “괜찮아? 그 안에서 한 몇 년이었던 거 아냐? 막 너무 피로하고 혼란스럽고 안 그래?”

 “적응치료 받았으니까 버틸만은 한데요. 근데 그런 생각은 들어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상현실이 진짜인 줄 착각한다, 뭐 그런 내용의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게,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도 가상현실이니까 깨어나야만 한다는 그런 힌트를 누가 바깥에서 넣어줬기 때문 아닐까요? 그러니까 그런 걸 보게 되면 보게 될수록, 점점 더 이 모든 게 다 환상일 가능성도 점점 커지는 거 아닌가. 그런.”

 그 말을 들으며 미영은 우주선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미영이 말했다.

 “이제 매번 엘리베이터 층수 숫자 보고 있을 때마다 갑자기 이상한 말 튀어나오는 거 아닐까 막 두근두근하고 그래? 그러게, 내가 한다니까 애초에 왜 그렇게 나섰어.”

- 2016년, 테헤란로에서

댓글 4
  • No Profile
    신나라 16.12.04 21:30 댓글

    "말버릇과 태도의 우아함"을 다시 읽었습니다. 과연 폴 버호벤의 꿈을 꾸는 것은 더글러스 퀘이드입니까, 하우저입니까?

  • 신나라님께
    No Profile
    곽재식 16.12.05 10:15 댓글

    잘 찾아 보셨습니다. 가상현실, 메타픽션, 이런 소재는 제가 종종 거듭 다시 써 보고 싶은 소재입니다. 이번에는 좀 가볍고 쉽게 써 봤는데 다음번에 쓰게 된다면 약간 화려하고 격한 이야기로 한 번 몰아 가 보고 싶기도 합니다.

  • No Profile
    청야 18.03.17 11:44 댓글

    굉장히 시리어스할수도 있는 소재를 이렇게 경쾌하고 웃기게 써주시니 정말 재밌네요ㅋㅋㅋ

  • 청야님께
    No Profile
    곽재식 18.03.18 22:03 댓글

    가상 현실 주제는 너무 많이 나오기도 했고, 저 자신도, 이 시리즈에서도 몇 번 다뤄 본터라, 좀 색다른 측면을 건드리는데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웃긴 분위기로 이번에는 흘러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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