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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길이 없다

2014.12.31 23:0412.31

길이 없다




1.
1월 17일, 하늘에 치솟아 높게 자란 초록 나무 사이로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날 아침 미얀마에 머물던 알 리는 좋은 생선을 사기 위해 국경을 넘어 번화한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개조한 모터사이클을 타고 고개 길을 넘어 갔을 무렵, 빗속에서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하나 둘 걸어 왔다. 군인들은 농약을 싣고 가던 차가 뒤집힌 사고 때문에 길이 폐쇄 되었다고 했다. 알 리는 하는 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 가야 했다.


그 바람에 알 리는 다른 곳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의 식당에서 알 리는 한 여자를 만났다. 알 리도 그 여자도 평소에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두 사람은 후덥지근한 날씨에 이곳에서 머무는 것이 힘들다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고, 1시간 15분 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알 리는 결국 상상했던 좋은 생선을 사는데는 실패했지만,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1월 17일 그날 왜 자신이 그곳에 가지 못했는지 그 진상은 영영 알 지 못했다.


2.
1월 17일, 비가 그친 도로에는 여기저기 흙탕물이 고인 곳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공기는 한번 완전히 씻겨져 있어서 더운 날씨이지만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날 타이에 있던 짐 응우엔은 새 밭을 사는 계약을 하러 국경을 넘어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는 숲길을 가고 있을 때 한 경찰을 보았다. 경찰은 짐 응우엔의 차를 세웠다. 경찰은 짐 응우엔의 차가 안전 규정을 어기고 있다고 말했고, 정밀하게 살펴서 처벌을 할 지 말 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짐 응우엔은 근처 경찰서 지소에서 여덟 시간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짐 응우엔은 여덟 시간 잡혀 있는 동안 너무 배가 고프게 되었다. 짐 응우엔은 경찰이 “큰 문제는 아니니 이번에는 그냥 보내주겠다”며 그를 보내 주자마자 허겁지겁 돼지고기를 요리해 먹었다. 그때 너무 급히 먹는 바람에 짐 응우엔은 덜 익힌 돼지고기를 먹다가 기생충에 감염 되었고, 그 덕분에 간이 상하여 한동안 고생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완전히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8년 1개월 후, 짐 응우엔은 술을 진탕 마신 저녁에 둑길을 걷다가 깜빡 균형을 잃었다. 아마 그때 간을 다치지 않았다면 그 정도로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똑바로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고, 그는 그대로 넘어져 둑길 아래의 물 속에 쳐박혔다. 그리고 그로부터 8분 후 짐 응우엔은 사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까지도 1월 17일 그날, 왜 자신이 그곳에 가지 못했는지 진상은 알고 있지 못했다.


3.
1월 26일, 베트남 북부 지역에는 비가 약하게 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는 줄기가 분명한 비가 내렸지만, 지금은 거의 내리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지만 도시의 빽빽한 건물들과 건물 사이사이를 휘감듯이 자라난 나무들을 희뿌연 안개가 감싸고 있었고, 그 거리를 걷고 있으면 얼굴과 손등에 가끔 물방울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인범은 처음에는 쌀쌀한 날씨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길을 걸어 이곳 시장통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고 나니, 안개와 빗방울 사이에 퍼진 후덥지근한 습기 때문에 무척 더워했다.


이인범은 길가에 세워 놓은 수많은 이륜차들 틈바구니에서 엉거주춤하게 섰다. 길이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인도에는 온통 이륜차들이 주차 되어 있었기 때문에 걸어갈 때는 인도가 아니라 차도의 가장자리에 붙어 걸어야 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틈을 아무 불편한 없이 느긋하고도 날렵하게도 잘 걸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인범은 가끔씩 차도를 달려 지나가는 차들이 두려워 항상 두리번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에 애를 써야 했다.


그런 끝에 도착한 곳이 지금 이인범이 서 있는 가전제품 수리점 앞이였다. 이인범은 전화 화면을 보고 원래 초청장에 나와 있는 주소가 이곳이 맞는지를 다시 확인했다. 맞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인범은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지금 시각은 10시 반이니까, 한국은 아직 8시 반이었다. 출근 시간 전이었고,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이인범은 녹음이라도 해 두기로 했다.


“김대리님, 죄송한데요, 내 이메일로 온 주소가 맞는건지 한번만 다시 확인해줄래요? 저는 회의 하기로 한 장소가 탕롱 일렉트로닉 센터라고 하길래, 무슨 컨벤션 센터 같이 큰 그런덴줄 알았는데, 여기와서 보니까 그 탕롱 일렉트로닉 센터라는데가 조그만 가전제품 수리점이에요. 우리 왜 지하상가 같은데 보면 ‘한양 전자 센타’ 뭐 이 정도 이름 붙여 놓고 온갖 잡다한 가전제품 수리도 하고 중고 제품 사고 팔기도 하고 하는 그런 가게 있잖아요? 딱 그런 모양이에요. 지금 문도 안 열었고. 여기서 무슨 미얀마 사람들이랑 만나서 회의할 그럴 장소가 아닌거 같아요. 꼭 좀 알아봐 주세요. 여기 아니면 딴 데 찾아 가려면 늦을지도 모를 것 같거든요.”


이인범은 전화를 마치고 다시 탕롱 일렉트로닉 센터로 가서 문이 열려 있기는 한지 한 번 흔들어 보았다. 꼼작도 하지 않았다. 덜컹이는 소리를 듣고 시장의 근처 상인들이 이인범을 쳐다 볼 뿐이었다. 빗방울이 얼굴에 좀 더 많이 와닿는 것 같았다. 이인범은 비를 피해서 잠깐 처마가 있는 곳 아래에 서 있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마에 서서 거리를 보니 폭이 좁은 건물들이 가지각색으로 골목마다 가득 들어찬 모습이 눈에 보였다. 폭은 좁았지만 높이는 7층, 8층으로 꽤 높아 보이는 건물들이었다. 건물 안에 온갖것을 넣어 놓고도 건물들은 그렇게 좁지 않아 보였다. 건물을 타고 올라간 나무 덩굴이나 가로수로 심어져 높이 자라난 거대한 나무들의 초록잎 빛이 퍼져 나와서 거리의 안개까지 녹색 빛으로 물들이는 것 같았다. 다시 한결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켜서 지도를 또 보았지만 시장 안의 길은 어지러워 정확히 이곳이 어디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다만 길모퉁이에서 배낭을 맨 젊은 유럽 여자 둘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이자, 이인범은 관광객들이 자주 다니는 곳이니 위험하고 살벌한 동네는 아니겠거니하며 안심해 보려고 했다.


발 앞으로 길바닥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서로 즐겁게 웃으며 길바닥에 앉아 그릇을 들고 뭔가 국물을 마시고 있는 시장 사람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깔판 같은 작은 의자를 받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베트남어로 대화를 했고,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베트남어라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 옆에서는 손님들이 먹은 음식을 설거지 하는 사람이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릇을 씻고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삿갓을 쓰고 있었는데, 비닐 호스에서 물을 받아서 그릇을 씻고 그릇을 헹군 물은 그대로 길가 배수로에 버리고 있었다. 시장통 곳곳의 음식 파는 곳들 마다 이렇게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릇을 씻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든 할머니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젊은 여자가 하나 있었다. 이인범은 무심코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도 다른 사람들처럼 쌓아 놓은 그릇들을 하나 하나 옮기며 길바닥에서 씻고 있었다. 옷차림과 행색은 다른 식당사람들과 다를바 없어 보였지만 약간 덩치가 큰 듯 보이기도 했다. 그 여자는 고기를 넣은 국 같은 것이 담긴 그릇을 씻었다. 길바닥에 버려지는 음식물 찌꺼기가 더러워 이인범은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여자가 씻던 그릇의 국물이 비워지고 바닥이 드러나자 순간 거기에 한글로 글씨가 씌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인범, 위험해, 전화해.”


이인범은 놀랐다. 자기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이인범은 자기가 뭔가를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인범은 그릇을 씻고 있던 여자를 쳐다 보았는데, 그 여자는 계속 무심히 다른 그릇을 씻고 있을 뿐이었다. 안개와 빗방울은 계속 뿌연 색깔이었다. 차가운 바람과 무더운 바람이 번갈아 불었다. 여자는 다른 그릇을 꺼내서 다시 씻었다. 그릇 바닥에는 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인범, 빨리 전화해.”


이인범은 그 뒤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이인범은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끝없이 미로처럼 길이 엉킨 이 시장 가운데에 서 있는데, 더운 안개는 모든 게 꿈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인범은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다른 누구도 이인범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상인들은 물건을 팔기 위해 소리치고 있었고, 가끔 시끄럽게 터져 나오는 이륜차의 경적소리는 가까이서, 멀리서 계속 들려왔다. 바닥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노인들은 소리 없이 그릇을 씻고 있었다.


이인범은 그러다 길 건너편에서 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후줄그레했지만 양복차림이어서 시장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물통을 꺼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한 모금 마셨는데, 꼴깍거리는 모양을 보니 맹물이 아니라 술 종류를 마시는 것 같았다. 며칠 내로 길바닥에 널브러질 알콜 중독자일까 싶어서 살펴 보면, 그렇게 보기에는 눈빛은 멀쩡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 남자도 믿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인범은 결국 그릇을 씻던 여자에게 다가가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런 글자를 보여 준 것이냐고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복잡하게 세워둔 이륜차 사이를 헤치고 지나 가느라 엉거주춤하게 걸을 때,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바로 이인범의 귀 옆으로 날쌔게 이륜차 한 대가 더 지나갔다. 이륜차는 겁을 먹어 걸음을 물려 뒤로 피했다. 다시 큰 차가 다가 오는 것 같아서 이인범은 마침 건물 사이로 있던 좁은 골목 쪽으로 잠깐 몸을 피해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인범 앞을 지나고 있던 그 배낭을 맨 유럽 여자 두 사람이 다가 왔다. 그리고 차가 지나가는 잠깐 사이에 그 둘은 이인범을 골목 안으로 잡아 당겼다.


좁고 높은 건물 사이에 있는 골목은 대낮인데도 그 그늘이 밤처럼 캄캄했고 깊었다. 두 사람이 이인범을 단숨에 골목으로 잡아 당기자, 끝없이 펼쳐진 시장의 미로가 그대로 이인범을 집어 삼킨 것처럼 그는 사라져 버렸다. 이인범은 어두운 골목의 뒤편에 있는 작은 문 안으로 끌려 갔고, 겁먹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두 배낭여행자들은 능숙하게 그 입을 막고 이인범의 목을 제압해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인범은 어느 어두운 방 한 가운데에 묶인 채로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두운 회색 시멘트 벽이었고, 가운데에는 백열등 하나만 밝혀져 있었다. 조용한 방이었지만 겁에 질려 씩씩거리는 자신의 숨소리만 귀에 선명히 들렸다. 그 소리는 더 겁먹게 하는 것 같았다. 건물 바깥 멀리서 또 가까이서 무심하게 빽빽거리는 거리의 이륜차 경적 소리만 들려 왔다.


이인범은 이 풍경이 영화나 TV에서 보던 대공분실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차이점은 영화에서 본 장면에서는 험상 궂은 40대 한국 아저씨들이 악랄한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자리에 앉은 사람을 보고 있었지만, 지금 이인범의 앞에는 금발의 유럽 여자 두 사람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다는 것이었다. 이인범은 숨을 고르고 살려 달라고 빌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그저 왈칵 울음이나 나올 것 같았다.


“뭐하는 사람인지 말하시오.”


여자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어디에서 나오는지 한국어로 누군가 통역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한국 섬유 산업 혁신 연구소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무기 계약직 연구원입니다.”


그리고 계속 두 사람이 묻고 이인범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이인범에게 언제, 어떻게 베트남에 왔는지 물었고, 이인범은 사실 대로 어제 대한항공편으로 왔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무엇 때문인지, 이인범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인범에게 몇 가지 수단으로 겁을 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인범에게 저지른 일과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했는 지에 대해서 똑바로 모두 털어 놓으라고 말했다.


이인범은 생각 나는 대로 말했지만 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정말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그냥 계약직 연구원이거든요. 몇 달전까지는 매년 한번씩 계약해서 회사 더 다닐 수 있는지 없는지 정해야 되는 일반 계약직이었는데, 이제 겨우 무기 계약직 됐구요. 무기 계약직이 되면 회사 사정이 힘들어서 해고해야 될 때만 아니면 계속 재계약 걱정 할 필요 없이 다닐 수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 수습기간이라, 다시 일반 계약직으로 내려갈 수가 있어서 진짜 시키는대로 다 해야 되는 처지라서, 그냥 엊그저께 갑자기 베트남에 가서 미얀마 쪽 연구소 사람들 만나서 급하게 회의하고 오라는 명령 듣고 그냥 군소리 안하고 시키는대로 온 거 뿐이에요. 특히나 요즘 연구소에서 출장 예산 때문에 말이 많아서 가라 그러길래 그냥 바로 비행기표 사서 왔거든요.”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인범의 말을 듣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저도 이틀 전에 이야기 듣고 갑자기 이렇게 출장 오기 힘들었고요, 그 전에는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아마 저만 그런것도 아니고 연구소 사람 아무도 몰랐을 거에요. 요즘이 연말연시 감사 기간이라 다들 상급기관에 무슨 책 잡힐까봐 무서워 하고 있는데, 상급 기관에서 우리 연구소 보고 그런데 참석하고 오라고 내려오길래 그냥 무조건 시키는대로 한 거거든요.”


이인범은 살기 위해서는 이 사람들에게 자신은 이렇게 힘들여서 괴롭히거나 죽일 가치가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인범은 자신이 얼마나 쓸모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지를 이야기 했고, 자신이 일하고 있는 한국 섬유 산업 혁신 연구소라는 곳 자체도 얼마나 무가치한 곳인지를 설명 했다.


한국 섬유 산업 혁신 연구소는 방직 공장이 망하는 바람에 실업자가 많아진 한 지역을 되살려 보겠다면서 그 지역 출신 정치인이 나서서 설립하게 만든 연구소였다. 그런데 새로 생기는 연구소 소장 자리와 간부 자리를 노리는 공직자들이 끼어 들어서 자기가 일하기에 유리하게 이리저리 가다듬는 바람에 결국 그 지역에 연구소가 생기지도 않았고, 한국 섬유 산업 혁신에 딱히 도움이 될만한 연구를 하는 곳으로 세부 업무가 갖춰지지도 않았다.


결국 설립된 지 5년이 흐르는 동안에 가치 있는 연구를 한 것은 전혀 없었고, 연구 실적이랍시고 가끔 이 나라 저 나라의 섬유 기술과 관련된 기관과 교류회를 했다면서 같이 밥 먹고 김청자 전통무용단이란 사람들을 불러다가 부채춤 추는 것을 지켜 보고는, 이런 좋은 행사를 했다고 내세우는 곳으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그 상급기관에서는 “쓸데 없는데 예산을 쓴다”는 악평을 받아 조직이 줄어 들면 영향력이 약해질 것을 싫어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연구를 하는 곳으로 치장을 하여, 그제껏 폐쇄시키지 않고 있는 곳이었다.


“정직하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에게 방법이 있지.”


그러나 끝까지 두 사람은 이인범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인범은 애처롭게 간청을 했고, 도대체 자신을 왜 이곳으로 붙잡아 왔는지 설명이라도 해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인범을 붙들고 그에게 주사약을 투여 했다. 이인범은 정신이 점차 몽롱해졌고, 갑자기 머리 위로 밀려 드는 습한 공기와 멍한 가운데 들려오는 이륜차 경적 소리만 머리에 파고 드는 것 같았다. 이인범은 곧 잠에 빠져 들었다.


이인범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귓가에 크게 울려 오는 요란한 경적소리를 들었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이인범은 고개를 들었다. 이인범은 야외에 있었고, 바로 옆에는 넓은 도로가 있어서 수십대, 수백대의 이륜차들이 끊임없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주위를 살펴 보니, 이인범은 노천 카페 같은 곳에 앉아 있었다. 앞에 있는 탁자에는 여러 개의 술잔과 샌드위치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카페에는 잘 차려 입고 데이트를 하러 나온 남녀가 소곤거리며 베트남어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도 있었다. 그 행복한 사람들이 소곤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이인범의 귀에 갑자기 아주 크게 들렸다가 작게 들렸다가 했다.


사람들 뒤로 저녁이 되어 불을 켜놓은 건물들의 불빛이 보였고 헤드라이트를 켜고 지나가는 차의 불빛들이 움직였다. 카페는 화려하게 치장된 오페라 극장 옆에 있는 것이었는데, 오페라 극장은 프랑스 어딘가에 있을 법한 모습이면서도 주위에 가지를 넓게 펼친 야자수와 다른 초록 거목들과 함께 어울려 있어서, 바로 앞 길에 가득한 차량의 행렬이 없다면 마치 정글 속에 숨겨진 비밀 궁전처럼 보일 듯한 모습이었다.


이인범은 머리가 아팠다. 똑똑한 정신을 차려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 섰을 때는 어지러워서 길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춤을 추며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이인범은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다가가 자기가 언제 여기로 왔고, 누구와 함께 여기에 와 있는지 물었다. 이인범은 직원과 정확하게 의사 소통이 안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직원은 이인범이 혼자서 여기에 왔고, 이인범 혼자 술을 퍼 마시다가 술에 취해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듯 했다.


이인범은 그렇다면 잠깐 아침에 시장에 갔다가 두 사람에게 붙들려 갔던 것이 술취해서 한 상상인가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급하게 출장이 잡혀서 미얀마 사람들과 회의를 해야 해서 베트남에 왔고, 회의 장소라고 하던 주소를 찾아간 일까지는 똑똑히 기억 나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대로 분명히 짜놓은 계획이었다. 이인범은 그렇다면 이 직원들도 혹시 한 패거리는 아닌가 싶어 겁이 났다. 이인범은 비틀거리면서도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이인범은 그리고 자기 자리에 놓여 있던 샌드위치를 다시 보았다. 바게뜨 같이 생긴 빵에 고기와 야채, 그리고 알 수 없는 쥐포나 오징어 채 같은 것도 뿌려져 있는 음식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그 사이에 종이도 한 장 끼워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인범은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고 그것을 먹으면서 몰래 종이를 꺼내 보았다. 종이를 뺀 나머지 부분은 맛있었다. 그리고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인범, 거기 있으면 안돼. 극장 안으로.”


이인범은 다시 주위를 살펴 보았다. 사람들은 많았고, 이인범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한 남자가 오페라 극장 뒤쪽 울타리 가까이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오전에 시장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인범은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그 사람 중에 다시 자신을 해칠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둥거리며 아무렇게나 돈을 꺼내어 술값을 치르고 오페라 극장의 계단을 올랐다.


오페라 극장 안에서 무슨 파티라도 벌어지고 있는지, 화려하게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극장 안으로 짝을 지어 들어 가고 있었다. 한 중년여자는 베트남 전통 의상을 서양식 이브닝 드레스 비슷하게 개량한 것을 입고 있었는데, 오페라 극장 앞에서 기념 사진까지 찍고 있었다. 불빛이 번쩍일 때마다 옷에 달아 놓은 반짝거리는 금속 장식들이 서로 순서를 바꿔가며 빛을 반사했다.


이인범은 초대장이 있는 사람들만 오페라 극장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양복 안주머니 안에 누가 넣어 두었는지 그 초대장이 있다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초대장에는 한글로 한 마디 적어 놓은 것도 있었다.


“부엉이 장식”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극장 안에 들어 서서도 이인범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부엉이 장식”이 무슨 말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이게 무슨 행사인지도 이인범은 알지도 못했다. 애초에 오늘 무슨 일을 왜 겪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지금 어디에 가서 뭘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가 온통 극장 안에 가득했는데, 그 삼박자로 쿵쿵대는 소리는 계속 이인범의 심장을 치며 위협하는 것처럼 들리기만 했다.


이인범은 일단 쪽지에 나와 있던대로 이제 극장 안으로 왔으니까 위험하지는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없는 2층 어느 구석 어디에 가서 잠깐 앉아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앉아서 생각해 본다고 뭔가 수가 나지는 않겠지만,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고 끙끙거리는 소리라도 마음껏 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인범이 2층에 갔을 때, 거기에 붉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붉은 옷에는 부엉이 모양의 장식이 있었다. 그녀는 키가 훤칠했고 이인범을 보는 눈은 멋져 보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은 불공평하게 태어날 수 밖에 없는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인범으로서는 그녀를 보고 평등과 불공평에 대한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이, 오직 우뇌로 감탄하면서, 좌뇌로는 부엉이- 하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쪽지 보고 왔는데요.”


이인범이 말하자 그녀는 창가 발코니쪽의 숨겨진 공간으로 안내했다. 좁은 통로를 지나고 나니 다시 진회색의 시멘트 벽으로 막혀 있는 어두운 방이 나왔다. 그녀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전등을 켰다. 이인범이 그 아래에 있는 자리에 앉자, 다시 대공분실 양식을 충실히 따르는 실내장식이 완성 되었다.


“저한테 다 말하셔야 돼요. 그래야 살 길을 같이 찾을 수 있어요. 아시겠죠?”


이인범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턱을 따라 그저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이인범은 어쩐지 그녀가 오전에 보았던 길바닥에서 그릇 씻던 사람과 닮은 데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1월 17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설명해 주세요.”


이인범은 1월 17일에 무슨 일이 있는지 기억해 보았다. 그렇지만 별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1월 17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삶의 어떤 일도 이런 자리에서 말할만큼 중요한 것이 있는 지 의심스러웠다.


희미하게 계속 들려 오는 왈츠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에 이인범이 간신히 정리한 1월 17일에 있었던 일의 기억 조차도 그녀가 처음 듣기 원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원래 연구소 기획실에서 우리 수익 구조가 안좋으니까 작년 한 해 동안 돈 아끼라고 출장 갈 때는 택시 타지 말고 무조건 버스 타라, 외부에서 밥 사 먹을 때는 6천5백원 미만으로만 사 먹어라, 전열비 아껴야 되니까 실내에서도 코트 입고 있어라, 뭐 그렇게 해서 작년에 돈 엄청 아꼈거든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예산에서 돈이 꽤 남았어요. 이제 결산할 때인데, 상급기관에 신청한 예산 다 안쓰고 돈 남았다고 보고 하면, 그러면 애초에 왜 그렇게 예산 많이 신청했냐고, 없는 돈 끌어다 준다고 고생했는데 왜 거짓말했냐고, 엄청 욕먹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돈 남기면 다음 해 예산 신청할 때 어차피 돈 또 남길 거니까 미리 줄여서 준다고 돈도 깎인다 그러고요. 그래서 돈을 남기면 안되고 무슨 수로든 써 없애야 한대요.


그래서 돈 다 써없앤다고, 1월 17일 날 난리 많이쳤죠. 사무실 비품비로 돈 써 없앤다고 A4 용지를 5백만원치를 샀나? 그런데. 그러니까 회의실 방 한칸에 A4 용지만 꽉꽉 다 채워서 쌓아 놔야 되더라고요. 평생 써도 다 못쓸만한 A4 용지라서 어쩌냐고 물어 봤더니, 그 동네에는 이렇게 정부 예산 타서 돌아 가는 연구소들이 많아서 그렇게 A4 용지 사서 돈 없애는 곳들이 우리 말고도 많대요. 그래서 그걸 다시 현금을 주고 도로 사 가는 업자들이 있대요. 값은 정가 보다는 훨씬 적게 쳐주기는 하는데, A4 용지만 산더미처럼 있으면 뭐하겠어요. 현금 좀 챙겨서 회식이라도 몇 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업자들한테 다시 또 A4 용지를 팔더라고요. 예전에 가끔 인터넷 쇼핑몰 같은데 보면 유난히 A4 용지가 싸게 나오는 게 있는데, 그게 그런 업자들이 파는 물량이라고 하더라고요.”


이인범의 설명을 다 듣고도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한편 이인범은 그동안 점점 취한 기운에서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무렵 이인범은 발코니 앞으로 찾아 온 네 명의 남자를 보았다. 이마에 “나는 마약밀매범 또는 조직폭력배요”라고 써서 붙여 놓았다면 더없이 자상한 설명이 되겠지만, 신께서 굳이 그와 같이 한글을 택하여 인간의 이마에 인위적으로 붙여 놓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똑같은 메시지를 안면의 험상궂음과 더러운 인상으로 정확히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그들의 모습이었다. 네 사람은 누구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와이파이 신호처럼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이인범이 발코니 아래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네 사람이 더는 쫓아 오지 못하게 그 자리에서 막았다. 이인범이 겁에 질려 오페라 극장의 뒤편 골목에서 엎드려 있을 때, 잠깐 바람이 멈춘 지면의 열기가 그를 감쌌다. 이인범은 몸이 온통 땀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서서히 안개가 피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인범은 자리에서 서서 어딘가로든 가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뒤에서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인범의 손을 붙잡고 안개 사이로 이끌었다.


골목을 따라 간 곳에는 낡은 네온 사인이 밝혀진 술집이 있었다. 색소폰 연주 하는 사람이 둘, 피아노, 드럼과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이 하나씩 있는 재즈 클럽이었다. 미스티- 라는 가사가 있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고, 근처 숙소에서 잠이 오지 않아 목을 축이러 나온 여행객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이인범은 그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또 어떤 얼굴이나, 어떤 글자가 있는 것은 아닌지 둘러 보았다.


어두운 가게 안의 조명 아래에는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영감님들이 잔뜩 술에 취해 있어서 이 흥겨워지는 순간마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춤을 추는 시늉을 하다가 히히 거리며 다시 주저 앉기도 했다. 그리고 가게 안 가장 깊은 곳에는 또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자기 물통을 열어서 거기에 하노이 병맥주를 따르고 있었다. 이인범은 그녀에게 저 남자를 계속 본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은 그녀는 이인범에게 먼저 말했다.


“여기는 음악 소리 때문에 옆에서 엿듣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그녀는 이인범에게 이번에야말로 정말 모든 것을 알려 달라고 말했다. 이인범은 다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고, 자신은 그저 한심한 연구소에서 무의미한 일에 시달리는 무기계약직 연구원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는 듯 했지만, 곧 다시 이인범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저는 대한민국 쪽 사람이에요. 거기 갔을 때 본 황금봉투가 어떻게 됐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안개 사이로 보이는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감돌아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이인범은 한참 귀에 소리가 닿는 촉감을 느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인범이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국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국정원에서 부르게 하던 노래가사를 들려 오는 색소폰 소리에 맞춰서 조그맣게 읊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국정원 사람들이 지난 번 선거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는 사실이 아닌지, 국정원 사람들 중에서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을만큼 상세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가 국정원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인범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인범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이인범은 그녀의 눈이 뭐라고 의사를 전달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알 수는 없었다. 그녀는 따라 놓은 한잔의 맥주를 마시고 그냥 웃었다. 웃음소리는 음악 사이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다시 조금씩 빗방울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인범에게도 맥주를 마시라고 권했다. 그녀는 다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인범은 그때까지도 머리가 많이 아팠지만 역시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한 잔 맥주를 다 비우고 잔을 탁자 위에 내려 놓으면, 그 내려 놓는 소리와 함께 모든 골치 아픈 일들이 사라질 것을 꿈꾸어 보았다.


그녀는 다시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인범도 그쪽을 보았다. 연주하던 사람들은 곡을 끝내고 옆으로 물러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방금 전까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영감님들이 그 자리에 서서 악기를 들었다. 기타를 들고 있던 영감님이 먼저 연주를 시작했고, 나머지가 뒤따라 소리를 섞었다. 술에 취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연주를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그 빠른 곡이 조금의 흠결도 없이 완벽하게 어울렸다. 멕시코 마리아치 노래였다.


그때 이인범은 그 마리아치 노래가 메아리로 울리며 점차 몸을 하늘로 떠오르게 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웃으며 자리에서 춤추고 한 번 발을 구르자 허공으로 연기처럼 붕붕 피어 올랐다. 이인범은 처음 연주를 하던 사람들이 악기를 챙기기 위해 케이스를 열자 그 안에 까만 총과 탄환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술 취해 히죽거리며 연주하고 있는 영감님들에 비해, 신비로운 곡을 먼저 연주하던 저 젊은 사람들은 얼마나 단정한 공무원 같아 보였는지 생각하고, 빙글빙글 웃었다. 그들은 케이스에서 총을 꺼내 이인범 쪽으로 겨누는 것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을 발로 차서 총 쪽으로 날려 버렸다. 이인범은 다시 정신이 점점 엷어지고 졸린 것을 느꼈다. 구석에서 맥주를 물통에 담던 남자가 뛰어 나왔다.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계속 되었다. 남자는 웃으며 눈을 슬슬 감고 있는 이인범을 붙잡아 끌고 갔다. 그녀를 겨누고 있는 탄환이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불꽃을 튀기었다. 그녀는 날아 다녔다. 총소리는 아직도 계속 되었다. 총을 든 사람들과 총알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다시 안개를 헤치고 나타나 총소리를 다시 더하고, 또 더하는 것 같았다.


이인범이 깨어 났을 때, 이인범은 물통 든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늙수레하게 생겼기는 하지만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인범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온몸에 열이 나는 것을 알았다. 이인범이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이인범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곳은 싸구려 모텔처럼 생긴 곳이었다. 남자가 대답했다.


“남산, 대공분실입니다.”


이인범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남자가 말했다.


“아직 정신이 좀 혼란스러우시죠. 그 사람이 이 연구원님께 먹인 약기운 때문에 그럴겁니다. 저희가 억지로 깨우긴 했는데, 약이 독해서 아직도 하루 이틀은 갈겁니다.”


이인범은 남자에게 뭐라고 더 물었고 남자는 뭐라고 더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인범은 무슨 말을 했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기억 하지도 못했다. 이인범이 기억나는 부분부터는 남자가 자기 물통에 담아 놓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말한 대목부터였다.


“1월 17일에 한국 섬유 산업 혁신 연구소에서 예산이 남아서 그 남은 돈을 다 써 없앤다고 하는 중에, 출장비를 써 없애야 하는 건이 있었습니다. 다른 예산 남은 것들은 대부분 A4 용지나 프린터 토너를 산더미처럼 사는 것으로 써 없앴는데, 출장비는 따로 관리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출장을 간 것처럼 처리를 해서 없애야 했습니다. 그래서 출장을 안 갔지만 서류상으로만 출장을 간 것으로 꾸미고, 출장비를 써서 없앤 걸로 처리를 하기로 했을 겁니다. 그때 혹시 어디로 출장 간 걸로 처리 했는지 기억 나십니까?”
“아니, 근데요. 그거는 그냥 위에서 시켜서 한 거거든요. 그런 거, 그렇게 서류 가짜로 꾸며서 출장 간 척 하고 그런거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어쩌다 들키면 잘못한 사람 잘라야 되잖아요. 그렇게 남들 다 하는 가짜 출장 가는 서류 조작한 것 때문에 정규직인 사람이 하루 아침에 확 직장에서 잘리면 너무 미안하니까, 혹시라도 잘리면 좀 덜 아까운 사람이 잘리라고 그런 일은 계약직한테 다 시키거든요. 그래서 저도 시켜서 그렇게 한거지, 제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저한테 10원짜리 하나 뭐 생기는 것도 없거든요. 그냥 시켜서 한 거라니까요. 제가 왜 나서서 그런 걸 하겠어요.”
“저도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요, 됐고요. 그때 어디로 출장 간 걸로 처리 했는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유럽이나 미국이나 이런 선진국 간 걸로 하면 너무 편한 데로 출장 간 것 같아서 상급기관에 보여 주면, 일하러 돌아 다닌게 아니라 놀러 다닌것 같아 보일 수 있다고 해서, 그런데는 뺐고요. 다른데 중에서도 동남아시아 관광지로 유명한데 가면 또 놀러 간 것 같아 보일 수도 있다고 해서 뺐고, 그래서 아무데나 아무도 잘 모를 거 같은 데 중에서 그냥 한 군데 아무데나 골랐거든요.”
“그래서 고른 이 연구원님이 그때 고른 곳이 라오스의 싱부리라는 곳일 겁니다.”
“정확하게 생각은 안나는데요. 라오스는 맞는 거 같네요.”
“그래서 이 연구원님은 그때 서류상으로는 라오스 싱부리에 가셨던 겁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날 라오스 싱부리에서는 연합군이 특별작전을 벌여서 비밀 봉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날 하루 동안은 싱부리로 들어 갈 수도 없고, 싱부리로 나올 수도 없었다는 겁니다. 아프가니스탄 마약 조직 두목이 옛날 마약왕 쿤사가 남겨 놓은 황금봉투를 챙기러 그날 싱부리에 들어 갔고, 연합군에서는 황금봉투를 찾으려고 그날 하루 동안 완벽하게 싱부리를 틀어 막았습니다.”
“예? 황금봉투가 뭔데요?”
“정확하게 뭔지는 저도 모르는데, 마약왕 쿤사 시절에 숨겨 놓은 비밀 재산을 찾을 수 있는 서류, 비밀번호 뭐 그런 거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 연합군에서는 황금봉투를 찾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봉쇄를 뚫고 누가 몰래 들어 가서 몰래 빼낸 것 아닌가하고 의심하는 기관들이 생겼습니다. 특히 미국쪽에서는 황금봉투도 황금봉투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면서 봉쇄를 했는데 그걸 누가 뚫고 들어 갔다면 보안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거기를 뚫고 들어간 사람을 잡아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냥 서울에서 일하는 무기계약직 연구원이고, 무슨 뚫고 들어 가고 그런 거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서류상으로 그날 이 연구원님이 거기에 갔다 왔다는 문서가 있으니까, 다들 놀란겁니다. 그래서 기관 사람들이 이 연구원님이 정말로 봉쇄를 뚫고 그날 황금봉투를 찾으러 간 줄 안 겁니다.”


이인범은 헛,힉,학,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잠깐 동안 멍청하게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인범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저 붙잡아서 딱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안된게, 미국쪽 사람들이 무기계약직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를 못해서, 뭔가 계약으로 일하는 사람이고 무기와 관련된 일을 한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비밀리에 일하는 무기 거래상이라는 식으로 이 연구원님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이인범은 남자를 쳐다 보았다. 남자는 곧 말을 계속 했다.


“거기다가, 정말로 그날 봉쇄를 뚫고 그날 황금봉투를 찾으러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엉이’라는 사람인데, 얼마전에 국정원에서 선거 때문에 시끄러울 때 그거 책임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잘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솜씨가 대단해서, 정말로 그날 거기에 갔다가 다시 나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착각을 해서, 마약조직쪽 사람들도 그렇고, 미국이나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타이쪽 기관들도 그렇고 이인범 연구원님이 바로 그 부엉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 여자가 진짜 부엉이였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 분야의 일입니다만, 첩보원이라면 다른 사람을 잘 홀릴 수 있으면 좋은 점이 있기 때문에 외모가 뛰어날 수록 좋습니다. 그렇지만 또 외모가 뛰어나면 금방 눈에 잘 뜨이고 기억에 잘 남기 때문에 어디든지 숨어 들어 가고 금방 잊혀야 하는 첩보원으로서는 단점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첩보원으로 적합한 사람은 수수하게 꾸미면 그저 평범해 보이지만 좋은 옷을 입고 화장을 잘 하면 갑자기 확 아름답고 화려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인범은 그녀를 생각했다. 다시 정신이 점점 멍해졌다. 여행 중에 본 모든 여자들의 모습이 다 그녀의 얼굴인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진짜 부엉이는 라오스에서 도망쳐서 베트남까지는 빠져 나왔는데, 베트남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엉이는 부엉이대로 이인범 연구원님이 황금봉투를 빼내 왔다고 생각하고, 이인범 연구원님을 베트남으로 오게 한 겁니다. 아마 상급기관 쪽 지시를 위조해서 연구소에 보냈을 거고, 연구소에서는 감사 기간이니까 그냥 발발 떨면서 시키는대로 무조건 연구원님을 베트남으로 보낸 겁니다. 그리고 이인범 연구원님이 베트남에 왔을 때 이인범 연구원님을 도와 주는 것처럼 찾아 가서 황금봉투가 어디 있는지 알아 내려고 했을 겁니다. 뭐, 진짜 부엉이가 누구인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는 제 소관은 아닙니다만.”
“그러면 소관인 것은 뭡니까?”
“저는 유네스코에서 일하고 있는 조사관입니다. 한국 섬유 산업 혁신 연구소에서 빈곤 국가 지원 사업으로 산업 기반이 없는 나라에 기초적인 섬유 산업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기술을 지원해 준다는 사업에는 유네스코쪽 예산도 들어 갑니다. 그래서 제가 이인범 연구원님 예산 기록도 보게 된 거고, 이인범 연구원님이 진짜로 연합군의 봉쇄를 뚫고 들어간 게 아니라, 예산 없애려고 가짜 출장 갔을 거라고, 국정원이랑 다른 기관에도 통보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부엉이를 찾아 다닐 동안 저는 이인범 연구원님을 처음부터 따라 다녔고, 마침 다들 모여 있는 순간에 연구원님을 빼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부엉이는 도망치기는 했지만 황금봉투는 못 챙긴 것 같으니, 기관들은 이제 이 일은 여기서 끝내려고 하는 참입니다. 이인범 연구원님은 이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해서 하셔야 합니다.”


남자는 슬쩍 웃는 것 같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다 밝히는 겁니다. 경찰, 법무부, 외무부, 연구소, 연구소의 윗선 기관, 그 기관의 윗선 기관에 불려 다니시면서 모두 해명을 하고 찬찬히 설명을 하시는 겁니다. 전에 가짜 출장을 갔다 왔다는 것부터 버림 받은 첩보원과 어울리며 베트남 도시의 시내에서 총격전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다 설명하시는 겁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잘리는 사람도 여럿 생길 것이고, 그 자리로 갑자기 떨어지는 낙하산들도 여럿 있을 것이고, 새로 생기는 기관도 있을 것이고, 새로 생기는 규칙이나 제도도 있을 것이고, 그 새로운 규칙이나 제도를 만들기 위한 기관도 생기고, 새로운 기관을 만들기 위한 규칙이나 제도도 생길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요?”
“지금 제가 드리는 봉투 안에는 미얀마의 섬유 산업 기술에 대한 내용이 들어 가 있습니다. 이걸 참고로 보시고 잘 상상하셔서, 베트남에 가서 예정대로 미얀마 사람들을 만났고, 회의를 잘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 왔다고 가짜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신 뒤에, 내일부터 모든 것을 잊는 겁니다.”


남자는 이인범의 앞에 놓인 컴퓨터를 켜 주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키더니, 입을 한 번 닦고는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인범은 9분 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동작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자기 평생 가장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나서 봉투를 열어 보고는 천천히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보고서의 내용과 무관하게, 그는 처음부터 1월 17일 왜 자신이 그곳에 가지 못했는 지 똑똑히 잘 알고 있었다.




- 2014년, 하노이에서

mirror
댓글 3
  • No Profile
    mirror 15.01.01 11:30 댓글 수정 삭제

    원고가 잘못 올라가 있어, 확인후 다시 수정했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2015.01.01 오전 11시 30분)

  • No Profile
    신나라 15.01.02 15:55 댓글

    "맥주병"인지 "주정뱅이 철학자"인지 "맥주 탐정"인지 아무튼 맥주 사나이의 모험도 계속돼서 반갑습니다.


    미영과 양식의 모험이 맷 그레이닝의 퓨처라마처럼, 다가올 날의 먹먹함을 느끼게 하고, 맥주 사나이의 모험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비정함을 느끼게 해서 두 이야기 모두 읽을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들고, 복잡한 기분이 들 때마다 다시 읽게 됩니다.

  • 신나라님께
    No Profile
    곽재식 15.01.03 20:49 댓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미영과 양식이 나오는 시리즈는 SF 소재를 좀 느슨하게 대충 다뤄 보고 싶을 때 써 보는 시리즈로 써 보고 있고, 맥주 탐정 시리즈는 요즘의 연구개발 업무와 관련된 괴상한 사건이나 관례에 대한 것을 역시 헐렁하게 대충 다뤄 보고 싶을 때 써 보는 시리즈로 써 보고 있습니다. 맥주 탐정 시리즈는 정말 몇 년만에 오래간만에 써 보는 것이라 등장인물로 잠깐 등장만시켜 보는 식으로 일단 다시 한 번 시작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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