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아이 무서워서

2014.03.01 15:3803.01

무서워서

 

 


“아직 안 끝난 거야?”
“오잉, 은미! 내일 온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곧 끝나. 행주만 삶으면 돼. 그런데 왜 느닷없이 오늘 왔어? 나 일 끝나고 다른 데로 새나 안 새나 감시하기로 한 거야! 햐, 치밀한데! 하마터면 감시망에 걸려들 뻔했어!”
“감시는 무슨, 내가 그렇게 한가한 여자로 보여? 마음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사람이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마음이 아니라.”
“그런 거 일일이 지적 안 해줘도 돼! 대충 뜻만 전달되면 되지!”
“전달이 안 돼!”
“지적해 줬잖아! 전달이 됐으니까 지적을 해준 거 아냐! 아이, 또 소리 지르게 만드네.”
“그러네. 대충 알아들었으니까 내가 지적을 한 거였네. 미안해, 소리 지르게 만들어서.”
“그것만 미안하다고 하면 안 되지. 이젠 막 얼렁뚱땅 넘어가기까지 한다! 아, 하마터면 방금 나 사과 받고 화 풀 뻔했어. 대래 너 은근히 고단수다!”
“…….”
“뭐해, 빨리 사과 안 하고?”
“생각 중이잖아.”
“무슨 생각?”
“은미 너한테 사과할 게 또 뭐가 있을까, 그 생각.”
“아, 그 생각! 생각 중인데 방해해서 미안.”
은미는 일부러 주방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창가 쪽 테이블로 갔다. 의자에 앉아서 힐끔힐끔 대래를 훔쳐보았다.
“생각하는 데 방해 돼. 잠깐 나가 있어줘. 부를 때까지 들어오면 안 돼.”
대래는 주방에 있는 간이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은미는 조용히 가게 밖으로 나갔다. 다소 추위가 주춤해졌다고는 해도 지금은 2월, 엄연한 한겨울이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밤공기는 차가웠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잔뜩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도 은미는 가게 밖에 우두커니 서서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가게 안을 힐끔거리지도 않았고, 추위에 몸을 떨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었다. 마치 동작이 멈춘 태엽 감는 인형 같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은미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은미는 그런 시선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저 여자 왜 저래? 설마 저 상태로 잠든 걸까, 아니면 죽은 걸까?” 이런 수군거림도 듣지 못했다.
도대체 대래는 언제까지 생각에 잠겨 있을 작정일까. 안 떠오르면 포기하면 될 텐데, 여전히 변비에 걸린 사람처럼 간이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포기를 모르는 성격인가.
가게 출입문에는 이미 ‘CLOSED’ 팻말을 걸어두었다. 영업 종료. 하지만 대래는 가게 정리도 하다 말고 주방에 앉아 있었다. 아직 영업이 끝난 게 아닌가, 그렇게도 보였다. 하지만 영업은 끝났는데, 그러면 가게 조명이라도 좀 꺼둘 것이지. 필요하다면 주방에만 좀 어둡게 켜놓고. 그렇게 하지를 않아서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은미는 가게 밖, 문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느꼈나! 조금 전까지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는데, 남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어깨와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어깨와 머리를 흔드는 건지, 아니면 어깨와 머리를 떠는 건지 잘 구분이 안 갔다. 이도 달그락 달그락 거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사람 같기도 했고, 화를 참는 사람 같기도 했다. 하여튼 너무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저, 아직 영업 안 끝났나요? 안 끝났으면 음료 두 잔만 테이크아웃 해가려고요.”
여자가 대래에게 그렇게 말했다. 말하고 나서 옆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저기요, 아직 영업 안 끝났으면…….”
“잠깐만, 내가 말할게. 사람이 들어왔으면 무슨 반응을 보여야지, 지금 뭐하는 거야, 이 사람!”
남자가 여자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언성을 높이는 걸로 봐서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자기야, 왜 소리까지 지르고 그래. 그냥 나가자. 장사 끝났나 봐.”
“아니, 끝났으면 끝났다고 말을 하면 되지! 우리가 뭐 무조건 음료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에이, 가, 가. 그냥 얼른 가자. 저 사람 좀 이상한 것 같아.”
그렇게 여자가 남자를 억지로 끌고 가게 밖을 나가려고 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대래는 주방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어머, 깜짝이야! 이 여자는 또 뭐야!”
여자가 막 남자의 몸을 끌어당겨서 가게를 나가려는데,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은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가로막은 채, 이번에는 마치 자기 일에 충실한 문지기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서.
“저기요, 여기 영업 끝난 것 같아요. 우리가 들어왔는데도 저 남자가 꿈쩍을 안 하시네요. 그러니까 그쪽도 다음에 오세요. 아니면 이 가게 아예 안 오셔도 되고요. 저 남자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저렇게 가만히 있어요. 아는 체도 안 하고. 그쪽도 괜히 음료 주문했다가는 화만 나실 거예요. 그냥 가시는 게 좋아요.”
그러면서 여자가 은미 앞까지 왔다. 밖으로 나갈 거니까 비켜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은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막고 서 있었다.
“저기, 좀 비켜주실래요?”
여자가 약간 짜증 섞인 말투로 은미의 정수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 정말 왜 이러니. 짜증나.”
“그, 그러니까 너, 너희가 자, 잘못한 거잖아. 여, 여기 문, 무, 문 닫았다는 표, 푯말 걸어놨잖아. 그럼 여, 여기 문 다, 닫은 거잖아. 그, 그런데도 너, 너희가 머, 멋대로 들어온 거, 거잖아. 너, 너희가 자, 잘못한 거잖아. 그, 그런데 왜, 왜 너희가 화, 화를 내! 왜, 왜 아무 죄, 죄도 없는 대, 대래한테 화, 화를 내! 너, 너희들이야말로 짜, 짜증나!”
은미는 여전히 가게 바닥을 보고 있었다. 바닥을 쳐다보며 여자에게 말했다.
“뭐래, 이 여자!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아, 진짜 여기 왜 이러니! 자기야, 얼른 가자! 나 여기 계속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아.”
여자가 문을 가로막고 있는 은미의 몸을 밀쳤다. 아니, 밀치려고 했다. 힘을 줘서 은미의 몸을 밀었다. 딱 보기에도 여자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 은미, 하지만 은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미의 몸을 밀치려 했던 여자가 휘청거렸다.
“사, 사과해. 대, 대래는 지금 새, 생각 중이니까, 대, 대신 나한테 사, 사과해. 그, 그럼 내가 이, 이따가 대, 대래한테 저, 전해줄게. 어, 얼른 사, 사과해. 그, 그럼 그냥 보, 보내줄게. 아, 안 보이게 해줄게. 두, 둘 다 아, 안 보이게 해줄게. 야, 약속할게. 내, 내 몸에 소, 손대도 아, 안 보이게 해줄게. 야, 약속할게.”
은미의 말에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까 휘청거린 경험이 있어서 다시 은미를 밀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 여자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뭐해, 자기야! 저 여자 빨리 비키라고 해! 아니면 아예 밖으로 끌어내 버리든가! 여기 진짜 짜증나! 도대체 뭘 안 보이게 해주겠다는 거야, 저 여자는!”
“그래, 여기 좀 이상하다. 저 여자는 계속 저렇게 땅만 쳐다보고 있네. 남자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고. 둘 다 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어우, 됐어! 그런 얘기 그만 하고, 빨리 저 여자 좀 어떻게 해봐!”
“알았어, 알았어. 어이, 이봐 아가씨! 우리 그냥 갈 테니까 좀 비켜주지? 그렇게 문 앞에 딱 버티고 서 있으면 곤란해. 자, 자, 비켜 비켜.”
남자가 은미의 어깨에 손을 대려고 했다. 순간 은미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 안 돼. 지금 내, 내 몸에 소, 손대면 아, 안 돼.”
은미의 말에 남자가 잠시 주춤했지만, 옆에서 여자친구가 툭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기어이 팔을 뻗어 은미의 몸에 손을 댔다.
갑자기 천장에 매달려 있던 형광등이 치지직 거리면서 꺼졌다. 그리고 암흑. 완전히 새까만 암흑.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건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지금이 밤 열 시 가까이 됐다지만, 천장에 매달린 형광들이 꺼졌다고 주변이 완전히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불이 꺼져도 흐릿하게나마 사물은 보인다. 그리고 금세 어둠에 익숙해지면 대충 다 보인다. 하지만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다. 밤에 방에서 불을 끈 채 손으로 양쪽 눈을 꾹 눌러보자. 암흑이다. 완전한 암흑이다. 새까만 암흑. 지금이 그렇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 보이지 않는다. 보일 리가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일 리가 없는데, 남자만 혼자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성대가 찢어진 사람처럼,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진 상태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은미의 몸에 손을 댄 남자만.
“으, 으악! 으악! 으악! 뭐, 뭐야! 너, 뭐야! 저리 가! 오지 마! 오지 마! 저리 가! 으악! 사, 살려줘! 저리 가! 저리 가! 살려주세요! 사, 살려주세요! 제, 제발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 아니, 주, 죽여주세요! 주,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불이 들어왔다. 가게가 다시 환해졌다. 모든 게 선명하게 보인다. 은미의 몸에 손을 댔던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혼자 성대가 찢어져라 소리질렀던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선명하게 보인다.
“봤어. 봤어. 보였어. 분명히 봤어. 분명히 보였어. 진짜 보였어. 그래, 진짜 보였어. 진짜 봤어. 봤어. 봤어. 봤어. 봤어. 죽인댔어. 나를 죽인댔어. 그래서 살려달라고 했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죽이지 않는다고 했어! 안 죽인댔어! 안 죽인댔어! 대신, 대신 계속 나타날 거라고 했어. 매일 매일 나타날 거라고 했어. 안 죽이는 대신 매일 매일, 계속 계속 나타날 거라고 했어. 그래서 죽여달라고 했어.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어. 죽는 게 나아. 죽는 게 나아.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또다시 볼 바에야 죽는 게 나아. 죽는 게 나아. 죽여주세요. 누가 저 좀 죽여주세요. 이봐요, 저 좀 죽여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저 좀 죽여주세요. 죽이세요. 저를 죽이세요. 또 나타날 거예요. 저 좀 죽여주세요. 제발이요. 제발 저 좀 죽여주세요. 어엉, 어엉, 어엉, 어엉, 제발이요! 죽여주세요!”
남자는 울고 있었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체구가 결코 작지 않은 어른이 울고 있었다. 속으로 삼키는 울음이 아니라, 그러니까 어른 같은 울음이 아니라 아이 같은 울음, 무서운 걸 봤을 때 기겁을 하듯 숨이 넘어갈 듯 토해내는 아이의 울음, 남자는 그렇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운 걸 봤으면 오줌까지 지리면서. 오줌을 지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오줌을 지리면서. 바지가 오줌에 젖어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것도 모를 테고.
우웩!
오줌까지 지리면서 엉엉 울어대는 남자를 보자마자 보인 여자의 첫 반응이었다. ‘자기 괜찮아? 왜 그러는데?’ 적어도 이런 반응이 나와줘야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이 비교적 정상적일 때 나오는 반응일 테고, 지금은 상황 자체가 상당히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자의 반응을 탓할 수는 없다. 다 큰 남자가 느닷없이 오줌을 지리면서 울고 있다니, 그것도 숨이 다 넘어갈 듯이 엉엉 울고 있다니, 게다가 모르는 여자를 붙들고 죽여달라고 조르다니,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죽여달라고 조르다니, 이런 낯선 광경, 낯선 모습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자기 남자친구라서가 아니다. 어른도 저렇게 겁에 질려 아이처럼 기겁을 하며 울 수 있구나. 실성한 사람 같아.
우웩! 그러니까 이건 몸이 느끼는 생리적 거부 반응, 멀쩡하던 사람이 단 몇 초 사이에 갑자기 실성을 해버렸으니, 그 거부감이 상당히 컸으리라.
반면 은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인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실성한 남자의 모습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관심도 없는데 자꾸 남자가 은미에게 애원을 한다.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제발 죽이세요. 또 나타날지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제발 죽여주세요. 또 나타날지 몰라요. 죽는 게 나아요. 그걸 보느니 죽는 게 나아요. 제발 죽여주세요.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달라고!”
하지만 은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동작이 멈춘 태엽 감는 인형 같았다.
“죽여달라고! 죽여달라고!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달라고! 죽여달라고!”
여전히 남자가 울며불며 애원을 한다. 오줌뿐만이 아니라 똥물까지 질질 흘리면서. 그런 남자 옆에서 여자는 계속 우웩거린다. 우웩! 우웩! 우웩! 물론 대래는 아직 주방에 있는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가게에서 벌어지는 소동이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대단한 집중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어, 대래가 아주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아주 살짝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물론 이 정도 소란에 아주 약간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조차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아주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은미가 놓치지 않았다. 비록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몸의 온 신경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대래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대래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다,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대, 대래가 불편해 해. 다, 당신이 대, 대래의 생각을 바, 방해 해. 대, 대래를 바, 방해하면 안 돼. 아, 아무도 저, 절대로 바, 방해하, 하면 아, 안 돼.”
은미가 남자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팔을 뻗으면 닫을 수 있는 거리까지. 그리고 주저 없이 팔을 뻗어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은미가 직접 남자의 몸에 손을 댔다.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다시 불이 꺼짐과 동시에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치지직 거리며 불이 켜졌다.
또다시 우웩! 우웩! 우웩! 여자는 여전히 생리적 거부 반응을 격렬하게 표현했다.
“시, 시끄러워. 조, 조용히 해. 더, 더 이상 대, 대래를 바, 방해하지 마. 그, 그럼 다, 당신 몸에도 소, 손을 대, 대겠어.”
읍! 읍! 읍! 여자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턱이 쑥 들어갈 정도로 입을 세게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헛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눈물범벅에 콧물범벅. 헛구역질을 멈추려고 입을 너무 세게 틀어막은 탓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마와 목에는 핏줄이 살을 뚫고 나올 듯 도드라졌다.
여자는 기어이 못 참겠는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웩! 우웩! 우웩! 이번에는 헛구역질이 아니라 진짜로 쏟아내고 있었다. 좀처럼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문 밖에서 계속 쏟아내고 있다. 아주 시원하게 쏟아내고 있다.
뭘 봤을까. 뭘 봤기에 여자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걸까. 그리고 남자는 왜 아까부터 혼자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걸까.
“와하핫, 생각났다! 생각났어! 히야, 내가 이런 착각을 다 하다니, 아무래도 미쳤나 봐. 안 그래도 손님들이 요즘에 나 보고 정신 좀 똑바로 차리라고 막 화내고 그러는데, 내가 좀 정신을 똑바로 못 차리기는 하나 보네. 은미야, 미안해. 사과할게.”
“왓, 드디어 고민 끝났구나! 좋았어, 그럼 뭘 사과하겠다는 건지부터 말해 봐. 우선 듣고 나서 받아줄지 말지 결정할게.”
은미는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다리를 꼬고, 등을 의자등받이에 기대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고.
“아, 네, 그러니까 제가 이은미한테 사과할 건 말이죠, 그러니까 말이죠, 음,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아, 긴장하지 말고 편히 얘기해. 거기 주방 의자에 앉아서 얘기해도 되는데 뭘 굳이 그렇게 차렷 자세까지. 뭐 아무튼 그런 태도 좋아. 반성의 기미가 보여. 결정하는 데 참고할게. 뭐해, 계속 해.”
“아, 네, 그러니까 말이죠, 저 노대래는 제 여자친구인 이은미한테 사과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뭘 사과를 하느냐, 이게 궁금하실 겁니다. 말씀드리죠. 제가 약속 날짜를 착각했다는 거죠. 같이 저녁 먹고 술 마시기로 한 날을 착각했다는 거죠. 저 노대래는 그게 내일, 그러니까 금요일인 줄 알았다는 거죠. 하지만 그건 제 착각입니다. 금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입니다. 그러니까 저 노대래가 제 여자친구 이은미와 함께 저녁 먹고 술 마시기로 한 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인 것입니다. 이 점, 제 여자친구 이은미한테 사과합니다. 제가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말씀드리자면, 제가 원래 착각을 좀 잘하는 편입니다. 일례로, 청바지를 사러 갔다가 깜빡하고 청치마를 사기도 합니다. 제가 여자라고 착각을 한 거죠. 얼마 전에는 밤에 와서 가게 문을 연 적도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문 닫고 집에 갔고요. 그 날은 장사가 전혀 안 됐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오늘 왜 이렇게 장사가 안 되지! 제가 착각했던 겁니다. 아침에 와서 문 열고 밤에 닫아야 하는데, 착각해서 거꾸로 했던 겁니다.”
“그런 착각들은 누구나 하는 거잖아. 나도 얼마 전에 한 적이 있어. 학교 운동장에서 머리카락을 하얗게 염색한 학생을 발견했잖아. 그래서 내가 그랬어. 학생이 머리를 그렇게 염색하고 다니면 어떻게 하냐고. 오늘 당장 원래대로 해놓으라고. 그러면서 벌로 운동장 세 바퀴를 돌라고 했거든. 그런데 그 학생이 글쎄 자기는 학생이 아니라는 거야. 교장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다섯 바퀴 돌라고 했어. 들고 있던 플라스틱 자로 머리통을 막 때리면서. 그런데 우리를 보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와서 말리더라. 왜 말려! 너희들도 같이 돌래! 막 소리쳤지. 아무튼 다섯 바퀴 다 돌기는 했어. 물론 나중에 나도 교장 선생님 지시로 운동장 일곱 바퀴 돌기는 했지만. 그 교장 선생님 은근히 뒤끝 있는 사람이더라고. 두 바퀴나 더 돌게 하고. 아무튼 이런 착각은 누구나 하잖아.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착각이 있지. 나와의 약속. 대래 너와의 약속. 착각을 잘한다고 해서 나와의 약속까지 착각했다는 건 있을 수 없어. 정상참작이 안 돼.”
“그렇겠지? 나도 그럴 줄 알았어. 아, 큰일이네. 그럼 사과 안 받아주는 거야?”
“안 받아주면 삐질 거야?”
“에이, 나 그런 거 가지고 안 삐져. 대신 좀 마음에 담아두기는 하겠지. 아마 그거 오래 갈 거야. 티는 안 내겠지만.”
“아, 큰일이네. 그럼 다음에 내가 착각할 때 앙갚음하겠네.”
“당연하지. 그러려고 마음에 담아두는 건데.”
“음, 그럼 잠깐 고민 좀 해도 돼? 대래 네 사과를 받아줄지 말지에 대해서.”
“음, 그래, 고민해 봐. 대신 나중에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걸로 끝이다! 번복하기 없기야!”
“알았어. 번복 안 할게. 고민 허락해 줘서 고마워.”
은미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팔짱을 풀고, 앉은 자세 그대로 양팔을 허벅지 위에 올린 채 허리를 완전히 굽혔다. 생각에 잠겼다. 아니,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가게 밖에서 여자가 양팔을 휘휘 저었다. 우웩! 우웩! 하고 속에 걸 시원하게 쏟아내던 여자였다. 여자를 발견한 순찰차가 가게 앞에서 멈췄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경찰 한 명과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 경찰 한 명이 순찰차에서 내렸다.
젊은 경찰이 여자에게 다가와 거수경례를 했다.
“혹시 신고하신 분이십니까?”
“네, 제가 신고했어요. 저 안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거든요.”
그러면서 여자가 가게 안을 가리켰다. 의자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은미, 그 옆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대래, 그 둘이 있는 가게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 가게에는 이 둘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더 있기는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함께 들어왔던 남자친구.
여자가 그 남자친구를 보더니 다시 우웩! 우웩! 속에 걸 시원하게 게워내기 시작했다. 순발력 좋은 젊은 경찰이 얼른 자리를 피했다.
“어라, 이봐 박 순경, 저기 가게 안에 있는 남자 있잖아, 저 남자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좀 이상해 보이지 않아?”
중년 경찰의 말에 젊은 경찰도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했다.
한 여자는 의자에 앉아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한 남자는 그 여자 옆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역시 움직임은 없었다. 그리고 한 남자, 둘 이외에 한 남자가 더 있었는데, 그 남자가 이상했다.
“이봐, 박 순경! 당장 저 남자 끌어내! 저거 혹시 미친놈 아니야!”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젊은 경찰 박 순경이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가게 문이 닫히지 않도록 손으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기척이 없다. 박 순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중년 경찰은 짐짓 딴 짓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들어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뭐야, 씨팔. 또 저래. 같이 현장 출동하면 항상 저래. 항상 저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딴 짓만 해. 그리고 보고할 때는 지가 다 처리한 것처럼 꾸며대고. 완전 재수.’
젊은 경찰 박 순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잡고 있던 문 손잡이를 놓았다. 그제야 중년 경찰이 문 가까이 다가와 가게 안을 살폈다. 보고를 하려면 현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영업 끝나신 것 같은데 이렇게 허락 없이 들어왔습니다. 저기 밖에 있는 여자 분이 신고를 해서 말입니다. 대충 현장을 보아 하니, 두 분이 저 남자 때문에 좀 겁에 질려 계신 것 같습니다. 혹시 저 남자가 들어와서 무슨 행패라도 부렸습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고요? 아니면 기물을 파손했다거나 뭐 그런 거 있으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젊은 경찰 박 순경이 대래와 은미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젊은 경찰 박 순경의 말에 둘은 아무 대구도 하지 않았다. 박 순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아, 이거, 두 분이 충격이 크셨나 봅니다. 저 남자 모습이 좀 이상하기는 하네요. 그래도 뭐라고 말씀을 해주셔야 저희가 일처리를 수월하게 할 수 있는데요. ……음, 얘기는 그럼 두 분 진정이 되신 다음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저 남자부터 이곳에서 끌고 나가겠습니다. 그게 두 분한테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 순경이 몸을 돌려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도중에 가게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년 경찰 김 경사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다. 김 경사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통화하는 척했다. 물론 고개를 돌려 박 순경의 시선도 피했다. 중년답지 않은 뛰어난 순발력이었다.
“아, 그 새끼, 갑자기 돌아보는 바람에 깜짝 놀랐네. 하마터면 꼼짝없이 가게 안으로 끌려들어 갈 뻔했어. 저건 꼭 지 혼자 안 하고 나까지 끌어들이려고 한단 말이야. 그래서 같이 출동하면 한 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어. 아, 정신이 그냥 확 드네.”
중년 경찰 김 경사가 휴대폰을 들고 혼자 떠들고 있었다.
박 순경은 체념한 듯 몇 번 고개를 젓더니 혼자 남자 곁으로 다가갔다.
역시 이상했다.
남자는 가게 구석에 등을 보이고 선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며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박 순경은 일단 등을 보이고 선 남자의 몸에 손을 대는 대신,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들어보았다.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않을 거야. 방해하지 않을 거야. 방해하지 않을 거야. 방해하지 않을 거야.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안 건드릴 거야. 안 건드릴 거야. 안 건드릴 거야. 안 건드릴 거야.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난 이제 괜찮아. 난 이제 괜찮아. 난 이제 괜찮아. 난 이제 괜찮아. 난 이제 괜찮아. 방해해도 돼. 방해해도 돼. 방해해도 돼. 방해해도 돼. 방해해도 돼. 방해할 거야. 방해할 거야. 방해할 거야. 방해할 거야. 방해할 거야. 건드릴 거야. 건드릴 거야. 건드릴 거야. 건드릴 거야. 건드릴 거야.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방해해도 돼. 방해해도 안 보여. 건드려도 안 보여. 괜찮아. 괜찮아. 이젠 안 보여. 이젠 안 보여. 이젠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
도대체 이 남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혼자 뭘 이렇게 중얼거려. 왜 벽 보고 중얼거려. 두 주먹은 왜 이렇게 꽉 쥐고 있어!
박 순경이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전혀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혼자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 그런데 이거 무슨 냄새야. 이 남자 이거 똥이라도 싼 거야! 도대체 뭐야 이 새끼!
“이봐요, 아저씨! 여기서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박 순경이 남자의 양 어깨에 손을 댔다. 그리고 남자의 몸을 자기 쪽으로 휙 돌렸다.
“으, 으악! 으악! 으악! 뭐야 이 새끼 이거! 아 씨팔, 놀래라. 김 경사님! 김 경사님! 이리 좀 와보세요! 이 새끼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에요! 김 경사님! 아, 이리 좀 들어와 보세요!”
남자의 두 눈에는 눈알이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그 속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꽉 쥐고 있는 두 주먹. 남자의 눈알은 그 안에 있었다. 이미 으깨진 상태로. 그리고 계속 중얼중얼중얼.
박 순경의 고함 소리에 여자가 또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물론 순발력 뛰어난 김 경사는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뭔데?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김 경사가 마지못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왓, 깜짝이야! 아, 놀래라, 씨! 뭐야, 이거! 이 새끼 이거 눈알 왜 이래! 이거 지가 뽑은 거야?”
“지가 뽑았겠죠. 손에 눈알 쥐고 있잖아요. 다 터져버렸겠지만. 저거 완전히 미친놈 아니에요? 왜 남의 가게 들어와서 지 눈알을 뽑고 지랄인지 모르겠네! 아, 얼마나 놀랐는지. 아, 아직도 심장 뛰어. 김 경사님, 저 새끼 저거 어떡하죠? 파출소 데려 가야 돼요?”
“그러게. 아, 미치겠네. 저 새끼를 저거 어떻게 차에 태우냐! 아, 눈에서 저거 피나는 거 봐. 아이 씨, 징그러워. 아, 미치겠네. 그런데 쟤 혼자 저기서 뭐라는 거야?”
“몰라요. 계속 저렇게 혼자 중얼대네. 뭐 건드리지 말라나, 방해하지 말라나. 아, 진짜 건드리고 싶지 않다, 건드리고 싶지 않아.”
“그런데 여기 두 분은 뭐라고 하셔? 뭐 들은 얘기 없어?”
“네. 물어봐도 아무 말씀들을 안 하시네요. 두 분 다 많이 놀라신 모양이더라고요. 정신적으로 충격을 좀 받으신 것 같아요. 두 분 다 저렇게 꼼짝도 안 하세요. 저 두 분도 일단 파출소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저렇게 그냥 놔두면 좀 위험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음, 그럼 일단 저 두 분부터 차에 태우자고. 그런 다음에 지원 요청을 좀 해야겠어. 저 미친 새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일 날 거 같은데.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며? 저거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 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 두 분 우선 차에 태우겠습니다.”
박 순경은 대래의 몸에 손을 대려다가 멈췄다. 은미 먼저 순찰차에 태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저기, 많이 어지러우세요? 혹시 일어설 수 있으시겠어요? 여기 상황 정리될 때까지 일단 파출소에 가 계시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그러자면 순찰차에 좀 타셔야 할 텐데, 힘드시면 제가 부축해 드리고요.”
박 순경이 막 은미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안 돼! 안 돼요! 그 여자한테 손대면 안 돼요! 떨어져요! 얼른 비켜요! 그 여자한테 손대지 마세요!”
헛구역질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그새 몰라보게 핼쑥해진 여자가 고함을 지르며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박 순경의 허리춤을 잡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미처 방어도 하지 못한 박 순경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라 넘어질 때의 충격은 상당히 컸다. 꼬리뼈가 가게 바닥을 제대로 찍는 바람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환상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 공포와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박 순경은 그저 너무 아프고 놀라서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버버.
“이 여자 때문이에요! 이 여자 때문에, 이 여자 때문에 제 남자친구가 저렇게 된 거라고요! 이 여자 몸에 손을 대는 바람에, 제 남자친구가 이 여자 몸을 만지는 바람에. 이 여자 만지면 안 돼요. 만지면 어두워져요. 캄캄해진다고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하지만 그 어둠 속에 뭔가가 있어요. 분명히 뭔가가 있어요. 뭔가가 나타나요. 그리고 그게 제 남자친구를 저렇게 만든 거고요. 저 여자에게 손을 대서요. 그러니까 경찰 아저씨도 저 여자한테 손대면 안 돼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 돼요.”
말할 때마다 여자의 입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 때문에 여자가 하는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만 나불대고 닥쳐! 하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그 엄청난 꼬리뼈 통증이 다 사라졌다.
너나 나한테 손대지 마, 너나!
박 순경은 속으로 그렇게 소리치면서 일어섰다. 욱씬거리는 꼬리뼈 때문에 괄약근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저 여자가 아까 뭐라고 지껄인 거야! 여자 몸에 손을 대면 안 된다고 했던가! 자기 남자친구가 저렇게 된 게 다 저 여자 몸을 만졌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여자 몸을 만지면 캄캄해진다고! 그리고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나타난다고! 그게 자기 남자친구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그러니까 뭐야, 저 남자가 가게에 들어와서 저 여자 몸을 멋대로 만졌고, 혹시 거기에 화가 난 이 냄새 나는 여자가 자기 남자친구를 저 지경으로 만든 거 아냐! 순간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남자친구의 눈알을 뽑아버린 거 아냐!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거 같은데! 그럼 미친 건 이 여자잖아, 이거!
저 남자 불쌍하다. 하필이면 이런 또라이 같은 년을 사귀는 바람에 눈알까지 뽑히고. 그 충격으로 저렇게 맛까지 가고. 쟤 이제 어떡하면 좋냐.
“김 경사님, 이거 사건 대충 정리가 되는 거 같은데요! 제 추측대로라면, 이 여자 이거 아주 무서운 여자에요!”
“어, 그런 거 같지? 나도 방금 머릿속으로 정리가 됐어. 딱 그렇게 나오더라고. 햐, 그나저나 박 순경 자네, 제법인데.”
“그런가요. 저도 그럼 슬슬 경찰관의 감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하는 건가요. 기쁜데요, 하하하.”
박 순경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자 김 경사도 따라 웃었다.
“두, 두 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누가 무서운 여자라는 거예요? 왜 저를 가리키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무서운 여자는 제가 아니라 저 여자라니까요! 저 여자 몸에 손을 대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거라니까요! 제 말을 안 믿으시는 거군요! 좋아요, 그럼 경찰관 아저씨가 직접 저 여자 몸에 손을 갖다대 보세요. 저 여자 몸을 만져보세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경찰관 아저씨한테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요. 물론 제 책임은 아니에요. 경찰관 아저씨가 제 말을 안 믿었기 때문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어서요! 어서 저 여자 몸을 만져보세요! 그런 다음 저를 의심하세요. 아니지, 그런 다음 저를 끌고 가세요. 저항하지 않을게요.”
“아가씨가 굳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어차피 저 여자 분 차에 태우려면 부축을 해드려야 합니다.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제발 그 말도 안 되는 얘기 집어치우세요.”
“네, 그러죠. 집어치울게요. 하지만 부디 제 남자친구처럼 저 꼴이 돼도 절 원망하지는 마세요. 뭐 이젠 남자친구도 아니지만요.”
“원망 안 합니다. 아가씨나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경찰관으로서의 소임을 다 하려는 것뿐이니까요. 그래도 안타깝기는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성을 잃지는 마셨어야 했는데요.”
“네, 그러게요. 늘 감정이 앞서서 문제죠. 아저씨, 잠깐 이쪽으로 좀 오세요. 저 경찰관 아저씨가 이 여자 분 몸에 손을 대야 한다네요. 또 한번 이곳은 암흑이 될 거예요. 어쩔 수 없죠. 그게 저 경찰관 아저씨의 운명이니까요. 그런데 참, 아저씨는 이 여자 분하고 어떤 사이신지 모르겠네요. 이 여자 분 굉장히 위험한 분인데,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면서 여자는 대래의 몸에 손을 댔다. 대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여자가 대래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가게 안은 어두워졌다. 칠흑 같은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이봐, 박 순경!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어, 대, 대래. 그래, 아까 이 여자가 대래라고 했는데, 이제 보니까 당신 이름이 대래! 어, 그, 그럼 혹시 당신도 이 여자처럼, 혹시 당신을 만져도 이 여자처럼…….”
여자가 어둠 속에서 뭐라 말을 하다 말았다.
“이봐, 박 순경! 자네 어디 있는 거야! 제발 여기 어떻게 좀 해봐! 출입문이라도 찾아 봐! 이거 앞이 전혀 안 보이잖아!”
중년 경찰 김 경사는 여전히 어둠 때문에 겁에 질려 소리지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없는 것처럼, 눈알을 빼버린 저 남자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보기 위해 꼭 눈이 필요한 건 아니다. 눈알 따위 없어도 된다. 그게 없어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어두워도 보이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기만 하면 볼 수 있다. 뇌만 살아 있으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눈알을 뽑은 저 남자는 정말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 다른 건 못 보고, 그것만 볼 수 있게 됐으니까.
아, 지금은 저 남자 걱정할 때가 아니다. 대래의 몸에 손을 댄 이 여자. 입을 뻐끔거리고 있다. 틀림없이 무언가 본 모양이다.
“왜 다, 당신 얼굴이 보, 보이는 거죠. 이, 이렇게 깜깜한데 왜, 왜 다, 당신 얼굴이. 대, 대래, 대래, 당신 이름은 대, 대래. 왜 다, 당신 얼굴이, 왜, 왜 다, 당신 얼굴이 벼, 변하는 거죠. 으, 으악! 으악! 으악! 으악! 으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여줘! 죽여줘! 죽여! 죽여! 죽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주, 죽여줘요! 주, 주, 주, 주, 주, 죽여줘요!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죽여줘요! 죽여! 죽여! 죽여! 주, 주, 주, 주, 주, 주, 죽여!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주, 죽여! …………………………………………………………………………………………………………………………. 그, 그래도 보여. 그, 그래도, 그, 그래도, 그, 그래도, 그, 그래도 보, 보, 보, 보, 보, 보여. 어엉, 어엉, 어어어엉,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어어어어엉.”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가게 안이 환해졌다.
은미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옆에는 대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둘의 모습은 바뀐 게 없었다.
“으헉! 뭐야 저 여자! 쟤네 왜 쌍으로 저래! 왜 둘 다 눈알들은 뽑고 지랄이야! 유행이야! 박 순경! 저 여자 어떻게 된 거야!”
“으헉! 글쎄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본 게 없어서요. 아무튼 비명은 엄청나게 질러대던데. 둘 다 무슨 암흑 공포증이라도 있는 걸까요? 똥오줌 지린 것까지 똑같네요. 거참 희한하네. 둘 다 눈알은 왜 뽑아, 눈알은.”
여자는 눈알이 들어 있는 손을 꽉 쥔 채, 냉동실에라도 갇힌 사람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여자가 몸을 떠는 건지, 아니면 가게 안이 흔들리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중년 경찰 김 경사는 여자를 쳐다보다 말고, 중심을 잡기 위해 손으로 벽을 짚기까지 했다.
“에잇, 기분이다! 사과 받아줄게!”
은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대래에게 말했다.
“난 좀 쿨한 여자니까, 사과 받아준다!”
“그래, 그래. 은미 넌 쿨하지. 쿨해. 아무튼 잘 생각했어. 고마워, 사과 받아줘서.”
대래가 고개를 들어 은미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

mirror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정도경 플라스틱 2014.05.31
양원영 인생 2014.05.31
해망재 페라리 2014.05.01
곽재식 로봇 반란 32년1 2014.04.30
양원영 효용가치1 2014.04.30
아이 2014.04.30
赤魚 흔한 남자들의 기적 (본문 삭제) 2014.04.30
미로냥 채미가(采薇歌) 2014.04.30
곽재식 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 (본문 삭제)8 2014.03.31
정도경 흉터 -- 본문삭제 2014.03.31
아이 지옥의 분홍, 로희 2014.03.31
양원영 마에스트로 G4 2014.03.31
해망재 노래같지 않은 세상 2014.03.01
곽재식 망했다4 2014.03.01
pilza2 우주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2014.03.01
아이 무서워서 2014.03.01
미로냥 페일 블루 발라드Pale blue ballad 2014.03.01
해망재 사과나무 2014.02.01
곽재식 꿈 속의 여인4 2014.02.01
pilza2 두 부부 이야기1 2014.02.01
Prev 1 ...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