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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감정의 여신

2014.09.01 00:0609.01

 

감정의 여신

 

 

그 날은 물에 젖은 8월의 파리 같은 아침으로 시작 되었다. 정말 그랬다. 간밤에 비가 와서 거리는 젖어 있었고, 그 때는 8월이었고, 내가 잠에서 깨어난 곳은 파리였으니까. 아침에 일어 나서 시계를 보니 8시 가 좀 넘어 있었고, 벨기에와 프랑스가 같은 시간대를 쓰는지 조금 의심하고 나니 대강 정신이 들었다. 텔레비전을 켜니까 프랑스어로 분홍색 옷을 입은 울적한 여자에게 잘난척 하는 목소리의 남자 상담자가 뭐라고 말하는 방송이 나왔고, 한참 채널을 돌려서 마흔 네 개의 채널을 지난 후에 다시 분홍색 옷을 입은 울적한 여자가 나오는 방송으로 돌아 왔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자는 이제 울고 있었고, 나는 이 호텔 텔레비전에는 영어 방송이 4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충 일기예보를 보여 주는 영어 뉴스 방송을 틀어 놓고, 나는 내가 호텔에서 아침을 거하게 먹을 만큼 배가 고픈지, 아닌지 고민해 보았다. 일어 나서 호텔 방안을 잠깐 걷다가 창 바깥을 보니, 호텔이 있는 거리 풍경은 어제까지 머물렀던 브뤼셀 풍경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주차해 놓은 차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어디냐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니 잠깐은 풍요로운 기분이 들었다.

 

벨기에의 브뤼셀에 머물렀던 출장 일정은 어제 다 끝났으니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 가면 될 것이었다. 그러면 서울에 토요일에 도착할 것이고 일요일 하루 쉬었다가 출근할 수 있을 터였다. 어제 아침까지만해도 그렇게 되기만을 간곡히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출장을 온 연구위원장과 기술위원장은 내가 영어를 조금 잘 한다는 이유로 모든 회의를 나한테 다 미루어 놓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절반도 알아 들을 수 없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그래도 혹시 부서에 큰 문제를 일으킬 이야기가  그냥 지나 가 버리는 것을 아닐까 싶어, 진땀을 흘리며 겨우 겨우 이리저리 끼어들고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멍청한 표정으로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한번만 더 설명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참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두 사람은 저녁 시간에 나를 불러 고생을 했으니 술을 사주겠다며 11시 반까지 이 술 저 술을 먹였다.

 

그러면서 그날 회의에서 자기들이 졸던 동안 이야기 되었던 내용들을 다시 자기들에게 처음부터 다 설명해 달라고 했고, 술 취한 얼굴로 설명을 듣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꼭그건 아니지. 그건 다시 이야기 해봐야지라면서 한입에 안주로 털어 넣는 벨기에 치즈를 씹듯이 쉽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나는 다음날 회의에서 그 지시를 따르느라어제는 내가 멍청해서 그냥 넘어 갔는데, 사실 이건 다시 엎어서 이야기해야 겠다며 또 모든 회의를 방해해야 하는 바보 역할을 하는 의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곳은 거리는 시끄럽고 좁았고, 날씨는 변덕스러웠고, 표지판에는 네델란드말 같은 것이 씌여 있지만 행인들은 모두 프랑스말만 말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도대체 무슨 이유가 가장 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운전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좁은 길과 아슬아슬하게 자리가 그려진 주차장이 가득했고, 신호에 엉킨 차들은 서울 못지않게 험악했다. 출장 중에 차를 빌려 타고 다니고 있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주차를 할 때, 브뤼셀 골목에 물 셀 틈 없이 빽빽이 주차 되어 있는 차들 사이에 차를 끼워 넣어 세우려고 하면, 고아한 돌로 포장된 옛 길 위에 무섭게 주차되어 있는 독일차들의 행렬은 영혼에 여유가 없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 악마가 설치해 놓은 함정처럼 보였다.

 

출장 마지막 날 오후는별 거 없으니까바깥에서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고 연구위원장과 기술위원장은 회의를 아예 빼먹고 앤트워프로 구경한다고 기차를 타고 놀러 가 버렸다. 그 동안 나는 회의장에서 또나 멍청해서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 들었다. 한번만 더 설명해 달라고 이야기하며 출장 일정의 마지막을 보냈다. 마침내 회의가 다 끝나고 놀러 갔다 오는 두 사람을 데려 오기 위해 나는 기차역에 갔는데, 역시나 주차 하는 것이 어려워 약속 시간 보다 10분이 늦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한참 더 늦는 모양이었고, 나는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하는 일 없이 그저 오락가락했다. “유럽에서는 기차역에 가면 기차가 들어 왔다 나갔다 하는 데까지 가서 볼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나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가, 시간을 보내느라 기차 시간표나 천천히 읽어 보게 되었다. 한 여름이지만 괜히 눈덮힌 벌판을 뚫고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의 출발 시각을 보았고, 바다 밑 터널을 지나갈 런던으로 가는 기차 시각을 보며 기차 위로 배가 지나가는 장면을 단면도로 떠올려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시간 얼마 만에 프랑스 파리로 가는 기차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파리. 그녀는 전에 나에게파리 좋아해?” 라고 나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비록 6개월 전에 그녀와는 헤어졌지만, 그녀가 그렇게 물어 보았던 그 시절에는 그녀와 시시껄렁한 헛농담을 나누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 시간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인 것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좋아한다기는 그렇고. 모기 보다는 낫지.”

 

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웃으면서지금이 1964년 겨울이냐?”고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가볍게 웃을 때, 그 웃음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것이면서 또한 내 손 안에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한 1초에서 3초 사이의 시간 동안 소리도 내지 않고 표정과 두 눈동자로만 웃었다.   웃음이란, 세상의 행복이 여기에 지금 머물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시원하고 편안한 곳에 있고, 앞으로는 더욱 더 그러할 것이라는 예감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한없이 따라 웃고 싶은데도 그녀를 더 웃게 하기 위해 일부러 멍청한 표정을 나는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 3초가 모자라는 웃음을 끝내며,

 

파리, 가 본 적 있는데. 난 참 좋았어.”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파리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파리를 두고 요즘에는 식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꼬인 삐딱한 마음을 잊고 솔직히 대하면 역시 낭만적인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몇 가지 웅장한 파리의 역사적 기념물들과 파리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내가 더 묻지 않았는데도 신이 나서 파리의 이곳저곳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기는 모습과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다른 소재로 이어지면서도 조용한 목소리는, 모르긴 해도 파리 만큼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만나기 전의 시절에 대해 그녀가 저렇게 그리워하며 저렇게 즐거워 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도무지 알 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와는 서로 나눌 수 없는 그녀만의 기억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아주 조금씩 외로워지기 시작하기도 했다.

 

외로워지기 시작했다고는 했으나, 그 때만 해도 나는 그녀와 내가 헤어질 줄은 몰랐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게다가 내가파리라고 해봐야 대도시인데 뭐 결국은 똑같은 거 아니야라고 중얼거렸더니, 그녀는감정의 여신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선 그녀는 잠깐 태도를 바꾸는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파리도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몰려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인 대도시일 뿐이라고 했다. 거리들 중에는 냄새 나는 골목도 있으며, 사람들 중에는 불쾌한 중생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리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파리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는 아련한 과거와 아득한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낭만이 있어서, 저녁 시간에, 이 옛 도시의 한 켠에 앉아서 파리에서 보내는 하루가 또 저물어 가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감상에 푹 빠지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파리에 가면감정의 여신이라고 요즘에 이쪽 사람들이 부르는 조각이 있는데. 그게 잘 알려진 건 아닌데. 그런 게 있거든. 여자 조각상인데, 아름답게 잘 만든거고. 앉아서 그걸 올려다 보면.”

 

그렇게 말하다가 그녀는 잠깐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파리가 아니고, 서울의 어두운 지하를 지나는 지하철에서 나와 쉰소리를 떠들고 있는 텁텁한 공기가 가득한 곳이었음에도, 그녀는 그때 잠깐 동안 다시 그날, 그녀가 파리에 있었던 그 때로 다시 돌아 간 것 같았다. 그녀가 혼자 빠져 있는 정취와 그녀의 그 그리움의 기색 덕분에 내가 서서히 자라나던 외로움이 본격적으로 가득 펼쳐지기 직전 무렵에, 그녀는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나서, 너를 만난거야.”

 

나는 나를 보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그녀의 이야기를 거기서 멈추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안개를 헤치고 나온 것 같았다. 나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질투심 같은 기분이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감정의 여신이라는 조각의 신비한 점에 대해서 짧게 좀 더 이야기하다 말을 멈추었고, 나는 그녀의 기색을 잠깐 살피고는 저녁에 먹을 곱창은 양념 한 걸 먹을 지, 말 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나는 그녀가 곱창은 양념한 걸 먹으면 곱창을 먹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반드시 양념 안한 것만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곧,

 

곱창을 양념한 걸 왜 먹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서울의 지하와 초저녁부터 소주 냄새를 풍기는 승객들과 곱창에 양념 바른 것을 살 지 양념 바르지 않을 것을 살 지에 대해 떠드는 나의 세계로 돌아 왔다. 일부러 빨리 돌아 오기 위해,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열띠게 양념 곱창의 무용함을 이야기 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그녀가 한 이야기는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파리에서는 아무리 그 딴 게 뭔 헛소리냐고 잘난척하는 현실주의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그 도시에 숨겨져 있는 신비한 낭만적인 감상과 언젠가는 마주칠 수 밖에 없으며, 그 중에서도감정의 여신이라는 그 조각상 앞에서는 누구나 사랑을 얻게 되고, 다시금 메마른 감정이 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곱창을 먹은 후로는 다시는 파리에 대해 그녀와 이야기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녀와 이별한 지도 몇 달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 브뤼셀의 기차역에서 나는 다시 파리로 간다는 단어들을 본 것이다. 그녀가 그때 잠깐 파리에 대해서 말하던 순간이 그대로 다시 떠올랐다. 그때 내 마음 속에 생겼던 기분들도 그대로 다시 떠올랐다. 그녀가 파리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겪었는지 나는 다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해 준감정의 여신의 정체가 무엇일 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앤트워프로 놀러 갔던 사람들로부터 브뤼셀에 역이 몇 개가 있는데 그 중에 원래 말해 줬던 역이 아니라 다른 역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이미 파리에 가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비행편 일정을 바꿔서 주말에 하루만 더 머물다가 한국에 돌아 가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에 도착하고 그 다음날 바로 다시 출근을 하려면 조금 더 힘들기는 할 터였다. 그렇지만, 회의장에서 더듬거리는 것과 위원장 두 사람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한국 식당들을 찾아 다닌 것으로 이번 주 한 주가 다 지나갔다는 기억을 갖고 돌아가, 다시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이름 모를 사람들 사이에 끼인 채 운반되는 월요일을 시작하느니, 차라리 파리에 갔다가 잠이 덜 깬 채로 출근을 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두 사람을 공항에 데려가 서울로 보내고, 나는 홀가분하게 혼자 밤 기차로 브뤼셀을 떠났다. 나는 파리로 향했다.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녀와 이별한 후 몇 달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했다. 앞으로는 뭐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도 생각했다.

 

정말 내가 그녀와 왜 헤어졌는 것인지도 생각했다. 역시 생각할 수록 그래, 헤어질 수 밖에 없었겠다는 것도 생각했다.

 

그녀를 화내지 않게 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녀는 종종 격하게 짖궂은 장난을 같이 치며 즐거워 했다. 그렇지만 어떤 때에는 내 작은 행동을 견디지 못하고 몇 시간씩 분노를 삭이지 못하기도 했다.

 

저녁 뭐 먹고 싶어?”

글쎄, 난 별로 먹고 싶은 거 없는데. 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날씨도 좀 그렇고 하니까, 국물 있는 국수 같은 거? 쌀국수나, 짬뽕이나.”

나 점심 때 라면 먹었다고 했잖아. 내가 말하는 거 안 들었어? 너 사람 말하는데 말을 그렇게 아예 안 듣냐.”

아니, 말을 안 들은 게 아니고. 너 점심 때 라면 먹은 건 아는데,”

아는데 넌 무슨 또 왜 국수 먹자고 그래? 너 말 안듣고 있었잖아.”

말 안 듣고 있었던 거 아니라니까.”

아닌데 뭐? 너 또 그렇게 우겨? 네가 잘못을 했으면 잘못을 했다고 해. 그렇게 막 잘못 안 했다고 우기지 말고.”

우기는 게 아니라니까.”

우기는 게 아니면 뭐야. 내가 점심 때 라면 먹은 거 알면, 왜 또 국수 먹자고 하는 건데.”

그게, 니가 뭐 먹고 싶은 거 있는 지 묻길래, 그냥 나는 순수하게 내가 뭐 먹고 싶은 지, 그 지금 내 마음만 놓고 봤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게 무엇인가 그 상태만 그냥 이야기해 준 거지.”

, 너 참 심하다. 그게 말이 돼? 저녁 때 저녁 뭐 먹고 싶냐는 이야기를 꺼내면 그게 지금부터 저녁 뭐 먹을 건지 의논하자는 거지, 그냥 너 상태가 궁금해서, 니 취향을 설문조사한다고 물은 거야? 왜 이렇게 억지를 써?”

자꾸 왜 우긴다고 그래. 아니라니까.”

그러면 저녁 때 뭐 먹고 싶은 지 이야기하는데, 니가 대답한게 지금 우리가 뭘 먹고 싶은 지에 아무 상관 없이 별개로 이야기한 거라고? 대화를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게 말이 되냐?”

일단 그렇게 말을 해 놓고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갈 수도 있잖아. 내가 국수 먹고 싶다고 했는데, 너는 점심 때 라면 먹었으니까, 또 짬뽕이나 쌀국수 먹는 건 좀 아니고, 그러면 대신에 국물 있는 뭐 다른 걸 먹어 보자, 부대찌개를 먹어 보자, 그런 식으로 같이 의논하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거 잖아.”

나 부대찌개는 원래 안 먹는다고 했잖아. 너 부대찌개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 꺼낸거야?”

그게 아니고, 아까 그건 그냥 예를 든 거고...”

정말 짜증 나게 왜 그래? 왜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이렇게 말을 길게 하게 만들어?”

 

내가 비열하게도 그날 부대찌개가 먹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었다는 것은 자백하자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발단이 되어 길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멈춰 서서 그녀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갖은 악담을 퍼부었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것은 도가 지나쳐 억울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그녀는 그날은 그녀의 직장에서도 피곤한 일이 많았고 몸도 많이 지쳐 있어서, 너무 힘든 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까지 마음에 안들게 하니까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해 주었다.

 

유기체 행동학에도 그런 게 있거든. 정해진 스트레스 적응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 이상으로 어떤 행위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만큼 다른 행위의 스트레스를 못 버틴다는 게 있어.”

 

그녀는 그녀가 직장에서 연구하고 있는 유기체 행동학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했다. 말하자면, 그녀가 이미 기분이 나쁘고 심신이 피폐한 날이면, 나는 다른 때와는 달리 그만큼 감안을 해서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그녀가 하는 그 날도 그녀가 이미 기분이 나쁘고 심신이 피폐한 날인 것 처럼 보이길래,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미안하다고만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내 마음 속의 진정한 나 자신의 진심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억울했으며, 그녀가 더 오만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 또한 한 사람의 행동하는 유기체로서, 나도 하필 그날 기분이 나쁘고 심신이 피폐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녀는 처음 대화를 할 때부터 내가 그럴 것이라고 조심하는 태도를 전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ㅗ 그녀가 기분이 나쁜 날이라면, 단지 그것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이유가 되어야 하는가. 왜 두 사람이 서로 행동의 수위를 결정 하는데, 한쪽의 기분이 반드시 먼저 고려해야 하는 사전 조건이 되어야 하는가? 그녀에게 직장에서스트레스를 준 사람은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 스트레스를 마음 껏 발산해도 되는 다듬이 방망이인가. 그녀가 대하는 다른 사람이나 그녀 자신 보다 나는 더 낮은 신분의 사람인가.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하면 나는 더 멍청해져만 갔다. 언젠가부터는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일단 보면, 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와 만나서 내가 어떤 기분이 되는지, 뭘 하는지를 다시 한번 챙겨 보게 되었다. 그녀와 만나면, 만나서 둘이 같이 있지만, 그녀는 전화를 들여다 보고 있는 시간이 나를 보는 시간 보다 더 많은 것 같았고, 같이 길을 걸을 때에도 그녀는 한 손에 전화를 꼭 붙잡은 채 걸으며, 친구인지, 직장 동료일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메시지가 올 때마다 바로 바로 답장을 보냈다. 보이지 않는 그녀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며, 가끔 반가워하기도 했고, 가끔 웃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가 무엇에 반가워하고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지금 파리로 가고 있었다. 후회한 적도 있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편하게 굴고 싶을 때가 있겠지. 어차피 정확하게 내가 해야 할 의무와 내가 손해 보지 않아야 할 영역을 나누어 사람을 사귄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어디에 가져다 쓰겠는가. 사랑하는데, 그냥 좀 억울하고, 그냥 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냥 그녀와 함께 즐겁게 그렇게 지낼 수 있도록 버텨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나는 그걸 버티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반대로 그녀는 나를 사랑한 것일까. 그런게 아니라 그냥 그녀는 나라는 사람을 대하는 예의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기에 너무 치사한 놈이었을까.

 

아무런 생각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지고 갑자기 막 그녀가 보고 싶고, 그냥 다시 찾아 가서 예전으로 돌아 가자고 하고 싶기도 했고, 옛날 그녀가 나에게 사랑했다고 썼던 편지를 괜히 다시 찾아 보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여기는 참 갑갑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뭔들 크게 잘 되겠냐 싶었다. 어릴적부터 나이 들어 가면서까지 가끔은, 언젠가는 더 행복한 순간이 오며, 언젠가는 혹시 크게 성공할 지도 모른다는 허상 같은 희망을 품을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저 내 삶은 그냥 이 정도로 눅눅하고 이 정도로 텁텁한 것이 계속 계속 이어져 인생의 마지막까지 가는 것이겠구나 하는 기분이 든 날도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니 이미 시간은 한참 늦어 있었다.

 

나는 바로 호텔을 찾아 갔다. 계단을 밟을 때 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고,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있으면 옆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건물은 그만큼 고풍스러웠고 방안의 가구들 또한 그만큼 세월이 묵은 것들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니 불을 켜놓지 않은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불을 켰더니 LED 조명등이 옆에서 들어 왔다. 옆에 비치는 불빛에 샹들리에는 앙상한 가지 모양과 그 그림자만 내 보였다.

 

파리에 왔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뭐부터 찾아 봐야 할 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감정의 여신. 나는 파리 여행 소개 자료와 여행 안내 책자를 몇 가지 살펴 보았지만 그런 것은 찾지 못했다. 일본 책을 베껴서 만든 틀을 가지고 해가 갈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뜯어 고치는 졸렬한 방법으로 만들어 낸 한국 여행 안내 책자들을 보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감정의 여신이라는 말을 적당히 일본말로 꾸며서 인터넷에서 찾아 보기도 했지만 역시 그런 자료는 없었다. 억지로 프랑스어 단어 몇 개를 사전에서 찾아감정의 여신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보려고도 했지만, 애초에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어였고, 포기는 더욱 빨랐다.

 

나는 내가 파리에 온 이유를 생각해 보았고, “감정의 여신이 정말 있는 것인지도 생각해 보았다. 파리에 온 첫날 나는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걸인이 빈민 구호 단체에서 깨끗한 새 옷을 받아 입고 나서, 그 좋은 옷을 다시 길바닥에 대고 엎드리며 구걸을 또 시작하는 날 같은 기분이었다.

 

아침이 되자, 그래도감정의 여신이라는 조각을 결국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분이 생겼다. 분명히 그녀가 말했듯이 뭔가 쉽게 알 수 있는 느낌이 오는 조각일 것이다. 알려진 관광지를 따라 걷다가 어떤 특이한 조각상이 하나 있으면, 그게 바로감정의 여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그렇게 움직여 보면 되겠다 싶었다. 다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텔레비전에 나오는 일기예보에서 오늘은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관광지를 이리저리 둘러 보기에는 그것 부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혹시나 일단 날씨를 보기 위해 호텔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날 아침, 어제 밤 어둠과 피곤함 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새로 뜬 아침 해와 잠깐의 희망 속에서 그것들은 모두 선명하게 보였고 좌절스러웠다. 파리에는 조각상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것이다.

 

조각상은 어디에나 있었다. “여신같이 보이는 조각상만 해도 수없이 많았다. 큰 길에 세워 놓은 기념탑이나 기념문 위에, 공원 마다 만들어 놓은 분수에, 건물의 지붕 위에, 다리의 난간에, 다들 어떤 여신이나 천사 같은 것들의 조각이 있었다. 굵은 기둥 위에 올린 거대한 건물의 옥상에는 거인과 같이 커다란 몸집으로 앉아 있는 조각이 있었으며, 성당의 처마에는 날개 달린 괴물들의 조각들이 있었다. 관공서 건물의 벽면에 갑옷을 입은 여자가 말을 타고 뛰어 나오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조각도 있었고, 기차역의 기둥 마다 그 기차역이 향하는 행선지를 나타내는 여신들의 모습이 새겨져 기둥을 휘감고 미끄럼을 타는 것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이 낡은 호텔의 문짝 위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얼굴 모양들이 조각으로 새겨져 붙어 있었다. 거리에 있는 그 크고 작은 얼굴 모양의 조각들은 문 아래를 내려 보는 모양이었다. 그 조각들은 소화불량이 걸린 듯한 표정의 시체와 같은 모양으로 벌써 백오십년 째 그 문 위에 붙어서 세상에 대해 투덜 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울고 웃는 조각들 중에, 무섭거나 엄숙한 조각들 중에, 도대체 그녀가 말했던감정의 여신이 무엇인지 알아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내가 파리에서 어떻게 어느 거리에 있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조각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인지, 그것부터가 한심스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8월인데도 춥기만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구름이 낀 거리를 걸을 때, 모퉁이 하나 마다, 건물 서까래 하나 마다 보이던 그 많은 조각들의 얼굴이 하나 씩 눈에 들어 왔다가 다음 것으로 넘어 갔다. 표정은 수백 가지였지만, 어느 것 하나 나의 희망에 동의해 주는 것 같은 얼굴은 없었다.

 

배가 고프다기 보다는 나는 어쩔 줄을 몰라서 시간이라도 보내야겠다 싶어서 호텔에서 아침을 먹었다. 나는 팬케익 비슷한 것인데 마분지 정도의 얇은 두께 정도로 나온 음식을 보고이 호텔은 팬케익을 이상하게 구워 주는구나고 생각하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괜히 차비만 날리고, 쓸데 없이 옛날 생각에 젖어서 엉뚱하게 호텔요금만 써버리는 짓을 했다는 후회를 조금씩 먹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파리에서 처음으로 밥을 먹고 시간이 가는 동안, 내 감정은 점차 변해 갔다. 그럭저럭 수를 내 보자는 생각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이상한 모양의 팬케익 같은 것이 사실은 크레페였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에는, 어쨌거나 유명한 조각이라면 루브르 박물관에 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니까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보자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한 가지 절망을 극복한 해답이기 때문에 더 통쾌하고 더 의욕적인 생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오늘 비가 온다고 했으니까 야외에서 많이 돌아다니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기왕 한나절 밖에 머물 수 없는 것, 루브르 박물관에서 조각품들을 둘러 보는 것도 적어도 그렇게 이상한 일정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밥을 먹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다.

 

그러한 바닥부터 틀려 먹은 결정으로 인해 지금 나에게 파리에 머물렀던 시간의 대부분은 기억은 철저하게 망가져 버렸다. 나에게 파리에 머무른 시간의 기억은, 노천 카페에 앉아 눈부신 여름 햇살을 보면서 끝없이 인생의 좋은 것과 인생의 슬픈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거리를 보고 있는 기억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강을 건너는 다리를 걸으며 저녁이 되자 저마다 빛을 밝히기 시작하는 골목길들에 대해 끝이 없도록 상상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파리란,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에 끝없이 줄을 서서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줄서서 기다리고 줄서서 기다리고 줄서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게 내 기억 속의 파리였다. 가만히 줄을 서서 있는 것.

 

토요일 오전에 찾아간 루브르 박물관 앞의 줄은 충격적으로 길어 보였다. , 세상에 예술과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가 싶었다. 관광개들이 너무 심하게 많이 몰려 있는 모습이었다. 거대한 궁전인 루브르 박물관의 건물을 따라 줄이 겹겹히 들어 차서 그 넓은 광장을 인간으로 가득 매우고 있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줄에 서서 어떤 원한이라도 갚아야 하는 것처럼 꿋꿋이 기다리는 그 많은 관광객들의 모습은, 마치 지옥을 향해 걸어 들어 가기 위해 줄을 선 망자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무섭고 거대한 끝트머리의 줄에 서는 행동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 가고 싶었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줄의 마지막에 발을 옮기며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올 것을 믿기 위해서는 거의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 긴 줄의 마지막 줄에 서는 용감함이라는 것은 산 앞에서 삽을 들고 한 삽을 뜨면서 언젠가는 저 산을 다 삽으로 퍼서 없앨 날이 올 거라고 결심하는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저 줄이 끝날 때 까지 서서 기다리기는 무리일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적당히 에펠탑, 적당히 몽마르뜨 언덕에 가서 사진이나 한 두어 장 찍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온다니 별로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또 그만큼 기억에 남을 지도 모른다. 아예 다 집어 치우고, 어디 포도주나 싸게 파는 집에 가서 버터에 구운 달팽이와 함께 술이나 진탕 마시다가 가면 그게 더 파리 같은 거라고 마음을 고쳐 먹고 싶었다. 정말 몇 번씩 돌아 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세상에 용기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내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관광객은 어디서인가 몰려 들어 그 줄의 길이를 또 늘리고 있었다. 잠깐 넋을 놓고 있다 보니, 한 사람 더 서나 덜 서나 별 차이도 없을 것 같던 그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넋을 놓기 전 잠깐 그때보다 더 한층 눈에 뜨이게 길어 보였다.

 

그리고 기운이 빠져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내 눈에 루브르 박물관의 외벽에 서 있는 조각상들이 보였다. 광장을 굽어 보고 있는 요란하게 장식한 세밀한 조각상들이 높다란 건물에 서 있었다. 그 숫자는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지붕의 한 구역과 모퉁이 마다 커다란 사람 모양이 조각 되어 올려져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로 가는 통로의 지붕이 되는 아치에도 청결과 장 건강을 기원하는 여신처럼 보이는 화려한 조각이 있었다. 그 많은 조각들 중에는 가까워서 얼굴 표정까지 잘 보이는 것도 있었고, 까마득히 먼 입구 쪽과 가까운 조각상은 어떤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도 잘 알 수 없을만큼 멀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조각들이 하나 하나마다 다들 한 가지 씩 의미와 사연이 있어 보였다.

 

나는 결국 그 줄의 맨 끝에, 줄이라는 것에서 가장 나쁜 자리이지만 나에게는 그래도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자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위치에, 서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용기를 내어야 하는 행동이었으면서도 마치 무엇인가에 패배 당하여 비겁하게 굴종하는 것과 같은 기분을 주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파리에 머무는 시간의 대부분을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줄을 서서 보냈다. 줄을 서 있는다는 것은 가만히 서서 내 앞의 사람이 앞으로 걸어 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설명으로 써 놓는 것 보다 직접 행동으로 해 보면 훨씬 더 재미가 없는 행위이다. 대체 얼마나 기다리면 이 줄이 다 줄어들 것인지 계산해 보기가 두려울 만큼 줄은 천천히 움직였고, 그렇다고 달리 뭐 할 수 있는 일이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저 멀리 줄을 한바퀴 돌아 내 옆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만해도 이미 나와는 다른 경지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 사람 옆에도 한바퀴 더 휘감은 줄이 있다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막막함은 커져서 두려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내 옆자리 사람 중에 어느 비참해 보이는 한 영감님은 그나마 조금 편하게 줄을 기다려 보겠다고, 낚시터에서 쓸만한 접이 의자를 하나 들고 와서 거기에 앉아 줄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런데 접이 의자를 자리 잡게 하고 조금 편하게 앉았다 싶으면 딱 한 두 걸음 더 옮겨 가야 할 만큼 줄이 줄어 들었다. 줄은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것이었으며, 그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영감님의 접이 의자를 보며 측은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줄이라는 알 수 없는 덩어리는 사악하게 영감님을 놀리 듯이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면서 영감님의 휴식을 방해했다. 혹시라도 줄이 줄어 들었는데 앞으로 가지 앉고 잠깐이라도 틈을 벌리며 서서 지체하고 있다가는, 자기 보다 뒤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원망 어린 눈길이 마치 다같이 지휘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쏟아졌고, 이 모든 줄서기에 대한 불행의 원인이 오직 그줄 줄어들 때 빨리 안 따라가고 30초 늦게 움직인 그 한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다같이 분개하곤 했다.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줄을 서는 것이 악마 같았던 점은, 과연 이렇게 오래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지금이라도 때려 치우고 그냥 돌아갈까 하고 망설이는 얼마간의 시간 동안에 내 뒤에 또 사람들이 한 뭉텅이 더 줄을 선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내 뒤에 줄을 더 설 때마다, 그것은 나보다도 더욱 가혹한 운명을 견디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증표가 된다. 망설임을 마치고나면 그런 증표는 이미 저만치 줄을 서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남들이 과외를 다 시킨다니까 과외를 시키고, 남들이 다 빚내서 집을 산다니까 빚내서 집을 사듯이, 이미 내 뒤에 줄을 선 사람을 저렇게 만다는 사실 자체가 줄을 서는 것을 포기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줄 서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 간다면, 내 뒤에 서 있는 저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나의 중요한 권리 하나를 강탈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망설이면서도 일단 그래도 줄이라도 서서 망설였던 탓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줄 속에 들어 오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발에 차인 돌이 굴러가다가 멈춰 서면 다른 사람이 또 차기 전에는 계속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 누가 차 주기라도 기다리는 돌처럼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하늘의 햇살은 뜨거웠고 그러면 더워서 땀이 났다. 그늘에 숨어서 줄을 서는 그런 깜찍한 장난 같은 줄서기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광장에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과 널려 있어야 하는 진짜배기 루브르 박물관 등급의 줄서기를 하고 있으면 그 햇빛은 괴로웠다. 모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면, 떠먹는 아이스크림 한통이 있는데 도무지 숟가락을 찾지 못하는 기분이 들 뿐이었다햇빛에 달궈진 내 검은 머리카락은 뜨거웠고, 거기에 닿는 손은 더욱 덥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비가 온다고 했던 그 구름 속으로 햇빛이 잠깐 들어 가면, 8월에 걸맞지 않은 세찬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시원했다. 그렇지만 얼굴과 가슴팍에 닿은 바람에서 시원함을 느끼고 그 바람이 뒤통수와 등 쪽으로 가기도 전에 이번에는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소매의 팔이 시려워 팔짱을 끼며 살갗을 문지를 정도였다. 조금 걷기라도 하면 금방 땀이 나고 춥다는 생각은 사라질 날씨 같기는 했지만, 줄서기는 마귀의 저주가 되어 나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걷거나 뛸 수는 없었다.

 

주위를 돌아 보니, 사람들 중에는 얇지 않은 겉옷을 걸치고 온 남자도 있었고, 반대로 반바지에 민소매 옷을 입고 온 여자도 있었다.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햇빛이 내려 쪼일 때는 괴로워 했지만 바람이 불 때에는 의기양양해 했고, 얇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바람이 불 때에는 달달 떨었지만 햇빛이 내려 쪼일 때는 상쾌해 했다. 이도 저도 아닌 회의 하러 온 직장인의 옷을 입고 있던 나는 모든 순간에 변함 없이 항상 일정한 불쾌감을 느끼며 괴로워 해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운명처럼 내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나를 뒤돌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나 보다도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고 굳센 얼굴이었지만 그녀가 그때 짓고 있는 표정에는 그 당당함과 굳셈을 모두 뚫고 솔직한 난처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인간이 처음으로 문명 생활을 시작한 후로 느껴온 원초적인 난처함이 그대로 솔직하게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 서툰 프랑스어로 무엇인가 질문했다. 그녀의 억양과 화장한 방법을 보고 나는 그녀가 한국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 프랑스어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그녀가 뭘 궁금해 하는 지 아예 그녀가 물어 보기도 전부터 알 수 있었다.

 

화장실 찾으시죠? 저 쪽에 저 큰 여자 조각상 있는 아치 모양 보이시죠? 저 쪽 길로 일단 가셔야 될 거 같거든요. 저기 가까이 쯤에 서 있을 때 표지판을 제가 봤거든요.”

 

운명처럼 그녀가 나를 돌아 보았다고 한다면 진지함의 수위가 어긋나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궁금해 하는 것의 답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그저 길바닥에서 가만히 줄서기만 한다면, 화장실 가고 싶다는 것은 분명히 한두번쯤은 겪어야 하는 문제였다. 나 또한 그 문제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내 대답을 듣고 나서도 그녀는 무슨 말을 바로 하지 못했다. 그녀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줄을 뛰쳐 나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고민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비록 루브르 박물관이 아무리 중요한 관광지라고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줄에 서서, 이 원수 같은 줄에 서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제가 자리 맡아 놓을 테니까 다녀 오세요.”

 

내가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는 인간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목소리로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8월의 햇빛 보다도 강렬한 속도로 내가 알려 준 방향을 향해 돌진해 달려 갔다.

 

얼마 후 그녀는 돌아 왔고, 그녀는 다시 내 앞에 줄을 섰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줄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 화장실을 다녀 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화장실이 약간 찾기 어려우니까, 어떻게 찾아 가라고 나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비장한 목소리로,

 

그런데, 화장실 앞에도 줄이 있어요.”

 

라고 말해 주었다. 소중한 정보였다. 만약 각오를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보았다면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울어 버릴 지도 몰랐다.

 

그렇게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그 30분간 둘이서 나눈 대화는 몇 마디 되지도 않았지만, 그 후에도 그녀와 나는 곧 다른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같이 싸운 전우들끼리는 서로 생명을 지켜 주는 사이였기 때문에 가족처럼 친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와 나는 인간의 존엄을 위해 생명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로 서로 의기투합한 사이였으며,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들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느껴지는을 서로 지켜 준 사이였다. 그게 아마도 그녀와 쉽게 다른 많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이유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도, 이제 앞 사람과 말은 한 마디 하기 시작한 사이였고, 앞으로 몇 시간이 될 지 모르는 남은 줄서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달리 아무런 할 일도 없었으니, 결국 선택은 계속 그냥 줄만 서 있거나 아니면 그냥 줄 서 있는 것 보다는 조금이라도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면 둘이 계속 떠들며 지루함을 달래는 것, 둘 중 하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들려 주는 이야기들은 재미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할 때 발음 하나 하나가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 때문인지,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다 가까운 사람의 친근한 이야기처럼 알아 듣기 쉬웠다. 그녀는 말을 할 때 말하는 단어의 감정에 따라 표정을 많이 바꾸어 가며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그 표정들은무섭다” “슬프다같은 단어를 말할 때에 조차 모두 즐거워 보였다.

 

나는 브뤼셀로 출장을 왔다가 파리에 왔다고 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녀 역시 런던에 출장을 왔다가 파리에 하루 들렀다가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혹시 이야기를 하다가 무례한 말을 하지 않을까 조심조심 말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하는 말들은 전부 솔직한 태도로 보였다. 그녀는 런던에서 해저터널로 기차가 들어 가더니 바다를 지나서 프랑스 땅으로 왔다고 이야기를 했다. 해저터널이라고 해봐야 그냥 터널이랑 똑같은 풍경이었다고 설명했지만, 그러면서도내가 탄 기차 위로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그 위로 배가 떠 다녔으며 나는 미래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양 신나는 말투였다.

 

그리고 그 긴긴 줄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같이 이야기했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의 마포역과 여의나루역 사이에도 한강 아래로 열차가 지나는 구간이 있다는 따위의 맨 강물처럼 싱거워빠진 이야기도 했고, 다니는 직장이 한참 골치 아플 때인데 이번 출장에 이리저리 다니는 시간 동안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뭔가 일을 좀 저질러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씁씁한 이야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느 이야기이건 그냥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 보다는 모두 너무나 재미있었다.

 

마침내 두 인간의 강철과 같은 정념으로 우리 앞의 그 장엄했던 줄은 모두 사라졌고,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 들어 섰다. 머리가 벗겨진 제목을 입은 사람이 우리의 짐을 검사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하고 있는 보안 검사치고는 얼척 없게 대강하는 것 같았다. 검사하는 사람은 우리 가방 안에취급주의 - 핵폭탄이라고 설명이 붙어 있는 상자가 혹시 있나, 정도를 볼 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의미한 순간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침내 줄서기를 완전히 끝내고, 모두가 자유롭게 원하는 곳이면 어느 방향으로든 걸어 갈 수 있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 서게 되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 설 때, 줄서기의 역경이 끝났음을 축하하며 누군가 양 옆에 도열하여 나팔이라도 불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도 박물관 안은 아름다웠다. 우리 보다 몇 배는 위대한 생물들이 걸어 다니는데 적합할 정도로 복도는 넓고 천장은 높았으며 건물 안은 내부에서 스스로 바깥 세계와는 다른 바람을 생겨나게 할 수 있을 만큼 거창했다. 더위도 없었고 추위도 없이 그 모든 귀중한 문화 유산들의 쾌적한 보존을 위해 묵묵히 에어콘이 돌아가고 있었다.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이 대리석 바닥을 디딜 때 소리는 메아리로 울려 퍼져 저마다 공을 들여 장식한 벽면 끝까지 전해졌다.

 

그래도 루브르 박물관에 왔는데 모나리자 구경은 해야죠?”

모나리자 구경하는 줄도 따로 있어서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내가 농담하자 그녀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근엄한 표정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다시 웃으며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정해 주었다.

 

모나리자가 있는 곳을 찾아 가기는 쉬웠다. 모퉁이 구석마다 모나리자가 걸려 있는 방향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하나씩 그려져 있었고, 우리처럼 일단 모나리자부터 구경해 보자는 사람들이 여럿 몰려 다니고 있었다. 더 아름답게 치장 된 계단을 몇 개 오르고, 화려하게 꾸민 창문으로부터 바깥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회랑을 몇 개 지나자 모나리자가 있는 방이 나왔다. 방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고, 멀리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저마다 모나리자로부터는 고개를 돌려 그림을 등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때요?”

신기하긴 하네요. 정말 맨날 책이나 TV에서 보던 게 여기 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그림을 더 지켜 보았다. 그림 속의 알듯말듯한 미소는 나에게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따지면서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모나리자가 있는 방에서 나와 보니, 커다란 그림들이 넓은 복도를 따라 끝없이 걸려 있었다. 다른 나라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져 가면, 보물 중의 보물 전시회를 한다고 온갖 생색을 내며 하나 빌려 주고 대단히 귀한 것이라고 선전했던 것 같은 그런 그림들이 그냥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할인판매 하는 옷처럼 널려 있었다. 이것도 어디서 한 번 봤던 그림이었고, 한 발짝 옮기기도 전에 그 바로 옆에 있던 그림도 굉장히 유명한 그림이었다.

 

그녀와 나는 다리 부분은 말이고 몸통 위로는 사람인 괴물이 붉은 옷을 입은 여자를 납치해 가는 그림과, 로마 군대의 옷을 입은 병사들이 몰려 와 여자들을 공격하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이렇게 세밀하게 진짜처럼 그린 커다란 그림 보는 게 좋아.”

 

그녀가 말했다. 내가 왜냐고 묻자 그녀는,

 

일단 이렇게 그리려면 되게 기술 좋은 사람이 엄청 정성 들여서 오래 그려야 될 것 같잖아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어서 좋기도 하고.”

 

라고 말했다.

 

그리고나서, 이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화가가 저 그림 속의 세상이 어디인가에 정말로 있는데, 그것을 보고 그 순간을 옮겨 놓은 것 같다는 상상을 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어떤 신비로운 세상에는 넓은 초원이 있어서 거기에 하반신은 말 모양을 한 괴물들이 뛰어 놀고 있는데, 그 말 중에 한 마리가 나물 캐든 처녀 중에 도저히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미녀를 발견해서 확 붙들어 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바로 그 세계의 그 순간으로 열려 있는 창문 같은 것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그렇게 보면, 이런 그림 하나 하나가 또 다른 세계의 모습과 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심정과 성격을 하나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 여자들을 공격하는 로마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 전쟁으로 무너지는 도시에서 절망하는 여러 사람들이 느끼는 기분과 지금까지 평화롭게 살아 오다가 당황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 사람들이 바로 다음 순간 경험할 어두운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 앞에는 그런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가 될 그림들이 수백장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그녀와 내가 합의한 것은 이제 그만 구경하고 좀 쉬자는 것이었다.

 

대단한 옛 사람의 정성도 좋고 새로운 세상으로 마음껏 떠날 수 있는 상상도 좋지만 다리가 너무 아팠다. 줄 서느라 너무 힘들었던 탓에 정작 박물관 안으로 들어 오니 구경할 것은 많지만 구경하러 다닐 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조용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는 곳을 찾아 아무 그림도 걸려 있지 않은 복도 한 켠으로 갔다. 우리는 같이 나란히 자리에 앉았고, 동시에 힘든 다리를 쉬게 될 때 탄식처럼 나오는--”하는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입이 아니라 다리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먹을 쥐어 다리를 몇 번 두드렸고, 털썩 주저 앉으며 흩날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 보다가 예의 없어 보일 까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눕는 것처럼 등을 기댔고, 건물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호사스럽게 장식된 박물관 건물인 만큼, 그 천장에도 번잡스러울만큼 빽빽하게 여러가지 장식들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천장 모퉁이에 진짜처럼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한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 색깔은 뽀얗게 맑게 간 대리석 색깔이었고, 날개를 달고 어디인가로 날아갈 듯한 모습이었다. 무거운 돌을 깎은 조각이지만 옷자락은 바람에 하늘거리며 흩날리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조각이었다. 일부러 돌로 만든 조각으로 가벼운 옷자락을 표현하면서, 더 조각의 솜씨를 과시하고 한편으로는 원래 이게 돌이라는 것을 잊게 할 만큼 가벼운 동작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 있는 그림이나, 전시해 놓은 조각상 못지 않게 그냥 건물 장식으로 여기 붙어 있는 조각도 엄청 잘 만든 거네요.”

저건 진짜 멋있다.”

저게 그냥 욕실에 타일 붙여 놓듯이 저렇게 이 건물 안에서는 흔하게 붙어 있지만, 사실은  저것도 어떤 조각가 한 사람이 자기 예술이라고 열심히 깎아 놓은 거 잖아요.”

 

그녀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보며 말했다. 나는 옛날에는 저런 조각을 건물 안팎에 붙이는 게 흔했지만, 요즘은 건물을 짓거나 옛날 건물을 복원할 때 인건비가 비싸서 저렇게 정교한 조각상을 달아 놓는 것은 하기 어렵다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3차원 프린터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3차원 모델을 컴퓨터로 만들어 놓으면 그대로 기계가 자동으로 돌을 깎는 기술이 이제 널리 퍼지고 있고, 그렇게 되면 3차원 모델의 설정만 조금씩 바꾸면 다양한 크기, 다양한 자세의 조각상을 얼마든지 찍어낼 수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저런 조각상들로 장식을 하는 것이 곧 다시 유행할 거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지난 1주일 동안 회의에서 이야기했던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조각상은 볼 수록 아름다웠다. 그녀는 조각상을 보고 감탄한 후에, 아주 만족스러운 것을 보았다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에게로 고개를 돌려 1초에서 3초 정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헤어진 그녀가 예전에 유기체 행동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동물들이 무엇인가를 볼 때 생기는 본능에 대해 설명 해 주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사마귀는 초록색 메뚜기를 보면 누가 그게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고 어디에서 배우지 않았더라도 그 형체를 보고 그것을 바로 공격해 잡아 먹는다. 어떤 새들은 꿀벌의 줄무늬를 보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습인데도 그것을 두려워하여 피한다고 한다. 어떤 형체는 따져서 판단하거나 계산해서 궁리하기 전에 그보다 더 깊숙한 본능을 움직이는 모습으로 동물의 몸 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도 사람을 갑자기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어떤 모습이 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그림이나 조각들 중에 우연히 그런 형체 중에 하나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저 천장에 있는 여신은 날개가 있으니까 하늘을 막 훨훨 마음대로 날아 다닐 수 있겠다. 좋겠다.”

 

그녀는 혼자 말을 했다. 나는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런데 그런데도 계속 저렇게 천장에만 붙어 있으니까, 너무 답답하고 싫기도 하네.”

 

말을 마치고 그녀가 나를 다시 보았다. 그녀의 눈은 안개를 헤치고 나온 것 같았고, 나는 아주 새로운 감정이 신적인 힘으로 물벼락을 맞는 것처럼 세차게 지나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 또한 아주 비슷한 느낌을 지금 받고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나의 파리 여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죽도록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그림 석 장을 보고 복도에 앉아 끝까지 오래오래 천장이나 올려다 본 것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나는 서울에 돌아 와서도 그날을 잊지 못했다. 어디서건 줄을 볼 때 마다 나는 파리 생각이 났다.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극장의 매표소 앞에서, 줄이 있는 곳이면 나는 그날 파리에서 거기에 서 있던 심정과 그날의 갖가지 생각과 기분을 떠올렸다. 그 줄에 서서 줄이 줄어들 때 까지 나는 파리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출근 시간 붐비는 환승역 지하철 개찰구의 줄이 몽땅 줄어들 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내 차례가 왔는데도 뭘 해야 되는 지를 못 떠올리고 허둥거린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나서, 나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그녀에게 e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을 e메일로 보내 주기로 했으니까, 사진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만나자고 청해 볼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날 그 날개 달린 여신의 조각상 아래에서 우리는 뭔가를 느꼈다고 나는 믿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보니, 그녀가 보낸 e메일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녀가 나를 찍어 준 사진을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그날 파리는 매우 힘든 하루였지만 그보다 훨싼 큰어떤 것을 느낀 하루라고 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고, 그녀의 헤어진 전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기로 결심했고 덕택에 지금은 다시금 그 전 남자친구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는고마웠다고 하는 마지막 말을 읽을 때는 갑자기 그저 허무, 허무, 허무라는 말만 반복되는 무슨 허무한 노래가 환청처럼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십년 치는 더 멍청해진 것 같은 기분으로 멍청히 한참 허무하게 있자니, 문득 그날 아침 파리에서 처음 텔레비전을 켰을 때 나왔던 그 여자는 왜 울었을까 궁금해졌다. 아마도 평생 모른채 그냥 내 인생은 끝날 것 같았다.

 

- 2014, 샤를 드골 공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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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바람별빛 14.09.01 00:48 댓글

    결국 감정의 여신은 찾지 못하고 새로운 연인을 만나나 했더니 그녀는 전 남자친구에게 가고.

    주인공만 허무해진 것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냥 눈에 띈 오타 알려드립니다. ^^;

    그리고 나에게 는 -> 그리고 나에게는

    훨싼 -> 훨씬

  • 바람별빛님께
    No Profile
    곽재식 14.09.01 06:49 댓글

    몇 달 동안이나 덧글 없는 글만 올리게 되어, 한참 덧글에 목말라 있었는데, 이렇게 반가운 덧글에 감사 인사 올립니다. 다음 호에는 좀 일찌감치 마감전에 작업해서 느긋하게 오타도 잡고 해 보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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